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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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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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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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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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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선택과 집중.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학동에 위치한 영화 전문 포스트프로덕션 업체 Blue Cave 스튜디오.

류지호가 김정혁의 안내를 받아 스튜디오 곳곳을 구경했다.

다이얼로그실(후시녹음·내레이션 등 작업), 이펙트실(Effect·특수효과음), 폴리실(Foley·효과음), 앰비언스실(ambience·환경음), 믹싱실(mixing·최종 음향작업) 등 방 마다 일일이 들어가 꼼꼼히 장비와 시설을 살펴보았다.

아직은 WaW 픽처스가 제작하는 인하우스 영화와 제휴 영화사의 작업 일부를 맡아 작업하고 있다.

따라서 직원 수는 많지 않았다.

이전 삶에서 Blue Cave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연간 크고 작은 영화 13~15개의 작품을 소화했었다.

현재는 많아야 5편.

스튜디오 운영과 영업은 전문 경영인 곽기윤 대표가 맡고 있다.

김정혁은 오로지 사운드 디자인과 음향 연구에만 집중하고 있다.


“할리우드는 자본과 인력이 넉넉해서 거대한 믹싱 콘솔로 사운드 편집을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프로툴이었습니다. 컴퓨터가 편집 수고를 크게 덜어줬고, 작업의 효율을 높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쓰고 있는 툴이 Abid의 프로툴이죠?”

“예.”

“미국의 GMG Lab에서도 영화 업무용 툴을 개발 중이긴 한데.... 베타 버전이 나오면 제일 먼저 Blue Cave에서 테스트할 수 있게 해보죠.”

“감사합니다.”


Blue Cave는 전 세계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로 영화 사운드 작업을 했던 음향팀이다.

감히 영화 작업을 개인용 컴퓨터로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시절, 적어도 사운드 분야에서 만큼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음향팀이다.


“김 기사와 직원들은 영화 사운드 분야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을 한 겁니다. 영화 한 편 전체의 사운드를 컴퓨터로 작업한다? 할리우드도 안 해요, 아니, 못해요.”


할리우드 음향 기사들은 처음에 ‘그걸로 되겠어?’란 반응을 보였다.

디지털 기술이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상업영화에서 섣부르게 시도할 수 없었다.

결국 Blue Cave가 하는 방식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된다.

필름에서 디지털 영화로 넘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이른 시간에.


“이 방이 믹싱룸이군요?”


10평이 조금 넘어 보이는 룸에 들어왔다.

프로젝터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었고, 믹싱 콘솔과 그 앞에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있다.


"가장 이상적인 음향 스튜디오는 대형 영화관 수준의 작업실을 4~5개 갖추는 것입니다. 영진공 녹음실을 빼고, ‘리드‘, ‘라이브툰‘ 같은 경우에는 영화에 입힌 사운드가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들리는지 평가하고 싶어도 물리적 여건이 따라가 주질 못하고 있습니다.“

“Blue Cave는 어떻게 하고 있죠?”

“기술시사 전부터 G.O.M 강남점의 1관을 열어줘서, 저희는 극장 상황에 맞는 사운드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극장과 서로 협조가 잘되고 있는 모양이네요.”


G.O.M 강남점의 1관은 THX 인증에서 한 번도 탈락하지 않은 상영관이다.

그곳 상영관에서 만족할만한 사운드가 구현되었다면, 전 세계 극장 중에서 THX인증 상영관에서는 거의 유사한 사운드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충무로에서 유일하게 사운드가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면서요?”

“함께 작업한 감독과 프로듀서들이 칭찬을 하긴 합니다.”

“지금 당장은 영진공 녹음실의 폐쇄적이고 고압적인 태도에 질린 감독들이 많이 찾아올 테지만, 곧 줄어든 한국 영화 편수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할 겁니다. 김 기사야 항상 연구하고 공부하는 분이니까 걱정은 없지만, 직원들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경쟁력은 장비가 아니라 결국 기사들의 센스와 숙련도 아니겠어요?”

“다른 일을 하다가 호기심으로 영화 녹음에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닌, 영화 사운드를 하겠다고 작정하고 들어온 친구들입니다. 저도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믹싱룸을 빠져 나온 두 사람은 접객실로 들어갔다.

손님접대용 소파에 자리를 잡자, 여직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어떻게 드시는지 몰라서, 2-2-2로 타왔어요.”

“다방 커피 좋아해요. 잘 마실게요.”


