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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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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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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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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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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쪽

아무 것도 안 해도 잘만 돌아간다.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의장님, 꼬리가 붙었습니다.”


룸미러와 사이드미러를 계속해서 확인하던 VIP 운전기사 겸 경호원 김영철이 보고했다.


“미행?”

“조수석 밖으로 망원렌즈가 얼핏 보인 것으로 봐서 파파라치로 보입니다.”


류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에는 파파라치가 없다.

기레기만 있을 뿐이다.

이 시기에는 더더욱.

한국의 언론사에서는 파파라치의 사진을 구입하지 않는다.

어떤 언론사든 파파라치의 사진이나 기사를 구입하는 전례를 남기면 유사한 일이 빈번하게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사 소속 기자에게 유명인의 사생활 폭로나 취재를 맡기면 된다.

연예부 기자와 연예기획사가 신사협정 혹은 카르텔을 맺고 있기도 하고.

프리랜서가 사진을 찍어 연예기획사에 협박을 하는 구조가 아니라, 연예부 기자가 사생활 폭로나 사진을 가지고 기획사와 직접 거래를 한다.

상부상조하는 관계다.

그 사이에 다른 무언가가 끼어드는 것을 기자들이 원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특권이자 권리였으니까.

연예계에서 부패나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기자들이 끼어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혹시 미국에서 원정이라도 왔을라나.....?”

“확인해보라고 할까요?”

“그러세요.”


신호대기를 받아 횡단보도에서 차량이 멈췄다.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던 미행차량도 똑같이 멈췄다.


쿵.


미행하던 차량에게 뒤에서 들이받는 접촉사고가 발생했다.

그렇게 사고수습을 위해 미행차량이 남겨지고, 류지호를 태운 차량이 유유히 떠나갔다.

제2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인천으로 내려온 차량이 구월동 아네모네 프랜차이즈 본사에 도착했다.


“미행 차량은 스포츠백원 연예부 기자였다고 합니다. 비서실 고현준 과장에게 즉시 통지했습니다.”


고현준은 제일신문 편집국장 출신이다.

언론 관리를 위해 (주)가온과 다온로펌이 공을 들여 영입한 인사다.

류지호는 그런가보다 했다.


“어마나! 우리 회장 마른 것 좀 봐.”

“졸업하더니 그 새 훤칠해 졌네. 우리 회장.”

“이제 장가보내도 되겠어.”


오랫동안 헤어졌던 자식이라도 맞이하듯이 이모들이 수선을 피웠다.

채연지 사장을 비롯해 초창기 창업자들인 마담 출신 이모들이 모두 모여 있다.

모두 표정도 밝고 생동감이 느껴졌다.

아네모네 프랜차이즈 사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


“세숫대야 냉면과 신포만두를 묶어서 체인 사업을 고민하고 있다고요?”

“인천하면 삼면 아니겠어?”

“......?”

“짜장면, 쫄면, 세숫대야냉면이잖아.”


인천이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음식들이다.

특히 1970년대 화평동에서 생기기 시작한 냉면거리 골목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매번 냉면사리를 더 달라고 해서 아예 냉면을 푸짐하게 담아 손님상에 올리기 시작했다.

냉면 그릇도 엄청나게 커지게 되면서 일명 세숫대야 냉면으로 불렸다.


“신포만두가 되겠어요?”

“원조타령 때문에 좀 복잡하긴 한데.... 안 되면 면요리 중심으로 사업을 구상할 수도 있고. 누가 뭐래도 인천이 짜장면, 짬뽕, 쫄면을 탄생시킨 면요리의 본고장이잖아.”

“짬뽕도 인천이 원조였던가요요?”

“안주개발팀장 말로는 나가사키의 화교들이 우동에 오징어, 새우, 굴 같은 해산물을 넣어서 시나우동이란 걸 만들어 팔았대. 그걸 또 화교들이 대한제국 시절에 우리나라로 가지고 들어왔고. 인천에서 처음으로 팔기 시작했나 봐. 일본사람들이 시나우동을 잔폰이라고 불렀는데 그걸 들은 조선사람들이 짬뽕이라고 발음을 한 거래.”


