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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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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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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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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훌륭하신 분이죠. 김구 선생님은 한국인입니다만... 중국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분께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분의 애국적인 정신은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따질 것 없이 우리가 모두 배우고 우러러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류지호는 의도적으로 시밍핑이 듣고 싶어 하는 단어를 많이 섞어서 썼다.

애국, 민족주의 같은.

시밍핑의 중요한 통치철학이기에.


“나는 저장성 서기이던 시절, 항저우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인민위원회 위원들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김구 선생 피난처에 한국인들이 매해 2,000명 정도 찾아왔다고 들었지요. 이곳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이 2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중국 인민에게도 애국을 배우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상하이시는 모르겠지만,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는 저장성 청부가 ‘성급 문화재’로 지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공무원이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맞습니다. 미스터 류.”

“상하이시도 이곳을 지역 문물보호시설로 지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청사 복원과 유지, 보수에 들어간 예산을 제가 지원할 수 있습니다.”


중국 내의 한국 관련 유적들은 모두 중국 관할이다.

한국 정부, 특히 보훈처에서 직접 관리할 수가 없다.

중국 당국에서 임시정부 같은 유적을 관리하다보니 한국의 대통령이나 고위 관료가 방문하면 그들 사진으로 유적지가 도배가 된다.

독립운동가분들의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붙여놔도 모자랄 판에.

중국 공무원들이 한국 고위인사와 중국 관리들의 사진을 덕지덕지 붙여 자랑을 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사적 의의를 살려 보존·유지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근현대사의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장소를 관광지화 시켜서 훼손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사실 신천지 개발 때 임정 청사 용지도 밀릴 뻔 했지요. 현재는 이 건물만 원형보존 조치가 취해져 있습니다. 이 또한 부주석께서 상하이 당서기로 계실 때 취하신 조치입니다. 덕분에 문물보호 단위로 지정되어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거지요.”


류지호에게 귀띔해주는 척 했지만, 시밍핑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이곳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들의 고귀한 희생과 애국심을 배우는 역사 교육의 장소로, 동시에 한·중 공동 항일투쟁의 우호의 장소로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류지호의 당부를 시밍핑이 받았다.


“후대가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을 잊지 않도록 우리 세대가 좀 더 노력해야 해야겠지요.”


국내 유적도 제대로 못 살피는 주제에 해외 유적까지 보살피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보훈(報勳)은 정부의 매우 중요한 업무 중에 하나다.

진보정부는 보훈 대상을 늘리려 하고, 보수정부는 대상을 줄이려고 한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유공자만 챙기는 것이 능사가 아닐 텐데.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기준이 다르다면 과연 누가 조국을 위해 희생하려고 할까.’


임시정부 건물을 둘러보는데 20분이면 족했다.

대신 사전행사가 쓸데없이 길었다.

어쩔 수 없다.

정치인이 낀 행사이기에.


“시청사로 자리를 옮기시죠.”


상하이 시청사로 이동한 류지호와 시밍핑은 대중 투자와 상호협력 방안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시밍핑이 베이징으로 돌아간 후 류지호는 임시정부 가이드를 했던 구지관리처 공무원을 따로 불렀다.


“보경리 다른 건물의 토지사용권을 살 수는 없습니까?”

“...어떤?”

“임시정부청사 1호부터 5호까지 전부.”

“안 될 겁니다.”

“외국인에게는 토지사용권을 팔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사는 대부분이 노인입니다. 정부가 20평 대 아파트 서너 채를 준다고 해도 그곳에서 절대 안 나갑니다.”

“....?”

“나중에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는 거죠.”


임시정부 청사 주변이 재개발로 인해 말 그대로 신천지로 변모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집값이 오를 텐데, 지금 당장 팔려는 집 주인이 있을 리가 없다.


“그 지역 평당 시세를 알 수 있겠습니까?”

“30만 위안은 넘을 겁니다.”


한화로 5,000만 원이 넘는다.

