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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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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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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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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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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성이 더 중요한 법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미국작가조합(WGA) 총파업이 작가조합과 미국영화방송제작자연합 사이의 협상이 타결되고 작가조합이 협상결과에 대한 찬반투표를 하기로 하면서 사실상 종료되었다. 이번 합의에는 아카데미 시상식 파행은 막자는 양측의 공감대가 자리했다. 또한 그간 한국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미스터 할리우드가 물밑에서 양측을 오가며 협상을 중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1세기 들어서며 할리우드 내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존경받는 원로가 부재한 상황이다. 지호 류의 보이지 않는 수고는 분명 박수 받을 만한 일이다. 할리우드 관계자의 한 관계자는 “처음 불릴 때는 조롱이 담겨있던 미스터 할리우드라는 닉네임이 이제는 지호 류에게 진정한 의미의 칭호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 의견을 반박할 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호 류는 중재자로써 훌륭한 일을 해냈다.]

- LA TIMES.


미국작가조합(WGA)의 총파업이 11월 5일에 시작되어 해를 넘겼다.

2월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였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팔수밖에 없다고.

류지호는 파행을 지켜볼 수만 없었다.

자신이 소유한 영화사들에게도 점점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기에.

파업행위는 반드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한다.

할리우드 작가파업도 마찬가지다.

지난 1988년 파업 때는 50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 파업 역시 장기화될 경우 그 이상의 경제적 타격이 불가피했다.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 자체적으로 추산한 바로는 이미 할리우드가 21억 달러 경제적 손실을 기록하고 있단다.

수많은 작가협회 회원들이 일감이 끊어져서 수입이 없어지기도 했다.

하루하루 힘겨운 가운데 파업을 이어가는 매우 고약한 상황이었다.


“파업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엿 같은 일일수도 있다. 나는 파업 때문에 직업을 잃게 될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팁을 받지 못해 울상일 LA 식당의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 길거리에 진을 치고 가난한 작가들과 배우들의 푼돈에 스타킹을 걷어 올릴 스트리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 거지같은 파업을 하루빨리 끝장내자.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스트리퍼들을 위하여!”


잠행을 깬 류지호가 Daily Variety와 처음으로 인터뷰를 했을 때 농담을 섞어 한 말이었다.

미국으로 날아온 류지호는 가장 먼저 영화 및 텔레비전 제작자 연맹(AMPTP)의 협상안부터 확인했다.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 알아야 협상을 중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미국작가조합(WGA)이 원하는 것도 청취했다.

류지호는 모리스 메타보이 회장과 면담을 한 후로 AMPTP 내에서 발언권이 강한 인사들을 연쇄적으로 만났다.

면담을 거절한 PARKsTV측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미디어그룹 회장들 역시 조용히 만났다.

그들과 큰 틀에서 협상안을 고쳐나갔다.

AMPTP측의 최후 협상안을 가지고 류지호가 미국작가조합 수뇌부들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류지호의 끈질길 설득이 먹혔을까.

일주일 만에 작가조합으로부터 일정부분의 양보를 받아냈다.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는 접어두고, 이번 사태에서 정작 미국인들에게 관심을 끈 것은 바로 파업 그 자체였다.

강성노조인 자동차 노조의 파업이 부각되어서 그렇지 미국은 보기와 달리 노동운동이 활발하지 않은 나라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일시해고(lay-off)를 당하더라도 대부분 군말 없이 물러나는 곳이 미국이다.

그런 나라에서 딱히 노동자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작가들이 파업을 했다.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이 파업에 들어갈 경우에는 당장 시민들이 겪는 불편함 때문에 사측이 압력을 받게 된다.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도 아니고 TV나 영화는 까짓것 안 보면 그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작가조합 측이 파업을 통해 권리를 주장하기에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작가조합이 제대로 힘을 증명했다.

파업 일자도 무려 100일 가까이 지속했고, 결국 골든글로브 시상식까지 취소시키는가 하면, 오스카 시상식 파행까지도 걱정하게 만들었다.

잠정 추정 2조 4천 억 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도록 만들었다.

만약 작가조합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그 여파로 12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배우조합과 1만여 명의 감독조합까지 파업에 동참하게 된다면, 그 손실은 몇 배로 불어나게 된다.

