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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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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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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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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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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민중의 적 : EMBARGO. (6)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7월 초순.

강북의 아파트 단지 입구에 류지호와 <EMBARGO> 제작진이 모여 있다.

서울 촬영분량의 로케이션을 확정하는 날이다.

로케이션 작업은 헌팅리스트 작성→헌팅→확인헌팅→확정 순으로 진행된다.

충무로 영화는 대체로 제작부와 연출부가 각각 1명씩 조를 짜서 헌팅을 다닌다.

그렇게 추려진 장소들 중에서 선별해 헤드 스태프들이 함께 돌아보며 확인하고 선정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단계가 훨씬 단순하다.


“20년 전이라면 몰라도 요즘 아파트치곤 별로잖아요. 저쪽으로 가면 깨끗한 집들만 있는 곳이 있는데···.”


제작실장은 조금 불만이다.

수많은 동네를 이 잡듯이 뒤져서 겨우 그럴 듯한 주택을 찾아냈다.

그런데 류지호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낡은 게 좋아. 부잣집이라고 해서 일률적으로 새 것 같은 집만 있는 건 좀 아니잖아. 김현수의 아버지가 10대 재벌 회장도 아니고. 다만 이 아파트 뒤편으로 산이 보이는 게 좀 그러네.”


제작실장이 자신이 콕 찍은 로케이션을 강력히 밀었다.


“차라리 압구정이나 동부이촌동 쪽으로 가심이...”

“이 아파트 섭외는 가능한 거야?”

“예.”

“감독님, 그럼 근처에 딴 데 한 곳 봐요.”


김재욱은 류지호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근처의 다른 후보지로 안내했다.

오전에 봤던 단지보다 훨씬 규모가 커서 회장 집으로는 그럴듯해 보였다.

문제는 새 아파트 분위기가 좀 더 풍긴다는 점이다.


“아까 거기가 제일 낫다. 점심 먹고 다시 한 번 가보자.”


오후로 접어드는 시간대 주광원의 방향이 어떻고, 광선의 세기는 어떤지를 체크하던 조명감독 입장에서 류지호의 선택이 딱히 마음에 드는 눈치가 아니다.


“시나리오상에서 묘사한 분위기와 맞아 떨어지기는 하지만.... 느낌도 나쁘지 않고....”


촬영감독까지 카메라와 배우들의 넉넉한 동선 확보가 필수인데 그만큼 충분한 공간인지는 자신을 못하는 눈치다.

헤드 스태프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동안 이동화가 슬쩍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아파트는 아니고, 이 근처에 단독주택이 하나 있는데.... 옛날 집인데도 차고가 있어요. 차고도 꽤 크고 넓더라고요.”


류지호는 당장 이동화를 앞세워 단독주택을 확인했다.

이동화는 한술 더 떠서 류지호의 콘티를 대체할 다른 동선까지 제시했다.


“혹시, 조규환 부모집이 단독주택이었기 때문에 아파트를 생각하신 거예요?”

“꼭 그런 건 아니고.”


섭외가 되는 고급 아파트라면 널리고 널렸다.

가온그룹 임원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중에서 아무 집이나 섭외를 해도 된다.

단지 김현수의 부친이 역사성을 가진 부자라는 것을 거주하고 있는 주택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평창동이나 한남동은 어딘지 진부한 느낌이 든다.

강남의 초고층 아파트는 신흥부자 같은 느낌이 강하고.


“감독님들이 오케이 하면, 이 집으로 픽스 하지요.”


감독이 만족하지 못하면 연출·제작부는 다시 한 번 먹잇감을 찾아 나선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어야 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동화가 추천한 장소를 두고 감독 모두가 만족을 표시했다.


✻ ✻ ✻


다음 장소는 불광동이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 먹고 천천히....”


프로듀서 김재욱이 여유를 부렸지만, 감독과 촬영감독은 한가할 틈이 없었다.

끼니도 거르고 연출·제작부가 추려놓은 장소들을 돌아봤다.


“처음에 본 곳은 실제 보니까 너무 낡았는데, 밤 촬영이라 무난할 것도 같고.”

“배우들의 동선이 확보가 안 되는데다가 비가 내려야 하는데 강우기 설치하는 것도 만만찮아 보이네.”


김재욱이 눈여겨봐뒀다는 아파트를 보여주겠다고 나섰다.

