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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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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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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글자수 :
391,305

작성
20.05.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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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정벌 준비 (4)

DUMMY

주교로부터 많은 깨달음을 얻은 펠릭스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영원한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은 죽은 뒤에 진가가 정해진다는 논리의 근원에는 영웅사관이 있었다.

마나는 주신 샤메드가 생명체에게 하사한 축복이고, 초인은 신의 은혜가 존재한다는 가장 큰 증명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후의 안정을 받을 것인가?


'업적···이라.'


예전이라면 모를까, 오늘날 인류의 가치관은 영웅사관이 지배하고 있었다. 용자 조르지오, 성인 라피헬라, 현인 마카사, 장인 브롤터. 마왕을 쓰러트린 주역 4명의 이름이 영웅이라는 지배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세계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없었다. 주신 샤메드의 힘인 마나를 부정하고 순수한 기술만으로 문명을 이룩하려면 인본주의가 성립되어야 했다. 하지만 아니다. 이 세계는 인본주의가 없다. 천부인권도 없었다.

펠릭스는 주교에게 물었다. 노예제도와 수인족 탄압에 대해서.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걸작이었다.


- 마왕을 따른 유사 인류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이마를 탁 치고 무릎을 팍 때릴 답안이었다. 모든 생명체가 거인 니요와에서 태어났고, 주신 샤메드에게 구원받은 건 어디까지나 마왕에 대적한 인류뿐이었다. 드워프, 엘프, 휴먼. 단 셋!

무릇 종교라면 만민에게 평화와 안식을 베풀며 포교하지만, 이 세계를 그럴 필요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패배자에서 비롯된 생명체다. 어느 의미로는 기독교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처럼 원죄가 있었다. 차이점은 '죄'가 아니라 '태생'이라는 딱지라는 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분제가 신화 단위부터 뿌리박혔다는 것이다.


"······."


이 세계에서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불공평하다.

누구는 귀족의 자식이고, 누구는 평민의 자식이고, 누구는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또한 주신 샤메드의 축복은 사람마다 달랐다. 누구는 귀족으로 태어나도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하지만, 누구는 노예로 태어나도 신의 축복을 받는다. 그런 세계였다.

펠릭스가 뛰어난 재능을 보여도 주위에서 일정 이상으로 놀라지 않는 건 이런 가치관이 있는 까닭이었다. 신의 축복. 이처럼 간편한 설명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기에 이 세상은 삶에 집착했다.


- 업적을 세운 사람은 그저 행운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영웅은 수많은 업적을 세운 자만이 자격을 얻습니다. 위기는 언제 어디에서나 닥쳐옵니다. 그런 걸 한 번 이겨낸 건 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지요. 하지만 진정한 영웅은 역경을 찾아가 해치웁니다.


일상을 지내다가 화재가 발생해서 살아남았다. 그럼 그건 영웅이 아니다. 침착한 사람이거나, 발 빠른 사람이거나, 운 좋은 사람이거나. 그렇게 바꿔 부를 수 있다.

영웅은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이다. 소방관 또는 대피안내를 자처한 민간인 같은, 다시 위기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영웅이라고 말했다.

거기에서 하나 더 나아간 대영웅을 드높이 칭송했다. 이순신처럼, 한니발처럼, 살라흐 앗 딘처럼. 업적을 세웠기에 영웅이 아니라, '그 사람이니까 가능했다'라는 말을 듣는 위인일수록 높이 칭송했다.

당연히 조르지오, 라피헬라, 마카사, 브롤터가 만들어낸 가치관이었다. 마왕이라고 하는 거대한 절대악이 있었으니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으음."


침대에 누워있던 펠릭스는 상념 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까지는 그냥 이 세계를 즐기고자 싶었지만, 주교의 말을 들어보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고개를 들었다. 호승심. 경쟁심. 그리고 자신감.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인데, 나도 업적 좀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영웅, 그리고 더 나아가 위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펠릭스를 설레도록 만들었다.

업적 한두 개 정도로는 위인이라고 불리기 어려웠다. 활약할 장소가 제공되어 그 위에서 빛난 자는 영웅이 아니라 풍운아라고 부른다. 펠릭스는 미래를 꿈꿔보았다. 백 년이 지나도, 천 년이 지나도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며 경탄을 흘리는 사람들을.

그리고.


"···아, 미연시."


갑자기 훅 치고 올라오는 열풍이 떠올랐다. 역사적 위인을 한낱 캐릭터로 만들어 팔아먹는 일본의 서브컬쳐 말이다.

위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맨틀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또한 나름의 신성한 충격이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진 않았지만.


"큭."


잠깐 흔들렸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위인 그 이상으로 올라 성역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올라 감히 다룰 수 없는 위치에 오르자고 마음먹은 까닭이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김칫국을 마시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지세트 정벌은 내 업적딸의 첫 한 줄이 돼···진 않겠구나. 첫 줄은 마나 블레이드겠는걸.'


신화 속 영웅에겐 기본 소양이 있었다. 비범한 출생이나, 뛰어난 조언자, 그리고 차례대로 찾아오는 역경 같은 것들 말이다.

펠릭스는 의자에 걸터앉아 무릎을 톡톡 두들겼다. 어떤 업적을 세울 것인가?


'학문적 소양은 내 밑천이 보잘것없어서 어렵고···. 군사적 소양 정도인가? 근데 이건 어려운데.'