누구도 바라는 결과가 아니다.

류지호는 작가조합 외에도 배우조합과 감독조합 최고위급 인사들과도 비밀리에 만났다.

다음 차례가 그들이기 때문이다.

양측 모두 내심 중재를 반기는 분위기였다.

비록 류지호가 메이저 스튜디오 오너라고 하지만, 그 스스로 작가이자 감독이다.

일방적으로 제작자측을 두둔하지 않을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다.

물론 외국인이란 점이 걸리긴 한다.

그럼에도 글로벌 복합미디어그룹 오너로서의 영향력과 평소 업계에서 약자들 편에 서는 태도를 취한 것으로 봤을 때 일방에 치우치지 않는 중재가 가능할 것이라 봤다.

나이가 젊다는 것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업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평판이 어떤지가 중요할 뿐.

이번 파업을 중재하면서 류지호도 배운 것이 많았다.

중재자 혹은 정치력은 아무나 쉽게 발휘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한편으로 이들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미국의 문화적 제국주의를 염려한다.

할리우드 영화와 팝음악의 전 세계 점유율을 보면 우려할 만도 하다.

또 한편으로 할리우드 사람들의 문화적 자긍심이 무척 부러웠다.


‘한류도 어서 성장해 주길.... 그래서 이 사람들처럼 자긍심이란 것을 느껴보길....’


열흘 만이다.

미국작가조합(WGA)과 AMPTP가 만나서 잠정 합의안이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이다.

그 열흘을 위해 무려 100일 간 강대강 갈등을 벌여왔다.

모리스 메타보이 회장이 물었다.


“핵심 사안은 합의를 본 거지?”

“온라인에서 TV프로그램 편당 스트리밍에 대한 권리로서 대략 1,300달러의 고정 로열티를 해당 작가들에게 지불하는 것에 합의를 봤어요.”


최근 10년 사이에만 TV프로그램의 방송이나 영화의 극장 상영 이후 DVD 대여나 판매 혹은 인터넷 스트리밍 등을 통한 스핀오프 시장이 두 배 이상 성장했다.

작가들은 고정 로열티 방식보다는 이윤창출에 따른 상대적인 로열티 지급 방식을 주장했다.

3년 안에 편당 스트리밍에 대해서 2%의 변동 로열티를 책정하자고 류지호가 타협안을 제안했다.

2010년 이후부터는 온라인 스트리밍 시장의 변동에 따라 다시 협상하자며 양측을 다독였다.


“수고가 많았어. Jay!"


모리스 메타보이 회장이 류지호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거렸다.

남은 것은 양측 실무자들의 몫이다.

협상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 인지 작가조합 내에서 조합원 표결에 붙여야 하는 과정도 남아있고.


“원로들이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명한 원로들이 나서서 중재하는 것이 그림이 좋다.

외국인이며 젊기까지 한 류지호가 나서는 모습은 그다지 환영받을 일은 아니다.

특히 백인 주류들이 보기에.


“우리가 백날 나서봐야 평행선이었을 거야. 봐, 미스터 할리우드가 양측을 오가며 중재하니까 세 달을 끌어온 문제가 단 열흘 만에 합의안이 도출되잖아.”

“휴, 이런 방식은 아니에요.”


모리스 메타보이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무리 할리우드 내부적으로 이해관계가 엉망진창이라지만, 업계 자체 자정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원로로서 참담함을 감출 수가 없는 현실이다.


“원로 제작자들이 스튜디오를 상대로 제대로 발언권도 못 가지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어쩌겠나. 이미 스튜디오와 방송국이 다국적 기업에 넘어가면서 예상되었던 일인 걸.”


과거였다면, 이 정도까지 파업이 길어지지 않았을 터.

곧바로 할리우드의 원로 제작자들이 나서 중재를 했을 것이다.

이젠 그럴 수 없는 환경이다.

미국 미디어 업계와 영화산업의 권력을 UOL, V&Acom 같은 대중문화와 창작의 영역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건강하고 합리적인 문화예술 산업생태계는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이윤 추구와 주주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실적뿐이다.


“그보다, 레오나가 첫 아이를 가졌다면서? 축하하네.”

“고마워요.”


