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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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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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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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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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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쪽

왕족만이 왕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백에 넣어놔서 지금 없어요.”


류지호가 주머니에서 스타텍 이리듐(StarTac iridium)을 꺼내 샤논에게 내밀었다.


“전화번호 찍어 봐요.”

“피! 전화도 하지 않을 거면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열심히 자신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돌려주는 샤논이다.

류지호는 그녀가 찍어준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혹시 99개 전화번호를 이런 식으로 모두 채운 건 아니겠죠?”


최신폰 스타텍은 전화번호가 99개까지 저장된다.


“내 휴대폰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샤논은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네네. 영광이에요.”


초거대 미디어 그룹 손녀와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이 전혀 없다.

회사 근처 펍에서 퇴근 후 간단하게 술 한 잔 하는 소탈한 모습도 좋아 보였고.

물론 혼술하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근데 지호....”

“뭐가 또 궁금하죠?”

“투자회사 수익률이 굉장하다면서요? 주식은 어떻게 투자하는 종목마다 대박을 치는 거죠? 혹시 비법이라도 있나요?”

“나는 주식 잘 몰라요.”

“농담하지 말고요. 주식을 모르는데 어떻게 주식투자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는 거죠?”

“저기 매튜 그레이엄 보이죠? 그를 중심으로 아주 유능한 인재들이 알아서 투자를 진행한 답니다.”

“소문하고 영 딴 소리를 하네요. 그럼 영화는요?”

“내 전공이 뭐에요? 영화잖아요.”

“그렇다고 투자하는 영화마다 대박이 나요? 손해 보는 사람들이 들으면 당장 지호의 멱살을 움켜잡을 것 같은데.”

“그 또한 유능한 직원들이 될 만한 영화를 골라냈기 때문이에요. 난 될 만한 영화에 돈을 넣은 것뿐이랍니다.”

“그래도 백 퍼센트는 말이 안 돼요.”

“설마 집안에서 신문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 말을 다 믿는 건 아니겠죠?”

“할리우드 영화 투자에는 약간 도박성이 있잖아요. 할리우드 역사상 트라이-스텔라처럼 수익률을 낸 스튜디오가 없다고 하던데요?”

“포트폴리오의 차이겠죠. 내 자랑 같지만, 난 창작자들을 존중하는 편이라서....”

“잘 만들고 돈 퍼부어 홍보해도 관객이 안 봐 버리면 그걸로 손해 보는 게 영화 흥행일 텐데....”

“진짜 잘 만든 영화는 어떻게든 관객이 봐주기도 하죠.”

“지호, 혹시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거나, 상처를 많이 받았나요?”


잘 나가다 튀는 질문이 나왔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적당히 대답을 내놓았다.


“부모님은 매우 자상하고 착하신 분이랍니다.”


“지호의 눈을 보고 있으면, 마치 사연이 많은 사람 같아요.”


과거로 돌아오고 얼마 동안은 이런 이야기에 찔끔했다.

이젠 아니다.


“내 눈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그런 것이 아니라..... 뭐 랄까....”


듣지 않아도 류지호가 잘 안다.


“어릴 때 본 책에서 한번 바닥을 찍은 사람은 위로 올라가기가 힘들다고 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 밑바닥이 늪이기 때문이라면서. 절망, 포기, 패배... 신념이든 열정이든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는, 다시는 몸을 일으킬 수 없는 맹독의 늪이라고 표현하더군요. 그런데 늪에 빠진 사람이 어떤 계기로 마른 땅으로 올라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일단 다시는 그곳에 빠지고 싶지 않겠죠.“

“그렇죠. 늪에 빠져 죽고 싶지 않다면. 그렇다면 다시 길을 갈 때도 신중하게 움직이게 되지 않을까요? 다시 그 끔찍한 경험을 하고 싶진 않을 테고, 절망 속에서 죽어가고 싶지 않을 테니까.”

“제일 좋은 건 바보처럼 늪에 빠지지 않는 거예요.”

“맞아요. 현명한 사람이라면.”


세상에는 류지호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절대 다수다.


