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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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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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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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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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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휴식의 완성은 업무죠!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다음 날 아침 일찍 무주리조트로 김영찬이 찾아왔다.

혼자 오지 않았다.


“인철 선배도 왔네요?”

“오랜만에 뵙네요. 감독님!”


<영정사진>에서 아들로 출연한 박인철이 함께 왔다.


“어떻게 된 게 나이를 안 먹어. 우리 류 감독은?”

“한 달 늘어지게 쉬어서 살이 좀 쪘어요.”

“류 감독이 저기 윗동네서 놀아서 나와 인철이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겠어. 이제...”

“무슨 말씀이세요. 두 분은 제게 영원한 동지입니다.”

“영원한 배우가 아니고 동지야?”

“그 말이 그 말입니다.”

“책 쓰러 한국 들어왔다고?”

“겸사겸사요. 박 선배는 어떻게 지냈어요?”

“최근에 공연 하나 끝냈습니다. 다음 달부터 드라마 찍을 것 같습니다. 단역이라 출연분량은 많지 않습니다.”


처음 감독과 배우로 만나서 그런지 박인철은 깍듯했다.

반면 김영찬 배우는 류지호와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고향 후배라는 생각에 편하게 대했다.


“최근에도 연극해요?”

“연극세상이라고 작년에 만든 극단에서 이강복 작가님 연극 한 편을 올렸습니다. 운 좋게 배역을 맡아 4월 말까지 공연했습니다.”

“혹시 <느낌, 안양 같은>이요?”

“<물고기 사내>라고 작가님 신작입니다.”


연극 <물고기 사내>는 남해안 양식장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세태 풍자극이다.

브로커에 속아 양식장을 산 주인공들이 적조현상으로 쫄딱 망한다.

때마침 유람선이 암초에 부딪쳐 침몰한다.

시신을 찾으러 유족들이 양식장으로 몰려들고, 주인공은 사례를 바라고 시신을 찾으러 바다로 나간다.

찾아와야 할 시체 대신에 산 남자를 구한다.

보상금을 받기 위해 주인공 부부는 살아남은 남자가 죽기를 바란다.

결국 남자는 양식장에 빠져 죽는다.

‘익명의 폭력’과 ‘나만의 안락’을 쫓는 개개인의 이기심을 통해 무엇이 우리사회를 황폐화시킨 원인일까라는 질문을 직설화법으로 묻는 연극이다.

유명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류지호의 기억에 없는 연극이다.

어쨌든 박인철은 류지호에게 불청객이 아니다.

자신의 두 번째 인생 첫 영화에 출연한 배우였니까.

반대로 박인철에게 류지호는 은인이다.

류지호가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첫 단편에 출연했던 자신을 알아봐주는 이들도 많아졌으니까.

게다가 잠시 스쳐지나갔을 법한 인연임에도 잊지 않고 먼저 찾아주는 의리가 있는 감독이었고.


“다 쉰 거야?”

“휴식의 완성은 업무 아니겠어요?”


류지호가 두 사람에게 출력된 종이 묶음 한 부씩을 나눠주었다.


“이것 한 번 읽어보세요. 보고 돌려줘야 합니다.”


두 사람은 대번에 영화 시나리오란 걸 알아차리고는 바쁘게 페이지를 넘겼다.

류지호는 두 배우가 조용히 시나리오를 읽을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피해주었다.


“인철아, 이 책이 류 감독 다음 작품인가 보다.”

“할리우드에서 찍을까요?”

“대본이 한글로 적힌 거보니 한국에서 찍을 모양인데?”


시나리오를 모두 읽은 두 배우가 속닥거리자, 베란다에 나가 있던 류지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읽은 시나리오는 완고가 아니에요. 올해 찍을 것도 아니고.”

“....?”

“영찬 형님은 내년 상반기부터 살 좀 찌우세요.”

“무슨 역할인데? 나 할리우드 진출하는 거냐?”

“배역은 아직 말씀드릴 수 없어요.”


김영찬이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박인철을 향해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박인철이 곧장 고개를 크게 끄덕여보였다.


