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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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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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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진흙탕 위 나룻배 (5)

DUMMY

카난리아프 협정은 수렁 속에 빠졌다. 펠릭스가 일부러 트롤링을 할 필요도 없이 기득권을 놓고 다투는 싸움이라 양측 모두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인 까닭이다.

덕분에 펠릭스는 붕 뜬 처지가 되어서 사실상 방관자가 되었다. 협상의 주도권이자 핵심은 상권이자 제조업에 있었으므로, 그 부분에서 의견을 낼 생각이 없던 펠릭스에겐 발언권이 분배되지 않았기 때문. 그 덕분에 펠릭스는 카난리아프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름 재밌게 지낼 수 있어서 좋긴 한데 말이야.'


언제 어디에서나 펠릭스는 늘 투쟁했었다. 인데브에 있었을 때는 고독, 텔로드에 있었을 때는 공부와 전쟁준비. 뒤돌아보니 두 번째 삶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쫓기며 살아왔다는 걸 자각한 것이다.

네리카의 곁에서 여유를 인지한 펠릭스는 아주 간단하게 무료함을 만끽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태평함. 이것은 스릴 있는 모험을 즐길 수 있는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나. 술집? 책방?'


돈과 신분이 확실했기에 펠릭스는 그 둘이 통용되지 않는 곳을 중심으로 돌아다녔다. 돈이 통하는 곳에선 늘 손님이고, 신분이 통하는 곳에선 늘 상전이다. 그러니 돈도 신분도 안 따지는 우범지역이야말로 소풍 가기 좋은 곳이었다.

당연히 네리카를 떼어놓아야 했는데, 방법은 간단했다. 펠릭스가 하루에 두 시간 정도 공부를 시키고, 숙제를 주면 땡이었다. 간단한 커리큘럼이었는데, 함셰르에게 가르침을 받아본 경험이 있어서 펠릭스의 주입식 교육에 빠르게 적응했다.

펠릭스는 네리카의 진취를 보며 교육과정을 점검했다. 인재를 직접 기르기로 했는데 준비가 미흡하던 차에 이런 식으로 대략적인 개괄을 뽑을 수 있었다. 네리카에겐 '자신이 없을 때의 표본이 필요하다'라는 식으로 변명했으므로 숙제는 홀로 머리를 굴리며 해결하느라 바빴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노는 거고.'


완전히 놀자판은 아니었다. 빈민의 삶을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활동이었다. 카난리아프의 유력자는 꿀에 절인 고기라는 무지막지한 사치를 즐겼는데, 빈민은 딱딱한 빵조차 못 구해서 굶주림이 일상이었다.

여러 종교단체에서 구호와 구휼을 하고는 있으나, 빈민 전체를 부양하는 건 불가능했다.


'자선과 방랑의 신, 대의와 고집의 신···. 샤메드는 주신이니까 그렇다 쳐도, 가정신 에브린이 있었는데 두 가지를 포괄하는 신이 있는 이유를 모르겠네.'


신에겐 신 나름의 고충이 있나 싶었지만, 파고들지는 않기로 했다. 환생이라는 은혜를 입은 덕분에 우러러보는 시선이 생긴 것도 있지만, 주신 샤메드의 은총으로 다시 태어난 펠릭스에게 괜히 관심이 쏠리면 힘들었다. 한국 양판소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거룩함이라는 요소가 빈약했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 신화로 신적 존재의 선입관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에 하나 올림포스 신족처럼 인간미 철철 흘러내리는 존재라면, 엮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생각해보니, 소설에서 나온 신들 대부분이 그쪽 모티브였네. 아니지, 그리스로마 신화 말고 다른 신화는 유명하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인터넷. 정확히는 위키가 보편적으로 퍼진 이후로는 신화라는 거대한 틀 안에 여러 신화가 소개되어 그나마 다양성이 생겼지만, 한창 양판소가 범람할 때는 기껏해야 북유럽 신화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인간적인 신'이라는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접근성이나 상상력을 위해서라도 그런 가벼운 신이 좋긴 하지만, 막상 신을 접할 수 있는 세계에 떨어지자 괜히 가까이 다가가기 싫었다. 신의 장난감이 되는 건 사절이다.


"어서옵셔. 뭘 드릴까?"

"시원한 맥주 한 잔."


네리카에게 숙제를 가득 안겨놓고서 자주 방문한 주점. 고급진 포도주가 아니라 값싼 맥주는 굉장히 색달랐다. 거친 보리와 굵은 홉으로 만든 맥주는 공장제 맥주와 전혀 다른 풍미가 있었다. 걸쭉하고, 진하고, 무거웠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냉동고가 없어서 얼음을 띄우지 못한다는 것 정도.

