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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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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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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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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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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민중의 적 : EMBARGO.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비디오가 재생되며 로케이션 헌팅 자료 화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류지호의 곁에서 이동화가 영상으로 보이는 보육시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했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보육시설이 산재해 있다.

실제 고아원이 리얼리티 면에서는 좋다.

막상 영화에 대입시키자니, 매치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섭외도 문제다.

각 지역 영상위원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어지간한 장소는 섭외가 되기는 하겠지만, 시설에서 지내고 있는 아동들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지금까지 보신 서울, 부산, 전주의 고아원들은 거의 섭외가 가능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부터 보실 곳들은 반반입니다.”

“주인공들 알려줘도 반응이 그래?”


영화나 드라마 헌팅을 가면, 가장 먼저 묻는 것이 누구 나오냐는 질문이다.

감독이 국제영화제 수상자란 사실은 일반인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알만한 스타가 출연하는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대접을 받는다.


“우리는 영화 한 편 찍고 빠지면 그만이지만, 거기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이 있지 않을까요? 원장님들이 은근히 걱정하시더라고요.”

“맞는 말이다.”


원장이 장소 제공을 허락한다고 해도, 원생들까지 허락할지는 미지수다.

특히나 범죄가 벌어지는 곳으로 영화에서 묘사되니.....


“폐교는 싫으시죠?”

“응.”

“적당히 좀 맞춰서 가시지. 참 까탈스럽다니까.”

“영화를 날로 먹으려 드니까 그 모양들이지.”

“지금 보신 곳들은 다 NG에요? Keep도 없어요?”

“응.”

“혹시 기숙사는 어떨 거 같으세요?”

“기숙사?”

“지방의 작은 대학교 기숙사나 고등학교 기숙사가 보육원 간지가 날 것도 같아요.”

“생각해 둔 곳 있어?”

“딱히 없는데... 군대 가기 전에 지방대 다니는 친구 기숙사에 놀러갔던 기억이 나서요.”

“왠지 느낌이 온다. 대신 최근 지어진 것 말고, 최소 10년 이상 된 것으로 찾아봐. 그리고 지방의 시골 벽지에 위치한 농업고등학교 같은데 기숙사가 있을 것 같기도 해.”

“경기도부터 알아보는 걸로 할게요.”

“부산이나 전주 근처도 괜찮아.”

“당근이죠.”


지난 작품까지만 해도 감독 대 조감독으로 다소 군기 든 모습을 보이던 이동화다.

이제는 형아우 사이가 되어서 편하게 굴고 있다.

류지호가 바라던 바다.


“고생해라.”

“일 보세요.”


이동화가 감독방을 빠져나갔다.

어떤 감독은 세트 없이 로케이션만 고집한다.

또 어떤 감독은 가짜 세트를 진짜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또 다른 어떤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염두에 둔 장소에서 최대한 촬영한다.

똑같은 장소라고 하더라도 햇빛 하나, 바람 한 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고집하는 감독도 있다.

순전히 감독의 정서적 인상에 기인한 태도다. 그런 태도가 예술가적인지는 류지호로서는 알 수 없다.

인공적인 세트를 거부하는 어떤 감독은 OK가 떨어진 장소에서 사소한 소품 하나라도 고스란히 현장 보존해야 직성이 풀린다.

조그만 변화가 분위기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다.

류지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나리오를 구상할 때 떠올린 공간을 활용하고 싶어 하고, 영화와 딱 떨어지는 장소가 촬영을 마칠 때까지 그대로 보존되길 원한다.

단 원칙이 있다.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장소에 괜한 고집을 부리지 말자.’


공들여 촬영해야 할 곳에 바짝 힘을 주자는 거다.

몇 초 나오지도 않고 공간이 묘사되지도 않고 극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장소에까지 에너지를 낭비하진 않는다.

실무적인 측면에서 선택과 집중을 늘 염두에 두는 것이 류지호의 장점이다.

예술지상주의 혹은 작가주의 감독들은 그런 부분을 류지호의 단점으로 지적하지만.


❉ ❉ ❉


어떤 분야나 온갖 말들이 떠돌아다닌다.

누가 이랬대 저랬대.

영화계 역시 온갖 루머와 뜬소문들이 넘쳐나는 분야다.

충무로 안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이 붙고 왜곡되면서 루머가 만들어진다.

