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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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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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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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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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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27. 악수

DUMMY

그 모습을 세 명은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다. 마침 다행히 후원에는 다른 손님들이 없었다. 멀리 있는 산책로에는 조금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멀리까지 나와야 하는 공터에는 적어도 없다.

어둑한 저녁 공기가 쌀쌀하다.


아드리안은 가져온 외투의 소매를 제 손으로 끌어내렸다. 으슬거리는 기운을 느꼈고, 헤슈나는 그것이 제 추위인양 금방 알아채고 동생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언니의 품의 온기를 느끼고 아드리안이 안정감을 느꼈다.

두 자매는 로멜리아 가의 마지막 직계이다. 전 남작은, 미모가 출중한 두 딸을 낳고, 그 이후의 후사를 보지 못한 채 일찍 삶을 마감했다. AI의 일이고 설정 상의 이야기였지만 어찌되었든.


줄리앙 리스트 역시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제냐의 움직임은 놀랍다. 재야에 묻혀, 이름도 없이 떠도는 자의 솜씨라고 보기엔 탁월했다. 로멜리아 가도 보유한 사병과 엘리트 병력들이 있었다. 그리 대단한 전력까진 아니었지만, 기사단도 일단 구색은 갖추고 있었다.


급하게 세슈칸으로 오는 길에 데려온 자들이 저 둘이었다. 영지 근처의 탐욕스런 적들의 시선을 피해 달아나느라 대단한 전력을 동행으로 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디가서 호위 무사로서 이름을 댈 정도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두 사람 모두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은 자들은 아니었지만 로멜리아 가 소속 경비대 중 가장 뛰어난 무력의 소유자들이다. 어지간한 기사와 맞붙어도 그다지 밀리지 않을 정도로. 또한 충의도 믿을만한 자들이었고.


그런 그들을 비록 스포츠처럼 대련을 한 것이라 하지만 손쉽게 제압하는 제냐를 보고 경탄을 내뱉지 않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로멜리아 가에서 가장 뛰어난 수석기사 정도는 되는 듯하다.


그는 지금 영지 내에서 주변 귀족들을 견제하고 영지민들의 동요를 막고, 내관들과 머리를 싸매며 영지의 내정을 살피고 있을 테다.

그가 영지군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주변의 탐욕스런 자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점도 있으리라.

대놓고 산슈카 왕국 내에서 전쟁이라도 하자는 듯 움직이는 건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기는 했지만. 줄리앙은 주변 소귀족들의 탐욕과 성정을 얕보지 않았다.


증거는 없으나 영주님께서 급사하신 것 역시 누군가의 암살이라고 심정적으로는 확신하고 있는 그였고, 근처에서 견제하는 세력이 없다면 당장 그들 일행을 향해 주력 병력을 보내서 대로변에서 처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로멜리아 가는 다행히 완전히 고립된 처지는 아니었고, 주변에도 그들 가문에게 우호적인 곳들 역시 조금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영지와 협력해 긴밀한 연락을 나누고 다른 적대적 영지들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 남은 자들의 임무이다.


무언가 일이 생기면 연락용의 아티팩트를 통해서 바로 전갈을 넣으라고 하고 떠나온 참이다. 아티팩트를 사용해 보내는 전갈은 실제 새가 나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날아와 닿는 종류의 아티팩트였기에 실시간 연락까지는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떨어져서 각지의 일을 알아볼 정도는 된다.


줄리앙은 호승심이 끓는 것을 느꼈다. 늙은이의 몸에 주책맞은 기운일 수도 있었으나. 저토록 뛰어난 젊은이를 보고 몸이 근질거리지 않는다면 검술가가 아닐 것이다.


줄리앙 리스트는 셋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말이다.


기사단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 큰 위험은 없을 것이고, 엘리트 병력이 그들의 앞을 막아선다고 해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주군의 여식들을 도망치게 하는 정도는 언제든 가능했다.


세슈칸의 골목 내에서는 그게 불가능했지만.


치명적인 독은 줄리앙에게도 유효한 것이었다.


그들이 세슈칸에 도착하고서도 계속 만남을 거절받아 작힘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때, 앞 길에 대해 고민하던 그들에게 다가온 이들이 그 때의 그 불량배들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최대한 자취를 감추려고 했던 일행이었으나, 불량배들 중 우두머리 격인 놈이 다가와 몰래 말을 걸었다.


작힘 가의 내부 사정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고, 지금 가문 내의 일이 복잡하니 자신들이 대신 전갈을 전하겠다는 투였다.

원래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내용이었으나 상황이 워낙 급박했고 또 가망성이 적었다.

작힘 백작과 만나 이야기라도 해보아야 무언가 진전이 있을텐데. 그에게서 얻어야 하는 것이 있으나 온전히 믿지 못하는 마음도 공존하는 난관이 줄리앙이 처한 상황이었었다.


세슈칸의 가도에서 마차를 타고 이동하다 골목 쪽으로 접어든 그들에게 불량배 두목은, 자신이 작힘 가의 비밀스런 일들을 맡아서 처리하는 용병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빛내던 놈의 기색이나 기세를 살폈을 때 아주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몇 놈이 있든 기사급이 아니라면 별다른 문제가 없으리라는 것 역시 그들의 방심을 불러 일으켰고.

상당히 공을 들이며, 작힘 가의 인장까지 보여주어 작힘 백작의 사정을 대신 아뢰는 놈에게 아주 약간의 신뢰감을 가지고 다가갔다.


세슈칸의 영주성, 작힘 가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겠다며 그들이 복잡한 길로 안내했고 이야기를 하던 틈을 타 사내들에게 독침을 쏘았다.