길잡이를 자청한 김재욱의 걸음이 빨라졌다.


“김 피디, 확정 헌팅이라고 너무 초조해 마.”


로케이션 헌팅을 다니다 보면, 온갖 잔소리와 충고가 쏟아지게 마련이다.


“대문이 하나였으면, 담이 좀 낮았으면, 중산층 정도의 집이었으면 좋겠고··· 땅은 콘크리트 말고 시멘트였으면 좋겠고··· 골목은 촬영할 수 있게 좀 넓었으면 좋겠고···.”


제작실장이 얄미운 시누이처럼 조감독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쌍문동나 수유동 가봤냐? 거기 가면 강철중 집이랑 최선영 아파트랑 다 있는데. 그러게 내가 쌍문동 타령을 얼마나 했냐. 수유리에 가봐라∼ 안 가더니만.”

“연출부 막내가 30살이거든요. 충무로 최고령 연출부죠. 노령화되다 보니 아무래도 젊은 친구들과 조금 달라요. 확인헌팅 지역 봤더니 한강 이남에 죄다 몰려 있더라고요.”


이동화는 되레 이동거리를 최소화하는 것은 아무나 못하는 일이라며 역설했다.

여전히 조감독과 제작실장은 친해지기 힘든 모양이다.

로케이션 헌팅을 두고 티격태격 하기 일쑤다.

마지막으로 경찰 지구대 한 곳을 결정해야 했다.


“평일에 왔을 때는 별로 통행이 없었는데. 오늘은 주말이라 차가 많나?”

“여기 원래 겁나 많은 덴데···.”


지나다니는 차량이 많으면 통제가 어렵다.

동시녹음을 진행하기도 쉽지 않다.

헌팅 때부터 미리 체크해둬야 낭패를 안 본다.


“촬영을 하기엔 내부 공간이 좀 비좁아 보이는데....”


촬영감독이 계속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부 장면은 그렇게 많이 쓰지 않을 겁니다.”


류지호는 촬영감독과 함께 디렉터 파인더를 가지고 몇 가지 앵글이 가능한지 체크했다.


“사진은 안 돼요! 정식 절차를 밟아야지. 그냥 찍으면 우리도 보고해야 합니다.”


프로덕션 디자인팀 퍼스트가 지구대 경찰관에게 제지를 당했다.

지구대 앞 게시판에 붙어 있는 지명수배 포스터를 촬영했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윤민구 디자이너가 줄자를 가지고 이것저것 치수를 쟀다.


“들어갈 촬영 장비를 생각하면 내부 세팅을 좀 바꿔야 해요. 인물 수를 좀 줄여야 하는데....”


가구 크기는 얼마 정도여야 하나, 책상은 몇 조가 들어가야 하나.

미술팀의 최대 관심사는 그런 것들이다.


“여건에 맞춰서 촬영을 하라고 하면 만들 순 있겠는데 손볼 것이 너무 많아요. 코팅된 유리도 다 갈아야 하고. 섭외가 많은데도 실제 촬영을 안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요?


이런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분위기, 영화적 느낌은 좋다.

그런데 촬영여건이 좋지 못한 경우다.

또 다른 지구대도 구경했다.


“지구대 외부와 내부를 나눠서 찍는 것이 좋겠어.”


마지막으로 일행은 마포구로 이동했다.

지그재그 계단.

이전 삶에서 단골촬영지였다.

지금 시기에는 어떤 영화나 드라마 심지어 광고에도 등장한 바가 없다.

멀리 마포의 고층 건물들이 보이는 이 계단은 조금 묘한 구석이 있다.

건널 수 없는 강처럼 한쪽 둔덕엔 높다란 아파트가, 또 한쪽 둔덕엔 철거촌이 들어서 있다.


“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네?”

“유학 가기 전 단편영화 찍을 때 봐두었던 곳이야. 아직 써먹지 않은 모양이더라고.”


다 좋은데....

계단의 중간쯤에 있는 한 폐건물의 파란색 천막이 류지호의 신경을 거슬렀다.


“김 피디, 저쪽에 파란 천막 씌워 놓은 게 영 마음에 안 드네.”

“주인에게 말끔하게 손봐준다고 하고 부탁이라도 해보겠습니다.”


미술감독도 계단이 주는 묘한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 싶은지 연방 아이디어를 쏟아 냈다.

김재욱이 다소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일행들을 위해 너스레를 떨었다.


