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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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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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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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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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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The Destroyer. (1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레모 일행이 산에서 내려와 탱크의 캐터필러 자국이 움푹 패어있는 길에 들어선다.

제파마을 이정표는 찌그러지고 총알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이정표를 지나쳐 코너를 돌아서면 피난민들이 나타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쓰였을 법한 매우 낡은 트럭이 길 중앙에 퍼져있다.

남자로 구성된 보스니아계 농민들이 길바닥에 퍼질러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레모 일행이 피난민들을 지나치는데....


(세르비아어)[우리를 가엽게 여겨주세요. 제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레모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한다.


(세르비아어)[다 빼앗겼어요. 모두 다. 집 음식....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은 마을에 인질로 잡혔어요.]


레모가 MI6 요원에게 묻는다.


[뭐라고 하는 겁니까?]


MI6 요원이 영어로 통역해준다.

레모가 스승을 돌아본다.


[나중에 ‘sorry’라고 하지 말고, 미리 ‘sorry’라 하거라.]


구해야 한다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MI6 요원은 무시하자고 한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면서.


[그냥 두고 가면 다 죽을 겁니다. 어떻게 모른 척 합니까?]

[군대가 있대요. 죽을 자리를 알면서 제 발로 걸어가란 말이에요?]

[마을 사람들이 붙잡혀 있다면서요? 특히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이 마을에 붙잡혀 있다잖습니까?]

[우리가 간다한들 모두를 구할 수 없어요. 우리가 할 일이 아니에요.]

[스승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세상에는 늙은 암살자도 있고 과감한 암살자도 있다. 늙었지만 과감한 암살자는 없다. 나를 제외하고는.]


레모 윌리엄스는 위험에 처한 이들을 외면할 수가 없다.

치운은 별 반응 없이 제자의 뒤를 따라간다.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는 모습에서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MI6 요원은 용감하지만 어리석은 사제지간과 함께 할 생각이 없다.


투다다다다!


사제가 마을 입구로 다가가자 느닷없이 기관총 세례가 퍼부어진다.

치운이 털옷을 벗는다.

한복의 소매까지 걷어 올린다.

레모가 알기로 스승은 한 번도 소매를 걷어 붙인 적이 없다.

영화에서 탱크와 대결을 벌일 때도 소매를 걷지 않았다.

치운에게도 이번 싸움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두둥 딱!


판소리 장단에 쓰는 소리북(고장북)이 깔릴 예정이다.

오늘날 전통음악 연주에 쓰이는 한국 전통북에는 20여 종이 있다.

로이 호너는 치운을 위한 테마를 만들기 위해 한국의 전통북 소리를 일일이 채집해 녹음했다.


얼쑤.


오순탁은 마치 로이 호너의 음악이라도 들리기라도 하는 것 같다.


쫙.


허리춤에서 부채를 꺼내 펼친다.


사뿐사뿐.


탱크와 대결할 때는 한량무(閑良舞).

이번에는 호걸(교방) 양반춤이다.

한국 전통춤은 계통도 많고 같은 계통 안에 류도 복잡하다.

한량과 교방은 기방계의 춤이다.

조선 사대부와 한량, 영웅호걸들이 관기(또는 기생)들과 여흥을 즐길 때 추던 춤이다.


타타탕!


마을에서 총알세례가 퍼부어진다.


덩실덩실.


양반춤을 추는 것 같은 몸놀림의 치운은 한 마리 우아한 학같다.

갈지자를 그리다가 빙그르 몸을 회전한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몸을 비틀기도 하고, 훌쩍 몇 걸음을 점프하기도 하고, 공중에서 우아하게 돌기도 하고.

춤인지 무술인지 경계가 모호한 몸놀림으로 마을로 다가간다.

반면에 레모 윌리엄스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방정맞게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사제가 나란히... 아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을 입구의 건물 앞에 도착한다.


툭툭.


치운이 벽을 발로 가볍게 차며 뛰어오른다.

레모는 파쿠르 기술을 활용한다.

