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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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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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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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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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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쪽

35. 제이미 숄더

DUMMY

절벽 위에 있는 도적들은 자신들을 감싸고 있던 투명화의 망토가 사라졌음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임무를 속행하던 놈들이 절반쯤 되었다. 나머지 절반은 절벽 너머로 도망을 쳤다. 제냐나 줄리앙이 봤을 때, 육안으로는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각도로 넘어가는 일이었다.


퉁,


하고 그럼에도 제냐는 아무렇지 않게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하늘 위를 장식하는 폭죽처럼 철시가 높이 올랐다가, 그대로 최고점을 찍은 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곡사, 였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제냐에게 있는 궁술 스킬의 보정 덕분이었고 또 천공의 눈 같은 감지계 스킬의 도움 덕이다.


곡사의 궤적마저 그의 시야 내에 붉은 점선으로 표현이 되었고, 절벽으로 가려져 있는 최종 궤적의 도착지까지 천공의 눈이 보여주는 움직이는 카메라의 화면으로 잡아낼 수 있었다.

상대가 빠르게 움직인다지만 그것까지 계산해 조금 더 행동 방향의 앞지점을 목표하고 쏘아냈다.


기력술의 묘리를 담아 날아가는 철시를 쏘는 일은 연사가 얼마든지 가능했다. 연사, 속사 역시 궁술의 경지가 높아지면서 가능한 기술이었으나 제냐도 어설프게나마 발휘할 수 있었다. 퉁, 퉁 퉁 하고 현악기의 음처럼 연속적인 소리를 내면서 복합궁의 시위가 흔들려댔다. 현악기와 달리 철로 만들어진 묵직한 화살을 통째로 날려 올려보낸다는 점이 흉악스러웠다.

도망가는 강도들에게는 더욱 더 무서운 일일 테다.


곡사포가 그러하듯 지면에 날아 꽂히는 철시의 촉이 도망가는 강도들의 뒷덜미를 뚫었다.


그대로 연수를 관통한 철시가 참수도와 비슷한 위력으로 강도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순식간에 도망치던 이들의 절반이 다시 게임 오버를 당했다. NPC로서는 시나리오의 하차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

AI가 만들어낸 연극 배우들의 퇴장이었다.


의지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응전하던 작자들은 줄리앙과 헤슈나의 화살로도 금세 처리가 가능했다. 협곡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길었던 질주가 끝나가고, 흑마는 지친 숨을 토해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질리언과 페이브, 그리고 아드리안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부석에 앉은 질리언은 최선을 다해서 마차의 방향을 유도하고 날아드는 화살을 몇 대 정도 쳐댔으나 조금 더 적극적인 개입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씨발, 작센 단장이 죽었어. 튀어 이 새끼들아!”

“으아악!”

“튄다고 살 것 같냐고! 세슈칸 영주가 우릴 죽일 거야!”


얼마 남지 않은 인간들을 과녁 삼아 화살을 쏴날리면서, 제냐와 줄리앙의 귓전에 들리는 강도들의 말소리가 있었다.

제냐는 줄리앙을 처다보지도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을 알 것 같았다. 제 입으로 작힘 백작의 직위 명을 꺼낸 놈은 살려둔다. 제냐가 퉁, 하고 한 발을 더 날려 강도 하나를 게임 오버 시켰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마차 외벽을 퍽, 말아쥔 주먹의 하단으로 쳤다. 소리가 울리며 객실 내부의 사람들이 기척을 느꼈다.

제냐가 말했다.


“저 놈 잡으러 갑니다, 줄리앙!”

“여기는 맡기게.”


제냐는 절벽을 가늠했다. 그리고, 화살을 잠시 내려놓고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협곡의 종반부를 다와가는 마차의 앞에서 그는 뒤를 돌아보는 각도로 강도들을 노려야 했다.


제냐가 뻗는 두 손 앞에 거친 전류가 나타나 제 몸을 뒤틀어댔다. 푸른 번개가 앞에 모인다. 썬더 볼트를 일반적으로 발동하는 데 드는 MP는 300정도이다. 파이어 볼이 그러했듯, 이 역시 얼마든지 MP를 과량 투입해서 폭탄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본인의 의지력과 초상술사로서의 노하우, 해당하는 원소 계열에 대한 적응도와 적합도 등이 필요한 일이기는 했지만 제냐는 일단 시행했다.