“이렇게 꼬불꼬불한 계단, 우리네 인생 같지 않습니까?”

“그것까지 읽어내는 영화평론가가 있을까?”


류지호가 만담으로 이어질 대화의 종지부를 찍어버렸다.


“감독이 그런 걸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 아무도 알 수 없겠지.”


류지호가 앞장서서 계단을 올랐다.

중턱쯤 오르니 오른편으로 자잘한 골목들이 이어져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촬영감독 윤기수가 마치 금맥이라도 찾은 것처럼 감탄성을 토했다.


“오~”


윤기수가 앵글 파인더를 꺼내 골목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휘유! 서울시내에서 보기 힘든 나무 전신주가 다 있네?”


프로덕션 디자이너 윤민구의 입에서 절로 휘파람소리가 흘러나왔다.

제작부가 미리 와서 심어놨다느니, 연출부가 했다느니 농담들이 쏟아졌다.

제작실장은 어느새 주민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런 골목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동네 전체 주민의 협조가 필요하다.

장소확정이 되든 안 되든 제작실장은 섭외 밑 작업에 들어갔다.

어느 틈에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다시 계단 저 아래로 내려갔다.

태양광의 방향을 가늠하느라 의견을 교환했다.

프로덕션 디자인팀은 매우 신난 표정이다.

최근에는 찾아보기 힘든 분위기의 동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작업에서도 써먹을 수 있기에 꼼꼼하게 살폈다.


“이 계단과 골목길 또 선영의 아파트가 연결되어야 해. 누군가가 미행하는 걸 느끼고 숨바꼭질을 벌이지.”


사건사고를 다루는 사회부 기자들은 사건 피의자나 전과자들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노련한 기자들은 혹시 모를 미행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집을 갈 때도 돌아서 가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따돌린 줄 알았던 괴한이 선영의 집으로 찾아오며 위기감이 조성된다.


“좀 더 역동적인 추격 시퀀스는 후암동에서 촬영하는 걸로.”

“강철중이 김현수가 보낸 해결사에게 쫒기는 장면?”

“응.”

“카 체이스는?”

“경기영상위원회와 부천시의 협조로 상동에서 촬영하게 될 것 같대.”


공공기관이나 단체를 상대할 때는 프로듀서가 직접 나서는 게 좋다. 직급이 높은 이가 상대를 함으로써 공무원들의 면을 세워주는 것이다.

어쨌든 서울에서 촬영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장소 물색보다 섭외, 주민협조, 촬영 시 통제가 너무 어렵다.

특히나 섭외가 어려운 곳들이 있다.

백화점, 병원, 호텔 같은 곳들이다.

운이 좋아 종합병원에 들어가서 촬영하면 그 곳은 이후 다시는 들어가지 못한다.

다음 작품에게 기회가 돌아가지 못한다.

병원 측과 환자 모두 학을 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영화를 빛내고는 곧장 은퇴한 병원들이 많지. 병원에서 내 준 시간은 길어야 5시간인데 곧이곧대로 그걸 지키는 인간들이 없으니까.”


한국영화 스태프들이 그런 식으로 온갖 곳에서 신뢰를 잃다보니, 이후로 섭외가 정말 어려워졌다.


“요새는 장소사용료도 세게 불러. 장소 대여가 잘되는 곳들은 온갖 매체에서 자주 등장했던 곳이라 신선도가 떨어지고.”


영화 촬영지를 두고 신선도를 따지는 것이 우습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영화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익숙한 장소가 나올 때보다 처음 본 장소가 나올 때 좀 더 몰입을 잘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그러니 관객들이 잘 모르는 장소를 찾기 위해 영화마다 발품을 팔수밖에 없다.


“보육원은 미국에 다녀오신 후 확정 할 거죠?”


가장 먼저 확정해야 할 로케이션이 결정됐다.

남은 곳들은 심사숙고가 필요했다.


“그래야 할 것 같다.”

“잘 다녀오세요. 축하드리고요.”

“고맙다.”


류지호는 연출·제작부들의 축하를 받으며 뉴욕으로 날아갔다.


❉ ❉ ❉


온 가족이 류지호의 전용기를 타고 뉴욕으로 왔다.

파커가문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오랜만에 롱아일랜드 파커 저택이 직계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장년들은 장년들끼리, 며느리들은 며느리들끼리, 자녀들은 또래들끼리 어울렸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류지호가 그 답지 않게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감정도 잠시.

