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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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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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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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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정벌 준비 (6)

DUMMY

오세안, 오슬레아 대왕국의 수도.

넓은 호수를 낀 드넓은 충적평야 위에 세워진 도시이자 말을 타고 남쪽으로 20일 정도 질주하면 깊이 파인 만(Bay)이 있는 천혜의 요충지.

농지와 염전에서 거두는 막대한 곡물과 소금은 오슬레아 대왕국이 팽창할 수 있는 원천이었다.


"공작 각하. 급보입니다."


전통적으로 수도의 힘이 강한 오슬레아 대왕국이었기에 어지간한 귀족은 영지에는 대리인을 맡겨두고 수도에서 생활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 모를까, 오슬레아에서 방귀 좀 뀌려면 수도에 터전이 존재해야만 했다.

테루아 공작은 오슬레아 북서부에 영지를 가진 대귀족이다. 트렐라드 변경백령이 있는 곳의 책임자이기도 하고, 이번 남부 확장에 공을 들이는 인물이기도 했다.


"지세트 국왕이 신하들에게 모살 당하고, 시체가 트렐라드에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들?"

"예, 한 명의 소행이 아니라고 합니다."


테루아 공작은 집사장의 보고에 미간을 찡그렸다. 어느 한 명의 소행이라면 그 인물을 콕 집어 죄를 몰아넣고 없애면 마무리되지만, 모두 작당했으면 해결책이 없다.


"어리석은 놈들. 일을 그르쳐?"


오슬레아 대왕국의 북서쪽 국경은 어지러워야 했다. 마게트 왕국을 정면에서 막고 있는 키펠 왕국에 흘러가는 지원 규모가 비대해지고 있었다. 전략적인 지원이고 필수적인 일이었지만, 도를 넘어섰다.

정보통이 물고 온 최신정보가 맞는다면, 마게트 왕국이 키펠 왕국을 구워삶아 서로 짜고 치는 전쟁이 빈번해졌다고 한다. 물론 그런 전투 하나하나에 신경 쓸 수는 없었다. 1년 내내 전쟁하는 건 불가능하고, 대치만 하다가 물러나는 것 역시 전략이었다.

그러나 근래의 키펠 왕국은 태도를 바꿨다. 오슬레아 대왕국의 막대한 지원금이 키펠 왕국을 점점 좀먹어 용병국가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농토, 광산, 벌목장 등 생산시설 관리에 소홀하게 만들었고, 상업구조도 기형적으로 만들었다.

마게트 왕국에 대항하는 동맹국이었으나, 이제는 오슬레아 대왕국 대신 싸우는 용병 정도로 격하됐다. 그런 인식이 없던 건 아니지만, 키펠 왕국이 이런 식으로 전락해선 안 됐다.


'공동전선이 너무 드물었지. 이런 일이 일어난 것 자체는 기정사실이야. 하지만···.'


일방적인 수세여야만 하는 북서부가 공세로 전환된다면 키펠 왕국에 내밀 변명이 마땅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남쪽에 집중하던 국력을 북쪽으로 돌려야 하고, 마게트 왕국과의 긴장도가 올라갈 게 뻔하다. 그럼 마게트 왕국의 전략적 동반자인 란가스 왕국이 오슬레아의 해안선을 어지럽힐 것이고.


'지금까지 투자한 것들이 무색하게 파탄 난다는 거지.'


10년이다. 10년 넘도록 양성한 해군과 상선대는 여전히 작은 규모에 훈련도도 형편없었다. 배 위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인구의 반이라는 란가스 왕국의 해군을 상대하기에는 양과 질 모두 현격히 떨어졌다.

소드마스터 상급 한 명의 등장으로 오슬레아의 대전략이 깨졌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뭘 할 수 있겠나. 멍청하게도 퇴로를 막은 건 그놈들이야. 지원하려고 해도 명분이 있어야지. 변경백이 속은 좁아도 멍청한 자는 아니야."


이길 싸움을 지게 하려면 크게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무능한 아군, 유능한 적군, 신의 변덕.

이번 일로 적의 무능함은 증명됐다. 아군의 무능을 발휘하기에는 지금까지 발목을 잡아온 시간이 10년을 넘겼다. 여기서 더 건들면 북서부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도 할 말이 없다.

그럼 이젠 신의 변덕에 기대야 하는데, 신께선 지세트 멸망을 바라시는 듯 소드마스터 상급을 내려보냈다.


"대전략을 바꿔야지. 적이 이렇게도 멍청하니, 우리도 상정하던 걸 바꿔야 하지 않겠나."


