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새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05 09:05
연재수 :
901 회
조회수 :
3,838,263
추천수 :
118,862
글자수 :
9,980,317

작성
22.11.12 09:05
조회
4,143
추천
134
글자
26쪽

Big Shot.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도대체 왜?”


류지호는 대답 대신 삼겹살을 뒤집었다.


“넌 농사에 농사도 모르잖아.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고.”

“외할아버지와 첫째 외삼촌이 농부야.”

“20억 달러가 큰돈이라고 해서 초콜릿 사먹듯이 해선 안 돼.”

“종자라는 게 D-Cinema로 치면 DLP 같은 원천기술이잖아.”


그제야 잔뜩 구겨졌던 매튜 그레이엄의 미간이 펴졌다.

그것도 잠시.


“한국인의 먹거리 원천기술을 외국기업에게 빼앗긴다는 게 자존심 상해.”


이번에는 도널드 제이콥의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또 다시 빅보스가 감정의 휘둘리는 의사결정을 하는 것 같았기에.


“그게 파커라고 할지라도.”

“진즉 그 말부터 했어야지.”


매튜 그레이엄이 실실거리며 브랫 파커를 쳐다봤다.

어떻게 하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감정에 휘둘리는 면도 있지만, 거대한 상대에 쫄지 않은 모습이 기꺼웠다.

브랫 파커는 기분이 상한 얼굴이 아니다.


“21%라.....”

“브랫이 싫다고 해도 난 반드시 관철시킬 거야. 아니 내가 인수하거나 투자할 거야.”


브랫 파커가 흔쾌히 동의했다.


“좋아.”


너무 순순히 동의를 했다.

류지호가 당황할 정도로.


“나는 호농과 중양 두 곳 모두를 인수하면 그만이야. 즉 경쟁기업에게 빼앗기지만 않으면 된다는 의미이지.”


류지호는 경쟁자가 아니란 의미다.

사실 파커 필드의 종자연구소에서는 호농과 중양이 가진 한국 작물의 유전자 정보와 기타 관련 정보를 얻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류지호와 함께 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각각 21%! 가온이 갖는 걸로.”

“그 만한 자금이 가온에 있어? 영화 사업에 투자하는 것도 빡빡할 텐데?”

“그 부분은 브랫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어떻게 할 거야? 21%!”

“넌 뭘 줄 수 있지?”

“뭘 원해?”


도널드 제이콥이 자르고 들어왔다.


“잠깐! 보스!”


그로서는 빅보스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호텔로 돌아가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브랫 파커는 계속해서 류지호를 도발했다.


“멀티플렉스 지분 10%를 팔아.”

“3%.”

“헛소리! 8%까지 양보하지.”

“헛소리는 누가 하는데? 한국과 아시아 종자시장이 10억 달러라도 된대? 전화 한 통화면 알 수 있는 걸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7%.”

“파커는 파커대로 그 두 종묘회사와 협상해. 나는 나대로 할 테니까.”


매튜 그레이엄이 짐짓 점잖게 두 사람을 타일렀다.


“애송이들아! 술 맛 떨어진다. 이제 그만 좀 해라.”


두 사람의 일차 협상은 끝이 났다.

언제 팽팽한 기싸움을 벌였냐는 듯 다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매튜와 브랫이 객실로 올라가자 류지호는 곧바로 전략기획실 문지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농과 중양에 대해 알아볼 것을 지시했다.

또한 인수합병을 준비하라고 전달했다.


“진심이셨군요?”


도널드 제이콥이 우려를 표했다.


“종묘회사를 통째로 인수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의 기존 사장과 임원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만큼의 지분만 확보해 보려구요.”

“미국과 한국 양쪽 사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야입니다.”

“알아요. 그런데 Don..... 내가 이런 일을 알고도 외면하게 되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네요.”

“솔직히 보스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렇죠 뭐.”


류지호 스스로도 오지랖이라는 걸 알고 있다.

돈도 털리고, 땅도 털리고, 건물도 털리고.

