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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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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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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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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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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민중의 적 : EMBARGO. (1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영화 촬영할 때는 외부 일정을 안 하는 류지호다.

이번 영화는 어째서인지 자꾸 정신이 분산되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세무조사를 받지를 않나, 훈장 준다고 해서 가서 받고, 영화상 시상자로 조광영화상과 춘사영화상 시상식에도 불려갔다.

한국의 영화상이 사실상 조광과 춘사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두 영화상이 주목을 받을수록 그랜드벨어워즈의 입지는 바닥을 뚫다 못해 아예 지하에 파묻혔다.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는 종합시상식 성격이기에 비교가 의미가 없다.

올해 영화 시상식에서 이변은 없었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가 주요 부문을 나눠가졌다.


“이걸 내가 받아도 되려나....? 순영 언니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춘사영화상 여자주연상에서 송라원이 수상했다.

조광영화상이 <아는 여인>의 오순영이 수상하면서 수상소감을 전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던 것과 달리 송라원은 한껏 생기발랄한 수상소감을 전했다.

뒤풀이 파티에 참석한 송라원은 자신의 수상이 괜히 미안하다면서 앓는 소리를 했다.


“까분다.”


류지호가 한심하다는 듯 송라원을 쳐다봤다.


“왜, 왜요?”

“네가 연기를 잘했으니까 상을 줬겠지. 요즘 한국의 영화시상식에서 나눠먹기 한다는 이야기 들어봤어?”

“그건 알겠는데... 저는 앞으로도 기회가 많잖아요.”

“순영씨는 영영 기회가 없냐?”

“그게 아니구. 제가 한참 어리니깐....”

“어린 게 벼슬이냐?”

“그 언니는 주로 TV에서 활동하구.....”

“넌 TV 안 할 것 같아?”

“영화만 할 거예요.”

“영원히 여자배우로 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열심히 해봐.”

“여자배우로 못 살아요? 남자배우로 살아야 해요?”


송라원의 엉뚱한 되물음에 주변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까지 풋풋하고 매력적인 여자주인공으로 널 써줄 것 같냐? 너도 언젠가 중년이 되고... 암튼 비정한 것 같지만, 그게 이 바닥 생리야.”

“저는요 감독님.... 주인공만 안 할 건데요. 아줌마가 되면 아줌마 배역도 하고, 엄마 역할도 하고, 할머니 역할도 할 건데요. 마리 R 스트립 할머니처럼이요.”

“스트립 여사를 언제 봤다고 할머니야?”

“언젠가는 만나 뵙지 않을까요? 언젠가.... 그쵸, 감독님?”

“내가 어떻게 알아?”

“무당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너 하는 거 봐서.”

“열심히 하겠슴다. 헤헤.”


송라원은 애교가 많다.

그런 모습이 알려져 ‘헤픈 여배우’라는 루머에 시달리기도 한다.

처음에는 모두의 앞에서 애교도 잘 부리고 또 잘 웃었다.

배우 생활의 연차가 쌓이면서 애교도 조절할 줄 알게 됐다.


“WaW 혼자서는 역부족이긴 하네....”


류지호는 두 개의 시상식의 후보영화들을 훑어보며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작년 한 해는 다양하고 신선한 기획과 장르로 풍성했었다.

올해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모양새다.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50위의 과반이 코미디 혹은 로맨스 장르였다.

<바람의 전설>, <인어공주>, <꽃피는 봄이 오면>, <슈퍼스타 감사용> 같은 영화들이 좀 더 프로덕션에서 완성도를 끌어올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한 해였다.

이전 삶에서 재능을 채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졌던 몇몇 감독을 기억하고 있는 류지호다.

WaW 엔터테인먼트에 그들을 주목을 하라고 당부를 해 두었다.

기회를 살리는 것은 오로지 본인들 몫이다.

춘사영화상은 다른 시상식과 달리 최고흥행영화상, 인기 스타상 같은 부문 없다.

그 대신 기술상을 아카데미 수준으로 세분화해서 시상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따라서 오리지널 각본상 외에 원작을 훌륭하게 재해석한 각색상을 마련했다.

미술상에도 분장과 의상을 따로 시상했다.

