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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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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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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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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정벌 준비 (3)

DUMMY

다음날. 펠릭스는 텔로드 성당을 찾아갔다. 사후세계를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전문가는 철학자 또는 종교인이고, 마침 성당의 인물과 안면이 있었던 까닭이다.

인데브에서 텔로드에 도착했을 때 맞이해준 성당의 사제. 그들을 찾아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당은 웅장했다. 전형적인 그리스·로마 스타일의 건축물이었다. 대리석 기둥과 벽, 새하얀 백색 미관과 원색으로 칠한 도료. 한눈에 들어오는 장엄함은 사람을 절로 신실하게 만드는 존재감이 있었다.


'내가 본 성당이라고는 명동 성당밖에 없긴 한데.'


한국에서 믿지 않았던 신을 이곳에서 믿자니 머리가 아파졌다. 뒤따라온 호위기사들을 입구 근처에서 대기시키고, 펠릭스는 홀로 성당에 들어간다.

방문 소식을 미리 전달받은 성당 측에선 책임자인 주교가 마중을 나와 주었다. 털털하게 웃으며 맞이해주는 탈권위적 모습은 제법 호감이 생겼으나, 교권(敎權)이 명백한 이 시대에 털털하다는 건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었다.


"환영합니다, 남작님. 못 뵌 사이에 장성하셨군요."

"키가 좀 크긴 했지요. 그분께선 잘 지내십니까?"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요양하고 계신답니다."


펠릭스는 성당의 안쪽, 접견실에서 주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5년 전과 비교하면 확실하게 성장했고, 12살 치고는 상당히 건강한 몸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10대 후반으로 보일 정도로. 온몸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뼈와 근육 등 신체 성장을 보조한 덕분이다.

주위에서 자주 보던 사람은 눈치 못 채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은 '많이 컸네'라고 놀랄 수준.


"오랜만에 오셨는데, 샤메드님께 기도라도 하시겠습니까?"

"좋지요. 어떻게 하는 겁니까?"

"기도라는 게 별겁니까. 진심을 담으면 그게 기도지요. 허허."


주교는 허허 웃었다. 진심을 담으면 된다는 말에 펠릭스는 의문을 표했다.


"그거면 됩니까? 아무 데서나?"

"아무렴요. 신께서 세상을 굽어살피시는데, 굳이 저희끼리 형식을 정해서 논란거리를 만들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격식은 좀 차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건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다르지요. 주님을 섬기는 종인 성직자는 가벼이 따를 수 없습니다. 주기적으로, 적절한 장소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도에게 그런 걸 강요할 수 없지요. 기도한다고 다 해결되면 누가 삶을 살겠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주교의 말이 이어지자 펠릭스는 내심 혼란스러웠다. 기도라는 것의 원천은 갈망이다. 누가 말했던가. 우리가 신을 신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전일 근무 가능한 무보수 만능 하인'이라는 본명이 부르기 지나치게 번거롭기 때문이라고.

이것은 동시에 모순을 내포한다. 신은 전능한가?


"허허, 아니요. 그렇게까지 전능하지 않습니다. 주신 샤메드께서 거인 니요와를 죽이고 사체로 세상을 만드셨지요. 뇌를 꺼내 해를 만들었고, 두 눈을 던져 달을 만들었습니다. 뼈와 살은 땅이, 피는 물이 되었지요. 쓸모없는 내장을 쌓아둔 곳에서 생명이 싹텄습니다. 인류와 몬스터, 동물, 곤충 같은 것들은 샤메드께서 만든 피조물이 아닙니다."

"···?"


펠릭스는 뒷목이 땅겼다. 신의 전지전능 자체를 뒤엎는 역설. 애초에 인간을 만든 게 신이 아니다, 라는 전제를 깔았다. 직접 만든 피조물이 아니므로 절대적인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도 말은 되었다.

그렇다면 '거인 니요와'는 누구인가?