사부와 달리 보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방식으로 벽을 탄다.

몇 발 앞 서 훌쩍 옥상으로 올라간 치운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탕.

탕탕탕.


총소리만 간헐적으로 들여온다.


으아아악!


건물 옥상에서 아르칸 반군 한명이 날아오른다.

땅바닥에 처박힌다.


불쑥.


옥상에서 치운이 모습을 드러낸다.


탁.


치운이 활짝 펼쳐진 부채를 접는다.

레모가 사부를 향해 잡아달라는 듯 손을 내민다.

당연히 붙잡을 줄 알았겠지만, 어림없다.


[매정한 노인네.....!]

[세계 최강의 암살자는 귀가 밝아서 제자가 오줌지리는 소리도 다 들린단다.]


액션 시퀀스 위주로 촬영을 해나가다 보니 류지호는 재미가 없었다.

감독인 자신이 할 일이 많지 않았으니까.

대신 숙소에서 비디오로 녹화한 그날그날 촬영분을 편집하면서 놓친 부분이나 아쉬운 점을 점검했다.


✻ ✻ ✻


제파마을의 건물 내부의 모든 장면은 LA의 세트에서 촬영할 예정이다.

원래 사람이 살지 않던 마을이다.

마이크 리바의 미술팀이 폐허마을로 새롭게 꾸며놓은 야외 세트다.

이곳에서는 외부 장면만 모아서 촬영했다.

윌리 워커의 분량은 실내 촬영이 많았다.

때문에 오순탁과 스턴트 더블 위주로 촬영했다.

오순탁의 더블은 엔리께(Enrique)라는 이름의 히스패닉 스턴트맨이 수행했다.


“혹시 저거 대유로고 아니야?”


마을 세트 곳곳에서 한국인에게 익숙한 기업 로고가 보였다.

대유 자동차의 로고다.


“대유자동차 동유럽 법인이 협찬을 좀 해 줬거든. 일종의 서비스라고 할 수 있지.”


부서지고 망가진 차량이 많이 필요했다.

폐차 직전의 대유 자동차를 구할 수 없었다.

폐차장에서 일본차들은 쉽게 구했다.

과감하게 일본차를 불태웠다.

정확한 모델을 알아볼 수 없게 훼손시킨 후 대유 로고를 슬쩍 부착해 놓았다.

대놓고 카메라에 담지는 않았다.

화면에 걸리면 담기는 것이고, 아니면 마는 것이고.

자동차 PPL 계약을 독일 국민차 브랜드와 했기 때문에 대놓고 대유 브랜드를 노출하긴 상도의상 미안했다.


“생각해 보니까, 네가 미국에서 찍은 영화들에 한국 브랜드가 잘 안 나오는 것 같더라. 재벌들하고 사이가 별로 안 좋아?”

“한국 기업들이 날 제대로 못 써먹는 거지.”


JHO Company 산하 영화사들에게서 연간 20편 가까이 영화가 제작된다.

투자·배급 하는 영화까지 포함하면 45편이다.

한국 기업과 PPL 계약 협상이 아주 없진 않았다.

번번이 결렬되고 있다.

류지호가 중간에서 조율을 해주고 싶어도 양측의 이견이 상당했다.

한국기업들은 할리우드 영화 PPL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했다.

자기들이 갑인 줄 안다.

협찬을 해주는 입장이라 생각해서.

착각이다.

톱스타가 나오는 블록버스터는 물밑에서 PPL 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치열하다.

JHO의 오너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만만하게 접근하다보면 큰 코 다친다.


“모르면 내게 물어나 보든가. 무조건 도와달라고 매달린다고 되나...?”

“이번 영화는 얼마나 받았어?”

“대외비.”

“아, 미안!”


할리우드 영화 PPL 금액, 지원 규모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영화사와 기업이 직접 협상하는 경우도 드문 편이다.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중간에 PPL을 연결해주는 전문 에이전시를 끼고 협상한다.

