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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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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1
추천수 :
230
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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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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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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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1쪽

진흙탕 위 나룻배 (4)

DUMMY

교섭장으로 활용되는 저택의 맞은편 저택.

펠릭스는 카난리아프 성주가 뼈를 깎아서 마련한 대접을 만끽했다. 키펠 왕국과의 관계가 악화하면 피를 가장 많이 보는 곳이 오슬레아 북부의 상업도시였다. 카난리아프 역시 그런 상업도시 중 하나였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곳이었다. 펠릭스가 함락한 펙시스처럼 말이다.

그런 속사정이 있는 까닭에 성주와 유력자도 만찬장에는 참석하며 펠릭스를 칭송하기 바빴다.


'비데가 따로 없네.'


알랑방귀 뀌는 모습이 정말, 정말로 꼴불견이었다. 만찬장은 영주성의 정원이라 지나치게 넓었다. 탁 트인 평지에 호화롭게 차려진 식단은 서양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백색 식탁보로 덮인 긴 탁자 수십 개가 놓였고, 그 위에는 점심에 맛보기에는 부담스러운 기름진 음식이 가득했다. 돼지 통구이 정도는 상식 범주였고, 칠면조나 소를 통째로 구운 게 전시되었다.

여러 조리사가 조심스럽게 뼈와 살을 발라내 접시에 담으면 시종이나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식탁 위에 리필했다. 수십 명이나 되는 광대의 재롱과 악단의 연주는 화룡점정이었다.


'트렐라드는 돈이 없어서 아득바득 유지한 병력으로 도적 토벌과 난민 수습하고 있었는데, 여기는 이런 짓도 할 수 있단 말이지···.'


카난리아프 성주와 유력자에겐 안타깝게도 이런 환대가 역으로 펠릭스의 신경을 거슬렸다. 펠릭스는 트렐라드 변경백령이 얼마나 힘들게 지냈는지 몸소 겪은 사람이었다. 인생의 전환점부터가 도적 토벌을 위한 소집에 보내진 신세로 시작한 펠릭스였다.

그걸 모르는 카난리아프 성주는 과하게 굽신거렸다. 트렐라드 변경백과 똑같은 엘프인데도 천박하다는 인상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사람의 욕심 때문에 고통받았다고 생각이 닿자 이곳에 모인 자들의 아부가 부질없게 느껴졌다.

이것은 곧 협상에 임하는 자세를 불성실하게 유도했다.


"란소스 남작님,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받아주십시오."

"됐다. 술맛이 없군."

"저 요리는 어떻습니까? 100일간 꿀에 절인 오리를 향신료와 함께 구운 요리입니다. 카난리아프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요!"

"너무 달겠군. 이빨은 괜찮은가?"


카난리아프 성주의 간절한 접대에도 불구하고 펠릭스는 한사코 제의를 거절했다. 음식도, 술도, 음악도, 여흥도, 제안도 모두.

어떻게든 키펠 왕국과 교역을 유지하고 싶은 북부 유력자들에겐 안 좋은 상황이었다. 그들도 눈치가 있었으므로 이렇게 판을 벌인 게 펠릭스의 뭔가를 건드렸다는 건 눈치챘다. 그러나 워낙 판을 거하게 벌여놓아서 정확히 무엇이 신경을 거슬렸는지 모를 뿐이다.


'네놈이 광대를 불러서 그런 거잖나. 저런 희곡쟁이 따위는 필요 없었다고.'

'네년의 요리사가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하고? 남작께서 음식을 한 입도 안 드시는 게 안 보이나?'

"······."


척하면 척이고 착하면 착이었다. 눈빛과 얼굴 근육 조금만으로 유력자들은 모든 책임 전가가 가능했다. 광대의 천박함을 탓하거나, 조리사의 실력을 탓하거나, 식탁보의 저열함을 탓하거나. 온갖 것으로 트집을 잡았다. 그 이유는 하나, 제물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모두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눈치를 넘어서 직감 영역에 다다른 카난리아프 성주는 이런 추한 작태를 지켜보는 펠릭스의 눈빛을 진작 알아차렸다. 초인의 영역에 접어든 펠릭스의 눈빛은 '네 탓이야!'라고 말하는 얼굴을 드러낸 사람을 향했다.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와인잔이 흔들려 식탁보에 두 방울 흘려버리고 말았다.

