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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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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2
추천수 :
230
글자수 :
391,305

작성
20.05.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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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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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지세트 최후의 날 (1)

DUMMY

가을이 되어 추수가 끝나자 트렐라드 변경백은 즉시 병력을 일으켰다.

기간트 골렘 10기, 매그넘 골렘 47기, 기병 200기, 보병 1,800명, 마차 300대가 움직이는 행렬이었다. 골렘은 아공간에 보관하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중규모 군사활동으로만 보였다.


"연도가 넘어가기 전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내자고."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마친다고 선전하는 것 같아 기분이 미묘했지만, 펠릭스는 배너렛 나이트에게 긍정적으로 대꾸해줬다. 시작도 하기 전에 사기를 깎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펠릭스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어려웠다. 체격 좋은 군마가 아니라 날렵한 초원마라서 등이 좁아 안장이 있어도 불편했다.


"얼마나 걸리지?"

"이 속도면 12일 정도 걸릴 겁니다. 행군 속도를 높이면 좋겠습니다만, 이쪽 길은 관리가 안 되는 국경지대다 보니 소홀했지요."


배너렛 나이트의 말처럼 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마차 하나가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에 불과했고, 이 탓에 별로 많은 병력도 아니었는데 길게 늘어졌다.

길 좌우로 평범한 초원이 있으므로 굳이 뭉쳐서 다니려 한다면 뭉칠 수 있겠지만, 단단한 바닥이 아니라 진군속도가 더 느려진다.


"느긋하게 가자고. 이런 평지에선 기습도 못 할 테니까."

"예, 디텍터에게 경계심을 놓지 말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이렇게 길게 늘어진 행군에서 측면은 지극히 위험했다. 대규모 병력이 날뛸 순 없겠지만, 텔레포트로 소규모 별동대가 취약한 측면을 강습해 보급 마차를 태워버리면 전쟁수행능력이 증발한다.

인간은 마법사가 아니면 공간을 뛰어넘을 수 없지만, 마족이나 마물 중에는 공간의 제약을 어렵지 않게 여기는 존재가 여럿 있어서 마법사에게 공간전이를 감지하는 군사문화가 생겼다.

'디텍팅(Detecting)'이라는 3서클 마법만 전담하는 디텍터라는 직책이 따로 있을 정도.


"네리카."

"응?"

"밖으로 나온 느낌이 어때."


펠릭스는 자신의 오른쪽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네리카에게 소감을 물었다. 네리카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성안 쪽보다 즐거웠다.


"새로워.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어서."

"앞으로는 자주 겪게 될 거야. 골렘은 어때. 손에 익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움직이지도 않고···."


네리카는 출정 전에 트렐라드 변경백으로부터 매그넘 골렘을 선물 받았다. 원래는 네리카의 아버지가 받았어야 했을 골렘이었다.

익스퍼트 중급이면 매그넘 골렘을 혼자서 기동할 수 있었다. 각인된 마나석을 활성화할 수 있으면 근력보조 마법진의 조력으로 맨손으로 소 척추를 찢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네리카는 익스퍼트 하급이라 혼자 마나석을 활성화할 수 없었다.


'마력을 만들어서 익스퍼트로 만드는 것 자체는 간단했지만, 그다음부터는 본인에게 달렸으니···.'


네리카를 익스퍼트 중급으로 만들어보려고 노력을 기울여봤지만, 일반인에게 마력을 선사해서 익스퍼트로 만드는 것과는 별개였다. 마력이 많아지기만 해선 경지를 올릴 수 없었다. 깨달음 없이는 경지에 오를 수 없었다.

마력이 아니라 마나를 이용해서 마나 블레이드를 만드는 펠릭스였기에 조금 답답하기만 했다.


"괜찮아. 노력하면 되겠지."


펠릭스는 네리카를 가볍게 응원하는 정도로 끝냈다. 자동차 운전이 그렇듯 이런 건 직접 부딪혀보며 경험을 쌓는 게 최고였다. 어쭙잖은 조언은 사고만 일으킬 뿐이고, 네리카처럼 펠릭스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상대방이라면 더욱 그랬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네리카의 머리를 가볍게 한 번 쓸어내려 줬다.