군사적 업적이라는 건 전투 한두 개를 승리로 이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군과도 싸우며 견뎌야 한다. 군사적 업적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거니까.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을 때, 이순신이 선조와 원균에게 모욕 받을 때, 원숭환이 환관에게 모함받을 때처럼 말이다. 명장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정치에 취약했다. 전장에 머무르는 장군이 어떻게 정치판에서 활약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펠릭스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추종자를 만들어야 하나? 아니, 그럼 파시스트잖아.'


펠릭스는 공부를 잘 하진 않았다. 인서울은 커녕 경기권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다만 국립대에는 들어갔는데, 그 이유는 어디까지나 할머니에게 물려받을 농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죽지 않았다면, 할머니께서 계신 마을의 논밭을 공동 상속받아서 트랙터를 몰고 다녔을 것이다.


'다른 분들 자식들은 전부 다른 직업을 선택해서 네 분의 논이랑 밭을 내가 받기로 했었지···.'


옛날이야기였다. 원래 농업과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6만 평이나 되는 논밭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해서 냉큼 받았던 기억이 있다.


'앞날이 막막해지니까 괜히 예전 생각이 나네.'


펠릭스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명확한 미래를 그릴 수 없을 때는 당장 눈앞에 닥친 일에 몰두하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지세트 정벌에 동원하는 병력은 2천 명이 좀 안 되었다. 중앙의 지원을 받은 군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규모.

하지만 진가는 골렘 규모에 있다. 트렐라드 변경백의 기간트 골렘 13기 중에서 10기가, 매그넘 골렘 71기 중에서 47기가 동원되었다. 지세트 백국의 골렘 전력은 기간트 골렘이 다섯에 매그넘 골렘이 오십이 안 된다. 골렘만으로 쌈 싸먹을 수 있는 전력.

일반병 2천 명은 사실상 주둔지 치안 유지 및 보조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사람 죽이는 거 생각하다가 왜 여기까지 왔더라.'


상념을 싹 거두어 현실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첫 고민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세계는 살인 자체에 큰 무게를 두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죽이는 거로 간주했다.

여기에서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이러니까 중세···서양 판타지라는 거겠지.'


이 세계는 여전히 지구 기준으로 중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늘을 날아다녀도, 이족보행 기계가 걸어 다녀도, 전기 없이 고도의 문명이 형성되어도 여전히 한 기준으로는 여전히 중세였다.

인본. 이 세계는 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작님. 안에 계십니까? 란소스 각하."

"응?"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트렐라드 변경백의 집사장이 서 있었는데, 눈치를 보는 분위기였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밖으로 내밀어 복도를 살펴보았다. 시녀 두 명이 펠릭스와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그걸 본 펠릭스가 문을 닫고 집사장을 바라보았다. 굳이 말을 안 해도 어떤 의도인지 뻔한 압박에 집사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남작 각하. 네리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 으응?"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냈던 네리카를 언급하는 집사장에게 펠릭스는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지세트 백국 공략에 문제가 생겼나보다 하고 심각한 대화를 대비하다가 나온 말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였다.

펠릭스가 소드마스터로서 수도 오세안에 간 사이, 네리카는 오러를 깨우친 익스퍼트 기사라는 것이 곳곳에 퍼졌다고 한다. 사실이라 논란은 빠르게 걷혔고, 기사의 자식이었으므로 의혹은 단번에 해명됐다. 그럼 이것이 왜 문제냐 하면.


"사방에서 혼인신청이 들어온 탓에, 공황이 와서 방에 틀어박혔다고?"

"원래 교우가 넓지 못했던지라···."


집사장이 설명한 상황은 이러했다. 네리카는 원래 시녀로서, 펠릭스 전담으로 붙기는 했지만 트렐라드 변경백의 묵인 아래 기사로서의 수양을 같이 걸었다. 이게 하루 이틀이라면 모를까, 몇 년째 시녀의 본 업무에서 멀어졌다.

펠릭스가 보기엔 시녀지만, 정작 시녀들이 보기엔 시녀가 아니었다. 그리고 기사들이 보기에도 기사가 아니었다. 그런 미묘한 선에 서 있던 네리카에게 갑자기 혼인신청 이삼백 장이 날아왔단다.


"···가관이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드쿨라 경의 말씀으로는 아직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그것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 나 때문이네.'


셀튼 이드쿨라의 앞에서 오러를 깨우치기는 했지만, 그건 오직 펠릭스의 순수한 마나가 조그만 깨달음에 반응한 탓이었다. 순수하게 네리카의 경지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앞뒤 사정을 파악한 펠릭스는 집사장에게 물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괜찮으시다면, 그 아이를 거두어주셨으면 합니다."

"본인의 생각은 안 듣고?"

"남작 각하의 말씀을 듣고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폐인이 되었다는 방증입니다. 수도원으로 보내야겠지요."

"아아."


돌려 말하지 않고 공황이라고 직설할 정도면 매우 심각한 상황일 것이다. 펠릭스를 찾아올 정도면 이미 네리카를 찾아가 봤을 것이고.

밖에서 시녀 둘이 집사장을 살펴보던 이유가 있었다. 시녀 사이에서 부러움과 질투를 한몸에 받았을 네리카의 고민은 지금까지 크게 생각해본 적 없었다. 본인이 내색을 안 하니 어떻게 알겠는가.

펠릭스는 예전에 셀튼에게 말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리카가 이성으로 보이는가?


'···아니, 전혀.'


나이 차이 많은 조카 정도로만 보였다. 귀염성은 없지만, 가끔 보이는 얼빵한 면이 매력이라 가능했으면 용돈이나 좀 쥐여줬을 것이다.


"일단, 직접 봐야 알 수 있겠어."

"안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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