말을 돌리려는 의도임을 알지만, 류지호도 더는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이들에게서 받은 축하였지만, 할리우드 권력자들에게 받는 축하는 조금 더 뿌듯한 것 같았다.


“레오나는?”

“임신 7주라 태아와 임신부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비행기에 태우지 않았어요. 다음 달에 는 집으로 돌아올 것 같네요.”


장모 캐서린이 한국에 들어오고, 제임스 파커도 시간을 내서 여주에 다녀갔다.

파커 가문에는 자손들이 셀 수 없이 많지만, 제임스 파커 부부에게는 첫 손주다.


“아이의 대부는 정했나? 매튜? 아니면 MJ?”

“첫째는 MJ가 대부가 될 것 같아요. Moe도 알다시피 그에게 여전히 좋지 못한 꼬리표가 붙어있으니까요.”

“나도 대부가 되어 줄 수 있네만?”

“그냥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 주세요. 대부는 조금 젊은 사람들에 양보하시고.”


매튜 그레이엄은 자신이 류지호의 첫 아이의 대부가 될 것이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헌데 마이키 잭슨에게 선수를 빼앗기게 생겼다.

그래서 둘째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면서 부부를 괴롭혀 대기 시작했다.

하도 징징거려서 둘째를 낳을 것이라 다짐해 줬다.


✻ ✻ ✻


“웬 한국전쟁?”


류지호로부터 <생명의 항해> 초고를 받아든 앨런 포스터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역시라고 할까.

미국인들은 전쟁영화 하면 2차 세계대전 배경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전쟁영화 잘 쓰는 작가가 누가 있을까?”

“오호라. 이 대본을 고치려고 미스터 할리우드께서 미국으로 급하게 돌아와 열정적으로 작가조합 파업을 종료시킨 것이구나?”

“서두를 생각 없어. 프리프로덕션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써야 할 거야.”

“예산은 얼마나 쓸 거야?”

“최소 1.5억.”

“휘유!”

“모든 장면을 Eye-MAX 카메라로 찍을 생각이고.”


앨런 포스터가 펄쩍 뛰었다.


“뭐라고? 미쳤어!”

“안 미쳤어. Eye-MAX에서 6K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 중이야. 이 프로젝트에서 최초로 6K를 시도해 보려고.”

“4K든 6K이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북미 대부분의 스크린이 2K인데?”

“Eye-MAX 영화라니까.”

“차라리 <스타크래프트> 실사화를 3D Eye-MAX로 찍는 것은 어때?”

“캐머런 감독이 하고 있잖아.”

“<아바타>하고 <스타크래프트>는 소재와 스토리가 완전 다른 영화잖아.”

“그것도 할 거야.”

“언제?”


류지호가 <생명의 항해> 스크립트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찍고 나서.”


약을 올릴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받아들이는 앨런 포스터의 기분을 그리 좋지 않았다.

저절로 어조가 불퉁했다.


“앨튼 로스는 어때?‘

“<포레스트 검프>의 앨튼 어르신?”

“응. 앨튼 로스가 많은 정보, 다량의 조사를 필요로 하는 묵직하고 밀도 있는 프로젝트에 적격이지.”

“지금 뭐 해?”

“뭐하긴. 파업하고 있지.”

“하하. 그렇겠네.”


참고로 앨튼 로스는 UCLA School of Theater, Film and Television 대학원을 나왔다.

학부 선배는 아니지만, 어쨌든 동문이다.


“파업 전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썼어.”

“그랬겠구나. 빠른 시간에 어르신과 만나봐.”

“최근 지적인 영화만 쓰고 있어. 그래도 괜찮겠어?”

“지적인 스크립트를 가지고 내 방식대로 찍으면 돼.”


앨런 포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너와 죽이 잘 맞을지도....”


<인사이더>, <뮌헨>, <굿 셰퍼드> 같은 영화들은 메이저 스튜디오가 잘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앨튼 로스라는 노작가는 장르영화에 정치적인 입장과 문제의식을 잘 드러내는 영화를 집필하고 있다.

관객에게 무언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진짜 영화라는 신념 때문이다.


“<사막의 꽃>은 소피에게 연출을 맡겼어.”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확보했던 소말리아 출신의 슈퍼모델 와리스 디리의 자전적 에세이를 영화화하는 프로젝트의 감독이 정해졌다.


