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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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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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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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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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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민중의 적 : EMBARGO. (9)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는 중국과의 합작 영화는 관심이 없었다.

동남아 화교권 국가를 제외하고 전 세계에 수출되는 중국영화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1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외형적으로 중국 시장은 북미 시장만큼 크다.

그런데 외국인이 들어가서 뭔가 해볼 여지가 극히 제한적이다.

중국 당국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글로벌 정서와는 완전 동떨어진 선전영화를 대량 양산한다.

중국 관객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 스토리부터 배우의 연기까지 고등학생 실습작품만도 못한 영화가 수두룩하다.

굳이 류지호가 나설 필요는 없다.

충무로도 안달복달할 이유가 없다.

중국은 한국 영화계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영화를 제일 잘 만들기 때문이다.


“동석이형!”

“어? 의장님~”

“잠깐 이야기 좀 해.”


류지호는 G.O.M International의 오동석을 데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중국 진출은 어떻게 되고 있어?”

“내년 하반기가 되면 중국에 극장업 라이선스를 신청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즈음에 CEPA 조건을 충족하는 모양이지?”

“내년 상반기 중으로 3년 조건을 채웁니다. 다만 중국 쪽 파트너를 신중하게 고르고 있습니다.”


중국 본토와 홍콩이 체결한 CEPA의 항목 중에는 ‘홍콩에서 3년 이상 영화관 사업을 운영했을 경우 중국에서 절대 다수 지분을 갖는 상영관 운영이 가능하다’라는 규정이 있다.

G.O.M International 홍콩점은 내년 봄 즈음 그 조건을 충족시키게 된다.

만약 중국 정부로부터 극장업 면허를 취득하게 되면, G.O.M 홍콩법인이 최대 75%의 지분을 보유할 수가 있게 된다.

참고로 외국 법인은 무조건 최대 49%까지만 지분을 보유할 수 있다.


“스탠 크레이그 총괄사장하고 대화는 나눠봤어?”

“JHO는 만달대련그룹과의 합작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습니다.”

“내가 그러라고 했어. 만달대련그룹이 부자 기업이라 합작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만달대련그룹은 탄탄한 부동산 사업을 바탕으로 영화업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사업 기반이 부동산이기 때문에 중국의 주요 성마다 가장 좋은 지역, 건물에 멀티플렉스를 건설할 수 있는 자금과 권력이 있었다.

그룹의 회장은 중국 당·정·군·재계 고위층 인사들의 자녀를 일컫는 태자당의 일원이다.


“메이저 국영영화 기업이 아니라 왜 만달입니까? 걔들 중국에 극장 깔려면 10년 이상 걸릴 텐데.....”

“JHO가 회장을 공략하고 있다면 형은 회장 아들하고 인연을 만들어 봐.”

“영화 사업 분야를 책임지고 있습니까?”

“아니, 아직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인가 할 걸.”

“......?”

“그 놈, 한국 연예인 무지 좋아해. 전형적인 재벌2세 금수저고.”

“......”

“형이 직접 상대하라는 거 아니니까. 불쌍한 척 하지 마. 일단 믿을 만한 20대 직원 중에서 영화, 음악, 게임, 파티, 클럽... 잡기에 두루 능통한 날라리를 찾아봐. 중국 출장 갈 때 데리고 다니면서 태자당 3세들과 접촉시켜. 특히 만달그룹 회장 아들을 한국에 초대해서 KM뮤직 공개방송에도 데리고 가고, 가온 플라자에서 게임 경기도 관람시키고, 내년에 오픈하게 될 센텀시티 G.O.M도 보여주고.”

“한류팬으로 만들어라....?”

“한류에 푹 절여서 친한파로 만들란 말이야.”

“솔직히 중국 애들을 도대체가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믿지 마. 혼자 뭐 좀 하겠다 싶으면 혼자 다 해먹으려고 뒤통수치니까. 그 전에 고삐를 꿰놔야 해. 현재 중국을 우리나라 군부독재시절 정도로 보고 비즈니스를 펼쳐야 할 거야.”

“걔들이 눈 하나 깜빡할까 싶은데....?”

“이보세요. 댁이 세계 10대 멀티플렉스 체인 CEO입니다. 기죽지 마.”

“그렇긴 하지만.”

