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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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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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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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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서임식 (5)

DUMMY

엘룬의 안내를 받아 고급스러운 옷을 걸쳤다. 지난 5일 동안 펠릭스의 신체 사이즈를 확인했던 거로 즉시 제작된 옷이다.

헐겁지도 않고 꽉 끼지도 않은 정복을 입고 나선 연회장.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어둑한 시간대였다. 하늘이 파란색에서 주홍색으로, 반대편 하늘은 보랏빛으로 바뀌는 시간대. 왕궁은 밤을 거부하기라도 하는 듯 굉장히 밝았다.


'전구 같은 게 붙어있네.'


동그란 구 형태의 무언가가 빛을 내고 있었다. 마나를 뻗어 만져보니 순수한 마나 덩어리에 마법진을 음각해서 임의로 마나의 흐름을 바꿔 빛을 내는 마력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양판소 설정상 마나석일 가능성이 컸고, 어떤 원리로 빛을 내는 마력으로 바뀌었는지 세밀하게 만져보았다.


'이렇게 하는 건가?'


움켜쥔 주먹 안에서 아주 조그맣게, 마법진의 흐름을 모방해서 마나를 움직여보았다. 마나가 회전하며 마력을 형성하고, 마력끼리 충돌해서 반응이 일어났다. 아주 작은 빛이었다.

라이트 마법을 사용해본 펠릭스의 솔직한 감상은, 비효율을 향한 낙담이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에게는 일단 마력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수적이므로 마력을 사용하는 전제로 설계되었다. 당연히 펠릭스에겐 현대의 마법체계 자체가 무용지물이라는 증명밖에 되지 않았다.


'일찍 포기하는 게 답이겠군.'


펠릭스는 마법을 단념했다. 정확히는 현대의 마법체계를 포기한 쪽에 가까웠다. 배운다고 한들 뿌리가 다르니 아예 처음부터 다시 재정립하는 쪽이 될 것이다.

기회가 되면 배우고, 기회가 오지 않으면 그런 운명이라 여기자고 결심하며 왕궁에 들어갔다. 빛의 궁전이라는 표현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찬란했다.


'샹들리에 있고. 촛대 있고. 대리석 조각상 있고. 화분도 있고. 디저트와 음료 진열대도 있고.'


왕궁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홀에서의 연회. 건축 구조상 홀이라고 하기보다는 로비에 가까운 위치였다. 대문 바로 안쪽이었으니까.

펠릭스가 보기엔 그 점을 신경 쓰는 자가 어디에도 없었다. 넓고 높은 홀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구는 안으로 들어가고, 누구는 밖으로 나간다. 왕궁을 나가는 것이 아니다. 왕궁 근처에 조성된 넓은 정원에서 길을 거닐다가 앞서 약속한 대로 둘만 만나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인데브의 펠릭스 란소스 경께서 입장하셨습니다."


입구에서 대기하던 문장관(Officer of arms)이 입장하는 이를 알린다. 큰 목소리가 아니고, 징을 울리듯 낮고 중후한 목소리였지만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목소리가 멈추고 고개와 시선이 한 곳에 몰렸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의 눈동자를 보게 된 펠릭스는 태연하게, 침착하게 지나가던 시종의 쟁반 위에서 샴페인을 한 잔 받아 디저트 진열대 쪽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찾아가 대화를 걸기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트렐라드 변경백 정도가 펠릭스가 아는 귀족의 전부였는데,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

청력을 키워 주위를 대화에 집중해봤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자신에 관한 소문을 떠들고 있었다.


"인데브의 유명한 둔재였다지? 백치인 줄 알았는데 천부의 재능이었어."

"인데브 남작. 꽤 능력 있던 자로 기억했는데. 자식 보는 안목은 누구나 안개를 끼기 마련인가."

"지금쯤 소식을 들었겠지. 어떤 반응일지 기대되는구려.

"트렐라드 변경백이 거두어 양부처럼 길렀다지? 별일 없으면 그쪽으로 가겠구먼."

"모르는 일입니다. 아직 어리니 구슬려서 데려가고자 하는 분이 한두 명이 아니겠지요."


