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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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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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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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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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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잘 익을 때까지 뜸들이기!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국민의 정부의 일부 경제 관료들은 구조조정에 미온적인 대유그룹 김 회장의 모습을 한국의 한 해 예산에 맞먹는 규모의 막대한 부채를 빌미로 정부를 협박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대유그룹을 좋게 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냥 대유그룹의 김 회장을 안 좋게만 볼 수도 없었다.

재계 2위인 대유그룹이 문제가 생길 경우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제2의 IMF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만큼 컸기 때문이다.

함부로 대유를 건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부 자금이 투입 가능할 수 있는 법정관리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했다.

류지호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일주일 후.

(주)가온의 호텔 & 리조트 사업부가 인수합병하기로 되어 있는 밀레니엄 호텔.

최고층에 위치한 대유그룹 총수의 집무실.

금감위원장이 찾아왔다.

김 회장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장장 9개월이었다.

대유그룹의 생존을 위한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다.

최근 김 회장의 집무실이 있는 호텔을 팔며 희망을 갖기도 했지만, 미국의 Durant Motors에 대유차 지분을 팔아 50억 달러를 유치하려던 계획이 최종적으로 실패하면서 백기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매튜 그레이엄이 Durant Motors CEO를 만나 대유자동차와 협상을 조금만 천천히 가져가 줄 것을 요청했다.

언론에는 대유자동차 문제에 대해 유익한 대화였다 정도로 나갔지만. 어쨌든 금감위원장은 이날 김 회장에게 정부의 구조조정안을 제시했다.


- 거함 대유그룹이 무너졌다!


대유그룹이 해체될 것이란 소식에 금융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금감위원장이 밀레니엄 호텔 집무실을 다녀가고 이틀 후 대유그룹 주식은 연일 동반 하한가로 직행했다.

대유그룹의 채권금리도 폭등했다.

금감위가 기관의 환매를 틀어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하루 1조원 넘는 환매 요구가 몰리며 자본시장은 시한폭탄으로 변해갔다.

코스피 지수 역시 사상 최대 71포인트(7.3%)가 하락했다.

김 회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법정관리와 워크아웃을 놓고 고민하던 끝에 (주)대유와 대유자동차, 대유중공업 등 12개 주요 계열사를 한꺼번에 워크아웃(채권단 공동관리)에 집어넣기로 합의했다.

채권금융기관들은 세계를 누볐던 32년 대우그룹사의 종말을 발표했다.


“3개월... 최대 6개월만 나가 있으시오. 우리가 정리 잘 하겠소.”


대통령의 간곡한 설득에 김 회장은 10월 경 한국을 빠져나간다.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해외를 떠돌게 된다.

사실 워크아웃 발표 전에 Durant Motors가 대유그룹에 손을 내밀었다.

김 회장은 정부의 법정관리안에 합의를 한 와중에도 Durant Motors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매튜 그레이엄이라는 왕년의 기업사냥꾼과 발을 맞춘 Durant Motors는 한국정부보다 한 발 늦게 대유자동차 인수와 관련해 논의를 시작했다.

금감원이 대유특별감리반을 출범시키며 분식회계를 조사하든 말든지, (주)가온이 대유그룹의 몇 개 계열사에 대한 인수의사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류지호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보름 만에 래리 킴 신임 CEO가 전격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발표했던 것.

다온 로펌은 물밑에서 정부 유관부처와 채권단 및 금감위와 열심히 접촉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독자생존이 가능한 건설사업 부문과 증권 등 금융계열사를 매각예정 계열사에 포함시키게 된다.

류지호가 원하는 회사들이었기 때문이다.

10조 안팎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대유 계열사 몇 곳의 인수금은 문제될 것이 없다.

월드컴 블록딜에 이어 류지호가 Yaaho!, 라이코스, UOL, IBT 그 외 닷컴기업 주식들을 무더기 매도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올 초부터 지분을 팔아치운 주식이 8월에 접어들면서 87억 달러의 현금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외에도 INTEG, BT&T, SanCisco, QualTech 등 많은 나스닥 보유 주식들이 레만브로스 투자은행을 통해 매수자를 찾고 있는 중이다.