“형은 국내 극장 상황은 신경 쓰지 마. BGV든 광성이든, 신경 쓸 거 없어. 북미 외에 남미 그리고 유럽, 동남아시아에 집중해.”

“중국은?”

“JHO 해외사업을 총괄하는 스텐과 긴밀하게 협조하도록 해.”


JHO Company Group은 극장업에 진출할 생각이 전혀 없다.


“형은 세계에서 통할만한 할리우드 영화를 꾸준히 공급받을 수 있는 사람이고, 몇 년 동안 수백억의 적자를 보아도 책임져줄 모회사가 있어. 글로벌 미디어기업 JHO CEO들과 언제든 페이스타임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형이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받지 말아야 할 대접을 받았다면, 그건 가온그룹과 나를 무시한 것이 돼.”


격려를 하는 것인지, 부담을 주는 것인지.

어찌되었든 오동석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최선을 다 할게.”

“사람들이 기다리겠다. 가자.”


류지호가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오동석은 어깨를 펴고 류지호의 뒤를 따랐다.

어딘지 그의 발걸음에 힘이 실리는 것 같았다.


❉ ❉ ❉


대략 15주.

<민중의 적 : EMBARGO>의 프리프로덕션 기간이었다.

넉넉한 시간을 두고 준비하던 류지호의 성향과 맞지 않았지만, 한국영화 평균 프리 기간과 비교해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

크랭크인하고 첫 주는 부담 없는 씬들 위주로 빠르게 찍었다.

계절이 드러나지 않는 로케이션들이다.


<시민케인>.


이 전설적인 영화는 미장센 분석에서 빠지지 않는 영화다.

이 영화의 쇼트들은 한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에게 포커스를 맞춰서 관객에게 보고 싶은 인물을 선택하게 한다.

이른바 딥포커스 기법을 통해서.

이러한 미장센은 객관성을 유지하며, 한 프레임에서 시공간의 연속성을 이해시킨다.

오손웰스 감독은 불과 26살 나이에 딥포커스, 조명, 그림자, 앵글 등의 모든 요소로 미장센을 표현했다.

영화사상 최고의 영화는 아니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탁월한 영화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스토리 라인은 특별하진 않다.

뉴욕의 거부이자 신문 발행인 케인이 ‘로즈버드’라는 수수께끼를 남기고 사망한다.

잡지 편집장은 케인의 죽음과 ‘로즈버드’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아오도록 기자에게 지시한다.

기자는 케인의 주변 인물들을 샅샅이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한다.

하지만 끝내 기자는 ‘로즈버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대신 영화 엔딩에서 은근슬쩍 진실한 의미를 관객에게 알려준다.

<시민케인>은 당대 영화문법의 완성판이자, 후대에 만들어진 <펄프픽션> 류의 혁신적인 스토리텔링의 조상격이라고 할 수 있다.

괜히 영화사와 비평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맞지?”


한창 촬영 중에 윤기수가 류지호에게 은근히 물었다.


“뭐가?”

“<시민케인>.”

“모더니즘 표현양식을 강조하는 것도 없고, 느와르 장르도 아닌데?”

“어딘지 모르게 표현주의적인 세트. 또 리얼리즘 조명을 강조하는 것. 맞는 것 같은데...?”

“그냥 상업영화 찍자. 영화 학도도 아니고.”

“혹시 편집에서 시간순서를 바꾼다거나 사건을....”

“평범하게 갈 거야. 심오한 척 하지 말자고. 그냥 강철중만 따라 가.”


이번에는 영화 내내 딥포커스를 최대한 유지할 계획이다.

등장인물의 얼굴 단독 클로즈업이나 빅클로즈업도 최대한 절제하기로 했다.

아주 중요한 감정 쇼트나 장면에서만 선별적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질주 추격씬, 자동차 추격씬, 회의 장면 외에는 쇼트를 잘게 쪼개지 않기로 했다.

특히 딥포커스가 두드러지는 장면들은 신문사 내부와 보육원 시퀀스들이다.


치이익. 칙!


모니터스테이션 테이블 위에 놓인 무전기에서 조감독 이동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 감독님, 지미집 스탠바이요.


류지호가 무전기를 집어 들고 입을 열었다.


“리허설 더 안 해 봐도 되겠어?”