“그래서 지호는 그런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다? 그래서 복잡하고 생각이 많은 눈을 하고 있다?”

“정확하네요.”


샤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몇 살 때인가?”

“16살 즈음이었던 것 같네요.”

“굉장히 조숙했네요. 지호는.”

“하하. 그래서 애늙은이라는 말을 지겹게 들었어요.”

“내가 너무 오랜 시간 지호를 붙잡고 있었나 봐요.”


샤논의 말에 류지호가 주변을 힐끗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언제 자신의 차례가 올까하고.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볼 때를 기대하죠.”


류지호는 그녀와 다음을 기약하고 다른 무리로 스며들었다.

류아라는 두 서너 명의 청년으로부터 대시를 받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술을 과하게 마셔서 취기가 올라온 것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일행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미성년자인 그녀에게 알코올을 서빙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부아아앙.


류지호 일행이 호텔 정문에서 자신들의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노란색 도이트(doge) 바이퍼가 먼저 들어왔다.

대표적인 아메리칸 머슬카 바이퍼는 10만 달러가 넘는 고가의 스포츠카다.

바이퍼의 주인은 다름 아닌 샤논 챔버스였다.


“지호, 캘리포니아에서 봐요.”


샤논 챔버스가 자연스럽게 노란색 바이퍼 운전석에 올라탔다.

류지호는 그녀가 소탈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완전히 수정했다.

소탈한 사람이 한화로 1억을 훌쩍 넘기는 고가의 차량을 타고 다닐 리 없으니까.


“저 언니, 엄청 터프하네....!”


류아라의 설레발에 류지호가 피식 웃어버렸다.

왠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류지호는 엄청난 부자다.

그럼에도 한인타운에서 육개장을 먹고, 비싼 와인 대신 버드와이저를 주로 마신다.

그런데 거주하는 곳은 수천만 달러짜리 호화 주택이고, 타고 다니는 차량은 수십만 달러짜리 커스텀 리무진이다.

소탈한 것이 아니라, 취향이 그런 것일 뿐.

일반 대중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류지호는 이번 자선행사에서 나름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Carmike Theatres, Tox Enterprises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었다.

창업주의 3세가 경영에 직접 뛰어들어 무조건 실패만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언론 재벌 Tox Enterprises의 함장은 창업주의 손자 존 C. 케네디였다.

샤논 T 챔버스의 삼촌이다.

성이 다른 건 어머니의 배다른 형제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CEO로 취임한 이래 Tox Enterprises의 수익이 18억 달러에서 147억 달러로 껑충 뛰었다는 사실이다.

샤논의 삼촌은 1972년 Tox Enterprises에 입사해 리포터, 광고 세일즈, 카피 에디터 등의 분야를 전전하며 실무 경험을 쌓은 것으로 유명했다.

직계 자손이 최고경영자가 되기까지 16년이란 기간 동안 경영수업을 받은 셈이다.

그것도 밑바닥부터.

다수의 3세 경영인들이 경영 수업의 일환이라는 명목으로 자사에 입사해 경험을 쌓는다.

한국 재벌가의 경우 3세가 임원급으로 승진하는데 평균적으로 3.8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대기업 공채로 입사한 일반 신입사원이 임원으로 올라서기까지 평균 19.9년이 소요되는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뚜렷하다.

재벌 3세들이 회사 말아먹는 거야 류지호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한국 재벌 기업의 주식을 꽤 많이 소유하고 있는 부분 때문에 살짝 우려가 들긴 하지만.


‘뭔가 놔두고 떠나는 이 찜찜함은 뭐지?’


LA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류지호는 연신 애틀랜타를 돌아봤다.

뭔가를 두고 떠나는 기분이다.

호텔을 나서기 전 가방을 다시 한 번 꼼꼼히 훑어보기도 했다.

빼놓은 것은 없었다.

옛 인연 그리고 새로운 인연.

세기말 초입 애틀랜타에서 류지호의 과거와 미래가 짧게 교차했다.


❉ ❉ ❉


회사를 퇴근한 샤논 챔버스가 단골 펍으로 들어왔다.

바에서 컵을 닦고 있던 흑인 노인이 샤논을 반겼다.