주인장이 내려놓은 큼직한 맥주잔에 흘러내리는 걸쭉한 거품. 이 세계의 식수는 맹물이 아니라 희석한 맥주였고, 민가가 아닌 주점에서는 희석하지 않은 오리지날 맥주를 팔았다. 희석하는 걸 전제로 만든 생맥주는 신세계나 마찬가지였다.


"요즘 떠들썩한 소문 없나?"

"도련님께서 흥미가 있을 정도로 흥미로운 건 없는 뎁쇼. 워낙 살벌해야 말이지."


주점 주인은 태평하게 말을 받아쳤다. 처음 펠릭스를 보자마자 '높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손발을 맞춰주었다. 흥미가 돋아 이유를 물어보니 펠릭스처럼 일상이 따분해진 귀족 가문의 자식이 외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답했다.

의식주를 충족한 어린아이들이 하는 외도란 뻔한 것이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평민과 달라서 숨기려고 해도 다 드러난다며 웃었다. 더러움을 향한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었다. 식탁 위 음료 웅덩이, 음식 찌꺼기를 신경 쓰며 옷이 닿지 않게 하는 눈치가 보이면 윗분이라고 했다.

펠릭스 역시 그런 식으로 들켰다. 다만 틀린 건 '높은 사람'으로서 들킨 게 아니라 '현대인'으로서 청결을 신경 쓰다가 들킨 쪽에 가까웠다.


"살벌하다?"

"소드마스터께서 방문하셨다는 소문도 있고, 키펠의 사작들이 들쑤시고 다닌다 하더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주점 주인은 찌든 때가 인상적인 헝겊으로 잔을 닦으며 태평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협상 테이블에서 물러난 펠릭스는 주점 주인이 흘리는 파편만으로 대략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 윗사람의 이성적인 체면치레와 다르게 아랫사람의 감정적인 행동은 전혀 다른 것이다. 백조가 우아하게 물에 떠 있으려면 다급하게 발을 저어야 하듯, 협상 당사자가 넉넉하게 웃음 짓는 동안 아래쪽은 유리한 정보나 정황을 찾으려고 난리였다.


'괜히 기사와 마법사를 떼거리로 데려온 건 아니었나.'


펠릭스는 맥주를 홀짝 마시며 주점 안쪽을 살펴보았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적었다. 용병 정도나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하는 게 고작이었다. 수송대 호위 일감이 흘러넘치던 옛날과 다르게 불경기라 할 게 없다는 불평과 불만이 대부분이었다.

술에 취해서 고성을 지르거나 싸움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기물이 파손되자 주점 주인이 경비를 시켜 멱살을 잡고 퇴출시켰다. 상업도시의 주점답게 자체적인 무력을 갖췄다. 경비도 어벙하지 않았다. 소란이 터져서 신호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진압했으니까.


"이런 일이 자주 있나?"

"흔하지. 용병은 절제를 모르거든. 그러니까 칼질이 가능한 거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놈이 없어서 다행이야."

"그놈? 이름난 난봉꾼이 있는가 봐?"

"유명한 놈 있어. 외상은 안 하니까 쫓아내진 않는데, 시비를 좀 잘 걸거든."

"그래그래. 마음에 안 드는 새끼는 바로 얼굴에 주먹을 찌르지."

"···?"


펠릭스는 자신의 옆에 털썩 앉으며 감상을 추가하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꽤 젊은 듯한, 청소년의 티를 아직 벗지 못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주점 주인은 그를 보자마자 '켁'하며 명백하게 싫다는 표정을 보였다.


"왜 벌레 씹은 표정이야? 기분 나빠지려고 하네."

"제길, 오늘 일진이 안 좋더라니."

"아, 됐고. 통닭이랑 포도주 내와. 돈은 있으니까."

"매번 맥주도 아니고 포도주를···. 어휴, 어쩌겠냐. 기다려!"


주점 주인은 툴툴거리며 접수대 위에 던지듯 올린 은화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펠릭스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맞아. 저 아저씨가 말한 시비 잘 터는 놈이 나야."

"뒷담을 들었는데 싫은 기색이 없네. 기분 나쁘지 않나?"

"나보다 약한 녀석의 찡얼거림에 왜 기분이 상해야 하지? 뭐라고 떠들어도 내가 강한 건 바뀌지 않는다고."

"호."


펠릭스는 청년의 강함에 흥미가 돋았다. 주먹패까지 동원할 수 있는 주점 주인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까지 받아들이는 청년의 강함이 궁금했다.

허리에 검은 없다. 단검을 다루나 싶었는데, 손바닥은 연했다. 하지만 손등과 손가락 마디에는 굳은살로 가득하다. 마치 권투 선수처럼.


"······."

"자신 있냐?"