- 촬영감독님이 슛 한번 가보자고 하시네요.

“가자. 큐사인은 네가 내.”

- 카피 댓.


피식.

류지호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난이도가 있는 촬영을 할 때 간혹 이동화가 오버 한다.


“슛! 레디!

“조용!”

“카메라!”

“롤!”

“사운드!”

“스피드!”

“씬 67. 커트 하나, 테이크 하나!”


딱.


경쾌한 슬레이트 클랩 소리와 함께 촬영이 시작되었다.

카메라는 말쑥한 정장차림의 사내들 허벅지와 정강이 사이를 잡고 있다.


“고!”


정장차림의 사내들이 몇 발자국 걸어온다.

지미집은 대기.


툭.


선두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한편에 쌓인 신문의 탑을 건드린다.

지미집 카메라는 무너지는 신문에는 관심이 없다.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틸트 업(Tilt Up)한다.

약간 로우 앵글(low angle)로 화면 앞으로 걸어오는 남자들을 잡는다.

남자의 표정은 오만하고 어딘지 권위적이다.


- 컷! 오케이!


똑같은 쇼트를 달리를 이용해 넓은 사이즈로 촬영했다.


“씬 69 갈게요.”


강철중이 편집국 입구에 팻말을 하나 써서 붙인다.


- 개새끼와 기관원X님 출입금지.


기관원 ‘놈’에 X 표시가 되어 있고, 그 옆에 ‘님’을 붙인다.

이 팻말을 보고 웃지 않으면 기자도 아니다.

대한매일신보.

영문판 제호로는 The Korea Daily News다.

1904년 영국인 기자 베델이 민족계몽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신문이다.

어느 날 대한매일신보 사옥 앞에 묘한 문구의 간판이 하나 걸렸다.


[일본인과 개(犬)는 출입금지]


일제로부터 검열을 받던 당시.

영국인이었던 베델과 조선인 지식인들이 내걸었던 간판이었다.

'을사늑약' 체결로 사실상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그 시절.

이런 간판을 신문사 정문에 내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강철중이 한 짓 역시 90년대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1990년대까지 국정원 조정관(2000년대는 IO)들이 언론사에 책상까지 두고 상시 출입했으니까.

그들은 수시로 신문사 간부들을 만나 압력을 넣기도 하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언론사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이를 참다못한 몇몇 신문사 기자들이 편집국 입구에 팻말을 하나 써서 붙였다.


- 기관원 출입금지.


기자들의 항의표시에 지나지 않았다.

국정원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국정원 직원은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언론사를 자유롭게 출입하며 압력을 행사했다.

정장 사내들이 쌓여있는 신문의 탑을 치고 무너뜨리는 것은 국정원 조정관의 횡포에 대한 암시다.

팻말을 건 강철중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받아버리는 돌아이였고.


[오오. 선배 다시 봤어요?]

[기사 써야 되는데, 저 새끼들이 얼쩡거려서 집중이 안 돼서 그래. 존만이들이 고개 빳빳이 쳐들고 다니는 것도 엿 같고.]

[그게 다예요?]

[말 시키지 마. 기사 써야 돼]

[보도자료 그대로 베껴 쓰면서 무슨....]

[다 들린다~]


강철중과 선영의 대화다.

강철중은 일제강점기에 강단을 보였던 조선의 지식인들의 기개를 흉내 낸 것이 아니다.

그저 더러운 성질머리로 인해 개인적으로 짜증을 부린 것 뿐.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강남의 G-Tower 빌딩에 세팅해 놓은 신문사 내부 세트 촬영이 이어졌다.

당장 입주할 기업이 정해지지 않은 공실이라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따라서 세트 촬영을 몰아서 촬영할 필요가 없었다.

날씨와 스케줄 조정에 따라 탄력적으로 들락날락거렸다.

류지호와 촬영하면 이런 것들이 큰 장점이다.

섭외도 쉽고, 누구 눈치도 안보고 촬영할 수가 있다.

심지어 실수로 기물을 파손해도 부담감이 덜했다.


“신경 쓰지 마. 내가 다 책임지니까.”

“죄송합니다. 감독님....”

“일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조금만 조심하자.”


로케이션 장소에서 부주의하게 일하다가 기물을 파손하거나, 폐를 끼쳐서는 곤란했다.