“박 선배는 특별히 살을 찌울 필요는 없어요. 대신 두 사람 다 검도를 배워둬야 합니다.”

“.....검도?”

“따로 검도장 등록할 필요는 없어요. 최영웅이라고 무술감독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곧 스턴트 사무실을 열겁니다. 거기로 나가서 배우면 됩니다. 그 친구가 내 영화 무술감독을 맡을 거라서 맞춤 지도를 해줄 겁니다.”

“언제부터?”

“그 전에, 전라도 사투리는 좀 하세요?”

“사투리는 기본이지.”

“드라마용 사투리 말고, 네이티브로요.”

“어색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긴 한데....”

“형님, 감독님은 완벽주의자잖아요. 전라도 사투리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할 것 같습니다.”


김영찬이 슬쩍 류지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래야겠지....?”


단편영화를 찍을 때도 매우 꼼꼼하게 작업했던 감독이다.

할리우드에서 블록버스터 영화까지 찍고 있는 지금은 더 하면 더했지 덜 할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시나리오를 공개한 게 많이 이른 감이 있어요. 내년 가을에나 촬영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

“그 사이 놀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내 영화 찍기 전에 영화 두 편에 먼저 출연을 했으면 해요.”

“......?”

“강요나 권고가 아니에요. 감독한테 소개만 시켜주는 겁니다.”


소개라 쓰고 낙하산이라 읽으면 된다.

낙하산 펼칠 필요도 없다.

그냥 정확하게 그 자리 가서 꽂히는 거다.


”무슨 영화인데?“

“배창훈 감독의 <퇴마기록> 후속편과 박은상 감독의 <풍운아>요.”

“....음.”


두 배우가 고개를 돌려 서로를 쳐다봤다.

다소 뜬금없는 낙하산 캐스팅이었기 때문이다.


“오디션은 봐야 할 거예요.”

“그 배역이 전라도 사투리를 써야 하는 모양이지?”


끄덕.


박인철이 거두절미하고 바로 승낙했다.


“저야 기회를 주시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김영찬은 다소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세 편 모두 액션영화네....?”

“캐스팅 된다고 해도 두 사람은 액션연기는 하진 않을 겁니다. 특히 영찬 형님은 그간 TV드라마에서 보여주셨던 캐릭터와 유사할지도 몰라요.”

“오디션은 언제 보는데?”

“그건 조감독이 따로 연락을 하겠죠.”


김영찬이 류지호의 손을 덥석 잡으며 감사를 전했다.


“류 감독, 고마워.”


류지호는 슬그머니 손을 빼며 농담을 던졌다.


“설마 나와 일할 때보다 연기가 퇴보하진 않았겠죠?”

“우리가 연기짬밥이 몇 년인데....! 내가 영화 출연이 뜸해서 그렇지 꾸준히 연극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있어. 나는 날로 먹는 배우가 아니다.”


김영찬이 자신이 연기 기술자가 아니라 배우임을 강조했다.


“알죠. 다시 영화에서 만나기 전까지 조선 시대 전라도 사람이 막 튀어나온 것처럼 사투리가 입에 완전 붙어있을 거라 믿어요.”

“걱정 마라. 완벽하게 준비해 놓고 있을 테니.”

“그리고 혹시 두 사람 소속사 있어요?”

“우리 주제에 무슨 소속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영찬은 매니저가 있었다.

일감이 떨어지면서 재계약이 물 건너갔다.


“매니지먼트 CHAN 아세요?”

“김혜주 있는데?”

“예.”

“알지. 거기 애들 일 잘한다더라.”

“소속사가 두 분 일 봐주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두 배우는 입을 다물었다.

일이 많지 않은 두 사람으로서는 소속사와 수익을 나누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자신들을 위해 열심히 배역을 따줄 것 같지도 않고.


“서울 올라가면 CHAN 대표와 미팅 한 번 해보세요. 거기 연극배우들도 많이 소속되어 있어서 박 선배는 대학로 연극배우들 몇 다리 건너서 알아보면 그곳 사정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예. 감독님!”