거기에 씨앗까지 외국기업에게 털리는 현실.

이 땅의 기후와 토양에 맞게 꾸준히 개량되고 있는 종자까지 외국기업에 넘어가는 것이 왠지 더 큰 치욕처럼 느껴졌다.

류지호는 일제강점기를 살아보지 않았다.

선조들이 느꼈을 감정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마치 우리 땅의 곡식을 일제에게 수탈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분 참여를 하게 된다면 한국인들에게 경영권을 몰아주실 생각입니까?”

“가능하면 파커에 인수된 이후에도 기존 회사명을 쓰고, 경영도 한국사장이 전담하게 해야죠. 구조조정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보스가 한국 경제를 구원할 순 없습니다.”

“당연하죠. 다른 건 몰라도 먹을거리 부분은 나로서도 모른 척 할 수가 없네요. 내 부모와 형제와 자손들이 먹을 텐데.”


류지호가 눈치 채지 못하게 도널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다가도 모를 보스다.

매사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현명하고 매우 신중하게 움직이다가도 오늘 같은 경우처럼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곤 한다.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처럼 이타적인 것도 아닌데, 남 도우는 것에 돈을 아끼지도 않고.

탐욕스럽지 않은 점은 존경받을 만하다.

중요한 것은 이제껏 자신의 보스는 절대 무모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두 회사를 인수·합병한다고 치면 최대 2억 달러. 각각 21% 지분에 대략 5천만 달러.... 결코 작지 않습니다.”

“내 개인자금으로도 감당한 수준 아니었어요?”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 자금으로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이.”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오간 멀티플렉스의 지분으로 퉁쳐도 되고.”


참고로 중양종자는 1955년에 설립된 이래 육종연구소에서 개발한 품종은 무 53품종, 배추 47품종, 고추 45품종, 수박 23품종, 멜론이 18품종 등이 있다.

양파, 당근, 시금치, 호박, 가지 등 지금까지 선보인 군소 품종까지 포함하면 357품종이나 된다.

업계 1위인 호농은 말할 것이 없다.

종자주권을 떠나서 꽤 알짜배기 농업기업이다.

이런 회사가 IMF 한파로 인해 외국기업에게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

파커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면 알지도 관심도 없었을 현실이다.

글로벌 농업 기업의 중역인 브랫 파커와 상대할 정도의 거물이 되지 않았다면, 담판은커녕 말도 꺼내지 못했을 터.


“내일부터 영화제 시작이네요.”

“디지털 상영의 모든 테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상영에는 아무런 문제없다고 자신 하니, 마음 편히 축제를 즐기십시오.”


류지호가 짐짓 투정을 부렸다.


“즐기고 싶어도 가만 둬야 말이죠.”


영화제 행사, 관객과의 만남, 공식 인터뷰를 포함해 각종 매체 인터뷰, 파티 참석, 세미나 등.

영화제 기간 내내 스케줄이 빡빡했다.

한국을 처음 찾은 세계적인 거장보다 저예산 영화를 가지고 온 류지호가 더 바빴다.


“오랜만에 한국의 공식석상에 나온 거니까... 감수해야하겠죠.”

“이제 호텔로 돌아가시죠.”

“도널드도 쉬어요.”


여기저기서 선배들의 술자리 초대가 이어졌다.

모두 거절했다.

지난 1회 때처럼 자유롭게 길거리를 돌아다니기 힘들다.

집행위원회는 올해 영화제를 찾을 영화팬이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류지호가 아무리 변장을 잘한다고 해도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에 류지호를 알아볼 사람이 지뢰밭처럼 곳곳에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본부 호텔로 돌아온 류지호는 샤워를 하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 ❉ ✻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반환 직전의 홍콩은 화산폭발 직전의 폼페이와도 같다.]

[홍콩은 정직한 창녀다. 이제 뚜쟁이만 바뀐 셈이다.]

[홍콩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은 중국이란 거대한 바다에 던져진 한 알의 소금에 불과하다.]


도발적인 대사다.