여담으로 가을에 접어들면서 Playa Vista 개발에 이어 한국의 재벌대기업을 인수하려는 욕심에 무리하게(?) 우량주식을 처분하는 류지호를 비웃는 목소리가 벤처캐피탈을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류지호의 자금이 빠진 자리는 다른 자본이 금방 채운다.

채운 정도가 아니라 더욱 몸집을 키우게 된다.

그로인해 블록딜로 내놓은 주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주가 뛰게 된다.


‘닷컴버블을 터트렸다는 이야기는 안 듣게 생겼네.’


류지호는 닷컴버블 붕괴 전에 나스닥 주식을 팔아치우는 것에 대한 시장의 반응이 별 것 없는 것에 안도하게 된다.

오히려 벤처 투자광풍은 더욱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기까지 한다.

어쨌든 내년 상반기까지 최소 25조 원을 조성하려는 계획이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다.

아울러 대유그룹 알짜 계열사 인수와 대규모 개발 사업까지 차질 없이 준비되고 있다.

류지호는 뜸이 들어 밥이 맛있게 익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 ❉ ❉


미국으로 복귀한 류지호가 티노 곤잘레스를 배웅했다.


“휴가 잘 보내고 건강하게 복귀하도록 해요.”

“한 달 후에 뵙겠습니다. 보스.”


두 달 넘은 한국행에 동행했던 티노 곤잘레스가 장기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류지호가 두둑한 휴가비도 챙겨주었다.

흔히 요리사, 운전기사, 경호원에게 잘 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음식과 안전을 책임지는 이들의 충성심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


“미안 한데, 말릭이 한동안 애써줘요.”

“보스, B와 C팀도 보스의 근접경호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이번 기획에 저는 지휘로 빠지고 팀원들로 운용해 보고 싶습니다.”

“말릭이 알아서 하세요.”


류지호에 대한 경호업무 강도가 센 편이다.

파파라치가 극성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천리포와 무주리조트에 칩거할 때를 빼고 한국에서 일정을 소화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미국 신문과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백인우월주의자나 극우단체의 협박도 있고.

때문에 경호팀을 2인 1조, 네 개 조로 편성해 순환근무 체제로 바꿨다.

벨에어 주택을 관리하는 경호팀은 따로 편성되어 있다.

한국의 가족들은 나래안전에서 전담하고 있는데, 경호원들은 외부에 전혀 노출되지 않고 있다.


“티노, 뭉그적거리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 봐요. 아이들 기다리게 하지 말고.”

“예.”


티노 곤잘레스가 웨스트우드 집무실을 떠났다.

말릭 또한 류지호의 근접경호 및 의전을 브라보팀에게 넘기고 뒤로 빠졌다.

일시적으로 공석이 되는 알파팀은 브라보팀의 러셀과 패트릭이 채웠다.

럭비선수를 연상시키는 거구의 흑인 러셀 뱅크스는 네이비씰 출신이다.

류지호와 비슷한 신장, 스마트한 인상의 백인 패트릭 틸먼은 FBI 출신이다.

특히 패트릭 틸먼은 꽤 고급인력이다.

티노와 말릭이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는 대원이다.


부우웅.


류지호를 태운 차량이 LA에서 50여 분 거리의 팔로스 베르데스 반도(Palos Verdes Peninsula)에 도착했다.

<Remo : The Destroyer>의 오프닝 스퀀스의 한 장면을 촬영했던 우정의 종각(Korean Bell of Friendship)이 있는 태평양을 낀 반도다.

류지호의 차량이 우정의 종각을 지나쳐 저 멀리 카탈리나 섬이 보이는 한적한 반도의 그림 같은 풍경과 함께 하는 럭셔리 리조트로 들어섰다.