류지호는 몰랐던 걸 알게 된 것보다 채연지가 짬뽕의 유래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는 것에서 사업가 다 되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옥순 이모가 밥차를 시작했다면서요?”

“처음에는 말렸는데, 제법 쏠쏠해.”


류지호가 기억하기로 충무로에 본격적으로 밥차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말이었다.

최초 등장은 90년 초반이었다.

초창기에는 연속성을 가지고 한 사업이 아니었다.

외진 곳에서 촬영하는 영화에 한 해서 몇 번 촬영장 근처에서 밥을 해서 나르는 방식이었다.

푸드트럭이 등장해 본격적인 케이터링 서비스를 한 것은 90년대 말이었다.

촬영현장 밥차는 2000년 이후 한국 영화가 급성장하면서 필수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한국영화가 한창 호황기일 때는 전국 촬영장을 누비는 밥차가 40여대까지 있었지만, 한국영화가 위축되면 밥차부터 먼저 영화판을 떠났다.

한국영화가 잘되는지 못 되는지 보려면 전국에서 운영 중인 밥차 숫자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류지호가 정옥순에게 물었다.


“이모가 직접 푸드트럭을 몰고 촬영현장으로 나가세요?”


정옥순은 룸살롱 마담 출신이 아니다.

채연지가 운영하던 룸살롱 주방 출신이다.

그랬던 정옥순이 아네모네 프랜차이즈 초창기에 여러 안주를 개발했다.

현재는 요리사, 요리연구가, 식품학과 출신들로 구성된 연구팀에서 각종 안주와 요리를 개발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하고 동생하고 둘이 했는데, 찾는 곳이 많아지더라고. 네 회사에서 찍는 영화는 내가 한다고 보면 돼.”

“WaW가 제작하는 영화만이요?”


WaW 픽처스 인하우스 영화는 일 년에 3편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것만으로 수지가 맞을 리가 없다.


“우리 지금 아네모네 밥차 3대나 돌려.”

“예?”


3대의 밥차로 먹고 살려면, 영화 세편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방송, 광고, 그 외 체육행사나 각종 이벤트도 함께 해야 먹고 살 수 있다.

부부가 자영업 형태로 푸드트럭 한 대를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인 밥차 형태다.

이전 삶에서 10대까지 운영하던 업체가 있긴 했다.

그것도 2017년에 가서 한국영화 황금기가 도래하면서다.

현재 그 정도가 수요가 있을 리가 없다.


“걱정 마. 전국 안 가는 곳이 없으니까. 다 찾는 데가 있으니까 3대까지 늘렸겠지.”

“영화만 쫒아 다닐 생각 마시고, 경로잔치나 체육대회 같은 쪽도 영업해보세요. 뷔페보다 조금 저렴하면서 알찬 식단을 갖추면 나쁘지 않을 거예요. 도시락도 괜찮고.”

“도시락?”


류지호는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밥차에 대한 팁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앞으로 지방 촬영이 많아 질 것 같아요. 영화 촬영은 길면 3개월 정도 객지를 떠돌게 돼요. 스태프들은 항상 집밥에 대한 그리움이 있죠. 집에서 먹는 것 같은 맛을 내는 게 일단 중요해요. 촬영팀 같은 경우에는 손에 기름이 묻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밥차를 부를 경우는 주로 식당이 멀리 떨어졌거나 식사를 위한 이동시간까지 아껴가며 촬영할 경우에요. 손을 닦을 수도 그럴 겨를도 없을 경우가 많아요. 멜로 영화 촬영장에서는 냄새가 많이 나는 음식을 피하는 것이 좋아요. 감정씬을 찍을 때는 그런 것들이 배우의 감정 몰입에 방해가 될 수도 있어요. 분장을 한 채로 먹는 사극 배우들은 몸이나 옷에 음식이 묻는 것을 극도로 꺼리겠죠? 복잡한 분장을 다시 해야 하니까요.”


채연지가 끼어들었다.


“옥순아, 우리 감독이 말한 거 다 기억해?”