그런데 이 같은 대사들을 통해 서양인들이 중국에 반환되는 홍콩에 대해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를 담아낸 영화가 개막작 <차이니즈 박스>다.

어쨌든 올 6월 30일 자정을 기해 세계 8위의 무역국가인 홍콩이 중국에 반환됐다.

고도의 자본주의에 익숙한 600여만 명의 운명이 사회주의라는 상이한 토양에서 다시 시작되게 된 셈이다.

류지호는 홍콩의 운명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사회체제를 선택했다고 굳고 믿는다.


‘어쩌면 누군가 선택한 체제를 순응적으로 따르고 있을지도.....’


홍콩시민들 모두가 중국으로 편입되는 것을 환영하진 않으니까.

암튼 개막작 상영을 시작으로 33개국에서 초청된 163편이 남포동 극장가와 해운대에서 나눠 상영되었다.

1회 때보다 회고전 프로그램이 강화됐다.

시상 부문과 운영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회고전은 김기영 감독 회고전, 아시아 발생기영화 특별전, 홍콩영화 특별전으로 나뉘어 상영될 예정이다.

이번 영화제의 최대 이슈는 '부산 프로모션 플랜(PPP)'을 출범, 3회 때부터는 시작될 필름마켓의 예비단계, 디지털 영화상영 등이다.

일반 시민들에게 D-Cinema가 무슨 대수냐 싶겠지만,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큰 이슈거리였다.

<Escape>는 개막작이 상영된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상영장에서 3일에 걸쳐 상영될 예정이다.

영화제 시작 전 이미 전석이 매진된데 이어서 급하게 상영장소가 변경되었음에도 열기가 뜨거웠다.

D-Cinema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류지호의 영화라서 인지는 모른다.

영화팬과 내외신 기자들까지 상영을 늘려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따라서 급하게 2회를 늘렸다.

자정을 넘긴 새벽 상영이다.

그럼에도 거의 전석이 매진됐다.

관객과의 대화에는 국내외 감독들도 많이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열혈 비평가와 류지호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카메라 따위는 수단일 뿐이며 시나리오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감독입장에서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그런데 왜 감독님은 디지털 영화에 집착하는 겁니까?”


류지호는 시비를 거는 비평가를 잘 알고 있다.

골수 작가주의영화 신봉자다.

펜보다 혀가 더 걸작이라고까지 불리는 독설로 유명한 영화비평가다.

알맹이 없는 요설에 불과하다는 것이 문제지만.


“디지털 비디오라는 저렴한 포맷의 탄생으로 궁핍한 재정의 독립영화인들도 이젠 손쉽게 극영화를 제작해 내고 있지요. 일반 영화 마니아들도 원한다면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세상도 멀지 않았습니다.”

“기술이 최고는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런데 뉴욕에서는 100만원도 안 되는 제작비로 100분 길이의 영화를 속속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제 곧 영화제작이 많은 자본과 고급 테크놀로지를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신비한 것이 아니고 열정과 능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민주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홈비디오 수준을 넘지 못한 것을 과연 영화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것’이란 표현에 류지호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은요?”


불어 발음이 썩 좋진 않지만 류지호는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비평가를 향해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으로 선보인 <라 시오타 역에서의 열차의 도착>이 영화가 맞느냐고 되물었다.


“......?”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열차의 도착>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비평가는 가만히 있었다.

류지호는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Le Voyage Dans La Lune)>을 끌고 들어와 논쟁에 불을 붙일 거라 예상했다.

<열차의 도착>은 엄밀히 말해 기록영상일 뿐이다.

최초의 시나리오 영화이자, 연출이 가미된 현대 영화의 기반을 자리 잡은 영화가 <달세계 여행>이었으니까.

학자들 사이에서 최초의 영화에 대해 논쟁이 벌어질 때 제일 먼저 언급된다.

비평가는 논쟁을 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긴 류지호가 말을 이었다.