“올해와 내년까지는 <퇴마기록>과 <풍운아>에 집중해 주세요. 출연료는 섭섭지 않게 책정되어 있을 겁니다. 오늘 읽은 시나리오에 관해서는 언론보도 나가기 전까지 함구하시구요.”

“신경 써줘서 고맙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김영찬과 박인철이 동시에 고마움을 표했다.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술 한 잔 해요.”

“좋지.”


류지호와 두 배우는 한적한 카니발상가의 주점에서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두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고 느낀 점에 대해 꼼꼼하게 들었다.


❉ ❉ ❉


아침 일찍 류지호와 해장국으로 속을 푼 김영찬과 박인철이 서울로 돌아갔다.

두 사람을 배웅하고 돌아온 류지호는 바로 김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영찬 선배가 소속사에 합류하게 되면, 드라마 말고 다른 프로그램은 일절 잡지 마.”

- 예능도?

“<도전 지구탐험대> 같이 해외 나가는 프로그램은 무조건 잡지 말아줘.”

- 그 프로그램은 우리 소속 연기자들 절대 안 보네. 출연자 안전관리는 전혀 관심도 없고 무대책으로 촬영한다고 하더라고. 오로지 시청률만 보이나봐. 출연자가 어떻게 되든 간에!


김민아가 씩씩거리는 호흡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소속 연기자 중에 출연했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적인 오지체험이란 명분으로 출연자를 온갖 위험에 노출시키고, 실제 수많은 사건사고가 벌어진 프로그램.

바로 <도전 지구탐험대>다.

작년에는 여자 출연자를 성추행한 사건으로 PD가 실형을 선고받은 일까지 있었다.

이전 삶에서는 김영찬이 대타로 출연했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었다.


- 근데, 갑자기 왜 CHAN의 자본금을 100억으로 확 늘린 거야?

“전략기획실에서 보낸 사업계획서 안 읽어봤어?”

- 읽어봤는데....

“봤는데?”

- 그 계획서대로 우리가 잘해낼 수 있을까?

“지금처럼만 해. 그렇게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 좋은 결과와 마주하게 될 테니까.”

- 아휴. 닭살 돋아..... 우리끼리 이야기 할 때는 말 좀 할아버지처럼 하지 말아줘. 거리감 느껴진단 말이야.

“하하. 툭하면 애늙은이라고 놀리고서는.... 뭘 새삼스럽게.”

- 회장님인 것도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말도 무게 잡고 하니까 좀 무서워....

“곧 재정이 돌아오는 거 알지?”

- 응.

“모르는 거 있으면 김우영 비서에게 물어봐. 재정이게도 물어보고.”

- 전략기획실이 아니라?

“그쪽 사람들은 말을 좀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어서 괜히 말 섞다가는 스트레스만 받을 거야.”

- 아휴 먹물이 그냥.....!

“하나만 당부하자면, 다른 사람들 말 잘 들어주는 자세는 좋은데, 주변사람들이 하는 말 모두 믿지는 마.”

- 알겠어. 중요한 건 꼭 재정이나 아버님과 상의할게. 아참 김우영 실장님도.

“우찬이는 걱정 마. 곧 한국으로 보내줄 테니까.”

- 얼굴도 못 보고 바로 미국으로 가는 거야?

“겨울에 들어올 때는 친구들 다 함께 보자.”

- 우리 우찬이 잘 부탁해.

“수고해라.”


툭툭.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날씨가 꾸물꾸물하더니 기어코 비가 내릴 모양이다.


‘전략기획실에서 수립한 기획처럼 차질 없이 진행된다면, CHAN은 10년 안에 WaW 규모의 종합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우뚝 설 수도 있겠는 걸.’


매니지먼트 CHAN 발전 방향의 초안을 류지호가 잡았다.

그것에 뼈대를 보강한 후 살을 붙인 것은 전략기획팀이다.

최초 아이디어는 S-HQ의 사업 모델이었다.

