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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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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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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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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진흙탕 위 나룻배 (7)

DUMMY

카난리아프 협정이 어느덧 두 달째로 접어들었다. 양자 모두 포기할 수 없었고, 입장 확인 정도로 만족하고 헤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마게트 왕국은 키펠 왕국에 무수한 추파를 던졌고, 오슬레아 대왕국은 군사적 공백을 해결하기 위한 용병 고용으로 재정이 휘청거렸다. 평소라면 모를까 카팔라 제국의 계승분쟁이 한창일 때는 용병 수요가 엄청나서 몸값이 평소의 2배까지 뛰기 때문.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나는 이만 돌아가 봐도?"

"죄송합니다. 그건 좀 어렵습니다."


펠릭스는 그 자체로 압박으로 작용했다. 소드마스터가 여유를 부리며 전선이 아닌 곳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국력을 드러내는 정황증거였다. 카난리아프의 빈민가를 수시로 방문하는데도 펠릭스에게 일체의 절제나 자제를 요청하지 않는 건 이런 이유였다. 아무런 볼일도 없이 도시에 묶어놔야 하는데 심기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오슬레아 대왕국의 수뇌부는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펠릭스가 빚이 있어 카난리아프에 머무는 건 맞지만, 그건 윗사람끼리 협약이었고 모시는 아랫사람으로서 마음이 가벼울 수 없다. 실수하거나 죄를 저질러 소드마스터에게 누를 끼친다면 모든 부담이 본인에게 쏠린다.


"뭐어···, 그럼 어쩔 수 없다만."


이런 부분은 펠릭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깔끔하게 미련을 털었다. 정말 할 일이 없다면 모를까, 간만에 여유를 즐길 수 있는데 독촉할 필요가 없었다.

하급 관리들은 안도하며 귀중품을 진상했다. 품위유지 명목으로 1천 골드의 현금, 도시 생활에서 돈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도시 유력자의 하인도 붙었다. 맛집이나 명품점의 일일추천은 덤이었다.

펠릭스 접대는 도시의 유력가문에서 돌아가며 맡았다. 한 가문이 전담하기에는 워낙 큰 거물이고, 씀씀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는 신흥이라 정보 부족으로 다 같이 양보하며 타협한 결과물이었다.


"형님.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술이나 즐기시죠. 포도주 잘 담그는 곳 압니다."

"포도주는 무슨. 숙제는 다 끝냈냐?"

"어제 자기 전에 끝냈슴다."


네리카에게 머리를 굴리는 고등과정을 연구한다면, 체스터에겐 초등과정을 연구했다. 함셰르에게 여러 가지를 배운 네리카는 기초지식이 풍부해서 일반인 기준으로 삼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체스터는 이 시대의 일반적인 지적 수준이라 테스트에 딱 알맞았다.

글자부터 가르쳐야 했으므로 차근차근 가르쳐야 했고, 사칙연산조차 모르니 더하기·빼기도 체계적으로 주입해야 한다. 가장 좋은 건 반복행동에 따른 학습이고, 몸이 튼튼한 체스터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세 글자 숫자 계산에 익숙해진 것 같으니 다음은 네 글자 계산을 시작해도 되겠어."

"아앗, 갑자기 두통이···!"


체스터의 엄살을 뒤로하고 펠릭스가 밖으로 나갔다. 네리카는 아라비아 숫자를 익히고서 미적분을 배우고 있었다. 숫자보다 글자가 더 많은 고등수학 특성상 어지간한 이해 없이는 거부감을 이겨내기도 어려운 과목이었으나, 네리카는 꿋꿋하게 버텼다. 버티는 것과 별개로 실력증진은 부진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네리카 덕분에 실력의 선이라는 건 정할 수 있었다. 선생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매달리는 네리카가 미적분에서 막혔다는 건 보통 사람은 함수와 방정식, 도형 관련 공식까지가 한계라는 깨달음이었다. 머리 굴리는 걸 잘하는 마법사는 되려 펠릭스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으니 그 부분을 빼더라도 대략적인 수치가 나왔다는 건 고무적인 성과다.


'7서클 마법사가 변압기를 만들 수준이면 내가 키우려고 해서 키울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니까.'


변압기의 성질을 공부하는 건 최소한 대학 과정이고, 그걸 직접 만들며 개량하고 연구하는 건 대학원 이상이다. 농업과 대학을 다니다가 이 세계로 넘어온 펠릭스에겐 닿지 않는 지식.