류지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윌리엄 파커의 건강이 생각보다 좋지 못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류지호와 레오나는 올 연말에 약혼식을 치룰 예정이었다.

윌리엄 파커의 건강문제로 일정을 앞당기기로 했다.

만약 윌리엄이 병원에 입원하기라도 하면 결혼식까지도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그 고민 때문에 윌리엄 파커는 우울증까지 생길 정도였다.

누구보다 윌리엄 파커의 축복을 바라는 류지호 입장에서 약혼과 결혼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는 약혼의 결정에 있어서 부모가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약혼 했어요’라고 놀라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기본적으로 프러포즈에서 신부가 허락한 것으로 결혼이 결정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파커가문처럼 명문가에서는 전통적인 절차를 따르는 편이지만.

보통 신부 쪽 부모가 사위 가족을 집으로 초청해 식사자리를 마련하는 식이다.


“먼저 귀하신 따님을 제 자식인 지호의 짝으로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류순호의 통역도움을 받은 류민상이 제임스 부부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제임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모자란 레오나를 지호 같은 훌륭한 자식의 배필로 인정해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캐서린이 정중한 어조로 말을 보탰다.


“진심이에요. 지호 같은 사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저희 부부는 매우 감사한 마음이에요.”


그 말을 심영숙이 받았다.


“양가 모두 같은 마음이어서 참으로 다행이에요.”


한국의 아침드라마의 상류층 집안의 약혼식 클리셰처럼 보이지만, 고리타분 전통을 고수하는 집안에서는 자칫 상견례로 혼례가 파토나기도 한다.

미국 초창기에는 결혼 시스템이 원활하게 운영되지 않았다.

가문이나 부모들이 서로의 가문과 자녀들의 성격, 인품 등을 확인하고 결혼 가능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약혼식을 중시하기도 했다.


“영숙, 우린 이미 한 가족이잖아요.”

“호호. 그래요. 가족이지요.”


제임스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호와 레오나의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류민상 역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소하게 진행된 약혼식은 화기애애했다.

명문가의 약혼식이라고 해서 복잡한 절차나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양쪽 가족이 모두 모여 점심을 함께 한 후.

오후 내내 파티를 벌였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도 또 파티가 이어졌다.


“하하.”

“호호.”


류지호의 부모님들은 댄스파티에 애를 먹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윌리엄 파커가 껄껄 웃었다.


“민상, 결혼식은 언제 했으면 좋겠어?”


평상시 태도로 돌아온 제임스 파커가 물었다.

이를 영어로 전달하는 류지호는 예의를 갖춘 말로 바꿔 전하지만.

류민상 부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류지호에게 돌아갔다.


“내년에도 영화를 한 편 연출해야 해요. 그것도 미국이나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찍어야 해서... 서두르면 내년 겨울에 할 수도 있지만....”

“들었다시피, 이 녀석이 원체 바쁩니다. 미안합니다. 사돈.”

“Jay는 혼자만의 몸이 아니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더구나 당사자인 레오나가 이해하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류지호의 통역을 들은 류민상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해를 해주신다니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윌리엄 파커가 끼어들었다.


“두 녀석의 운명이다. 지호에게 운명이 있듯이 레오나에게도 운명이 있지. 우리는 그런 지호와 레오나의 운명을 존중해야 한다.”


류민상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윌리엄 파커에게 허리를 숙였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어르신.”


윌리엄 파커도 그에 맞춰 고개를 숙여보였다.


“내 건강은 너무 괘념치 말게. 두 사람은 모두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치룰 자격과 권리가 있으니까.”

“예.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르신.”

“알겠어요. 아버지.”


류지호 가족은 금요일에 뉴욕으로 날아와, 토요일에 약혼식과 파티를 벌였다.

일요일 오후에서야 양쪽 집안사람들이 흩어졌다.

류지호의 가족들은 LA로 떠났다.

신혼집이 될 수도 있는 벨에어의 두 채의 저택을 돌아보고, Rancho Palos Verdes의 골프장을 파헤쳐 조성 중인 미추홀 공원을 둘러봤다.

하루를 더 파커저택에서 머문 류지호는 월요일 아침 뉴헤이븐에 레오나를 데려다주고, 전용기에 올랐다.