만약 PPL계약이나 기업명 노출과 관련된 계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에 기업 로고가 보인다면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가령 LA 시내를 촬영하는데 무심코 특정 기업 광고판이 화면에 잡힌다면, 영화사에서 반드시 이에 대한 허락을 구한 후 영화에서 노출해야 한다.

해당 기업이 노출을 거부한다면, CG로 PPL계약이 되어 있는 기업로고로 바꾸게 된다.

어쨌든 한국기업들은 할리우드 PPL에서 경쟁력이 없다.

그런 주제에 갑의 위치에서 접근하다가 번번이 기회를 놓치기 일쑤다.


‘오성 휴대폰이 <매트릭스> 몇 편에서 노출되더라.....?’


<매트릭스>에 오성이 특별 제작한 휴대폰이 등장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걸 계기로 한국기업들의 할리우드 영화 PPL의 개념과 접근방식이 바뀌게 되지 않을까 류지호는 추측했다.

오성전자가 PPL를 따내기 위해 저자세를 보이면서 최선을 다하게 되니까.


[놈들이 달아나는데요?]

[쫓지 마라.]


사제의 인간적이지 않은 무력에 반군이 마을에서 달아난다.

끝까지 따라가 모두 죽여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치운이다.

그런데 잔당 추격을 막는다.


[스승님....?]

[입 다물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치운이 마을 중앙의 교회당으로 들어간다.

동네주민들 상당수가 이미 죽어있다.

마치 처형이라도 당한 것처럼....

레모는 혹시나 생존자가 있지는 않나 교회당을 샅샅이 뒤진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없다.

치운은 꼼짝 하지 않고 교회당 벽과 바닥만 뚫어질 듯 쳐다본다.

벽과 제단 바닥에 불길한 문양이 새겨있다.

판타지 소설이나 코믹북에서 볼 수 있는 소환마법진이다.


(세르비아어)[구세주여!]


어느 틈엔가 돌아온 피난민들이 사제에게 뜨거운 환호와 감사를 보낸다.


[정의가 뭘까요?]

[내가 정의다.]

[에휴.]


딱!


한숨 쉬는 제자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치는 치운이다.


[너도 정의고, 오늘 우리 손에 죽은 적들도 정의다.]

[.....!]

[단, 정의는 완벽할 때만 옳다.]

[어쩌면 제가 저들을 더한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어요.]

[선행은 잘못된 이유로 행하여지더라도, 여전히 선한 것이다.]


바닥에 엎어져 절까지 하는 피난민들 사이에서 MI6 요원 홀로 서 있다.


[당신들 정체가 도대체 뭐죠?]

[세계 최강의 암살자와 두 번째로 강한 암살자죠.]

[스파이가 아니라 암살자....?]

[네가 아무리 잘나도 너보다 나은 사람이 늘 있다는 말을 평생 들어 왔을 것이다. 그게 나다.]


MI6요원은 뻔뻔하게 제 잘남을 지껄이는 치운을 보며 말을 이을 수 없다.


[아무도 믿지 않으면 놀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법이지.]

[이제 그만 마을을 떠나죠. 눈이 오기 전에 산을 넘어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은 눈이 오지 않아. 눈이 오기엔 너무 춥기 때문이지.]


레모 윌리엄스가 시체를 모아놓은 곳에 불을 놓는다.

MI6 요원은 그 광경을 마이크로 카메라로 이를 은밀하게 촬영한다.

레모와 치운을 찍는 것인지, 화장하는 광경을 찍는 것인지.

아니면 둘 모두인지.


[왜 이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일까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혼돈도 있어야 한다.]

[시난주의 계승자는 그런 혼돈을 제 위치로 돌려놔야 하는 거고요?]

[모두가 자신과의 전쟁을 한다. 인간의 삶은 투쟁의 연속인 법.]

[전쟁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다시 전쟁의 한복판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아들.]

[....네?]

[바르게 행동하고 정의를 사랑하며 자비를 행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다.]


액션 시퀀스들이 한창 몰아치다가 한 템포 쉬어가는 장면이다.