류지호가 호로록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영화 사운드가 광고나 음악하고 다른 매력이 있죠?”

“재밌습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당장은 욕심도 부리지 마시고.”

“영화진흥공사 간부들도 찾아오고, 오성하고 대유영상사업단 간부들도 들렀습니다.”


영화 사운드가 좋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니 궁금했으리라.

아시아 최고라는 양수리 촬영소가 규모와 시설은 훨씬 좋다.

그런데 사운드의 질에서는 Blue Cave가 더 좋다.

단순히 공기업과 민간업체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래도 왕 노릇하는 영진공 녹음실에 학을 뗀 감독들이 우리 녹음실의 작업을 많이들 궁금해 합니다.”

“영진공 출신들이 나와서 만든 라이브툰도 작업을 시작했다고요?”

“네.”


라이브툰은 97년에, 웨이브캡은 99년에, 아톰시네사운드는 2003년에 문을 연다.

누구는 영화 사운드 분야의 춘추전국시대니 떠들겠지만.

인식의 변화가 전혀 없는 충무로 제작자들로 인해 90년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감독들하고는 원활한 소통이 되긴 해요?”

“항상 감독이 왕이란 생각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감독님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운드 디자이너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저 영화에 들어갈 음향 소스를 만들고 조합하는 기술자라고 생각하지 말길 바랍니다. 소리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하네요. 마치 편집이 제2의 연출이 듯이.”


그저 입바른 소리가 아님을 김정혁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The Killing Road> 사운드 작업을 라이언 클라이스와 어떻게 진행했는지 곁에서 똑똑히 지켜봤으니까.

감독이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을 구현시켜주는 것.

이때는 그 기본조차 누리기 힘든 시절이다.

민간의 녹음 스튜디오가 활성화되면서 경쟁체제가 만들어진다.

그제야 고압적이고 왕 노릇하던 영진공 공무원들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진다.

우수한 녹음기사들이 하나둘 영진공을 떠나 독립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양수리 녹음실로 향하던 영화인의 발길이 한동안 끊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만만디다.

철밥통 준공무원들이라서 일감이 많든 적든 크게 개의치 않으니까.


“3년만 이곳에서 고생해주세요.”

“고생이라니요. 믹싱룸 크기만 양수리보다 작지 시설은 이곳도 훌륭합니다.”

“최고의 시설로 옮겨드린다는 약속은 꼭 지킵니다.”

“사실 할리우드라고 뭐 다르지도 않더군요. 감독님도 잘 아시겠지만 영화 장비는 그들이 쓰는 거나 우리가 쓰는 거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류지호가 마시던 커피잔을 테이블 내려놓았다.


“내년에 옛 콜롬비아스 스튜디오 자리에 트라이-스텔라 스튜디오가 오픈할 예정입니다. 그곳에 들어갈 녹음시설 세팅에 김 기사도 참여해 보세요.”


김정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제가요?”

“할리우드 녹음 스튜디오 시공에 참여하면 뭔가 배울 점이 있지 않겠어요? 물론 김 기사가 전문가란 걸 잘 압니다. 단순히 돈을 얼마 발라서 얼마나 휘황찬란한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 나는 김 기사가 할리우드 엔지니어들의 디테일을 참고했으면 좋겠어요. 게다가 수년 간 녹음 분야에서 나름의 노하우를 쌓은 김 기사의 아이디어도 트라이-스텔라 스튜디오에 반영할 수 있길 바라고.”


김정혁이 기대감을 한껏 담아 말했다.


“노하우라고 할 것까지야.... 아무래도 제가 배울 게 많겠죠.”


할리우드 사운드를 배우겠다고 무작정 미국으로 날아갔던 김정혁이다.

류지호가 판을 깔아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김 기사는 수년 간 광고와 음악 사운드를 작업했던 베테랑입니다. 적당한 시점이 오면 미국으로 넘어가 디지털 사운드의 최신 정보도 얻어오세요.”

“감사합니다.”

“부탁드려요. 김 기사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후배와 후학들도 가르쳐야 합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지금 시기의 연극영화과는 글러먹었다.

영화아카데미나 영상원 역시 오로지 연출과 연기 중심이다.

기술 분야를 배우고 익히는 방법은 오로지 도제 방식밖에 없다.

학교에서 배울 것이 있고, 인턴으로 경험해 볼 것이 있으며, 조수로 익힐 것이 있는 법이다.