❉ ❉ ❉


류지호가 도착한 곳은 한국이 아닌 도쿄였는데, 바쁜 일정 탓에 곧장 G.O.M 롯폰기로 향했다.

Eye-MAX 상영관 앞에 한일 연예부 기자들, 도쿄다카라와 WaW 재팬, 푸지TV 등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류지호가 모습을 드러내자, 일시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 미스터 할리우드! 지금까지 도쿄다카라와 합작한 영화들이 연속해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번 영화도 성공할 거라고 봅니까?

- 일본에서도 영화를 찍을 계획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 <REMO> 마지막 영화는 언제 개봉합니까?

- 일본영화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고 있습니까?


시장판이 따로 없다.

일본어, 영어, 한국어가 마구 뒤섞여 들려왔다.

그렇다고 무례하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눈앞에서 카메라 플래시를 마구 터트리지는 않았다.


“한국과 일본의 스태프들의 팀워크가 아주 훌륭했다고 들었습니다. 영화흥행을 함부로 속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감독, 배우 그리고 스태프들이 최선을 다한 만큼 관객분들께서도 알아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약혼에 관한 보도자료를 풀지 않은 모양이다.

관련 질문은 전혀 나오질 않았다.

밀려드는 질문에 대해 양해를 구한 류지호가 냉큼 극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류지호는 도쿄다카라와 푸지TV 고위 임원들과 함께 시사회를 관람했다.

일본의 시골 동네 두부집 아들 타쿠미.

매일 새벽마다 아버지를 대신해 오래되고 낡은 자동차 AE86을 몰고 두부를 배달한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해 오던 운전이다.

매일 다니는 길이기에 험하고 구불구불한 아키나 고개 다운힐은 식은 죽 먹기다.

전 세계 청소년들에게 드리프트를 널리 유행시킨 바로 그 레이싱 만화.

바로 <이니셜 D>다.

이를 WaW 엔터테인먼트 재팬과 도쿄다카라가 합작으로 실사화했다.

영화의 스토리는 원작을 90% 정도 반영했다.

남은 10%는 <풋 루즈>의 구세대의 폭력적인 아집에 저항의 서사를 일부 차용했다.

공권력의 위협이라는 스릴러 요소도 추가했다.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고등학생이 공도 레이싱의 세계에 눈뜨고, 쟁쟁한 드라이버와의 레이싱을 벌이며 점차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다.

갈라파고스화 된 일본의 현실과 잃어버린 10년, 일본의 왜곡된 성문화도 풍자한다.

기본 서사는 성장물이다.

첫 기획에서는 Eye-MAX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헌데 영화가 생각보다 잘 나왔다.

제작위원회가 욕심을 부려 전격적으로 Eye-MAX DMR을 단행했다.

Eye-MAX Corp.이 DMR 일체를 책임지고 추후 월드와이드 개봉 수익을 분배받기로 했다.

단 Eye-MAX 상영관 수익의 23%다.

제작위원회는 이 시점의 일본 최고들만 모아서 <이니셜D>를 찍었다.

감독, 촬영감독, 제작자만 한국인이다.

재미있는 점은 재일한국인임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배우 및 스태프들도 많이 참여했다.

모두 이봉호 일본 지사장의 인맥으로 불러 모은 이들이다.

본인이 재일임을 밝히지 않은 이상 알려질 일은 없다.

이봉호 사장으로부터 귀띔을 받은 류지호 역시 함구하기로 했다.

만에 하나라도 일본 연예계 활동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서다.

영화음악은 <공각기동대>로 유명한 카가와 겐지가 맡았다.

WaW 엔터테인먼트, 도쿄다카라, 푸지TV가 주축이 된 제작위원회는 지금까지 두 편의 영화를 제작해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춤추는 대수사선Ⅱ>와 <자토이치>다.

두 영화의 해외배급을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가 맡았는데, 꽤 쏠쏠한 배급수수료를 챙길 수 있었다.


‘나쁘지 않네.’


<이니셜D> 언론시사를 본 류지호의 감상이었다.

이전 삶의 홍콩판 <이니셜D>는 한마디로 끔찍했다.

일본이름, 일본 간판, 일본 차, 일본 로케이션.

영화를 보면 분명 일본영화다.

근데 작중 인물들이 광동어로 대화를 나눈다.

등장인물 구성도 중구난방으로 합치고 빼고 하다 보니, 원작팬 입장에서는 몰입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애니메이션 기준 3기까지의 스토리를 맥락 없이 버무려놓아 무척 난잡했다.

