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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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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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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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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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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사회생활은 인맥이야...!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외환위기 시기에는 전 연령대가 고통을 받는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고난을 겪게 된다.

막 졸업을 하고 사회에 발을 내딛게 되는 개띠, 돼지띠, 쥐띠들도 직격탄을 맞는다.

30대 기업에 들어가는 대기업들과 은행까지도 망하는 시기다.

취업의 문이 극도로 좁아졌다.

돼지띠 대학졸업생들의 상황은 매우 우울했다.

1971년에 태어난 신생아는 102만 4773명이다.

이들 돼지띠들의 국민학교 입학자 숫자는 역대 최대.

한 반의 학생 숫자는 60명이 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80명까지도 한 반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오전반·오후반은 기본이었다.

류지호와 친구들은 어릴 때 군사정권의 집권을 경험해야 했으며, 중학교 2학년 때 86 아시안게임과 고등학교 2학년 때 88 서울올림픽 같은 국가적인 행사를 경험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87년에는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주요 대학가에서는 최루탄 가스가 끊기지 않고 연일 터졌다.

십대 시절이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학창시절 내내 경쟁에 경쟁을 거듭하는 생활이었다.

1990학년도 학력고사 전·후기대학 경쟁률은 그야말로 살인적인 경쟁률이었다.


“재수는 기본, 삼수는 선택!”


이 말이 유행처럼 회자되던 시기가 바로 90년부터다.

고생 끝에 낙이라도 왔던 것일까.

20대에 들어서면서 문화적 풍성을 누렸다.

호프 문화와 노래방 문화를 처음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 돼지띠들이다.

경제성장에 따른 문화 융성 혜택을 누리며 소위 X세대 혹은 오렌지 세대라고 불렸다.

60년대 생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유럽과 미국 문화를 비교적 손쉽게 접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기존의 미국 문화나 한국적 문화와는 또 다른 퓨전 문화를 창조하게 된다.

그런데 운동권 세대 그리고 확연히 달라진 가치관의 80년대 세대 사이에서, 어딘지 낀 세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이들 세대다.

<불길한 청춘>을 구성하는 주요 팀의 퍼스트급들은 되지띠들이다.

류지호가 의도하진 않았다.

이전 삶에서 친했던 동년배들이 막 퍼스트가 될 시점이다.

때마침 <불길한 청춘>을 프로듀싱 하게 되면서 친구들을 만날 수가 있게 됐다.


“너희 둘은 왜 양수리까지 왔어?”

“인상이 더럽게 생긴 출연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영균이형이 내려오라고 하더라.”


보조출연자를 불렀는데, 외모와 체격 등이 박은상 감독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급한 대로 고우찬과 김재욱을 불러들였다.

둘 외에 두 명의 동갑내기 친구도 스태프 숙소 앞 호프집에서 함께 자리했다.

두 사람은 김재욱과는 친구로 지내고 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순박한 인상인 최영웅은 무술팀 퍼스트다.

외모와 달리 도합 15단으로 각종 무술에 능통했다.

작년까지 홍콩 영화계에서 활동하다 귀국했다.

까만 피부에 다부진 체격을 자랑하는 안재민은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터프가이다.

무술팀은 최영웅이 아니라 안재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그 정도로 체구가 당당했다.

실제로는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이면서 학구파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와 두 친구의 우정이 영원하진 않았다.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영화판을 못 버티고 직장을 구해 충무로를 떠났다.

중년이 되어서는 서로 생사만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였던 사실이 류지호의 마음에서 지워진 것은 아니다.

최영웅이 류지호에게 건배를 제안하며 입을 열었다.


"할리우드 스턴트는 어때요?“

“뭐가 어때요?”


고우찬이 버럭 화를 냈다.


“야! 동갑끼리 무슨 감독님이고 씨고 나발이야? 그냥 말 터.”


김재욱도 거들었다.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친구 먹자. 이 기회에.”