두 청년과 줄리앙까지 셋 모두 만만한 작자들은 아니었으나, 치밀하게 준비한 듯 골목 내부에 숨어있다가 멀리서 공격하는 작당들의 행태에 대응을 하지 못했다. 두목이라는 놈이 제 장기인 것처럼 순식간에 줄리앙의 목덜미를 독을 바른 암기를 사용해 긁어내었고, 두 청년 역시 암습을 당해 쓰러졌다.


심각한 수준의 신경독을 치사량에 근접하게 맞았지만 줄리앙은 반항을 했고, 놈들의 패거리와 혈전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제 몸을 다 내던지고도 아무런 수가 없을 그 즈음.


제냐와 맞닥뜨린 시점이었다, 그 때가.


그 전까지 작힘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던 줄리앙이었으나 불량배들의 습격 이후 확신하게 되었다. 작힘 백작은 로멜리아 가의 유산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유산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반환을 요구하리란 것도.


불량배들이 스스로 그렇게 움직였을 리가 없다. 고작해야 귀족가의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의 귀금품이라도 뺏자고 그렇게 철저하게 굴었을까.

잘못하면 뒤탈이 크게 날 수도 있는 상황인데. 믿을만한 뒷배가 있고, 또 그 효과 좋은 신경독도 아마 작힘 백작으로부터 나왔으리라. 기사에 버금가는 이들을 순식간에 제압할만한 강력한 무기였다.


그들이 말한 것 중, 아마 작힘 백작이 수족으로 부리는 뒷거리의 용병이라는 말 정도만 사실일 테다. 그러니 작힘 백작이 그들을 부려 습격한 셈이 되고.


얼마 되지 않은 일행들이었지만 줄리앙은, 개중에서는 가장 노련하고 또 강한 편이었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극독에 당한 상태에서도 마지막까지 정신을 잃지 않았을만큼 말이다.

흰 머리가 나고, 주름이 얼굴을 비롯해 피부를 덮었지만 그래도 그의 검이 느려지진 않았다. 전보다 성장세는 확연하게 둔화되었겠지만.

신비로운 에너지가 물리적으로 실존하며 또 그걸 다루는 초인들의 기술이 진보한 세계에서, 나이는 더 이상 그렇게 치명적이며 절대적인 약함의 이유가 되지 못했다.


남들은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노쇠할 나이에 수 백의 기사를 단신으로 해치울 수 있는 정정한 노익장도 실존하는 판타지 세계다.

경험이 온전히 강함으로 환산될 수 있는 곳에서, 줄리앙이 그런 부류라면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되리라.


옷을 털고 있는 제냐에게 줄리앙이 다가갔다.


저벅거리며 오는 노인을 제냐가 처다봤다. 줄리앙이 말한다.


“그래도 쓸만한 놈들로 꾸려온 건데. 너무 쉽게 해치우는구먼.”


끄응······.


흙바닥에서 신음을 내며 일어나는 청년들이었다.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다들 몸이 튼튼하기로는 일류의 사내들이다. 실제 마차에 치인다고 해도 타박상이나 좀 입고 말리라.

제냐가 MP까지 소모하며 후려쳤지만 상하게 하려는 의도까지는 없었고.


기력을 담은 대거의 날로 몸을 치지는 않았으니까.


페이브와 질리언. 둘은 입을 앙다물고 제 처지를 수습했다. 낑낑거리며 간신히 서고 검날에 묻은 흙더미를 떨어냈다. 스릉, 납검하는 그 동작마저 끊김없이 깔끔하다.

둘 다 고수였다.


몸에 익은 기술이라는 면에서는. 총체적인 전투력에서 제냐에게 밀렸을 뿐이다. 아무래도 NPC들은 가지고 있는 스킬의 숫자에서부터 플레이어들에 비해 조금 부족한 편이었다. 목숨을 반쯤은 내어놓고 게임 속 세상에서 온갖 모험을 즐기는 이들과 얻어내는 스킬의 가짓수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다.


게이머에게 게임이란 말 그대로 여흥이었고, 생활이 아니기에 온갖 극단적인 극한의 수련을 해댈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신체적인 요건 또한 플레이어 쪽이 대개의 경우 강력하다. 개발진들은 플레이어에게 기본 캐릭터로 흠없는 것을 주진 않았으니까. 완벽하게 건강하며 어떤 부상도 치료만 받으면 금방 이겨내고 계속해서 스텟이 오르는 자들과 정면에서 붙는 건 좀 무리이긴 하다.


물론 NPC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괴물들이 많이 있지만.


스륵, 하고 줄리앙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제냐는 그것이 들리는 순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언제지? 줄리앙의 손은 어느새 얇은 세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다.


마치 인벤토리에서 순식간에 아이템을 꺼내는 것과 비슷한 동작이었다. 실체는, 단지 뒷짐을 진 등 뒤에 얇은 검을 미리 준비해 들고 있다가 다가서면서 숨긴 것을 꺼낸 것 뿐이다.

다만 세검이 가볍고 부피가 작으며 그것을 다루는 줄리앙의 몸짓이 마치 연극 배우처럼 절묘해서 일순간 중간 동작을 놓친 것 뿐이다.


세검은 얇지만 탄탄하다. 탄력적이며, 톱처럼 쓸 수 있는 강력한 물건이었다. 특수한 합금으로 지어졌다. 로멜리아 가의 집사장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검이었다. 무술가의 명맥이기도 한 로멜리아가의 오랜 전통은 뛰어난 검술가를 가문의 내정관으로 모시는 것이었다.


박식하며, 온갖 예절에 능숙하고, 잡다한 일에 도가 튼데다 두 아가씨를 불편함 없이 모실 수 있는 노쇠한 집사장은 동시에 세련된 검술가이기도 했다.