보경리 4호 임시정부 골목의 건물 모두를 사들이기 위해서는 수백억이 필요하단 소리다.


‘압구정 아파트도 아니고.... 무슨 평당 5천씩이나 해?’


류지호는 얼토당토않은 땅값에 질려버렸다.

따라서 오지랖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국내라면 무조건 사서 기부체납을 했겠지만....’


교포사회를 대표하는 이들과 상하이 시당국 고위 관리들을 위해 연 파티장에서 류지호가 총영사에게 물었다.


“상하이 시당국이 현대화 사업으로 구도시를 개발하면서 툭하면 임정이 있는 동네가 철거될 위기에 처한다고 합니다. 혹시 대책은 있습니까?”

“시밍핑 부주석이 작년 원형보존을 약속했는데, 막무가내로 철거야 하겠습니까?”


류지호의 등 뒤에서 시니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국을 어떻게 믿어요? 지들 편할 대로 손바닥 뒤집듯 수시로 정책을 바꾸는 사람들인데.”


류지호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부룩한 헤어스타일에 뿔테 안경, 빌려 입은 듯 몸에 맞지 않는 양복 등.

파티장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한 40대 남자가 류지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시사직격의 저널리스트 한승진입니다. 감독님.”


류지호가 한승진과 악수를 나누며 물었다.


“혹시 최근에 여행기 쓰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을 헤집고 다니긴 했습니다.”

“맞죠? 임정과 광복군 유적 취재하는 기자....”

“2005년부터 중국 각지에 산재한 임정과 광복군 유적을 찾아다니고 있긴 합니다.”

“곧 임정 수립 90주년이 되지요. 의미 있는 취재를 하고 있으시군요.”

“회사에서 취재비를 거지같이 책정해서 무전여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8개 도시를 한 번에 돌아보는 겁니까?”

“아닙니다. 중국에 올 때마다 한 도시씩 취재하고 있습니다. 원래 귀국했어야 했는데... 감독님이 상하이 임정을 방문한다고 해서... 이렇게 파티까지 초대되어 감독님과 말까지 섞는 영광을 맞이했지 뭡니까.”


빈정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한승진 기자에게서 어떤 간절함이 느껴졌다.


“한국에 잘 좀 알려주세요. 많은 국민들이 임시정부가 상해 말고 여러 군데로 나눠져 있다는 걸 잘 모를 겁니다.”

“혹시.... 말입니다.”

“....?”

“충칭에서 토지 사용권을 매입할 의향은 없으십니까?”

“......?”

“이왕에 독립운동 역사를 보존하고 싶으시면.....”

“충칭 임시정부 터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거기... 후우. 임정 청사와 광복군 총사령부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재개발한답니까?”

“사실 광복군 청사는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원형 보존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건물을 보존한다고 하더라도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필요하죠.”

“역사적 유적지를 리모델링해요?”

“보존과 유지를 위한 작업이 필요하단 말씀입니다.”


문화재는 보존에도 돈이 필요하다.


“근데 청사가 위치한 곳이 하필 충칭 한복판의 중심가입니다. 충칭시 정부로부터 광복군 청사 부지의 토지 사용권을 매입하려면 적어도 수백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죠.”

“한국 정부는 뭘 하고요?”

“중국 당국은 한국 정부가 토지를 매입하는 걸 허용하지 않습니다. 독지가가 나서 엄청난 자금을 선뜻 내놓기를 기대할 수도 없죠. 한국의 재벌들이요? 기대할 사람에게 해야지....”

“......”

“좋은 재벌, 기부 많이 하는 참재벌 아니십니까? 감독님은.”


참재벌이란 표현은 듣기에 따라서 조롱일 수도 있다.


“3,200억 짜리 공군 레이더 교체사업까지 홀로 책임지겠다는 분께서 몇 백억 가지고 쩨쩨하게 굴진 않으시겠죠.”

“내가 토지매입을 했다고 칩시다. 리모델링비는? 유지비는?”

“그 정도는 한국 정부가 책임지지 않겠습니까?”