최영웅과 안재민이 서로 마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충무로에서 나이와 족보 까고 친구, 선·후배 먹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다.

그럼에도 류지호의 사회적 위치나 위상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덜컥 ‘그러마’ 하기가 어려웠다.

최영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되겠어요?”

“그러게. 감독님은 WaW 회장님이기도 한데.....”


많은 영화인들에게 류지호는 감독이나 제작자 이미지보다는 청년 재벌이 각인되어 있다.

재벌 회장과 동급처럼 여겨지기까지 하다.

언론에서 하도 ‘억만장자’를 부각시켜서 그렇다.

영화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하고.


“충무로에 그런 게 어디 있어. 형이면 형이고 친구면 친구고 동생이면 동생이지.”


고우찬이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김재욱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말이!”


류지호가 생맥주 잔을 높이 들었다.


“친구 먹은 기념으로 거국적으로 건배 한 번 하자.”


류지호가 맥주잔을 내밀며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원샷!”


고우찬의 외침에 모두가 단숨에 생맥주를 목구멍 뒤로 넘겼다.


꿀꺽.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스턴트맨에 대해 물었지? 홍콩영화계하고 똑같아. 할리우드 스타들도 자신과 비슷한 체구와 외모를 지닌 전속 스턴트맨이 있어. 스타 배우가 다치기라도 하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영화사로서도 엄청난 손해잖아. 배우가 스타가 되면 바로 전속 스턴트맨을 정해.”

“스턴트맨도 많죠... 엄청나겠지?”

“정확히는 나도 모르지. 듣기로는 남녀 대역전문배우가 한 6,000명 쯤 된다고 했던 것 같아. 실제 활동하는 배우는 5,000명은 될 거라고 들은 것 같고.”


미국의 스턴트맨은 영화배우조합에 가입되어있거나, 스턴트맨협회에 가입해 있다.

스타들의 리허설을 대신 수행하거나 롱 샷 같은 촬영에서 전문적으로 대역을 수행하는 전문 대역배우들이 따로 존재한다.

그들은 스턴트맨과 달리 위험수당이 없다.


“어휴, 부럽네. 우리나라는 겨우 80명이 될까 말까인데.”


김재욱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겨우? 그것 밖에 안 된다고?”


고우찬이 냉큼 김재욱을 타박했다.


“명색이 제작부장이란 놈이 그런 것도 몰라?”

“모를 수도 있지. 제작부장이라고 그런 것까지 다 알아야 하는 법은 없어.”

“웃기고 있다. 이 자식이 순 날로 먹으려고 들어... 빠져가지고.”

“정신 사나우니까. 니들은 입 다물고 있어 줄래?”


류지호가 만담 분위기로 돌입하려는 두 사람을 조용히 시켰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자, 최영웅이 입을 열었다.


“2년 전에 <두목> 촬영할 때 충무로 다찌마리 배우들이 다 모인 적이 있었어. 그때 격투기 체육관에서 섭외한 학생들 빼고 전문 스턴트가 40명 조금 넘었던 것 같아. 현역으로 뛰지 않는 선배님들까지 포함해야 겨우 백 명을 채울 걸?”

“내년에 권 감독이 액션 스쿨 연다고 들었는데 뭐 들은 거 없어?”

“장소를 알아보고 있는데 쉽지 않은 가 봐. 그 형이 스턴트 분야에서 애를 많이 쓰고 있지.”


권용찬 무술감독은 내년 보라매공원 체육관에 액션만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스턴트를 전문적으로 서비스하는 액션스쿨을 열게 된다.

그 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던 한국 스턴트가 체제가 잡히는 대사건이다.


“넌 권 감독하고 안 친해?”

“그냥저냥. 내가 어릴 때 홍콩으로 넘어가서 일을 하다보니까, 한국의 스턴트맨들하고는 조금 서먹서먹한 데가 있어.”

“작년까지 방가반에 있다가 올해 돌아 온 거야?”

“응.”


방가반은 방사룡으로 대표되는 홍콩의 스턴트집단이다.

