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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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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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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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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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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정벌 준비 (2)

DUMMY

트렐라드 변경백은 이번 겨울에 출정하겠다며 계획을 꺼냈다. 난민과 도적, 몬스터에게 골머리를 앓고는 있지만, 추수를 위해선 겨울이 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데브 남작령은 상황이 이렇게나 나빠졌어도 피해를 최소로 줄이며 영지를 온존했다. 그러나 모든 영주가 인데브 남작처럼 유능하지 못했다. 누구는 도적 떼에게 영주성을 빼앗겨 인근 성채로 도피했고, 어디는 난민에게 도시가 점령당했다고 하소연을 할 만큼 궁핍해졌다.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본거지를 정리해야만 했다. 그 시간은 약 7개월.

기사는 부르면 바로 동원할 수 있지만, 마법사는 골방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므로 전쟁에 동원하려면 몇 개월 전에 공고를 보내놔야 뒤탈이 없었다. 후원금을 받는 마탑이나 마법사에게 동원공고를 보내고, 중앙에서 받은 돈으로 식량과 소비재를 확보해 전방에 공급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 이 역할은 펠릭스가 맡게 되었다.


"아직 사람 죽여본 경험은 없지?"

"예."

"능력이 뛰어나서, 과정을 건너뛰었으니까 말이야···."


트렐라드 변경백의 지시로 상급 기사가 여럿 동원되어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살인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해 무감각해지도록 단계적으로 계단을 밟듯 과정이 따로 존재했다.

첫째 날. 펠릭스는 '사람을 해친 해수(害獸)'를 죽였다. 멧돼지였는데, 농가로 달려들어 밭을 파헤치다가 농민이 쫓아내려 하자 달려들어 들이받았다고 설명을 들었다. 농민은 갈비뼈가 으깨져 죽었다고 한다. 상급 기사가 잡은 멧돼지는 성한 꼴이 아니었다. 죽지 못할 정도로만 상처가 꾸며져 있었다. 인대가 끊어져 움직이지 못하고, 다리뼈가 부러져 가만히 서지도 못한다. 그런 멧돼지의 목에 검을 찔러넣었다.

지방과 근육이 튼튼한 멧돼지라 검을 쑤셔넣는 감각이 매우 묵직했다. 오러나 마나 블레이드를 전혀 입히지 않아서 무척 께름칙했다.

둘째 날은 늑대를 생포해 왔다. 멧돼지와는 다르게 상처가 전혀 없었지만, 대신 입가에 피가 그대로 묻어있는 녀석이었다. 마을에 침입해 닭을 훔쳐먹은 녀석이라는 것이다. 목줄을 포함해 쇠사슬로 꽁꽁 묶인 늑대의 목에 검을 쑤셔 넣었다. 멧돼지보다는 쉽게 멱을 딸 수 있었다.

셋째 날. 이번에는 범죄자였다. 수염이 가득하고, 머리는 산발에, 악취가 진동하는 데다가, 덩치가 커다란 인물이었다. 흉악한 범죄자였는데, 맥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눈동자는 풀려 있었고, 침을 질질 흘리며, 오줌을 흘리는 꼴불견이었다.


'저항할 수 없게 마약 비슷한 걸 투여했나 본데.'


인명을 해친 멧돼지를 죽이고, 재물 손괴한 늑대를 죽이고, 저항할 수 없는 흉악한 범죄자를 죽였다. 다음날은 휴식. 아무런 일 없이 평온하게 지나갔다.

그러다가 4일째 몬스터가 나타났다. 멧돼지 때처럼 인대와 뼈를 망가트린 오크.


'이렇게 생겼구만.'


한국 양판소에서 오크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톨킨식 오크, WoW식 오크, JRPG식 오크.

톨킨 스타일의 오크는 몬스터이기는 해도 지능이 있는 개체로 묘사된다. 애초에 톨킨이 오크라는 설정의 원본이거니와 표준형이다.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신체조건과 선천적인 악랄함이 특징이다.

WoW식 오크는 사회를 형성할 정도로 지능이 뛰어나고 신체조건이 사람보다 월등하다. 엄연히 하나의 지성체이자 주류 종족으로 군림하는 스타일이나, 양판소에서 흔한 부류는 아니다.

JRPG식 오크. 말 그대로 '몬스터'로서의 모든 걸 보유한 오크다. 사람보다 가축으로 보이는 돼지 머리에, 근육보다는 지방이 많고, 지성 없이 야만스러우며, 인간과 비슷한 요소에서 탐욕을 부리는 잡몹이다.


'꽤 많이 궁금하긴 했는데.'