주로 촬영현장에서 흘러나와 술집에서 확산된다.

최근 송라원에 대한 각종 루머가 충무로에서 만들어져 증권가 찌라시에도 등장하고 있다.


- 송라원이 건방져졌다.

- 콘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촬영 보이콧 했다.

- 전날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아침에 입에서 술 냄새가 심하게 나더라.

- 배우 누구누구하고 그렇고 그랬다더라.


날으는(?) 침대.

여배우에게 가장 치욕적이며 치명적인 소문이다.

아무리 싹싹하게 굴고 스태프들에게 잘 해줘도, 꼭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나마 충무로 일각에서 루머가 돌아서 그렇지, 포털 사이트나 SNS가 활성화 된 시기였다면, 어린 송라원이 정신적으로 매우 힘겨웠을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소문들의 질이 매우 나빴다.

지금까지 송라원은 3편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이었다.

그로 인해 삶의 큰 변화를 맞이했다.

첫 작품 <복수의 꽃>에서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연기 했다.

감독이 워낙 유명했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고.

몸은 힘들지만 연기하는 것이 재밌었다.

촬영장으로 향하는 것이 설레고 즐거웠다.

첫 영화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실감을 잘 못했다.

<이중간첩> 촬영을 마치고 나서야 자신이 진짜 유명해졌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3작품 만에 본격적으로 배우의 삶을 살아가는 기분이다.

광고도 몇 편 찍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또 내적으로도, 전에 없던 이런저런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 변화가 이제야 커다랗게 다가왔다.

금전적인 면에서도 풍족했다.

통장에 거금이 쌓였다.

아직까지는 수입에 대해 현실감이 별로 없었다.

데뷔 이후 쉬지 않고 일을 해서 그런지 특별히 돈을 쓸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래서 엄마에게 돈을 맡겼다.

돈은 중요하다.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금전이 필수다.

송라원은 돈이 많을수록 할 수 있는 선택지를 넓혀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무튼 송라원은 요즘 생활이 썩 만족스러웠다.

자신의 커리어 덕분인지 매니지먼트 CHAN의 영업 능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고 여배우만 찍는다는 광고도 찍어봤다.

비록 단발이긴 했지만.

TV 광고에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대중적인 인지도가 부쩍 올라갔다.

친구들과 길거리를 편하게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무엇보다 연기 외에 따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다른 친구들 보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데가 많다.

불편한 자리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도 좋았다.


“다 왔다. 라원아.”


매니저의 말에 송라원이 상념을 멈췄다.


“먼저 들어가 있어. 감독님은 안쪽 자리에 앉아 계실 거야. 찾을 수 있지?”

“내가 감독님 원투데이 봐? 눈 감고도 찾거든.”

“하도 덜렁대니까 그렇지.”

“주차하고 곧장 들어오지 말고,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와. 오전 내내 운전만 했잖아.”


송라원이 스타크래프트 밴에서 폴짝 뛰어내린 후 차 문을 닫았다.

매니저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송라원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주차장으로 밴을 몰았다.


“저를 따라 오세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송라원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프라이버시를 위해 칸막이가 양쪽으로 세워진 테이블에는 류지호, 설형기, 전주호, 김재욱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송라원이 씩씩하게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감독님! 선생님! 피디님!”

“어서 와라.”


류지호가 먼저 인사를 받았다.

설형기 배우가 질색했다.


“얌마! 선생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전주호 배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왼손을 배에 대고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 마치 웃어른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충청도 영감.

연예계에서 불리는 전주호의 별명이다.

본래 기질이 사람관계를 중시하는데다가 매너를 꽤 따지는 편이다.


“잘 부탁드려요, 선배님~”


송라원은 특이한 선배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악수했다.

전주호는 TV에서 주로 활동해왔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코미디 영화에서 주로 주인공을 맡고 있다.

반듯한 외모에 나쁘지 않은 연기력을 보이고 있다.

무난한 배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최근 코미디 영화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면서 코믹 이미지가 강해지고 있다.

송라원까지 합세하면서 <민중의 적 : EMBARGO>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재욱이 낮은 목소리로 송라원에게 물었다.


“배우는 할 만 해?”

“질문이 이상해요. 피디님.”

“<복수의 꽃> 할 때 도망가려고 했잖아. 힘들다고. 배우 때려치운다며?”