홍콩 영화계에는 4대 무술팀이 활동 중이다.

방가반과 함께 홍삼모의 홍가반, 위엔우핑의 원가반, 류자양의 유가반이다.

이들 네 개팀 혹은 그 곳 출신들이 홍콩 영화계에서 고난도의 스턴트 장면을 대부분 작업한다.


“내가 있던 방가반은 팀원 각각의 무술을 개성적으로 선보이는 성향이라면 다른 팀들은 하나의 톤 앤 매너로 큰 그림을 그리는 무술을 시도한다고 보면 돼.”

“지금도 한국인이 방사룡 대역을 하고 있어?”

“응. 올해 개봉한 영화부터. 홍가반에도 선배가 한 분 활동하고 계시고.”

“황정의 감독이 불러서 홍콩으로 넘어 간 거지?”

“군대 제대하고 몸을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는데 <황비홍계열지일대사> 찍으신다고 오디션 보러 오라고 하시더라고.”


황정의는 황민식과 함께 70년대 홍콩에서 활약한 무술가이자 배우다.

90년대 초까지 홍콩에서 영화를 연출했는데, 최영웅이 출연했던 <황비홍계열지일대사>가 마지막 연출 작품이다.

리앙중의 <황비홍> 시리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쨌든 최영웅은 그 영화 이후로 방가반에 발탁됐다.

작년까지 홍콩 영화에서 스턴트맨과 단역 생활을 하다 귀국했다.


“충무로 스턴트맨 대우가 홍콩하고 많이 다르지?”

“별로.”

“별로라고?”


그럴 리가 없다.

이 시기까지도 한국의 스턴트맨들이 일명 ‘으악새‘라고 자조하던 때다.

‘으악새‘라는 말은 주인공에게 얻어맞는 단역이 죽을 때 ’으악’하고 소리치며 죽는다고 해서 붙여졌다.

스턴트맨 역시 단역과 다름없는 신세였기에 스스로 ‘으악새‘라고 부르며 자조했다.

스턴트맨이 전문가 대접을 못 받는 시절이다.

애매한 포지션이라고 할까.

촬영현장에서 배우도 아니고 스태프도 아니다.

그나마 충무로 영화현장은 가족 같은 분위기로 인해 스턴트맨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반면에 방송 현장에 가면 아무도 스턴트맨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홍콩영화도 무술영화에서나 대접받지 다른 장르로 넘어가면 똑 같아. 그리고 여기서 아는 유명한 홍콩 무술팀도 사실 들여다보면 보수도 더럽게 짜고, 군대보다 위계질서가 더 빡세. 먹고 살기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는 애들도 많고.”


김재욱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홍콩 액션영화하면 세계적으로 먹어주는데, 먹고살기 힘들다고?”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는 건 마찬가지야.”


한때 홍콩영화계에는 4대 무술팀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무술팀이 존재했었다. 현재는 거의 대부분이 해체되었다.

한국 상황과 거의 유사한 이유에서다.

엄격한 위계질서 하에서 강도 높은 일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 것에 비해 보수가 매우 짜다.

그 적은 보수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이들까지 있다.

그나마 꾸준하게 영화를 찍는 방가반이나 원가반을 제외하고는 버틸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돈 보고 하는 건 아니지만.”

“얀쯔단은 어때?”

“자기 영화사를 차려서 제작도 하고 감독을 하는 것 같은데... 영화들이 영 신통치 않은 것 같더라.”

“자기 팀은 없고?”

“방가반처럼 집단은 아닌데, 살바티와 겐지라고 마음 맞는 외국계 액션배우들 서넛하고 액션도 짜고 합도 맞추고 하는 걸로 알아.”

“홍콩으로 다시 갈 생각이야?”

“글쎄. 박 감독님이 이 작품 끝나고 시라소니 영화를 찍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더라고.”


박은상 감독과 최영웅은 은근히 죽이 잘 맞았다.

<풍운아>까지 함께 갈 가능성이 높았다.