“아차. 받아 적게 한 번만 더 말해 줄 수 있어?”

“제게 듣는 것보다 재욱이와 이야기 해보세요.”


정옥순이 못 미더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재욱이?”

“재욱이가 현장을 뛰고 있으니까, 스태프들 입맛과 취향을 저보다 잘 알겠죠. 밥만 고집하지 마시고, 김밥부터 수제 햄버거까지 만들 수 있으면 아마 스태프들에게 환영받으실 겁니다.”

“햄버거?”

“조수들 연령대를 생각해보세요.”

“요새 외국물 먹은 감독들도 많긴 하더라.

“스태프들이 무얼 먹고 싶은지 최소 이틀 전에 제작부장에게 물어보세요. 이모가 제작부가 말한 모든 걸 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촬영장에서 선호도가 높은 음식을 알 수 있는 것만 해도 메뉴 짜는데 도움이 되겠죠. 특히 촬영장에서 자주 만나는 퍼스트급들하고 친해두면 좋아요. 영화팀에 누가 생일인지도 미리 확인해 두세요. 촬영 나가서 이모가 미역국을 끓여주면 감동할지도 몰라요. 물론 음식 맛과 위생이 가장 중요하지만.”

“응. 알겠어.”

“밥차 운영하는 게 만만치 않을 텐데... 이모 정말 괜찮겠어요?”


한 번에 수십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을 만들어야 한다.

장보는 것부터 운전, 철수까지 중년을 훌쩍 넘긴 여성이 하기에 힘든 것이 사실이다.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니. 배우도 구경하고, 사인도 받아서 아주 재밌게 일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옥순이가 룸싸롱 주방에서 일을 해봐서 별의 별 요리를 다 할 줄 알아.”


술안주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옥순이 말을 보탰다.


“프랑스 코스요리는 못해도, 그 비슷한 음식들은 흉내 낼 줄 알아.”


채연지가 웃으며 물었다.


“술안주 만들면서 무슨 프랑스 요리인가 싶지?”

“요리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소위 한 자락 한다는 인사들 입맛이 얼마나 지랄 같은 줄 네가 몰라서 그래. 술 취하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지는지 모르는 주제에 이거 만들어 와라 저거 만들어 와라 진상부리는 놈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미국에서 영화 찍을 때 우리 밥차 불러. 내가 우리 감독 위해서 특별히 한국음식을 만들어 줄게.”

“저 혼자 먹을 거 만들려고 미국까지 출장 오면 뭐가 남아요. 마음만 받을 게요.”

“은인인데 그 까짓것도 못해줄까.”

“은인 아니에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아휴. 겸손은..... 예나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냐. 이뻐 죽겠다.”


류지호는 이모들이 칭찬세례를 퍼부을 태세를 보이자,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PC방 체인은 좀 어때요?”

“효자야. 노래방하고 같이 떨어진 소주방 매출을 메워주고 있어.”

“내년 하반기 즈음으로 해서 수도권과 지방 대도시 중심으로 직영점 확장할 준비해 두세요.”

“내년 하반기?”

“대작 게임이 출시될 예정이에요. 자세한 건 가온의 의장 비서실에 문의해보세요.”

“그렇게 할 게.”

“비서실 통해 보고 받기로 태극음향이란 데를 인수했다고요?”

“카오디오를 만들던 회사였는데, 컴퓨터 노래반주기를 만들더라고. 투자할 테니까 노래방용 반주기도 만들어볼 생각 없냐고 했지. 그랬더니 얼마 안 있어서 뚝딱하고 업소용 반주기를 만들어 오더라. 그래서 우리 체인에 들여놨어.”


노래방 반주기의 대표주자 금강 엔터테인먼트의 경쟁사로 성장하는 바로 그 태극음향이다.


“손님들 반응은 어때요?”

“금강 반주보다 좋다는 손님도 있고, 별 차이 없다고 하는 손님도 있고.”

“태극음향 재무 상태는요?”

“카오디오 만들 때도 크게 어렵지 않은 회사였는데, 우리가 투자해주자 날개를 달았지 뭐.”

“잘 하셨어요.”