놀리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다보니, 김재욱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때는 저만 그런 게 아니었거든요. 영찬 선생님도 그랬어요. 감독님은 헐랭이처럼 페이크를 치다가 어쩔 때는 고문 기술자처럼 막 괴롭히고... 으! 지금 생각해도 너무 힘들었어요.”


송라원이 떠올리는 것만으로 치가 떨린다는 듯 격한 몸짓을 보였다.


“<실미도> 찍은 설 선배도 있는데, 네가 힘들었다고 하면 안 되지.”

“앗! 죄송합니다.”


피식.


설형기가 특유의 썩은 미소를 지으며 밑반찬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이중간첩> 보니까, 허파에 바람만 든 건 아닌 것 같더라?”


칭찬인지 꾸중인지 알쏭달쏭한 류지호의 말에 곧바로 송라원이 대꾸했다.


“여리여리한 역할을 연기 하느라 닭살 돋아 죽는 줄 알았어요.”

“하하. 어련 했겠냐?”

“그래두 배우로 사는 건 재밌는 것 같아요. 정확히 말하면 배우의 삶이라기보다 남의 인생을 살아보는 재미가 있다고 할까.”


설형기가 슬쩍 충고했다.


“너무 빠지진 말아. 나올 때 정말 고생하니까.”

“<복수의 꽃> 할 때는 처음 겪었던 거라 정말 힘들었는데요. 3작품 끝내고 나니까 조금쯤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아직 한참 멀었지만....”

“자아가 확고하지 않으면 그 재미에 잡아 먹혀 나중에 몇 배의 데미지로 돌아올 수 있다. 즐기긴 하되 과몰입 하진 마.”

“여전히 고민되고,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지만 일단 재미가 있으니 괜찮지 않나 싶은 느낌이 들어요. 선생... 선배님 말씀 꼭 명심할 게요.”


이건 어디까지나 어설프게 들어갔다 나와서 가능한 일이다.

메소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작품 한 편 끝내면, 엄청난 후유증을 겪는다.

당장 눈앞에 앉아있는 설형기의 경우, 최근 <역도산> 촬영을 위해 몸무게를 급격하게 불렸다 빼는 과정에서 몸이 축나기도 했다.

데뷔 이후, 멜로영화 같이 비교적 부담 없는 영화를 한 편도 섞지 않고 계속해서 잔뜩 힘이 들어가는 배역만 했다면 성격마저 파탄 날 수도 있었다.

송라원이 쾌활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정말, 너무 좋아서 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 하는 일은 제가 원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요즘 하루하루가 재밌어요.”


그 모습이 싫지 않은지 일행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설형기가 차로 입을 개운하게 만들고, 입을 열었다.


“감독님, 거 왜 강철중이 백신과 바이오산업을 설명하는 씬 있잖아요?”

“대사가 꽤 길죠? 입에도 잘 안 붙고.”

“사실 이름만 같지 다른 영화, 다른 인물인데... 이게 쌈마이적이고 시시껄렁한 게 나와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편에서는 말꼬리에 ‘그랬거덩’ 이렇게 대사를 쳤잖아요.”

“다른 영화이긴 하지만, 느슨하고 헐렁한 사내인 것은 전편의 형사 강철중과 똑 같아요.”


설형기는 대사를 외운 뒤, 막상 현장에선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가 연기를 펼치는 타입이다.

그렇다고 애드리브를 마구 만들어서 연기를 하지는 않는다.

시나리오를 따라가지만 감정처리, 호흡을 즉흥적으로 가지고 노는 타입이라고 할까.


“혼자 주절주절 떠드는 걸 몇 번 해봤는데, 평생 한 번도 발음해보지 않은 낯선 말들이라 입에 잘 붙지 않더라고. 전편에서는 내가 놀 수 있는 장면이 꽤 많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여백도 별로 없어 보이고.”

“기존 한국영화나 드라마가 묘사한 기자 캐릭터로 인해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거라고 봐요. 캐릭터 연구를 위해 만나본 몇 명의 기자들 때문에 어떤 틀에 갇혀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고.”


설형기가 그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했다.


“난 한 번도 고학력을 연기해 본 적이 없어서....”

“이번 영화의 강철중은 반듯한 기자 아닙니다. 어딘지 모르게 거칠고 양아치 같은 캐릭터 맞아요.”

“그런데 대사가 참 모범생답던데?”