기술상도 뭉뚱그리지 않고 편집, 시각효과, 음향 부분을 따로 시상했다.

영화시상식은 관객에게 스타배우가 상 받는 모습을 전시하는 행사가 아니다.

영화인들의 축제 한마당이다.

그 축제의 한자리를 영화팬들이 손님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영화시상식을 주최하는 이들이 주로 언론사다.

그들은 영화를 존중하지 않고 보여주기 과시형 행사로 생각한다.

그러니 스타상 같은 부문을 만들어 상 나눠먹기 같은 불합리가 있는 것이다.

본래 영화시상식은 영화계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 동료의 성과를 치하하고 축하하는 자리다.

그 잔치에 손님들을 초대해서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고.

그래서 영화상과 영화제를 그래서 구분해야 한다.

어떤 상이든 잡음이 없을 수가 없다.

심지어 노벨상도 매해 뒷말이 나온다.

그럼에도 춘사영화상은 나름 올바른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 ❉ ❉


“개명?”


대본리딩에서 내심 찜해 두었던 단역배우 오성광이 힘차게 대답했다.


“예! 감독님!”

“뭐로?”

“오윤빈입니다.”

“...원빈도 아니고, 현빈도 아니고. 윤빈?”

“그냥 윤빈 아니고 오~윤빈입니다.”


본인 앞에서 대놓고 웃을 수도 없고.


“짝퉁이라고 비웃음만 받지 않을까?”

“서초동 검사들도 자주 찾는 보광동의 용한 박수무당이 있습니다. 아스트로 대표님도 가끔 가신다고 하고. 암튼 그 무당이 이 이름으로 바꾸면 대성할 거라고 했습니다.”

“보광동?”


이태원하고 가까운 동네이긴 한데, 그곳에 용한 점집이 있는 줄은 몰랐다.

자신이 알기로 영화인들이 자주 가는 점집은 청담동과 관악산을 끼고 있는 지역에 있었다.


“그곳에서 배우 예명도 많이 짓는다고 합니다. 저도 뮤지컬하는 친구가 소개해서 가 봤는데 예약 안하면 못 만나볼 정도로 장난 아닙니다. 영화 흥행도 잘 맞추고... 감독님 이번 영화도 무조건 잘 될 거라고 합니다. 상도 많이 받으실 거라고....”

“됐고. 회사에서는 뭐래?”

“한 번 들으면 잊어먹지 않을 것 같아 좋다고 하십니다.”


당연히 톱스타 이름과 유사하니 잊지 않겠지.


“본인이 마음에 들고 회사에서도 허락했다니 내가 뭐라 할 건 아닌데....”


이러다 한국 남자배우에 온갖 빈 트리오가 생기는 건 아닌지.

물론 외모만 놓고 보면 오성광, 아니 오윤빈은 두 사람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매우 평범했으니까.

다만 모나지 않은 얼굴과 안정된 연기력으로 인해 도화지 같다는 장점이 있다.

뭘 칠해도 다 그 색깔이 될 것 같은.

작품과 감독만 잘 만나면 꽤나 스펙트럼이 넓은 조연배우가 될 것 같았다.


“준비는 잘 해왔어?”

“넵!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본래는 이미지 단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지상파 공채 출신 배우의 연기력이 실망스러워 그가 하기로 되어 있는 대사를 오윤빈에게 줬다.

크레디트도 받았다.

정치부 기자1에서 오 기자로 이름을 부여받게 됐다.


“리허설 때 보면 알겠지.”

“옛.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늘은 G-Tower에 꾸며놓은 대한일보 편집국에서의 마지막 촬영이다.

단 두 개 씬만 남겨두고 있다.

오전에는 계속해서 리허설만 했다.


[저거 저거... 사회부 새끼들 하는 꼬라지 봐라... 강 선배! 또 술 펐어? 기자하려고 룸빵 가는 거요, 룸빵가려고 기자하는 거요?]


“컷! 윤비니!”

“예. 감독님!”


오윤빈이 얼른 모니터 스테이션으로 달려왔다.


“튀고 싶냐? 혼자 뭐해?”

“.....”