“대본 받아보고 내가 할 일이 있겠다 싶으면 박 감독님하고 한 작품 더 하는 거지 뭐.”


한국 스턴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영웅의 경력으로 무술지도를 맡는 것도 용납이 안 되는데, 대본을 보고 할지 안 할지 결정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선배가 하자면 하고, 말자면 마는 것이 일반적인 풍조니까.


“영웅아.... 혹시 말이야.”


류지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방가반이나 홍가반처럼 너만의 액션팀을 꾸릴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준다면 할 마음 있어?”

“나만의 액션팀?”


고우찬이 설레발쳤다.


“이야! 영웅이한테도 지호의 마수가 뻗치는 거야?”


김재욱은 한 술 더 떴다.


“무조건 한다고 해. 생각할 것도 없어!”

“니들은 조용히 술이나 마셔.”


류지호의 말에 두 녀석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미국에 내가 투자하는 스턴트 회사가 있어.”

“거기는 팀이 아니라 회사야?”

“Vic & Jay라고. 혹시 황민식 사범님 알아? 홍콩에서 활동하셨던 1세대 한국 무술 배우신데.”

“알지. 지금도 홍콩에서는 기억하는 애들 많아. 캐나다에서 도장하신다고 들은 것 같아.”

“그분 제자하고 함께 차린 회사야. 액션의 설계부터 대역까지 모두 소화가 가능한 팀이지.”

“나더러 할리우드 가서 스턴트맨 하라고?”

“그것도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영어 좀 하냐?”

“조금.”

“중국어는?”

“둘 다 일상 생활할 정도야. 막 잘하지는 못해.”

“미국으로 넘어가서 스턴트맨 해도 되고, 한국에서 스턴트 팀을 꾸려도 되고. 물론 네가 한국에서 스턴트팀을 꾸려도 LA의 Vic & Jay와 교류할 수 있도록 주선 해 줄게.”


난데없는 제안에 최영웅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신음을 흘렸다.


“....음.”


고우찬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뭐가 음이야! 당장 고맙다 친구야 한 마디 하면 끝날 걸.”

“아니... 거... 너무 갑작스러워서.”


최영웅의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오늘 처음 말을 트고 친구가 되었다.

자신의 뭘 보고 투자를 하고, 미국까지 진출시켜준다는 것인지.


“내가 홍콩에서 그렇게 잘 나가는 스턴트맨도 아니었어. 그런데 뭘 믿고?”

“솔직히 말할게. 한국에서 영화를 찍을 때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하고 싶어. 선배들은 아무래도 편하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


거짓말이다.

현재 충무로에서 제일 잘나가는 무술감독과 일을 해도 잘 다룰 자신이 있는 류지호다.

웬만한 무술감독들의 성격과 성향은 다 파악하고 있으니까.

갑 중에 갑인 위치이기도 했고.


“네가 미국에서 영화 찍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똑같이 하고 싶은 거야?”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충무로 액션영화는 달라. 하지만 액션 스타일과 달리 그걸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은 같지. 곧 우리도 미국영화에서 보여주는 액션씬을 연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열정만 가지고는 힘들어. 장비, 노하우, 현지화. 한 사람이 시도하고 연구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더 나아가 여러 사람이 하는 게 더 낫지.”


이런 모습이 성급해 보이는 것도 사실.

그렇지만 류지호는 한가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천천히 친분을 쌓아가며 지원해 줄 여력이 없었다.

워낙 신경 써야 할 것도, 하는 일도 많았으니까.

게다가 인연들이 경력을 쌓아감에 따라 머리가 커지게 되어 있다.

그때 지원해 봐야 늦다.

영화판에서 굴러먹다보면 똥고집도 생기고 자존심을 꽤나 내세우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지금, 손을 내미는 것이 모두에게 좋았다.


“우린 두 번 살 수 없어. 오로지 단 한 번만 살 수 있지.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


류지호의 표정과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마치 한순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잘....!”