실물로 보게 된 오크는 '많이 못생긴 사람'이었다. 돼지처럼 수직으로 선 들창코는 아니지만, 콧구멍이 아래가 앞으로 향하기도 했고, 비를 맞았을 때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위쪽이 뾰족했다. 사람은 콧등만 연골이지만, 오크는 아예 코 전체가 연골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은 있었지만, 심한 M자 탈모 이상으로 이마가 훤해서 마치 변발을 한 것처럼도 보이기도 했다. 피부 색깔은 회녹색보다 좀 밝은 쪽의 짙은 연녹색에 가까웠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국방색으로도 부르는 그 색깔.


"주저하지 마십시오. 이놈은 노상강도처럼 사람을 사냥하고 다닌 몬스터입니다."

"오크는 처음 봐서···."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본다. 근육이나 지방은 두드러지지 않고, 깡 마른 사람처럼 뼈가 앙상했다. 배만 조금 볼록 튀어나왔지만, 흉하다기보다는 안쓰러웠다. 유니세프 홍보 같은 안내책자에서 못 먹고 자란 사람의 모습이 이랬으니까.

겉모습은 판타지 만화에서 보는 몬스터와 달랐다. 인간에게 위협적으로 보이도록 거대한 체구를 강조하는 것과 달리, 이 세계관에서는 몬스터의 모습이 볼품없었다.


'하긴, 근육이나 지방이 쉽게 생기는 건 아니지.'


근육은 헬스에 열중하며 노력한 자들의 결실이고, 지방은 식사에 집중하며 돈을 쏟아부은 자들의 결실이다. 둘 다 돈과 시간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 신체특성인 것이다. 그것이 몬스터 하나하나의 특색이 아니라 종족 전체의 특징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펠릭스는 장검을 들어 간단히 명치에 검을 쑤셔 넣어보았다. 천천히. 오크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움직일 수 없지만, 생존본능이 발버둥을 끝없이 요구했다.


"으음."


생명윤리나 존중 같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 세상 자체가 신에게 창조된 세계라는 걸 아는 펠릭스였으므로, 굳이 이런 식으로 목을 자르는 절차의 필요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 검을 휘둘러보니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생각은 그러할 지언정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지극히 감각적이었다. 검이 피부에 닿고, 그 끝에서 느껴지는 상대방의 박동. 짐승을 도축할 때는 미약했으나, 몬스터를 죽일 땐 같은 박동이라도 다르게 다가왔다.


'나 스스로 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날아다니던 잠자리를 낚아채 두 마리를 서로 싸우게 해본 적이 있었다. 잠자리가 다른 잠자리의 머리를 먹어치우는 장면이 떠올랐다. 수풀에서 방아깨비를 잡고선 뒷다리를 잡아 방아 찧는 모습을 보다가 거미줄에 던져 거미에게 먹히도록 한 적이 있었다. 닭둘기로도 불리던 뚱뚱한 비둘기가 보이자 재빠르게 달려가 발로 뻥 차본 적도 있었다.

이런 일은 모두 10살 미만이었을 때 벌인 기행이었지만, 적어도 그 일들을 후회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오크는 가슴에 칼이 천천히 들어올수록 격하게 발버둥 쳤다.


'이런··· 거군.'


흉악한 범죄자였던 사람을 죽이는 건 머뭇거림이 없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을 죽이는 건 살인이 아니라 처형이다. 둘의 차이점은 명분의 유무.

이번에 오크를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사냥하고 다닌 몬스터, 흉악한 범죄자와 다를 게 없다. 몬스터라는 차이점만 있을 뿐.

몬스터를 먼저 죽이고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바로 알았다.


"몬스터나, 사람이나. 둘 다 똑같네."


오크가 피 거품을 물었다. 붉은색이 아니라 거미나 전갈처럼 파란색 피가 흘러내렸다.


"사람보다는 몬스터가 더 고약하지요."

"말로 하면 듣는 사람과 다르게 몬스터는 결코 안 들으니까요."


상급 기사들이 뒤에서 한 마디씩 거들었다. 사람은 몬스터와 같지 않다고 은근히 강조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펠릭스는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고민했다. 사람이나 몬스터나 같은 생명이다, 라고 말하기에는 이 세상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에 불과했다. 그럼 모든 배역을 죽인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이게 옳은 삶인가?'


툭 던진 화두가 끝없이 맴돌았다. 두 번째 삶을 그저 살기만 하다가 끝내면 그건 과연 제대로 산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펠릭스가 고민하는 내용은 간단하면서 모순된 것이었다. 주위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으나, 주위에 인정받고 싶다는 모순.