“한 기자.... 한국 사람들에게 내가 호구로 비춰집니까? 아니면 한 기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

“기부는 부자의 의무가 아닙니다. 누구도 기부를 강요할 수 없어요. 내가 기부를 많이 하니까 뭐든 말만 하면 다 해줄 거처럼 보이나 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광복군 사령부 청사 아닙니까.”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대한민국 대표입니까? 차라리 한 기자가 잡지에 좋은 기사를 많이 쓰고 그걸 통해 국민들이 모금을 하도록 하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건방지게 내게 기부하라 마라 충고질 하기 전에....”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류지호가 손을 들어 한승진의 입을 막았다.

총영사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이들이 살벌한 눈 레이저를 한승진에게 쏘아댔다.

꺼지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한승진이 사과의 의미를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떠나갔다.


‘피곤하구만....’


부자는 무조건 기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부는 부자의 의무가 아니다.

의무적으로 부자가 자신의 부를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면, 그것은 기부가 아니다.

세금이다.

류지호의 기부가 부자로서 당연한 것이란다.

때문에 칭찬하고 떠받들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기부를 하지 말고 그 돈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사람까지 있다.

국가는 세금을 거둬 공공을 위해 그 돈을 쓴다.

개인의 기부는 국민의 세금과 쓰임새가 다르다.

선행은 선행으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강요해서 하는 선행은 연속성을 저해하게 되기에.


‘기부 안 해. 그냥 세금을 좀 더 내고 말지....!’


간혹 드는 생각이었다.

미국에서는 슈퍼리치의 기부와 세금에 대한 논쟁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기부를 하지 말고 세금을 내라는 측.

세금과 개인이 선의로 하는 기부는 전혀 다르다는 측.

두 측면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물론 선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부자들이 가족 재단을 통한 기부로 세금혜택은 혜택대로 받고, 때로 상속까지 해결하기도 하니까.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류지호가 총영사에게 물었다.


“내년에 시밍핑 부주석이 방한할 예정이라죠?”

“.....”


상하이 총영사는 자신도 모른다는 투로 입을 꾹 다물었다.

공식화되지 않은 양국의 외교상 정보를 발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울 즈음 방문한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시밍핑 부주석이 방한하면 국가정상급 경호와 그에 준하는 의전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겁니다. 시 부주석이 최대한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대접해 주라고 한국정부에 알려주세요.”

“....!”


시밍핑은 이제 막 국가부주석에 임명되었을 뿐.

차기 최고지도자 자리를 노리는 후보군 중에서 딱히 눈에 띠는 인물은 아니다.


“만약 이런 보고서가 베이징이 아닌 상하이에서 외교부에 전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총영사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시밍핑 부주석이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일본을 먼저 들르게 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총영사가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류지호의 말을 인정했다.


“일본 정부가 국가주석도 아닌 부주석의 경호 수준을 국가 원수급으로 해줄 리가 없잖습니까? 아마 시밍핑 부주석의 의전팀에서 경호나 의전 격상을 요구해도 일본에서는 거부할 겁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었다.

이전 삶에서 시밍핑 부주석 측이 일본에 국가원수급 경호와 의전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흘러들어갔다.

시밍핑의 방일 기간 내내 ‘돌아가라’ ‘지옥으로 꺼져’ 등의 구호를 외치는 반중국 시위대로 인해 체면을 구겼다.

그런 후에 한국을 방한했는데, 시밍핑은 한국에서 극진하게 대접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밍핑이 권력을 잡은 이후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비록 사드배치를 핑계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외교노선이 변경됐지만.

암튼 상하이 총영사가 그 같은 일들을 예상해 한국 정부에 미리부터 보고서를 보낸다면.


‘출세에 보탬이 되겠지.’


여담으로 상하이 총영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시밍핑의 방한 한달 전 류지호가 귀띔해 준 내용을 청와대에 보고하게 된다.

실제로 상하이 총영사의 보고서는 그대로 적중한다.