"이해하기 쉽도록 형상한 것뿐, 거인 니요와가 정말 거인인 건 아닙니다. 일종의 개념이지요."

"개념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혼돈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 테지요. 모든 게 뒤섞여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하기 쉽게 묘사한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 역시 그러한 존재지요."

"···그런데 그게 왜 기도와 연결됩니까?"


펠릭스의 물음에 주교의 설명이 이어졌다.

혼돈 속에서 충돌하여 패배한 쪽이 '거인 니요와'이고, 승리한 쪽이 '주신 샤메드'라는 전제. 패배한 부분은 산산이 조각나 세계를 구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그 세계가 너무나 넓은지라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 특정 역할을 관장할 도우미를 만드니, 그것이 다른 신들이라 하였다.

주신 샤메드는 세계 전체를 조율하는 균형자가 되었고, 신들은 세상을 조정하느라 바빴다. 이 세상은 거인 니요와의 것인지라 동격인 주신 샤메드가 아니고서는 크게 간섭할 수 없었다. 즉 이 시점부터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전제가 깨진다.

그러므로 신이 이 세계에 간섭하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고, 거인 니요와의 내장에서 만들어진 '생명체'의 기도가 필요했다.


"스스로 바라므로 세상에 관여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기도라는 것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선사시대나 고대에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사회가 움직였습니다. 믿는 신이 강해야 보답을 받기 쉬웠으니. 그러기 위해서 신끼리 싸우거나 협력하거나, 그런 난세가 펼쳐졌습니다."

"그 시대가 끝나게 된 계기는?"

"초인의 등장이지요. 주신 샤메드께서 마나라는 힘을 생명체에게 선사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생명체는 신에게 기대지 않고도 초월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에게 기댈 필요가 없는 초인이 사회를 굴리기도 하였고, 비로소 원시적 형태의 부족국가가 탄생했습니다."

"국가, 라."


지난번에 의문이었던 국가라는 정체성이 비로소 풀렸다. 국가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전에 사회라는 개념이 있었고, 이미 신이라고 하는 절대적 존재로 인해 다종족·다민족 국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다.

오러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초인 덕분에 인류는 신이라는 주박에서 벗어났고, 일부는 그 신을 소멸시키기도 하면서 자유를 쟁취했다. 그때가 마왕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 신은 점차 무게감이 줄어들었고, 주신 샤메드가 상정한 본래의 역할만 맡았다.

그리고 마왕이 등장.


"주신 샤메드께선 거인 니요와의 모든 걸 이용해서 세계를 만드셨지요. 하지만 단 하나, 주님의 손에 닿지 않은 게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혀?"

"하하하. 재치있는 답변이었지만, 아닙니다. 바로 정신입니다."


거인 니요와의 정신은 무겁게 내려앉아 마계를 만들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계로 형성됐다는 말이 맞겠지만.


"이래서 마계와 연결된 곳에 가까워질수록 주신 샤메드와 드래곤의 힘이 약해졌던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거인 니요와의 힘은 주님의 힘과 충돌하니까요. 대신 주님의 힘을 받아들인 니요와의 피조물은 마계와 가까워져도 힘을 대부분 온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계에서 신앙이라는 건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인데브 남작령에 '가정신 에브린'을 섬기는 수도원이 있었는데, 딱히 종교행사를 치렀다는 얘기는 들은 적 없었다.

기도라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보답을 받는 것도 확정이 아니다. 신이 정말 존재하는 세계에서 기도만으로 안식을 받는 게 끝일 수는 없다. 신성력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지 않은가.


"그럼 기도는 나중에 따로 하고, 제가 찾아온 건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였습니다."

"사후세계 담론입니까. 죽으면 죽는 거지요. 별거 없습니다."

"영혼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설명과 이해를 쉽게 하고자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합니다. 영혼이 뭡니까? 육체를 움직이는 자아의 정의 아닙니까. 영혼이 같다면 다른 몸에 들어가도 같은 사람일까요? 같은 영혼은 다른 경험을 겪어도 같은 결과로 성장할까요?"

