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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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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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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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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민중의 적 : EMBARGO. (7)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도쿄다카라 제작위원회와 영화 두 편을 더 계약했다지요?”


일정 내내 류지호를 수행하던 이봉호 사장이 대답했다.


“의장님께서 일러준 <데스노트> 실사화와 <춤추는 대수사선> 스핀오프에 투자했습니다.”

“<군계>가 개봉하는 해에 <데스노트>가 극장에 걸리겠군요?”

“2007년 상반기는 <데스노트>, 하반기에 <군계>가 개봉할 것 같습니다.”


만화 <데스노트>는 작년 12월 주간 소년 점프에서 연재가 시작되었다.

설정집 포함 13권이 발매된다.


“푸지TV에서 <히어로> 영화판 만들겠다고 하면, 이 사장도 제작위원회에 들어가세요.”

“알겠습니다.”


왜냐고 묻지 않았다.

드라마 <히어로>는 2001년 대히트를 쳤다.

주인공으로 출연한 가수이자 배우만 승낙하면, 곧바로 영화화가 진행될 수가 있다.


“제작위원회에서 <군계> 시나리오 가지고 뭐라고 안 해요?”

“그게 좀 복잡미묘합니다.”

“.....?”

“<군계>를 작가주의 영화로 풀어내시면, 토론토나 베를린 영화제를 노려볼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군계>는 격투기 장르영화를 표방하고 있다.

겉으로는 그렇다.

영화를 꼼꼼히 뜯어보면 일본이 꺼려할 영화다.

군국주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기득권을 비판하는 암시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만 봐서는 그 같은 류지호의 음흉한 속내를 파악할 순 없다.

최종 결과물을 봐야 그 같은 암시와 상징이 깔려 있는 영화인 줄 알 수 있다.

푸지TV는 전통적으로 일본우익성향의 논조를 펼쳐왔다.

도쿄다카라는 수위 높은 폭력을 담은 영화나 정치색이 농후한 작품을 제작하지 않아 왔고.


“그들 표현에 의하면 오랜만에 국제 영화제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고 흥행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찬스이긴 한데.... 영화가 너무 센 것 문제라고 할까요. 높으신 분들이 싫어하면 어쩌나 실무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긴 합니다.”

“만약 제작위원회가 중간에라도 발을 빼겠다면 WaW 재팬이 제작권리를 양도받는 것을 고려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애매한 문제이긴 한데. 앞으로 미국 쪽 출판물에 관해 씨네콰논이 영화 판권을 구입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저희가요?”

“미국에서 영화권리를 사들이는 것이 많이 힘들어져서요.”


류지호는 최근 미국에서 출판된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의 영화 및 TV시리즈 영화권리를 구입했다.

장편 범죄소설 <덱스터>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연쇄살인마 덱스터 모건이라는 인물이 낮에는 유능한 법의학자, 밤에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로 활동하는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이전 삶에서 TV시리즈로 제작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소설이다.

실사화 권리를 얻는데 우여곡절이 꽤나 많았다.

이제는 미국에서 출판물에 대한 판권 계약에 류지호가 나설 수가 없게 됐다.

상대가 판권 가격을 터무니없게 부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류지호가 어떤 작품을 구한다고 소문나면, 경쟁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렇다보니, 원작자의 협상력만 높여주게 됐다.

속임수를 써보기도 했다.

소용없었다.

실패를 모르는, 미다스의 손이 관심을 보이는 아이템이다.

경쟁자들로서는 자신들이 못 가지더라도 최소한 방해라도 하겠다는 못된 심보를 부렸다.

따라서 류지호는 영화화 권리 확보에서 완전히 빠지기로 했다.

경쟁자들을 속일 수 있는 루트를 찾기로 했다.

그 중에 하나가 할리우드에 알려지지 않은 씨네콰논이다.

어쨌든 최근 류지호 본인이 구입한 작품은 둘이다.

미국에서 출판된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와 한국에서 연재 중인 어반 판타지 소설 <월야환록>이다.

<월야환록>은 <퇴마기록>의 후속 프랜차이즈로 점찍었던 장르소설이다.

한세건의 후보라고 할 수 있는 80년대 생 남자배우들도 무럭무럭 커리어와 연기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기에 제작 시점을 면밀히 살피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 망가나 애니메이션 판권은 어떻게....?”