펠릭스 본인의 이야기는 없었다. 소드마스터 상급이라거나 하는 실력에 관한 내용 대신 영주인 아버지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왕도에 이야기가 올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자식 보는 안목이 꽝이었다며 험담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트렐라드 변경백 이야기도 종종 튀어나왔다.

이건 당연히 펠릭스엔 아무런 이야깃거리가 없었던 탓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없는데 그걸로 이야기가 나올 리 없고, 앞날을 놓고 점치는 자들로 넘쳐났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걸.'


샴페인을 마시며 디저트 바에서 과일을 먹으며 아무에게도 관심 없는 척 딴청부리는 펠릭스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익스퍼트 최상급이나 마스터 하급이라면 모를까, 마스터 상급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데 이곳에 보인 어중이떠중이가 엣흠거리며 다가가기엔 너무도 거물인 탓.

펠릭스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어차피 처음에 마나 블레이드를 검증할 때부터 대귀족끼리 펠릭스의 처우를 결정했다는 걸 말이다. 그렇게 굴러다니긴 싫으니까 왕 아래로 들어가려고 한 거였지만.


'적어도 내 머리 위에 있는 사람이 하나여야 대처하기 편해.'


펠릭스는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에 의심을 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다가오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대귀족이 저지해 놓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까닭이다.

해가 완전히 저문 뒤.


"정숙! 오슬레아의 정당한 군주,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입구 반대편, 로비의 계단에서 시종장이 지팡이로 바닥을 세 번 찧었다. 그걸 신호로 이중문이 활짝 열리며 왕과 측근들이 연회에 참가했다. 펠릭스가 마나 블레이드를 검증할 때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대귀족들이 왕 뒤에서 나타났다. 연회장에 안 보이나 싶었더니, 국왕과 함께 있었다.

국왕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세안을 찾아온 경들을 환영하는 바요. 짐이 준비한 연회를 즐거이 만끽하길 바라오. 음악!"


어느새 나타난 오케스트라가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가볍고 유쾌한 왈츠 계통의, 우아함에서 비롯한 격식은 있으면서 분위기는 띄울 수 있는 연주였다.

국왕과 대귀족들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걸 시작으로 홀 가운데에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으로 두 명씩 짝지어 춤추기 시작한다. 손을 맞잡고 왈츠의 경쾌한 박자에 스텝을 밟았다. 남녀뿐만 아니라 남남 혹은 녀녀가 거리낌 없이 밀착해서 춤을 추었다.


'아, 저렇게 밀담을 나누는 거군.'


30명 규모 악단의 연주는 절대 작지 않았다. 좌우에 15명씩 나누어 연주하기 때문인지, 홀의 구조 설계 때문인지, 가까이 다가가 말하지 않으면 소리가 안 들렸다.

청력을 키운 펠릭스의 귀로 가운데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렸다. 누군가는 애정행각을, 누군가는 정보 전달을, 누군가는 계약 상담을 이루었다. 공개적으로 '우리 이런 사이입니다'라는 걸 알리는 과시도 섞인 것 같았다.

과일을 즐기며 샴페인 한 잔을 비울 즈음, 시종 한 명이 펠릭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란소스 경, 국왕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아, 따라가지."


시종을 따라서 향한 곳은 계단의 아랫단 근처였다. 국왕과 대귀족들이 한데 모여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펠릭스가 도착하고, 시종은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오, 란소스 경. 준비한 음식이 입맛에 맞았기를 바라오."

"신선한 과일에 익숙하지 않아 제대로 즐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앞으로는 맛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주 즐길 수 있을 겁니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대귀족이 펠릭스를 맞이하였다. 어떻게 말문을 틔워야 할지 감이 안 왔던 펠릭스에겐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과일이 어땠느니, 샴페인이 괜찮으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펠릭스가 부드럽게 말을 받자 어리다고 가벼운 주제로 말을 시작한 대귀족들이 꽤 즐겁게 받아주었다. 어디 와인이 맛 좋다느니, 어느 과일이 제철이라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국왕은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었다.


"폐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귀족 하나가 대화의 주도권을 국왕에게 넘겼고.


"남쪽 과일이 먹기 좋지."

