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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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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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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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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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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Celebrity.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졸업식에 참석했던 외가 식구와 친구들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스탠퍼드 대학원 입학을 하는 황재정은 팰로알토로 떠났다.

류지호는 <REMO : The Destroyer> 연출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스크립트 최종고가 나오지 않았기에 캐스팅을 시작할 수도 없다.

여름휴가를 파커 저택에서 가족들과 보내기로 했다.

곧 뉴욕으로 떠나야 했다.

부모님을 먼저 뉴욕으로 보냈다.

류지호는 따로 라스베이거스에서 할 일이 있었다.

매년 7월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북미 최대 홈비디오 컨벤션이 열린다.

VSDA(Video Software Dealers Association)가 주최하는 이 행사에는 북미의 모든 홈엔터테인먼트가 참여해 자사 타이틀과 신작들을 소개한다.

물론 홈엔터테인먼트와 관련한 최신 제품도 함께 전시된다.

스타 배우는 물론이고 할리우드의 쟁쟁한 감독들도 참여해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진다.

올해 처음 류지호가 참석하게 됐다.

그것도 오프닝 비즈니스 세션 대담자로.


“길고 긴 연구개발과 협상 끝에 결국 DVD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되었네요.”


류지호의 말을 ‘DVD의 아버지’ 워런 리버팝이 받았다.


“긴 세월이었지요. 미스터 류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영화업계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을 겁니다.”

“워런이 DVD의 상용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어요.”

“보람으로 느낍니다.”


사회자 없이 오로지 두 사람만이 무대에서 대담을 나눴다.

그럼에도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대화가 술술 이어졌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산도 많죠.”


지난 1995년 말, 워너-타임이 이끄는 진영과 소닉·로얄필립스의 제휴세력 등 굴지의 전자회사 10여 곳이 DVD의 공동 규격을 개발키로 합의했다.

몇 년 간 두 진영이 첨예하게 분쟁을 이어갔다.

결국 통일규격을 만들면서 끝이 나게 됐다.


“DVD가 VHS 비디오테이프보다 생산단가가 낮아요. 영화사들이 DVD 1장에 10∼13달러의 순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성장의 한계에 봉착한 영화산업 성장에 기여하는 거의 유일한 전략이 DVD라고 확신합니다.”

“DVD 디스크 플레이어, PC에 장치되는 롬이 하루 빨리 규모의 경제가 이루어져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공급이 되어야 하겠죠.”


DVD의 선구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워런 리버팝이다.

그런데 DVD 명칭을 부여한 것은 류지호다.

워너-타임 VS 소닉 양 진영이 규격에 대해 최종 합의를 했을 때, DVD는 ‘Digital Versatile Disc’를 의미했다.

류지호를 대리해서 워너-타임 진영에 참여하고 있던 IVE Entertainment의 지우베르투 코르테즈는 이를 ‘Digital Video Disc’라고 부르자고 주장했다.

류지호가 그렇게 부르길 바랐기 때문에.

추후 음악을 비롯해 게임까지도 디스크에 담고 싶었던 전자업체에서는 류지호의 명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DVD 규격 각축전에 참여하지 않은 메이저 스튜디오를 트라이-스텔라가 설득해 합류시켰다.

결국 그들은 류지호의 명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LOG, PARKs, 패런마운틴은 영화의 DVD 제작을 거부했다.

4센트의 로열티 문제부터 가장 큰 걱정거리는 불법복제였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류지호가 꺼낸 카드 중 하나가 DVD가 영상에 특화된 기기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다른 전자제품 업체들 및 대형 소매상들 역시 거의 한결같이 DVD에 반대했다.

그런 상황에서 최초의 DVD 플레이어가 1996년 11월 일본에서 발매됐다.

한 달 뒤에 워너-타임의 <블레이드 러너>, <이레이저> 또 트라이-스텔라의 <터미네이터Ⅰ·Ⅱ 합본> 등이 처음으로 일본에서 DVD 타이틀로 발매됐다.

생각보다 반응은 폭발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VD 규격 합의에 참여한 10개 가전회사들이 올 1월에 열린 CES에서 자사의 새로운 DVD 플레이어를 일제히 선보였다.

그러나 DVD 영화는 등장하자마자 거의 실패작으로 간주됐다.

블록버스터와 할리우드비디오 같은 대형 소매상들이 DVD 타이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DVD 기술은 뜻밖의 인물을 만나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바로 복합엔터테인먼트 그룹 JHO Company의 류지호다.