펠릭스가 지세트 백국을 첫 침공국가로 선택한 결과는 오슬레아 대왕국의 대전략 변화로 이어졌다.


* * * *


'강아지도 이렇게 엉겨 붙진 않겠다.'


열흘 동안 물만 마시며 버텼다. 마나를 이용해 체력을 온존했고, 밤에는 문에 등을 기대어 눈을 붙였다.

그렇게 정성을 들인 결과 네리카가 문을 열고 나오긴 했다. 밥도 먹었고, 씻기도 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쇠약해진 게 보여서 안쓰러워 보여 별말 안 했는데, 기운을 차리자마자 펠릭스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끔은 신체접촉도 시도했다. 밀착이라던가, 껴안기라던가.


"덥다."

"여름이니까."

"안 더워?"

"오러를 배운 다음부터는 덜해."


펠릭스는 책을 읽고 있었다. 지세트 백국의 지형지물과 인구, 명사의 신상 등이 적힌 첩보문서였다. 트렐라드 변경백이 특별히 읽을 수 있도록 허가해준 물건이었다.

그걸 읽는데 네리카가 옆에 찰싹 붙어서는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마나로 신체를 자극했으므로 펠릭스의 체격은 네리카보다 컸다. 그래서 고개만 살짝 기울이면 네리카의 머리는 펠릭스의 어깨에 살포시 얹을 수 있었다.

문제는 네리카도 글을 알기 때문에, 펠릭스의 신경줄 위에서 징박은 신발로 탭댄스를 추는 것 같은 짜증이 밀려 올라온 것이다. 기밀정보 아닌가!


"다른 책이라도 읽고 있는 게 어때."

"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펠릭스는 눈을 천천히 감으며 책을 덮었다. 방금 막 고개를 빼꼼 나온 사람에게 거리감을 드러내는 건 좋지 않다. 절제를 요구하더라도 펠릭스가 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말해야만 했다.

그걸 해줄 사람이 없으니, 일단 펠릭스가 물러나야 했다.


"산책하러 나가자. 바람 좀 쐐야겠어."

"응."


느닷없는 말인데도 군말 없이 따르는 네리카. 펠릭스는 실내복에서 얇은 외투만 걸치고, 네리카는 펠릭스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고마워. 문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준비 끝나면 나와."

"알겠어."


펠릭스는 방 밖으로 나가 숨을 돌렸다. 곧 여름이 시작되는데 거리낌 없이 달라붙으니 덥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선선하긴 해도, 오슬레아 대왕국은 열대 바다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습기 때문에 사시사철 습했다. 겨울은 그나마 덜했지만, 여름은 죽을 맛이었다.

네리카와 함께 영주성을 빠져나가 텔로드 외곽으로 향했다. 꽤 높은 성벽이 있어 바깥 경치를 만끽하려면 성문을 나서야 했다.


'언제 봐도 장관이란 말이지.'


드넓게 펼쳐진 밭이 지평선을 이루었다. 산이 많은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경관이다.

밭에선 농부들이 한가롭게 길을 거닐고 있었다. 짊어진 도구는 널빤지와 곡괭이. 농부가 저런 도구를 쓰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돌 깨러 가는 모양인데.'


밭에 박힌 바위나 제방을 다듬으러 가는 정도다. 뾰족한 곡괭이는 용도가 좁고, 철이라 관리하기도 어렵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 농부들에게 향했다.

단정한 옷차림의 펠릭스와 네리카를 본 농부들은 즉시 물건을 아래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고, 고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곡괭이를 들었던 인물만이 무리를 대표해서 고개를 들고 말을 올렸다. 철제 도구를 관리하는 인물이라 그런지, 그 정도 급은 되는 것 같았다.

펠릭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고, 용건을 말했다.


"이렇게 뭉쳐서 어딜 가는 거지?"

"관리인님께서 제방을 보수하라고 하셨습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머리통보다 큰 돌은 모두 없애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건가."


강에는 수량이 한정되어 있다. 물이 움직이는 길이고, 강의 깊이나 너비에 맞춰 양이 달라졌다. 하지만 물은 혼자만 움직이지 않았다. 모래를 같이 운반하기도 하고, 가끔은 돌덩이도 손님으로 초대했다.

평소라면 상관없으나, 장마철이 되면 이런 돌덩이는 수량을 줄이는 장애물이 되어 범람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앞장서게. 잘하나 구경 좀 해야겠군."

"예, 옙."


네리카는 펠릭스가 무슨 생각으로 그들을 따라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펠릭스가 가는 길이기에 군말 없이 따랐다.