“이 사장이 다이렉트로 논의를 진행하세요. 나는 이제 빠집니다.”


어차피 5억 엔(50억 원) 선에서 이봉호 사장 마음대로 집행할 수 있다.

달라질 부분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일본의 사업을 따로 점검하거나 챙길 필요는 없었다.

큰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7개 극장 71개 스크린을 보유한 버진 시네마즈를 인수한 GOM Cinemas JPN은 현재 12개 극장 130개 스크린으로 늘어나 있다.

도쿄다카라와 합작하는 영화마다 흥행성적도 좋고.

기존의 씨네콰논은 3억 엔 미만의 예산영화를 따로 기획·제작하고 있다.

큰돈은 벌진 못하고 있지만.

원래 저예산전문프로덕션은 적게 쓰고 적게 버는 영화를 많이 찍어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것이 경영전략이니 상관없었다.


❉ ❉ ❉


류지호는 인천국제공항이 아니라 김해공항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광안리에서 열리는 스타리그 전기리그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류지호가 개입하면서 ‘광안리대첩’이란 말이 생기지 않을 것으로 봤다.

헌데 기대 그 이상의 흥행행진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 ‘스타크래프트 리그‘는 양대리그로 진행되고 있다.

다솜리그와 올게임리그다.

통합챔피언스리그는 지난 2000년부터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 이듬해부터 최대 1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리고 있다.

90년대부터 ‘스타리그’ 결승전은 명경기와 흥행성으로 인해 큰 화제를 끌고 있다.

강남 E-스포츠 플라자의 연간 방문객 숫자가 90만 명에 달할 정도다.

코엑스몰의 올게임넷 상설 경기장 역시 30~45만 명이 방문하고 있다.

작년 스타크래프트 양대 리그 통합챔피언스리그에서 올림픽체조경기장을 가득 채운 입장객수 17,121명은 E-스포츠 단일 행사 최대 관중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에 고무된 양대 게임 리그 방송사는 올해 전기리그 결승전을 대규모 행사로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올게임넷 전기리그 결승은 광안리에서 다솜리그는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하루 앞 서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다솜리그 결승전은 공식집계 67,042의 관중 수를 기록했다.

주경기장의 최대 수용인원 10만 명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새로운 기록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류지호가 참관한 광안리 결승전이 하루 만에 그 기록을 갈아치웠다.


“10만 명이던데?”


김석민이 류지호를 놀렸다.

어제 다솜리그가 세운 기록을 큰 차이로 넘어선 것에 대한 놀림이다.


“겨우?”


류지호는 최소 10만 명, 최대 15만 명까지 광안리에서 북적거렸을 것이라 예상했다.


“10만 명이 겨우냐?”

“어제의 흥행 버프를 받아서 한 20만 명은 왔을 줄 알았지.”

“그러냐? 어쨌든 다솜이 올게임에 졌어.”

“흥행에 성공한 건 다솜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어차피 우승은 다솜리그에서 나올 것이고.”

“하나쯤은 양보해도 된다는 거네?”

“빅이벤트 흥행, 시청률 다 져도 되는데, 우승만큼은 양보 못하지.”


가온그룹은 오너가 Snowstorm Entertainment까지 소유하고 있는 셈이라서 해당종목 팀을 따로 운영하진 않았다.

뒷말이 나올까 싶어서다.


“미국에서 온 애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냐?”


류지호는 DoTA-Allstar 맵 제작자 7명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SPECTRUM Home Entertainment의 게임소프트 사업부에 스카우트해서 Timely IP를 활용한 AOS 게임을 개발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다섯 명은 남고 두 명은 미국으로 돌아갔어.”

“남은 애들은 스펙트럼과 함께 하겠대?”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왜?”

“걔들은 스펙트럼에 채용되는 것보다 미국에서 스타트업을 하고 싶은 모양이야.”

“DoTA를 기반으로?”

“응.”

“잘 좀 꼬셔보지.”

“우리가 Snowstorm도 아니고, 아직 게임 출시도 안 한 무명 개발산데, 걔들이 옳다구나 스카우트 제의를 덥석 무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냐?”


물론 전설의 게임 <그날이 오면> 시리즈를 발매한 미리내 게임즈가 자회사로 있긴 했다.

그들은 그들대로 국산 온라인게임을 개발하고 서비스하느라 여력이 없었다.


“내가 투자한 회사라고 밝혔는데도 그래?”

