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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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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19
추천수 :
230
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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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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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정벌 준비 (5)

DUMMY

"네리카. 네리카."


현대사회에서 소외감이라는 건 SNS 확산에 기반한다. 접할 수 있는 사람의 폭이 엄청나게 커지지만, 정작 체감할 수 있는 교우관계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을 때 쉽게 발생한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지금의 네리카가 이러했다. '아는 사람은 많은데, 마음을 터놓을 사람은 없다.'는 아이러니.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주위 사람을 자주 만나기에 아는 사람이 곧 친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이건 싫어도 자주 만나야 하니 좋게 지내야 하므로 생기는 일이지만, 네리카에겐 그런 사람이 전혀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견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고아였으니까 선천적인 강철 멘탈이라고 해야겠지만···.'


펠릭스가 짐작하기로 네리카가 겪는 건 인간불신일 가능성이 컸다. 손바닥 뒤집듯 얼굴을 바꿔 칭송하는 자들을 향한 혐오. 지금까지 잘 대해준다고 생각한 언니나 동생이 단번에 태도를 바꿔 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지구에서 정치와 여러 가지 교우관계를 간접적으로 겪어본 펠릭스였기에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데, 자기보다 형편이 어려워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잘 대해준 사람이 어떻게 바뀔지는 뻔한 일.


"내가 돌아왔는데 얼굴도 안 보여주고 말이야. 섭섭한데."


펠릭스는 문을 퉁퉁 두들기며 계속 말을 걸었다. 안쪽에 인기척은 느껴졌다. 이불 부스럭거리는 소리,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 숨소리.

마나를 안쪽으로 흘려보내 네리카의 심장에 자리 잡은 네리카의 존재감도 느껴졌으니, 확실히 있긴 했다.


"네리카. 나 손 아프다."


펠릭스는 아예 의자까지 가져다 놓고 말을 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집사장에겐 가라고 손짓했고, 집사장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자리를 떴다. 당분간 이곳에 사람이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인간불신에 걸린 사람에겐 그 어떤 논리나 설득도 힘을 잃는다. 사람을 못 믿는데 사람이 말한다고 귀에 들어오겠는가. 그래서 열정적 동물애호가가 되거나, 본인의 생존과 편의만을 생각하는 개인이기주의자로 흐르기에 십상이다.

모든 사람이 이런 흐름을 타는 건 아니지만, 배신당해서 고독과 외로움으로 인간을 불신하다가 다른 길로 빠지는 건 보기 싫었다.


"오세안에서 지낼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게."


윽박지르거나 소리치지 않고 조곤조곤 대화가 끊기지 않게 노력한다. 오러를 깨우친 몸이라 일반인보다 오래 버틸 수 있긴 하지만, 식음을 전폐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다.

상처 입은 사람을 다시 문밖으로 나오게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한 법. 펠릭스는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 * * *


펠릭스가 네리카를 설득하고 있을 무렵, 지세트 백작은 탁자를 내리치며 격분하고 있었다.


"소드마스터 상급이 왜 이쪽에 배치되느냔 말이야!"

"······."


백작 앞에 모인 모든 전략가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카팔라 제국의 확장기에 몸을 사리기 바쁜 다른 대국이 이렇게 과감한 결정을 내릴 거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슬레아 대왕국이 마게트 왕국의 패권 도전에 대응하느라 해군양성에 힘쓴다는 정보는 공식이나 비공식 루트를 가리지 않고 들어왔다. 그런데 기간트 골렘을 탄 소드마스터 상급이 국경에 배치되자 비상이 걸렸다.


"해명을 해봐. 짐이 이해할 수 있도록."

"면목없습니다."

"장난하는가? 시간 안 주고 궁정광대를 불러도 그것보다는 재미있을 걸세. 아니면 그대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겠나?"

"······."


지세트 국왕은 비아냥과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당당하게 비꼴 수 있는 건 오슬레아 대왕국을 향한 계략을 반대한 유일한 인물인 덕분이다. 차라리 알카탄 공국이나 로블 공국을 노렸으면 노렸지, 오슬레아 대왕국은 국력 차이가 컸다.

