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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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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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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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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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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글자
23쪽

민중의 적 : EMBARGO. (8)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모두가 프로들이다.

짬밥이 있어서 그런지 대사가 꼬이거나 대사가 서로 엉키지 않았다.

류지호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다음 씬들에는 대사가 거의 없지요?”


송라원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네!”


모든 시선이 송라원에게 쏟아졌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가 잘 못되었나 고개를 갸웃했다.


“자, 마지막으로 강철중의 원맨쇼 한 번 들어보고 마치겠습니다.”


설형기 배우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류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픽.


입가에 미소를 띠운 설형기가 영화의 마지막 씬의 열연을 펼쳤다.

대사 다 무시.

온통 애드리브였다.

욕이 절반이라, 아역배우들을 따라 온 엄마들이 자신의 자녀들 귀를 막았다.


짝짝짝!


박수가 쏟아지며 리딩이 끝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오버가 좀 심하긴 하네.’


전주호 배우는 가벼운 리딩임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런 식이면 설형기에게 압도당해 현장에서 더 오버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다보면 실수를 범하게 되고.

그도 프로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스트레스를 꽤나 받을 것 같았다.

전주호 입장에서 연기가 물이 오르고 있는 송라원과 서서히 힘을 빼는 연기단계로 나아가는 설형기가 상대배우가 된 것은 좋은 일이다.

한편으로는 나쁜 일이기도 하고.

기존에 해오던 연기 방식으로 접근하면, 둘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놀라운 것은 송라원이다.

고아원장으로 출연하는 윤도상, 편집국장 강전일, 사회부장 김영찬, 강철중의 설형기 등.

중견 연기자들 사이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튀어나올 때 반드시 튀어나올 줄 알았다.


‘자식... 많이 컸네. 꽤 할 줄은 알긴 했지만... 괴물이었어.’


류지호는 반성했다.

송라원이 잠재력이 충만한 것은 이전 삶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대로 한 눈 팔지 않고 30대를 넘기면 제2의 한소연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제작부장이 소리쳤다.


“뒤풀이 장소는 길 건너 합정갈비입니다! 약도는 회의실 입구와 우리 팀 사무실에 붙여놨으니까 참고하세요.”


배우들이 회의실을 모두 빠져나가고, 류지호와 송진한 작가만 남았다.


“송 작가님 보기에 리딩 어땠어요?”

“김현수 괜찮겠어?”


류지호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류 감독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최근 코미디 영화만 해서, 좀 과하긴 해요.”

“소시오패스 캐릭터가 대놓고 힘이 들어가면 시시해지는데 말이야.”

“현장에서는 많이 누를 겁니다. TV 연기와 코미디만 주로 해서 좀 떠있긴 해요.”

“대사는 더 안 만져도 되겠지?”

“현장에서 상황 봐서 알아서 고칠게요.”

“오케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캐릭터도 점차 전형화 되고 있다.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연기도 중요하지만, 서사와 연출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류지호는 이전 삶에서 <나이트 크롤러>에서 뛰어난 광기를 선보였던 제이 질렌할의 사례를 참조했다.

제이 질렌할 배우는 배고픈 코요태의 사냥 전인지 후인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연기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밝혔는데, 9Kg를 감량한 빼빼마른 얼굴에 무심한 것 같은 눈동자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었다.

전주호 배우에게 코요태의 영상을 참고하라고 조언했다.

또한 영화 엔딩에서 <유주얼 서스펙트>에 버금갈 만한 감흥을 선사해주는 제이 질렌할의 마치 마실을 걸어가듯 평범하게 걸어가는 걸음걸이를 전주호에게 시켜볼 생각이다.

즉 전편의 조규환과 마찬가지로 김현수를 현실세계에서 동떨어진 인간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의 인물로 묘사할 생각이다.

류지호는 주인공보다 악당에 더욱 공을 많이 들이는 타입이다.

주인공은 허술해도 된다.

영화 속에서 성장하거나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악당은 완벽해야 한다.

이야기가 시시해지 않으려면 악당이 매력적이면 된다.

물론 악당이 저지른 범죄나 비윤리적인 문제를 옹호하거나 미화해선 안 된다.

선악이 모호하고, 뭐가 정의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경계선.