“나왔어요. 자말.”

“어서 오세요. 아가씨.”

“아가씨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입에 붙었는데 쉽게 떨어지겠습니까? 허허.”


샤논 챔버스가 볼멘소리를 했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까지 그러느냐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말 T 제퍼슨(Jamal T Jefferson)은 선대부터 Tox 가문에서 종사했다.

말이 좋아 종사다.

예전에는 Tox 가문의 노예 신분이었다.

남북전쟁 당시에 Tox 가문의 가주가 자말의 선조를 비롯한 1,000여명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면서, 자말의 선조에게 미들 네임을 허락했다.

이후 자말까지 Tox 가문에서 집안일을 하다가 지난 70년대 완전히 독립했다.


“매일 마시던 걸로 드릴까요?”

“네.”


자말이 술을 준비하는 사이 미첼이 펍으로 들어와 샤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자말, 나는 데킬라로 줘요.”


샤논이 걱정을 담아 물었다.


“요즘 계속 독한 술만 마시는 것 같던데?”

“말리지마.”

“데이커는?”

“그 개자식 말은 꺼내지도 마! 그 바람둥이 자식 정리할 거니까!”

“매일 그러더라.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이번엔 진짜 끝낼 거야. 아주 괜찮은 남자를 발견했으니까.”

“나와 맥주나 한 잔 해. 데킬라는....”

“데킬라를 트집 잡지 마. 신이 인간을 고문하려고 내린 위대한 선물이니까.“

“언니, 마음은 알겠는데, 과음은 곤란해.”


자말이 칵테일과 데킬라 한 잔 각자 앞에 놓았다.

미첼이 데킬라를 단숨에 비우고 자말에게 물었다.


“어떻게 봤나요?”

“뭘 말인가?”

“지호 류....”


샤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말을 쳐다봤다.


“자말도 지호를 봤어요?”


미첼이 대신 대답했다.


“매트로 애틀랜타에서 제일 큰 주류도매업을 하는 자말이 그제 자선행사에 초대받는 건 당연하잖아.”

“근데 나는 왜 자말을 못 봤지?”

“아쉽지만, 자말은 실버 초청장을 받았으니까.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자말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대단한 청년인 것 같더군.”


자말 제퍼슨은 샤논 챔버스에겐 깍듯하고 미첼에게는 퉁명스러웠다.


“그건 우리 모두 아는 이야기고요.”

“매튜 그레이엄이라는 망나니가 그의 곁에 있더군. 안색도 많이 맑아졌고, 술과 마약을 끊었다는 얘기가 되겠지.”


샤논이 그럴 리 없다고 단정했다.


“말도 안 돼....마약이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건가요?”

“나야 알 수 없지요.”

“샤론 가만 있어봐. 그래서요?”

“자선모금에 함께 온 사람 중 데본 테럴이란 사람이 있어. 군 시절부터 대쪽 같은 성품으로 유명했다지. 물론 정치를 할 줄 몰라 끝내 별을 달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CIA로 옮겼으니 결과적으로 커리어는 화려하게 마감한 셈이지만. 그와 군 생활을 함께 한 부하들에게 신망도 두텁고.... 가장 중요한 건 그 청년이 파커와 그레이엄 가문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야.”

“그래서 평가는요?”

“친구.”

“가족이 아니라요?”

“그는 한국인이야.”

“국적이 무슨 상관이에요? 그는 헨리 게이츠보다 훨씬 어린나이에 자수성가한 남자라고요.”

“.....?”

“샤논 멋지지 않아? JHO 오너와 Carmike 손녀의 결합.”

“데이커는?”

“지호 류에 비하면 하찮고 하찮은 인간이지. 자신이 누구 덕에 지금의 위치를 누리고 있는지 모르고 천방지축 까부는 멍청이!”

“데이커를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사랑이 어디 있어? 부와 부의 결합이라고. 비슷한 수준의 사람과 만나야 하는 거야. 데이커 봐봐. 그 천한 자식이 제가 잘나서 지금의 위치에 서 있는 걸로 착각하잖아.”