번개는 화염과 닿은 구석이 있었다. 원소를 잘게 분해해서 생각해보면, 결국 뇌전도 열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잘 탈 것이 있다면, 산소가 주어진다면 번개술사들은 얼마든지 불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런 상상력은 곧 의지력에 대한 보정이 되기도 한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초AI가 관할하고 주관하는 시스템이었다. 그 내부에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플레이어들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게임 내로 들어와서 어떤 융합 반응을 일으킬 지 다 알지 못했다. 개발진을 비롯한 게임 사의 직원들조차 말이다.


모든 것을 게임사의 전신이 되는, 현재 운영되는 태Tae보다 규모가 작은 핵심 인원들이 관측은 하고 있었다. 그들이 발명해낸 초 인공지능, ‘만물박사’는 시간이 지나고 게임 내에 많은 데이터를 얻어내면서 계속해서 발전해나가고 있다.


이전에 닿지 못했던 한계 너머의 기능을 향해서 게임과 그 주관자는 나아간다. 결국 결론적으로, ‘태Tae'의 목적은 인류 과학사의 발전이었고, 그로 인한 효용과 혜택의 증가였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최고의 게임으로서 지구촌 수많은 사람들의 취미 생활이 되었고,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데이터 군을 형성하며 만물박사에게 지식을 제공했다.


아무리 게임을 정교하게 만들더라도 어딘지 인위적인 이음새나 디테일이 느껴져서, 현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이 가상현실을 즐기는 이들의 공통적인 평이었지만 비련의 시나리오는 그런 한계에서 가장 많이 벗어난 게임이며 프로그램이다.

아무리 디지털 단위를 세밀하게 깎아도 초확대를 해보면 아날로그의 곡선을 표현할 수 없고 직각으로 꺾이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그 한계 지점을 향해서 비련의 시나리오는 나아간다. 그것을 즐기고 있는 제냐는 그런 한 부분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초상 스킬에 있어서 공략본에도 잘 나와 있지 않은 다양하며 세밀한 감각들은 실제로 사용자가 초능력을 가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 초능력이 마치 실제 자연적 지구에 있는 것처럼, 절묘한 논리와 합치성, 분야의 공식을 가지며 놀랍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하나의 비유처럼도 보이는 그 절묘함이 플레이어들을 매료시킨다.


새로운 초상 스킬을 익히고 그 질감을 느끼듯 스킬을 연구하며 깊이 있는 실력을 쌓아가는 과정은 그런 즐거움이었다.

고작 게임 시뮬레이션 내부의 일이었으나, 현실에서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는 장인들의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제냐는 제법 즐거웠다.


파지직, 하고 불꽃이 튀듯 전류의 형상화된 연출이 여기저기로 튀어나가며 둥근 모습을 만들어냈다. 양 손바닥 앞, 파이어 볼이 생기듯한 모양이다.


최초에 둥글었던 그것이 점차 가느다랗게 변해갔다. 썬더 ’볼트‘가 아니라 ’스피어‘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모습으로까지 변화한다.

작은 단창이 아닐까 싶게 변한 썬더 볼트다. 제냐의 팔꿈치로부터 손가락 마디 끝까지, 혹은 그보다 조금 더 긴 길이였다. 두께감은 일반적인 화살보다 훨씬 두꺼웠다. 타원형이라고 불러야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곡선형의 투사체의 겉면에 일그러지며 나아가는 직선적 움직임이 번쩍거렸다. 밤하늘에 내려치는 번개의 형상처럼.

푸른빛과 하얀빛이 섞여서 명멸하는 모습이 마치 닿는 모든 것을 모조리 소멸시킬 것 같은 권능의 가시화된 형체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그만큼 고도의 초상 스킬이거나, 다량의 MP가 투입된 물건은 아니었고, 분위기는 그러했으나 그보다는 훨씬 못미치는 위력이다.


제냐는 협곡을 지나면서 몇 개의 물약병을 땅바닥에 버렸다. 아마 며칠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게임 내에서는.


마지막, 곧 지금의 썬더 볼트를 형성하기 전에 그의 MP량은 약 3,800정도의 총량에서 3,000정도를 채우고 있었고, 지금의 발동으로 벌써 1,000 이상이 날아갔고, 계속해서 소모되고 있다.


제냐는 의지력이 아주 강한 편이었다. 최종적으로 1,300정도의 MP가 스킬 한 발에 담겼다.