"그걸 모르겠군요."


주교는 펠릭스의 솔직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육신에 깃든 정신은 육체의 변화에서 만들어집니다. 아픈 경험을 했다면 그 아픔을 피하고, 즐거운 경험을 했다면 또다시 그 경험을 겪기 위해 노력합니다. 영혼이라는 건 육체를 움직이며 받아온 자극으로 비롯된 경험이 누적된 정신을 곧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사후세계는 없는 겁니까?"

"아니요, 오히려 영원하지요."

"영원하다?"


영혼이 존재하지 않다고 말했으면서 사후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는 주교에게 의문을 드러낸다. 사후세계가 있다고 한들 영혼이 없다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 의문을 짐작한 듯 주교는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째서 사후세계를 바라십니까?"

"글···쎄요."


이미 한 번 죽어봤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보답 받기를 바랍니다. 어째서 보답 받기를 바랄까요.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신께서 자신의 삶을 판단해주기를 바라지요. 그리고 신은 그런 재판 따위를 맡지 않으십니다."

"판단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사람을 죽인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겁니다. 범죄자니까, 적이었으니까, 실수였으니까 나는 무죄다,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죄가 작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신께선 알아주실 거다, 라면서 관념을 부여하는 거지요. 이유가 뭐였건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찾아온 겁니다."


주교의 가벼운 말에 펠릭스는 무겁게 대답했다. 본질은 달랐지만, 계기는 몬스터의 죽음을 보고 선악의 기준이 모호해져 사후세계에 관한 질문을 하러 찾아온 것이다. 별개의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본인이 당당하면 된다는 겁니다. 왜 사족을 붙이면서까지 인정받고자 합니까? 무엇 때문에?"

"자기만족···이겠죠."

"맞습니다. 자기만족이죠.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자신이 한 일을 신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면 누가 알아줍니까? 수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할 짓을 해도 당당합니다. 그래선 안 될 일인데도. 그건 뻔뻔한 겁니다. 그렇기에 신께선 판단을 맡기지 않습니다. 신만이 알아줄 거라면, 안 하느니 못합니다. 죽어서 주님 앞으로 간들, 신께서 곱게 봐주실까요?"

"···봐주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신의 힘은 생명체의 신앙에서 비롯된다고."

"아."

"신의 이름을 팔아 한 악행에 정당성을 붙일수록 그 신을 향한 사회의 불신과 배척이 벌어집니다. 그럼 그 신은 힘이 약해지는 데 뭐가 좋다고 그자를 곱게 봐주겠습니까?"


펠릭스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일종의 순환구조였다. 거인 니요와에서 태어난 생명체들. 주신 샤메드가 만든 신들. 신의 힘은 곧 생명체들의 신앙심. 그렇다면 신앙이 강할수록 신은 강해지고, 신앙이 약할수록 신은 약해진다.

대의. 정당. 선의.

모든 것은 섬기는 신을 향한 이득과 연결됐다. 진정으로 모시는 신에게 이득이 되려면 언행과 일치해야 한다. 진정으로 옳기에 행하는 것이고, 진정으로 옳지 않으므로 막는다. 그것이 이 세계의 종교가 가지는 자세이자 원리.


"신이 판단하지 않으면, 왜 사람은 선행을 해야 합니까?"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천당을 말하고, 불교는 윤회를 말하고, 힌두교는 카르마(業)를 말했다. 오늘날 거대 종교는 모두 사후관이 확실했다.

주교는 털털하게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죽은 뒤에 선행으로 기억될 테니까요.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억된다?"

"재판은 신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도 할 수 있지요. 오히려 신보다 사람이 사람을 재판하는 게 적격이지요."

"······."

"왜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는 건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남작님께서 작고하신 뒤에 주위 사람이 각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겠지요. 이것이 진정한 사후세계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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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정벌 준비 (4) 20.05.03 164 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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