고우찬이 실실거리며 대답했다가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류지호는 그의 장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최영웅과 안재민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내가 어른들에게 배운 가르침 중에 항상 가슴에 새기는 것이 있어. 만약 남이 나를 중하게 여김을 바란다면 내가 먼저 남을 중히 여겨야 한다. 내가 돈이 남아돌아서 혹은 너희들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아줘. 영웅이는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는 어떤 스턴트맨보다 액션영화 경험이 많아. 재민이는 충무로에서 제일 기술력이 앞서있다는 다이너마이트의 정두원기사 밑에서 배우고 있고.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한국에서 영화를 찍게 된다면 미국에서 스태프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충무로 사람들과 하고 싶어. 솔직히 지금 상태라면 난 한국에서 영화를 못 찍을 것 같아.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으니까.”


안재민이 물었다.


“차라리 용찬이 형이 하려는 액션스쿨이나 정 기사님 다이너마이트에 투자하는 게 낫지 않아?”

“뭐든 경쟁이 있어야 해. 지금 CG회사가 다섯 개 정도 돼. 녹음실은 3개, 내년에 양수리 포함 5개가 되지. 그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포스트프로덕션에서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어.”


물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과열 되면 문제가 생긴다.

작업 단가를 후려치며 제 살 깎아 먹기 망조가 든다.


“특효와 스턴트 부분은 체계도 없고, 정리가 되어있지 않잖아. 이 상태로 가면 일부 잘나가는 회사가 독식을 하게 될 거야. 그럼 발전은 더디겠지.”

“.....?”

“웬만한 보험사는 직업이 스턴트맨이라고 하면 아예 보험을 안 들어줘. 연기자라고 해서 가입을 해도 현장에서 사고가 나면 보험 조사원들을 잘 속여 넘겨야 보험금을 받을까 말까야. 아니야?”


최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재산이라 할 수 있는 게 스턴트맨이야. 지금 같이 구멍가게도 못되는 동호회 수준인 상황에서 영화계가 나서서 보험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우리말은 아무도 귀담아 듣질 않지.”

“아무리 지원과 장비가 좋아졌다고는 해도 스턴트맨들에게는 항상 부족하게 느껴지지. 제대로 된 안전장비도 없이 라면박스 위로 뛰어내리고 뒹구는 게 현실이야. 내가 그런 열악한 상황을 조금은 바꿀 수 있어. 영웅이나 재민이도 현장 나가보면 알 거야. 감독이 카 액션 하고 싶다고 하면 어느 정도가 한계인지. 아니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을 걸?”


안재민이 투덜거렸다.


“폐차장에서 가져 온 차로 무슨 카액션을 하라고.”

“내가 바꿔줄 수 있어. 적어도 너희가 만드는 회사만큼은.”


최영웅과 안재민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눈동자에 복잡한 심경을 담고 있다.


“충무로에 무술팀과 특효팀이 더 많아져야 해. 화약취급, 총기취급, 각종 특수장비들 그런 것들을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여오거나 영화현장에 적용하려면 개별 회사 힘으로 정말 힘들어. 일개 회사에서는 세관에서 이를 막아버리면 도리가 없으니까. 솔직히 세관원조차도 막기는 하는데, 명확하게 무슨 근거로 통관을 금하는지 알지도 못해. 왜? 적용할 정확한 법률이 없으니까. WaW에 유능한 법률회사 파트너가 있어. 영세한 회사 한 곳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 몇 년 걸릴 일을 재민이와 영웅이 너희들은 금방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야. 내가 도와준다면.”


이전 삶에서 영화에서 실제 총기가 사용되고, 특수효과 책임자가 외국으로부터 불법으로 총기를 들여와 영화 소품으로 공급했다는 혐의로 해당 책임자는 구속되고, 총기들은 모두 압수되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이를 두고 영화 소품용, 그러니까 특수목적용 총기관리가 법적으로 부실했다고 온갖 말들이 쏟아졌었다.

