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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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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15
추천수 :
230
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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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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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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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진흙탕 위 나룻배 (6)

DUMMY

펠릭스는 해가 저무는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손을 거둘 수 있었다. 왕실 근위대와 대련할 때도 맛보지 못한 차진 맛에 홀리듯이 두들겼긴 탓이었다.

가까스로 주먹과 발을 절제한 펠릭스는 바닥을 뒹구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속이 상하지 않고 겉가죽이 달아오를 정도로 때렸는데 피부가 멀쩡했다. 멍이 든 부분은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전혀 안 보였다.


'이 자식, 한두 번 맞아본 솜씨가 아닌데?'


펠릭스는 청년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맞아본 사람이 맞을 줄 안다고, 교묘하게 몸을 비틀며 충격을 줄여 고통을 줄였다. 그러면서도 비명은 호쾌해서 마치 잘 때린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애원이나 절규는 없었다. 때리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전혀 주지 않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샌드백.

그렇다 보니 정신을 차린 펠릭스는 의구심이 일었다. 선천적으로 이런 재능을 타고 태어나진 않았을 터이니, 누가 이 청년을 이렇게 단련했는지 궁금했다.


"안 아픈 거 다 안다. 일어나."

"으으윽···."

"세 번 말하진 않겠어. 이번에 안 일어나면 뼈를 부러트리겠다."

"헤헤, 일어났습니다."


부드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굽신거리는 모습. 비굴하게 보이긴 하지만, 그 속에는 '언젠가 무릎 꿇게 만들겠다.'라는 열망이 불타오르는 게 보였다. 일종의 호승심이자 도전정신이 엿보이는 부위가 있었다. 무방비하지 않고 언제든지 뒤나 옆으로 도약해 피할 수 있는 무게중심, 반격을 위한 팔의 흔들거림까지. 그것이 훤히 보였다.

거기까지 시선이 닿으니 펠릭스는 절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상대방이 방심하면 그대로 한방이라도 먹여주겠다는 청년의 반골 기질이 시선을 끌었다.


"누구에게 배웠지?"

"헿, 저는 뒷골목 건달이라···."

"허튼소리 말고. 자세며 마음가짐이며, 누구에게 배우지 않고서는 갖출 수 없는 걸 보여줬으면서 독학이라고? 날 우롱하는 거냐?"

"전 정말···, 말 안 할 건데!"

"허참."


청년은 준비 동작을 십분 활용해서 뒤로 도약했다. 거리를 훅 벌려놓고 곧장 도주하려는 심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던지듯 내달리는 청년의 뒷모습을 본 펠릭스는 피식 웃었다. 짐작하던 동작이었고, 이렇게 된 이상 직접 좇아가는 게 나았다. 다리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각력을 높여 도약했다. 근육을 축소해서 무게를 극단적으로 줄인 건 덤이었다.

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수분을 최소한만 남기고 배출해서 체중을 줄인 펠릭스는 힘껏 달리면서도 소리가 거의 울리지 않았다. 청년은 카난리아프 빈민굴로 들어가더니 어디론가 빠지지 않고 직진했다. 구석구석 돌아다니면 해가 저물었다고는 해도 펠릭스의 지붕 밟기가 들킬 수 있었는데 알아서 빠지니 고마웠다.


'그나저나 도망치는 기술도 수준급이네. 상식을 찌를 줄 알아. 직진으로 쭉 도망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


일반적으로 도주라는 건 위험에서 회피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누군가에게서 도망치건, 어떤 상황에서 멀어지건. 근본적으로 감지되지 않는 게 근본이며, 일반적으로는 멀리 도망치기보다는 숨는 걸 선택한다. 그런데 그는 도주를 선택했다. 가까운 곳에 숨어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체득한 상태라는 것.


'잘 때리고, 잘 찾아내는 사람이라니. 어지간한 초인이라도 안 그러겠는데.'


펠릭스는 썩 두근거렸다. 인재 1호가 될 가능성이 충분한 사람 아닌가!

그 덕분에 청년이 헐떡거리며 풀썩 주저앉은 자리 뒤에 거리낌 없이 착지했다. 인기척이 느껴지자마자 청년은 그대로 앞으로 숙이며 운동선수가 달리기하듯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아, 좀."


또 한바탕 추격이 이어질 것 같자 이번에는 생포하기로 했다. 전력 질주하는 청년의 뒤통수에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짱돌을 던졌다. 퍽! 하는 소리가 울렸다.

