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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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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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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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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펙시스 공략전 (2)

DUMMY

알카탄 공국 남부 대도시 펙시스. 네안칼 백작이 통치하는 지역이었고, 오슬레아와 키펠을 중개하는 상업도시였다.

오론 강의 풍부한 수운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막대한 물자를 실어 날랐다. 대표적으로 밀가루와 맥주가 있고, 목재나 제련한 금속도 무궁무진하게 팔아넘겼다. 그 돈으로 성벽을 구축했고, 드넓은 창고 지역과 선착장이 도시의 명물이었다. 조선소에서 만든 수운용 화물선이 교역품을 실어 나르는 모습은 대단한 장관이었다.

그런 영광도 오늘로 막을 내렸다. 펠릭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성벽 밖 선착장을 점령한 것이다.


"엄청난걸."


창고 수백 개가 질서정연하게 건설된 모습은 근대적인 항구를 떠올릴 정도였다. 크레인만 있었으면 현대적인 항구를 떠올렸을 것이다.

펠릭스가 선착장을 점거하고 창고를 확인해보자 대부분 소거된 상태였다. 내부에 남아있는 거라곤 목제 가구, 금속괴, 채소, 수레바퀴 같은 중간재 또는 쓸모없는 완성품뿐이었다.

가구나 금속은 가치가 있지만 너무 무거워서 많이 가져갈 수 없고, 채소는 썩기 쉽고, 수레바퀴 같은 것은 반쪽짜리라 부품이 충분히 갖춰져야 유용한 물건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제법이야. 소거 절차가 확립된 걸 보면 꽤 자주 연습했던 것 같은데.'


창고 지역 곳곳에 덩그러니 방치된 곡물이나 소비재가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 운반하다가 떨어트린 듯 멀쩡하진 않았다. 그중에는 썩은 냄새가 나기도 했다. 오래전에 소거를 끝마쳤거나, 일부러 독을 섞었다는 물증이다.

펠릭스는 그런 물건에 손대지 말고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음식은 충분히 있었다. 괜히 불확실한 물건에 손대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보다 약간의 불만이 생기는 편이 낫다.


"항만에서 노역하던 수인족 몇 명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없습니다."

"수인족이라고?"

"옛. 강을 넘는 배가 만석이라 버려졌다고 합니다. 처리할까요?"

"내 앞으로 데려와라. 직접 물을 게 있다."


펙시스는 오론 강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뉘었다. 북쪽은 성을 포함해 주거지와 중공업단지고, 남쪽은 창고 지역과 가벼운 가공 정도가 고작인 경공업단지가 있었다. 물류집적지 역할과 생산공장 역할도 겸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이런 주요 도시였으니 펠릭스가 선택한 곳이었다. 원래는 이곳에서 후발부대와 합류하는 지점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전에 당해버렸지만.


'수인족이라···.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인류를 배신해서 저주받을 종족이라고도 불리는 수인족은 이 세계에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사회 밑바닥을 구성했다.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므로 내쫓기기 일쑤였다.

수도 오세안에 수인족을 구경할 수 있는 동물원이 있다고 말은 들었지만, 골렘 조종 연습과 대련을 하느라 왕궁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수인족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었고.


'···퍼리잖아.'


수인족의 외견은 퍼리였다.


'왜?'


펠릭스가 상상하던 수인족은 '케모노'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동물의 특징이 있는 부류였다. 하지만 펠릭스의 기대를 산산이 부순 퍼리는 동물에게 사람의 팔다리를 달아놓은 모습과도 같았다. 동물의 핵심이 전혀 다른 만큼 둘의 외견은 전혀 달랐다.

양판소 세계관이니까 상업화에 유리한 케모노라고 단정하던 펠릭스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뒷목이 시큰하고 뻐근했으며 후두부가 얼얼했다.


"······."


주위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펠릭스가 눈을 감고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침을 삼키며 긴장한다. 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리카는 펠릭스가 말을 아끼는 동안 앞에 끌려온 수인족을 살펴보았다. 돼지, 사슴, 소의 수인족이었다. 거칠고 상처 난 피부와 튼튼한 근육이 두드러졌고, 전혀 관리하지 않은 털 때문에 날벌레가 주위에 날아다녔다. 지하에 숨어있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천박했다.


"강에 던져서 씻게 할까?"

"···아니. 아니. 아니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꽉 찬 직구가 날아와 머리가 멍했지만, 펠릭스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는다. 전장에서 싸우지도 않고 멘탈이 터지면 여러모로 위험했다.


'근데 왜 퍼리야?'


아무리 펠릭스라도 미련이 없어지질 않았다. 양판소에서 수인족이 나온다면 케모노가 정석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수인족은 아무리 봐도 퍼리였다. 돼지 머리, 사슴 머리, 소 머리. 가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아니라 가축 그 자체인 외견. 팔 골격이 사람과 같고, 다리만 역관절이었다.