몇 년 후, 상하이 총영사는 워싱턴DC 미국 대사로 임명 된다.

류지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는 열혈 지지자가 된다.

또한 류지호와 시밍핑의 가이드를 했던 시공무원은 가온그룹의 후원으로 한국으로 유학을 오게 된다.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머물며 한국 역사와 문화를 배운다.

김구 선생에 대한 연구 논문까지 발표한다.

10여 년이 흘러 중국 내에서 대표적인 지한파 역사학자가 된다.

시사직격저널의 한승진 기자가 말한 충칭의 광복군 사령부 건물도 좋은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먼저 GH 오락집단유한공사의 본토 파트너 다롄상예(大连商業)그룹이 류지호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충칭의 광복군 사령부 일대 토지 사용권을 매입한다.

다롄상예그룹은 지역을 개발해 백화점을 만들고, GH 오락집단유한공사는 멀티플렉스를 입점시킨다.

그를 통해 쓰촨성의 대표적인 메가플렉스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류지호와 관련한 재단들이 힘을 모아서 이미 철거된 광복군 청사를 충칭의 오사야향 지역에 복원하게 된다.

또한 충칭시 차원에서 광복군 사령부 청사 부지에 한국풍속거리를 조성하게 된다.

이 사업에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광복군동지회, 역사학자, 건축전문가 등 다수가 참여하게 된다.

또한 충칭의 임시정부 유적 역시 기존 영화지 청사의 증축·보수 과정을 거쳐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구지(舊地)’라는 명칭으로 재개관하게 된다.

당연히 머릿돌에는 류지호의 이름이 새겨지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파악한 중국에서 복원해야할 독립운동 유적은 무려 409곳에 달한다.

남의 땅에서 독립운동 유적을 복원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특히 중국 당국과 협상을 진행하는 데는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정부에 체계적인 유적 복원 프로세스가 마련되어 있는지 의문이지만, 류지호는 다울재단에 독립운동 관련 보존사업을 새롭게 구성해서 류아라를 총책임자로 앉히게 된다.

이 시기 독립기념관 이사 가운데 한 명은 도시락 폭탄 의거로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손녀다.

몇 년 후 독립기념관장까지 지낸다.


“지난 참여정부에서 친일파들의 재산을 환수해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뭘 해주는 게 치욕스러웠다. 독립운동가 지원은 국가예산으로 해줘야하는 것이지 그들(친일파 후손)도 부당하다고 하는 재산환수를 통해서 도와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이전 삶에서 사회 지도층 인사로 성장한 독립운동가 손녀가 한 말이었다.

특정한 전직 대통령을 옹호하기 위해 한 말치고는 독립운동가 자손으로서 역사관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었다.

류지호는 독립운동가 후손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진보적 정치지형에 서야한다고 보지 않았다.

어쩌면 보수주의자가 더 어울릴 수도 있기에.

왜냐하면 보수주의에 민족주의도 포함하니까.

다만 항일 독립투쟁의 상징인 윤봉길 의사의 직계 후예가 일본군 장교 출신 대통령의 딸을 지근에서 돕는 현실을 보는 것이 가히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후,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불법적으로 강탈해 독재를 행한 아버지의 권력의 큰 수혜를 입은 자녀이며 그 아버지의 가치관을 그대로 계승한 대통령 후보를 독립운동가 후손이 성심을 다해 도왔다는 것을 과연 역사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수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기득권 근처는커녕 하루살기도 힘겨웠을 텐데...’


윤봉길 의사의 후손이라서, 다른 독립유공자들과 달리 엘리트코스를 밟아가며, 감투도 쓰고, 수구 기득권 세력의 일원이 되어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이.

과연 그들의 선조들이 바랐던 모습이었을까.

누군가는 류지호에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똑같이 비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너도 기득권 아니냐. 내로남불이다.’


여담으로 2012년 대통령 선거 정국.

전 독립기념관장과 다울재단 국제협력본부장 류아라가 뜬금없이 비교가 된다.