“재정이하고 의장 비서실에서 다 해주고, 아네모네는 별로 한 것도 없어.”


참고로 인천에서 카오디오업체로 시작한 태극음향은 가정용 컴퓨터 노래반주기로 시장에 진출한 후로 실제 연주 방식을 최초로 도입한 업소용 반주기를 출시했다.


“사실 또 한 군에 회사에 투자하고 싶은데....”

“회사에요 업소에요?”

“회사.”

“뭐하는 회사인데요?”

“주공테크라고 컴퓨터 만드는 회사야. 오성이나 금성 같은 대기업에 밀려 회사가 조금 위태위태한 모양이더라고. 어차피 전국적으로 PC방 체인을 깔게 되면 그곳에 들어가는 컴퓨터 숫자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아. 우리가 대기업 회사를 인수할 순 없고, 중소기업 정도는 어떻게 될 것 같은데....”


주공테크가 연주와 삼바와 달리 외환위기 이후에도 살아남았다는 것을 류지호는 기억하고 있다.

연주컴퓨터는 부도를 맞고, 삼바컴퓨터는 법정관리를 신청하게 된다.

연주는 문어발식 기업 확장 때문에, 삼바는 두루미넷의 실패로 중저가 PC제조 벤처신화의 막을 내리게 된다.


“주공테크에서는 뭐래요?”

“경영권만 보장해주면 인수합병도 논의해볼 수 있대.”

“혹시 이모님이나 남편 분들 중에 그 회사 경영에 욕심내는 분 있어요?”

“없어. 일자무식 동생들이 무슨 회사 경영을 하겠니?”

“사장님은요?”

“내가 컴퓨터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 회사를 경영하겠어.”

“근데 왜 연주나 삼바가 아니고 주공테크예요?”

“거기는 다른 회사와 달리 한 우물만 파는 게 마음에 들더라. 지금은 대기업에 치이고, 설비투자하자마자 경제가 어려워져서 그렇지, 재정이 말로는 원래 재무구조도 건전한 편이래.”


외환위기에도 살아남았다면 그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병역특례업체로 지정되어 있대. 그렇다면 아무리 한국경제가 어려워져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네가 5년 넘게 배당금을 한 푼도 가져가지 않아서 사내유보금도 많이 쌓여있고.”

“자금은 충분해요?”

“PC방 체인 말고는 사업을 벌인 것도 없고. 기존 프랜차이즈도 무리해서 확장하지 않았고. 네가 배당금도 안 받아 갔잖아.”

“만약 주공테크 인수·합병할 수만 있다면, 제가 지원해드릴 게요.”

“고마워.”


고마운 건 도리어 류지호다.

나래안전도 그렇고, 아네모네도 그렇고.

자신의 경고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지난 2년 간 사업을 무차별적으로 확장하고픈 욕심을 꾹꾹 눌렀다.

태극음향과 주공테크에 대한 투자 역시 아네모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멈췄다.

회사를 운영하다보면 매출도 쑥쑥 성장하고 성장세가 가파르면, 신사업 진출이나 기업인수합병의 욕심이 생길 수가 있다.

나래안전과 아네모네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류지호가 대학을 졸업하고 경영일선에 나서길 기다렸다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현재 벌이고 있는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면, 적어도 20년은 끄떡없을 거예요.”

“20년이 뭐니. 회사가 커져서 나도 힘에 부쳐.”

“전문경영인에게 맡기실래요?”

“가온 밑으로 들어가면 안 돼?”

“지금 규모를 유지하는 게 서로에게 딱 좋아요.”

“가온에 필요가 없어서?”

“그래야 중소기업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재정이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서 조금 불안했어.”

“잘하고 계세요. 언제든지 어려운 일 생기면 제게 전화를 하세요. 만약 제게 연락이 닿지 않으면 비서실에 전화하시고.”

“고마워.”

“어릴 때 아줌마가 제게 베푼 호의에 비하면 사실 별 것도 아닌 걸요.”

“언제 적 얘기니. 겨우 변호사 소개시켜준 것뿐인데.....”