* * * *


테알론, 지세트 백국에서 트렐라드 변경백령으로 넘어가려면 거쳐 가야 하는 상업도시.

평소에는 상인으로 북적였을 도시는 오크에게 점령당하기라도 한 듯이 조용했다. 성문의 깃대에는 샤메드 교단의 문장기(紋章旗)만이 휘날리고 있었다. 지세트 백국의 국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거야 원."


배너렛 나이트는 주위에서 들으라는 듯이 혀를 찼다. 테알론에선 그 어떤 전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빨리 끝내달라는 배짱만 보였다.

성벽 위 병사는 트렐라드 군세를 보고도 징이나 종을 안 울렸다. 다만 소리를 쳤는데, 적이 나타났다는 경고음이 아니라 성문을 열라는 외침. 그것 하나만으로 테알론의 굳건한 성벽이 그대로 열렸다.

싸울 의지가 전혀 안 보이는 테알론 안에 들어간 그들은 일종의 통보를 전달받았다.


"코프타 평야에서 기다리고 있다?"

"예, 그렇습니다. 그들이 지세트 최후의 군대입니다."


테알론의 성주가 절박하게 설명했다.

지세트의 고위 문관 대부분이 외국으로 도피해서 제대로 된 전쟁준비를 할 수 없었고, 군관 중 죽을 각오를 마친 자들이 남았다는 이야기였다.

트렐라드 군의 지휘부는 성주로부터 지세트의 현실을 들을 수 있었다. 군마는커녕 짐말도 없어서 군수품을 멀리 옮기지 못해 국경에서 싸우는 것조차 못하는 열악한 군대와 한 번 싸우면 끝이라는 처량함 말이다.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군수품을 국경지대로 옮기는 것조차 못하는 군대라고 하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배너렛 나이트와 사작들이 허탈하게 웃는 동안 펠릭스는 침착하게 성주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들의 규모는?"

"천하고도 이백 명이 조금 넘습니다."

"허, 숫자가 좀 많은데. 골렘끼리 싸우고 끝내면 사람은 상하지 않을 텐데도."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자살 희망자입니다."


테알론 성주는 사지에 나선 1,300명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지세트 최후의 군대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지세트 백국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걸 각인하고 싶거나 타국의 통치 아래로 굽히긴 싫다는 열사(烈士). 지세트 백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이런 식으로 휘둘리는 데 회의적이거나 수치스러워하는 극렬한 애국주의자.

방향성은 다르지만 전부 나라를 위해 죽을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다. 만약 제대로 된 국가였다면 이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도 사기가 안 떨어지는 정예병이었을 것이다.


"도망친 놈들보다 차라리 그자들이 낫구나."

"동감입니다."


배너렛 나이트의 말에 주위에서 한마디씩 했다. 그들은 국가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겐 선망이나 다름없었다.


"암. 적에게 항복하느니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는 게 백번 낫다."

"리젠칼의 결사단 같아서 보기에는 좋군요."

"어라, 그럼 우리가 마왕군이라는 소린가?"

"하하하."


사작들은 웃으며 그들을 칭송했다. 본래는 지세트 백국을 방방곡곡 순회하며 약탈과 파괴를 하려고 했지만, 이런 이들이 최후의 예의를 보인다고 하니 그럴 생각이 사라졌다.

펠릭스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왕도를 불태우겠다고 이를 갈던 양반들이···. 이거 하나로 태도를 바꾼다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천삼백 명이 전의를 다진 것만으로도 복수심을 접을 정도로 대단한 상황이란 말인가?


"코프타 평야는 여기에서 얼마나 더 가야 하지?"

"말을 타고 전력 질주하면 닷새 정도 걸립니다."

"행군한다 치면 열흘 좀 더 걸릴 것 같군요. 란소스 각하께서 괜찮으시다면 당장 출발할까 합니다만."

"나는 상관없지만, 병사들 발바닥이 괜찮을지 걱정스러운데."

"괜찮습니다. 이 정도 행군으로 낙오할 병사는 도적이나 고블린이 데려갔을 테니까요."