미첼이 약혼자를 신나게 씹어대고 있을 때, 샤논은 자말과 눈을 마주쳤다.

못 말리겠다는 듯이.


“아가씨는 대화를 나눠보셨지요? 어땠습니까?”

“한국인이서 그런 건지. 겸손해요. 일단 거들먹거리지 않더라고요.”

“한국인들은 자녀교육에 엄격한 면이 있습니다.”

“대학에서 사귄 한국친구들은 안 그렇던데요?”

“대체로 그렇다는 겁니다. 가끔 한인 가정에 아동학대로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벌어지니까요.”

“왓!”

“아동학대?”


미첼과 샤논이 깜짝 놀랐다.


“문화의 차이입니다. 그들이 자녀를 훈육하는 방식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미첼이 테이블을 ‘탁‘ 치며 말했다.


“그 문제는 중요하지 않아. 암튼 충고 고마워요. 자말.”

“다들 아는 이야기만 말했을 뿐이야.”

“샤논, 넌 지호 류에게 관심 없어?”

“그는 파티장에서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었어.”

“맞아.”

“그래서 나도 빛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난 누구의 액세서리로 살고 싶지 않거든.”

“혹시...?”

“아니, 나를 위해서.”


미첼과 자말이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샤논은 그녀의 아버지처럼 Tox 그룹에 대한 야망이 없었다.

배우, 무용가 및 안무가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고 여행을 즐기는 20대 아가씨였다.

막대한 부를 상속받았기 때문에 부를 축적하고 싶은 욕심도 없었고.


“그를 보니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살아왔는지 알 것 같아. 그의 여동생조차 자신의 삶의 방향을 명확하게 하고 있더라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않고.”


류지호는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거대한 기업을 일궈냈다.

비록 파커와 그레이엄의 후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해낼 수 없는 업적이다.

미국의 청년 창업가들처럼 회사를 대기업에 팔아 부를 이루지도 않았다.

할아버지 세대가 했던 방식처럼 주춧돌을 하나하나 놓듯 기업을 성장시켜 나가고 있다.

그녀가 보기에 배울 점이 많은 기업가다.

비록 경호원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꼴이 그다지 멋져 보이지 않았지만, 친구들과 펍에 출입하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올드맨의 향기가 물씬 풍기기는 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거나, 사랑에 빠진 건 아니다.

다만 호감이 생긴 것만큼은 확실했다.


“샌프란시스코로 옮기게 되면 그와 가까이 지내려고. 배울 게 많은 사람 같아.”


미첼이 짐짓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 네가 그런 마음이라면, 이 언니가 눈물을 머금고 양보를 해야 하잖아.”

“지호와 사귄다고는 말 안했는데?”


자말 제퍼슨이 끼어들었다.


“샤논 아가씨.”

“예. 자말 아저씨.”

“과거의 왕족들이 같은 왕족하고 혼인하는 이유를 알고 있지요?”

“강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요.”

“아닙니다.”

“.....?”

“왕족만이 왕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문가문 후손에 비해 류지호는 손색이 있다는 의미를 돌려선 전달한 것이다.

물론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아냐. 자말의 말은 무시해. 지호와 사귀겠다면 내가 도와줄게.”


미첼이 샤논의 손을 꼭 잡았다.


“누가 지호와 사귄다는 거야?”

“친한 언니가 돼서 동생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봐야하지 않겠어, 샤논?’


미첼이 은근슬쩍 샤논의 맥주를 데킬라로 바꿔치기 했다.

속아 넘어갈 샤논이 아니다.

샤논은 데킬라를 한쪽으로 치웠다.

그 모습에 슬쩍 눈길을 줬던 미첼이 입을 열었다.


“난 호리호리한 남자는 별로 던데....”

“속도 꽤 알찬 사람 같아. 몸이 단단하더라고.”

“그건 어떻게 알았어?”

“헤어질 때 포옹하면서.”

“어머나, 그 짧은 시간에?”

“태권도를 십 년 넘게 수련하고 있대.”

“갑자기 벗은 모습이 궁금해지는 걸.”


미첼의 말이 점점 야해졌다.

자말이 두 아가씨가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었다.