“혼자만 연극하는 것 같잖아. 대화를 해야지 왜 방백을 하고 있어?”

“죄송합니다!”

“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와.”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후다닥.


오윤빈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다들 10분만 쉽시다!”


류지호는 배우를 독하게 단련시키는 감독이 아니다.

준비된 배우가 연기로 놀만한 여지를 보장해주는 타입이다.

연기의 본질은 ‘행동의 모방’이 아니다.

‘성격의 창조’다.

그래서 창의적인 활동인 동시에 예술인 것이다.

연기로 펼치는 모든 동작에는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책상을 먼저 짚고 대사를 하는 것과 대사를 먼저 하고 책상을 짚는 것은 심리적인 면이나 의미전달에서 차이가 있다.

류지호 사단의 맏형격인 김영찬 배우도 이번 영화에 출연한다.

오랜만에 안경을 쓰고 출연하게 됐다.

어떤 장면에서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데, 안경이 떨어질까 봐 지레 움찔 거리는 모습을 넣었다.

관객이 보기에는 전혀 안경이 떨어질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김영찬은 황급히 안경에 손을 가져다댔다가 손을 떼는 연기를 추가했다.

애드리브가 아니었다.

사전에 류지호에게 허락을 받고 한 연기다.

안경을 벗고 글을 읽는 것은 그가 노안이거나 지독한 근시임을 드러낸다.

안전한 곳에 안경을 벗어놓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손을 가져다 대는 행동은 예민한 성격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으로 돌다리도 두드리는 신중한 성격과 보신주의를 암시하기도 한다.

강철중이 Life-Plus 단독 기사를 가져왔을 때, 김영찬은 그의 기사를 사회면 머리에 올릴지 킬 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때는 안경을 다루는 방식을 전혀 다르게 가져갔다.


[돌아버리겠네. 강철중 저 미친개....! 오, 주여 왜 내게 저런 꼴통을 보내셨나이까.]


이전과 달리 안경을 벗어던지고 신경을 안 쓰는 모습을 보인다.

안경을 하나 설정함으로써 그간 김영찬이 다른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센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예민하면서 신중한 성격을 만들어냈으며, 상황에서 심리와 갈등까지도 표현하는데 사용했다.

연기는 언어적 연기 즉 다이얼로그 연기 말고도 비언어적 연기까지 함께 그려져야 입체적인 성격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또 한 예가 있다.

류지호는 편집부 기자로 출연하는 배우에게 즉석에서 팔꿈치까지 덮는 팔토시를 하게 했다.

인물담당 조감독에게 큐사인이 나가가 직전에 팔토시를 내리라고 일러두었다.

촬영이 시작되고 류지호가 화난 얼굴로 편집부 기자를 연기한 배우에게 팔토시를 올리라는 사인을 보냈다.

깜짝 놀란 배우가 팔토시를 추켜올렸다.

배우 입장에서는 전혀 계산되지 않은 애드리브 연기였다.

비록 그 배우를 단독으로 찍은 커트는 아니었지만, 고지식하고 자기 방어적인 성격의 편집부 기자 캐릭터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영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성격을 일일이 소개하기 위해 영화가 할애할 시간 따위는 없다.

그렇기에 그가 화면에 병풍으로라도 길게 또렷이 등장하는 커트에서 디테일한 행동 하나를 추가했던 것이다.

2.35:1 화면비, 딥포커스의 장점을 감독이 어떻게 활용하는지 보여주는 연출이다.


“팔토시 신경 쓰지 마세요! 왜 정신 사납게 잔연기를 계속 하려고 합니까!”


류지호가 팔토시를 한 번 써먹자, 해당 배우가 틈만 나면 그걸 활용하려고 했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더니,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는 줄 알고 툭하면 팔토시 가지고 뭔가를 해보려고 했다.


“저거 저거... 사회부 새끼들 하는 꼬라지 봐라... 강 선배! 또 술 펐어? 기자하려고 룸빵 가는 거요, 룸빵가려고 기자하는 거요?“


담배를 피우며 오윤빈이 계속해서 대사를 읊조렸다.


“어렵네... 감독님이 뭘 원하시는 거지....?”


무대 연기든 영상에서 보이는 연기든.