“처음 영화를 꿈꾸는 십대 시절, 혹은 돈이 없어 VHS 비디오카메라로 단편영화를 찍는 수많은 영화학도들을 보세요. 꼭 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극장흥행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서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영화를 꿈꾸는 누구나 비평과 흥행에 무관하게 영화를 만들 권리가 있습니다. 곧 맞이하게 될 21세기에는 관객도 더 이상 꿈꾸지만 말고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뛰어 나가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보는 즐거움은 넘어선 만드는 즐거움을 느끼게 될 거라 확신합니다.”

“감독님이 디지털 신봉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야의 선구자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디지털 영화 부분에 집착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타이틀은 하등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가정입니다만, 똑같은 능력을 가진 창작자가 같은 작품을 만든다면 무엇으로 만드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화가는 좋은 붓을 써야 하지 않던가요? 여기서 좋은 붓이란 자기가 만들고자 하는 창작물에 제일 잘 맞는 붓을 말합니다. 수채화를 그리는데 수묵화 붓으로 그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수채화도 그려야하고 수묵화도 그려야하는 영화예술인으로 살려면 모든 붓을 다룰 줄 알아야겠지요.”

“영화만 좋으면 무슨 기종의 카메라로 찍었는지 관객은 알려고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영화만 좋다면 말이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필름이든 디지털 신호든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다. 다만 스스로 이 정도면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내놓는 것은 관객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창작자로서도 부끄러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기술과 이를 영화에 응용하는 시도는 새로운 미학과 표현방식에 대한 고민과 탐구의 과정입니다. 그 또한 예술로 나아가는 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감독들은 대체로 디지털 영화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냈다.

반면에 촬영 전문가들은 디지털 카메라 개발 진척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기후와 포스트프로덕션 인프라에서 한계가 뚜렷한 한국이다.

문명의 이기를 활용해 그것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좀 더 높은 품질의 영화를 기대할 수 있다.

관객들은 머리 시끄러운 D-Cinema에는 관심이 덜했다.

다만 지금까지 류지호가 추구해 온 것과 달라진 영화풍에 대해 질문이 많았다.


“전작보다 그리 많이 바뀐 것 같지는 않습니다. <The Killing Road> 보다 덜 폭력적이라고 하셨는데.... 글쎄요. 보기에 따라서는 물리적인 폭력 이상으로 사회적 폭력이 더 무서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부정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즐기기 위해 남을 다치게 만드는 건 참기 힘들며 참아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즐기자고 남을 업신여기는 짓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뉴스를 포함한 미디어의 책임이 픽션을 만드는 나 같은 사람보다 책임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남의 비극을 장사하는 데 이용하는 것은 근절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신기자이거나 아니라면 서구권 평론가로 보이는 남자가 질문했다.


- 백인을 적대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축구 선수 같은 경우에는 매우 멍청하고 힘만 센 바보처럼 보입니다. 디렉터 류가 아시아계로서 역차별을 하고 있다는 말도 들립니다.

“영화에 드러난 것보다 과장하려는 미국언론이 만든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미국에서 신문을 팔아먹는 방법이기도 하고. 그들은 내가 아무 의미도 두지 않은 장면에서 논란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정작 논란을 만들어주길 원할 때는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Life Goes On>을 내놓았을 때 언론의 행태가 그랬다.

영화팬인지 영화학도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은 여학생이 물었다.


- 감독님의 단편영화들은 혹은 초기 영화들은 휴머니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장편영화를 찍으시면서 온통 절망만 있습니다.

“절망을 알아야 희망도 노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미움과 증오가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그걸 반성하고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출구가 있을 것으로 믿었던 환기구를 어렵게 통과했지만, 결국 그곳은 출구가 아니었습니다. 주인공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혹시 사회조직이 붕괴되는 것을 의미하신 걸까요? 결국 역사는 돌고 돈다는. 줄곧 전진했다고 믿었지만 도착한 곳은 처음 시작했던 곳. 때문에 역사의 발전은 의미 없다는 걸 말하고자 하신 것은 아닌지......?”