그 정도가 적당하다.

류지호의 영화에서 보이는 관점 중에 하나다.

사회부장으로 출연하게 된 김영찬이 대뜸 물었다.


“류 감독 혹시 기자생활 해봤어?”

“전혀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리딩이 진행되는 사이 배우들이 질문하는 것들을 척척 대답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조지려면 반론의 여지가 없게 확실하게 취재해서 깊이 있게 다뤄야죠.”


김영찬이 웃음을 터트렸다.


“기자라고 뭐 다르지 않더라고요. 그냥 직장인에요. 일반 회사원이 실적을 내야 하는 것처럼 기자들은 기사가 신문에 실리는 게 중요한 거죠. 그 중에 가장 큰 실적이 특종이고.”

“하긴 열심히 취재해서 기사 썼는데, 신문에 나가지 않으면 상심이 클 수도 있겠다.”

“배우도 그렇잖아요. 열연을 펼쳤는데 편집에서 잘려나가면 그 배우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기자들도 오랜만에 쓴 단독기사가 편집과정에서 지면을 못 찾아 배달판에서 누락되면 다음 날 술 엄청 마신다네요. 낙종이라도 하게 되면, 엄청 깨지고. 때에 따라서는 경위서도 쓰고.”

“사람 냄새가 나야겠지?”

“특정 언론사나 그곳에서 근무하는 수뇌부를 까고 싶진 않아요. 신문이란 매체와 그들만의 리그가 가진 허울을 드러내고 싶을 뿐.”

“그래서 강철중 빼고는 다들 그냥 직장인 같은 거구나?”

“어디나 다 마찬가지 아닐까요? 좋은 사람이 훨씬 많은데, 몇몇 나쁜 놈들 때문에 그들이 속한 사회나 조직이 개판되는 거.”


한국 언론의 문제는 특정 정당 또는 이해관계가 얽힌 광고주를 지나치게 ‘빨아‘ 준다는 것이다.

특히나 광고주라고 할 수 있는 대기업의 총수와 관련된 일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를 써주고 반대급부를 받는 경우가 많다.

한발 더 나아가 광고주 측에 반협박을 가한 후에 항복을 받아내기도 한다.

항복의 표시로 광고를 받게 되면 태세를 전환해 다시 ‘빨아’ 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사회면, 경제면, 문화면에는 기사인지 광고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기사들이 실린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전경련 대표 기업들이 주요 언론사 지분을 가지고 있다.

도가 지나친 홍보 기사가 넘칠 수밖에 없다.


“청와대 출입기자단 없애버린다며?”

“검찰도 고개 바짝 쳐들고 개기는데 기자라고 안 그럴 줄 아세요?”

“요번에 기자들과 좀 어울려보니까 옛날하고 많이 다르다고 하던데? 거 왜 언론고시라고 불리던 것도 많이 바뀌어서 기자들도 전문화되고 있다던데?”


참여정부가 언론을 개혁하기 위해 애쓰고 있긴 했다.

이미 기득권의 일부가 되어버린 언론과 싸움 자체가 되지 못한다는 걸 확인하는 수준에서 멈추게 되겠지만.

어찌되었든 이 시기에는 전문 기자들이 언론사에 많이 영입되면서 나름 깊이 있는 기사를 꽤 자주 접할 수가 있었다.

포털사이트가 언론의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되면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리지만.


“영화에서 밤의 대통령이란 대사 막 쳐도 되나....? 그 양반한테 찍히면 아무리 류 감독이라도 곤란해지는 거 아냐?”


국내 신문판매부수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신문 사주를 이르는 표현이 ‘밤의 대통령’이다.

대통령처럼 큰 권력을 휘둘렀다는 의미와 함께 밤일(?)도 잘했다는 의미도 담긴 별명이다.


“한국인 중에서 주요 보수신문이 모두 족벌언론이란 걸 모르는 사람 있어요? 이미 후계자까지 지정해서 언론사를 물려주려고 한다던데.”

“괜히 밉보일까봐 그렇지.”

“어차피 그 사람들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 시기 백원일보는 사주 일가의 지분이 70%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제일일보의 사주는 오성가문의 처가이며, 동양일보의 창립자는 친일파다.