그녀 입장에서는 류지호가 레몬소주를 알려준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일 뿐이었다.

반면에 류지호에게는 너무나 큰 호의이자 도움이었다.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패배감.

과거로 돌아왔어도 여전했던 세상에 대한 회의와 불신.

그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 맞이한 친절이었다.

게다가 세상살이에는 공짜란 없다.

류지호가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 파커에 대해서도 평생을 두고 갚을 은혜인 것처럼.

채연지의 친절이 파커의 호의와 비교해 작아보일지 모른다.

받아들이는 류지호는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간절하던 시점에 적당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할 뿐.


“부산 내려가기 전에 모두 모여 파티 한 번 해요.”

“그러자.”


아네모네 프랜차이즈가 연주나 삼바처럼 잘 나갈 때의 동력을 핵심사업 역량 강화로 연결하지 못한다면 부도나 법정관리를 맞이하게 되겠지만, 지금처럼 제 분수에 맞는 수준에서 본연의 영역에 집중한다면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태극음향과 주공테크 두 회사 모두 해당 산업의 하향세에 접어들었을 때도 흑자 행진을 했던 곳이다.

류지호가 이전 삶의 기억을 쥐어짜서 조언을 해줄 필요가 없을 터.


‘이모들끼리 쓸데없이 사내 정치질 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고.

같은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도 돈 앞에서는 핏줄도 무시한다.

아직까진 이모들끼리 큰 다툼 없이 회사를 꾸려가고 있는 것 같아 안심했다.


❉ ❉ ❉


인천을 다녀온 류지호는 강남의 가온빌딩으로 출근했다.

영화 사업을 점검하고, 투자회사의 실적도 보고받았다.

특히 가온투자파트너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한국에서도 벤처란 용어가 자연스럽게 퍼지고 있는 것 같네.”


류지호가 혼잣말을 한 것이지만, 유재웅 가온투자파트너스 CEO가 설명을 시작했다.


“작년 말부터 벤처기업협회와 매일이코노미가 ‘벤처창업 로드쇼’를 공동 개최하면서 벤처란 용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봐서는 로드쇼가 꽤 흥행을 한 것 같은데, 실제로 어때요?”

“한마디로 뜨겁습니다.”


작년 벤처기업협회가 서울대를 시작으로 ‘벤처창업 로드쇼‘라는 이벤트를 열었다.

당시 서울대 공대 학생 등 500여 명이 참석해 벤처기업에 대한 관심을 보여줬다.

벤처기업협회가 창립 1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개최한 이 행사에 내걸린 캐치프레이즈는 ‘한국의 헨리 게이츠여 모여라!’였다.


“작년 하반기 포항공대, 카이스트, 연하대 등 주요 공대를 돌아다니며 로드쇼를 열었는데, 2천여 명이 참여하며 각 대학마다 창업동아리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이공계열 학생뿐 아니라 연구원, 교수 등을 대상으로 창업 로드쇼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벤처기업들의 썸머스쿨도 열리며 벤처창업 열풍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가온투자파트너스는 벤처기업협회가 추진하고 있는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벤처기업협회가 구로동에 벤처빌딩을 짓기 위해서 서울시와 논의를 하고 있다고요?”

“서울시에서는 학여울 근처를 후보지로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벤처빌딩은 신경 쓰지 마세요.”


벤처빌딩은 후보지도 수십 번 변경되고, 서울시장이 바뀌게 되면 지지부진 하게 된다.

결국 외환위기를 맞게 되면 백지화되는 계획이다.


“테헤란로 쪽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들게 될 겁니다. 한국에 경제위기가 오게 되면 서울 대부분의 지역에 공실이 늘어나게 될 겁니다. 대형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건물주들이 자금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죠. 강남 요지의 빌딩들이 헐값에 나올 겁니다. 어쩌면 리딩 벤처들이 자기 건물을 살 수도 있겠죠. 결과적으로 벤처기업들의 부동산 자산이 늘어나게 될 겁니다. 가온투자파트너스도 강남 대형 빌딩을 주시하도록 하세요.”

“예. 의장님!”