란소스 남작이 이 자리에서 가장 거슬려 하는 게 유력자들이라는 걸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리고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본인이 주인공인 삶을 살아온 자들에게 그런 식의 제스처는 없었다!


'성주가 제법 정치력은 있는 모양인데, 다들 제 잘난 양반이라 성주 눈치는 죽어라 안 보네. 알만하다.'


펠릭스는 내심 조소를 지으며 이들의 추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광대나 악단보다도 카난리아프 성주의 안달복달한 모습이 차라리 더 재밌었던 까닭이다.

점심식사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눈치가 극에 달한 몇몇이 자리를 비운다는 핑계를 대며 물러났고, 졸부만 남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펠릭스에게 '성의'를 건네며 잘 보이려고 노력한 건 덤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센스가 있는 유력자는 네리카에게도 반지나 목걸이 등 화려한 장신구를 선물했다.

만찬을 끝내고 개인실로 돌아간 펠릭스는 초대장 몇 개를 받았다. 먼저 자리를 비운 자들이 간곡하고 간절하게 구구절절이 적은 글귀였다. 사모하는 연인에게 쓰는 글도 이렇게 애처롭진 않을 것이다.


"왜 그래? 표정이 안 좋네."

"당연하지. 우리가 트렐라드에서 어떻게 지냈는데. 저들은 막대한 돈을 쌓았으면서 전혀 돕지 않았잖아. 곱게 보일 수 없지."

"그런가?"

"···?"


네리카의 평온한 되물음에 펠릭스가 놀라서 고개를 돌려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리카는 '왜?'라는 얼굴로 마주 보았다.


"그런 짓을 한 대가를 치를 수 있잖아. 그럼 그때 일에 꽁해 있을 필요가 있을까?"

"아···, 그렇긴 하지."


선물 공세를 받아 그들을 용서한 건가 의심하던 펠릭스는 뒤이은 설명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추태 때문에 생각이 닿지 않았으나, 지금의 펠릭스는 그들에게 충분히 엿을 먹일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명분이 있었다.

비록 이번 교섭에서 전권을 부여받은 건 아니고 일종의 어깨보증 비슷한 트로피로서 참석하는 상황이었지만, 그걸 다 집어치우더라도 유일무이한 소드마스터 상급이라는 타이틀은 영향력이 없을 수 없었다.


"이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팔아서 재정에 보태면 되고. 펠릭스는 어떻게 할래?"

"글쎄, 어쩔까···."


트렐라드 변경백에게 들어둔 배경지식으로는 '어쨌건 화평!'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지세트 백국은 점령을 끝내서 샤메드 교단에 절차를 밟는 상황이고, 알카탄 공국은 오슬레아 대왕국의 극대노를 한몸에 받고 있다. 키펠 왕국은 최소한 당장 자립할 수 없으니 시간이 필요하다.

오슬레아 측의 외교관은 알카탄을 제물로 내밀 것이고, 키펠 측의 모논다 공작도 알카탄 징죄를 대가로 시간을 벌고자 할 가능성이 가장 컸다. 여기까지는 서로 합의할 수 있는 내용. 문제는 그다음의 세부조항.


"교역량 감소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키펠도 어떻게든 자국산업을 육성하려고 할 거고."

"응,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장려하는가···가 관건이지. 이건 키펠 내부 방침이라 난 몰라."


펠릭스는 시쳇말로 '내부 트롤링'이라고 부르는 짓을 해보려 했는데, 이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실감했다. 오슬레아 북부의 교역망을 개판으로 만들어 이 근방 유력가를 빚더미에 올려야 하는데, 과연 어떤 방식으로 해야 뼈대가 잡힐지 감이 안 왔다.

21세기 지구처럼 전자결제가 가능하지도 않고, 산업은행처럼 거액을 움직이는 금융기관도 없다. 이 분야는 지극히 중세 스타일이었다. 따라서 돈을 가진 부자가 곧 은행으로서 작용하는, 대부업자로 활동했다. 이곳의 유력가문 역시 그런 식으로 돈을 쌓은 자들이다.