마치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BS와 올리온 그룹 두 여걸 자녀들이 맞수로서 비교되는 것처럼.

독립운동가의 후손과 세계적인 슈퍼리치의 여동생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가 극명하게 갈리게 된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삶의 궤적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친일행적이 있는 부친의 자녀를 돕는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세계적인 슈퍼리치의 여동생으로 국내외 독립운동 역사 유적을 복원하고 돌보는 일에 삶을 바친 청년 여성으로.

매스컴에서 두 사람을 적나라하게 비교하게 된다.

누구의 행보가 정답이라고 쉽게 단정할 순 없다.

두 사람 모두 자신만의 신념에 충실한 것일 뿐.


“......”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보경리 앞을 지나쳐가며 류지호는 총선이 한창인 한국을 떠올렸다.

독립유공자 후손이라고 해서 굳이 정치와 멀어져야 할 이유는 없다.

총선 때마다 정치권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을 비례대표로 공천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고.

앞으로 계속 그럴 것이다.

왜 독립유공자 후손 중에서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자신과 가족의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대의명분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걸출한 보수주의자가 출현하지 않을까.


-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레밍 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


서울의 봄이 실패하고 사실상 신군부의 수괴가 집권할 수 있게 되자, 당시 한미연합군사령관이 했던 말이었다.

류지호로서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말이지만, 그 속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했다.


❉ ❉ ❉


언제 중국에 다시 올지 알 수 없기에 류지호는 많은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중간에 영화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에도 다녀오고, GH 오락집단유한공사와 합작 문제 때문에 홍콩에도 잠시 다녀와야 했다.

바쁘게 돌아다닌 끝에 상하이에서 마지막 일정만 남겨 두게 됐다.

회장의 초청으로 SE전매집단유한공사(SEMG)를 방문했다.

SEMG는 지상파 방송국은 물론이고, 영화 및 애니메이션, 광고 스튜디오, 소프트웨어 회사, 공연과 전시회 회사에 호텔과 부동산 회사까지 거느린 중국 최대 복합미디어그룹 중에 하나다.

SE전매집단유한공사(SEMG)를 방문한 김에 영화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최고경영자를 만나 양국의 영화계 교류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저희 촬영단지를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그들로써는 자랑하려고 보여준 걸 테지만, 류지호에게 어떤 감흥도 주진 못했다.

Playa Vista의 Tri-Stellar Studios까지 갈 것도 없다.

여주에 조성한 WaW종합촬영소와 비교해도 모자랐기에.

다만.


‘상해영시낙원은 조금 부럽긴 하네...’


상해영시낙원(上海影视乐园)은 1930년대 상하이를 재현해 놓은 대규모 야외촬영 세트장이다.

1998년에 문을 열었는데, 시민들의 유원지이자, 드라마·영화 세트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개장 초창기 이곳에서 WaW의 영화를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박은상 감독의 <풍운아>가 한국영화 최초로 한중합작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대부분의 옥외 세트 분량을 이곳 상해영시낙원에서 촬영했다.


“3부까지 제작되지 않았습니까?”

“90년대 WaW의 양대 프랜차이즈 시리즈였지요.”


시라소니의 활약상을 그린 <풍운아>는 <퇴마기록>과 함께 WaW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다.

참고로 몇 년을 묵혀 두었던 <퇴마기록>이 새로운 시리즈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

새로운 감독과 배우들로 진용을 꾸려 ‘세계편’이 제작될 예정이다.

무려 한중일 합작 프로젝트다.

실상은 가온그룹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것이지만.

즉 한국은 WaW 엔터테인먼트가, 중국(홍콩)은 GH 오락집단유한공사가, 일본은 씨네-콰논이 참여할 예정이다.

역시 중국 개봉은 포기했다.

현대물에서 귀신이 등장하고 미신적 요소가 포함되면, 중국에서는 절대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기에.

암튼 SEMG는 가온그룹보다는 작은 회사지만, WaW 엔터테인먼트와 비교할 수 없이 큰 회사다.