답이 없는 문제였다.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해선 자신만의 비전이 필요한 법. 펠릭스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


"······."

"처형을 끝마치셨으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러지."


인상을 팍 쓰고 가만히 서 있는 12살에게 주위 어른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기사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고급 기사와 상급 기사, 하급 기사다.

하급 기사는 오러를 사용할 수 없지만, 영주에게 사작을 받은 준 귀족이다. 이들은 봉급을 받는 직업군인이므로, 군대에서는 부사관 역할을 맡고, 영주의 명령을 시행하는 관료 역할도 일부 수행한다. 귀족이 아니더라도 영주에게 사작을 받아 기사가 되려면 성이나 도시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무력을 가진 자에 한정된다. 들짐승, 도적, 몬스터에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야기.

상급 기사는 마나를 다루는 기사를 의미한다. 오러를 깨우친 기사는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기사 수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고, 일반병을 철저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인간병기다. 당연히 이런 인력은 고급으로 대우받으며, 영지를 가진 귀족 사이에선 영입대상 상위권에 속한다.

고급 기사는 골렘을 조종하는 부류. 기간트 골렘이 아니라 매그넘 골렘을 조종하는 게 일반적이다. 주군과 가신이 기간트 골렘으로 전장에 나서면 매그넘 골렘을 조종하는 고급 기사가 보조하는 식이다.

기사 사이에서도 벽이 있고, 상급 기사들은 기간트 골렘을 조종하는 남작인 펠릭스에게 고개를 들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쪽으로···."


혹여나 본인이 펠릭스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봐 상급 기사들은 고개를 푹 숙이며 저자세로 기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상급자에게 찍히는 건 그 자체로도 죄였다. 주군인 트렐라드 변경백이 막아준다면 모를까, 그 주군이 눈앞의 소년에게 푹 빠졌는데 어떻게 구명 받을 수 있겠는가.

펠릭스는 자신의 앞날을 놓고 고민하는 거였는데, 이들은 심기를 거슬렀을까봐 두려워했다.


'나는 어째서 두 번째 삶을 받았지? 뭐를 위해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펠릭스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2번째 생명을 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세계의 문제로 사망했으므로, 그 세계의 신에게 삶을 받았다. 예정된 삶을 살지 못한 대가로 초월적인 힘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상수이자 전제로서 가만히 놔둬야 하고.


"이 세계에서···, 뭘 하느냐···.'


두근두근한 모험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세계는 야만스럽지 않았다. 묘한 부분에서 현실성을 부여했다. 그러므로 직접 부딪히는 것보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하며 방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막대한 보화를 떠올렸다.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죽을 때가 되면 모두 놓을 물질적 영광에 불과했다. 신의 존재를 몰랐다면 현실에 집중하겠지만, 지금의 펠릭스는 천국이나 지옥이 꽤 크게 와 닿았다. 죽은 뒤에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인가?

들짐승을 죽였을 땐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범죄자를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예 종족이 다른 몬스터를 죽였을 때, 선악(善惡)과 사후세계가 떠올랐다.


"······."


2번째 삶을 산 펠릭스는, 자신이 죽은 다음 어떤 세상으로 가게 될 것인지를 놓고 깊은 상념에 빠졌다. 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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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진흙탕 위 나룻배 (5) 20.06.16 90 2 12쪽
39 진흙탕 위 나룻배 (4) 20.06.01 88 3 11쪽
38 진흙탕 위 나룻배 (3) +1 20.05.30 94 2 11쪽
37 진흙탕 위 나룻배 (2) +1 20.05.28 96 3 12쪽
36 진흙탕 위 나룻배 (1) 20.05.26 101 3 11쪽
35 펙시스 공략전 (6) 20.05.23 101 1 12쪽
34 펙시스 공략전 (5) 20.05.19 101 2 11쪽
33 펙시스 공략전 (4) 20.05.18 106 3 12쪽
32 펙시스 공략전 (3) 20.05.14 110 4 12쪽
31 펙시스 공략전 (2) 20.05.12 107 2 12쪽
30 펙시스 공략전 (1) +1 20.05.11 131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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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정벌 준비 (5) 20.05.04 157 3 11쪽
23 정벌 준비 (4) 20.05.03 164 6 11쪽
22 정벌 준비 (3) +1 20.04.29 182 5 12쪽
» 정벌 준비 (2) +1 20.04.27 190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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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기간트 골렘 (1) 20.04.24 227 6 13쪽
17 서임식 (6) +2 20.04.23 226 7 12쪽
16 서임식 (5) 20.04.22 224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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