JHO 산하의 Eye-MAX Corp.이 보유한 다큐멘터리를 DVD로 출시했다.

또한 10편의 트라이-스텔라 흥행영화가 포함된 박스 에디션을 발매했다.

할리우드 최고 제작자 가운데 한 명인 스티븐 아들러까지 끌어들였다.

스티븐 아들러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음향회사 DTSS 포맷을 DVD에 사용하는 방안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양측의 합의를 이끌어냈던 것.


“많은 이들이 DVD 미래에 대해 엇갈린 전망을 내놓고 있어요. 미스터 류의 생각은 어떻지요?”

“우리의 시도는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지금까지 출시된 DVD 타이틀들이 실제로 재생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플레이어와 디스크 간의 호환성 문제 그리고 우리가 시장에 내놓는 모든 것이 소비자가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키는지 면밀히 따져봐야 합니다. 여러분, 미안하지만 Video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입니다. TV시리즈 한 시즌이 통째로 디스크에 담깁니다. 크기도 작고 가볍습니다. 되감기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이상하죠? 내가 원하는 곳 어디서나 영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담고 남는 용량에 다른 서비스 트랙을 넣을 수 있습니다. 영화팬들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그를 마케팅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 낙관적인 분위기와 완전 딴판의 상황이 벌어진다.

DVD 플레이어의 보급률 저조했기 때문이다.

처음 혁신이 이루어질 때는 원래 그런 것이다.

수요가 폭발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게다가 할리우드 업계와 가전업체, 부가시장 모두가 한마음으로 뜻을 모은 것도 아닌 상황에서 시작된 비즈니스 모델이다.

그럼에도 수년 전부터 DVD 타이틀 콘텐츠를 고민해왔던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는 로열티를 받아가는 워너-타임에 비해 좀 더 유의미한 수익을 거두고 있다.

<보디가드>, <마스크>, <클리프행어>, <스피드> 등 이미 한차례 수익사이클이 돌았던 흥행작들을 DVD 타이틀로 출시해 유의미한 매출을 기록하게 된다.

<미션 임파서블>은 DVD 타이틀 최초로 북미에서 10만 판매 기록을 깨기도 한다.

2년 뒤에 <타이타닉>은 100만 장 출하를 가볍게 넘긴다.

비디오 대여 시장의 양대 축은 블록버스터와 할리우드 비디오다.

그들에 한참 밀리지만, StreamFlicks 역시 DVD 시장 안착에 기여하게 된다.


“비용만 늘고 성장 잠재력이 정체된 영화산업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짝짝짝.


오프닝 비즈니스 세션을 무사히 마친 류지호가 곧장 행사장으로 향했다.

트라이-스텔라 홈 엔터테인먼트, 트라이-스텔라 텔레비전, ParaMax 홈 비디오, Timely Studios, IVE, StreamFlicks 그 외에 제휴영화사 부스를 일일이 방문해 홍보를 도왔다.

VSDA 컨벤션에는 성인용 비디오 부스도 곳곳에 있어서 눈을 즐겁게 해줬다.

전담 취재진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류지호를 따라다니는 카메라가 많았다.

그들 중 절반은 전문 파파라치다.

때문에 성인용 비디오 부스에 제대로 눈길을 주진 못했다.


"미스터 류!“

“헤이. 미스터 카츠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소닉 컴퓨터 엔터테인먼트(SCE)의 히라이 카츠키와 재회했다.

“비즈니스 세션 잘 봤습니다.”

“임원이 직접 부스에 나와 있는 겁니까?”


컬버시티 소닉 스튜디오 주차장에서 처음 만난 후로 히라이 카츠키는 SCE USA COO로 승진한 상태다.


“JHO의 빅보스도 자회사 홍보에 적극적인데, 일개 임직원인 저는 몇 배로 뛰어야죠.”


일본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주제에 마인드는 일본 스타일이다.


“‘파이널판타지7‘의 판매량이 꽤나 고무적이라죠?”

“이제 겨우 새턴과 닌텐도의 발끝에 도달한 느낌입니다.”

“확실히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잘 이해하고 있는 소닉 뮤직 출신들이라서 그런지 짧은 시간에 경쟁력을 갖춰가는 것 같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세대 게임기 출시는 언제로 예정되어 있습니까? 아차.... 대외비입니까?”

“21세기 전 출시가 목표입니다.”