그 나이와 세련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꺾이는 일 없이 계속해서 기량이 늘어만 온 오랜 수련자에게 그 단어는 참 잘 어울리는 수식어였다.


무뢰배들을 상대로는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할 겨를도 없었지만, 이번엔 만전의 컨디션으로 임할 수 있는 대련이었다.


줄리앙은 칼을 든다.


밤의 정원 속, 어둔 허공에 얇은 칼날이 번뜩였다. 잘못 본 건가, 싶을 정도로 희미한 윤곽이었다. ‘기력’의 일종이다. 그렇잖아도 구분하기 어려운 세검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고, 줄리앙의 MP가 소모되며 레이피어의 검날에 깃들었다.

웅웅대며 공기 중에 진동하는 쇠의 울림.

아이템으로 치면 비스트 슬레이어보다 한 단계 높았다. 6등급 아이템. 동종의 희귀도를 가진 물건들 가운데서도 위력으로 상위권에 들었다. 좋은 재질로 만들어져 물리적으로 단단한데다 기력을 잘 받아먹어 절삭력과 파괴력의 증가율이 높다.

좋은 검사의 손에 들리면 천하의 일절을 구사할 수 있는 어엿한 보검이었다.


제냐는 눈을 똑바로 떴다. 초점을 잘 맞추어 줄리앙의 자세를 가늠했다. 청년들은 주춤대며 뒤로 물러섰다. 싸움에서 진 개, 라고까지 놀리면 아마 제냐에게 죽을 각오로 덤벼들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색이 조금 있어 보이는 건 사실이다. 청년은 집사장을 응원했다, 속으로. 그리고 믿었다.

로멜리아 가의 집사장은 대대로 호위 기사를 겸한다. 연로함에도 굴하지 않고 검을 단련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자, 다른 모든 내정관의 조건과 함께 그것을 가져야만 로멜리아 가의 집사장 자리를 맡을 수 있다.


그들이 아는 줄리앙은 그 어떤 기사보다도 호전적이고 날카로운 작자였다. 그런 기사급의 인물 셋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킨 독이었으니, 반대로 말해 골목길에서 엊그제 그들을 덮친 무뢰배들의 뒷배가 만만찮다는 게 증명되는 일이다.

강력한 기력은 신체 전반의 능력과 함께 내구성, 각종 독물에 대한 저항력 역시 끌어올린다. 극독에 당한다면 당연히 데미지를 입기야 하겠지만. ‘기사를 바로 죽이지 않고 움직임만 막는 독‘이라는 건 생각보다 아주 얻기 까다로운 물건이었다.


줄리앙은 제냐에게 실력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은인에게 그 동안 보여줄 기회가 없었으니, 이번에 제대로.

제냐의 실력은 얼추 안다. 그것이 그의 전신전력인지는 가늠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걸 보지 못한 것 보다는 훨씬 낫다.

제냐의 경우엔 줄리앙이 어디로, 어떤 속도로 올 지 파악하기 위해 머리가 바쁘리라.


실제로 바쁘지는 않았지만,

제냐의 스킬 시뮬레이터는 바빴다. 여러가지 보정이 그의 두뇌와 뇌에 정보를 주입했다. 줄리앙의 기세로 보건데 상당히 강력한 기사였다. 제냐가 느끼기에 본격적인 기사, 라고 할 만했다.

······.


그저 골목길 바닥에 쓰러져만 있던 노인장인 줄 알았는데 이럴 줄이야. 생각보다 조금 더 고될 지도 모르겠다. 제냐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들고 있는 건 대거다.


제냐는 레벨에 비해 강한 편이다.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이상한 짓거리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것이 운좋게 그에게 활용 가능한 다양한 스킬들로 치환되었던 탓이다.

플레이의 흔적이 스킬과 스텟에 고스란히 묻어나지만, 자신이 제대로 운용할 수도 없는 보상들을 받고 잡캐나 망캐亡Character의 길을 가는 자들이 늘 많다.


적성과 취향이 합치되는 지점에서 경험치로 치환되는 노력을 해야만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을 뛰어나게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앞서 나가면서 말이다.


제냐는 앞서 나가는 자들이 될만한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습만을 따진다면.


그게 그가 대거만 들고 줄리앙 앞에 서 있는 자신감일 것이다.

설령 진다고 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줄리앙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라고 말하려는지, 그 입술이 달싹거리며 수염이 흔들렸다. 그러다 이내 만다. 생각이 있겠지. 제냐의 솜씨를 다 알지 못하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밑천이 있다면 그걸 보는 것도 좋은 구경일 테다.


줄리앙이 달려들었다.


청년들과 마찬가지다. 페이브나, 질리언이 했던 그 직선 일도의 궤적이지만 속도나 노련함이 다르다. 한, 두 걸음을 걸을 때 보폭이 미세하게 달랐다. 제냐가 감각하는 타이밍 역시 흐트러졌다. 마지막에는 농구에서 피벗을 하듯이 빙글 몸을 돌린다. 양 발 중 오른 발이 멈추고, 축을 삼아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결국 제냐가 맞이하는 건 그의 시선에서 볼 때, 왼쪽에서 측면에서 날아오는 횡베기다.


레이피어는 날카롭고, 뾰족하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들어간 철의 양이 적다 뿐이다. 강력한 질량에 맞부딪히면 쉽게 튕겨나갈 수 있었다. 방패를 뚫기도 어려우리라.

그러나 그건 일반론이었고, 고수의 손에 들리면 허점을 노리는 매서운 독사처럼 군다. 거기다 비련의 시나리오의 세계에서 기력술을 쓰는 기사라면 수준에 따라 철도 뚫는다.