경일그룹 역시 자선재단을 내세워서 우회적으로 언론사를 거느리고 있고, 기독교 종교 단체가 지배하고 있는 언론사도 둘이나 된다.

정부 유관 지분이 과반이 넘는 언론사도 있다.

YNTV, 경향일보, 겨레일보처럼 우리사주와 임직원 지분이 지배적 지분에 근접한 곳도 있긴 했다.

대부분의 한국의 언론사들은 표면적으로는 소유주 대신 전문경영인이 언론사를 운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상 기사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가진 편집국장이 사주의 통제를 받는다.

지상파 방송사 중에서도 두 개 방송사는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사장을 임명하는 구조여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독립성 논란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백원일보가 여론을 호도한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80년대만 해도 판매부수가 300만 부였다고 하던데, 요새는 200만 부도 안 된다고 하네요. 아마 실질 판매와 진성 구독자 수는 그 절반도 안 될 겁니다.”


이 시기 보수언론이라 분류되는 신문을 모두 합한 총판매 부수가 300만 부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다.

해가 갈수록 판매부수는 더 떨어지게 된다.

메이저 언론사들은 생존의 기로에 서있다.

인터넷 포털과 뉴스 유통을 놓고 법적인 분쟁과 갈등을 겪고 있다.

광고수주도 예전 만 못하다.

충성도 높은 구독자를 제외하고 일반 대중들이 포털사이트에서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언론사 전문경영인들로써는 생존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고민이 깊었다.

그래서 종합편성채널 같은 새로운 수익창출 비즈니스를 고민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이다.

다만 시대의 흐름을 발맞추기 위해 편법과 반칙을 일삼으니까.... 문제다.


“감독님, 선생님....!”


신인 배우가 류지호와 김영찬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정치부 기자로 출연하는... 성광씨죠?”

“네! 오성광입니다!”


그는 한 개 씬에서 대사가 조금 있고, 두 개 씬에서 대사 없이 출연할 예정이다.

그 외 신문사 편집국이 나오는 장면마다 병풍처럼 등장하게 되는 단역이다.

이동화가 캐스팅했는데, 리딩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현장에서도 그렇게만 해줘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혹시 회사 있어요?”

“지금은 열심히 오디션 보러 다니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님!”


오성광이 아직도 회사가 없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연기 좀 하는 배우는 이런 저런 추천으로 오디션을 보고 매니지먼트와 계약하기 때문이다.

류지호의 기억에 없는 배우다.

이전 삶에서 무명배우로 전전하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배우인 모양이다.

내심 괜찮은 배우를 발굴한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갖고 류지호가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쟤가 감독님 눈에 띠었나 봐?”

“톤이 좋더라고요.”

“쟤 마임도 좀 해.”

“형님도 아는 친구였어요?”

“봉사 갔다가 저 놈이 마임하는 거 봤어.”

“봉사도 다녀요?”

“요새 마임 공연할 데가 없다. 재능기부도 할 겸 공연도 할 겸. 겸사겸사.”

“주로 어디 다니시는데요?”

“여기저기. 스케줄만 맞으면 안 가리고 불러주는 데는 다 가.”

“<Help Me, Please!>에 출연했던 마임 팀은 아직도 있어요?”

“해체한지가 언제인데. 그때 애들 중에 남아있는 놈 없다.”


솔직히 잊고 살았다.

<Help Me, Please!>에서 좀비를 연기했던 마임팀원들은 고마운 사람들인데.


“그 단원들 지금도 보세요?”

“뿔뿔이 흩어져서.... 지방으로 간 후배들은 연락이 끊겼어.”

“좀 무심했네요.”

“뭘 무심해? 이 바닥이 다 그런 거지.”

“형님, 제 동생 아라 알죠.”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릴 때 몇 번 보긴 했지, 왜?”

“아라 한 번 만나보세요. 다울재단에서 형님 마임팀을 지원해 줄 겁니다.”

“왜?”

“계획 없이 비정기적으로 재능기부 하실 거 아닙니까. 다울재단이 진행하는 재능기부 프로그램에 들어가시면 마임 하는 후배들 최소 차비 정도는 벌 겁니다.”

“기부에 무슨 돈을 받아?”