“각자 영화를 해석하는 것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리얼리티란 없습니다. 각자가 바라보는 리얼리티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질문하신 분이 둘이 같은 물건을 놓고 한 달을 대화해도 둘이 보는 물건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정답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정답은 질문하신 바로 본인이 가지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관객이 질문했다.


- 열린 결말을 특별히 선호하는 이유가 있으세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제 영화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 중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 감독님.... 미국에서 영화하는데 어려움은 없어요?

“쫄면 지는 겁니다.”


하하하.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 인종차별을 당하진 않나요?

“미국은 불과 35년 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공공장소, 고용, 선거참여에서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제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벽과 장애물이 꽤나 많습니다. 극복하느냐 받아들이냐라고 한다면 제 입장은 후자는 절대 아닙니다.”

- 감독님도 차별을 받았다는 말씀이신가요?

“미국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자수성가하면 인정하고 존중하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뭔가 성취를 해낸 사람을 무시하진 않습니다. 적어도 제 면전에서 언어폭력으로든 노골적으로 차별적인 모습을 보인 미국인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류지호라는 사람은 성공한 소수계 인종일 뿐이다.

인종차별에 관해 할 말은 많지만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 혹시 한국에서는 영화 안 하시나요?

“대학을 졸업하면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지 뭡니까. 한국인이 특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정서를 담은 시나리오도 몇 편 써놓은 것이 있긴 합니다.”

- 이른 시간 안에 감독님이 연출하신 한국영화를 극장에서 봤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사회자가 나섰다.


“10분을 더 연장한 시간까지 다 흘러버렸네요. 늦은 시간까지 극장 남아 <Escape>를 연출하신 류지호 감독님과 질의응답을 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면서 이만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극장을 나서는데 김민아가 새로운 스케줄을 알려왔다.


“간담회?”

“꼭 참석해 달래.”

“뭐하는 간담회인데?”

“대통령선거 후보들이 영화인 대표들과 간담회 자리를 마련했대.”

“근데?”

“충무로 최고 아니 월드스타 류지호 감독은 반드시 참석해 주길 바란다고 신신당부하더라고. 1,2,3번 후보들이 모두 참석하는 자리래.”

“참석하지 않으면.....?”

“높으신 분들에게 찍히지 않을까?“

“귀찮게스리....!”

“웬만한 충무로 영화인 모두가 참석하는 모양이야.”


지금까지 이런 자리는 없었다.

처음으로 대통령후보와 영화인들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다.

얼마나 허심탄회한 자리가 될지 알 순 없지만.


“가서 얼굴 도장은 찍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긴 하지.”

“가서 2시간만 참아봐.”

“그러자.”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이 대통령 후보들의 개막식 연설은 막았다.

세상 어떤 국제영화제에서 정치인이 개막 연설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대통령후보씩이나 되는 인사들이....

수준 낮은 한국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진솔하게 포장마차에서 영화인들과 섞여서 산낙지에 소주 한 잔 했으면 국민들에게 더 점수를 딸 텐데, 간담회는 개뿔이.”

“뭐라고 그랬어?”

“아냐. 아무것도. 의전팀에 가장 마지막에 내게 보냈던 한국영화산업 현안 보고서 보내달라고 해줄래?”

“알겠어.”


명색이 대통령후보를 만나러 가는 자리다.

현안에 대해 파악도 못하고 가서 꿰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있다 오고 싶진 않았다.


❉ ❉ ❉


이전 삶에서 부산국제영화제는 정치권에 꽤나 휘말렸다.

한국 최고의 국제행사 가운데 하나로서 국내외의 큰 주목을 받았다.

영화산업 자체의 질적 성장까지 이루어지면서 정치권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에는 무조건 후보자들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었다.

부산영화제가 처음 정치권의 주목을 받은 것이 바로 올해부터다.

특히 제1 야당의 대통령후보는 영화계에서 오래 전부터 지지를 받아왔다.

그로인해 정책적으로도 긴밀하게 협조해 왔다.

그를 통해 준비한 정책 공약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발표하려고 했다.