재주는 어깨 너머로도 흉내 낼 수 있다.

기술은 시간과 노력으로 축적된다.

10년이 지나면 한국영화의 연출, 촬영 및 CG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다.

상대적으로 못 따라가는 분야가 편집, 사운드, FX, 스턴트 등이다.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곳이 없다.

있다손 쳐도 더 배워야 할 사람이 학생을 가르치는 격이다.


“그걸 왜 네가 고민해?”


황재정이 하는 말이다.


“차라리 기부를 하시는 것이 어떨지...”


도널드 제이콥이 하는 말이다.

류지호는 매년 사회공헌에 수천 만 달러를 쓰고 있다.

충무로 영화인 절반 이상이 소외계층이다.

그들을 위해 돈을 쓰는 것도 사회공헌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1920년부터 B Movie를 통해 자체적으로 인력양성을 했다.

현재 충무로는 감독과 헤드스태프들이 남의 돈으로 실력을 향상시키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것도 A Movie로.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다. 증명하는 자리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었던 전 국가대표 축구해설위원이 한 말이다.

월드컵에 경험을 쌓기 위해 오는 팀이 없듯이 충무로 역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실전 현장이다.


‘오늘 이 시간에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스태프들을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책임은 모든 영화인들과 정책 당국에게 있다.

류지호라고 해서 그 같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류지호는 동료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 성에 차지가 않았다.

잘하길 바랐다.

한국 콘텐츠가 전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던 시기를 경험해봤으니까.

반만년의 온갖 스토리가 넘쳐나는 역사.

근대 이후로 우여곡절을 겪은 경험들.

한국전쟁 이래 다이내믹한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게다가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두셋을 해내는 응용력.

더럽게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소비자들.

판만 제대로 깔아주면 남들이 십년 걸릴 것을 오년 안에 해결할 수 있다.

사실 수십억 원을 들여 영화 한 편을 만들면서 감독과 스태프에게 경험치를 먹여주는 것보다 전문 아카데미를 만들어 인재를 키우는 것이 싸게 먹힌다.


“한국이 아시아의 할리우드, 대중문화의 본산이 되어야겠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곽 대표, 이거 회식비에 보태세요.”


류지호가 곽기윤 대표에게 격려금을 찔러주고 Blue Cave를 떠났다.


✻ ✻ ✻


류지호는 Blue Cave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위치한 VFX업체 WaW Digi Lab을 방문했다.

Hues & Rhythm Studios에서 연수를 했던 다섯 명의 CG맨들이 만든 회사다.

WaW 픽처스의 자회사로 편입되어 있는 상태다.


“아직까지는 영화 분야에서 VFX가 수요가 많지 않지요?”

“주로 광고, TV, 케이블TV 외주를 받아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VFX 업계에서는 기술은 고급기술이지만 그걸 배운 노동력은 되도록 싸게 굴리려는 경향이 있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그렇다.

포스트프로덕션은 시간과 돈을 들이면 들일수록 품질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시간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한 상황에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게 된다.

가장 먼저 깎는 것이 포스트프로덕션 예산이다.


“오성에서 투자한 <건축무한>은 제로원에서 하기로 했다면서요?”

“아쉽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박준우의 표정은 매우 속상해하는 태가 역력했다.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 <건축무한>은 전액 오성영상사업단에서 투자했다.

CG는 업계를 선도하는 제로원이미지웍스가 담당하기로 했다.

80년대 초에 설립된 제로원이미지웍스는 CF 중심으로 컴퓨터 그래픽을 처음 적용한 업체다.

한국 VFX 분야의 선구적인 업체라고 할 수 있다.


“Discreet Logic의 제품군은 쓸 만 해요?”

“굉장합니다.”


박준우가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지 류지호에게 Discreet Logic의 영화용 시각효과 프로그램 Inferno를 시연해 보였다.

몬티리올에 본사가 있는 Discreet Logic은 작년에 주식시장에 상장됐다.

주력 제품이 Flame이었는데, 치명적인 버그가 발견되었다.

한때 1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던 회사가 작년 8,400만 달러로 매출이 둔화되었고, 순 손실만 4,4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당연히 주가가 폭락했다.

GMG Lab이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는 Discreet Logic을 인수했다.


“미국에서 23만 달러에 파는 것 같던데....”

“영화용 Inferno만 그렇고, IFF 통합 제품군은 70만 달러에 구입해야 합니다.”