13만 평에 달하는 대지 위에 지중해 스타일의 5성급 리조트 Terranea Beach Resort에 도착하자 사장부터 총지배인, 간부들 및 직원 30여 명이 류지호를 맞이했다.


“환영합니다.”


최고급 리조트답게 직원들의 옷맵시나 태도가 품격이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치곤 과한 환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롭게 바뀐 주인이 처음으로 리조트를 방문한 것이다.

영접에 소홀할 수 없었다.

류지호와 JHO Company는 주식을 정리하면서 돈이 남아돈다고 할 정도다.

Playa Vista 개발에 소요되는 투자금을 조달하고도 수 조 원이 남아서 한국에 투자를 하는 것도 모자라 미국의 부동산을 사들이고 있었다.

Terranea Beach Resort는 JHO REAL ESTATE Company가 최근에 인수한 최고급 리조트였다.


“컨벤션은 잘 진행되고 있죠?”

“차질 없이 행사가 치러지고 있습니다!”


현재 Terranea Beach Resort에서는 JHO Convention이 열리고 있다.

올해 주제는 ‘millennium‘이다.

인류가 정보통신이 대중화되고 세계화가 된 후로 처음으로 맞이하는 세기가 넘어가는 시기다.

종말론은 물론이고 다양한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었는데, 컴퓨터 버그(Y2k)가 가장 큰 공포로 다가오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민간에서는 별 일 없이 지나가는 문제지만, 기업에서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었다.

JHO Company는 JHO Security Services를 중심으로 사장된 마이너 컴퓨터 언어를 끄집어내고, 다수의 프로그래머를 고용해 전담팀을 꾸려 대비를 하고 있었다.

Y2K에 대처하기 위해 1,300만 달러가 투입된 상태다.


“컨벤션 장소로 곧바로 가시겠습니까?”

“잠시 리조트를 돌아보고 싶군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사장 랜스 헨릭슨(Lance Henriksen)이 류지호를 안내해 리조트를 소개했다.

해안가 절벽에 자리하고 있어서 인지 바닷바람이 솔솔 불고 있다.

습기가 없어서인지 맑은 바람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102에이커(약 12만 평)에 달하는 대지 위에 지어진 리조트에는 바닷가 방갈로 20개,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오는 독채(카시타) 50개, 빌라 32개 등 총 582개 객실과 스위트를 구비하고 있다.

실내외 수영장이 4개, 1,400평에 달하는 스파, 레스토랑만 8개가 갖춰져 있다.

해안가 절벽을 끼고 리조트 고객 전용 작은 만과 해변 모래사장까지 있다.


“모든 레스토랑에서는 리조트 내 정원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주로이용하고, 인근에 양봉장에서 가져온 신선한 꿀로 페이스트리, 캔디, 샐러드드레싱을 만들고 있습니다.”


부지가 워낙 넓어서 산책하기 좋을 것 같았다.

절벽 아래 해안가를 거닐어도 좋고, 골프코스에서 가볍게 골프를 즐겨도 좋다.

팔로스 베르데스 반도에는 부자들이 꽤 많이 살고 있다.

부자들이 주말에 독채를 빌려 호화로운 가족 파티를 열기도 하고, 결혼식도 매주 열리고 있었다.


“JHO의 컨벤션은 매년 열립니다. 헤드쿼터와 잘 논의해서 리조트 영업에 지장 없도록 하세요.”

“문제없습니다. 보스.”


류지호가 이 리조트를 선뜻 인수한 이유는 가족이 쉬기에 매우 좋다는 점이다.

어린이를 위한 음식 메뉴, 놀이시설, 워터 슬라이드, 어린이 캠프를 포함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었다.

부지 한 편에 온실을 만들어 직접 친환경 채소를 재배해 요리에 사용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좋았어. 하계는 이곳에서, 동계는 무주리조트에서....!”


처음 컨벤션을 개최할 때는 계열사들 간 소통을 목적으로 했다.

이제 겨우 3회째다.

과장급까지 참가 자격을 확대하고 가족동반도 허용했다.