“기부는 마임 공연으로 하시고, 후배들 교통비라도 받으면 좋죠. 다들 자비로 다닐 텐데.”

“....고맙다.”

“고마워할 것 없어요. 심사에서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대본리딩 후에 열린 뒤풀이는 차분했다.

크랭크인이 코앞이라, 먹고 마시며 흥청망청 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 ✻ ✻


며칠 후.


“오....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말씀이시죠?”


오성광은 매니지먼트 CHAN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디션을 보러오라는 제안이었다.

오성광은 새로운 영화 오디션인 줄 알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매니지먼트 CHAN을 방문했다.

매일매일 마음속에 불을 지피고 있다.

배우의 길로 들어선 지 5년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화술, 액팅, 마임, 운동을 해왔다.

오디션이 있든 없든.


“오성광씨 우리와 계약할 생각 없어요?”

“저, 저를 CHAN이, 그러니까. 소속 배우로요? 진짜요?”

“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오성광은 다온로펌의 변호사의 도움으로 꼼꼼하게 계약서를 확인하고 서명했다.

이제부터 매니지먼트 CHAN 소속으로 케어를 받게 되었다.

며칠간 정신없던 날을 보낸 오성광이다.

매일 하던 연습도 제대로 못했다.

<민중의 적 : EMBARGO> 크랭크인 날짜까지 일 주일이 채 남지 않았다.

비록 대사는 없다시피 했지만, 참여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무려 류지호 감독의 영화이니까.

단역이자 병풍이었지만, 촬영이 진행되는 두세 달의 시간 동안 자신의 연기가 일관되게 이어져야 했다.

중간에 바뀌어서 다른 느낌을 주면 영화에서 자신이 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를 망치는 길이다.

러닝타임 순서대로 찍지 않기에 연극과 달리 영화는 캐릭터를 일관되게 유지하기 쉽지 않았다.

반면에 연극은 사건들이 순서대로 진행된다.

자연스레 배우의 감정이 사건을 따라간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만 지나면 막을 내린다.


“단역이면 어떻고, 주인공이면 어떠랴~”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배우들 모두가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아니다.

영화에 출연하고도 본인조차 알아볼 수 없게 짧게 스쳐지나가거나, 열심히 준비했던 연기가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다.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할 경우도 수두룩하다.


“사회부 새끼들 하는 꼬라지하고는... 쯧쯧.”


오성광은 몇 마디 되지 않는 대사를 열심히 연습했다.

심지어 샤워를 할 때도 대사를 읊조렸다.

지하철에서도 저도 모르게 대사가 튀어나왔다.

사람들이 미친놈 보듯 슬금슬금 피했다.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나왔다.

왠지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블록버스터 안 찍어?”


충무로 사람들이 류지호에게 자주 묻는 질문이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류지호는 생각했다.

300억 예산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다.

그런데 한국영화 시장이 감당을 하지 못한다.

혹여 류지호가 2천만 명을 동원하는 영화를 찍었다고 해서 한국영화 시장이 갑자기 두 배로 커지지도 않는다.

한국영화에 투자되어야 할 제작비를 류지호가 대부분 가져가게 되면, 그것에 따른 반작용이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

전 세계 어떤 영화시장이든, 투자와 수익으로 순환되는 자금 규모의 크기는 정해져 있다.

딱 해당 영화시장의 크기만큼에서 조금씩 상승하거나 하락한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고예산 영화의 천만 관객 돌파로 다시 한국영화에 돈이 돌고 있다.

문제는 한두 해 영화로 유의미한 수익이 나오지 않는다면.

한국영화 시장 규모 이상으로 들어왔던 자금이 또 다시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할리우드가 주요 조합과 임금인상을 비롯해서 처우협상을 괜히 3년마다 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을 인위적으로 조절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WaW 엔터테인먼트는 매년 한국영화 라인업에 10~20편을 무조건 편성한다.

그 정도에 소요되는 자금이 매년 안정적으로 영화계 안에서 순환되고 회수될 수 있도록 판을 짜고 있다.

다른 메이저와 함께 120~150편이 안정적으로 제작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수백억 대 영화를 제작한다고 해도 한국영화 투자규모가 흔들리지 않고, 또 한국영화 시장이 감당할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류지호는 수백 억 원 예산의 한국영화를 찍을 계획이다.