줄리앙이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기를 모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실전에서 견제기로 써먹을 만한 기술은 아니었다. 적어도, 어떤 강검과 부딪혀도 세검이 부러지지 않게 보호하는 건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새액, 하고 공기를 날카롭게 가른다. 그 얇은 검날처럼 말이다. 거기에 갈리는 무언가에 제 몸을 추가하고 싶진 않은 제냐의 대거가 역수로 쥐어져 황급히 막았다. 캉! 하고 쇠가 서로 떨어 울리게 했다. 손에 찡, 하는 감각이 온다. 아무렇지도 않다. 검을 들고 사용하다 보면 흔한 일이다. 그것 때문에 장갑을 끼고는 한다.


제냐는 손가락 끝 마디가 드러나는 가죽 건틀렛을 끼고 있었다. 팔목 위까지, 전완부를 넉넉하게 감싸는 질 좋은 물건이었다. 떨림으로부터 보호한다. 건틀렛의 손바닥에는 쇠 판이 일부분 달려 있었다. 급할 때 칼날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무게감을 위해서 그리 크지 않은 철판이 작게 붙은 것이었고, 실제 전투에서 방어용으로 쓰려면 묘기를 부려야 했다.

다만 자신의 검날에 가져다 대고 상대를 밀어내는 데는 아주 쓸만하다.


뒤로 튕긴 대거를 제냐가 다시 갖다 박았다. 레이피어의 검면에 말이다. 얇아서 날인지 면인지 순간 노리기는 힘들지만. 그대로 대거의 뒷부분을 건틀렛에 붙여 밀었다. 힘은 압도적으로 제냐가 강했다. 줄리앙의 칼이 뒤로 한 번 더 튕겨 나갔다. 다만 반대쪽 손이 남아 있었다. 제냐가 앞으로 무게가 쏠리자 줄리앙의 좌수가 서슴없이 날아들어 제냐의 목덜미를 노렸다.


손가락을 뾰족하게 세워 다가오고, 그 손아귀에 미미하게 기력이 서려 있었다. 제냐의 목 부근에는 방어구가 없는 맨 살이 있다. 위험할 땐 그 부분까지 상체 방어구를 완벽하게 차지만 일상시에는 아니었다. 손아귀가 목줄기라도 잡아 뜯을 듯한 기세로 다가선다. 그렇지 않더라도 뒷덜미를 잡히면 움직임이 제한된다.


제냐는 머리를 움직였다. 동시에 발도 뛰었다. 줄리앙의 오른쪽에 레이피어가 뒤로 튕겨 나갔고, 그 방향으로 질러 들어갔다. 칼날을 디밀며 들어오는 동작에 줄리앙이 몸을 빙글 돌려 피했다. 좌수의 손아귀도 허공을 휘저었다. 제냐가 줄리앙을 축으로 삼아 빙빙 돌듯이 굴었다. 그리고 가까이 그 몸을 가져다 댔다. 어깨로 명치를 노리면서 박치기를 했다.


줄리앙은 마지막에 엉뚱한 곳을 휘저은 왼 손을 제냐의 앞에 가져다 댔다. 여전히 기력이 넘실거렸다. 아주 희미한 아지랑이. 회백색의 그것은 약간 불투명했고, 그저 평범한 연기처럼도 보인다. 그 연기가 조금 더 양이 늘었다. 제냐의 몸통 박치기가 위협적으로 느껴져서 그럴 것이리라.


제냐의 어깨 갑옷의 판에 그의 손바닥이 먼저 턱, 붙었고 그대로 팔이 굽었다. 줄리앙이 먼저 뒤로 조금 뛰었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쿵! 하고 전차에 치인 것마냥 사람의 몸이 뒤로 날았다. 저항감이 별로 없다. 제냐는 타격감이 별로 없다는 걸 느꼈다. 줄리앙은 그대로 몇 바퀴 구르더니, 아무렇잖게 일어섰다. 레이피어를 다시 홱, 허공에 한 번 휘두르더니 검투사처럼 앞으로 세워 잡는다.


펜싱 경기를 하는 중세 시절의 결투자같다.


흠.


제냐는 콧김을 뿜었다. 힘은 그가 앞서지만 순발력은 상대도 만만찮았다. 동작의 유연함이나 정확성, 임기응변이 굉장히 빨랐다.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미꾸라지를 잡으려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쩔 수 없다.


닥치고 돌격해야지.


줄리앙이 그렇게 했듯 제냐가 달려들었다. 줄리앙이 내려치기 자세를 순식간에 잡으며 레이피어로 긴 종베기를 날렸다. 그 검극이 휘둘러지는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또 소리가 날카로운지. 마치 채찍을 연상시켰다. 제냐는 머리 위로 대거를 들고 그냥 박았다. 캉! 하고 불똥이 튀었다. 제냐가 잘 하는 짓이었다. 그보다 체격이 큰 상대에게 달려들어 그 품에 칼날을 선사하는 일. 뛰어난 반사신경, 동체시력, 담력이 있어야 가능한 짓거리다.


게다가 체력적으로도 HP가 높을수록 좋다. 자칫하면 한 번에 전투불능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다음 기회를 생각한다면 체력 수치가 충만할 때 해야 할 전략이리라.


줄리앙은 제냐보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노인 치고는 보기 드문 정정함과 훤칠함이었지만 키는 그저 비슷하리라. 오래도록 검술을 단련한 무예가의 몸이니 제냐보다 더 근육질일 수는 있었다.