반응이 폭발적이다.

심지어 류지호가 투자하고 있는 실리콘밸리 기업 CEO들까지 옵저버라도 참가하게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 하고 있다.

비록 기업 내부 행사지만, 네트워크를 쌓기에 이 보다 좋은 환경도 없었기에.

의장비서실의 참모들은 매년 6월 매킨토시가 개최하고 있는 세계 개발자 회의(MWDC) 모델을 벤치마킹해 궁극적으로 글로벌 이벤트로 확대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류지호는 그런 수준을 바라지 않았다.

매 순간 급박한 변화와 혁신이 이루어지는 21세기에 JHO Company 임직원들이 최신 트렌드와 정보를 공유하고, 첨단 산업에 대해 이해를 넓히며,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컨퍼런스를 통해 얻어간다면 만족할 뿐이다.

직원복지 차원에서 멋진 휴양시설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것은 덤이고.

류지호 개인적으로는 집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언제든지 가족들과 와서 편안하게 쉬다 갈 수 있는 휴양지를 가지게 된 것이 무엇보다 흡족했다.


✻ ✻ ✻


Terranea Beach Resort에서 열린 컨벤션에 다녀온 류지호는 미국 일상으로 복귀했다.

가장 먼저 <Remo : The Destroyer>의 편집부터 챙겼다.

영화부문 보좌관 사라 케슬러가 Tri-Stella Studios의 시사실을 예약해 두었다.

스튜디오의 시사실은 거의 매 시간 가동된다.

해당 영화 관계자들을 위한 내부 시사는 기본이고, 프로듀서와 감독만 참석하는 파이널컷 확인 시사가 수시로 열리고 있다.

심지어 3일 혹은 5일에 한 번씩 전달되는 촬영 중인 영화들의 러쉬필름 시사까지 쉴 틈 없이 시사실이 가동된다.

메이저 스튜디오에는 각각의 용도에 따라 시사실이 갖춰져 있다.

선셋가의 Tri-Stella Studios 역시 세 종류의 시사실로 나눠져 있다.

사라 케슬러가 예약한 시사실은 극장용 좌석이 20여 개 배치된 소극장 사이즈였다.

관객석 중앙에는 탁상 스탠드가 설치된 테이블이 놓여있고, 시사회를 보는 감독과 프로듀서의 취향을 고려한 음료수와 군것질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JHO Pictures 제작파트에서는 류지호가 즐겨 먹는 간식과 음료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류지호라서 특별 대우하는 것이 아니다.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감독들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대접을 받는다.

대신 영화 창작적인 부분에서 간섭과 통제를 심하게 받아서 그렇지.


삑.


류지호의 손가락이 테이블에 설치되어 있는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플레이.”


촤르르르.


무지필름이 몇 초 돌아갔다.

필름이 빛을 받아 까맣게 되었거나, 감광층을 벗겨 버려 투명한 상태로 된 것을 무지필름이라고 한다.

주로 영화에서 본내용이 시작되는 필름의 앞뒤에 붙인다.

본편 중간에 풀 CG 장면이 채워지지 않아 비어있는 부분 등에 삽입하기도 한다.

리더필름 카운트가 줄어들었다.


5 4 3 2....1!


배급사 로고나 오프닝 시퀀스가 붙어 있지 않은 본편이 곧바로 상영됐다.

참고로 리더필름(leader film)은 극장 실내등이 꺼진 뒤 본 영화 상영 사이에 선보이는 15초 분량의 토막 영상물을 일컫는다.

영화의 맨 앞부분에 '이제 시작한다'는 출발 사인이라는 뜻에서 ‘리더‘라는 이름이 붙었다.

배급사인 트라이-스텔라 픽처스 로고 필름은 사운드 믹싱까지 끝난 후 상영용 네거필름을 만들 때 들어가게 된다.

류지호가 보고 있는 편집본은 오로지 원판 영상과 대사만 들어가 있는 파이널 컷 직전 단계의 필름이다.


촤르르르.