여기저기로 튀어나갈 듯 계속해서 운동하는 썬더 볼트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MP를 과용한다는 건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지휘력 이상의 군사를 다루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하나 명령을 듣지 않는 놈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지휘관의 명령과 반대로 움직이거나 오작동하는 부분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런 폐해를 감안하고서, 대략적인 효과와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면 급할 때 구명기로 써먹을 수 있기도 하다.

방향성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면 막대한 양을 발휘한 뒤 근접 거리에서 터뜨려버리는 것도 좋은 공격법이기도 하고.


제냐는 자신의 MP의 삼분지 일 정도를 다루면서 어느 정도 형식화된 결과를 도출해내고 있으니 아주 준수한 명 지휘관이라 할 수 있었다. 썬더 볼트의 속도, 파괴력, 정확성은 조금 떨어질 지언정 원거리 공격으로서 충분히 기능하고 있었으니.


어느새 뭉툭하게 변한 썬더 볼트가 겨누어졌다.


제냐의 시선에서 보이는 붉은 점선의 궤적은 정확하게 절벽 한 귀퉁이를 조준했다.

사람을 맞추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상대는 어수선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거리가 멀었으니까. 이 정도로 난폭한 운용을 하면서 정밀 저격은 농담이거나 단순한 불가능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자리를 맞추어서,


겨누고 제냐는 자신이 앉은 마부석에서 벗어났다.


거칠게 달려대는 마차의 앞자리에서 가볍게 툭, 발끝으로 뛰니 그가 허공으로 길게 떠올랐다가 바닥에 닿을 때 즈음이 되었다. 그 과정에 제냐는 이미 썬더 볼트를 출발시켰다.


공기를 태우고 찢는 듯이 흉폭한 소리를 내고 썬더 스피어에 가까운 투사체가 날았고, 절벽 위에 선 채 석궁을 겨누고 있는 어떤 털복숭이 산적의 아래 자리를 향해 간다.


그 속도는 산적이 쏘아대는 석궁의 화살보다 훨씬 빨랐다. 썬더 볼트답지 않게 비교적 깔끔한 직선 궤적을 그리면서 번개의 창끝이 돌벽에 닿는다.


쾅!


하고 터져나갔고,


*


“으아아아아아아!”


아무런 초상 스킬도, 이렇다 할 재주도 없는 강도 하나, ’제이미 숄더‘라는 이름의 41세 남성은 비명을 질렀다.


석궁의 끄트머리를 협곡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 마차의 뒤꽁무니에 향한 뒤 방아쇠를 당긴 찰나에, 변화가 생겼던 탓이다.

그가 노려보고 있던 마차 쪽에서 빛줄기 하나가 날아들더니 그가 서 있는 절벽, 그 낭떠러지 아래 바위를 때렸다.


쾅! 하는 귀가 먹먹해지는 폭음이 들렸고, 그는 보지 못했지만 바윗덩이에 충돌한 번개가 터져나가면서 돌을 부수어댔다.

번개가 돌에 맞는다고 쪼개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광경은 아니었지만, 번개의 속성과 그것을 연출한 형태를 가졌을 뿐이지 본질은 고농도로 압축된 MP체였다.


콘란드 대륙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에너지는 폭탄 그 이상의 파괴력으로 얼마든지 전환될 수 있었고, 1,000P 이상이 함유된 푸른 창은 이미 대포와 비슷한 물건이었다.


그가 딛고 서 있는 지면이 출렁거렸다. 땅이 출렁거렸다? 라는 문장에 떠올리는 스스로도 의문을 품을 때, 절벽의 말단이 그대로 부서져 떨어진다.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사격을 하고 있던 제이미 역시 그 충격과 낙하 범위에 포함되어 있다.

산사태에 휩쓸리는 등산객처럼 제이미는 자신의 발밑이 그대로 부서져 나가면서 절벽 아래로 미끄러졌다.


“으아아아아악!”


아까부터 질러대던 비명이 더욱 커졌고, 목이 온통 쉬도록 소리를 냈다. 아무리 내도 모자라다. 얼핏 보아도 수십 미터 이상의, 아득한 낭떠러지가 그를 반긴다. 그의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처절한 절규도 차라리 가벼운 것이었다.