5개의 영화 제작사, 14개 TV드라마 프로덕션을 산하에 두고 있고, 영화전문 TV채널을 따로 가지고 있으며, 양자강 이남 지역에서 75개 극장 200여 개 스크린의 멀티플렉스까지 소유하고 있다.

이 시기 중국 최대 멀티플렉스 사업자가 SEMG 산하의 브랜드다.


“잠시 촬영을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됩니까?”

“오늘만 이곳에서 영화·TV·CF 6개가 촬영 중입니다.”


할리우드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류지호가 볼 때 남의 촬영장에 방문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그런데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권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촬영 중인 현장에 손님들이 찾아온다.


“......?”


촬영장에 있는 그 누구도 류지호 일행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당간부로 오해했다.

그래서 그러려니 했는데, 얼마 안가 감독과 제작부장이 하던 촬영을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촬영장을 얼씬거리고 있는 무리가 류지호와 SEMG 사장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연배우들까지 뛰어 와서 류지호 일행에게 인사를 했다.

해외에까지 알려진 유명 배우는 아닌 듯싶었다.

어쨌든 민폐다.

아무도 그런 것을 따지는 사람이 없어 보였지만.

심지어 디렉터스 체어까지 급하게 가지고 와서 앉으라고 법석을 떨어댔다.


“谢谢.”


류지호는 남의 촬영장에 방문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상해영시낙원에서 촬영 중인 6개 팀 모두에게 간식과 음료를 돌렸다.

이 또한 할리우드와 유럽 영화권에는 없는 문화다.

중국이라고 있을 리가 없다.

누군가의 촬영장에 먹을 것을 싸가지고 가는 것은 오로지 한국 영화계에만 있는 문화다.

오죽하면 팬들이고 동료고 친한 이들이 촬영장에 간식이나 음료 케이터링 서비스를 보내주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될까.

웃긴 것은 한류스타들의 중국과 일본 진출이 더욱 활발해지면, 이런 간식 쏘는 문화까지도 전파된다는 사실이다.

상해영시낙원의 메인 거리로 이동한 류지호가 사라 켄슬러에게 빈손을 내밀었다.


"파인더 줘봐요."


류지호는 사라 켄슬러가 건네준 디렉터스 파인더(Director's finder)를 통해 1930년대 상하이를 재현한 거리 세트 곳곳의 뷰(view)를 확인했다.

딱히 중국 배경의 영화를 찍을 계획은 없다.

혹시나 상하이 배경 영화 기획할 순 있기에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감을 잡아보는 것이다.

시대 소품들을 모아둔 곳도 확인했다.

당시에 운행했던 차량들과 전차 및 인력거 등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음.“


다솜미디어는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이해 특집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

워킹타이틀은 <임시정부>다.

24부작으로 기획되고 있는데, 주요 옥외 촬영지는 부천야인시대세트, 여주 WaW종합촬영소, 합천 세트장이다.


“스펙터클한 영상은 여기 와서 찍어도 좋을 것 같긴 한데....”


제작비가 문제다.

<풍운아>와 <야인시대>가 대중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질 2010년대 중반을 대비해 판권 하나를 확보해 둔 상황이다.

만화 <감격시대>다.

WaW 엔터테인먼트는 류지호의 영향으로 할리우드 방식을 많이 벤치마킹했다.

그 중에 하나가 표절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혹시나 표절 의혹이 불거질 수 있는 작품의 판권을 무조건 확보해 둔다.

소송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해당 영화의 권리를 사버리는 것이다.

충무로에서는 표절 논란을 일으켜 노이즈마케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류지호는 그런 마케팅은 좋아하지 않는다.


“중국시장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기세입니다. 미스터 할리우드.”


상해영시낙원에서 볼 수 없을 법한 훤칠한 인상의 백인남자가 말을 걸었다.


작가의말

어느새 설 연휴가 찾아왔습니다.

한국축구국가대표팀이 설 명절 선물을 고국에 전해주길 기대해 봅니다.
활기찬 한 주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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