“소피 코폴라?”

“응.”


UCLA 영화과 선배이자 할리우드 거장 프랭크 코폴라 감독의 딸 소피 코폴라는 류지호의 동갑내기 친구다.

배우 니콜라스 코폴라와 사촌지간이기도 하고.

<존 말코비치 되기>의 스파크 존스 감독과 결혼 했다가 지난 2003년 이혼 했다.

류지호의 친구 쿠앤 태런티노와 사귀다 그와도 얼마 전 헤어졌다.

사귀다 헤어졌음에도 친구로 잘만 지내고 있다.

암튼 류지호는 프랭크 코폴라 감독과의 인연으로 딸인 소피와도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배우로 데뷔했을 때는 연기에는 재능이 없음을 분명히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감독을 한 편 하고 나서 연출자로서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계약했어?”

“응. 각색을 자신이 직접 하겠대.”

“좋을 대로.”

“그린 라이트는 Jay가 켤 것이라고 말해 뒀어.”

“말 나온 김에 소피와 와리스와 식사를 하면 좋겠는데.”

“두 사람 다 뉴욕에 머물고 있대.”

“약속 잡아봐.”


두 사람과 저녁약속이 잡히자 류지호와 앨런 포스터가 뉴욕으로 날아갔다.


✻ ✻ ✻


류지호는 뉴욕을 방문한 김에 암 수술을 받고 요양 중인 대니얼 그레이엄을 병문안했다.

매튜 그레이엄과 함께 찾아가 GRAM Resources의 지분을 양도받았다.

그런데.


“할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안 됩니다!”

“시끄럽다!”


병문안 내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매튜 그레이엄까지 류지호를 두둔했다.


“Jay 말 그대로야. 안 하던 짓.... 하면, 죽을 때가 멀지 않았다고 하잖아.... 이건 아니야.”

“이것들이 나를 죽어버리라고 아주 대놓고 욕을 하는 구나!”

“그러게 살아생전에 잘 좀 하시지....”

“누가 죽기라도 했냐? 이놈에 자식아!”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이유가 있다.

대니얼 그레이엄이 난데없이 GRAM Resources 지분 매각대금 전액을 J&L Foundation에 기부하겠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지분 일부를 매각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자체를 가온 인터내셔널에 매각하면서 그 대금까지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남이 설립한 재단에 땡전 한 푼 기부해 본적 없는 대니얼 그레이엄이 말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는 엄청난 금액의 기부를 해왔다.

절세를 위해서다.

진심으로 누굴 돕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본 적이 없는 노인이다.

헌데, 이번에는 자신이 기부한 돈을 어디어디에 사용하라고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일러두었다.

마치 에드워드 버펫이 게이츠 재단에 기부할 때처럼.

류지호와 매튜 그레이엄이 알기로 대니얼 그레이엄은 절대 그럴 성격의 노인이 아니다.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Jay!"

"....예?“

“널 배신할 놈은 딱 두 종류다.”

“......”

“너무 배가 고파서 버틸 수 없는 놈. 그리고 먹어도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는 놈. 전자는 끼니 챙겨주지 못한 네 잘못이고, 후자도 사람 볼 줄 모르는 네 탓이다. 명심해라.”


류지호가 매튜 그레이엄을 돌아봤다.


“......?”


매튜 그레이엄이 검지를 관자놀이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절대 부모 앞에서 할 수 없는 패륜적인 행동이지만.

류지호로서도 대니얼 그레이엄의 정신이 조금 오락가락 하는 것도 같았다.


“GRAM Resources가 캐나다에 알짜 광산을 여러 가지고 있지만, 호주 자원기업 지분도 제법 가지고 있다. 잘 활용하면 도움이 될 거야.”

“감사합니다.”


대니얼 그레이엄에게 치매가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니다.

암수술을 받게 되자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톨스토이가 그랬다.

모든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서로 닮은 데가 많고, 모든 불행한 가족은 모두 제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인해 불행하다고.

외손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에 없이 행복했다.

왜 그런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특히나 예뻐했던 외손녀라서가 아닌 것 같았다.

이상하게 만감이 교차했다고 할까.

자신의 이미지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걸 잘 안다.