그런데 오슬레아 대왕국은 남쪽을 신경 쓰고, 중앙귀족이 지방귀족의 기세를 죽이려고 고의로 방치할 거라며 노골적으로 변경을 괴롭혔다. 난민을 동쪽으로 유도했고, 범죄자나 불량배에게 무죄방면을 대가로 도적 떼로 만들어 보냈다. 이 모두가 소위 전략가를 자처하는 자들의 계략이었다.

작은 국가인 지세트 백국은 귀족의 힘이 왕보다 강했다. 국외에 영지가 있는 귀족은 양반이고, 외국 유력인사와의 친분을 빌어 왕을 위협하는 자도 있었다. 이번 일처럼.


"폐하, 지금처럼 생산성 없는 회의로는 나라를 지키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테이체 남작! 그래서 지금처럼 성황리에 군수품을 찍어내는 전황을 만들기 위해 힘쓴 그대는 백국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지? 채권을 사겠나, 종군이라도 하겠나? 그 잘난 카팔라의 장인어른께서 백국을 가여이 여겨 용병이라도 보내주시겠다던가? 말을 해보게!"


테이체 남작은 지세트 백국의 신하라기보다 카팔라 제국의 대리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세가 높았던 자다. 이번에 오슬레아를 압박하는 방법 중 범죄자를 풀어 도적으로 만들자는 주장을 한 전략가이기도 했다. 당연히 도적 떼가 의도대로 오슬레아로 넘어가든가 아니면 지세트에 남아 혼란을 일으키든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으니까 제시한 것이다.

왕의 말에 테이체 남작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까지 이런 모욕은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 잘난 머리로 이 지경까지 만들었지 않나. 그럼 대책도 당연히 준비해둔 게 아닌가?"

"송구하오나 폐하. 존재하지도 않았던 소드마스터 상급을 상정할 정도로 인생을 피곤하게 살 사람은 이곳에 없을 것입니다."

"눈을 감는다고 소드마스터 상급이 사라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으니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나? 오슬레아를 공격하자고 주장하던 그때처럼 과감하게 말이야. 응?"


테이체 남작은 왕의 비아냥에 '지랄하지 말고 현실을 봐라.'라고 말했지만, 국왕은 '너야말로 현실을 봐라.'라고 더 큰 모욕을 들었다.

그랬다. 이곳에 모인 사람 모두 세울 대책이 없었고, 오직 책임 전가만이 남았다. 일방적인 상황에 이르자 이곳에 모인 전략가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지세트 백국 최강의 검객이라고 해봤자 익스퍼트 최상급에 불과했다.

국왕은 이런 현실의 끝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말을 속 시원하게 꺼낼 수 있었다.


"왜 다들 말이 없는 거지? 아, 짐이 부르기 전에 꿀이라도 먹고 들어온 건가. 속 편해서 좋겠군, 그래. 이토록 나라가 위중한데 과자가 참으로 맛있었겠어. 암, 다들 오슬레아에 소출 좋은 장원 하나씩 찍어두었으니 제때 밥을 먹어야 오래 살지."

"······."

"그런데 지금은 벌레라도 먹은 것 같군. 짐이 모르는 사이에 사교계에 벌레 먹는 유행이라도 생겼나? 짐을 초대하지 않은 연회가 워낙 많으니 알 수가 있나! 유행을 따르지 못한다고 전처럼 위로해주진 않으니 섭섭하구먼."

"······."

"혼자 떠들고 있자니 마치 인형이라도 세워둔 것 같군. 그대들이 떠들 땐 내가 인형이었는데 말이야. 매일같이 즐거운 날이었지! 지금 그대들도 즐거울 거라고 믿네! 안 그러면 그때의 짐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헤아리지 못한 돌대가리였다는 말일 테니까!"

"폐하."


테이체 남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뭔가? 드디어 그 잘난 혓바닥으로 돌파구를 말해줄 시간인가? 길었군."