흑인, 붉은 머리칼을 더벅머리로 기르고 누더기나 비슷한 옷을 입고 있던 중년의 사내 제이미는 토사물들과 함께 균형을 잃고 곧 빙글빙글, 허공에서 돌며 자유 낙하를 시작했다.

절벽의 일각 속에 섞여 떨어지는 와중에 그의 몸을 여러가지 잔해물들이 긁고 치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몸에 상처가 났으나 가벼운 생채기 수준이었다. 저 지면에 닿은 뒤에 얻게 될 종말에 비교한다면 그렇다.


그 때, 아래에서 달리는 푸른 그림자가 있었다. ’보법‘은 갈수록 효과를 더해갔다. 기형적인 움직임을 보정하는 보법 스킬은 제냐의 움직임이 초현실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다.

숲에서의 입체 기동처럼, 제냐는 쿵, 쿵 거리면서 그 발을 절벽의 가파른 벽면에 찍어댔다. 양 손과 양 발을 이용해서 거미처럼, 개미처럼, 뭐 그런 종류의 동물들처럼 오르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숲에서 온갖 괴수 무리들을 상대하며 얻어낸 입체 기동은 제냐에게 새로운 시각을 부여했다. 숲이 아닌 지형에서도 충분히 발휘되는 기능으로 그를 절벽 위쪽으로 인도한다.

마치 클라이밍 운동장에 온 것처럼, 그가 짚어야 하는 방향과 경로를 정확하게 그려내주고, 제냐는 그 그림을 따라 손이나 발을 짚어가면 되는 것이다.


거기다 일반적인 장정의 5, 6배에 달하는 근력과 또 순발력 따위가 합쳐지니 거의 나는 것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속도감이 나왔다.


제냐 스스로의 시야는 어마어마하게 흔들리고 있다. 고레벨로 갈수록 움직임은 마치 제트기의 조종사가 느끼는 것처럼 빠르게 변화한다. 그 감각을 잡아채는 것이 플레이어들이 적응해야 할 가장 큰 숙제였다.


초인적인 움직임에 대한 감각적 보정은 ‘순발력’과 ‘집중력’에 영향을 받는다. 제냐는 스텟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편이었으므로 육체 활동에 감각이 쫓아가지 못하는 일은 아직 없었다.

스텟이 받쳐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어지럼증을 느끼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그건 개인의 체질에 관한 문제였으므로, 보통 그런 자들은 스텟을 높이고 빠른 속도의 전투 플레이를 즐기지 않는다.

전투 직종Class를 갖지 않아도 얼마든지 즐길 거리가 많은 시나리오 온라인 내부였으므로, 그런 이들은 조금 더 평화로운 스토리에 집중하며 다양한 시나리오를 구경한다.


제냐는 스스로 그런 스릴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절벽 사이를 헤집듯이 손을 박아넣고 올라가는 감각이 참으로 즐거웠다.

어린 시절 읽은 동화 속의 주인공, 혹은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 된 것 같은 간접 체험을 이토록 시켜주니 그에게 있어서 즐거운 취미이자 고마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조잡한 수준의 체현이 아니라 거의 완벽한 현실적 광경과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어떤 영화도 이렇게까지 입체적이지는 못하리라.


영화 산업은 입체적인 비쥬얼과 사운드, 약간의 진동 따위로 발전하고 있었다. 완벽한 초현실적 오감 구현으로 가다 보면 아직은 기술력의 부족으로 도리어 정밀성이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기에, 차라리 몇 가지로 감각을 제한한 뒤 하나하나의 퀄리티를 높이는 쪽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화 산업의 최정상에 있는 작업물이라 할 지라도 비련의 시나리오에 들어와서 느끼는 자연 환경에 비한다면 한 두 수 아래인 것이 사실이다. 거기다가 생각하는대로 움직일 수 있고, 제한된 감각이 아닌 완벽한 오감 체현이 가능하다면 비련의 시나리오를 영화 대신 접속해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컨텐츠의 상위 호환 격인 이 게임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억 단위의 사용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냐, 현실에서 김서원은 그다지 얼리어답터도 아니었고, 새로운 기술이나 유행에 둔감한 편이었으므로 관심이 없다 한참 나중에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의 시야에 잡히는 화면이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제냐의 눈으로 바라보는 바로 앞의 장면들이다. 또 하나는 절벽 전체를 조감하는 거대한 3D 맵이었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이 툭 튀어나온 것처럼 붉게 물들어서 빛나고 있다.