“넌 코빼기도 안 비쳤잖아.”

“실력은 있어 보여?”

“딴 건 모르겠는데, DoTA 캐릭터와 스킬은 빠삭하더라.”

“너희들이 개발한 게임에 대해선 뭐래?”

“처음에는 놀라더니 그걸 DoTA Allstars에 어떻게 접목시킬지 지들끼리 쑥덕거리는 눈치야.”


류지호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김석민은 류지호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10여 분이 흐르고 좀처럼 열릴 것 같지 않던 류지호의 입이 열렸다.


“정말 경영에는 관심이 없어?”

“그냥 개발자로 살란다.”

“그룹 차원에서 자회사 통합작업 하는 건 아냐?”

“재정이가 알려주더라. 나만 알고 있으라던데?”

“자회사로 흩어져있는 인터넷 관련 기업들을 통합할 거야.”


가온그룹은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는 씨네필, 스펙트럼 DVD, 스펙트럼 조이숍(온오프라인), 조이365, WaW CGI Lab, 아이콘스 엔터테인먼트, 미리내 게임즈 등을 통합해 홈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개편하기로 했다.

창업 멤버 중에 한 명인 김석민에게 회사를 맡길 생각이었는데.


“난 기업 경영 같은 거 안 해. 아니 못할 것 같아.”

“모하임도 서른 전에 Snowstorm을 시작했어.”

“....!”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니까.”

“대신 게임 스튜디오는 나와 태경이가 책임지고 싶어.”

“미리내까지?”

“응.”

“그럼 DoTA Allstars 개발자 애들로 미국에서 자회사 설립하는 걸로 정리해 봐.”

“통합되는 스펙트럼 게임 스튜디오 자회사로?”

“응.”

“알겠어.”

“마흔 넘고 오십 넘어서까지 게임 개발자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난 사장이랍시고 우리 애들 쪼아대고 달달 볶기 싫어.”

“너더러 돈 벌라는 소리 아무도 안 해. 애들하고 재밌는 게임만 만들어.”

“그 말이 더 부담돼 자식아~”

“이번 게임만 만들고 은퇴할거야? 내가 있잖아. 경영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한국의 게임판 한 번 뒤집어 놔봐.”

“태경이랑 의논해볼게.”

“연말에 자회사 통합안이 발표될 테니까 그때까지는 떠벌리고 다니지 말고.”

“태경이한테도?”

“응.”

“알겠어.”


한국의 게임 개발사는 SPECTRUM KOR, 미국에 설립할 스튜디오는 SPECTRUM USA.

추후 Revolt Games가 설립되면 미국법인에 합병시켜서 <리그 오브 레전드 : 크래쉬 오브 페이츠>를 개발하도록 할 계획이다.

한국에 벌여놓은 것들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가 IT 관련 사업들이었다.

늦어도 내년 상반기에는 교통정리가 될 것 같았다.


‘결혼 전에 가온그룹도 얼추 정리가 될 것 같네.’


은퇴할 생각은 없다.

다만 마흔 언저리에 이사회의장 자리까지 내놓고 다른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돈 버는 일보다 돈 쓰는 일이 될 것 같다.

즉 영화에 집중하면서 자선활동에도 시간을 많이 할애할 생각이다.

과거로 돌아와 숨 막힌 하루하루를 살았던 류지호는 오로지 영화를 잘 해보고자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는 가운데 회사를 키우고, 엄청난 부를 일구었다.

대기업을 일군다는 것이 원래가 원했던 삶의 목표는 아니었다.

어떤 간섭도 없이 마음 놓고 영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원했던 삶을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그냥 가려고? 술 한 잔 안하고?”

“응. 삶의 원동력이자 목표를 수행해야 하니까.”

“그게 뭔데?”

“뭐긴? 영화지.”


[영화 만들기란 마차를 타고 서부를 여행하는 것과 같아서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지 걱정스럽다.]


- 영화 <아메리카의 밤>에서 나오는 말이다.

영화 현장은 어느 장소, 어떤 때든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아메리카의 밤>에서처럼 배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여배우의 돌출행동, 제작자의 잦은 간섭 등 예상치 못한 사건과 사고의 연속으로 어수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만들기는 즐거운 작업이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

우리네 삶 역시 영화 현장처럼 예상치 못한 것들의 연속이다.