류지호는 원작을 최대한 반영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편으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표현하지 못하는 영역. 관객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던 걸 실사로 표현해주세요. 그리고 주요 타깃은 10대~20대입니다. 청춘 성장영화. 유치해도 상관없어요.”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싱크로율을 중요하게 따진다.

특히 일본에서는 그 정도가 심해서 연기력보다 우선 한다.

그런 면에서 배우 캐스팅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일본 청춘스타치고는 연기력이 썩 나쁘지 않았다.

한국식 유머 코드도 간간이 들어가 있었다.

일본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할 수 있을지 의문부호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시사회 반응만 보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한국영화인의 일본 본토 침략.]


첫 시사회가 열린 날부터 일본 매체에서 <이니셜D>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다.

자극적인 타이틀을 단 기사가 눈이 들어오기 마련.

잘 만든 오락영화이자 청춘영화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한국에서도 제법 떠들썩했다.

<풍운아> 시리즈로 액션영화 잘 찍는 감독으로 자리를 잡은 박상은 감독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류지호는 <이니셜D> 영화홍보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 때문에 일본에 이틀 더 머물렀다.

영화잡지와 인터뷰를 하고 텔레비전 인터뷰도 두 군데 나갔다.

토크쇼 출연섭외도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을 들어 정중하게 거절했다.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은 일본에 온 김에 광고를 찍거나 강연 같은 걸 한다.

그를 통해 들어오는 수입이 꽤나 쏠쏠한 것으로 알려졌다.

류지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비서들과 매니지먼트에서도 한목소리로 반대하기도 했고.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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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 재밌어 질 것 같네.... (1) +8 23.09.28 2,195 104 25쪽
629 세상으로 나가 옳은 일을 하라. +7 23.09.27 2,292 89 23쪽
628 안정 속의 변화. (5) +4 23.09.26 2,211 88 22쪽
627 안정 속의 변화. (4) +5 23.09.25 2,267 93 22쪽
626 안정 속의 변화. (3) +8 23.09.23 2,375 88 23쪽
625 안정 속의 변화. (2) +3 23.09.22 2,295 94 23쪽
624 안정 속의 변화. (1) +7 23.09.21 2,435 93 27쪽
623 다 해먹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2) +4 23.09.20 2,336 96 25쪽
622 다 해먹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1) +10 23.09.19 2,343 103 25쪽
621 포토라인에 서는 걸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5 23.09.18 2,367 100 23쪽
620 모른 척 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8 23.09.16 2,396 106 25쪽
619 비평가들이 싫어하면 관객이 좋아해. +4 23.09.15 2,319 108 24쪽
618 People Not Profit! +3 23.09.14 2,307 103 23쪽
617 우린 괴물이 아닙니다! +13 23.09.13 2,340 111 28쪽
616 Only One을 향하여! +6 23.09.12 2,332 112 24쪽
615 살아줘서 고맙다..... +8 23.09.11 2,383 105 29쪽
614 민중의 적 : EMBARGO. (14) +5 23.09.09 2,322 100 25쪽
613 민중의 적 : EMBARGO. (13) +4 23.09.08 2,204 92 26쪽
612 민중의 적 : EMBARGO. (12) +3 23.09.08 2,029 79 23쪽
611 민중의 적 : EMBARGO. (11) +6 23.09.07 2,169 97 24쪽
610 민중의 적 : EMBARGO. (10) +4 23.09.07 2,017 83 23쪽
609 민중의 적 : EMBARGO. (9) +4 23.09.06 2,217 97 23쪽
608 민중의 적 : EMBARGO. (8) +3 23.09.06 2,091 85 23쪽
607 민중의 적 : EMBARGO. (7) +6 23.09.05 2,228 92 25쪽
» 민중의 적 : EMBARGO. (6) +2 23.09.05 2,135 86 22쪽
605 민중의 적 : EMBARGO. (5) +7 23.09.04 2,300 87 24쪽
604 민중의 적 : EMBARGO. (4) +2 23.09.04 2,194 84 25쪽
603 민중의 적 : EMBARGO. (3) +4 23.09.02 2,395 104 24쪽
602 민중의 적 : EMBARGO. (2) +2 23.09.02 2,285 73 24쪽
601 민중의 적 : EMBARGO. (1) +9 23.09.01 2,517 105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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