❉ ❉ ❉


LA로 복귀한 류지호는 매일 Tri-Stellar Studios로 출근했다.

자신의 전용 스테이지 JH. R.은 물론이고 건너편의 800평 스테이지 두 곳에 <Remo : The Destroyer>의 세트를 지어 놨다.

풀 세팅 된 세트에서의 촬영은 어려울 것이 없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 같다.

계획한 대로 착착 촬영이 진행됐다.

류지호는 스토리보드 대로 빠르게 하루하루 촬영분량을 지워나갔다.

영화, 영상에서 색감이 갖는 능력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때로는 장르를 대표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를 대표하기도 하며, 가끔은 브랜드를 대표하기도 한다.

셀 수도 없이 쏟아지는 영상의 대홍수 속에서 어떻게 본인만의 영화에 맞는, 영화 작업에 꼭 맞는 색감을 찾고, 소위 룩(Look)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류지호는 마이크 리바와 레이먼드 쿤디 같은 유능한 크루와 일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안 것은 별로 없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을 새삼 되새기는 기회였다.

한편으로는 롭 B 리처드슨이 얼마나 대단한 촬영감독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작업 만에 그가 그리워질 줄이야....’


레이먼드 쿤디도 좋은 촬영감독이다.

다만 류지호는 롭 리차드슨과 좀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레이먼드 쿤디는 상업영화에 특화된 촬영감독이다.

특수촬영장비에 대한 아이디어가 대단히 뛰어났다.

물론 VFX에 대한 이해도도 훌륭하고.

롭 리처드슨이 빛과 색, 분위기, 심리묘사 쪽을 먼저 떠올린다면, 레이먼드 쿤디는 기능적인 요소들을 먼저 떠올린다고 할까.

그래서 롭 리차드슨은 묵직한 쇼트들이 하나로 합쳐질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면, 레이먼드 쿤디의 영상들은 화려한 쇼트들의 연속성이 뛰어났다.

둘 모두 할리우드에서 손에 꼽히는 촬영감독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개성과 스타일이 다를 뿐.

촬영의 기본은 빛과 색, 그 다음이 구도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촬영감독은 대칭 구도로 안정감을 주다가도 어떤 순간에 그 안정감을 깨줌으로서 해서 긴장감을 주고 다시 안정감으로 복구시켜놓는다.

<Remo : The Destroyer>는 굉장히 움직임이 많은 영화다.

때문에 등장인물의 움직임만큼이나 카메라 무빙도 매우 중요했다.

레이먼드 쿤디는 특수촬영장비들을 적재적소에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다.

테크노 크레인이나, 스태디 캠은 기본이고, 헤드 고정레버를 풀어서 PAN과 Tilt를 자유롭게 오갔다.

특히 고정카메라 촬영 기법을 잘 썼다.

고정카메라 촬영은 단순한 촬영방법에 비해 결과물이 상당히 재미있는 기법이다.

한마디로 피사체에 카메라를 묶어두고 촬영하는 방법인데, 대상이 되는 피사체를 제외한 다른 것들만이 움직이는 신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상은 고정되어 있어 위, 아래, 옆 등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보면 상당히 신기한 느낌을 선사한다.

레모 윌리엄스가 숲 속에서 아르칸 반군에게 쫒기는 장면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애틀랜타 주차타워에서 토로가 콘 맥클리에게 제압되는 상황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리보비치 마시코프에게 고정카메라를 설치한 후, 그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다가 바닥에 쓰러지는 장면이다.

인물과 카메라가 동시에 같은 속도로 쓰러지기 때문에, 앵글이 변함으로 해서 꽤 재밌는 쇼트가 만들어졌다.

2010년대 한국 예능에서 액션카메라를 달고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진다.

이 당시만 해도 고정카메라 기법은 거의 사용할 일이 없었다.

카메라 무게가 워낙 무겁기 때문에.

줌 인 트랙 아웃(Zoom in Track out)과 그 반대 기법도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현기증 효과라고도 불린다.

전설적인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이 <현기증>.에서 처음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카메라가 줌 아웃 하는 동시에 카메라가 올라가 있는 트랙이 피사체에 다가가면서 촬영하는 기법이다.