플레이어의 캐릭터 신체는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NPC들이나 현실의 몸이 그렇게 바뀌듯 근육질이 되려면, 어마어마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거기다 체중 증강제의 역할을 하는 아이템 따위를 사용하면 더 쉽게 가능하다.


제냐는 재빠른 움직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탄탄한 체격을 갖고 있었지만, 초인적인 운동 수행 능력을 보일만큼의 신체냐고 한다면 갸우뚱할 만한 몸매였다. 김서원의 몸매가 아니라, 제냐 킴의 그것이 말이다.


캡슐 형의 시뮬레이터 바깥에서 움직이는 김서원의 몸뚱이는 제냐의 그것보다 훨씬 하위 호환이었다.

육체능력으로도, 외형적으로도.


제냐의 신체, 플레이어의 신체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단단한 고무 찰흙을 상상하면 편하다. 원상태로 회귀하려는 성질이 강해 체격을 바꾸려면 강한 자극을 오래도록 주어야만 한다.

김서원의 신체는, 그냥 운동 부족이었다. 비만 따위는 아니었지만 운동 부족은 확실했다. 그는 최근 몸이 자주 뻐근함을 느낀다. 비련의 시나리오도 좋지만 실제로 운동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어쨌든 지금은, 김서원의 신경 반응이 최고속으로 기능하며 격렬한 운동 중이었다. 마인드 트레이닝.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수준의 열량 소모는 있을 지도 모른다.


게임에 접속한 사용자의 신체를 정밀 장비로 검사해보면, 게임 속 플레이어가 집중해서 운동하는 부위에 아주 극소한 근육 반응이 있다는 건 입증된 결과였다.

그런 정신적 연동의 혹시 모를 폐해를 막기 위해 통감 따위의 자극은 철저하게 시스템이 일정 이상을 막고 있었고.


줄리앙의 잘 다려진 양복 정장이 코 앞이었다. 제냐의 코 앞.


그는 머리 위로 치켜든 대거를 그대로 가져와 그 검병(손잡이)의 말단으로 명치를 찍는다. 제냐의 근력, 순발력은 줄리앙보다 낫다. 근력의 경우에는 확연한 차이다. 순발력은 한 끗 정도 줄리앙이 밀리는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줄리앙 리스트라는 사내가 노련한 기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NPC들은 보편적으로는 플레이어들에게 육체 능력이 뒤지게 마련이니까. 최상위권으로 가면 의미 없는 지표였지만. 적어도 중간 레벨 부근에서 줄리앙이 충분히 통할만한 스펙을 가진 캐릭터라는 뜻이었다.


줄리앙은 내려치는 것이 막혔고, 제냐가 달려드는 그 순간 제 온 몸을 쥐어짜며 피하려 했다. 근육이 영 말을 듣지 않았다. 그만큼 제냐 킴의 대시가 순식간이었다. 옆으로 피하려 한다. 레이피어는 보통 한 손으로 다루었다. 줄리앙의 나머지 손이 가운데에 끼어 들며 조금이라도 충격을 줄여보려고 한다. 어림도 없다. 제냐는 그대로 다시 박았다.


이전 모습의 재탕이지만, 가지고 있는 패가 거기서 거기이니 어쩔 수 없다. 콱! 하고 살갗에 손잡이 말단의 가죽이 틀어 박히는 소리가 났다. 명치에 직격이었다. 검날을 쓰지 않은 것만이 제냐가 그 와중에 지킨 유일한 예의였다. 나머지는 손속에 사정을 둘 여유가 없었다. 줄리앙도 제냐에 버금갈만큼 빠르고, 전투에 있어서는 더 노련했으니까.

그냥 힘으로 때려 박아 속전속결로 가는 것이 제냐가 이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장기전으로 간다면, 체력으로 엉겨 붙으면서 싸우는 도중에 스킬들을 개화시키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근접전으로 싸울 때 말이다.


적대적 NPC와 하는 전쟁이라면 그냥 거리를 벌린 뒤 파이어 볼과 철시를 난사하는 수가 있다.


그런 방식으로 수많은 몬스터 떼거리들을 잡아 죽였다. 이 세계에서 다양한 특수 능력을 갖는 초인들은 단신으로 화력전이 가능한 경우가 드물게 있었고, 플레이어들은 모험가로 분장하며 세계관 내부를 거니는 가장 흔한 초인들이었다.


줄리앙은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충격이 있을만한 부위에 전신의 기력을 투사했다. MP가 주욱 달았다. 그래프로 표현이 된다면, 순식간에 반절 정도는 쓰인다. 검병으로 찍히는 명치를 중심으로 상체 전면부를 감싼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다른 부위에도 머물러야 할 테다.

그대로 날아가면서 낙법을 취할 수 있을까? 줄리앙의 경험 많은 머리가 대답을 내놓았다. 조금 어려웠다. 워낙 강력한 힘으로 순식간에 채였고, 공격 도중에 맞은 것이라 자세가 좋지 않았으니까.


홱, 하고 줄리앙의 몸이 앞으로 쏠리던 자세 그대로 날았다.


대포에라도 맞은 물체처럼 붕 날아 떨어진다. 쿵! 하고 흙바닥에 거친 충격음을 내며 노구가 뒹굴었다.


“······.”


아드리안은 말을 잃었다. 어린 소녀는 기사들간의 대련을 자주 보지 못했다. 전쟁이나 전투는 경험하지도 못했다. 그녀가 겪은 가장 뚜렷한 기억은, 아무래도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여 위협을 당했던 최근의 그것이다. 그 외에 소녀의 눈은 보여줄 것만 보여주고 제 주인을 용케 잘 지켜왔는데.