고로 펠릭스는 본인이 확실하게 가르칠 수 있는 범주에서만 책임지기로 했다. 기사에게는 중학교 수학, 좀 가까이 놓고 굴릴 측근에게는 고등학교 수학까지 때려 박기로 한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수학은 논리와 더불어 사람의 기초능력을 평가하기에 딱 알맞은 분야라서 앞으로의 대계를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엄살부리지 마라.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차라리 도시를 돌라고 하십쇼. 왜 머리 아프게 저런 걸 배우라고 하십니까. 제가 사제도 아닌데."

"네가 멍청하면 주인인 내 흉을 본다. 어디 가서 내게 수치를 주지 않도록 하려면 교육을 가르쳐야지. 가정교사를 붙인다고 공부할 것 같진 않으니."


체스터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정곡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펠릭스는 몸을 돌려 앞으로 나갔다. 평소에는 네리카를 찾아가 막힌 부분을 풀어주지만, 오늘은 일이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잘 성장하셨군요, 각하."

"변경백님 덕분에 잘 크긴 했지요."


인데브 남작, 펠릭스의 아버지가 카난리아프에 찾아온 것이다.

두 사람은 도시 중심부의 고급 살롱의 개인실에서 만났다. 술집은 아니고,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해서 과자를 만드는 다과점이었다.

펠릭스는 꿀을 탄 과일주를 한 모금 마셨다. 만남을 요청한 건 인데브 남작이었고, 어렸을 때 쫓겨나듯 떠난 펠릭스에겐 그 어떤 할 말이 없었다. 비꼼이나 비아냥이 아니라 인데브 남작에게 말을 걸만한 주제거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안부 인사였다.

인데브 남작은 입을 굳게 다물며 뜸을 들이다가 과자 한 판이 모두 사라질 때가 돼서야 어렵게 말을 꺼냈다.


"각하께서는 베로니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의 의도가 불분명하군요, 인데브 각하. 무슨 대답을 바라십니까?"

"···후계 관련 사안이라 상세히 말씀드리기 굉장히 어려우나, 저택에 한번 찾아와주셨으면 합니다."


인데브 남작은 주위를 살피고 침착하게 말했다. 응접실 안에서 대기하는 기사와 마법사를 내보내고 용건을 말하기엔 그의 입지는 한없이 낮았고, 상대의 입지는 한없이 높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단순한 저택 초대였지만, 펠릭스는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카난리아프에 군말 없이 온 이유는 형태 없는 빚을 갚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베로니크에게 더 멀어지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남작이 직접 그 용건으로 찾아올 정도라니.


"어···. 이보게들."

"예, 남작님."

"긴히 나눌 말이 생겼으니, 밖으로 나가주게. 산책이라도 하고 와."

"알겠습니다."


기사와 마법사가 방을 나가고.


"우리 서로 암묵적으로 선을 그어둔 거 아니었습니까? 서로 신경 안 쓰면서 살자는 그거잖아요."

"그랬지요. 하지만 네 누나의 집착은 더없이 위험해. 실수를 가장해 화살을 맞을 뻔 했을 때는 정말, 간담이 서늘했지."

"대체 왜? 집착의 선을 아득하게 넘었어!"


트렐라드 변경백에게 들었던 내용과는 한없이 멀었다. 그저 단순무식하게 '유일한 혈육을 향한 애정의 악화'라고 넘어가기에는 목숨이 오락가락했다.

긴장으로 목과 입술이 타는 듯 인데브 남작은 떨리는 손으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집니다. 첫째는 그 애가 각하께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다는 점. 둘째는 각하의 독보적인 성장."

"그게? 겨우?"

"그 애가 안다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자신이 돌본 동생이 부모의 결정으로 먼 타지로 떠났는데, 왕국 유일의 소드마스터 상급이 되었답니다. 각하를 보살핀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습니까."

"···쓰읍."


펠릭스는 어이가 터져서 흘러나올뻔한 침을 삼켰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고, 가능성 또한 컸기에 아버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 본인이 보살핀 여리고 불쌍한 동생. 부모의 강압으로 불쌍한 삶을 살게 된 동생.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대체할 수 없는 위인이 된 동생.