가문 밖의 인간들이 떠드는 것은 콧방귀조차 아깝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더 정확하게 후손들이다.

대니얼 그레이엄은 적어도 증손주들에게 만큼은 좋은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었다.

앞으로 사는 날까지 잘해 줘야겠다고 마음도 먹었다.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것을 모르고.


✻ ✻ ✻


류지호가 설날에 맞춰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해야 할 일을 마무리했기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류지호가 어릴 때만 해도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

대신 강화도 외가로 가서 설을 쇠고 왔다.

남매가 장성하고 류지호가 결혼을 하게 되자, 명절 차례를 지내기 시작했다.


“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성이 더 중요한 법이다.”


부친의 성향을 잘 알기에 명절 차례도 전통방식으로 엄격하게 지낼 것으로 예상했다.

의외로 류민상은 깐깐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방도 한문만 고집할 필요가 없다며 나중에 자신이 죽어 한문을 쓸 사람이 없게 되면 한글로 쓰라고 일렀다.


“에이~ 아빠도 참. 큰오빠가 있는데 그럴 리가 있으려고.”

“차례상도 가족들이 먹을 정도만 차리 거라. 차례상 차리는 양식은 옛 책에도 통일된 게 없어. 그러니 상차림을 두고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다. 대도시에서 너무 큰 상에 차례상을 보지 않아도 된다. 굳이 규칙에 구애받지 말고 적절히 갖춰 놓으면 돼.”


이 시기만 해도 인터넷에 검색하면 차례상 차리는 것부터 제사지내는 법을 잘 정리해 놓은 블로그가 많았다.


“새언니, 임신하면 어때?”


레오나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말도 마. 너무 힘들어. 아무것도 못 먹겠어. 이러다 아이보다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


우욱!


입덧이 시작됐다.

7주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입덧을 시작했다.

9주차에 들어서며 피크를 찍고 있다.

일주일 사이에 2Kg의 몸무게가 줄어들 정도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며느리는 심하게 입덧 하는 건 아니야.”


시어머니의 말에 레오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치 곧 지옥문이 열릴 거야라고 예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욱!


레오나가 일어서서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류지호가 그런 레오나를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들.”

“예. 어머니.”

“입덧 끝나면 며늘아기가 이것저것 많이 먹고 싶을 거야. 마음의 준비 해둬.”

“입덧은 언제까지 할까요?”

“난 한 달 보름 정도 했나, 그래. 15, 16주 정도부터 좋아질 걸? 심하면 서너 달도 한다더라.”

“....음.”


심영숙은 임신부의 입덧을 완화하는데 애용되는 생강차를 자주 끓여왔다.

레몬 같은 새콤한 과일, 견과류도 잔뜩 사두었다.

레오나가 제대로 먹질 못해서 냉장고만 차지하고 있다.

미국임신협회에서 추천한다는 비타민제를 사다가 레오나에게 먹였다.

입덧을 하는 중에도 육류와 달걀, 브로콜리를 약간이나마 먹어서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죽과 물만 먹어도 안 죽어. 아들.”

“그거야 없이 살던 시절 이야기고요.”

“엄마는 너희 셋을 낳았어. 그만 출근해서 할 일을 해. 마누라 옆에 찰싹 붙어있지 말고.”


며느리가 입덧으로 식사도 잘 못하고 고생하고 있다.

야박하게 말하는 어머니가 내심 섭섭한 류지호다.

이래서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고 하는 것이리라.


“오빠!”

“왜?”

“이제 오빠도 조심하셔. 태교가 중요하다고 하잖아. 좋은 말한 사용 하고 화도 좀 내지 말고.”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기분이 살짝 나빠지면서 화가 나려고 하는데?”

“태교에 안 좋다니까.”

“까불지 말고. 얼른 동네 한 바퀴 돌고 오자.”

“오케이. 세뱃돈 수거 타임!”


차례를 마치고 남매가 부모님께 세배를 드렸다.

류지호가 사업을 시작한 고등학교 시절부터 세배를 하고 부모님과 외가 어른에게 용돈을 드리는 전통 아닌 전통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식구가 집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바뀌지 않았다.

부모님도 세뱃돈을 주고, 자식도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훈훈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하나 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까지 세뱃돈을 받았다.