❉ ❉ ❉


-너네 같은 놈들을 네 글자로 뭐라고 하는지 아냐?

-민중의 적 : 엠바고!

-제작고사. WaW Pictures


현수막 아래 고사상이 차려져 있다.

상 중앙에는 잘생긴 돼지머리가 활짝 웃고 있다.

상 오른쪽으로는 망원렌즈가 달려있는 ARiCH535 카메라가, 왼쪽에는 HMI 4kW 라이트가 놓여 있다.

프로듀서 김재욱의 집례로 영화 <민중의 적 : EMBARGO>의 안전한 촬영을 기원하는 고사가 시작되었다.

WaW 엔터테인먼트 회장 박건호를 시작으로 감독, 주연배우, 헤드스태프 등이 순서대로 배례를 올렸다.

류지호 영화에 참여하는 배우·스태프뿐만 아니라, WaW 엔터테인먼트의 주요 임원, 프로듀서, 감독들, 친분이 있는 배우, 영화 관련 협회장 등.

수많은 사람들이 무사고를 기원해주었다.

돼지머리에 꽂히는 돈 봉투가 늘어갈수록 돼지가 더욱 활짝 웃는 것만 같았다.


“사고 없이 무사히 촬영 쫑하길 기원할게.”

“영화 기대하지.”

“무탈하게 마치시길 빌어요.”


덕담을 해오는 지인들에게 류지호가 일일이 고마움을 표했다.

처음으로 류지호 영화에 합류한 사람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제작고사를 축하하러 온 사람들의 면면이 너무 대단했기 때문이다.

매지니먼트 CHAN 소속 스타 배우들은 물론이고 허정원, 박중환, 안정기 같은 톱배우들까지 일부러 시간을 내 찾아왔다.

영진위원장, 메이저 스튜디오 사장들, 극장연합회장, 감독들까지.

한국영화를 움직이는 유력자들이 모두 모인 것 같아 마치 영화 시상식을 연상케 했다.

고작 제작고사일 뿐이지만, 류지호가 차지하는 한국영화에서의 위상을 실감케 했다.

전하영이 김재욱에게 물었다.


“합정갈비에 오늘 온 사람들 모두 들어갈 수 있을까?”


“가능할 걸요?”

“우리 감독님은 어떻게 된 게 하루 촬영 진행비보다 파티비용이 더 드냐.”

“하하.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감독님한테 눈도장 찍겠어요.”

“그나저나, 고은아까지 올 줄은 몰랐어.”


슈퍼탤런트 출신의 고은아는 다소곳하고 지적인 여성 이미지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남성들에게는 ‘최고의 신부감’, 장년층에게는 ‘최고의 며느리감’으로 꼽힐 정도로 이미지가 좋았다.

작년부터 설형기와 스캔들이 모락모락 돌고 있었는데, 증권가 찌라시에서 불륜설이 돌고 있는 상태다.


“그냥 모른 척 하세요.”

“진짜래?”

“모르죠.”

“진짜라고 하더라도 영화 개봉하고 터졌으면 좋겠다.”

“흥행에 영향을 미칠까봐요?”

“우리나라 관객들이 배우 사생활에 민감하잖아.”

“그래두, 감독이 류지호잖아요.”

“영화 잘 빠져도, 관객이 정나미 떨어지면 볼짱 다 본 거야. 입소문이 얼마나 무서운데.”

“전 별로 걱정 안 되네요.”

“초록은 동색이냐? 감독님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도 피디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걱정 마세요. 아마 스캔들 터져도 별 일 없을 거니까.”

“그걸 어떻게 장담해?”

“우리 감독님이 편집을 싹 갈아엎을 테니까요.”

“편집을 갈아엎어?”

“영화 톤을 확 다운 시켜서 사회파 스릴러로 장르를 바꿔버릴 걸요.”


전하영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 김재욱을 돌아봤다.


“콘티가 두 개더라고요. 하나는 전편처럼 약간은 코믹한 톤이고, 다른 하나는 좀 많이 무거워요. A콘티로 촬영한 다음 코믹적인 상황 줄이고, 언론과 정의에 포커스를 맞추면 얼추 사회파 드라마 비슷하게 나올 것 같다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어요.”