제아무리 설계가 잘 되어 있다고 해도 뜻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 ❉ ❉


합정로터리에 위치한 WaW 프로덕션 오피스.

대본리딩을 진행할 수 있는 대형 회의실에 <민중의 적 - EMBARGO> 배우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였다.

음료와 다과가 준비되었고, 메이킹 팀의 카메라도 세팅되어 있다.

연출부는 프리비즈 영상이 제대로 재생되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제작부장은 리딩을 마친 후 진행될 뒤풀이 장소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속속 도착하는 배우들을 조감독과 제작실장이 맞이했다.

배우들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놓인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리딩에 앞 서 프리비즈부터 먼저 보시겠습니다.”


신문사 내부의 복잡한 동선을 보여주는 장면, 추격 장면, 최선영이 공격받는 장면, 카 체이스 장면 등.

복잡한 촬영 과정이 필요한 장면들이 프리비주얼로 상영되었다.

배우들에게 자랑하려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속도감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보라는 의미다.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오직 류지호만 진행하는 과정이다.

시나리오는 송진한이 썼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던 송진한은 충무로 복귀를 타진하고 있었다.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따라서 류지호가 제안하는 영화나 TV 드라마 대본을 집필하며 감독 복귀를 궁리 하고 잇다.

<민중의 적> 3편 연출을 제의해봤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길게 사설 늘어놓을 필요 있겠습니까? 바로 가죠?”


아아!

크흠!


배우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볍게 목을 풀었다.

류지호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짤막하게 말했다.


“이 감독! 시작 합시다.”

“예. 감독님!”


사락사락.


침묵 속에서 대본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본리딩 경험이 없는 몇몇 신인 배우들이 마른 침을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내 이동화의 차분한 목소리가 대회의실을 울렸다.


“씬 1. 밤. 쏟아지는 장대비. 일순 굵은 빛기둥이 보육원 간판을 훑고 지나간다. 승합차에서 내리는 검은 그림자들. 은밀하면서 민첩하게 움직이는 구둣발.....”


이동화가 덤덤하게 지문을 읽은 후 배우들의 대사들이 튀어나왔다.

리딩이 진행되는 동안 류지호는 한 번도 끊지 않았다.

말 그대로 리딩이다.

힘 빼고 가볍게 영화 전반을 훑는 과정이다.


하하하.

호호호.


탁월한 감초연기를 선보이는 몇몇 배우들의 애드리브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오로지 전주호 배우만이 웃지 않았다.

대사를 마음껏 가지고 노는 몇몇 배우들로 인해 당황할 법도 한데, 전주호는 내색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다년 간 TV드라마와 영화 현장을 경험한 노련미가 엿보였다.


“어! 이거, 내일자로 엠바고 걸린 건데....”


설형기 배우의 능청스러운 리딩이 끝나기도 전에, 사회부장 역할의 김영찬 배우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쳤다.


“깰 눈치가 보이면 니가 먼저 깨고 써야지. 무슨 변명이야! 경위서 받으라는 거 내가 싹싹 빌어서 막았어, 인마! 그리고 출입처 가서 밥 좀 얻어먹고 다니지 마. 그지 새끼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지라니....”

“환경부 애들은 도시락 시켜 먹는댄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기자실에서 고스톱 치느라고 바빠서 도시락 시켜먹는 거요.”

“자랑이다, 자랑이야. 야, 막내! 은행장 피살기사 아직 멀었어! 1단 짜리 스트레이트 하나 쓰는데 무슨 시간이 이렇게 걸려! 너 한번만 더 물먹으면 경위서 받을 거야!”


여전히 김영찬은 안정적이다.

사회부장 역할을 위해 무려 5Kg을 감량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굳이 감행했다.

예민하고 강박증적인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을 만들고 싶다나.


“씬6, 신문사 근처 대포집.”


지문을 읽어나가는 이동화의 음성이 끝나자마자.

송라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쫌! 선배! 곱창 좀 그만 뒤집어요! 정신 사납게스리....!”


실제 촬영에서는 송라원이 자신의 젓가락으로 설형기의 젓가락을 치는 모션을 취하게 된다.


“이 새끼가....콱! 선배들이 그러더라.... 5년, 6년 차 때가 고비라고.... 내가 겪어보니까 딱 맞아. 물불 안 가리고 뛰다가 그 때 쯤 되니까 팍 겉늙어 버리는 거야.... 니들, 보는 놈은 다 도둑놈이요, 세상은 온통 협잡질의 연속으로 보이지?”