다른 영화팀이 다시 빌릴 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작은 실수로 인해 죽일 놈이 되어 조수들이 주눅 드는 꼴을 류지호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 본인이 그런 꼴을 많이 당해봤기 때문이다.


“조감독, 내일부터 여주로 가나?”


조명감독이 다음 일정을 물었다.


“촬영, 조명, 저희 연출팀이 선발대로 가고. 나머지 팀들은 내일 모레 넘어올 거예요.”

“숙소는 가온호텔?”

“예.”


전주호 매니저가 이동화의 불러 세웠다.


“조감독님, 주호형이나 다른 배우는 어떻게 할까요?”

“모레 콜 타임 맞춰서 현장으로 와도 되고, 하루 일찍 올 거면 제작부에 이야기 해.”

“미리 내려가도 된다는 거죠?”

“형기형이랑 주호형, 하루 일찍 내려와서 밤새 술 마시는 거 아냐?”

“촬영 전 날은 안 마셔요.”

“내가 하루 이틀 속냐?”

“조감독님이 형들한테 한 마디 해주시던가요.”

“괜히 말하러 갔다가 나까지 붙들려서... 아휴, 적당히 마시라고 해.”

“그 형들이 매니저 말을 듣던가요, 어디.”

“몰라. 암튼 나는 철수!”


지방 촬영을 가면 애주가의 방이 사랑방이 되곤 한다.

매일 밤 술판이 벌어진다.

90년대까지 선배들이 술판을 벌이자면 어김없이 후배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점차 개인주의화 되어가며 젊은 스태프들 사이에서 콘솔게임기를 챙겨 와서 숙소에서 <FIFA> 같은 축구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지방 로케이션의 영화팀 밤문화가 건전해지고는 있지만, 한쪽에서는 여전히 꼰대 회식문화라든지 성추행과 관련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 ❉ ❉


여주 가온호텔, 대연회장.

<민중의 적 : EMBARGO>의 대한고등학교 61회 동창회 장면 촬영 준비가 한창이다.

부부동반 파티 설정이다.

한껏 멋을 부린 100명의 보조출연자들이 명문고교 동문 파티 분위기를 내고 있다.

연출부들이 보조출연자 사이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복장이 미흡이하거나 스타일링이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골라냈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보육원생 소년을 납치하는 씬 바로 다음에 붙는 장면이다.

실질적인 영화의 도입부다.

류지호는 당연하다는 듯 스태디캠을 꺼내들었다.

<The Killing Road>부터 시그니처가 되어버린 류지호 영화만의 도입부다.

류지호 영화의 모든 도입부는 원 씬 원 커트다.

핸드 헬드든, 지미집이든, 스태디캠이든, 달리든.

어떤 테크닉을 부리든. 지금까지 류지호가 연출한 모든 장편영화의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씬은 원 씬 원 커트 내지는 현란한 카메라 워크를 선보였다.


[아푸푸푸]


카메라 아래에서 방정맞게 세수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이잉.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울리고.


[그만 좀 징징대라. 새끼야.]


불쑥.


화면으로 강철중의 뒷모습이 나타난다.

단정한 흰색 와이셔츠의 차림이다.

그런데 등짝은 쭈글쭈글하다.

말이 필요 없다.

강철중이란 캐릭터를 의상의 상태만으로 단번에 드러냈다.

거울에 반사된 강철중의 푸석푸석한 얼굴, 움푹 들어간 눈.

피곤에 절어있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맨다.

바지는 양복바지였는데, 상의는 빛바랜 갈색 점퍼다.

갈색 점퍼는 전편부터 이어진 강철중의 코스튬이었다.

변기칸에서 휴지를 뜯어 구두까지 반들반들 닦는다.

매무새를 점검한 강철중이 화장실을 나간다.

바닥에는 고급 양탄자가 깔려있고, 인테리어도 세련됐다.

카메라는 계속 강철중을 쫒는다.

연회실 앞으로 걸어가, 입구에 대기 중인 직원에게 초청장을 보여준다.

설형기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는 애드리브를 넣었다.


“......”


류지호의 미간 슬쩍 찌푸려졌다.

그렇다고 해서 촬영을 중지 시키진 않았다.

계산된 연기는 아니다.

캐릭터에 몰입되어 자연스럽게 나온 애드리브다.