"아! 폐하께서도 아시는군요. 어떤 과일을 선호하십니까?"

"바나나가 부드럽고 달더군. 오렌지도 좋아한다네."

"소신은 파인애플이라는 게 취향입니다. 단단하고 거친 껍데기 안에 샛노란 과육이 들어있지요. 한 입 베어 물면 무척 달아 이빨이 아플 정도입니다."


열대 과일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디저트 바에서 먹은 과일이라고는 사과, 포도 정도였다. 그 외 과일은 생으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서양배는 잼이나 과일주 정도였고, 산딸기 같은 작은 과일은 운반하다가 상하기 쉬워 영주에게 진상되기 어려웠다.

가만히 듣다 보니 이들의 목적이 대충 보였다.


'가만. 왕이 귀족과 한패가 아닐 거라는 보장이 없었잖아?'


치명적인 실수였다. 양판소를 읽으며 왕과 귀족이 힘을 합치는 장면을 전혀 못 봤기 때문에 내린 판단 미스다. 남방 개척이 국가 지도층의 공통된 사안이라면?


'자칫하다간 큰 낭패를 보겠어.'


왕과 귀족끼리 주거니 받거니 떠들었다. 열대 과일이 얼마나 단지, 식감이 얼마나 아삭한 지 이야기하는 모습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풍토병과 야생동물로 고초를 겪는 남쪽 실무진의 탄원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적임자가 나타난 것이다.

펠릭스는 똑같이 웃으며 이야기를 받아줬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자 대귀족 하나가 가볍게,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란소스 경은 신선한 열대 과일에 관심 있나?"

"먹어본 적은 없는지라 궁금하기는 하나, 달기만 한 건 싫어합니다."

"오. 허허, 그런가? 맛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네."

"사과주와 꿀 바른 빵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단 걸 먹으면 이가 시리더군요. 가끔이라면 모를까, 자주 먹을 수 없을 만한 물건이었습니다."


단맛은 인간이 맛을 느끼도록 설계된 요소 중 하나다. 단맛의 근원인 당은 신체의 에너지원이고,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정확한 인과관계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열량을 섭취할 수 있도록 거부할 수 없는 맛'으로 느끼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열대 과일의 단맛을 미끼로 펠릭스가 스스로 남쪽으로 가도록 유도하려 했는데, 그 단맛을 꺼린다고 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이유도 자연스럽다. 지나친 단맛은 혀나 이빨을 과하게 자극해 고통이나 다름없는 감각까지 주고, 또한 드문 경우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란소스 경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가?"


다른 대귀족이 말을 열었다. 실패한 주제거리는 적당히 묻어버리면서, 펠릭스가 마음을 둔 곳을 알아내려는 질문이었다. 급하게 주제를 전환하려다 보니 다소 직설적인 면이 되었지만.


"예, 받은 은혜가 있고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고민하시니 미력하나마 돕고자 합니다."

"충의가 있고 예의도 바르니, 변경백이 크게 기뻐하겠군."

"동의하오. 최근 난민과 몬스터로 심려가 깊다 들었는데,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 같소."


펠릭스가 트렐라드 변경백의 이야기를 꺼내니 국왕을 시작으로 대귀족들이 호응했다. 펠릭스의 의리를 칭찬하며 트렐라드 변경백을 한껏 띄웠다.

이러한 칭찬 공세의 목적은 뻔했다. 기분 띄워주고 은근히 무언가로 밀어 넣으려는 정치인 특유의 공수표가 이러했다. 멋모르는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인터넷으로 정치질이 무엇인지 잘 아는 펠릭스에겐 조악한 심리전에 불과하다.

들뜬 마음 없이 잠시 묵례하며 감사를 표하기만 하자 몸이 달아오른 건 그들이 되었다. 아쉬운 사람은 펠릭스가 아니었으니까. 대화의 균형추는 점차 펠릭스 쪽으로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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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진흙탕 위 나룻배 (4) 20.06.01 89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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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진흙탕 위 나룻배 (2) +1 20.05.28 97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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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펙시스 공략전 (2) 20.05.12 10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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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기간트 골렘 (1) 20.04.24 227 6 13쪽
17 서임식 (6) +2 20.04.23 227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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