'으윽, 뒷목이야.'

"며칠 전에 마지막 배가 여길 떠났지?"

"제, 제 기억이 맞는다면 열흘 전입니다."

"똑바로 얘기하지 못하나!"


수인족 옆에서 허튼짓을 못하도록 감시하던 기사가 대답한 소 수인의 어깨를 걷어찼다. 골렘 나이트가 마력을 담아 걷어찬 탓에 2m가 넘는 거구의 소 수인은 허공에 붕 떠서 날아가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 행각에 펠릭스는 짐짓 놀랐다. 농노의 실수에도 살갑게 허허 웃으며 괜찮다고 달래던 인물이었다. 성품이 괜찮아 곁에 데리고 다녔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여간 충격이 아니었다.


"칼슨."

"예, 란소스 각하."

"그만하면 됐어. 지하로 숨은 자들이 날짜 변화를 정확히 알 수 있겠나? 대략적인 일수면 충분해."

"옛. 각하의 자비 덕분에 산 줄 알아라, 겁쟁이 놈들."

"······."


펠릭스가 보는 앞에서 수인족을 욕하며 골렘 나이트, 칼슨이 비켜섰다. 소 수인은 걷어차여 얼굴을 땅에 거하게 쓸렸어도 펠릭스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자비를 칭송했다.

소가 사람 말을 능숙하게 하는 광경에 놀라고, 극명한 신분 차이에 두 번 놀라고, 주위에서 아무도 칼슨을 나무라기는커녕 수인족을 노려보는 광경에 세 번 놀랐다.

말문을 잃은 펠릭스의 손목을 네리카가 부드럽게 잡았다. 그 덕분에 충격에서 깨어나는 펠릭스.


"포로를 관리할 인원은 없다. 저 셋은 해방하고, 배는 어떻게 됐지?"

"죄송합니다, 각하. 이 근처의 모든 배를 네안칼 백작군이 징발했습니다. 탈 수 있는 배라고는 나룻배 정도입니다."

"그걸로 500야드(≒ 460m)가 넘는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으면 참 좋겠어. 저 녀석들을 풀어주고 오게."

"예."


칼슨은 고개를 푹 숙이며 경례하고 수인족 셋을 끌고 갔다. 엉덩이를 금속제 각반으로 얻어맞으면서도 굽신거리는 모습이 펠릭스에겐 다르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펠릭스는 노골적인 악의를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 방에 갇혀 지내긴 했지만, 느닷없이 구토하고 혼절한 본인의 잘못이 컸다. 따라서 그걸 제외하고는 모두 선의에 가까웠다.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경계하는 사람도 있었고, 죽은 자식을 투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 가지 태도는 있었지만, 악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눈앞에서 펼쳐진 악의. 일방적인 수직관계와 폭행이 당연하게 벌어졌다.


'끙. 이 정도로 혼란스러워하다니. 아직 멀었네. 아니, 충격적이긴 했는데. 좀 많이 충격이긴 했는데!'


아직도 머릿속에서 수인족들의 말똥말똥한 눈동자가 맴돌았다. 머리만 놓고 보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 문제. 너무 쉽게 연상됐다.

수인족을 해방한 칼슨이 돌아오자, 펠릭스는 손짓으로 집결을 지시했다. 골렘 나이트와 마법사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기병은 주위를 둘러싸고 사방을 경계한다.


"원래 계획은 여길 태우기만 끝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기를 함락해야 해. 반드시 강을 건너야 한다."


너비 500야드가 넘어가는 광대한 오론 강을 넘으려면 나룻배로는 안 된다. 알카탄과 키펠을 이어주는 거대한 강줄기라 뒤지기 시작하면 배가 나오긴 나올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법 통신으로 이 인근에 펠릭스가 도착했다는 걸 깨달았을 거라는 점.

신통한 방법으로 강을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방법은 안타깝게도 없었다. 텔로드에서 협상에 미적거린다 하더라도 한 달이 한계다.


"이 근처에서 가장 좁아도 350야드(≒ 320m)입니다. 배 없이는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걸 누가 몰라. 앵무새냐, 계속 똑같은 말만 하게?'


뾰족한 수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강폭이 워낙 긴 데다가 원활한 운송을 위해 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 200마리와 사람 250명이 한 번에 건널 수 있는 배가 덩그러니 나타날 수는 없는 법.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마법으로 공간도약을 시도하려고 해도 이미 도시에는 공간왜곡 마법진이 가동돼서 섣부르게 시도하다간 영원히 허수공간을 떠돌게 되거나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연출된다. 따라서 아예 멀리 동떨어져 골렘의 마나석을 이용해 마법으로 강을 넘는 방법 외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밤중에 수영으로 넘어가는 건 아무도 말 안 하네. 여기에 상어가 있나, 아니면 유속이 빠른가?'