<Remo : The Destroyer>는 주인공의 직업이 스파이일 뿐, 화끈하고 통쾌한 액션이 주가 되는 전형적인 장르영화다.

더해서 주인공 레모 윌리엄스와 그의 스승 치운의 정서적 교감, 가족애에서 발전한 휴머니즘의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다.

화려한 볼거리 사이에서 보이는 코미디 요소까지, 하나의 장르로 꼬집기 어려운 복합장르 영화다.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이란 건드리기에는 부담스럽지만 매우 시의성 있는 소재를 가지고 왔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답게 낙천주의가 전편에 깔려 있다.

즉 결국 주인공이 승리하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을 표방하는 영화다.

성조기도 등장하고, 애국심 투철한 미군 장교도 등장한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메시지인 ‘경찰국가 미국‘ 주장도 엿보인다.

그럼에도 ‘미국만세‘보다는 보스니아 내전에서 보여준 미국의 미온적이며 다소 비겁한 태도를 비판하는 냄새도 진하게 풍긴다.


‘생각보다 오프닝이 루즈 한 편인데....?’


편집본을 확인하는 내내 류지호는 중요한 분기점마다 시간을 확인했다.

때때로 메모지에 뭔가를 기록했다.

류지호는 이번 영화에서 스토리 설명이나 심리묘사가 주가 되는 장면에서는 동선 및 인물 배치 등을 효율적으로 디자인해 많은 커트가 필요하지 않도록 콘티를 했다.

그것이 영화적 호흡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액션 시퀀스에서 숨 가쁘게 진행되기 때문에 잠시 관객들이 쉬어가거나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또한 무거운 감정이 지배하는 장면에서조차 가급적이면 빅 클로즈업을 자제했다.

와이드 쇼트의 장면들과 이질감을 줄이기 위해서다.

영화 전체의 통일성을 유지시키려고 했다.


“.....음“


치운을 태운 NATO 헬리콥터가 보스니아(실제로는 슬로바키아) 산악지역을 비행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지만, 생동감이 없다.

사운드 이펙트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편집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썩 훌륭했다.

실제 항공촬영으로 촬영한 익스트림 롱 쇼트가 시각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선사했다.

색보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 색감임에도 겨울철의 차갑고 건조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과거로 돌아온 류지호는 롱테이크와 롱 쇼트를 선호하고 있다.

또 한국 TV드라마처럼 대화씬에서 바스트 쇼트를 교차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한(恨)‘ 같은 것 때문이다.

변명일지 모르지만, 이전 삶에서는 롱테이크와 쇼트를 찍을 수가 없었다.

적은 예산과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섬세한 미장센이이나 복잡한 인물 동선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감당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CG가 들어가지 않은 편집본이기 때문에 그린스크린 배경, 와이어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서사와 편집 템포 혹은 리듬을 확인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류지호 정도 되니까 감을 잡는 거다.

선무당들은 이 같은 편집본을 보고 영화의 결과물을 재단한다.

그로인해 파국이 벌어지기도 하고.

어쨌든 스펜서 베어드는 류지호가 원하는 콘셉트를 충실히 편집에 반영해주었다.

액션시퀀스의 콘셉트, 드라마 부분에서 컷 수를 많이 나누지 않은 시원시원한 호흡의 편집, 긴박함과 간절함을 드러내는 밀당의 호흡, 속도감을 강조하는 짧은 호흡의 편집 등 영화 전편에 걸쳐 짜임새 있게 편집이 이뤄져 있었다.

슬로우 모션도 다양한 속도로 사용될 예정이다.

매우 느린 속도, 조금 느린 속도, 일반적인 속도.

그런 감독의 의도에 맞춰 스펜서 베어드는 액션시퀀스 편집에서 속도의 장난질을 듬뿍 쳤다.

극저속에서부터 뮤직비디오 스타일의 초 단위 몽타주 편집까지.

류지호가 원한대로 액션시퀀스에서 관객에게 익숙한 박자감에 혼란을 주도록 편집이 이뤄졌다.