피사체 크기는 그대로이지만, 줌 아웃 되면서 배경이 더 많이 더 깊게 보이는 극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주로 누군가 사랑에 빠졌다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마주하거나, 인물이 겪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관객에게 시각화해 보여줄 때 사용된다.

류지호는 환상적인 공간으로 이동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다.

레모 윌리엄스가 처음 보스니아에 잠입했을 때, 폐허가 된 마을에 서있는 모습과 테러를 막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헬기를 기다리는 평원에 서있는 레모 윌리엄스 장면에서 쓰였다.

이는 일상성에서 판타지적인 공간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현실적인 세계로 돌아왔음을 관객에게 인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참혹한 내전이 벌어지고, 인종말살 같은 반인륜적인 행태가 벌어진 보스니아를 평화로운 오스트리아와 미국과 분리시켜 강조하는 동시에, 치운의 비현실적인 무력을 판타지에 가두려는 의도도 있었다.

일상성에서 판타지로 넘어갔다가 아주 현실적인 것으로 끝맺음하는 것.

류지호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바다.

판타지지만, 그 안에 현실을 담아내는 것.

단편영화부터 꾸준히 일관되고 보이는 일면이다.

일례로 <Life Goes On>에서 스탭프린팅 기법을 중요하게 사용한 것과 같이.

암튼 상업영화라고 할지라도 풍자가 들어가지 않으면, 인문학적 요소가 들어갈 여지가 없게 된다.

소영웅주의나 미국 만세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풍자를 녹여내는 것이 중요하다.


삶과 죽음의 여주인.


보스니아 내전 당시 민간인 고문, 포로 살해 등을 자행한 보스니아계 크로아티군 소속 바시츠라는 여성의 별명이다.

세르비아계 반군의 악당이 토로라면, 보스니아계 악당의 상징이 바시츠다.

실제로 바시츠는 보스니아 법원에서 14년형을 선고받았다.

법정에서 증언대에 선 증인들은 그녀가 포로의 이마에 십자가를 새기고, 휘발유를 마시게 한 뒤 얼굴이나 손을 불을 붙이거나 벌거벗긴 채 깨진 유리 위를 기어 다니도록 했다고 진술했다.

<Remo : The Destroyer>에서 이 역할은 영국 출신 여배우 제시 맥티어가 연기했다.

그녀는 185㎝의 큰 체격과 싸늘한 표정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몇 차례 격투 장면도 남자 배우 못지않은 박력으로 소화해냈다.

영화의 독특함은 무엇보다 캐릭터에서 나온다.

무시무시한 군인이자, 잔인한 고문기술자가 여성이라는 점이 <Remo : The Destroyer>라는 판타지액션영화의 또 다른 흥밋거리다.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다.

베테랑다운 풍모를 과시한다고 해야 할까.

무릎 아래 길이의 정장 스커트, 몸에 꼭 맞는 재킷, 실크 스카프, 진주 목걸이까지.

첫 등장에서 중산층 귀부인 또는 고위 공무원으로 보이게 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상한 풍모와는 이질적으로 핸드백에서 총을 꺼내 순식간에 목표물을 해치운다.


[시간이 필요한가?]


사람을 죽이기 전 묻는 그녀의 음성에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담겼다.

영화에서 단 몇 장면에만 등장한다.

그럼에도 제시 멕티어는 이야기를 뛰어넘어 분위기로 압도했다.

워낙 피지컬이 좋은 여배우라 그 에너지가 항상 현장 가득 묵직하게 존재했다.

육체적인 힘이 아니다.

연기 내공이 탄탄했다.

그녀 역시 앨리나 와츠처럼 항상 조용히 류지호과 가까운 위치에 앉아서 시나리오를 들여다봤다.

조연급이라 그리 많은 부분에 나오지도 않고,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에 어떤 기품과 맛을 불어넣어줬다.

이전 삶에서는 류지호가 몰랐던 배우다.

작업을 하고 나서 제시 맥티어에게 높은 점수를 주게 됐다.

제시 맥티어의 마지막 출연날이다.