배우의 움직임에 대한 기본 규칙이 있다.

다이얼로그 부분에서는 극적 대사가 있고, 일상어가 있으며, 연설처럼 강한 어조의 대사가 있는가 하면, 독백이나 시낭송처럼 정서적인 대사도 있다.

근접촬영에서 발휘되는 발성과 원경 촬영에서의 발성법이 다르다.

짧은 어휘도 발성법의 변화에 의해 의미가 달라진다.

연극을 제법 해 본 오윤빈이 그 같은 기본을 모를 리가 없다.

적응의 문제다.

또한 의욕과잉 때문에 평정심이 흔들리기도 했고.

안정된 경력을 가진 배우를 제외하고 어떤 배우든 눈에 띠고 싶어 한다.

특히 단역배우들은 더 심하다.

어떤 배우는 연기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

상대역에게 지기 싫어서 과잉되게 연기하는 배우도 있다.

감독이 창조한 세계의 조화를 무너뜨리는 나쁜 연기들이다.

영화감독이 현실의 삶과 세계를 탐구하는 것처럼 배우 역시 그래야 한다.

혼자 접신해서 제 아무리 신들린 연기를 펼쳐봐야 극과 함께 하지 못하면 원맨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화감독은 삶과 인간을 탐구하는 배우를 사랑한다.

그런 페르소나를 갖고 싶어 하고.

성숙한 인격까지 갖추고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된다.


“으갸갸갸!”


한편에서 송라원이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으....당 떨어져.”


쪽쪽.


입안에 넣고 있던 막대사탕 스틱에 남은 찌꺼기까지 빨아먹었다.


“저기... 라원아.”

“응?”

“류 감독님은 절제되고 담백한 걸 좋아하셔?”

“딱히....”


오윤빈이 새 담배를 꺼내 물려다가 송라원을 의식해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송라원이 스태프 단체복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두 개 꺼내 하나를 오윤빈에게 건넸다.

자신의 것을 까서 한 번 쪽 빨아먹고는.


“우리 감독님은 단 한 씬 출연하는 배우에게라도 뭐라도 따먹을 수 있게 해줘.”

“그런 거 같더라. 디렉션이 엄청 디테일 하신 것 같아.”

“근데 아까 리허설 때 오빤 이것저것 설정이 너무 많더라.”

“풍부하게 표현해보려고.”


송라원이 뜬금없이 연기를 펼쳤다.


“사회부 새끼들 하는 꼬라지 하고는... 강 선배! 또 술 펐어? 기자하려고 룸빵 가는 거요, 룸빵가려고 기자하는 거요?”


방금 전 오윤빈이 했던 대사였다.


“쫌 어색했지? 내 게 아니라서 입에 잘 안 붙네. 암튼 은근히 사회부 깔보는 투였던 것 같아.”

“대본을 다 외웠어?”

“나랑 한 번도 안 걸리는 선배님들 대사는 안 외웠지.”


남의 대사까지 암기하다니....

베를린 영화제 배우는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는 오윤빈이다.


“오빠도 촬영하면서 느꼈겠지만, 감독님은 현장에서 콘티 잘 안 바꿔. 다른 감독님처럼 한 장면을 여러 구도에서 딱딱 끊어서 안 따고. 매 씬 촬영하기 전에 마스터 쇼트 반드시 촬영하시고. 그때 디렉션 주시는 걸로 끝. 풀 리허설 할 때 감독님이 아무 말 안하시면 준비한 연기하면 되고, 지적한 사항이 있으면 그걸 본인이 맞춰서 바꾸거나 감독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고.”

“왜 나한테는 별 말씀이 없으시지....?”

“상상력을 발휘하라. 그걸 오빠에게 가르치고 싶으신가 봐.”

“....음.”

“오빠가 준비한 게 혹시 너무 많지는 않을까? 테이크가 길어지면 촬영에 지장을 줄 수 있어. 상대 배우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데 카메라에 걸리거나, 오디오에 소리가 묻거나 하면 안 되잖아. 오디오가 침 삼키는 소리까지 잡아낼 수 있을 만큼 아주 민감한 부분이니 주의해야 하고. 오빠 단독으로 촬영한 부분이 편집에서 사라질 수도 있어. 현장에서 연기는 잘 했는데, 그런 것 때문에 NG가 나거나 편집에서 빠지면 얼마나 아쉽겠어.”