광고 및 비디오물 제작, 매니지먼트, 음악 및 기타 오디오(음원) 출판업, 데이터베이스 및 온라인 정보제공, 광고 대행, 위성 및 기타 방송, 방송 프로그램 제작·공급, 공연·전시·행사기획 및 대행 등.

연예기획사를 기본으로 연관 사업을 펼치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를 위해 광고 및 방송 프로그램 제작사 Aram 프로덕션을 설립해 이전 삶에서 인연이 깊었던 최준영에게 맡겼다.

향후 케이블TV 사업자인 다솜방송을 중심으로 CHAN과 Aram의 삼각편대가 영화업에 집중하는 WaW 픽처스를 대신해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사업부문을 책임질 예정이다.


‘자고 일어나면 회사가 하나씩 생기는 것 같네....’


JHO Company와 비교해 규모는 고만고만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벌여놓은 회사들 숫자도 상당했다.

대유그룹 채권단과 빅딜이 성사되면, 그룹체계로 개편되는 가온은 한국 100대 기업에 너끈히 들어가고도 남았다.

이제 가온은 창업 당시의 사업 이외에 여러 가지 사업을 하게 됐다.

새로운 사업 기회가 생겨서 직접 투자를 늘리는 경우도 있었고, 다른 회사들을 인수·합병해서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 규모가 크지 않았을 땐 큰 무리가 없었다.

영업 범위가 넓어지고 사업 간의 독립성이 중요해지면서 사업부들을 별도 회사로 분리시켜 자율적인 경영을 도모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올해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순수지주회사의 설립이 원칙적으로 허용됐다.

(주)가온은 별도로 자체적인 사업을 영위하면서 자회사 주식을 소유하는 사업지주회사 형태로 개편될 예정이다.

즉 자회사가 모회사에 지급하는 배당금, 브랜드 명칭 사용료(로열티) 외에도 자체적인 사업을 벌여 수익을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감사팀을 전략기획실 못지않게 보강해 나가고 있고.’


검찰보다 더 무섭다고 알려진 조직이 재벌그룹 감사팀이다.

검찰은 영장이 필요하지만, 감사팀은 영장 없이 모든 조사가 가능하니까.

감사 대상자의 계좌 공개까지 요구해도 따를 수밖에 없다.

싫다면 사표를 써야 한다.

사표 쓴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곧바로 검찰 수사를 의뢰한다.

차라리 감사팀에 협조해 적당한 선에서 합의하는 게 현명한 길이다.

JHO Company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면서 류지호는 거대 기업 집단을 지배하려면 온갖 조직이 다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특히 내 사람들로만 채워야 하는 조직이 필수란 생각이 들었다.

회장 직속의 비서실만으로 거대한 기업 집단을 통제하는 회사도 있다.

그런데 (주)가온의 경우는 특정인이나 한 조직에 지나친 권한을 주기보다는 서로 감시와 견제를 하는 구조를 채택하기로 했다.

총수라고 할 수 있는 류지호의 산하에 비서실, 전략기획실, 감사실 삼축이 서로를 견제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문제는 금융 부문인데....’


한국은 은산분리는 철저하게 지키지만, 보험 증권 캐피털 자산운용사 등 2금융권의 소유와 경영은 대기업에도 허용하고 있다.

1금융권인 은행에 대해선 지분 소유 한도를 정권에 따라서 4~9%로 제한한다.

정권에 따라 산업자본에 대한 의결권 제한 같은 조치를 취하기도 하지만, 자회사의 지분 100%를 소유하는 미국식 지주회사 모델을 추구하는 류지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 대유증권을 인수합병 할 수만 있다면 보험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2금융 사업을 전개할 수 있다.

대유그룹 채권단과의 빅딜에는 다이너스티클럽 코리아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 본사와 새로 제휴 계약을 맺을 계획이다.

보험 부분은 대유증권 인수합병이 실제 이루어진 후로 미뤄두기로 했다.


“김 과장, 비도 오는데 막걸리 한 잔 어때요?”

“.....”

“경호팀이 모두 내려와 있잖아요. 2팀장에게 인계하고 티노와 말릭까지 해서 가볍게 막걸리 한 잔 합시다.”