직원이 연회장 문을 열어준다.

강철중의 눈앞에 화려한 동창회장이 펼쳐진다.


[저기 철중이 아냐?]

[고등학교 때는 범생이었잖아.]

[내성적이었지. 기자되더니 애가 완전히...]

[요새 맨 정신으로 살 놈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되겠냐.]


자신의 뒷담화를 듣고 그대로 지나칠 강철중이 아니다.


[그래. 나 미친개다.]

[어! 철중아.... 반갑다.]

[반갑냐? 니들 얼굴이 티꺼워 보이는 건 내 착각이고?]

[하하....]

[개새끼가 돼야 인간을 물지. 아무 개새끼나 막 사람 물디? 미치지 않은 개가 사람 무는 거 봤어?]


강철중은 동창이 들고 있는 샴페인을 빼앗아 마시는 유치한 짓 따위는 안 한다.

그저 ‘앙’ 무는 시늉을 해보이고, 쿨하게 돌아선다.

강철중과 눈이 마주친 동창이 손짓한다.


[철중이 왔네? 야! 강철중!]


방정맞게 손을 흔드는 동창의 옆에는 김현수가 함께 있다.


[야, 요즘 동창회는 다 이러냐?]

[우리가 오피니언 리더들 아니냐?]

[오피니언 리더는 지랄....]

[표정 좀 풀어. 사회에 불만 있냐?]

[졸라 많다. 불만.]


척.

김현수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달고 악수를 청한다.

강철중 가볍게 김현수의 손을 잡았다 놓는다.


[몇 반?]

[내가 이과여서 넌 기억 못할 걸?]

[여기 현수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벤처를 시작했대.]

[개나 소나 다 벤처래? 지난 정부에서 벤처에 몰빵 하다 나라 종칠 뻔 했어.]

[......]

[농담이다 농담. 뭔데? 게임, 쇼핑?]

[바이오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대한일보에 있다며?]

[엉.]

[내가 철중이한테 잘 보여야겠어.]


김현수는 시종일관 사교적이고 매너 좋은 사람 연기를 한다.

본래가 좋은 이미지를 보여준 전주호 배우다.

기존에 TV드라마에서 많이 봤던 그 모습이다.


[사스마리에게 잘 보여 봐야 좋을 거 하나 읍다. 경찰서나 법원에서 볼 일 있냐?]

[정치부, 경제부 기자도 했다며?]

[좇 같아서 사회부 왔는데, 내가 이러구 있다.]

[부장되고 국장 되고....]

[국장은 니미... 일없다. 경찰의 꽃은 형사. 기자의 꽃은 사회부.]


김현수는 틱틱거리는 강철중의 말투가 매우 거슬린다.

학교 다닐 때는 뭣도 아닌 새끼가.....

하지만 참는다.

계속해서 겸손하고 스마트한 비즈니스맨의 태도를 유지한다.


“컷!”


그것으로 원 씬 원 커트는 끝.

최종 편집본에서는 백그라운드 음악으로 은은한 클래식이 흐르며 동창회 몽타주가 잠시 흐른다.

김현수가 비서에게 뭔가 속닥거리는 모습이 짧게 삽입된다.


[여기 철중이도 고시 패스 했지. 언론고시.]

[하하하. 그러네.]


고시만큼 어렵다하여 붙여진 이름, 언론고시.


[안 해봤음 주댕이 털지 마라. 필기시험 더럽게 어렵거덩. 졸라 두꺼운 시사상식 책 열권은 달달 외워야 돼.]


한 쇼트 한 쇼트 매우 공들여서 찍었다.

다만 이렇게 촬영한 쇼트 중에 절반이라도 편집에서 살아남으면 선방.

흙수저 출신 기자와 금수저 출신 벤처 기업가의 첫 대면이다.

류지호는 강철중을 밑에서 위로 찍고, 김현수를 위에서 눌러 찍었다.

강철중이 김현수의 우위에 있음을 관객들에게 인지시키는 것이다.

이후로 역전된다.

강철중이 외압에 시달리며 그 반대가 된다.

김현수가 강철중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아이레벨에서 두 사람이 대치한다.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마다 앵글로, 혹은 미술로 대치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 창틀을 걸고 찍은 장면도 나온다.