조금 험한 꼴이었던 모양이다.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물기가 맺히는 것도 같다. 그녀 자신을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온, 오랜 집사장이 만신창이가 되어 날아갔으니 어쩔 수 없다.


헤슈나 역시 민망한 표정이었다. 어떤 낯을 해야 좋을 지 몰랐다. 도움을 청하는 입장이라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다. 호위 무사의 역할을 하는 두 청년과 달리 줄리앙과 두 처녀는 제냐의 무용을 똑똑히 보았고, 또 그의 호의를 전해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가차없는 것 아닌가. 헤슈나는 손이 약간 떨렸고, 그 손으로 옆에 있는 아드리안의 등께를 쓰다듬으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헤슈나의 손이 닿아 어린 꼬맹이의 마음이 조금쯤 진정이 되었다. 아드리안이 울지는 않았다. 빽, 하고 소리를 질러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용케 참았다.

집안에서 어리게만 커 온 막내 딸은 나이에 비해서는 조금 어린 면이 많다. 명민하냐고 묻는다면 머리는 좋은 편이었지만, 경험이 적고 사람의 속내에 대해 파악하는 데 다소 둔한 면이 있다.

학문적으로는 재빨리 돌아가 그간 과외 선생들의 총애와 칭찬을 받아왔다,


라는 NPC 설정이다.


두 청년 역시 줄리앙을 믿었지만, 어쩔 수 없는건가··· 하는 심정을 표정으로 표현했다. 그들이 몸소 느껴본 제냐는 성난 말과 맞부딪히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들에 비해 그리 비대하지 않은 덩치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련한 기사들은 기력을 오래도록 머금어 그 육체가 특질이 되어 평상시에도 초인적인 힘을 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세계에 존재하는 초상력을 받아들이고, 모으고, 수련하는 그 동안에도 변화가 있고.


고련을 거친 고급 기사들이나 저런 위용을 보인다. 그도 아니라면 상식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이 넓은 대륙에 다양한 기인들이 또 있기야 할테지만···.

그들이 아는 상식선에서 가장 가까운 것을 찾으라면, 고위 기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로멜리아 가의 기사단장과 부단장이 그 정도 수준이었다. 사실 어지간한 소귀족의 영지에는 없을 때가 많은 전력이지만, 지위나 세력 크기에 비해서는 괜찮은 병력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로멜리아였다.


격투가 계속될수록 저무는 해가 더욱 기울어졌고, 밤이 찾아온다.


“······.”


말이 없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제냐도 약하게 숨을 헐떡였다. 급하게 힘을 쓰면 이렇게 된다. 초인적인 근력을 가진 놈도, 초인적인 수준의 빠르기로 움직이거나 무언가를 들면 지치는 법이다.

단시간에 그리 많이 움직이지 않은 것 같았지만, 짧은 수 싸움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줄리앙은 레이피어 한 줄기를 가지고 마치 나뭇가지가 뻗어 나가듯 다양한 시뮬레이팅 상의 궤적을 그려냈다.


그 사소한 변화로 만들어지는 가능성들의 줄기가 제냐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수준이었다. 스킬 보정의 정보 전달은 플레이어의 시각에서 여러 화면이 동시 상영되거나 증강 현실같은 가상의 그래픽이 캐릭터 시야에 더해지는 방식인데, 아무런 변화가 없는 지점으로 집중력을 발휘하면 나머지 그래픽들이 지워지게 되어 있다.


사용자의 선택과 집중을 방해하지 않고 돕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제냐는 도중부턴 게임 속, 실제 신체는 아니지만 김서원의 감각을 끌어내서 최대한 싸웠다. 캐릭터가 결과적으로 움직인 거리보다 훨씬 지치는 일이었다. 여기냐, 저기냐를 찰나의 순간 가늠하면서 여러 군데 여지를 두고 갈팡질팡 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 말이다.


한 순간에 스텟으로 표현되는 한계치에 가까운 속력을 내서 이겼다. 그러지 않았다면 장기전이 되었을 테고, 제냐가 검술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아마 패배했으리라.


줄리앙은 강했다. 노련한 기사라고 할 법했다.


제냐는 선 채로 말이 없다.


아드리안이나 헤슈나도 그렇다.


줄리앙은 바닥에 대大자로 뻗어 있었다. 제대로 낙법을 취하지 못하고 그대로 꼴사납게 굴렀다. 어디 돌멩이 굴러가듯, 나뭇잎이 날아가듯 날아서 말이다.


점잖게 정리했던 복장과 머리가 헝클어졌다.


줄리앙은 자신의 왼쪽 눈을 거치적거리게 가리는 앞머리를 치우지 않았다. 별다른 말없이 하늘을 봤다.

이렇게 하늘을 보는 것도 참 좋은 경험이다.

나이를 먹고, 실력이 오를수록 이런 날이 별로 없다.


보통 그 정도 즈음의 베테랑이 된다면, 죽거나 살거나이다.


예전 어느 때처럼 전신전력으로 서로 겨루고 이렇게 널브러지는 일은 아주 드물다. 그를 상대할만한 자들도 영지 내에 별로 없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상대를 찾자면 그만한 연습 파트너는 고위 기사가 되어야 하고, 대개의 고위급 기사들은 지체 높은 귀족가에서 요직을 맡아 쉽게 움직이지 않는 작자들이다.


홀가분한 느낌이 들 정도로 내팽개쳐 지는 건 사내에게 제법 해볼만한 경험이다.

줄리앙은 그리운 기분마저 들었다. 하늘에 해 진 어둠이 찾아왔고, 별들이 빛났다.

잠깐 숨이 골라진 것 같았다.