부산영화제 집행위는 반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야당 대통령후보의 레드카펫 입장과 소개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개막식 다음 날 오전에는 영화인 지지자들과 함께 정책 공약을 발표했다.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유력 야당 후보자가 개막식에서 인사말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야당 국회의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그러나 집행위원장은 당당하게 정치 불간섭을 원칙으로 내세웠고 이를 관철 시켰다.

부집행위원장 역시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다.


“내 말이 맞았죠?”


작년에 이미 류지호는 오늘의 일들을 예견한 바 있다.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자 영화제 측은 꽤나 당혹스러웠다.


“여당 후보도 난리도 아니었다면 서요?”


제1야당 후보의 거침없는 행보에 질세라 여당 후보 또한 광복동 PiFF 광장을 방문해서 상설 무대에 올라가려했다.

영화제 측에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영화제가 대통령후보의 유세장이 되어선 안 되기 때문에.


“후보자 측에서는 권력으로 강행할 수도 있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습니다. 역풍을 우려해 한 발 물러서더군요.”

“축하해요.”


사무국 삼인방이 류지호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부산영화제에 대한 첫 정치적 실험대를 맞이했네요. 부산국제영화제가 앞으로도 정치적 중립을 지켜낼 수 있을지 꽤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수 있겠네요.”


흥미진진한 일이 절대 아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별다른 문제만 없다면 세계 5대 영화제에 들어갈 만큼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다.

그로 인해 중앙 정계와 지자체의 간섭 그리고 영향력 행사가 도를 넘어서게 된다.


“감독님 충고에 따라 부산시가 영화제를 위해 책정한 6억 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기업 두 곳과 가온의 후원만으로 충분히 꾸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충무로 영화인들이 십시일반 후원한다고 하면 받지 마세요?”

“......?”

“시상 부문에서 괜히 뒷말이 나올 수 있어요. 다만 부산시민과 개인들의 후원은 받아야겠죠. 부산시가 아니라 부산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제. 지자체는 행정적 도움만 받는 것으로 해야 나중에 그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을 겁니다.”


이번 영화제 전체 예산규모는 대략 24억 원이다.

류지호가 개입한 이번의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시 예산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대신 부산시로부터 행정지원을 받았다.

이전 삶에서는 부산시장과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공동으로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부산시의 예산을 전혀 받지 않게 되면서 조직위원장은 민간인 단독으로 맡게 되었다.

영화제 집행부는 정관계가 영화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였다.


“향후 3년만 고생하세요.”

“왜 3년입니까?”

“경제위기 극복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기업들 후원이 꽤 들어오기 시작할 겁니다.”


(주)가온 홀로 모든 걸 책임지는 건 분명 부담될 터.

사무국 삼인방은 그 때부터 후원을 조금 줄일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WaW 픽처스나 트라이-스텔라 또는 ParaMax가 후원을 할 순 없어요.”

“혹시 뉴커런츠 시상부문에 시비가 있을까 봐서.....?”

“그렇다고 후원 금액이나 현물지원이 늘면 늘었지 줄진 않을 겁니다. 가온이나 JHO 말고도 후원을 해 줄 기업을 꽤 소유하고 있으니까요.”


WaW 픽처스가 빠지게 되면 아네모네 프랜차이즈가, JHO Company 대신에 DALLSA Corp.이나 Eye-Max, 혹은 류지호가 대주주로 있는 IT기업을 후원사로 넣으면 된다.


“한국경제가 너무 좋지 않아 기업들에게 후원을 부탁하기가 좀 그런데. 3년 후에는 내가 몇 군데 대기업에 직접 후원을 부탁해 보죠.”

“감사합니다. 감독님.“


이전 삶에서 부산국제영화제가 세계 5대 국제영화제급으로 올라섰을 때 예산이 대략 100억 원이었다.

그 중에 국가와 부산시가 70% 가량을 지원했다.

평상시 운영예산의 대부분은 부산시가 감당해 주었다.