김영철이 슬쩍 티노 곤잘레스를 돌아봤다.


끄덕.


티노가 동의하자, 김영철이 4개 팀 8명의 경호원들의 임무를 조정했다.


추적추적.


때 이른 장마인가 싶게 빗방울이 제법 굵었다.

김영철이 우산을 챙겨 들고 객실을 나서는 류지호의 뒤를 따랐다.

두 배우와 술을 마셨던 주점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파전과 김치찌개를 주문한 류지호는 세 명의 경호원들과 동동주를 나눠마셨다.

티노와 말릭 두 사람은 류지호를 따라 한인타운에서 자주 한식을 먹어왔기에 능숙하게 젓가락을 놀려 파전을 찢어 먹었다.

김영철이 류지호의 빈 잔에 동동주를 채워주며 입을 열었다.


“감독님, 가온은 사훈(社訓) 없습니까?”

“사훈이 왜 필요한데요?”

“사훈은 회사의 경영철학이나 비전을 담은 지침이지 않겠습니까? 창업주의 정신도 계승하고 말입니다.”

“‘창의와 인화’ ‘단결’ ‘성실’ ‘사업 보국’ ‘봉사’ ‘정직’ ‘신용’ ‘생산성’ ‘품질’ ‘기술’ 기타 등등. 우리나라 기업 사훈이 조직원으로 하여금 획일적 사고를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아 별로예요.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는 우리는 그런 거 없이 가고 싶네요.”

“보스가 신세대이니, 전략기획실이나 직원 공모로 좀 더 창조적인 사훈을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술적인 뜻인 담긴 걸로요.”


류지호는 잠시 머릿속으로 Googol이 한 때 사용했던 모토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 사악해지지 말자!


이 모토는 네티즌들의 공격으로 사용되어 없어지긴 했지만 한때 유명했던 기업 모토였다.

류지호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사훈이니 모토니 그걸 직원들에게 강요하는 건 우리 같은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기업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직원들의 평균 연령도 벤처기업처럼 낮은 편이고, 앞으로도 기업 자체가 계속 젊음을 유지할 것 같아서 별로 사훈이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뭔가 가온을 상징할 만한 멋진 단어나 문장이 있으면 좋을 텐데....”


김영철은 몰랐지만, 그가 속해있는 나래안전은 (주)가온 컴퍼니에 편입되지 않는다.

아네모네 프랜차이즈, 매니지먼트 CHAN처럼 류지호가 대주주로 있는 독립회사로 운영될 예정이다.

세 개 회사는 각각 서너 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때문에 세 기업까지 편입시키면 가온그룹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거의 모든 부분을 건드리는 기업이 된다.

사방에서 좋지 못한 소리가 터져 나올 터.

정부부처나 관련 산업계의 견제도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당분간은 자회사나 계열사로 받아들일 계획이 없었다.


“개인적인 바람은 가온이 ‘자유주식회사‘로 유명해지면 좋겠네요.”

“자유롭게 경영되는 주식회사입니까?”

“경영뿐만 아니라 직원들에게도 자율을 강조하고 싶네요. 통제가 아닌 자율의 가치를 더욱 높게 보고 있어서.”


김영철로서는 미국파다운 보스의 마인드라고 생각했다.

사실 미국파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류지호가 기억하는 승승장구했던 글로벌 기업들이 자율성과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하는 기업문화였기 때문이다.

10여 년 후 트렌드가 되는 기업문화이자 실제 성과를 낸 기업문화다.

한국도 예외 없이.


“최고의 성과는 지시 받았을 때가 아니라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이유와 목적을 이해했을 때 나오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조직원들을 기꺼이 움직이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느냐가 기업 조직관리의 성패를 가를 겁니다.”


류지호는 가온웨딩 스튜디오를 운영할 때부터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조직문화보다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기업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뿌리 깊게 박혀있는 조직문화를 바꾸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초창기부터 이런 문화를 만들어 정착시킨 덕분에 현재 (주)가온에서는 자율과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기업문화가 어느 정도 정착이 되었다.