“.....”

“씨발, 혼자 쥐뿔 나게 뛰어봤자....”


사회부 2진 기자 역할의 배우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사건팀으로 보내줘. 넥타이 매는 부처출입은 체질에 영 안 맞는 것 같아.”


실제 촬영에서는 이렇게 대사를 치면, 사운드가 물린다.

설사 서로 대사가 겹쳐지더라도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따로 작업을 한다.


“강남서 출입하면서 테헤란 벤처두 취재했잖어. 까지 말고 그냥 해.”

“다시 강남서 카바할게.”

“시끄러... 넌 과천, 저기 곱창 굽는 새끼는 시민단체야.”

“자꾸 새끼새끼 하지 마십시오. 나도 집안에서 귀한 딸입니다.”

“지랄...! 막내 확실히 잡아... 이제 갓 수습 딱지 뗀 놈이 빠져가지구. 정치부나 얼쩡거리고 어영부영....”

“쳇. 사회부가 기자의 꽃이라고 꼬실 땐 언제고....”

“다시 사스마리 돌게 해줘? 이 찬바람 몰아치는 일사후퇴 같은 IMF 엄동설한에?”


<민중의 적 : EMBARGO>의 시간 배경은 1998년이다.


“나는 방바닥이다. 몰라? 복지부동! 나도 니들 때는 도꼬다이 존나 많이 했거덩. 특종, 그거, 마약이다 그거... 근데 이거 드럽게 안 익네. 따르릉.”


킥킥.


배우가 직접 휴대폰 벨소리를 흉내 내자, 신인배우가 소리 죽여 웃었다.

설형기는 진짜 전화 통화라도 하는 듯 혼자 원맨쇼를 펼쳤다.


“이공보관이 자리 만들었단다. 가자. (잠시 사이) 이 새끼들이.... 구린델 캐려면 우리가 먼저 똥을 묻혀야 되는 거야. 황새들 뒤를 캐려면 황새인 척 해야지.”

“선배, 우리 백로였어요?”

“엉. 처음에는.....”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말?”

“이빨에 낀 고기나 이쑤시개로 어떻게 하고 말해 이 새끼야... 드럽게시리.”


힘 빼고 툭툭 던지고 받고.

그저 대본을 읽는 것뿐이었지만.

호흡이 이어졌다 풀어졌다 듣는 재미가 있었다.

실제로 촬영에 들어갔을 때, 배우가 대사가 끝났음에도 호흡을 늘어트릴 때가 있다.

그렇게 호흡이 이어지는 동안은 관객들의 감정도 이어진다.

상대 배우가 던지고 늘어트리는 걸 제대로 받아주지 못하면 연기 하모니가 망가진다.

함께 붙는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그걸 받는 배우도 저절로 감정이입이 된다.

현장에서 지나치게 분절해서 촬영을 하다보면, 그런 맛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그 미묘한 배우들의 연기호흡을 포착하기 위해서 감독들은 촬영셋업을 바꿀 때도 무계획적으로 해선 안 된다. 영화감독은 때로 배우의 보모가 되어야 하고, 상담사가 되어야 하며, 심리분석가 노릇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배우라는 생물이 워낙에 예민한 종족이기에 그렇다.

리딩이 진행되는 동안 류지호는 가만히 듣고만 있지 않았다.

뭔가를 다이어리에 끊임없이 메모했다.

리딩이 끝난 후, 배우에게 알려줘야 할 것.

특정 배우의 입에 붙지 않는 다이얼로그.

현장에서 연기 디렉션을 줘야 할 때 특정 배우에 한해 유념하고 있어야 할 부분.

메모는 다양했다.

이동화가 캐스팅한 조단역 배우들은 대체로 안정감이 있었다.

몇몇 중견배우들에게 소위 ‘쪼‘라고 하는 전형성이 보였다.

그 ‘쪼‘가 그 배우의 밥줄이자 정체성이다.

너무 튀어나오면 극에 방해요소가 될 때가 있기에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했다.

류지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들 연기 선수들이라 현장에서 충분히 조정이 가능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지나 엔딩으로 나아갈 때였다.


“컷!”


류지호가 리딩을 잠시 중단 시켰다.


“이번 씬은 끊어서 가지 않겠습니다.”


어흠!

아!

벌컥벌컥!