필연적으로 부산 정계의 입김이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단돈 일원을 받아도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예산의 거의 대부분을 받아서 쓰게 된다면 중립이든 자율성이든 물 건너가는 거죠. 힘들겠지만 영화제 조직위가 쉬운 길이 아닌 어려운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류지호가 뭐라고 영화제 핵심관계자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다.

류지호는 부산국제영화제 출범의 공신 중에 한 명이다.

준비 단계부터 자금을 지원했고, 준비 위원회에 이름을 빌려줌으로써 류지호가 가진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류지호가 보기에 매 회 예산을 급격하게 늘리지 않으면 후원만으로 운영할 수 있다.

보여주기 행사나 화려하고 겉만 번듯한 이벤트를 안 하면 된다.

관료들이 들어와 간섭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된다.

영화제 외형만 키우려고 들 테니까.


“어쨌든 초청 영화 편수도 늘고 게스트와 방문객들이 늘어날수록 자연스럽게 예산은 올라가겠지만, 관에서 하는 행사처럼 멋대가리 없이 폼만 잡는 행사가 아니라 소박하더라도 영화와 영화팬이 주인공이 되는 국제영화제가 되길 기대합니다.”

“열심히 해봐야죠.”


처음 자리 잡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지, 한국에서 개최하는 국제규모 행사라면 아시아권에서만큼은 대표성을 띨 가능성이 높다.

류지호의 개입으로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만,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34 우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6 22.11.14 4,371 143 26쪽
333 Big Shot. (5) +5 22.11.12 4,361 142 22쪽
» Big Shot. (4) +6 22.11.12 4,143 134 26쪽
331 Big Shot. (3) +7 22.11.11 4,409 139 25쪽
330 Big Shot. (2) +16 22.11.10 4,408 143 23쪽
329 Big Shot. (1) +10 22.11.09 4,465 145 23쪽
328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3) +9 22.11.08 4,286 141 22쪽
327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2) +2 22.11.08 4,071 133 22쪽
326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1) +9 22.11.07 4,358 138 21쪽
325 사회생활은 인맥이야...! +9 22.11.05 4,491 138 26쪽
324 선택과 집중. (4) +9 22.11.04 4,469 138 22쪽
323 선택과 집중. (3) +10 22.11.03 4,366 148 22쪽
322 선택과 집중. (2) +7 22.11.02 4,729 148 24쪽
321 선택과 집중. (1) +5 22.11.01 4,597 148 24쪽
320 아무 것도 안 해서, 안 돌아가는 일도 있더라. +5 22.10.31 4,579 144 30쪽
319 아무 것도 안 해도 잘만 돌아간다. (3) +10 22.10.29 4,569 146 27쪽
318 아무 것도 안 해도 잘만 돌아간다. (2) +8 22.10.29 4,304 131 22쪽
317 아무 것도 안 해도 잘만 돌아간다. (1) +9 22.10.28 4,564 153 27쪽
316 Celebrity. (2) +8 22.10.27 4,529 148 28쪽
315 Celebrity. (1) +10 22.10.26 4,606 144 27쪽
314 지적인 액션영화는 망할 걸? +4 22.10.25 4,639 155 26쪽
313 엄마는 여한이 없어..... +11 22.10.24 4,572 144 29쪽
312 세계 최초의 D-Cinema! +5 22.10.22 4,513 154 25쪽
311 환경이 아닌 인식의 문제. (4) +4 22.10.21 4,457 143 24쪽
310 환경이 아닌 인식의 문제. (3) +11 22.10.20 4,372 160 22쪽
309 환경이 아닌 인식의 문제. (2) +8 22.10.19 4,471 132 22쪽
308 환경이 아닌 인식의 문제. (1) +6 22.10.18 4,568 155 22쪽
307 괴짜 같은 녀석..... +7 22.10.17 4,512 150 25쪽
306 영화 기술사의 한 획! (5) +13 22.10.15 4,534 162 20쪽
305 영화 기술사의 한 획! (4) +5 22.10.15 4,270 129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