“할인가격이에요?”

“감독님의 회사인 GMG가 인수하면서 할인가격을 철회했습니다.”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면서요?”

“해결했다고 들었습니다.”


GMG Lab은 Discreet Logic을 자회사로 편입시킨 후 광범위한 구조조정을 시행했다.

먼저 매사추세츠(미), 플로리다(미), 케임브리지(영) 세 곳의 영업 사무실과 아일랜드에 있는 제조 회사를 폐쇄했다.

모두 캐나다 몬티리올 본사와 뉴욕으로 통합 재조정했다.

그에 따라서 100명이 넘는 인원을 감축했다.

남아 있는 전 세계 영업점은 프랑스, 독일, 영국, 홍콩 정도다.

1년 전 인수한 브루게티라는 회사가 개발하던 차기 제품도 중단시켰다.

그 과정 속에서 올해 여름 Inferno, Flame 및 Flint 시스템의 최신 버전을 공개했다.


“<퇴마기록> 작업에 쓰이고 있겠네요?”

“물론입니다.”

“제로원이미지웍스에서도 Inferno를 사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맞아요?”

“<건축무한> 작업을 위해 무리를 한 것 같습니다.”

“영화 작업을 하려면 장비 세팅에 적어도 23억은 들어갔을 텐데.... 어쩌려고.”


제로원이미지웍스는 전 세계적으로 20대도 채 풀리지 않은 시스템을 한국에 들여왔다.

한국시장의 영세성을 생각하면 모험인 셈이다.

WaW Digi Lab은 그 이상의 장비를 갖추고 있지만.

모회사인 WaW 픽처스가 워낙 탄탄한 회사라서 적자가 나도 큰 문제는 없다.

반면에 CF 위주로 작업을 하는 제로원이미지웍스로서는 엄청난 투자가 아닐 수 없다.


“그 만큼 컴퓨터 그래픽 분야가 유망하다는 아니겠습니까?”


매우 유망하다.

문제는 업계만 호황을 누린다는 거다.

CG맨들은 영혼까지 갈려나가며 혹사당한다.

VFX업종이 높은 기술을 요구하는 것은 맞지만, 대부분이 단순 노동이기에.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마세요. 상업영화는 여러분들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시험장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서 완성도를 끌어올려주세요. 앞으로 여러분의 역량을 모두 펼쳐 보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희도 감독님들께 함부로 약속을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에 작업하는 배 감독님은 CGI로 도배된 영화를 찍고 싶지 않다고 하셨고요.”

“많은 걸 보여줄 수 없다고 아쉬워 마세요. 만약 <퇴마기록>이 시리즈로 만들어질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계속해서 발전된 VFX를 보여주게 될 겁니다. 이것도 건드리고 저것도 하다보면 시간, 비용, 여건에 휘둘려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낼 겁니다. 선택과 집중입니다. 화려한 그래픽 기술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영화 퀄리티를 보완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해주세요.”


할리우드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기술력과 역량을 가진 Hues & Rhythm Studios에 연수를 했던 이들이다.

할리우드 주요 VFX 업체들이 사용하는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똑같이 사용하고 있다.

연수 기간 동안 미국의 광고, 뮤직비디오, TV 프로그램, 영화, 애니메이션 등 무수한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실제 참여하기도 했다.

창업멤버들은 열정과 의욕으로 충만해 있다.

<은행나무 침대>의 성공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쯤 이들을 눌러줄 필요성을 류지호는 강하게 느꼈다.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논으로 가는지 산으로 가는지 모르게 된다.

사공이 많아서 성공한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해내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은행나무 침대>로 형성된 판타지장르의 흥행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특수효과 기술을 뽐내는 것보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선택과 집중. 이 두 가지를 절대 잊지 마세요.”

“명심하겠습니다.”


<퇴마기록>의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 읽었을 때 류지호는 내심 만족했다.

배창훈 감독과 원작자가 컴퓨터 그래픽을 고려하면서 각본을 쓰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면연출에 매몰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서사 중심이었다.

최근 WaW 픽처스로 들어오는 장르영화 시나리오 상당수가 이 씬은 CG를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넣었구나하는 생각이 곧바로 든다.

누가 어떤 것으로 성공하면 우르르 몰려가는 전형적인 행태다.

<은행나무 침대> 성공 이후로 고예산 영화들이 많이 기획되고 있다.