코스닥은 작년 여름 시가총액 7조 6천억 원으로 출범했다.

아직은 거래 종목이나 주식수가 적었다.

가온투자파트너스는 전국 대학의 벤처창업동아리들을 지원하고 주요 이공계 대학 출신들의 창업을 돕고 있었다.


“재차 강조하지만, 가온은 인큐베이터가 되어야 합니다. 벤처 창업가들은 사회생활을 전혀 해보지 못한 사회초년생이 대부분입니다. 투자 계약서 하나 제대로 쓸 줄 몰라요. 가온투자파트너스가 실리콘밸리 VC 모델을 도입했다고 해도 아직 많이 어설픕니다. 어떻게 심사를 하고 어떤 식으로 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파트너의 성장을 위해 무엇을 지원할 것인지, 마지막으로 어떻게 EXIT 할 것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노하우를 쌓으세요. 지금 벤처 투자에 100억 넣어봐야 크게 먹을 것도 없어요. 일정 정도 시행착오는 눈감아 줄 테니까 한국 실정에 맞는 VC를 만들어 보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류지호는 벤처붐에 편승해서 일확천금을 노릴 생각이 없다.

외환위기, 더 나아가 금융위기 시기에도 살아남는 인터넷 기업들의 지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 두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인수합병을 통해 계열사로 편입시킬 수도 있고.


‘정치만 제대로 역할을 해주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조금은 완화될 수 있을 텐데.....’


모든 문제에 있어서 정치 탓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반론을 펼칠 수도 있다.

지정학적 불안도, 기업 지배구조와 회계의 불투명성도, 노동시장의 불합리성도, 외교적 리스크도, 왜곡된 경제구조도,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제정책도, 작전주·테마주가 판치는 시장의 불투명성까지도... 그 모든 걸 바로잡거나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선출권력이다.

일개 기업이 또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 모든 것들이 입법과 행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 중에서 두서너 가지만 해결 되어도 30년 후 코스피 5000도 꿈은 아닐 텐데.....’


류지호가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서 바뀔 것 같지 않았다.

국가와 국민의 역량이 한국전쟁 이래 대도약했음에도.

정치만은 그 시대에 머물러 있을 테니까.


✻ ✻ ✻


가온웨딩 스튜디오는 류지호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회사다.

지난 1980년대 말 웨딩스튜디오 가온은 업계 최초로 압구정동에 진출했다.

90년 초에 신사동의 더 넓고 쾌적한 빌딩으로 이전하며 한 단계 성장했다.

2000년에는 청담동에 지상 7층 건물의 대형주차장을 완비한 본사 사옥을 신축할 예정이다.


“연건평 750평 규모의 웨딩 전문 복합빌딩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원스톱으로 스·드·메 웨딩패키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스튜디오도 테마별로 각각 세분화할 계획입니다. 기존 스튜디오들은 탁 트인 공간에서 두 쌍 이상 촬영을 진행하며 혼선을 빚기 일쑤입니다. 저희는 자연광과 인공조명을 이용할 수 있는 스튜디오 공간의 다변화, 야외정원 등 실외 세트까지 마련할 예정입니다.”

“모든 접객시절의 인테리어 전반에 예비부부들이 편안히 상담 받고 행사를 진행할 수 있게 반영하도록 하세요.”

“예.”


9월 현재까지 재계서열 30위 권 대기업 4곳이 부도를 냈거나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연일 정리해고 뉴스가 도배되고 있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취업의 문 역시 극도로 좁아져만 가고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서울에서만 하루 200쌍 이상이 결혼을 하고 있다.

그에 따라서 웨딩 관련 업체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저가 공세.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상술.

한편으로 업계에서는 과잉경쟁이 치열했다.

바가지상혼으로 웨딩업계에 대한 소비자들의 시선이 예전과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도 (주)가온웨딩은 정직한 영업방식과 품격 높은 상품으로 예비부부들에게 사랑받는 회사로 자리 잡았다.

고품격 웨딩서비스의 대표주자로서 그 명성을 10년 가까이 이어가고 있다.