난류가 형성될 만한 암초나 구조물이 전혀 없고, 너비가 좀 길긴 하지만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에겐 큰 문제는 아니었다. 골렘 나이트 몇 명이 헤엄쳐서 강을 넘어 배를 나포해 건너자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트렐라드 변경백과 논의할 때 이런 상황을 논의하지 못했다. 알카탄 공국이 선발부대를 먼저 공격할 확률이 높다고 점친 탓이었다.


"밤에 나를 따라 강을 헤엄쳐 건너가 배를 뺏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어렵습니다. 저런 도시에는 밀수꾼을 적발하기 위한 경보용 마법이 있기 마련입니다. 물에서 공격받기라도 하면 목숨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아아."


합당한 대답이었다.

전쟁이라는 틀에서만 생각했는데, 평상시로 시야를 넓히자 밀수꾼의 존재가 있었다. 전쟁 때만 적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도 밀수꾼이 강을 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체계가 있다면 이슥한 밤이라도 강을 건너는 건 불가능하다. 급조한 인력과 체계가 아니라 닳고 닳은 노련한 견시병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테니까.


"멀리 떨어져서 마법으로 강을 건너는 게 최선이겠군."


말 200마리와 250명을 한 번에 옮기려면 10일가량을 강변에서 지내야 했다. 수신용 마법진이 없는 일방향 텔레포트라서 안전성과 정밀성을 위해 정교한 마법진이 필요한 까닭이다.

이때는 전략적 도주나 추격이 어렵다. 마법사를 지킬 호위가 필요할뿐더러 장거리 저격으로 마법사 하나가 죽으면 마법진 전체를 전반적으로 손봐야 했기에 다시 그려야 한다. 마법진이 망가지지 않도록 별도로 보호, 고정화 마법을 걸 마법사도 필요하다. 이 모든 일을 위한 열흘.


'20일 안으로 저길 함락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펠릭스가 고개를 돌려 펙시스를 바라보았다. 굳건한 성벽과 그 위에 삼엄하게 경계를 선 병사들. 샤메드 문장기와 알카탄 국기, 네안칼 백작기, 펙시스 시기(市旗)가 나란히 펄럭이는 모습이 보였다.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테알론과 지세트 수도와 다르게 진정한 공성전이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수인족의 처우를 직접 본 경험도 전쟁을 체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반나절 주겠다. 여기의 모든 창고와 공방을 태우고 남쪽에서 집결해라."

"예!"


펙시스 남쪽 창고지대와 산업구역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매연이 새파란 하늘을 검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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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진흙탕 위 나룻배 (6) 20.06.21 89 2 12쪽
40 진흙탕 위 나룻배 (5) 20.06.16 90 2 12쪽
39 진흙탕 위 나룻배 (4) 20.06.01 89 3 11쪽
38 진흙탕 위 나룻배 (3) +1 20.05.30 95 2 11쪽
37 진흙탕 위 나룻배 (2) +1 20.05.28 97 3 12쪽
36 진흙탕 위 나룻배 (1) 20.05.26 101 3 11쪽
35 펙시스 공략전 (6) 20.05.23 102 1 12쪽
34 펙시스 공략전 (5) 20.05.19 101 2 11쪽
33 펙시스 공략전 (4) 20.05.18 106 3 12쪽
32 펙시스 공략전 (3) 20.05.14 110 4 12쪽
» 펙시스 공략전 (2) 20.05.12 108 2 12쪽
30 펙시스 공략전 (1) +1 20.05.11 131 3 11쪽
29 지세트 최후의 날 (3) 20.05.09 138 3 12쪽
28 지세트 최후의 날 (2) 20.05.08 143 5 12쪽
27 지세트 최후의 날 (1) +1 20.05.07 153 5 11쪽
26 정벌 준비 (7) +1 20.05.05 155 6 11쪽
25 정벌 준비 (6) 20.05.05 154 4 12쪽
24 정벌 준비 (5) 20.05.04 158 3 11쪽
23 정벌 준비 (4) 20.05.03 164 6 11쪽
22 정벌 준비 (3) +1 20.04.29 182 5 12쪽
21 정벌 준비 (2) +1 20.04.27 190 6 12쪽
20 정벌 준비 (1) 20.04.25 209 7 12쪽
19 기간트 골렘 (2) +2 20.04.25 210 5 13쪽
18 기간트 골렘 (1) 20.04.24 227 6 13쪽
17 서임식 (6) +2 20.04.23 226 7 12쪽
16 서임식 (5) 20.04.22 224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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