자신의 손을 바로 알아챈 펠릭스에게 청년도 흥미가 돋았다. 강함이라고 하면 보통은 근육과 노련함을 꼽는다. 그러므로 울퉁불퉁한 근육이 없으면 괄시받고, 젊으면 허세라며 무시당한다. 펠릭스처럼 곧장 병장기와 손을 살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무기와 손을 살핀 사람은 한결같은 강자, 바로 마나를 체득한 기사였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그저 도련님에 불과했다. 무기도 없고, 손도 아기처럼 말랑해 보였다.


'꼬마 팔을 비틀어봐야 자랑거리도 안 되고. 어느 부잣집 자식인 거 같으니 대충 놀아주면 돈 좀 뜯어낼 수 있겠지?'


기분이 썩 괜찮았던 청년은 펠릭스와 가볍게 스파링을 뛰어주고 돈을 받아내려고 했다. 강함을 선망하는 어린아이를 구워삶는 건 쉬운 일이었고, 지금까지 몇 번이고 해온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일이 잘 풀릴 줄 알았으나.


* * * *


2시간 뒤.


"흐-억···!"

'숨넘어가는 소리가 이런 거군.'


청년은 펠릭스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몇 번이나 바닥을 굴렀다. 처음 몇 번은 운이나 요행이라고 여기며 여유롭게 다시 덤벼보라며 내려다보는 시선이었지만, 8번째부터는 청년이 도전자 입장으로 바뀌었다.

느리다면 느리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일반인은 현실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강함을 맹신하기 마련이니 빠르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너, 익스퍼트 수준이 아닌데. 마검사냐?"

"글쎄."

"똑바로 말해. 힘 조절 하기 전에 수준을 정해야 하니까."

"내가 익스퍼트라면 넌 익스퍼트에게 지는 놈이고, 마검사라면 잡기술 하나 못 이기는 놈이 되는데. 괜찮겠나?"

"···그게 도발이었다면 아주 잘 먹혔다고 해주지."


청년은 온몸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펠릭스는 맹렬한 마나의 흐름을 읽어보았다. 철처럼 단단하면서 유연한 마력이었다. 다른 익스퍼트 기사의 마력은 불, 물, 바람, 흙이라는 4가지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데에 비해 청년의 마력은 금속과 성질이 비슷했다.

그 점이 흥미로웠기에 펠릭스는 청년의 준비 동작을 끝까지 기다렸다. 청년은 자신의 오러를 보고도 표정 변화 없이 기다리는 자신감에 더욱 열불이 뻗쳤지만.


"이젠 맨손으로 막을 순 없을 거다.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어주지."

"7번이나 같은 소리를 하면 질리지도 않나? 내 유언이 듣고 싶으면 일단 날 죽일 정도의 힘이 있다는 걸 보여준 다음에 말하라고."

"끄응···."

"와라."

"사양 않고."


청년은 온몸에 두른 마력을 활용해 화살처럼 달려들어 펠릭스의 배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배꼽 부근을 타격해서 어깨와 팔꿈치, 손목을 들어 올려 운동에너지를 갈비뼈로 보호받는 흉부 내장으로 타격하는 수단이었다.

어지간한 수련으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고도의 체술이라 만큼 위력은 확실해서 위액을 역류시킬 정도로 강력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맞을 때의 이야기. 펠릭스는 피하지도 않고 맨손으로 청년의 주먹을 막았다.


"이게 끝인가?"

"너 이 자식!"

'미동도 없어! 이걸 막으면 뒷걸음질 정도는 하기 마련인데!'


청년은 목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망치를 휘두른 공격과 마찬가지라고 자부하던 공격이었다. 빙판에 미끄러지듯 수평으로 다가가 거리감각이 모호하도록 유도해놓고 정면에서 두들기는 타격기가 막혔다. 반응속도도, 반동통제도, 신체제어에서도 밀렸다.

이런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해명할 수 있는 단서는 단 하나.


"···소드마스터냐?"

"오, 눈치챘군. 예상보다 빨라. 몇 번 더 거꾸러지고서야 깨달을 줄 알았는데."

"젠장! 그런 모습이니 당연히 못 알아보지! 빨리 말했어야 할 거 아냐!"

"말하면 믿었겠어? 그보다, 자포자기한 거냐? 이번엔 내가 공격해볼까?"

"아 잠까느어억-"


그날 카난리아프 변두리에는 북 두들기는 소리가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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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진흙탕 위 나룻배 (6) 20.06.21 88 2 12쪽
» 진흙탕 위 나룻배 (5) 20.06.16 90 2 12쪽
39 진흙탕 위 나룻배 (4) 20.06.01 88 3 11쪽
38 진흙탕 위 나룻배 (3) +1 20.05.30 94 2 11쪽
37 진흙탕 위 나룻배 (2) +1 20.05.28 96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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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펙시스 공략전 (4) 20.05.18 106 3 12쪽
32 펙시스 공략전 (3) 20.05.14 110 4 12쪽
31 펙시스 공략전 (2) 20.05.12 107 2 12쪽
30 펙시스 공략전 (1) +1 20.05.11 131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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