“이미 한 번 해봤던 강철중 말투를 텍스트로 묘사해 놓으면, 선배가 전편의 틀을 복제할 까봐서.”

“......?”

“여전히 강철중은 꼬여 있는 게 맞아요. 전 선배가 연기할 김현수가 반듯하게 꼬여있다면, 강철중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어 언제 뚜껑을 열어젖힐 것인지 불안하게 꼬여있는 거죠. 캐릭터 기본 구조는 똑 같습니다.”

“주먹 안 쓰고 이빨로 죽이는 또라이?”

“하하. 마지막에 두 캐릭터가 주먹다짐을 벌이긴 하잖아요. 때로는 펜보다 주먹 아니겠어요?”


<민중의 적 : EMBARGO>의 강철중은 나쁜 놈 김현수에게 영화 내내 열세에 놓이게 된다.

관객들은 이미 전편에서 강철중 캐릭터가 패륜범을 혼내주는 걸 봤다.

영화의 결말은 이미 정해놓고 관람할 터.

류지호는 그런 관객들과 밀당을 벌여야 한다.

20년 후 관객들은 질색하겠지만, 아직은 고구마 전개가 먹히는 시기다.

클라이맥스 전까지는 강철중을 철저히 수세적인 입장에 놓이게 할 계획이다.

그렇다고 장애물 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김현수의 수작에 번번이 가로막히지만, 그 외에는 특유의 저돌성으로 헤쳐 나간다.

악당의 압박은 전편보다 더 지능적이고, 더 거대하며, 더 폭력적이다.

러닝타임의 중반을 막 통과하는 시점에 가서야 터닝 포인트를 맞이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한다.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전형적인 플롯을 따른다.


“선배와 라원이는 그런 다이얼로그 전부를 암기해 두세요. 촬영에 들어가면 상당량은 라원이가 칠 텐데, 클라이맥스 전에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사건 정리를 해줄 때는 두 사람이 그 긴 대사를 즉흥적으로 나눠서 치게 될 겁니다.”

“대사가 길어서 못 외운다거나 외우기 싫어서 그런 건 아냐. 오해 말아요.”

“알아요. 대사를 안치더라도 외우고 있어야 해요. 뭘 말하는지도 첨부한 해설서 보고 대강은 알고 있어야 하고.”

“기자 만나서 인터뷰도 해야 돼. 참고서 보고 공부도 해야 돼. 암튼 우리 감독님 유별난 건 알아줘야 돼.”


송라원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저기... 공부는 제가 더 많이 해야 하는데....요. 저는 완전 언론고시 준비하는 수준이라고요.”


김재욱이 소리죽여 큭큭 웃었다.

그러자 연쇄적으로 웃음이 터졌다.


하하.


류지호는 기자배역을 담당한 배우들에게 기자를 소개시켜줬다.

배우들은 사회부 기자를 따라다니며 기자 생활을 체험해 볼 예정이다.

캐릭터에 도움이 될 만한 언론관련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배우들을 질리게 한 것은 시나리오 두 배 두께의 참고 문서다.

영화 속 등장하는 언론계 은어, 신문사 시스템, 주요 등장인물의 일대기, 바이오벤처 분야, 3~5세용 백신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심지어 송라원은 백과사전 두께의 참고자료를 받았다.

그녀가 연기할 여기자는 기자로서는 미숙할지 몰라도, 똘똘하며 당찬 캐릭터다.

강철중의 막무가내식 저돌성을 지적이며 논리로 보완하는 구도다.

설형기와 송라원은 연기를 접근하는 면에서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촬영현장에서 대본을 잘 보지 않는다.

이미 대사를 모두 외운 상태에서 카메라 앞에 선 후, 영화에 빠져들어 간다.

때문에 류지호는 두 사람에게 충분히 놀 수 있는 여지를 주는 편이다.

반면에 전주호 배우는 완전 다른 타입이다.

시나리오를 학술서 읽듯 굉장히 꼼꼼하게 분석하고 연구한다.

여러 개의 연기를 미리 준비해 와, 리허설 때 펼쳐 보인다.

그 중에서 감독이 OK 한 것을 선택해 연기를 펼치는 식이다.

설형기와 송라원의 방식이 매번 좋은 장면을 만들어내진 않았다.

촬영 현장에서 감정을 잘 살리는 경우라면 괜찮다.

계산되지 않은 날 것 같은 연기는 진짜배기라는 느낌을 준다.