송라원의 지적에 전혀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오윤빈은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호흡을 맞춰야 하는 상대에 대해 잘 알수록 연기하기 좋고.


“혹시 말이야... 감독님한테 찍혔을까?”

“응.”


송라원의 단언에 너무 놀란 나머지 오윤빈이 물고 있던 막대사탕을 뱉을 뻔했다.


“나쁜 쪽으로 찍혔다는 뜻이 아니야. 감독님은 마음에 드는 배우가 있으면 쫌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어. 아무 감흥이 없는 배우는 직접 꼼꼼하게 디렉션을 주시는 것 같아. 두 편 밖에 안했지만, 성향이 그러신 것 같아”

“그냥 담백하게 가야 할까.....”

“내가 주제넘은 참견을 했네. 미안. 오빠.....”

“아니야. 이제 뭐가 잘 못된 건 줄 알겠어. 고맙다. 라원아.”

“아휴. 나도 처음 감독님이랑 영화할 때 영찬 선생님이 이러저런 조언 안 해 줬음 미쳐버렸을 거야. 어떤 때 보면 감독님이 이중인격자 같다니깐.”

“감독님 들으시면 어쩌려고....”

“이 정도는 감독님이 쿨하게 넘기실 걸? <복수의 꽃> 촬영할 때 선생님들이랑 감독님 흉 얼마나 많이 봤는데.”

“그, 그러냐....?”

“암튼, 당도 얼추 충전했고, 슬슬 현장으로 복귀해볼까나.”


두 사람은 촬영장으로 향하며 가볍게 대사를 맞춰봤다.


❉ ❉ ❉


심기일전한 오윤빈이 촬영장으로 돌아왔다.

제작부가 검지를 입에 가져다댔다.


“쉿....”


잠시 담배를 피우며 송라원과 노닥거리는 사이 다른 장면부터 먼저 촬영을 시작한 모양이다.

자신 때문에 촬영 순서가 변경된 것 같아 오윤빈은 죄책감이 들었다.

더욱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다.


“액션!”


모두가 퇴근하고 썰렁한 대한일보.

보도국 사회부 섹션에만 불이 켜져 있다.

최근에 입수한 경찰, 검사 등 거악을 상대로 취재를 할 것인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고아 아동과 관련한 작은(?) 사건을 파헤칠 것인가.

강철중은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컷!”


일반적으로 신문사 내부는 섹션별로 구분되어 있다.

<민중의 적 - EMBARGO>에서는 사회1팀을 파티션과 산처럼 쌓인 서류박스와 종이뭉치를 활용해 공간을 약간 분리시켰다.

촬영의 편의성과 함께 미술적으로 좀 더 풍부하게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높이가 다르게 쌓아 놓은 각종 종이뭉치와 박스들.

컴퓨터 모니터의 삐딱하게 틀어진 각도.

수직과 직각으로 이어진 프레임들.

파티션에 빈틈없이 붙여있는 신문기사와 메모들.

모두가 계산된 미술들이다.

강철중을 화면에 담을 때 배경에 어떤 것이 잡히냐에 따라서 그림이 달라지도록 소품 데코레이션 설계를 했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종이뭉치나 자료의 기울기에 따라서 심리묘사, 긴장감 조성을 표현할 수 있다.

강철중이 벼랑 끝에 몰렸다거나 난관을 극복하고 잘 될 것이라는 암시를 할 수 있다.

온갖 분야를 망라한 자료이 강철중이 다방면에서 유능하다는 걸 암시하기도 하고.

쓰레기더미처럼 쌓여있는 자료 안에는 언론인으로 수상한 트로피까지 처박혀있다.

위태롭게 쌓여 있던 자료더미가 무너진다.

그때 특종 관련 언론인상 트로피를 선영이 발견한다.

양아치 같았던 사수가 새롭게 보이는 순간이다.


[왕년에 최루탄 좀 흡입해보고, 화염병 좀 투척해 봤어요?]