부모님께 세배를 드린 후에는 전 WaW 회장 박건호를 시작으로 어른들에게 새해인사를 다녔다.

과거로 돌아와 인연을 맺은 이들이 가운데 노년에 접어든 이들이 많았다.

류지호도 어느새 불혹을 바라보게 됐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이 크게 와 닿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과거로 돌아와서 흘러간 20대의 시간들에 류지호는 후회가 없었다.

실패한 50대 정신머리로 20대를 다시 살아보니 더욱 와 닿는 말이.


‘청춘(靑春).....’


청(靑)은 푸르다, 젊다, 고요하다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춘(春)은 봄과 동녘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20대를 청춘이라고 말한다.

류지호가 보기에 한자의 의미만 놓고 보면 나이보다는 태도나 삶의 자세가 청춘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았다.

춘(春)은 동녘이란 뜻이 있고,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방향이다.

해가 떠오르는 쪽을 바라보며 살면 나이가 많아도 푸르게 사는 사람이 아닐까.

물론 한자 그대로 ‘짙푸른 봄’이라는 뜻은 변하지 않는다.

한 해의 시작은 봄이며 그 봄은 생기가 넘치고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우리네 인생에서 20대를 청춘기(靑春期)라고 칭한다.

예로부터 노인들이 ‘靑春’을 값지게 여기며 젊은이를 아낀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기개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인들이 떠나고 남을 세상이 여전히 푸르고 밝게 빛날 가능성 말이다.


작가의말

평안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월요일에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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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4 빅딜 해볼 생각 없어? (1) +4 24.02.29 1,659 78 22쪽
783 고집쟁이는 아니지만, 지나친 완벽주의자... +9 24.02.28 1,611 79 30쪽
782 돈을 번다는 건 분명 좋다! (2) +2 24.02.27 1,585 82 23쪽
781 돈을 번다는 건 분명 좋다! (1) +3 24.02.26 1,618 83 25쪽
780 이 사업은 무조건 된다! +11 24.02.24 1,699 80 27쪽
779 고마워요. 내게 다시 일할 기회를 줘서. +7 24.02.23 1,681 83 23쪽
778 놀면 뭐해... 일할 수 있을 때 바짝 해야지 (2) +4 24.02.22 1,625 79 23쪽
777 놀면 뭐해... 일할 수 있을 때 바짝 해야지 (1) +2 24.02.21 1,669 74 20쪽
776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6 24.02.20 1,685 74 23쪽
775 내가 오너인 걸 고마워해라... +5 24.02.19 1,669 83 23쪽
774 오빠, 화이팅! (3) +5 24.02.17 1,689 83 23쪽
773 오빠, 화이팅! (2) +6 24.02.16 1,604 84 22쪽
772 오빠, 화이팅! (1) +5 24.02.15 1,674 77 27쪽
771 복댕이! +9 24.02.14 1,681 90 25쪽
770 할 수 있는 건 다해봐야겠지! (3) +7 24.02.13 1,604 88 25쪽
769 할 수 있는 건 다해봐야겠지! (2) +3 24.02.12 1,668 84 27쪽
768 할 수 있는 건 다해봐야겠지! (1) +8 24.02.10 1,683 89 22쪽
767 진작 이런 시나리오 가져오지 그랬어....! +4 24.02.09 1,668 80 26쪽
766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7) +7 24.02.08 1,664 84 29쪽
765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6) +4 24.02.07 1,650 81 25쪽
764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5) +8 24.02.06 1,656 78 26쪽
763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4) +6 24.02.05 1,650 78 25쪽
762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3) +3 24.02.03 1,696 82 24쪽
761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2) +2 24.02.02 1,733 78 25쪽
760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1) +5 24.02.01 1,745 77 24쪽
759 슈퍼스타 납셨어, 아주~ +6 24.01.31 1,772 78 27쪽
758 어차피 돈 벌자고 하는 짓인데. +6 24.01.30 1,804 80 23쪽
757 아무나 대기업 총수로 살아갈 순 없는 법이지. +8 24.01.29 1,737 88 25쪽
756 감독님은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3 24.01.27 1,776 86 25쪽
755 일본이여, 이것이 히어로 영화다! +6 24.01.26 1,748 85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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