(주)가온의 임직원들은 전반적으로 젊다.

핵심 경영인 연령도 40대가 대부분이다.

아직은 관료주의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란 말이 있다.

가장 큰 적은 바로 관료주의다.

관료 집단은 상당부분 이익집단화 된다.

괜히 관료와 마피아를 합성한 ‘관피아‘ 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설립 초기의 혁신적인 마인드보다는 안정성을 추구하게 되고, 시스템이 복잡화되고 관리계층이 신설되면서 조직 내 정보유통이 느려지는 등 조직의 지속성장을 가로막고 몰락시키는 증상이 보이는 것은 필연이다.

가온에는 앞으로도 사훈이나 기업 모토를 따로 만들지 않을 생각이다.

그 모토가 결국 형식주의 같은 관료주의를 낳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 류지호가 비 오는 날 파전에 동동주를 먹으며 말한 ‘자유주식회사’가 직원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며 사훈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다.

사훈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10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 ❉ ❉


스티븐 아들러와 친구들은 그동안 논란을 빚었던 LA 근교 2억 달러 규모의 영화스튜디오건설 사업 포기를 선언했다.

풍운아 하워드 휴즈가 건설한 거대한 격납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21세기 할리우드의 선봉이 될 디지털 영화학교로 운영하고, 늦어도 2000년에 이 스튜디오에서 영화 제작에 들어가겠다고 발표한 지 4년 만에 이 사업에서 발을 뺐다.

발표가 나고 며칠 후에는 Playa Vista 주거단지 개발을 진행하려고 했던 스탠리모웬을 필두로 한 컨소시엄이 Playa Capital Company를 JHO REAL ESTATE에 매각했다.

JHO REAL ESTATE는 류지호가 소유한 부동산개발회사다.

그 동안 Playa Vista 개발과 관련해 다양한 노력들이 이어졌지만, 개발을 저지하려는 지역시민단체와 환경운동가들이 제기한 12건에 달하는 소송 등에 시달리며 20년 넘게 개발이 지지부진했다.

생태계 보호를 내세우는 환경보호단체들의 거센 반대로 법정 소송이 벌어지는 등 말썽이 많았던 문제의 Playa Vista 개발을 류지호가 이어받기로 한 것.


LA 시청.


시청에는 기자회견장이 있고, 시의회에도 소규모 기자회견장이 따로 있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주로 그 곳에서 기자회견을 한다.

기업 관계자나 시민단체들은 시청 입구나 로비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편이다.

사실 대다수 기자회견은 이슈가 되고 있는 현장에서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LA 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것은 공공의 의미를 띨 경우다.

시청 앞 잔디광장에서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JHO REAL ESTATE CEO 클리프 데니히(Cliff Dennehy)와 JHO Company 의장 수석참모 도널드 제이콥, 공보비서 데이빗 브레이텐바크 등이 참석한 기자회견이다.

Playa Vista 개발을 총괄하게 될 클리프 데니히 사장이 류지호의 연설문을 대독했다.


- 도심 외곽에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항시 겪게 되는 문제점이 환경의 파괴일 것입니다. 개발의 측면에서 볼 때 도심지의 과밀한 인구유입을 분산시키고 주택공급에 한층 여유로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발의 타당성을 역설할 수 있겠죠. 하지만 환경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도시개발은 기존의 자연생태를 파괴하고 그곳을 기반으로 살아가던 생태계의 혼란을 초래하는 무서운 환경위협으로 다가옵니다. 한번 파괴되어 버린 습지는 수십 만 년 혹은 수억 년에 걸쳐 생겨난 생태환경의 보고를 순식간에 개발이라는 잣대로 없애버릴 수 있는 무지막지한 인간의 이기심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개발과 보존의 문제는 Playa Vista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오래된 자연환경과 습지의 경관을 보존하려는 입장과 도심개발을 통해 이익을 얻어내려는 개발업자들 간의 길고 긴 줄다리기가 지난 십 수 년 간 보여주고 있죠. 그에 대해서 우리는 지역주민 및 환경단체와 언제든 공론의 장에서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역사회와 개발 사이에서 절충안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개발과 환경보존이 양립할 순 없지만, 인식을 조금만 바꾸면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방법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뻔 하다면 뻔 한 연설문이다.