[근처도 안 가봤다. 언론사 입사하고 싶어서 공부만 죽어라 했어. 내가 얼마나 범생이었는데.]

[......!]


사회부·자치행정부·법조 등 출입처가 있는 기자들은 9시 전에 출입처로 향한다.

회사에서 담당 데스크(부장)의 지시를 받고 나서, 곧장 외근을 나간다.

낮 동안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가 대부분 오후 4시 전에 회사로 돌아온다.

기사를 송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조간신문의 마감 시간이 오후 4시.

최종 마감시간은 저녁 9시다.

일반적으로 6시 전에 모든 기사를 마감한다.

이후 기사를 배치하고 제목을 다는 편집기자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한다.

다음날 챙길 것을 준비한 후 오후 7시 전후로 퇴근한다.

영화에서는 강철중과 선영이 속한 사회1팀이 가장 늦게 퇴근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물론 퇴근 후에 강철중은 접대 받기 바쁘지만.

“사회부 기자들 들어오세요. 윤빈이도 들어오고.”


인물담당 조감독이 다음 촬영을 알렸다.

오윤빈은 모니터스테이션 방향을 슬쩍 의식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배우들에게 자료화면 보여줘.”


PPL로 받은 아남전자의 최신 HD 텔레비전에서 국회에서 벌어진 여·야간의 충돌 장면이 나왔다.

배우들끼리 가볍게 대사를 맞춰봤다.

두 번의 리허설을 마치고 텔레비전을 껐다.


“액션!”


사회부 기자들이 케이블채널 실시간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사이에 정치부 최 기자(오윤빈 역)가 끼어 있다.

최 기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저들에게 국가나 국민은 뭘까?]


강철중이 냉소적으로 답한다.


[개돼지.]


다른 사회부 기자들은 귓등으로 듣는데 최 기자의 시선만 강철중에게 향한다.


[저 사람들이 사육사겠네요?]

[권력욕과 탐욕의 줄에 매달려있는 마리오네트겠지.]

[오오. 선배가 그런 말을 다 할 줄 알다니....]


이전에 NG를 냈던 것과 달리 오윤빈은 침착했다.

다소 잡스러웠던 동작들도 다 빼고 담백하게 자신의 다이얼로그를 소화했다.

다만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넣고 짝다리를 짚고 서서 대사를 했다.


[만날 저래서 국회 출입기자 할 맛도 안 납니다. 요새는 통 쓸 것도 없어요. 헤드라인도 만날 똑 같고.]

[새끼... 우리가 언제 모두가 궁금해 하는 걸 알려준 적이 있었냐? 우리가 알려주고 싶은 것만 알려주고 있지. 척 하지 말자.]

[그렇다고 거짓말 한 적도 없죠]

[거짓말도 나쁘지만, 생략하는 것도 나빠.]

[지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선수끼리 그르지 말자. 최 기자야~ 우리 다 알잖아. 쟤들이나 우리나 민주주의 졸라 잘 이용해 먹는다는 거. 김일성 만세라고 외칠 수 있어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아니냐? 김수영 시인이 그랬잖아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라고. 낼 모레가 21세기야. 소련 망하고 중공도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판국에 빨갱이 때려잡는 게 나치와 뭐가 달라?]


참고로 강철중이 인용한 김수영의 시는 당시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신문사에 각각 보냈지만, 두 곳 모두 실어주지 않았다.

표현의 자유 최전선에 서있는 언론사가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시를 거부했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장면에 대해 WaW 픽처스 안에서 꽤나 논란이 있었다.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흥행이 도움이 된다는 의견과 상영금지처분이 내려질 것이라는 우려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불쑥 선영이 끼어들었다.


[선배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뭔데요?]

[내가 어떻게 알아. 난 기레기질로 밥벌어먹는 사람이야. 정치학 전공한 새끼한테 물어. 난 걍~ 자유주의자니까.]

[선배는 저 짝 마포에 있는 바스티유 요새에서 근무했어야 한다니까.]


1991년 건립된 겨레일보 사옥은 프랑스 바스티유 요새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 된 것으로 유명하다.

최 기자가 말했다.