레모 윌리엄스는 제임스 본드나 에단 헌트처럼 완성된 스파이도 액션영웅도 아니다.

시리즈화 된다면 완성형에 가까워지겠지만.

레모 윌리엄스 캐릭터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깔려 있다.

미숙한 아이가 아버지라는 존재와 갈등하고, 어머니 품을 극복하고 어른이 된다.

이를 성장물에 대입하면, 미숙하거나 트라우마를 가진 주인공이 현실에 직면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한 명의 어엿한 성인이 되는 서사라고 설명할 수 있다.

스파이더맨이자 소년인 피터 파커를 이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개념으로 설명하게 되면 인물과 서사구조의 분석이 명확해진다.

질풍노도의 청소년기.

피터 파커는 초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가 되어서도 여전히 실수가 많다.

그저 이웃의 친절한 영웅이 되고자 할 뿐이었다.

그런데 슈퍼 악당과 원치 않은 대결을 벌여야 한다.

실연도 당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자리도 얻어야 하는 등.

슈퍼 히어로라는 설정 빼고는 공감할 수 있는 면이 많은 캐릭터다.

그래서 가장 사랑 받는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캐릭터의 고민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니까.

소재와 서사 고갈로 고심하고 있는 할리우드 프로듀서들을 향한 교훈을 준다.

허구한 날 소재 고갈 타령하지 말라.

소재가 문제가 아니라 서사가 문제라고.

류지호가 TCU 창작위원회에 기대하는 것도 그것이다.

강력한 빌런을 창조하기에 앞 서, 그들의 신념과 생각을 먼저 알아야 한다.

초창기 작가들이 캐릭터를 어떻게 창조하게 되었는지.

현대에 와서 그것이 어떤 식으로 계승 발전해야 하는지.

그런 재정립 없는 TCU는 겉만 화려한 액션 전시회만 될 뿐이다.


❉ ❉ ❉


“밥 먹었냐?”


<Remo : The Destroyer> 제작진이 슬로바키아의 작은 마을을 지나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예전 한국에서도 그랬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을 치룬 나라들은 ‘밥 먹었냐?’가 인사인 것 같더라.”


강화도 외가 어른들의 안부인사 역시 언제나 ‘밥 먹었냐’다.

경호팀을 지휘하는 파벨 노보트니가 말을 보탰다.


“전후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에 배고픈 참상의 굴레라고 할까. 옛 유고연방 국가들에서는 공통적인 안부인사죠.”

“이제 그 안부인사도 오늘내일로 끝이네.”


슬로바키아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있다.

로케이션 대미를 장식하는 장면은 폭파 씬이다.

제파마을을 재현해 놓은 야외 세트 전체를 폭파할 예정이다.

실제 역사에서 미국이 보스니아 내전에 개입하면서 나토가 주요 세르비아계 반군 진영에 무차별 공습을 가했다.

그로인해 세르비아군의 포로가 된 일부 UN군 병사들이 쇠사슬로 몸이 묶여 나토 공습에 방패막이 되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결합했다.

아르칸 부대는 레모와 치운에게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것으로 피의 복수를 한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치운은 영화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너무나 강력한 살심을 드러내서 주변 사람의 피부에 닭살을 돋게 만들 정도다.

결국 제자인 레모를 미국으로 보낸 후, 홀로 보스니아에 남는다.


[복수는 내가 대신 해주지.]

[......]

[물론 공짜로!]


치운이 다시 한 번 소매를 걷어 올린다.

힘든 싸움이라서 아니다.

제대로 화가 났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다고 오순탁이 성난 연기를 과장해서 표현하지는 않았다.


“부동심이지?”

“사실은 비정한 거죠.”

“세계 최강의 암살자는 결코 따뜻한 사람일 수 없겠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벌레 죽이듯 죽여 왔을까요? 일반적인 인간성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겠죠.”

“그래서 레모의 역할이 중요한 거고. 맞지?”