“정찰제는 절대 깨지 마세요. 그것이 가온웨딩이 장수업체로 자리매김하는 길입니다.”

“예. ‘고객감동’을 모토로 차별화된 토탈 웨딩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늦었지만 부사장 영전 축하해요.”

“어깨가 무겁습니다.”


기획실장이던 정윤규는 현재 웨딩사업 전반을 책임지는 부사장이 되어 있었다.

2000년대 이후 기업에서 등장하는 운영책임자(COO) 포지션이다.

사업총괄본부의 신사업팀을 겸임하면서 새로운 수익모델 개발과 구현까지 책임지고 있다.

일개 경리직원이었던 양주연은 본사 총무부장이 되어 있다.

팀장이었던 윤종원과 박기표는 이사가 되어있었고, 인천 주안점의 박상우는 경영에서 물러나서 전국 지점 포토그래퍼들의 평가와 연수를 책임지고 있다.

사장 심재우는 웨딩업계에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상의 인물이 되었다.


“외삼촌, 정치하시려고요?”


심재우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국회의원들하고 자주 어울린다면서요?”

“가끔 골프 치는 거야. 오해 마라.”

“공연히 정치인들에게 줄 대지 마세요. 만약 그래야 한다면 외삼촌이 하지 마시고, 다온이나 나래안전을 통해서 하시고요. 아니면 비서실에게 넘기시고.”

“그러지 않아도 사적으로는 안 만난다. 현보 작살나는 거 보고, 다들 바짝 몸 사리고 있기도 하고.”

“권력은 십년을 못 넘긴다잖아요. 유통기한 있는 자들과 어울려서 뭐하겠어요.”

“그렇지. 우린 백년은 갈 텐데. 겨우 십년짜리들한테 굽실거릴 이유가 없지. 하하.”


백년까지는 모르겠지만, 심재우는 21세기를 대비한 플랜을 마련해 두고 있다.

2000년 본사 이전과 함께 미국 괌과 LA, 하와이, 동남아시아 등에 해외지점을 설립할 계획이다.


“한국 신혼부부가 선호하는 신혼여행지에서 스냅샷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포토그래퍼는 어떻게 하구요?”

“여행사에 랜드사라고 있지? 그런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어.”

“올 연말이나 내년에 국내 여행사들 많이 쓰러질 거예요. 메이저 여행사 중에서 하나 인수해서 현지 대행사에 스냅샷 서비스를 접목하는 방식도 고려해 보세요.”

“본격적으로 여행업도 진출해 보라고?”

“이번에 닥칠 경제위기만 잘 극복하면 괜찮을 거예요.”


심재우가 정윤규에게 고개를 돌렸다.


“부사장 들었지?”

“신사업팀에서 검토하겠습니다.”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웨딩산업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이 사실이죠. 그런데 살아남는 자가 강자라고 했듯. 최고의 자리에 연연하지 말자구요.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하자구요.”

“작년부터 해병전우회를 비롯해서 여러 단체들과 업무협약을 체결했어. 과거처럼 폭발적인 성장은 하지 못할지라도 현상유지는 가능할 거라고 봐.”


어쨌든 불투명한 시장상황에서도 선전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직원들이 했지. 작년부터 긴축 경영을 해서 월급도 많이 올려주지 못했다.”

“버텨보자고요. 살아남아야 직원들 월급도 넉넉하게 챙겨줄 수 있는 거니까요.”

“다른 계열사들은 다 괜찮은 거지?”

“조금 어려운 곳도 생기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안심이고.”


신경을 덜 썼거나 그간 내버려두었던 회사들도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다.

다들 성공에 취해 방만해 지지도, 무리한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무책임하다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알아서 잘 돌아가는 걸 좋아해야 하는 거겠지....?’


당연히 좋아할 만한 일이다.

오너가 꼭 경영 일선에 나서서 진두지휘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경영을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 이들을 발탁해 동기를 부여하고 명확한 목표를 설정해 주면 된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다 보면 결과를 가져온다.

지금까지 나쁜 결과를 가져온 경우는 없었다.

실망스러운 결과는 있었어도.


작가의말

주말 잘 보내십시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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