서사와 인물을 탄탄하게 구축해 놓고 그것은 더욱 현실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미술이든 CG든 필요한 것이다.


“듣기 싫은 말일지 모르지만, CG 기술을 뽐내고 싶으면 행사용 영상물을 만드는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암튼 <퇴마기록>의 원작자와 배 감독이 좋은 타협점을 찾은 것 같았다.

이전 삶에서는 월향검의 첫 등장을 멋지게 묘사하고 싶은 나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장면에서 월향검을 등장시켜 CG 자랑만 했다.

배창훈 감독은 달랐다.

주인공의 첫 등장부터 월향검을 멋지게 등장시켜 김을 빼는 짓을 하지 않았다.

혈도가 꼬여 한쪽 팔로만 무예를 펼칠 수밖에 없는 현암이다.

게다가 월향검은 더럽게 말을 듣지 않는다.

마치 미운 일곱 살 같다.

그런데 현암이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월향검이 활약을 한다.

월향검의 쓰임새를 아끼고 아꼈다가 중요한 순간에 제대로 써먹는 방식이다.

월향검은 자아가 있어서 스스로 날아다니는 설정이다.

무협소설의 이기어검처럼 월향검이 날아다닐 수 있다는 개연성을 영화 전반부에 깔아놓아야 하는 것이 교과서적인 방식이다.

배창훈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월향검은 현암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

때론 통제를 따라주는 것 같기도 하다.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을 관객에게 심어준다.

게다가 자아가 있는 월향검이 현암에게 감정을 여러 차례 드러낸다.

현암은 그것을 읽지 못한다.

인간과 검 사이의 의사소통이 안 되면서 불협화음이 종종 빗어진다.

그 과정에서 유머도 있고, 답답함도 있고, 쫄깃한 긴장감도 선사한다.

현암은 기연을 통해 엄청난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백퍼센트 활용 못하는 반쪽짜리 초인인 것이 때론 답답해보인다.

기보인 월향검 또한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


‘어찌 보면 관객에게 고구마를 잔뜩 먹이다가....’


클라이맥스에서 현암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월향검이 스스로 날아오른다.

멋지게 현암을 위기에서 구해준다.

이후로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현암과 월향검 콤비가 더 많은 활약이 펼치게 된다.

관객은 이미 주인공들이 악을 처치할 것을 알고 영화를 관람한다.

알면서도 속이 시원해지는 플롯이 관건이다.

현암과 월향검 둘 다 해당되는 전형적인 성장스토리이기도 하고.

류지호는 현암을 중심으로 최대한 단순한 플롯을 주문했다.

CG가 없다고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도 신신당부했다.

그러자 이야기와 캐릭터 중심의 액션 장르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제작자이자 총괄프로듀서인 류지호는 CG보다 미술, FX, 특수분장에 더 많은 제작비를 책정했다.

CG 기술을 뽐내는 어설픈 짝퉁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기획의도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캐릭터 중심의 스타일리쉬한 심령판타지액션스릴러.

류지호가 기대하는 영화판 <퇴마기록>이다.

미국에서 제작되는 Timely의 히어로 <블레이드>의 실사화와 비슷한 접근방식이다.


“김영복 기사와 CG팀 소통은 잘됩니까?”

“저희 의견과 요구를 잘 들어주는 편입니다.”

“다행이네요. 김 기사가 권위적으로 굴면 한 소리 하려고 했는데.”

“컴퓨터 그래픽이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저희를 많이 배려해주고 있습니다.”

“좋네요. 촬영기사가 골질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픈 게 포스트프로덕션이잖아요.”

“이명수 감독님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모든 아이디어를 다 수용할 순 없을 겁니다.”

“비주얼 콘셉트만 잡고 빠지셨습니다.”


미장센과 공간적인 감각이 탁월한 감독이 이명수다.

이명수 감독은 현실을 낯설게 보이게 만드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

류지호는 그를 비주얼 아티스트로 앉혔다.

이명수 감독의 아이디어를 빌려 영화가 판타지 스타일처럼 보이길 기대했다.

배창훈 감독과 이명수 감독은 매우 친분이 깊다.

시나리오를 공동으로 작업한 경험도 많다.

사람과 감정을 잘 다루는 배 감독과 독보적인 영상 스타일을 가진 이 감독의 장점이 잘만 녹아들 수 있다면, 이전 삶에서 완전히 망한 영화보다는 훨씬 나은 영화가 나올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 그런 게 흥행하겠어?