총기관리에 있어 무척 예민한 나라가 한국이다.

사건이 크게 부풀려졌었다.

물론 해당 업체의 잘못이 크다.

속을 들여다보면 관련 법적 장치 마련에 무관심한 영화계와 해당업무를 방기한 공무원들의 책임도 그 못지않게 크다.

자신의 영화에서 실제 총이 나오길 바라면서도 막상 문제가 발생하면 외면하는 이기심.

류지호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할 위치에 있다.

합법적이고 더 나은 방안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조수일 뿐이야.”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했어.”


고우찬과 김재욱이 소리 죽여 쑥덕거렸다.


“오랜만에 지호 방언 터졌다.”

“킥. 저 말빨에 안 넘어갈 놈 없지.“


류지호가 피식 웃으며 두 친구를 구박했다.


“다 들려 이것들아.”

“근데, 스턴트 회사를 차리면 돈이 되나....?”

“그러게. 일 년에 액션영화가 몇 편이나 만들어진다고.”

“스턴트만 해서는 굶지.”

“....?”

“자체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야해.”

“자체 콘텐츠?”

“내가 디맨션필름이라는 영화사를 가지고 있어. 주로 공포영화, 액션영화를 제작하지. 극장 개봉용 영화 위주이긴 해도. 주요 타깃시장은 부가시장이야.”

“나보고 비디오 영화를 찍으라는 거야?”


최영웅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마치 ‘유호’나 ‘한 시네마’ 같은 에로영화를 찍으라는 것으로 들렸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난 액션영화 전문 영화사를 말하는 거야. 또 알아? 네가 GH오락집단유한공사처럼 한국 액션영화를 주름잡게 될지.”

“난 스턴트나 할 줄 알지. 영화 연출은.”

“배워야지.”

“연극영화과나 영화 아카데미에라도 들어가야 돼....?”

“워크숍을 정기적으로 열어 줄게. 촬영감독과 영화감독,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강의를 열어 줄게. 배워. 정창화 감독님은 <셰인>의 프린트를 극장에서 빌려와 한 프레임 한 프레임 돌려가며 연구하고 공부하셨다더라. 그저 몸만 쓸 줄 아는 3D 업종의 스턴트맨이 아니라 당당하게 전문가가 되어 봐. 재민이는 자주 미국으로 출장 오도록 하고. 관련 장비들을 구입해 와서 그걸 한국 실정에 맞춰 개조하거나 변경하는 건 너의 몫이야. 특수효과와 관련된 법률적 도움은 다온 로펌이란 곳에서 해줄 거야.”


김재욱과 고우찬이 쑥덕거렸다.


“저 화려한 말빨.”

“저 자식은 보험을 팔아도 매달 이달의 보험왕은 따 놓은 당상일 거야.”


세 사람은 그들의 만담에는 관심이 없었다.


“.....”


최영웅과 안재민은 류지호의 맑고 깊은 눈과 마주했다.

자신들 같은 조수들이 뭐라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너 좀 한다‘라는 말은 들어봤다.

이렇듯 전폭적인 믿음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그거 해서 먹고 살겠냐고.

빨리 다른 직업을 알아보라고.

대부분이 그렇게 충고한다.

최영웅이 결심이 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할 게. 난 WaW에 취직시켜준다고 해도 널 업고 다닐 판이야. 그런데 팀을 꾸릴 수 있게 해주겠다니 고마울 뿐이야.”


안재민이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하나만 물어볼게.”

“얼마든지.”

“수익분배는 어떻게 하는 거야?”

“난 너희가 버는 돈에 관심 없어. 수익이 생긴다고 해도 재투자할 셈이니까.”

“할게!”

“나도!”


하하하.


류지호가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고우찬이 류지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렇게 좋냐?”

“좋지. 조자룡과 황충 둘을 얻는 중요한 순간인데.”

“얘들이?”

“응.”

“그럼 나는 뭔데?”

“장비?”