류지호가 플레이스테이션2에 관심을 드러낸 것은 다음 게임기부터 DVD 기능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행운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히라이 카츠키 외에도 컨벤션 곳곳에서 낯익은 이들을 꽤나 많이 만났다.

<더 락> 홍보를 위해 브에나비스타 부스에 와 있던 레온 브룩하이머와 <제5원소> 홈비디오 게스트로 초청받은 폴 베숑도 만났다.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배우들도 보였다.

친분이 없는 이들 뿐이라서 발길을 돌렸다.

류지호는 오프닝 비즈니스 세션을 포함한 단 하루 일정만 소화하고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까지 따라온 파파라치들은 류지호가 게이트를 통과하고 나서야 떨어졌다.


✻ ✻ ✻


류지호가 오랜만에 뉴욕의 파커 저택에 왔다.

저택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마지막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사람이다.


“나 왔어요.”

“어서 와요.”

“Jay는 볼 때마다 더 멋져지는군요?”


저택의 주인인 윌리엄 파커가 늙어가는 것처럼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고용인들도 세월을 거스를 순 없었다.


“브래드, 부모님이 안 보이네요?”

“한인 커뮤니티 행사에 초청을 받아 외출 중입니다.”

“아라는 별 탈 없이 도착했구요?”

“레오나와 놀러 다니기 바쁩니다.”

“할아버지는 서재에 계세요?”

“네.”


류지호가 한달음에 서재로 달려갔다.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해 섭섭했지? 미안하구나.”

“괜히 무리하셨다가는 탈이 날 수도 있잖아요. 잘하셨어요.”

“그래, 영화과 졸업작품 상영회를 빅 이벤트로 만들어버렸다고?”

“다행히 결과가 좋았어요.”


류지호는 여장을 푸는 것도 잊은 채 윌리엄과 대화를 나눴다.

여전히 조손처럼 사이가 각별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저녁식사 전까지 오랜 시간 이어졌다.

부모님도 돌아오시고, 동생들과 제임스 부부도 퇴근 후 저택으로 돌아왔다.

두 가족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저녁식사 내내 류지호의 졸업이 주된 화제였다.


하하하.

호호호.


류지호와 가족들은 여름휴가를 뉴욕에서 보냈다.

제임스 부부도 맞춰서 휴가를 냈다.

함께 플라이 낚시도 가고, 뉴욕의 유명한 맛집 투어를 돌았다.

가족 모두가 뉴욕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들은 이미 돌아봤다.

그럼에도 즐기고 구경할 곳은 널리고 널렸다.

휴가를 즐기는 틈틈이 류지호는 동부의 지인들을 만났다.

독립영화 감독들과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의 교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루 임대료가 수만 달러나 하는 슈퍼 요트를 빌려 카리브해까지 다녀왔다.

8월 초까지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취했다.

정말 원 없이 놀았다.

문득 류지호는 군 제대 후 발전 없이 에너지가 소진만 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목적과 의미 없이 부지런한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자신이 몰두하고자 하는 것에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했다.


‘그간 너무 정신없이 달렸어.’


류지호는 잠시 호흡을 고를 필요성을 느꼈다.

번잡한 대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해 뉴욕을 떠나기로 했다.


❉ ❉ ❉


결과적으로 복작거리는 뉴욕보다 아이오와 주로의 여행은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윌리엄이 파커 가주의 전용기를 내줬다.

뉴욕을 떠난 류지호 가족이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중북부로 날아갔다.

인디애나쯤 지나니까 옥수수 평원이 보였다.

그러다 일리노이 주를 지나니까 ‘아, 여긴 옥수수 밭이 더 많네’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아이오와에 들어서자.


“와, 여긴 그냥 바다네 바다야. 옥수수가 물결치는 구나.”


류지호의 가족이 탄성을 터트렸다.

비즈니스 제트기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이 펼쳐졌다.

말 그대로 장관이다.


“특히 여름 8, 9월이 정말 멋있어. 오려면 그때 와.”


파커가의 형제들이 여름에 방문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아이오와에 와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듬성듬성 자리한 작은 농촌마을을 제외하고, 평원 전체에 잘 익은 옥수수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옥수숫대가 누웠다 일서서는 것이 마치 파도가 치는 것 같다.


“미국의 남부를 바이블 벨트, 북동부를 러스트 벨트, 중부지역을 팜 벨트라고 하더니, 일리노이 주부터 펼쳐진 대평원은 그것만으로 장관이네.”


가족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오와의 어디를 가더라도 지평선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부우웅.