보스니아의 시골 가정을 영화적으로 재해석해 만들어놓은 세트에서 액션 장면 촬영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제시 맥티어의 키가 185Cm라 스턴트 더블은 여성이 아닌 남자 스턴트맨이 수행했다.

스턴트 더블은 제시가 입었던 똑 같은 옷을 입고 헤어스타일도 맞췄으며 특수분장으로 제시의 얼굴과 몸매를 거의 비슷하게 재현했다.

제시 맥티어가 골격이 큰 편이어서, 스턴트맨이 꾸며도 크게 어색한 점이 없었다.

레모와 치운이 제파마을에 억류되어 있는 마을 주민을 구하기 위해 아르칸 반군과 전투를 벌인다.

그때 고문기술자 바시츠(제시 멕티어)가 마을 주민 사이로 스며든다.

시골 아낙네처럼 추레한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땟자국으로 위장까지 한다.

주인공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MI6 요원은 그녀에게서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하고 의심한다.

두 여배우가 이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은 이미 슬로바키아 야외세트에서 촬영을 해 두었다.

방안에 들어온 이후부터 촬영을 진행하면 된다.


“레디! 액션!”


제시 맥티어가 앨리나 와츠를 위해 방문을 열어준다.

앨리나 와츠가 감사를 담아 살짝 눈웃음을 보이며 먼저 안으로 들어간다.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퍽.


제시 맥티어의 공격이 시작된다.

벽으로 밀친 후 팔뚝으로 앨리나 와츠의 목을 지그시 누르더니...


퍽.


제시의 주먹이 앨리나의 옆구리에 꽂힌다.

두 여자의 치열하고 처절한 결투가 벌어진다.

두 여성 스턴트 더블은 마치 종합격투기(MMA) 스타일의 자세를 취했다.

UFC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90년대 초였다.

일부 지역에서 소규모로 행해질 때는 정치권에서 금지시켜야 할 스포츠라며 법률제정운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그래플링 방식의 UFC가 허용돼, 미국 전체 주 가운데 20개주가 허가하는 등 날로 세력을 넓히고 있다.

4년 전만 해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격투기 경기에서 4천여 명의 관중을 동원했다.

최근에는 3배 이상의 폭발적인 관중동원력이 보여주고 있다.

유료 케이블채널 시청자도 약 20배나 폭증했다.

또 패러마운틴 계열의 스팍TV에서 방영된 경기는 케이블 TV사상 격투 종목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인간 닭장싸움.


온갖 폄하로 금지 목소리가 많았다.

오히려 마니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UFC 경기에서는 물어뜯기, 머리카락 잡아당기기, 침 뱉기, 눈 찌르기, 사타구니 때리기, 욕설, 속임수 등이 금지된다.

<Remo : The Destroyer>에서는 경기 룰을 따를 이유가 전혀 없다.

온갖 반칙과 세트 안의 지형지물과 소품을 마음껏 이용한 액션 디자인이 나왔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뒤에서 목을 조르면 소파를 지지대삼아 상대를 벽 쪽으로 밀치고, 벽에 머리를 부딪쳐 벽에 구멍이 뚫리는가 하면, 손에 잡히는 물병으로 상대의 머리를 가격하고, 상대의 팔이나 손목에 꺾기 공격이 들어오면 이를 교묘하게 피해나가고, 안다리 걸기 같은 기술을 선보이는가하면, 제시 맥티어가 나이프를 손에 쥐는 순간 현란한 칼리아르니스 기술이 폭발한다.

비좁은 방안에서 두 사람은 엉켰다 떨어졌다 밀쳤다 넘어졌다... 한 쉬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물론 쇼트를 끊어서 촬영했다.

실제 촬영에서는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앨리나 와츠는 가짜 대결이었지만, 제시 맥티어와 연기하며 큼지막한 바위를 상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영화상에서는 앨리나 와츠가 더 뛰어난 요원이다.

팽팽한 대결을 넘어 끝내 승리자가 되어야 했다.


“너 변태냐?”


고우찬이 류지호에게 다가와 시비를 걸었다.


“웬 개소리야?”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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