[민주주의가 태동한 고대 그리스 이후로 아무도 모를지도..... 사실 만날 민주주의 떠들어대는 저 인간들도 민주주의가 뭔지 모를 걸요?]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것. 알면서도 저 짓거리 한다는 것. 둘 다 사기야.]

[역할놀이죠, 뭐. 우파니 좌파니 패 나눠서.....]


선영이 툴툴거렸다.


[그 놈에... 비관주의.]


그때 저만치에서 김영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이빨 까려면 휴게실 가서 까! 기자라는 새끼들이 취재를 해야지 어디서 평론하고 자빠졌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던 기자들이 흩어진다.

홀로 남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강철중에서.


“컷!”


오윤빈이 긴장한 표정으로 모니터 스테이션으로 달려왔다.

류지호가 그런 오윤빈에게 가까이 와서 보라고 손짓했다.

방금 촬영한 장면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모니터했다.


“오케이!”


류지호의 시원한 목소리와 함께 두근거리던 오윤빈의 심장이 안정을 찾았다.

이후로 오윤빈에게 할당된 커트들을 무난하게 촬영했다.


“윤빈아!”

“넵! 감독님!”

“꾸준함이란 게 열심히 하냐, 열심히 안 하냐의 문제가 아니더라. 하냐, 안 하냐의 문제지. 왜냐하면 세상의 거의 모두가 열심히 안 하거든.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결과도 볼 수 없는 거고. 왜 소수의 사람만이 반짝반짝 빛을 내냐면 그들만이 하니까 그런 거야.”


G-Tower에서 마지막 촬영은 강철중과 선영의 퇴근 모습이었다.

촬영을 마친 <민중의 적 : EMBARGO> 제작진은 출근하는 샐러리맨들과 엇갈려 퇴근길에 올랐다.


“저 직장인들 중에 열심히 하는 사람 몇 명이나 있겠냐? 그저 주어진 일만 백점 맞기 위해 할 뿐이잖아. 좋아하지 않는 걸 꾸준히 한다? 그저 노역일 뿐이지. 그런 시간 낭비도 세상에 없지. 시간만큼 중요한 투자가 없는데.”

“......”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끝을 볼 때까지 꾸준해야 돼.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은 노력 하는 게 아냐. 그냥 하는 거지. 죽어라고. 거기에 무슨 노력을 가져다 붙이겠어. 안 그래?”

“예.”

“꾸준히 하면 그게 언젠가 자산이 돼. 자산은 너의 가치로 연결되고 가치가 있는 사람은 롱런하게 되어 있다.”


물론 해당 분야에 재능이 있을 경우에만.


“예. 초심 잃지 않고 꾸준히 정진하겠습니다.”

“고생했다.”


류지호가 오윤빈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올라탔다.

<민중의 적 : EMBARGO>에서 오윤빈의 임무는 끝이 났다.

이번 작품이 그에게 있어 배우인생의 전환점은 아닐 것이다.

끝도 아니다.

그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한, 필모그래피는 꾸준히 이어질 테니까.


작가의말

다음 주에는 다시 본래 연재주기로 돌아갑니다.

편안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PS. 늦었지만, 루시오엘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다음 700화까지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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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세상으로 나가 옳은 일을 하라. +7 23.09.27 2,292 89 23쪽
628 안정 속의 변화. (5) +4 23.09.26 2,210 88 22쪽
627 안정 속의 변화. (4) +5 23.09.25 2,267 93 22쪽
626 안정 속의 변화. (3) +8 23.09.23 2,375 88 23쪽
625 안정 속의 변화. (2) +3 23.09.22 2,294 94 23쪽
624 안정 속의 변화. (1) +7 23.09.21 2,435 93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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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살아줘서 고맙다..... +8 23.09.11 2,383 105 29쪽
» 민중의 적 : EMBARGO. (14) +5 23.09.09 2,322 100 25쪽
613 민중의 적 : EMBARGO. (13) +4 23.09.08 2,204 92 26쪽
612 민중의 적 : EMBARGO. (12) +3 23.09.08 2,029 79 23쪽
611 민중의 적 : EMBARGO. (11) +6 23.09.07 2,169 97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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