디모인 국제공항을 빠져나온 세단이 디모인의 부촌 중에 한 곳인 어번데일(Urbandale)로 들어섰다.

류지호 가족이 도착한 대저택은 전형적인 미국 전통주택 스타일의 고택이다.

뉴욕의 파커 대저택만큼 엄청난 부지를 자랑하진 않지만, 마치 숲속에 숨겨진 고택처럼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어서 오십시오.”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가 류지호의 가족을 맞이했다.

그렉, 노아 형제는 겨울철에만 디모인에서 지낸다고 한다.


“아이오와는 사계적절이 뚜렷한 편이지만, 봄·가을이 짧고 겨울철이 꽤 긴 편입니다. 한 겨울에는 영하 30도를 넘을 때가 자주 있어서 두 형제 가족분들은 이곳 저택에서 겨울을 지냅니다.”

“머무는 동안 잘 부탁해요.”

“내 집이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류지호는 이틀 정도 디모인에 머물렀다.


“어딜 간다고?”

“옆 주에 사시는 어르신께 인사드리고 오려구요.”

“참전용사분이시냐?”

“미국에서 한 손에 꼽히는 부자세요. 윌리엄 할아버지와도 친분이 있으시고.... 안부 묻는 김에 가르침도 조금 받고요.”

“휴가 중에는 일을 손에서 완전히 놓기로 하지 않았어?”

“이번에 만나러 가는 분은 미국 대통령보다 더 만나기 어려운 분이시라서....”

“그래, 조심히 다녀오거라.”

“금방 못 돌아와요. 그렉 형제와 가족들도 만나고 올 예정이라서.”


가족들은 디모인에 남아 관광과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류지호는 뉴욕에서 타고 온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네브래스카의 오마하(Omaha)로 날아갔다.

미국에서도 에드워드 버펫을 미팅할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다.

류지호는 키윗플라자 빌딩 14층의 소박한 집무실에서 에드워드 버펫을 만났다.


“촌구석까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어?”

“더 나은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요.”


에드워드 버펫이 자주 하는 말이다.

더 나은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 우리도 더 나아질 수밖에 없다라는.


“친구는 많이 사귀고 있어?”

“인간관계야 말로 투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판세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면서요? 그 가르침에 충실하고 있어요.”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진실하지 않거나 흐리멍덩한 사람들까지 상대하기엔 그리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명심할게요.”


안부 인사차 들렀다.

짧은 시간에 한정된 미팅이이다.

경제, 투자전략, 자선사업 등에 대해 단편적인 이야기만 오갔다.

뭔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그럼에도 좋은 시간이었다.

구체적인 지식을 얻기보다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정도는 되었으니까.

사실 에드워드 버펫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책을 사서 읽는 것이 더 유익하다.

대화에서는 감정이 뒤섞일 수가 있으니까.

암튼 오마하의 현인이 누굴 만나는지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특히 기업가나 투자자를 만날 때는 더욱 더.

류지호는 윌가에서 ‘리틀 버펫‘이라고 불린다.

오리지널과 리틀 버펫이 오마하 본사에서 만났다는 뉴스가 나가면 주식시장이 술렁거릴 수도 있다.

미국의 금리정책이 저금리로 전환되는 것을 검토하는 시점이자, 침체 일로의 부동산이 다시 활황으로 돌아서고 있고, 실리콘밸리 벤처 투자열풍이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으며, 국제투기자본이 태국의 바트화에 대해 집중 공세를 취하고 있는 시점에서.

류지호는 에드워드 버펫과 한 시간 가량 티타임을 가진 후에 키윗플라자를 떠났다.

오마하를 떠난 류지호는 비즈니스 제트기 대신 SUV를 타고 콘벨트라고 불리는 대평원의 시골동네로 향했다.

대략 20만 명의 농부들이 아이오와 대평원에서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대평원이라고 하면 땅이 평평할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 않았다.

낮은 구릉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철길과 곡물 트레일러들이 다니는 도로가 평원을 관통하고 있다.

철도와 도로가 만나는 곳에는 고층빌딩 높이의 곡물창고가 우뚝 솟아 있다.

미국의 곡창지대는 기업형 농업을 짓지 않더라도 혼자서 몇 만평씩 기계식 농사를 짓는다.


“한창 수확해서 시카고로 보낼 때는 곡물창고 당 대형트럭이 80대가 들락거리지.”


류지호를 픽업하러 온 노아 파커의 설명이다.

대도시인 디모인에는 다른 인종이 간간이 보였다.