어떤 장면에서는 창틀 안을 차지하고 있는 강철중의 면적이 김현수보다 좁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둘 사이의 권력의 우위 또는 주도권을 암시하는 미장센이다.

그런 창틀을 덧씌운 더 거대한 창틀도 나온다.

두 쓰레기 모두 사회 속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영위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미장센이다.

처음에는 같은 틀 안에서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위치처럼 보이고 주도권 싸움을 벌이지만, 어느 지점에 가서 강철중이 창틀에서 완전히 벗어나면서 극한의 대결이 벌어질 것을 암시하게 된다.

그저 멋 부리는 앵글의 단 발로 그치면 미장센이 아니다.

영화 전편에 걸쳐 꼼꼼하게 계산되었을 때 의미를 갖게 된다.

창틀 혹은 문틀 같은 구조를 활용한 미장센은 회화와 사진, 영화에서 아주 기본적인 방식이다.


[파티는 재밌게 즐기고 있냐?]

[요새 길바닥에 쓰레기가 잘 안보이더라.]


슥 - 동창회장을 둘러보는 강철중이다.

마치 쓰레기는 여기 다 모여있네.

그런 투다.


[우리가 함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엘리트 탈을 쓴 개새끼들이? 혓바닥에 빠다 좀 발랐냐? 느끼하게 잘 턴다?]

[......]

[미국식 유머로 알아들을 게.]


김현수가 비서에게 손을 내민다.

비서가 김현수 손바닥에 고급케이스를 놓아준다.

강철중이 고급케이스를 건네받아 열어젖힌다.

몽블랑 명품 만년필이 자태를 뽐낸다.


[스타인웨이 에디션이다. 좋은 기사 쓰라고.]

[누가 요새 이런 걸로 기사를 써. (타자치는 시늉을 한다) 다 뚜드리지.]


강철중, 케이스 밑을 들춰본다.

역시나.

케이스 안쪽에 상품권이 두툼하게 깔려있다.


[새끼가... 누굴 기레기로 아나?]

[....기레기?]

[기자 쓰레기의 줄임말이다, 새끼야. 가만! 쓰레기도 쓰레기 기자 줄임말이잖아....? 킥킥.]


그때 -

갑자기 강철중이 쉬 마려운 강아지처럼 하체를 불에 그슬린 오징어다리처럼 꼰다.


지이잉. 지잉.


강철중이 바지 주머니에서 플립형 휴대폰을 꺼내 받는다.

갑자기 화를 내고, 쩔쩔매고.

강철중이 생쇼를 펼쳐 보인다.


[나 좀 어디 갔다 올 동안. 니들 딱 여기 대기하고 있어.]


후다닥.


강철중이 동창회장을 빠져나간다.

은근슬쩍 만년필 케이스를 점퍼 안주머니에 챙기면서.


“컷! 오케이!”


자칫 지루한 장면이 될 수도 있다.

가장 쉬운 방식은 TV드라마처럼 커트를 자주 나누는 것이다.

류지호는 두 배우 역량에게 맡겨버렸다.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

악이 사회적 선의 크기를 줄임으로써 존재감을 과시하듯, 선 또한 악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영화 <다크나이트>는 선과 악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잘 보여준다.


[나도 널 안 죽일 거야. 내가 너 없으면 뭘 해? 넌 날 완성해.... 왜냐면 넌 너무 재밌거든. 우린 평생 이렇게 싸울 운명이야.]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어차피 둘 다 악한데, 그나마 기자가 재벌을 견제하는 것이 좋겠지.“


일견 타당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체념이 깔린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인지 관객 스스로 자문해 보길 바랐다.

흑 아니면 백을 골라야 하는 답안지도 아니고, 아주 까만 흑과 조금 덜 까만 흑 중에서 골라야하는 비극적인 상황은 이 사회를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게 할 것이기에.


“더 비극은 어느 쪽이 득세하든 사회가 부조리하다는 근본은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겠지.”


<민중의 적 : EMBARGO>에서는 류지호 영화답지 않게 한국식 신파가 묻어 있다.

호화 동창회 다음에 고아원 장면이 이어진다.

고아들의 처지가 더욱 도드라지며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나중에 밝혀질 비극에 관객이 분노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서사방식이다.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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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적 : EMBARGO. (9) +4 23.09.06 2,217 97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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