한 발짝 떨어져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누나인 베로니크보다는 후견인으로서 도와준 트렐라드 변경백의 공이 더 크다. 어렸을 때 베로니크가 돌봐준 건 분명 사실이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준 건 트렐라드 변경백이다. 그런데 왜 베로니크는 집착하는가?


'사춘기잖아···.'


부모를 향한 반항심이 핵심이다. 후계자 교육이라는 건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혹독한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고, 당사자의 고통은 신경 쓰지 않는다. 기본예절, 가문의 비전, 통치자로서의 덕목. 주입식 교육을 받다 보면 윗사람에게 증오가 생기기 마련.

그나마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단이 내리사랑이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금의 집착은 그 내리사랑의 보상심리.


"하아아···."

"후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태를 파악한 펠릭스는 답이 없는 상황을 향한 아이러니에, 인데브 남작은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공개하며 도움을 요청한다는 굴욕감에.


"그래서, 제가 가면?"

"잘 달래주십시오. 매몰차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그래도 누나인데···."

"거길 파고들 수도 있습니다."


인데브 남작은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평가했다. 펠릭스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 부분을 파고들 거라는 말. 화술에서 당연히 대비해야 하는 요소지만, 친한 사람끼리는 그런 걸 생각하는 게 아니다. 토론하는 게 아닌데 왜 논리에 철저해야 하는가.

펠릭스는 인데브 남작이 남매로서 만나지 말고 타인으로서 만나라고 종용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 말은 펠릭스를 타인으로 여기는 게 아닌 이상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뭐, 이건 어쩔 수 없지.'


깔끔한 선 긋기에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수긍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차피 지금까지 살아온 목적은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남작 역시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게 뻔하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펠릭스가 억지로 인데브라는 가문 소속임을 밝히고 다닌다면 남작을 찾아올 손님은 '소드마스터 상급을 아군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거물들'이다. 유능하다고는 해도 남작 혼자서 감당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고로 지금까지 그래 왔듯 '트렐라드 변경백의 양자' 정도의 위치가 서로의 신상이나 생활에 이롭다. 단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주제에서 공식적으로 절연을 부탁하니 머리가 멍해진 것뿐.


"이번 협상 끝나고, 운신이 좀 자유로워지면 찾아뵙죠. 길어야 1년일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인데브 남작은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함을 표현했다. 본인의 의도를 잘 파악해주었고, 언제 방문할지 기한도 말해줘서 설득이 쉬워진 까닭.

그다음으로 나눈 이야기는 적당한 잡담이었다. 인데브 남작의 시선에서 트렐라드 변경백의 상황, 그리고 작은 영주가 보는 지세트 백국 처우와 근황 등.

펠릭스가 어떤 부분을 궁금해하는지 파악한 남작은 필터 없이 정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다가 나온 이야기.


"백국이 재건되었다?"

"정확히는, 알카탄과의 공동 봉신국이 되었습니다."

"어째서?"

"여기, 카난리아프에서 협정을 여는 동안 알카탄 공국이 침묵하는 대가였습니다."


알카탄 국왕은 본인의 몸값을 십분 활용했다. 키펠 왕국이 한 달 내내 시간을 끄는 이유가 있었다.

키펠 왕국이 협상하는 데에 필요한 전제조건이나 정보가 진실이라는 걸 입증할 가장 강력한 증인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키펠 협상단은 '출처 없는 증거'만으로 오슬레아 협상단을 상대하는 처지가 됐다.

오슬레아-키펠 협상이므로 알카탄 공국은 이 협상판에 올라오지 않으므로, 오슬레아 대왕국은 가벼운 조건으로 알카탄 공국에게 침묵을 받아냈다. 이중 충성을 받는다고는 하나, 백국의 새로운 왕이 알카탄 공국보다는 오슬레아 대왕국을 더 따를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으니 할 수 있는 밀약.

이걸 깨달은 펠릭스는 감탄을 흘렸다.


'정치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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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진흙탕 위 나룻배 (4) 20.06.01 89 3 11쪽
38 진흙탕 위 나룻배 (3) +1 20.05.30 95 2 11쪽
37 진흙탕 위 나룻배 (2) +1 20.05.28 97 3 12쪽
36 진흙탕 위 나룻배 (1) 20.05.26 101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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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펙시스 공략전 (3) 20.05.14 110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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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정벌 준비 (4) 20.05.03 164 6 11쪽
22 정벌 준비 (3) +1 20.04.29 182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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