류지호의 연설문 대독을 마친 클리프 데니히 사장은 Playa Vista 개발 청사진에 대해 대략적으로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이전 개발업자들보다 진일보한 친환경 프로젝트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신도시주의(New Urbanism)’를 반영한 오픈스페이스와 보행자 중심의 근린 생활권, 공원과 녹지의 비중이 법률이 정한 것보다 훨씬 많이 차지하면서 복합용도개발, 에너지절약, 디지털 시티 및 첨단영상단지 특히 신재생에너지와 수자원재활용 등 환경 친화적인 도시 콘셉트를 강조했다.

기존 개발업자들은 최대 9억 달러의 개발비가 소요될 것으로 계획했지만, JHO REAL ESTATE는 무려 17억 달러를 예산으로 편성했다.


- 그렇게 해서 미스터 류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뭡니까?


기자의 질문은 당연했다.

기존 개발업자들이 괜히 10억 달러 미만의 개발비를 산정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도널드 제이콥이 마이크 앞에 섰다.


“환경보호와 디지털 기술이 도시에 적용된다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무궁무진합니다. 보스는 주택단지를 개발하면서 얻게 될 이익보다는 환경과 도시, 주민의 생활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대안을 찾길 기대합니다. 또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고 5년 안에 Playa Vista 전 지역에 광케이블이 깔릴 예정입니다. 실리콘밸리의 일부 IT기업과 VFX분야에서 선도적인 기업으로 꼽히는 Hues & Rhythm Studios를 비롯해 다양한 영상분야 기업들의 캠퍼스를 입주시킬 계획입니다.”


도널드 제이콥은 '높은 질의 공공용지와 조경'을 강조하며 공원도시로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 혹시 Dreamfactory의 계획을 이어받게 됩니까?

“JHO는 트라이-스텔라를 위한 캠퍼스 스타일의 종합촬영소를 따로 준비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21세기 D-Cinema의 중심 도시가 되길 희망합니다.”

- 해당 지역은 발로나 습지를 파괴할 것이라 주장하는 환경단체로부터 소송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환경단체 모두가 강경하진 않습니다. 환경보호론자 상당수가 발로나 습지 복원계획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개발 자체를 막으려는 소송은 전부 LA 고등법원에서 기각됐습니다. JHO는 반대자들과 대화를 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들을 설득할 절충안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 LA 서부지역의 교통 혼잡 문제, 고압축가스관이 지하에 매설되어 있어 지진이 발생할 경우 누출될 위험성이 있든 점 등 주민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습니다.

“1,000 에이커가 넘는 전체 부지 모두에 욕심을 부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JHO는 습지와 일부 가스관에 대해 시정부와 긴밀하게 논의를 진행 중입니다. 올해 안에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합니다.”


류지호는 Playa Vista 개발에 있어서 개발이익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여의도 한 배 반의 엄청난 면적이다.

발로나 습지 일부는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

때문에 주택단지개발보다는 공원과 JHO Company 계열의 캠퍼스와 IT기업을 유치해서 제2의 영화도시 혹은 미니 실리콘밸리로 개발 계획을 잡고 있다.


- 스티븐 아들러와 스탠리모웬이 자금조달에 실패해 사업을 접었습니다. 수십 억 달러를 어떻게 조달할 계획입니까?

“나의 보스는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투자포트폴리오에서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많다는 판단 하에 투자적 관점을 재조정하고 있습니다. Se7ven Flags 인수와 이번에 Playa Vista 개발 역시 장기적인 플랜으로 기획된 투자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나스닥 주식을 대대적으로 처분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빅4 증권사 가운데 한 곳을 통해 블록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웅성웅성.


기자들이 술렁였다.

Playa Vista 개발보다 더한 뉴스감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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