“예. 레모를 통해 부정을 느낀다는 것은 치운이란 캐릭터 역시 성장한다는 거고 그를 통해 입체적인 인물이 되는 거니까요.”


치운 캐릭터의 핵심은 암살자의 부정(不情)과 부모로서의 부정(父情)이다.

레모 윌리엄스처럼 청년이 어른이 되는 성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시리즈를 거치며 치운의 성격이나 태도가 뚜렷하게 변한다.

불변하는 캐릭터는 죽은 캐릭터다.

살아서 변화해야 한다.

정이 없던 치운이 레모로 인해 정이 생긴다.

의뢰가 아니면 사람을 죽이거나 임무수행을 하지 않는 치운이 보스니아에서 학살당한 죄 없는 민간인들을 대신해 공짜로(?) 복수를 해준다.

캐릭터가 변한 것이다.

그리고 시리즈가 계속되면 레모를 위해 희생까지 각오할 정도로 인간다워진다.

암튼 치운의 복수는 짧게 몽타주로 처리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주인공인 윌리 워커가 장식한다.


두두두두.


하늘에는 항공촬영을 위한 헬기가 떠있다.

지상에는 파손을 각오한 ARiCHⅢ 카메라를 비롯해 다섯 대의 카메라가 세팅되어 있다.

하늘을 수놓는 폭격기의 폭탄비는 CG로 채워진다.

대신 대규모 폭발로 쑥대밭이 되는 마을은 대부분 실사다.


콰과과과광!


특수효과팀은 야외 세트 중앙의 교회당만 남겨두고, 건물 모두를 폭파시켰다.

장관이다.

이 한 장면을 위해 엄청난 화약이 소모됐다.

당연히 폭발과 화염에도 CG가 조금 가미될 예정이다.

여담으로 이 폭파씬에 들어간 비용보다 마을을 정리하고 청소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간다.

물론 미국처럼 깨끗하게 치워지지 않는다.

치우는 시늉만 한다.

어차피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었기에.

그리고 뒤처리 비용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제작진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야외 세트장을 시원하게(?) 날려버린 <Remo : The Destroyer> 제작진이 오스트리아로 철수했다.

배우들은 슬로바키아에서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제작파트는 뒷정리와 정산 및 미국에서 가져온 장비들을 DHL 특수화물 운송에 맡기는 일 등을 처리했다.

배우와 스태프들을 배웅한 류지호는 미국이 아닌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와 연말 휴가를 한국에서 보내기로 했다.


“영화 찍고 있다며?”

“촬영 중에 무슨 휴가야?”


류지호를 반갑게 맞이하긴 했지만, 가족들은 뜬금없는 귀국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배우들하고 연말 휴가 보장에 관해 계약을 했어요.”

“미국은 별 걸 다 챙겨가면서 일한다.”

“장시간 해외 로케이션을 진행해서 중간점검도 필요하고요.”


류지호는 크리스마스부터 연말까지 한국의 한남동 집에서 보냈다.

(주)가온의 의장비서실 외에는 한국에 들어온 사실도 몰랐다.

새해가 밝자마자 류지호는 미국행에 올랐다.

도착지는 LA가 아닌 애틀랜타였다.


❉ ❉ ❉


<Remo : The Destroyer>의 투자·배급사 트라이-스텔라가 언론에 촬영현장을 공개했다.

첫 미국 촬영부터 이벤트를 벌이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류지호로서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촬영현장 공개는 영화 제작기간 중에 중요한 이벤트 중에 하나기 때문이다.

언론공개 당일 오전에는 camera car 세팅과 리허설이 주로 이루어졌다.

각종 매체의 기자들이 촬영현장에서 배우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는 모니터 스테이션 주변으로 한정되었다.

배우들의 대기 장소인 트레일러 근처로는 접근조차 못한다.


“크리스와 샘처럼 영화로만 보던 어마어마한 포스의 배우들이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한다. 크리스는 내가 원하는 그대로 하는 편이라면 샘은 매 테이크가 다 다르다. 두 배우의 차이를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다.”