“그게 가능해?”

“저야 모르죠. 감독도 아닌데. 그게 되면 감독하지 프로듀서 하겠어요?”

“두 가지를 계산해서 찍으면, 촬영 회차 늘어나는 건 아니고?”

“계산하고 찍지 않아도 된대요. 포스트에서 얼추 만들어 질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편집이 어떻게 되고, DI가 어떻고, 음악이 어떻고. 뭔 말인지 물어도 대답을 안 해주지만. 암튼 계산이 다 서 있나 봐요.”

“그게 피디가 할 소리야?”

“저한테 뭐라 하지 마시고. 앞으로 우리 감독님 영화는 전 피디님이 하시던가요.”

“전편만한 후속편 없다고. 이거 곤란한데....”

“걱정 마시라니까요. 한국에서 흥행이 안 돼도 상관없잖아요. 아마 4대 국제영화제 한군데 감독주간에는 초청될 테니까.”


김재욱이 자신하는 이유가 있다.

국제영화제는 암암리에 밀어주는 감독이 있게 마련이다.

토론토와 베를린의 경우, 류지호의 영화를 다른 영화제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초청할 것이다.

물론 영화가 형편없다면 초청을 받고도 최종적으로 탈락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프로그래머가 작품에 실망했다면 보통 영화제 사전 행사 같은 감독주간에라도 초정을 받는다.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은 칸 영화제에 작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선제적으로 나선다.

류지호 영화는 작품이 완성되기 전부터 몇 군데 국제영화제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그 정도로 국제영화제들은 명성 높은 감독의 영화 확보에 사활을 거는 편이다.

물론 최후의 보루도 있다.

한국에서 열리는 부천판타스틱 영화제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다.

그 곳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민중의 적 : EMBARGO>을 개막작이나 폐막작으로 상영해 줄 것이다.


“오랜만에 뵙네요.”


류지호가 동우의 왕 회장과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현재 왕 회장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홍콩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축하하네.”

“중국에 들어가신 거 아니었어요?”

“잠시 들어왔네. 한 달 정도 머물다 다시 넘어가려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자네 혹시... 홍콩에서 영화 찍을 생각은 없나?”

“그럴 계획은 없어요.”

“올해부터 홍콩과 중국 합작 영화는 수입쿼터에 포함되지 않는 건 알지?”

“예.”

“홍콩 쪽에서 자네와 Eye-MAX 영화를 찍어볼 수 없겠냐고 물어. 그쪽 관계자들이 자네 다다음 영화가 결정되었는지 꼭 물어봐 달라고 하더군.”

“일본에서 한 편 끝내놓으면, 당분간 휴식을 취하려고요.”

“얼마나.”

“일 년 정도요.”

“그렇게 오래? 경영에 집중하려고?”

“아니요. 제 피앙세 뒷바라지 좀 하려고요.”

“그, 그랬구만.”


왕 회장은 일순 할 말을 잊었다.

류지호가 약혼녀의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이 어딘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네 약혼녀는 미국 명문가 자녀 아니었나?”

“힘들고 외로울 때 곁에 있어주는 것도 뒷바라지 아니겠어요?”

“알겠네. 뒷바라지 하는 사이에 홍콩과 합작으로 영화 한 편 하는 것도 생각해 주게.”

“홍콩 쪽에서 물어보면, 당장은 생각이 없다고 전해 주세요.”

“그럼세.”


류지호는 왕 회장과의 대화를 끝으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언젠가 전용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찍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없이 말했던 적이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더니....’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 작성자
    Lv.99 하얀유니콘
    작성일
    23.09.06 14:37
    No. 1

    잘보았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3.09.06 19:48
    No. 2

    잘 보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7 ma******..
    작성일
    24.04.18 18:02
    No. 3

    저 당시에 '감히' 청와대 출입기자실 없앤다고
    대통령 죽여야 한다고 게거품 무는 기자 마누라들의 까페글을 봤어요
    기자 마누라들 무섭던데요 대한민국 최고 존엄이 기자 마누라인줄
    마누라들이 그 지경인데 기자들은 어땠겠어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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