펠릭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배너렛 나이트의 말마따나 요즘의 트렐라드 병사는 하나하나가 강병이었다. 10년 넘게 혼란스러운 줄 토벌에서 살아남은 병사이기도 하고, 1년 동안 푹 쉬어서 기력과 체력을 회복하기까지 했다. 고작 보름 행군했다고 뻗을 리 없고, 보름 더 행군한다고 낙오할 자가 생길 리 없다.

익숙하지도 않은 초원마 안장 위에서 계속 버티느라 꼬리뼈가 아픈 펠릭스는 내색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살짝 숙였다. 뭔가 분했다.

펠릭스의 불편함은 보름 내내 이어졌고, 코프타 평원에 도달하고 나서야 끝났다.


'돌아가면 좀 편한 안장을 주문하든가 해야지.'


평원에 주둔한 병력은 트렐라드 군대와 비교하면 눈에 보일 만큼 적었다. 마차 때문에 규모가 좀 크게 보인다는 걸 생각하면서 봐도 절반 정도로만 보였다.

배너렛 나이트와 지휘부는 아래 사작들에게 진영을 꾸리라는 말을 하고서 지세트 군대를 향해 말을 몰았다. 펠릭스는 엇 소리도 못 내고 얼떨결에 그들과 함께 지세트 군영을 향했다.


"트렐라드에서 오셨군요. 멀리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결의를 무색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고대의 전쟁에서 장군끼리 서로 술잔을 나눴다는 이야기는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야기였는데, 그게 눈앞에서 펼쳐지니 펠릭스는 절로 숨이 막혔다.


"모살 건에 대해선 유감스럽게 됐네."

"폐하를 곁에서 모시지 못한 저희 탓이지요. 이렇게나마 죗값을 치를 기회가 주어져 다행입니다."

"여한 없이 싸우세."


배너렛 나이트는 상대 장군의 두 손을 잡으며 경의와 존중을 표했다.

펠릭스는 얼이 빠져서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와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대관절 무슨 상황이고, 정탐당할 수도 있는 본진을 훤하게 보여준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바로 옆에 찰싹 붙은 네리카가 아니었으면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제 뺨을 때렸을 것이다.


'이 세계 상식 되게 낯설다, 진짜.'


배너렛 나이트는 펠릭스를 적장에게 당당히 소개하고, 정장은 펠릭스를 암습하거나 독살 시도하기는커녕 극진한 예의를 보여주었다. 아군에게도 못 받아본 절도 넘치는 인사를 적장에게 받아본 펠릭스였다.

경망 없이 본인의 경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배너렛 나이트의 소개로 온전한 마나 블레이드를 보여준 것이다. 감탄을 흘리는 마법사도 있고, 눈물을 흘리는 기사도 있었다. 가관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접받은 술에 기분 좋게 알딸딸 취한 배너렛 나이트가 펠릭스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전혀 걸릴 게 없다는 태연한 답변이다.


"적진에 들어가서 한 거 말이야. 뭐하러 그렇게 한 건가?"

"아. 아아, 남작 각하께선 검 수련 단계에서 끝나셨던가요. 그건 말입니다···."


배너렛 나이트는 꼬인 혀로 '전장의 예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펠릭스의 기준으로 볼 때 미친 짓거리에 불과했지만, 이건 마왕이 등장한 이후로 세상에 뿌리내린 상식이었다.


"원한을 가진 자는 언데드로서 되살아난다고···."

"마나를 모르는 일반인은 어지간한 원한으로는 되살아나지 못합니다만, 적장처럼 오러를 깨우쳤거나 마법을 익힌 자는 얘기가 다릅지요."


스켈레톤 나이트나 메이지로 되살아난다면, 그건 재난 정도가 아니었다.


"죽을 곳을 찾아서 온 자는 그에 걸맞은 예의를 갖추고 목을 거두어주는 게 도리입니다, 남작 각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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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60 fodfood
    작성일
    20.05.07 08:12
    No. 1

    진짜 경의를 표하는것보다 언데드로 살아나는걸 막으려고 그런게 좀더 큰가 보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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