류지호는 Variety지 기자와 인터뷰했다.


“디렉터 류가 영화를 찍는 방식은 정말 놀랍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획되어 있다. 내가 찍어야 할 것뿐만 아니라 영화의 모든 것들이 스토리보드로 완벽하게 작성되어 있다.”

“더 놀라운 건 지호는 스토리보드가 머릿속에 다 들어 있다는 거다. 심지어 편집까지 머릿속에 다 돼 있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또 다른 형태의 천재다.”


윌리 워커와 앨리나 와츠가 류지호에 대한 극찬을 늘어놓았다.

듣는 류지호의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는 매우 까다로운 감독이긴 하지만,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내 연기법과 해석을 존중해줬다. 그는 매우 친절하며 스마트한 사람이다.”


리보비치 마시코프가 통역을 통해 한 말이다.

크리스 워컨이 웃으며 말했다.


“사석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자리를 가지면 보통의 청년이다. 하지만 촬영에 들어가면 마치 20년 동안 영화감독을 해온 사람 같다. 내 또래처럼 느껴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샘 잭슨이 말을 보탰다.


“진지하게 지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혹시 이중인격이라거나 아퀼리안 왕자 아니냐고.”


아퀼리안 왕자는 <맨 인 블랙>에 등장하는 외계종족 캐릭터다.

기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미스터 류는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제 확실해졌군. 녀석은 지구인이 맞았어.”


샘 잭슨의 농담에 크리스 워컨이 낄낄거렸다.


“아참. 지호를 외계인에 비유했다고 인종차별적인 발언했다고 쓰진 말아줘. 난 깜둥이고 지호는 매우 미끈하게 빠진 섹시한 아시아 청년이자 내 이웃이고 형제니까. 난 지호에게 깜둥이라고 부를 정도로 형제같이 지내고 있다는 걸 알아줘.”


샘 잭슨과 크리스 워컨의 인터뷰는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장난과 농담의 연속이었다.

말실수 한 마디가 기사거리로 돌변해 가십이 되기도 하지만, 두 배우는 기자를 능수능란하게 상대했다.

평소 친분이 있는 기자이기도 했고.

미국 촬영부터 옵저버로 합류한 안재민과 고우찬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류지호에게 다가왔다.


“표정이 왜 그래?”


류지호가 오만상을 구기고 있다.


“스테이지 들어갔을 때 현장 공개를 했어야지.... 아휴....”

“원래 다 하는 거라면서?”

“촬영하기 바빠 죽겠는데. 성가셔.”


연예인처럼 구는 할리우드 감독도 많다.

특히 뮤직비디오나 광고계에는 자기들이 연예인줄 알고 허세 가득한 감독도 많다.

주로 20대 젊은 감독들이 그렇다.


“애늙은이....”

“니들이 말 안 해도 지겹게 듣고 있어.”


성가시고 귀찮은 촬영장 공개 이벤트가 끝났다.

점심 식사 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애틀랜타에서 진행되는 촬영 역시 액션 시퀀스가 대부분이다.

레모 윌리엄스와 콘 맥클리가 아르칸 테러리스트들이 보스니아 평화협정을 방해하려는 음모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Remo : The Destroyer>는 SF영화가 아님에도 CG가 꽤 많이 들어갈 예정이다.

애틀랜타 시내에서 벌어진 카 체이스 장면에서는 자동차 액션 자체보다는 배경 연출을 위해 CG를 활용할 계획이다.

방송중계팀으로 위장한 아르칸 테러리스트들이 협상이 열리는 건물에 승합차를 놔두고 사라진다.

레모 윌리엄스가 승합차를 몰고 애틀랜타 시내를 질주한다.

승합차 안에 협상장 반경 수 킬로미터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슬로바키아 평원 질주장면보다 난이도가 높았다.

애틀랜타시 당국으로부터 촬영허가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하루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출퇴근 및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은 이틀 간 총 10시간뿐.

도심에서 자동차 질주 장면을 촬영하는 데 10시간이면 미국에서는 기본이다.