“야! 관우도 있고 마초도 있는데, 왜 하필 장비야?”

“큭큭. 제갈량이란 말은 안 하네?”

“그건 먹물 많이 든 재정이더러 하라고 하고. 난 관우할래. 장비는 여기 재욱이가 딱 어울려.”


김재욱이 발끈했다.


“싫어! 난 마초.”

“오오. 삼국지도 알아?”

“나도 대학생이야. 방통대지만.”

“재욱이 많이 컸네.”


류지호는 마치 제일처럼 좋아하는 두 친구를 보며 함께 즐거워했다.


“회사 설립은 내년으로 일단 미루고, 지금 하고 있는 영화부터 끝내. 그러고 나서 우찬이하고 미국으로 와.”

“....?”

“내년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한 편 찍거든. 너희들 혹시 중학교때 <Remo>라는 영화 봤어? 고등학교 때인가 주말의 명화인가 토요명화인가에서도 해 줬을 건데.”

“봤어. 한국사람 나오는 영화.”


한국인 안 나온다.

한국인을 분장한 백인만 있을 뿐.


“내가 그 영화 리메이크를 연출할 거야. 그 영화 인턴으로 참여해 봐. 할리우드 애들이 스턴트와 특수효과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경험해 봐.”


김재욱이 테이블을 탁 치며 항의했다.


“나, 나는!”

“넌 일단 WaW에서 제작실장부터 달고.”

“딴 놈들은 개나 소나 제작실장 다는 데, 왜 나한테만 빡세게 기준을 세우고 지랄이야.”

“너도 개나 소나가 되고 싶냐? 개나 소나 하는 제작실장 달아주라고 추천해 볼까? 박건호 대표가 어떻게 나오나?”


대답을 하지 못하는 김재욱이다.

김재욱이 프로젝트 계약직 제작부장이었다면 박건호 대표가 신경을 쓸 리가 없다.

WaW 픽처스 정직원이기에 관리를 하는 것이다.

고우찬이 입술을 삐죽 내민 김재욱을 향해 물었다.


“영화판에 돼지띠 모임 같은 거 없냐?”

“누가 그딴 걸 만들어?”

“이참에 재욱이 네가 한 번 만들어봐.”

“노땅들이나 하는 친목계냐?”

“사회생활은 인맥이야 쟈샤. 혈연, 학연, 지연... 그리고!"


고우찬이 손가락으로 류지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띠연!”


하하하.


네 녀석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이 보기에 류지호라는 사람은 인맥을 맺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가능한 인물이 아니다.

친구라고 해주는 것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다.


“내 친구라서 하는 말은 아닌데. 지호가 손대거나 투자해서 잘 안 된 게 없어. 너희 둘에게도 뭔가 가능성이 보이니까 투자를 하겠다는 거야. 영복이형도 지호가 <영정사진> 찍을 때 픽업했어. 영복이형 지금 잘 나가지?”


김재욱의 말을 고우찬이 냉큼 받았다.


“곰에서 본부장하는 동석이형은 어떻고.”

“최고와 일하려면 최고가 되어야지. 최소한 충무로에서만큼은.”


김재욱이 거만하게 말하고 반쯤 남은 생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피식.


류지호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김재욱의 말이 우습다거나 가소로워서가 아니다.

어떤 각오가 느껴졌기에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류지호에게는 주식을 팔아 묵혀놓은 자금, 달러, 금으로 비축해 둔 자금, 은행 계좌에서 꼬박꼬박 쌓이는 이자 등 수백억 원이 있다.

VFX, 포스트 프로덕션, FX, 스턴트 팀, 광고기획사까지.

그곳들을 10년 간 아무 문제없이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이 한국의 주거래 은행 계좌에 쌓여 있다.

투자라는 것이 거창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하고 싶을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 역시 투자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투자는 결국 사람에 대한 투자다.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류지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웅아, 이번에는 제대로 대접받으며, 마음껏 액션 영화 찍어봐라.’


작가의말

편안하고 여유로운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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