감독들이 좋아한다.

반대의 경우가 문제다.

좋은 장면인데 쓸 수가 없을 때.

너무 좋아서 문제가 발생한다.

연기가 영화의 모든 요소들을 다 잡아먹어 버릴 때다.

어쩔 수 없이 촬영 부분을 버릴 수밖에 없다.

나중에 예고편에나 써먹으면 모를까.

폭발적인 연기는 감독에게 양날의 검일 경우가 많다.

상업영화에서는 배우에게 여백을 잘 주지 않는다.

관객이 지루할 만한 심리적, 내면의 형상화 같은 것들을 최소화 하니까.

사건과 이벤트 위주로 장면을 설계하니까.

때문에 감 혹은 필링에 의존한 연기법을 펼치는 배우는 전형적인 상업영화와 부조화를 이루기 쉽다.


“라원아.”

“네?”

“현장에 대한 감각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와.”

“모든 거요....?”

“<이중간첩> 현장에서 어떤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는지 들었다. 전형적인 액션블록버스터 특성상 네가 뭘 해볼 여지가 별로 없었을 거야.”

“뭐라고 할까. 그냥 저는 기능적이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내가 뭘 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앗! 조세민 감독님 뒷담화 아닙니다. 이르시면 안 돼요.”

“난 세민이처럼 널 가르치지 않아. 알지?”

“가르치진 않지만, 너무 어려운 걸 요구하시잖아요.”


한국에서 영화를 할 때면 배우들에게 틀에 박힌 연기를 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매번 상상력을 발휘해 보라고 요구한다.


“두 선배들에게 많이 배워.”

“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지한 전주호와 달리 설형기가 드물게 너스레를 떨었다.


“걱정 말아요. 밥값은 할 테니까.”

“선배, 금단증상은 끝났어요?”

“아주, 죽갔어요.”


설형기는 프로레슬러 역할을 연기하면서 금연을 선언했다.

술까지 삼갔다.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늘였던 체중을 정상 체중으로 감량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미팅 역시 술자리 없이 식사만 하고 헤어졌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전주호 배우가 류지호를 잡아끌었다.


“감독님, 저랑 따로 한 잔 하시죠?”


류지호는 흔쾌히 수락했다.

배역에 대해서 따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두 사람은 청담동의 조용한 바로 옮겼다.

전주호가 부담감을 토로했다.

지능적이고 미묘하게 분열적인... 냉혈한.

시나리오 첫머리에 있는 김현주 캐릭터의 한 줄짜리 소개다.


“잘못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겠다는 위기감이 들더라고요. 형기형 하면 연기파 배우고, 저는 최근 쌈마이 캐릭터만 하고 있느니....”


거기에 <민중의 적 : EMBARGO>에는 소위 류지호 사단이라고 할 만한 이들이 모였다.

기계처럼 손발이 척척 맞는 분위기에서 자신만 이질감이 들 것 같다며 우려를 표했다.

한편으로 독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신인이라는 마음으로 매일 거울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강하고 악하게 보일 수 있을까 이미지를 분석하고 있고, 그걸 캠코더로 찍어서 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자타공인 연기파 배우와의 호흡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다.

본인은 연기력 면에서 절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간의 평가는 달랐다.

게다가 최근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면서 90년대 TV드라마와는 또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도 신경이 쓰였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미지가 심어진 것은 좋다.

그로 인해 영화배우로서 잃은 것도 많다.

그는 자칫 코미디로 굳혀진 이미지 때문에 비슷한 역할에 계속 typecast 될까 걱정이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설형기의 연기 스타일을 확인하기 위해 모든 작품을 모니터링을 했단다.

너무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서 류지호가 걱정이 될 정도다.

<민중의 적 : EMBARGO>의 캐스팅은 김재욱과 조감독 이동화가 전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현수 캐스팅은 전주호 배우가 먼저 출연을 하고 싶다고 찾아와서 성사되었다.


“외향에 치중하는 기존 악역 캐릭터를 좀 더 내면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로서는 필사적이었다.

코미디 영화에 맞는 배우보다.

연기를 내면화해 표현할 줄 아는 주인공이 당연히 좋으니까.

길고 오래 가기 위해서는 기존에 각인 된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깰 필요가 있다.

류지호는 그의 연기에 대해 조언을 해줄 수 있지만, 가만히 듣기만 했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굳이 사기를 저하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대본리딩까지 시간적으로 충분히 여유가 있기도 했고.