아이오와 평원에 와서는 유색인종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전형적인 백인 지역이다.

백인이 아닌 인종은 아이오와 주 전체적으로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유색인종 자체가 없다시피 하다 보니, 인종적인 갈등도 없다.


“겨울철 혹독한 추위를 빼고는 경제 상황도 좋은 편이고, 공해, 교통 체증, 실업률 걱정도 없고. 하루하루 농사를 지으며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이지.”


노아 파커는 겨울에 추운 것만 빼면 진짜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끝마다 강조했다.

그렉 파커 역시 가문 소유의 대농장에서 농사철을 보내고 있었다.


“하하하. 어서 와라. 꼬맹아!”


면도하지 않은 꺼끌꺼끌한 수염에 멋들어진 카우보이모자를 쓴 그렉 파커는 변함없이 화통하고 유쾌했다.


“너는 옥수수를 사기위해 방문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파커 필드를 방문한 유일한 아시안이야.”

“오년 만에 농장에 나타난 비백인 일걸?”

“그렇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모두 시카고나 디모인에서 미팅이 이루어지니까.”


현재 아이오와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10%를 한국에서 구입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고객은 백설그룹이다.


“다음 주까지 이곳에 있어도 되죠?”

“당연하지. 네 집이라고 생각해.”

“고마워요.”

“네가 묵을 캐빈은 싹 정리해 놨어. 부족한 것이 있으면 곧바로 샘에게 말하도록 해.”


샘은 그렉 파커에게 도널드 제이콥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예일대학 출신이다.

대도시 잘나가는 회사 임원자리도 아니고 농사꾼 수발이나 들고 있다.

그 모습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떠나기 전까지 편안하게 쉬어. 마음껏 주변을 돌아다녀 봐. 시골이라 볼 건 없겠지만.”

“시골이라서 범죄율도 낮고 다들 순박한 사람들이라서 네게 위협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거다.”

“고마워요.”


형제가 캐빈이라고 말한 주택은 꽤나 큰 목조형 단독주택이었다.

내부 시설은 어지간한 리조트 객실 수준 이상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류지호는 파커 형제가 마련해 준 캐빈에서 경호원들과 일주일을 머물렀다.

형제들을 따라 다니며 파커 가문의 농장과 곡물창고, 농기계 정비소, 곡물 운송 회사, 거대한 축사 등 파커 필즈를 구경했다.

목장에서는 승마를 배웠다.

호수에서 낚시도 즐겼다.

존 웨인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윈터셋(Winterset) 마을을 방문하기도 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실제 촬영 장소를 돌아봤다.

매일 저녁마다 파커 형제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셨다.

함께 MLB 중계를 시청했다.

휴일 예배를 마친 파커 형제는 류지호를 끌고 파커 목장 순찰을 했다.

말을 타고 순찰을 할 때도 있고, 커스텀 바이크를 탈 때도 있었다.

파커 필즈 생활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예정보다 사흘을 더 머물렀다.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날 파커 형제가 류지호에게 말발굽 소리와 비슷한 엔진 배기음으로 유명한 Davidson-Harley의 커스텀 바이크 한 대를 선물했다.


“탈시간도 없고, 이걸 어떻게 운반하겠어요.”

“아버지의 제트기를 타고 왔다면서?”

“나중에 또 놀러오면 빌려서 타는 걸로 할 게요.”

“주소 남겨두고 가라. 바이크는 내가 알아서 너희 집으로 보내주마.”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여기서 지내다보면 외부에서 온 사람 만나기가 정말 힘들어. 네가 방문해줘서 일주일 동안 꽤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나와 친구들 모두.”


TV가 아닌 실제로 유색인종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노인이 있을 정도다.

류지호가 할리우드의 유명인인 걸 알 리가 없다.

그 정도로 외부와 소통 없이 평생 밀이나 옥수수 농사만 지어온 농부들이다.

류지호의 출현은 그런 이들에게 신선함을 안겼다.

이곳 순박한 시골사람들에게 류지호는 다른 의미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지친 몸과 마음은 다 추슬렀냐?”

“덕분에요.”


지난 열흘 동안 사업도, 영화도, 삶도 그 어떤 것도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말을 타고 달리거나, 호수나 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거나, 태권도를 수련하거나, 대평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서 단전호흡을 했다.

대자연과 하나가 되고, 뭔가 깨달음을 얻고.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

과거로 돌아온 것만 해도 충분히 판타지다.


‘무협까지 얹어질 리가.....’