따라서 작은 은행 군집을 무너트리려면 그들의 역할을 싹 날려버리고 뒷방 퇴물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근데 그건 하기 싫단 말이지···.'


구상 자체는 있다. 소드마스터 상급이라는 명예를 걸고 일종의 구심점 역할을 하여 돈을 끌어모으는 것이다. 일종의 투자은행 개념의, 원시적 형태의 증권시장을 만드는 것.

펠릭스가 구체적인 설계까지 가지고 있으면서도 망설이는 이유는 이걸 결심한 순간부터 이전에 다짐한 목표가 무색해는 까닭이다. 신의 시대를 끝내고 인간의 시대를 열겠다는 야망에 투자은행은 아귀와 분위기가 맞지 않았다.

고민하던 펠릭스는 시야에 들어온 네리카를 바라보았다. 그 어떤 마법적 장치가 없는 기간트 골렘 외장갑 한 세트가 최소 8만 골드라던 트렐라드 변경백의 말을 떠올랐다. 사람 하나 데리고 사는 건 부담이 없지만, 추종자를 거느리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다만 지금 급하진 않다. 돈을 번다고 해봐야, 돈을 관리해줄 측근이 없으면 금은보화를 모아봐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게 뻔하다.


'필요성은 분명 있다. 근데 수단이 세련되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미뤄야 하고, 어떻게 돈을 번다고 해도 그걸 관리해줄 인재도 없어.'


유비에게 미축이 있듯이, 펠릭스에게도 돈을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뿐만 아니라 간옹처럼 지략이 뛰어난 상담가 겸 조언자, 손건처럼 멀리 떨어져도 충성심이 여전한 대리인도 필요하다.

그 모두 펠릭스에게 없었다. 어느 만화의 영향으로 간손미라는 멸칭으로 불리긴 하지만, 조직을 세우려면 그 간손미가 필요했다.


"흐음···."


펠릭스는 자신이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을 헤아려 보았다. 트렐라드 변경백은 거물급이지만, 연령 차이가 너무 크다.

함셰르와 셀튼 이드쿨라도 펠릭스 윗세대 사람이다. 조언자로 대동할 수는 있어도 오랫동안 함께할 수 없다. 애초에 펠릭스가 부른다고 따라올 사람도 아니다.


'지금까지 좀 느긋하게 돌아다니긴 했구나. 아직 열셋이라지만 대의를 이루려면 이때부터 친교를 다져야 하는데.'


매번 도돌이표다. 고민이 돌고 도는 탓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가늠이 안 된다.

주위에 나름 능력 있는 사람이 있긴 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결격사항도 넘쳤다. 이건 펠릭스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은 것도 한몫했다. 따라서 이런 펠릭스의 눈에 차는 전문가는 이미 임자가 있었다.

왕도에서 나름 유능한 사람을 찾으러 수소문해서 얻은 소득이었다. 기사와 마법사는 당연히 영주 아래, 기술자와 학자도 당연히 물주 아래. 그리고 영주와 물주는 대체로 동일하다.


'일단 영지부터 가져야 하나? 작위는 있는데. 영지가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네. 입신양명의 시작조차 못 했잖아?'


펠릭스는 자신의 대계를 세부적으로 나눌 필요를 느꼈다. 지금까지는 고찰할 시간이 없었으나 앞으로는 단계를 정해놓고 차근차근 인재를 영입하는 걸 목표로 삼는다.

네리카는 생각에 빠진 펠릭스의 뒤에 슬그머니 앉아 긴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엉키거나 꼬인 부분을 정성스럽게 손질한다.


'란소스님께서 어떤 길을 가시더라도,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


네리카는 펠릭스가 뭘 생각하는지 짐작했다. 어린 나이에 소드마스터 상급이 되어서 원하지 않던 삶을 살게 되었어도 당당한 펠릭스가 늘 눈부셨다. 언제까지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따라가자고 결심했다.

트렐라드 변경백의 지시로 같이 모시기 시작했지만, 공부할 기회와 오러를 배워 기사의 자식으로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펠릭스였다. 그러니 배운 게 의미 없어질 때까지, 기사로서 살 수 없게 될 때까지 곁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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