어떻게든 촬영을 마치긴 한다.

<Remo : The Destroyer> 제작진은 애틀랜타 시내 촬영을 마치고 외곽지역으로 이동해 똑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촬영했다.

포스트프로덕션에서 두 곳에서 촬영한 장면을 바탕으로 3D로 복원한 배경과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진 군중을 만들어 합성하게 된다.

자동차 내부와 주인공의 연기 부분은 2주로 예정된 스크린 프로세스 촬영 때 모아서 찍을 예정이다.

류지호는 사전시각화 (Previsualization)를 통해 철저히 준비했다.

제작진들과는 동유럽에서 충분히 손발을 맞춰봤다.

따라서 애틀랜타 촬영에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시간에 쫒기는 것만 빼고는.

애틀랜타에서 5일 간 촬영을 진행했다.

그 과정은 마치 정교하게 맞물리는 톱니바퀴 같았다.


❉ ❉ ❉


류지호가 친구들과 함께 호텔 근처 펍으로 들어왔다.

고우찬과 안재민은 동유럽 로케이션에 함께 할 수 없었다.

정식 크루가 아니기 때문에 데려갈 수 없었다.

최영웅의 경우는 Vic & jay팀의 일원으로 등록됐다.

<Remo : The Destroyer> 엔드 크레디트 스턴트 섹션에도 들어간다.

류지호가 맥주 한 병을 비우고, 바텐더에게로 향했다.

막 맥주를 주문하려는데.


“헤이.”


밝은 갈색의 숏커트의 백인여성이 인사를 했다.


“헤이.”


키가 꽤 커서, 170Cm 정도는 되 보였다.

평범한 재킷에 가죽바지 차림의 여자는 제법 미인이라 불릴 만 했다.

물론 일반인들의 눈높이에서.

류지호처럼 온갖 인종 및 국가의 미남미녀를 자주 접하는 입장에서는 눈이 휘둥그레 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류지호는 바텐더가 맥주를 내주길 기다렸다.

그런데 한 남자가 여자에게 수작을 걸었다.


“헤이.”

“헤이.”

“어때요?”

“좋아요.”


여자는 시종일관 시큰둥했다.

마치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는 듯이.


“내가 한 잔 사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그쪽이 키가 더 커지고 섹시해 져요? 유부남이 아닌 게 되고?”

“유부남 아닌데....?”

“반지 빼는 거 봤어요.”

“....!”

“펍에서 여자들에게 집적대는 것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아내에게 돌아가요.”


남자가 여성에게 시원하게 딱지를 맞았다.

류지호는 둘의 모습에 별 감흥이 없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꽃에는 벌이 꼬이기 마련이니까.


“가죽바지 때문인가 봐요.”


류지호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바지를 입어야 남자들이 귀찮게 하지 않을까요? 치마를 입기는 싫은데....”


그녀는 류지호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군복을 입어요. 차라리.”

“예?”


미모의 여자가 류지호를 향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열심히 기억회로를 돌렸다.


“남자들은 다 세병 쯤 마시면 싱글이 되나요?”

“글쎄요. 난 네 병째 마시고 있어서.....”

“아, 그러시구나. ...음. 적어도 동부 출신은 아니군요?”

“좀 멀리서 왔죠.”

“혹시 남부는 아니겠죠?”

“.....남부?”

“서부 남자들은 바이크를 타고, 남부 토박이는 여자 사촌을 타죠.”


하하.


류지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일 해요?”

“사람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해줄까 그런 고민을 하는 일을 주로 하죠.”

“......?”

“영화 촬영 때문에 애틀랜타를 방문했어요.”

“아!”


그제야 여자는 류지호를 기억해 냈다.


“혹시... 지호 류?”

“날 알아요?”


당연한 질문이다.

촌구석(?)에까지 자신이 유명할것 같진 않았다.

미국 동남부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를 촌구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마는.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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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Destroyer. (13) +7 22.12.10 4,143 145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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