전 남작님께서 돌아가시고 제대로 숨조차 못쉬고 달려온 것 같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 지혜를 짜내어서 적과 아군을 구분해야 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남은 두 후계자를 데리고 급하게 영지를 벗어났다.

조심에 조심을, 다시 조심을 더하면서 세슈칸까지 그들을 모셨다.

긴 여정 중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그의 빠른 행동 탓도 있었고, 또 로멜리아 가를 적대하는 늑대 새끼들이 무슨 연유에선지 수작을 크게 부리지 않는 점도 있었지만.


또 줄리앙이 온갖 심려를 다 쓰고 고생하며 여행길을 계획한 이유도 분명 있었다. 집사장이 되기 아주 전에 그는 유망한 용병이었고, 그 다음엔 재능을 인정받아 격의 없는 프리랜서 기사의 시종이 되었다.

견습 기사가 되었고, 로멜리아 가에 투신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럴싸한 티가 나는 선임 급의 기사가 된다.

전 남작 님을 만났고, 오래 모셨다. 그 과정에서 기사가 아닌 집사장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두 아가씨가 태어나는 모습을 보고, 그녀들의 아버지가 그러하듯 지키고자 애를 썼다.


노구가 들뜬 숨으로 어깨 한 번 편히 풀지 못하고 오래 걸어왔다. 줄리앙은 비참한 몰골로 홀가분한 평안함을 느꼈다.


“후우.”


명치를 아주 거세게 얻어맞고, 그 반작용으로 몇 바퀴 나부낀 다음에 땅바닥에 등을 처박았지만 상처는 없었다. 기력의 효과다. MP가 상당량이 날아갔다. 그는 빈혈기마저 조금 드는 걸 느꼈다.

술사던 기사던 격전 속에서는 정신력이 생사를 가른다. 신체적인 능력과 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정신력에는 MP의 과소비로 어지럼증이 오는 일을 참는 게 반드시 포함된다.


줄리앙은 오랜만에 빈혈기를 느꼈다.


진실로 비참한 일은, 이런 탈진을 느끼지도 못한 채 끝이 나버리는 것이다.


그럴 뻔했다. 불과 며칠 전에.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세슈칸에 도착하기까지 심신 양면으로 피로가 극심했었는지. 만나야 하는 작힘 백작이 다른 모습을 보이자 해야 했던 최악의 상상을 자기도 모르게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털끝만한 경계의 사각이 생겼고, 그 틈을 아주 잘 찔렀다. 독에 당해 제대로 기력을 쓰지도 못했다. 육신마저 둔했고, 눈 앞에서 하마터면 로멜리아 가의 명맥이 끊기는 걸 볼 뻔했다.


그 상황에서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준 것이 눈 앞의 청년이다. 아니, 눈 앞은 아니지. 그의 눈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어르신?”


줄리앙이 상념에 잠겨있는 시간이 조금 되었나보다. 제냐가 다가와서 불쑥, 하늘의 일부를 가리며 거꾸로 고개를 집어 넣었다.

검은 머리칼, 콘란드 대륙에서 동북부인들이 가지는 생김새다. 인종으로는 동부와 북부 대륙의 이름을 합쳐 ‘세시앙 인’이라고 부른다. 북부 대륙을 세스타샤라고 했고, 동부 대륙을 ‘이앙’이라고 불렀다.


여러 인종들이 오가며 떠도는 이 거대한 대륙의 흐름 속에서 그다지 희귀한 꼴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낯섦 정도는 있다. 로멜리아 가에는 세시앙 인, 황인종이 없었으니까.


뚱한 눈매로 그를 내려다보는 표정이 제법 정감이 간다. 하는 짓거리가 조금 웃기기는 했다. 속내가 보이는가 싶다가도 어떤 사고방식인지 잘 읽히지 않았다. 관념이 다를 수도 있었다. 떠돌이 생활을 아주 어릴 때부터 계속 해왔는가 보지.

다만 그 떠돌이 생활 중에 익힌 전투 기술이 아주 수준급이었다. 저 정도라면 어거지라도 고위 기사와 맞상대할 만한 솜씨였다. 장기전이 된다면 필패하겠지만 아직 보이지 않은 비장의 수가 더 있다면 다시 또 모를 일이다.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 줄리앙은 입매를 비틀었다. 양 쪽 끝을 위로 올렸다. 웃었다.


갑자기 자신이 쳐 날린 노인이 바닥에서 멍을 때리다가 자신을 보고 입매를 올리자 제냐는 살짝 불안했다.

이 NPC, 맛이 간 건가.

다행히도 비련의 시나리오 내의 가상인격 시스템은 아주 정교했다. 쉽게 고장나진 않는다. 애초부터 그런 결함을 가상인격 설정에 집어넣은 게 아니라면야.


줄리앙이 말했다.


“합격이네.”

“예?”

“솜씨 좀 보자며. 그 김에 나도 다시 봤네. 합격이네.”

“어······ 예. 가, 감사합니다.”


입장이 반대가 된 것 아닌가,

하는 말은 접어두었다.

체면으로 먹고 사는 귀족가의 일원들이다. 도움을 청하는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꼬치꼬치 따져서 서열을 나눌 일은 없다. 그들 부류와 평생 적이 되려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정말로 체면 있는 귀족이라면 알아서 고마움을 느끼고 표현할 테니까. 제냐가 보기에 부적합한 인격 적성을 가진 NPC들은 아니었다. 성향도 딱히 악이나 혼돈이 섞인 것 같지도 않고.


이들이 하는 말이 장대한 사기이며, 어떤 악의 계획의 한 축을 담당한 악역들일 가능성도 있다는 게 비련의 시나리오의 가장 소름 돋는 점이었다.