배역에 대한 충분한 숙지가 이루어진 후에나 디테일한 부분을 서로 맞춰 가면 된다.


✻ ✻ ✻


류지호는 배우들과 자주 만남을 가졌다.

이번 영화와 관련해서 폭넓은 대화를 나눴다.

YNTV 사회부 기자와 함께 일일 기자 체험도 해보았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가 체험했거나 알고 있던 것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체험을 시켜주는 기자가 적나라한 기자의 치부를 보여주지도 않았고.

배우들의 체험을 도와주고 있는 기자가 물었다.


“혹시 영화 주인공의 모델이 송 부장입니까?”

“송 부장이 자신이 모델이라고 하던가요?”

“그런 건 아닌데. 지방지 사회부 기자 출신이라든가. 말투가 어딘지 송 부장하고 비슷해서.”

“송 부장을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라, 그 양반 성격이 알게 모르게 캐릭터에 묻어 나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송 부장이 사스마리 돌 때 한 성깔 했다고 하더라고요. 인천 남동경찰서장도 끔뻑 죽었다나...”


기자들 사이에서 경찰서 출입을 ‘사스마리 돈다‘고 표현한다.


“사회부 기자들이 고된 일을 하다 보니 규율도 세고 전투적이잖아요. 송 부장이 나와바리 돌 때는 다들 그렇게 했다고 들었어요.”

“감독님하고 대화하다보면 기자랑 얘기하는 것 같다니까.”


송라원이 슬쩍 말을 얹었다.


“모르셨어요?”

“뭘요?”

“우리 감독님 무당이잖아요.”

“내가 무슨 무당이야!”

“다 맞추잖아요. 모르시는 게 없다니까.”


류지호는 송라원을 무시해버렸다.

말을 섞다보면 또 무슨 별명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기자들을 많이 상대해봐서요.”

“미국 기자들은 많이 다릅니까? 제가 해외 특파원으로 나가보질 않아 잘 몰라서.”

“똑같아요. 메이저 언론사 기자들은 젠틀한 편이고, 타블로이드 기자는... 뭐 그래요.”

“모쪼록, 사회부 기자 잘 좀 그려주세요. 잘 아시겠지만, 정말 고생 많이 합니다.”

“너무 잘 그리면, 한국에서 영화를 못할 것 같은데요?”

“기자 신랄하게 까도 되죠, 뭐. 언론이 성역도 아니고. 기자를 너무 멍청하게만 그리지 말아주세요. 매번 TV나 영화에서 나오는 기자가 좀 덜떨어지게 나오거나 지나치게 탐욕스럽게 나오더라고요.”

“똑똑하죠, 기자들.”

“기자가 뇌물을 챙겨봐야 얼마나 챙기겠습니까? 형사랑 똑같아요. 형사들이 사건수사비에 쪼들려서 자기 돈 꼴아 박는 것처럼. 우리도 회사에서 주는 걸로는 취재도 제대로 못해요.”

“아, 네.”


어떤 직업을 취재하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업세계의 애환을 많이 들려준다.

그런 애환들이 영화에서 리얼하게 묘사되길 기대하면서.

상위 직급자로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조건 자신의 직업세계를 멋지고 훌륭하게 묘사해주길 바란다.

재밌는 것은.

그런 분위기가 201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 달라진다는 것이다.

특히 형사들이 제발 그만 좀 애환을 우려먹으라고 부탁하게 된다.

차라리 더 리얼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심지어 형사를 악독하게 그려도 상관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관객들이 질려하기 때문이다.

형사가 힘든 직업임을 모르는 관객은 거의 없다.

TV에서 틈만 나면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싼 돈 내고 극장에 앉아서 그런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형사 본인과 가족들조차도.

그때 가서도 부정적으로 자신의 직업을 그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부류는 둘 뿐이다.

검사와 재벌이다.

원래도 최악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영화에서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걸 좋아할 리가 없기에.


“YNTV에도 국정원 직원이 파견 나와 있어요?”


작가의말

9월 달에도 좋은 일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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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 안정 속의 변화. (5) +4 23.09.26 2,211 88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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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민중의 적 : EMBARGO. (13) +4 23.09.08 2,204 92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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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적 : EMBARGO. (4) +2 23.09.04 2,194 84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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