저마다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집중력을 고조시켰다.

배우들이 대본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이동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편집국장의 눈치를 보며 뒤따르는 부국장과 부장들. 소리치고, 대답하고, 전화 받는 분주한 대한일보 편집국 풍경. 정신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기자들의 손. 편집기자의 재촉에 책상에 머리를 쿵쿵 찧는 신문 만화가. 자료더미 안쪽에 고개를 푹 숙이고 화장을 고치는 워킹맘 기자. 광고동판을 들고 경제부장에게 애원하는 광고부장. 모니터로 기사를 확인하는 편집기자. 각 부서를 바쁘게 뛰어다는 사동의 모습 등등... 부장들을 뒤에 달고 편집국을 종횡무진하며 지시를 내리는 편집국장. 야전사령관 같다.”


편집국장 역할에는 전편의 반장을 연기한 연극배우 출신 중년 배우가 맡았다.


“오늘 마감 시간 10분 당긴다. 편집부! 마감 지나선, 여의도에 간첩선이 떴다고 해도 받지 마! 사장실에서 내려와도 안 돼!”

“...예!”

“사회 1부.”

“석간들이 항공기 사고원인을 악천후와 사고불감증으로 몰고 갔는데, 기체결함도 상당부분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항공기 결함 쪽에 맞춰 쓰겠습니다. 그리고 새벽 명동에서 발생한 은행지점장 피살사건 속보로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에... 인기가수 겸 배우 소지윤 음주운전은 대중 스타의 탈선 현장. 연예인과 음주운전 편을 싣겠.....

“스포츠지로 가는구만, 쯧. 다른 거 없어?”

“....”

“동양에 난 수입 혈장에 에이즈 감염 기사는 뭐야?”

“.....알아보겠습니다.”

“서 부장, 기사 좀 잘 챙겨! 경쟁 신문에서 도꼬다니 할 때 뭐했어?”

“그게...”

“다음!”

“경제부 보고 드리겠습니다. 오성전자가 반도체 수출 1위 자리에 올랐다는 기사. 경제면 톱으로 올리겠습니다. 사이드론 빅딜 관련 기사를 모아....

“야, 경제부. 오성전자 너무 키우지 말고, 마... 3단으로 줄여서 한쪽 귀퉁이에 넣어.”

“광고 때문에....”

“3단! 머리에 뭘 올릴 건지나 말해봐!”

“정치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당 기사를...”

“Kill!”


신음소리, 헛기침 등 몇몇 배우가 애드리브를 쳤다.

싸늘해진 회의 분위기를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경제부 빅딜 그리고 사회부 항공기 사고기사 머리로. 사진부장, 둘 다 사진 있지?”

“예. 공항사진은 우리만 들어가서 찍었습니다.”

“출입처에서 공무원들한테 점심 얻어먹고 다니지 좀 말라 그래. 거지새끼도 아니고. 기자 품위 좀 지키면서 살자. 들어보니까 환경부는 도시락 시켜 먹는다고 하더만.”


정치부장을 연기하는 배우.

주로 TV드라마에서 활동하는 중견 배우다.

굉장히 틀에 박혀있고 표면적이다.

전형적인 직장인을 연기하고 있을 뿐.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부족했다.

그래서 그를 캐스팅했다.

틀에 박힌 연기와 날 것이 뒤섞여야 진짜 현장분위기가 날 것 같아서.

<민중의 적 : EMBARGO>에서는 신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도 영화의 마지막에서.

윤전실에서 신문이 인쇄되어 출하장을 통해 전국 각지로 배달 나가는 장면도 있고, 광화문 동양일보사 앞에 초판이 풀리면서 그를 확인하려는 각계각층의 사람들까지 보여준다.

참고로 신문의 최종 배달판이 나오기 전까지 과거에는 동판, 현재는 필름이 보통 3~4번이 바뀐다.

그 사이 기사가 빠지고, 들어가고, 크기가 달라지고, 타이틀이 변경된다.

조간의 경우 새벽 내내 전쟁터같은 신문 편집 작업이 이루어진다.


“한 번만 더 해보죠. 대사 씹어도 됩니다. 입에 안 붙으면 건너뛰어도 됩니다. 현장 맛을 살려서 최대한 ‘다다다다‘ 밀어붙여 주세요.”


배우들이 똑같은 씬을 속도를 좀 더 올려 다시 한 번 읽었다.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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