펠릭스는 고꾸라진 청년을 어깨에 짊어지고 저택으로 향했다.


* * * *


저택에 가둬놓고 적당히 구슬린 지 3일째. 청년은 완고하게 입을 다물며 비밀을 지켰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에 의해 비밀이 풀렸다.


"몽크?"


청년의 정체는 전투승(Monk)이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지만, 양판소에서 종종 등장하는 직종이라 받아들이는 건 빨랐다.

하지만 의문인 점은 왜 그런 몽크가 뒷골목을 전전하며 주점에 드나들며 고기와 술을 만끽하느냐는 점. 아무리 이세계라지만, 주신 샤메드의 성당이나 에브린 수사들의 신실함을 봐온 펠릭스에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몽크를 본 적 없다는 점도.


"예, 오직 다섯 중신에게만 허락된 존재이지요."


펠릭스의 앞에 앉은 노인, 운명의 신을 따르는 주교이자 몽크가 점잖게 답변했다.

주신(主神) 샤메드 아래에는 다섯 중신(重神)이 있었다. 운명, 맹세, 죽음, 판결, 세월. 오직 이 다섯 신만이 전투승을 만들 권한을 주신 샤메드에게 받았다.


"어째서?"

"다섯 요소는 신조차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인 까닭입니다. 주신 샤메드께서 신의 시대를 종식하실 때 만든 신이니. 신조차 운명을 거스를 수 없고, 맹세를 어길 수 없고, 죽음을 피할 수 없고, 판결을 부정할 수 없고, 세월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럴듯하군. 그래서, 운명의 신을 따르는 전투승이 뒷골목에서 술과 고기를 즐기며 나에게 시비를 건 이유를 말해주겠나?"

"아무리 훈계해도 듣지 않을 녀석은 듣지 않기 마련. 납치당한 것이라면 응당 되찾아야 마땅하나 무례를 끼쳐 이렇게 되었으니 저희 손을 떠난 문제지요."

"허. 담담하군."


펠릭스와 노인은 방구석에서 무릎 꿇고 두 팔을 든 청년, 체스터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여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귓등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거로 보아 턱이 움직이는 게 분명했다. 좋은 말은 안 하고 있을 게 뻔했다.

노인은 나아지지 않는 청년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 또한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그딴 소리 하지 마! 여기까지 와서도 운명이야? 나는 내 의지로 행동했던 거라고!"

"허허."


노인은 펠릭스를 힐끗 훔쳐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펠릭스는 체스터의 무례한 언사에도 느긋하게 받아넘겼다. 그걸 본 노인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아직 젊으니 그런 소리를 당당히 할 수 있는 게다."

"발전 없다는 걸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마! 그냥 의지가 없는 거잖아!"

"목소리를 줄여라. 네가 무례할수록 최소한의 변호와 부탁조차 할 수 없다."

"제발 그렇게 해주시지! 운명이고 뭐고 지긋지긋해! 왜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건데!"

'아아, 알겠군.'


펠릭스는 노인과 청년의 대화에서 대략적인 흐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노인이 손을 쥐락펴락하는 걸 보면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는 것 같고, 그걸 눈치챈 청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내뱉었다.

운명의 신을 따르는 사제이자 몽크로서 많은 걸 가르쳐주었으나, 청년은 그 운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펠릭스에겐 청년의 말이 우습게만 느껴졌는데, 전생자인 자신과 엮인 시점에서 청년의 운명개척론은 틀렸다는 게 증명된 까닭이다.


'뭐, 그걸 말할 필요는 없겠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니···.'


청년의 무례함이 계속될수록 노인은 머리가 아픈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결국 청년의 머리에 핵꿀밤을 먹였다. 물론 대놓고 먹인 건 아니었다. 마력을 이용해서 허공을 때려 머리에 충격을 전달하는 기술이었다. 굉장히 빨라서 일반인은 인지조차 못 하겠지만, 펠릭스는 소드마스터라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순리를 마나로 약간 바꿔 만드는 마법과는 다르게 마력의 흐름이 굉장히 난해했다. 뇌, 심장, 하복부의 모든 기관에서 마력이 일제히 움직여 만든 현상이라 마치 무협지의 무공 같았다.