편집전문가들은 액션시퀀스를 편집할 때 관성적으로 액션과 리액션의 관습적인 박자감이 있다.

심지어 공식까지 있다.

공격하는 걸 길게 보여주고 당하거나 반응하는 것을 상대적으로 짧게 보여준다.

철칙 같은 것이다.

영화 속에서 나오는 싸움 장면이 실제 촬영은 가짜로 진행되었음을 속이기 위한 불가피한 연출 및 편집 기법 때문이다.

그런데 류지호는 그 같은 공식을 일부분 깨고 싶었다.

쇼트 길이와 미세하게 속도를 조절해서.

가령 치운과 탱크의 대평원 전투에서 치운의 모습을 CG를 동원해서 움직임의 속도나 편집 템포를 빠르게 가져간다.

반면에 탱크의 느린 포탑 회전 속도를 그 사이에 넣는 식이다.

제라마을 전투 시퀀스에서도 치운의 모습을 묘사하는 편집템포는 느긋한데, 벽을 박차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쇼트의 경우는 눈 깜짝 할 사이에 흘러가 버린다.

이후 옥상에서 벌어지는 치운과 아르칸 반군의 싸움을 보여주지 않고, 카메라는 가만히 정적인 롱 쇼트로 길고 여유롭게 보여주다가 느닷없이 옥상에서 반군이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히는 CG 장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게 빨리 지나간다.

땅바닥에 처박혀 경련하다가 사망하는 반군을 보여주는 쇼트는 충분히 길게 보여준다.

CG합성의 어색함도 숨기면서 관객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다가 의외의 순간 의외의 장면을 보여주는 식의 편집기교다.


‘좋게 포장하면 의외성이고, 사실은 꼼수지.....’


아직은 CG가 들어가면서 화질과 질감에서 손해를 보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고려해 전체적으로 ‘쨍‘하게 촬영되었다.

그 만큼 현장에서 조명을 많이 썼다.

촬영감독은 자칫 보는 이로 하여금 너무 비현실적으로 다가가진 않을까 염려했다.

조명으로 사실적인 백그라운드를 만들어 줌으로써 그런 부분을 상쇄하려고 했다.


[우리가 함께 근무한지 5년 쯤 되었나?]

[.....]

[자넨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도 우리 국민입니다.]

[자네한테는 망할 정보원이 전부겠지만, 우리에게는 아냐.]

[아군이 적진에 있는데, 본인들 직위만 생각합니까?]

[다시 전쟁이 터지면 어쩔 거야? 누가 책임지지?]

[....]

[오늘 한 생명을 구할지 모르지. 하지만 그로 인해 내일 많은 목숨을 위태롭게 할 거야.]

[제 정보원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해. 대신 이것만은 알아둬. 우리에게 어떤 지원도 바랄 수 없다는 걸.]


샘 잭슨은 스파이 세계에 찌들 대로 찌든 콘 맥클리를 덤덤하게 표현했다.

<나쁜녀석들>의 마이크 라우리, 마커스 버넷 콤비 같은 유쾌한 사제지간의 좌충우돌로 인해 마냥 가볍기만 할 것 같은 영화에서 샘 잭슨의 연기가 반대 쪽 무게추를 잡아줬다.

무엇보다 류지호를 흡족하게 했던 것은 치운을 연기한 오순탁의 한국말이다.

할리우드 영화 역사상 가장 정확하고 가장 길고 가장 많은 한국어를 구사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Remo : The Destroyer>는 큰일을 한 것이라 자평했다.

비록 한국 외의 영화팬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겠지만.

본편이 끝나고 대략적인 클로징 크레디트(closing credits) 스크롤 타임까지 계산해서 넣은 무지필름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쿠키 영상(credit cookie)으로 마무리됐다.

그렇게 두 번 더 편집본을 확인하자.


“퇴근할 시간입니다. 내일 다시 오시죠.”

“미안해요. 존.”