거대하고 현실성 높은 세밀한 세계관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희극과 비극을 버무리고, 거기다가 지독할 정도의 배배꼬인 스토리마저 가끔 넣어두니까.

그런 시나리오에 걸려든 유저들의 하소연이 인터넷 천지에 넘쳐난다. 그리 공들여 찾지 않아도 비슷한 검색어로 정보를 보다 보면 걸리는 이야기들이다.


그런 사전 정보를 의도치 않게 입수한 바 있는 제냐는 상식적인 선에서 계속 가늠을 해보았으나··· 아무래도 이 정도로 속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머리 위에 개발진들이나 시스템 AI가 있을 수도 있겠다만. 그 정도로 속인다면 어쩔 수 없다. 넘어가야지.


제냐는 고갤 혼자 끄덕거렸다. 웃음마저 걸렸다.


“왜 웃나.”


줄리앙이 물었다.

제냐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아래로 처다보며 답했다.


“거 어르신 넘어진 폼이 웃겨서요.”

“······이제보니 싹수가 노랗군.”

“합격이라면서요?”


제냐의 말에 줄리앙이 답했고, 상체를 힘겹게 일으키면서였다.


“끄응. 그건 전투 능력의 이야기고···.”


구겨진 집사복의 소매를 털면서 일어서는 줄리앙의 반대편으로 가서 손을 잡아주었다. 노인이 일어섰다. 그가 복장을 가다듬었다. 멀리 있던 청년 중 하나가 다가왔다. 질리언, 어리고 머리가 짧은 쪽이다.


“집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네. 질리언 경. 이 친구가 손대중을 해 준 모양이야.”

“······.”


제냐는 전혀 그런 바가 없었지만, 입은 닫았다.


줄리앙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연못 근처의 아가씨들에게 웃어주었다. 늘 웃는 믿음직한 낯빛이다.

물정 모르는 두 후계자에게 보여야 할 얼굴이었으나, 그 반대에 드리워진 우울한 현황은 늘 줄리앙의 두통의 원인이었다. 다만 같은 고난이라 하더라도, 애송이 하나가 손을 보탠다면 그만큼은 나으리라.


줄리앙이 셔츠의 깃을 정돈하며 말했다.


“제냐 킴 군.”

“어, 예.”

제냐가 턱을 긁적였다.


“어때, 나는 합격인가?”


우리는, 이라고 묻지 않은 건 집사장의 자존심이었다. 속모를 모험가가 불합격이라는 대답을 했을 때 전부가 그런 소릴 들으면 마음이 상하잖겠는가.


제냐가 살짝 뜸을 들였다.

대답을 고민하는 건 아니었고, 앞으로의 사건 전개를 상상해보다가 그랬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하기를,


내일 오전 수업이 있는데 게임을 너무 빡세게 했나··· 하는 마음이었다. 일단 일정은 맞추어야 했다.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을 때 어지간하면 시스템 AI가 사건 전개를 크게 시키지는 않는다.

퀘스트에 연관된 플레이어가 부재중이라면, ‘가급적’ 상황 진행을 미루고 변수를 낮춘다.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일단은 개인에게 부여된 시나리오이며 최대의 선택자이자 주체는 유저였으나 여러 명이 동시에 진행하는 난수 속의 MMORPG(대규모 다중 접속 온라인 게임)이다 보니, 시스템도 정말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

진정한 완벽이라는 단어가 과연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AI에게 부여될 수 있는 표현인가 하는 문제도 당연히 있었고.


그런 점에서, 퀘스트 내의 NPC들과 깊은 교류를 맺고, 관계성을 나눈 뒤 상황 전개의 페이스를 조절하는 일이 필요하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서바이벌, 액션, 사냥 게임임과 동시에 가상인격 관계 시뮬레이션 게임이기도 했다.

화술과 보편적인 관계성 형성 능력에 탁월한 자가 이런 방식으로 플레이의 활로를 뚫기도 한다.


지나치게 외골수인 베테랑 플레이어들은 늘 심화된 퀘스트 진행 중에 난항을 겪고 만다.

혼자서 오롯이 플레이하기는 힘든 게임이었다. 한 명이 모든 분야에 탁월함을 갖기는 어려울 테니.

물론 가능하기는 하다. 어떤 식으로든 좌충우돌 모험을 겪는 것조차 개발진들이 염두에 둔 즐거운 플레잉, 취미 생활의 한 갈래일테니. 안정적으로 임무를 깨고 스토리를 진행시키고, 시나리오의 엔딩에 가까워질 수 있느냐 하는 건 다른 이야기가 되지만.


제냐는 고갤 끄덕거렸다.


“물론입니다. 등 뒤를 맡겼다가 칼을 맞아도 억울하지는 않겠군요. 의지도, 솜씨도 모두 확인했습니다.”

“이를 말인가.”


허허, 줄리앙은 당돌한 평가와 과감한 칭찬에 너털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두 청년은 마냥 웃지만은 못했고. 두 아가씨는, 어쨌건 잘 된 일인듯 하다며 아드리안이 웃었고 헤슈나는 아드리안이 울지 않자 일단 다행이라고 여겼다.


정원에서 한바탕 난리를 피운 그들은 망가진 땅을 평탄화하는 시늉 정도만 하다가, 호텔 건물로 다시 들어갔다.


어떻게 움직일 지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며 다시 여관에 돌아가 로그아웃을 하면 될 것 같았다. 제냐는 속으로 혼자 김서원의 일정을 가늠했다.


*

griffin-wooldridge-aFMsnhkZoJg-unsplash (1).jpg


작가의말

슬슬 속도를 내면 좋겠군요.

전개보다는...

글쓰는 속도를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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