"계속 이야기해봐야 좋은 이야기는 안 나올 것 같으니 이쯤 하지. 아무튼, 내가 계속 데리고 다닌다는 점에 이견은 없겠지?"

"예, 남작님. 저희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말썽은 없다니 다행이군. 너도 불만은 없겠지?"

"그래! 저 폭력배에게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이제 다시는 못 만날 텐데 마지막은 좀 좋게 말해라. 웃으며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나?"

"평소에 잘 해줬으면 나도 그랬겠지. 방금 그거 저 노친내가 날 때린 거라고!"

"허허허···."


노인의 분기 찬 웃음소리. 청년은 낄낄 웃었다. 이 분위기에 펠릭스는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인재 1호를 얻은 건 좋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미련이 없다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헤어지면 펠릭스가 찝찝했다.

더 방치하면 싸움이 날 것 같으므로 펠릭스는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만. 그만. 더 듣지 않겠다. 네 신변은 이제 내가 좌우하겠다. 노예로 다루진 않겠지만, 네가 선택한 대로 종으로 삼겠다. 이견은 없겠지."

"종? 뭐, 노예만 아니라면야···."

"좋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제 넌 나의 소유다. 공증인은 당신이요. 동의하는가?"

"···동의합니다. 운명의 신을 따르는 하인으로서, 체스터는 당신의 종입니다."

"이걸로 끝이다, 끝. 이제 물러나도 좋다. 드잡이질하느라 고생했어."


펠릭스의 상황정리에 노인과 청년 모두 할 말이 남아있는 듯 턱과 목울대가 움찔거렸지만, 펠릭스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돌리자 만남은 그대로 끝을 맺는다.

노인은 바깥에서 대기하던 몽크 무리를 이끌고 저택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2층에서 내려보았다.


"왜, 인제 와서 할 말이 생겼나?"

"그럴 리가! 속 후련하기만 한걸!"

"그건 그렇고. 말투가 좀 거슬리는군.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잖나."

"아기일 때부터 거두어준 양부이자 스승에게 하는 거 못 봤어? 난 이게 천성인데."


펠릭스는 잠깐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예절을 주입해야겠군."

"뭐라ㄱ"


인정사정없는 구타가 체스터를 덮친다. 폭력에 기댈 생각은 없었지만, 앞으로 데리고 다녀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옆에서 활동한다면 위엄이나 권위에 손해가 막심했다. 옛날 옛적 고전 판타지의 모험물이라면 이런 캐릭터성이 감초 역할과 분위기메이커로 활동했겠지만, 펠릭스가 그리는 미래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배, 가슴, 배, 그리고 골반. 허벅지, 어깨, 턱, 명치. 사흘 전과 다르게 급소라도 과감하게 두들겼다. 맞는 데 이골이 난 체스터에게 항복선언을 받아내려면 손속에 정을 두면 안 된다. 맷집도 있고, 끈질김도 있다. 사제니까 회복력도 뛰어나 좀 강하게 때린다고 해서 티가 나지도 않는다.


'이번 기회에 격투술을 연습하는 것도 괜찮겠어.'


펠릭스가 딴생각을 할 때 체스터가 카운터를 걸었다. 왼손으로는 손목을 붙들고 오른손으로 팔꿈치를 밀쳐 팔을 꺾으려는 잡기 기술. 자칫하면 뼈가 빠질 수도 있는 위험한 관절기. 일방적으로 맞는 게 분했는지 마력까지 움직여 작정하고 반격했다.

그 관절기를 정면에서 돌파. 완력으로 버텼다. 구타가 멈추고, 시선이 마주쳤다.


"계속 저항해봐라. 네 밑천을 다 봐야 속이 풀릴 것 같으니."

"으읏."


질렸다는 표정을 지은 체스터는 머뭇거림 없이 창가로 뛰어 유리를 깨고 1층으로 떨어졌다. 본능이 경종을 울려 도주를 선택했으나 오히려 펠릭스를 바깥에 풀어놓는 결과를 낳았다. 방이라는 좁은 공간에 제약이 걸린 건 마찬가지였으므로.

항복선언이 나온 건 자그마치 17일이 지난 다음이었고, 그나마도 반쪽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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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진흙탕 위 나룻배 (4) 20.06.01 88 3 11쪽
38 진흙탕 위 나룻배 (3) +1 20.05.30 95 2 11쪽
37 진흙탕 위 나룻배 (2) +1 20.05.28 97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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