류지호는 실로 오랜만에 휴식을 취했다.

고갈된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었다.

디모인에 머물고 있던 가족들은 류지호의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롱아일랜드에서 함께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뉴욕에서 보자.”


연말의 재회를 기약하며 류지호가 파커 필즈를 떠났다.


✻ ✻ ✻


뉴욕의 파커 저택으로 돌아온 류지호를 매튜 그레이엄이 호출했다.

맨해튼의 GARAM Invest에 도착해서 매튜로부터 좋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긋지긋한 로니 페럴만 일당과의 법정분쟁이 마무리됐어.”

“그 작자 회사로 들어갔던 자금들 다 토해내는 거야?”

“전부는 아니고. 대략 60% 정도.”

“혹시 판결 전에 합의했어?”

“어차피 최종 판결로 가도 꿀꺽한 금액 전부를 회수 할 수 없어.”


류지호의 마음 같아서는 신주와 채권발행으로 발생한 자금을 빼돌린 죄까지 묻고 싶었지만, 로니 페럴만이 아닌 애꿎은 전문경영인만 감옥에 보내는 것이라서 단념했다.

나중에라도 그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맞붙게 된다면 단단히 혼을 내주리라 다짐했다.


“Timely를 종합엔터테인먼트 기업을 전환하는 작업에 들어가도 되겠지?”

“영화사로 변신시키게?”

“코믹스가 중심이 되는 복합엔터테인먼트 기업이 되어야 하겠지.”

“샘이 알아서 잘하겠지. 가자.”

“어딜?”

“투자회의.”


류지호는 매튜에 이끌려 얼떨결에 회의실로 향했다.

중역 전용 회의실에 서른 명이 넘는 팀장급 이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직이 빈번한 월가 투자회사답다고 해야 할까.

처음 보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한편으로 흐뭇한 기분도 들었다.

한국계로 보이는 간부들이 몇 년 사이에 꽤 늘었다는 사실이다.

부사장 조민욱을 필두로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아이비리그 출신이 대부분이다.

미국 전역에서 입사를 희망한 교포 2,3세 중에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다.

인사고 뭐고 없다.

곧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아시아 금융위기 TFT 팀장 숀 태 노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외국인들의 탈주는 골드만대거스와 메릴린치가 내어놓은 보고서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브리핑하는 숀 태 노는 메릴린치 증권에서 수년간 아시아 투자를 담당하다가 작년에 GARAM Invest로 이직했다.


“아세아자동차의 처리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늦어지는 것이 금융 불안 심리를 자극한 것입니다. 게다가 외국 은행들이 한국은행들에게 자금을 빌려주지 않거나 만기연장을 해주지 않고, 자금을 회수하고 있는 상황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골드만대거스와 메릴린치는 한국의 외환보유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월가의 은행들에게 돌렸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외환 보유액이 예상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결국 태국처럼 버티지 못하고 IMF에 손을 내밀거라고 전망했다.


“외환딜러들 전망으로는 원화 환율이 3개월 이내에 달러 당 1,100원대로 상승하고 8개월 이내에는 1,300원에 이를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미국의 언론들은 이 분석 보고서를 바탕으로 기사를 썼다.

한국의 외환 사정이 생각보다 어렵고, 동남아 국가들처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보도였다.

이런 움직임은 헤지펀드들의 초기 공격 방법이다.

월가의 공신력 있는 보고서를 이용해 언론플레이를 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수법이다.


“인도네시아는?”

“한국이 먼저 항복하느냐 인도네시아가 하느냐... 미국 재무부의 통제 하에 있는 IMF가 태국 사례를 들어서 한국 정부를 압박하지 않을까 합니다.”

“블라이드 정부의 멍청이들은 아직도 미온적인가?”

“경제관료들은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까지 동남아를 망가뜨리고 대만 정도에서 진정되지 않을까 예측하고 있습니다.”


여름까지도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다.

헤지펀드가 헤집어 놓은 태국에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 일본에 대해 엄중 경고하는 선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일본은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동남아시아 외환위기를 자신들이 통제하려고 하다가 미국에게 크게 혼났다.

어쨌든 한국은 변동환율제를 택하고 있고, 자본유출입도 제한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외환위기에 취약한 동남아와는 다르다는 주장이 미국 정부 내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사실 미국대통령은 이 당시 아시아 금융위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외환위기가 대만에 상륙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IMF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후우.


비관적인 보고를 들으며 류지호는 무력함을 느꼈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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