- 억만 장자라고 하더니 돈이 남아도나 봐.

- 본전치기나 하면 다행일 걸.

- 미국에서 잘 나간다고, 충무로에서도 통하는 줄 아나봐.


현재 충무로에서 돌고 있는 <퇴마기록>에 대한 뒷담화다.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감독님. 못난이들이 배 아파서 하는 소리들입니다.”

“개가 짖어도 마차는 갑니다.”


하나회를 척결한 김용삼 대통령이 한 말로 유명해졌다.

아랍 속담이라는 말도 있고 페르시아 격언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부터다.

남자 주인공이 스칼렛 오하라에게 ‘The dogs bark, but the caravan moves on’라고 말하며 원하는 길을 소신껏 밀고 나가라고 충고하는 대사로 알려졌다.


“하하. 예!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노력해도 성공하거나 부유해질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질투가 악의로 변하기도 한다.

앞서 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성장에는 반드시 상처와 고뇌 그리고 시련이 따른다.

어느 한 분야에 수십 년간 몸담아 온 사람을 전문가로 인식하고 성장의 완성을 이룬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타성에 젖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저 정체된 시간들을 그냥 보냈다면 그건 눈속임일 뿐이다.

성장의 한계가 없는 것이 바로 내적 성장이고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긴다.

시대적 문화와 문명의 흐름을 깨닫고 변화의 문명과 가치관의 이탈, 과학, 문화가 새롭게 정의되는 시간과 함께 호흡을 해야 성장은 단계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기술의 습득으로 달인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서 성장이 완성될 수 없다.

류지호는 기술의 성장과 함께 성찰을 통한 내적 성장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철학과 문화적 소양, 분명한 자기의 색깔이 있을 때 비로소 전문가가 되고 그 능력을 인정받고 넓고 깊게 전파되는 법이니까.


작가의말

편안하고 안정된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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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Big Shot. (5) +5 22.11.12 4,361 142 22쪽
332 Big Shot. (4) +6 22.11.12 4,143 134 26쪽
331 Big Shot. (3) +7 22.11.11 4,409 139 25쪽
330 Big Shot. (2) +16 22.11.10 4,408 143 23쪽
329 Big Shot. (1) +10 22.11.09 4,464 145 23쪽
328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3) +9 22.11.08 4,286 141 22쪽
327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2) +2 22.11.08 4,071 133 22쪽
326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1) +9 22.11.07 4,358 138 21쪽
325 사회생활은 인맥이야...! +9 22.11.05 4,491 138 26쪽
324 선택과 집중. (4) +9 22.11.04 4,469 138 22쪽
323 선택과 집중. (3) +10 22.11.03 4,366 148 22쪽
322 선택과 집중. (2) +7 22.11.02 4,728 148 24쪽
» 선택과 집중. (1) +5 22.11.01 4,597 148 24쪽
320 아무 것도 안 해서, 안 돌아가는 일도 있더라. +5 22.10.31 4,578 144 30쪽
319 아무 것도 안 해도 잘만 돌아간다. (3) +10 22.10.29 4,568 146 27쪽
318 아무 것도 안 해도 잘만 돌아간다. (2) +8 22.10.29 4,303 131 22쪽
317 아무 것도 안 해도 잘만 돌아간다. (1) +9 22.10.28 4,564 153 27쪽
316 Celebrity. (2) +8 22.10.27 4,529 148 28쪽
315 Celebrity. (1) +10 22.10.26 4,605 144 27쪽
314 지적인 액션영화는 망할 걸? +4 22.10.25 4,639 155 26쪽
313 엄마는 여한이 없어..... +11 22.10.24 4,572 144 29쪽
312 세계 최초의 D-Cinema! +5 22.10.22 4,513 154 25쪽
311 환경이 아닌 인식의 문제. (4) +4 22.10.21 4,457 143 24쪽
310 환경이 아닌 인식의 문제. (3) +11 22.10.20 4,372 160 22쪽
309 환경이 아닌 인식의 문제. (2) +8 22.10.19 4,470 132 22쪽
308 환경이 아닌 인식의 문제. (1) +6 22.10.18 4,567 155 22쪽
307 괴짜 같은 녀석..... +7 22.10.17 4,512 150 25쪽
306 영화 기술사의 한 획! (5) +13 22.10.15 4,534 162 20쪽
305 영화 기술사의 한 획! (4) +5 22.10.15 4,270 129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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