류지호는 메모로 가득 찬 종이를 챙겨 시사실을 나섰다.


✻ ✻ ✻


류지호가 확인한 <Remo : The Destroyer> 편집본의 러닝타임은 136분.

120분을 생각하고 콘티를 했으니 16분이 오버됐다.

예상 범위 안이다.

그런데 조금 더 줄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흔히 ‘밀도‘라는 말을 쓰곤 한다.

서사의 밀도, 연출의 밀도, 긴장감의 밀도 등.

영화 안에서 각 요소들이 조밀하면 좋겠지만, 특정 장르가 아닌 경우 관객을 오히려 숨 막히게 만들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게다가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표현들이 영화를 고급스럽게 만들지만, 상업영화는 친절한 것이 좋다.

그래서 상업영화의 눈높이는 중학교 3학년 수준에 맞추라는 격언이 있는 것이고.


“3분만 줄여줘요.”


스펜서 베어드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늘리는 게 아니라?”

“몇 군데서 느슨한 것 같아요. 오스트리아 촬영분에서도 한 씬 정도는 들어내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혹시 샘 잭슨이 등장하는 씬?”

“맞아요.”

“샘이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았는데?”


스튜어디는 묘한 눈으로 류지호를 바라봤다.


“감독 버전을 따로 개봉할 생각이야?”

“아니요.”

“샘의 분량을 줄이면서까지 러닝타임을 줄이자.....?”

“샘의 연기를 보는 즐거움은 있지만, 이미 앞뒤로 비슷한 내용을 암시하는 게 다 있어요. 지루해요.”


곧바로 스펜서 베어드도 납득했다.


“샘의 연기가 너무 근사해서 뺄 수 없었던 장면이지. 사실 영화 전체적으로 없어도 무리가 없는 장면이긴 해.”


감독들은 대개 심혈을 기울여 촬영한 장면을 빼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배우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심하고.

헌데 류지호는 <The Killing Road>에서도 그랬지만, 생략하고 압축하고 심지어 공들여 찍은 것을 날려버리는 것에 어떤 거부감도 없었다.

감독으로서 쉬운 판단은 아니다.


“3분이라고?”


류지호는 메모를 참고해가며 스펜서 베어드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다음의 나올 장면의 대사를 앞씬 후반에서 선행시킨다든가, 주인공이 일일이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쇼트들을 대폭 생략한다든가, 액션영화 특유의 악당이 거들먹거리는 쇼트의 길이를 압축한다든가....

할리우드에서는 편집자가 의견을 수용하지 않으면 감독은 도리가 없었다.

편집은 그들의 고유의 영역이니까.

그들이 수용하는 것은 제작자(프로듀서)나 투자자의 의견이다.

류지호는 <Remo : The Destroyer>의 투자자이면서 제작자이기도 하다.

스펜서 베어드 입장에서 류지호와 의견일치를 보면 그것으로 끝이다.

제아무리 트라이-스텔라 임원이 와서 떠들어대고 무시하면 된다.


“포스트를 서둘러 마무리하지?”

“왜?”

“토론토에서 월드프리미어 하게.”

“못 맞춰.”


류지호는 두 명의 프로듀서 의견을 단호히 거부했다.

토론토 영화제는 9월에 열린다.

그 일정에 맞춘다고 촉박하게 후반작업을 진행하다보면 완성도가 떨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특히 사운드 완성도에 치명적이야.”

“다음 주에 가이드 음악까지 얹어서 보고 판단해.”

“싫어. 원래 배급 스케줄대로 진행하도록 해.”


류지호의 단호함에 두 명의 프로듀서는 물론이고 트라이-스텔라 배급팀도 더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관장님이 그러셨지. 밥을 맛있게 먹으려면 뜸을 충분히 들여야 한다고.‘


배고프다고 뜸도 들이지 않고 솥뚜껑 열었다가 골고루 잘 익지 않은 밥을 먹게 될 수도 있다.

정성스럽게 밥을 잘 지어놓고도 마지막 순간에 일을 그르칠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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