텔로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밀 농사는 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자연적으로 형성된 흔적이 보였다. 공들여 흙을 다지거나 자갈을 깔지 않고 작은 개울 하나가 이 근처로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이 개울은 테루아 강으로 흐르는 지류 중 하나에서 나온 겁니다. 여기 말고도 호수를 저수지로 개조한 곳이 여섯 곳 있습니다."

"많군. 그 정도로 물이 많이 흐르는 것 같진 않은데."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면 강이 범람합니다. 저수지를 충분히 정비해두지 않으면 밭에 물이 차서 밀이 썩습니다. 트렐라드의 골머리지요."


농토를 관리하는 인물이 펠릭스의 옆에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곡괭이를 든 농부가 돌을 깨고, 널빤지 위에 잘게 부순 돌멩이를 얹어 둑 너머로 던졌다.

뜻밖에 머리보다 큰 돌멩이가 꽤 많았다.


"물이 흐를 때 굴러오는 돌도 있지만, 이쪽의 돌은 물에 흙이 씻겨나가면서 바닥에 박혀있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내버려두면 장마철에 돌끼리 걸려서 쌓일 수도 있다는 건가."

"정확합니다. 탁월한 식견이십니다, 하하."


관리인은 두 손바닥을 파리처럼 비비며 아부했다. 허리의 검과 반지는 작위가 있는 귀족이라는 걸 드러내는 명백한 증표였다. 굽신거려도 전혀 부끄러울 게 없는 신분 차이.

펠릭스는 끙끙거리며 바닥에 박힌 바위를 깨는 농부들을 내려보았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강물에서 강바닥 바위를 깨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힘을 싣기도 어렵고, 흙탕물이 시야를 가리는 탓에 깨트린 돌조각을 골라내는 것도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네리카. 네가 해 볼래?"

"응···? 저걸?"

"곡괭이에 오러를 입혀서 바위를 깨보자고."

"···알겠어."


기사에게 농사일을 도우라는 말이었지만, 네리카는 순순히 따랐다. 곡괭이는 검처럼 철만 있는 게 아니라 나무 손잡이 때문에 오러를 입힐 수 없었다.

그걸 아는 네리카였기에 조금 조심스럽게 오러를 일으켰는데, 펠릭스가 바로 옆에서 마력을 보조했다. 터지듯 박살 나야 할 나무 손잡이가 그대로 유지되고, 곡괭이에 오러가 맺혔다.


"오오···."


주위의 감탄과 네리카의 놀라움.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자 펠릭스가 가볍게 팔을 들어 괜찮다고 표현했다.

펠릭스의 모습에 안정을 되찾은 네리카가 곡괭이로 바위를 내리쳤다. 어깨 위에 손을 얹듯 가볍게 휘두른 곡괭이가 바위에 푹 박혔다. 다시 한 번 내리치자 바위를 관통했고, 오러를 거두어 약간 비틀자 그대로 뻑 소리를 내며 뜯어졌다.

진흙으로 미끈거리는 발바닥, 발목과 정강이 부근의 차가움. 그리고 주위 농부들의 감탄. 펠릭스가 다시 해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네리카는 다시 곡괭이를 휘둘러보았다.


'잘하네.'


기운을 북돋게 하기 위해선 주위의 분위기가 필요한 법. 신분 차이는 좀 있지만, 농부들의 감탄과 경이로운 시선은 네리카에게 자신감을 조금이나마 되살리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지시로 이루어낸 것이기는 하나, 본인이 만든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자립시켜야지. 그나저나 성 바깥은 평야라서 바람이 좀 세구나. 외투 좀 더 두껍게 입을 걸 그랬어.'


펠릭스는 옷깃을 여미며 바위 깨기에 열중하는 네리카를 바라본다.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웃는 걸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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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진흙탕 위 나룻배 (4) 20.06.01 89 3 11쪽
38 진흙탕 위 나룻배 (3) +1 20.05.30 95 2 11쪽
37 진흙탕 위 나룻배 (2) +1 20.05.28 97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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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펙시스 공략전 (4) 20.05.18 107 3 12쪽
32 펙시스 공략전 (3) 20.05.14 111 4 12쪽
31 펙시스 공략전 (2) 20.05.12 108 2 12쪽
30 펙시스 공략전 (1) +1 20.05.11 131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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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정벌 준비 (4) 20.05.03 164 6 11쪽
22 정벌 준비 (3) +1 20.04.29 182 5 12쪽
21 정벌 준비 (2) +1 20.04.27 190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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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기간트 골렘 (1) 20.04.24 227 6 13쪽
17 서임식 (6) +2 20.04.23 226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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