"심신이 어지러우신듯하니 이만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대야말로 장인의 품에서 쉬는 게 간절할 것 같은데 짐을 걱정해주니 이루어 말할 수 없이 기쁘다네. 하지만 짐의 영지는 그대와 다르게 이곳이라서 말이야, 당연하게도 돈을 낸 대가를 받아야겠네. 돈벌레가 아니라면 지금까지 봉급을 받은 만큼 일해야겠지!"

"······."


거기까지였다. 전략가 중 하나가 마법으로 왕의 심장을 터뜨려 죽였다. 사람 미만의 벌레 취급을 받아 인내심에 한계가 온 까닭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마법사를 탓하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홀에서 부동자세로 자리를 지키던 기사들도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늘 화를 부르는 입이었지."

"경솔한 언동이 한두 번이 아니었소."

"주제넘은 짓이었소이다. 애초에 본인 능력이 수준 미달이었는데 누굴 탓할꼬?"

"허허, 그렇지. 애초에 우리가 한데 묶여 있는 이유가 그거잖소. 이간질할 생각은 안 하고, 자기편 아니면 다 적으로 취급했으니. 무능이 도를 넘었소이다."


전략가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그들도 나름 억눌린 게 많았던 탓이다. 그들의 상식으로 생각했을 때, 적은 분열시켜 줄여야 하는데 왕은 그런 거 없이 일방적인 아군과 적으로 구분했다. 아군도 동맹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아랫것이라는 오만함만 있었다.


"빠르게 처리합시다. 왕의 목을 바치면 권리는 보존할 수 있을 거요."


테이체 남작이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악덕을 왕에게 덮어씌우면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도 테이체 남작의 말에 맞췄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궁중 조언가 역할이었지, 결정권자는 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약하게 성장하도록 유도했고, 무슨 일을 해도 칭찬보다는 악의적 해석으로 꼬집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속 좁은 왕이었다. 아니, 왕이었던 시체다.

당연히 이런 궁중의 분위기는 주변에서도 눈치채고 있었다.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거래를 맺자는 거겠지요."


트렐라드 변경백은 서신을 읽자마자 기분이 팍 상했고, 집사장은 재빨리 수습했다.


"난민도 아니고 도적을 보냈으면서 용서를 바란다고?"


흉악한 범죄자라고 해서 꼭 난폭하고 지능 낮은 건 아니었다. 테이체 남작이 직접 수작을 부린 건 아니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도적 전부 필사적으로 싸우진 않았고, 흉악범 일부는 트렐라드에 평범한 시민이 되어 눌러살기도 했다.

이런 파편 수십 개가 모이면 통치자 시선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뭔가가 보이기 마련이다.


"거절해라. 모조리 짓밟아주겠다고 답해."


당연하게도 이런 위험분자를 받아들일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안정적인 병합과 통치?

기간트 골렘을 탄 소드마스터 상급이 있는데?


"정중히 답하겠습니다."

"그리해라. 괜히 읽었어. 기분만 잡쳤잖아."


트렐라드 변경백은 얼굴을 찡그렸다. 왕을 허수아비처럼 좌우하던 자들이 왕의 시체를 보장했다면 나오는 결론은 오직 하나다. 책임 전가.

가뜩이나 10년 넘게 이딴 짓거리를 유지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공들여 만든 환경인지 훤하게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불리해지자 이런 수작을 걸어온다는 건 뭔가 있었다.


'수도 새끼들. 군사정보를 흘려? 정도가 있지.'


트렐라드 변경백은 이런 수작을 부릴 자가 너무 많아 누구인지 콕 집지 못 했다. 중앙귀족은 하나같이 여우 같은 작자라 정보를 흘린 것만으로는 유추하기 어려웠다.

머리를 벅벅 긁은 변경백이 생각을 환기하고자 집사장에게 물었다.


"네리카는 어떻게 됐나?"

"방을 나오긴 했습니다만···."

"만?"

"···행동거지가 좀 어린애같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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