그 지점이 바로 제냐가 쫓고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작힘 백작의 직위를 이야기했던 강도단의 어느 한 사내를 쫓는 추적점이었다.


고양이가 재빠르게 장애물을 넘는 것과 같은 동작으로 제냐는 몇 번 눈을 깜빡이거나 호흡을 할 정도의 시간만에 절벽을 올랐고, 그건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제이미 숄더의 낙하 과정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이미 숄더의 움직임은 제냐의 레이더에 정확하게 걸리고 있었다. 애초에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쏘아낸 썬더 볼트다. 청명한 하늘. 바윗덩위와 흙더미, 그 비산하는 부유물들 속에서 함께 쓰레기처럼 자유낙하를 하고 있는 흑인 사내는 정신이 점차 아득해져갔다.


차라리 정신을 잃는다면 덜 고통스러우리라. NPC의 사고 체계를 초AI, 만물박사가 아주 디테일하게 구현해냈다.

제이미는 침통한 안색으로, 어딘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해탈한 눈빛이 되어서 거꾸로 뒤집혀 푸른 하늘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아, 새가 난다······.’


강도질로 제 목숨을 연명했던 어느 흉악한 중년 사내의 마지막 감상, 이 될 뻔한 단상이었다.


제이미는 자신의 몸을 강하게 잡아끄는 충격을 느꼈다. 억, 하고 정신이 조금 들었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이미 쉬어버린 목이다. 건장한 흑인 사내의 몸집이 누군가의 손아귀에 걸려 흔들렸다.


공중에 나타난 손아귀의 주인은 제냐의 것이었다. 그는 절벽 위로 순식간에 타고 올라가, 떨어지는 제이미 숄더를 발견했다. 절벽의 벽면에 붙어 있던 제냐가 온 힘을 발휘해 뛰었고, 벽면에 균열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점프는 그의 몸을 허공을 밀어냈다.


떨어지는 제이미 숄더에게 간신히, 그러나 정확히 닿았다. ‘순발력’ 수치는 몸의 말단의 근력에 관여한다. ‘소근육’이라고 불리는 곳들 중 일부이다. 동작의 디테일을 잡게끔 도와주고, 정교한 작업에 절대적으로 관여하는 스텟이다.


제대로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무언가를 끌어 잡아당길 때, 이 순발력 수치야말로 큰 도움이 된다. 근력은 전체적인 근육의 향상을 돕지만 비율적으로 볼 때 크기가 큰 근육들, 신체 전반적인 영향력에 더 큰 보정을 더한다.

제냐의 뻗어낸 오른 손에 떨어지고 있는 제이미 숄더의 한 쪽 어깨, 가죽 보호구의 틈이 걸렸다. 손아귀로 그것을 강하게 붙든 제냐는 온 힘을 다해서 끌어당겼고, 공중에서 힘을 쓰자 두 명이 가까워졌다.


제냐는 그 스스로의 HP도 일 만에 가까워지고 있는 초인적인 내구성의 사내였지만 그가 들듯이 잡은 흑인은 아마 평범한 인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와 같이 기사급의 능력을 가진 NPC들은 아무래도 흔하지 않다.

이런 야지에서 활동을 하는 낭인, 강도 따위가 그런 신체 능력을 갖고 있다면 명백한 밸런스 붕괴일 것이다.

기사급의 인원들로 구성된 떠돌이 강도단이라니. 국가적 규모의 토벌군이 와야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을 골칫덩이이리라.


괘씸한 놈이었지만 일단은 살려야 한다. 제냐는 공중에서 재주넘기를 하듯 제 몸을 홱 잡아 돌렸다. 그 과정에서 오른 손에 걸려 있는 제이미의 몸 또한 움직였고.

알알이 흩어지는 모래, 흙, 바윗덩이 사이에서 부리고 있는 묘기였다.


제냐가 허공에서 돌면서 제이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거구의 중년 사내를 바짝 끌어당겨 두 손으로 잡는다. 그대로 자유 낙하.


제냐는 별다른 부유 스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전에 그가 피스 시에서 경험했던 어느 고양이 변신술사같은 스킬이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더 쉬웠으리라.

그러나 스킬이 없다고 꼭 못 해내는 법은 없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그런 게임이다. 자신의 손과 같은 MP가 있었다. 그건 비가시적이지만 찰흙과 같아서 상상력만 받쳐준다면 온갖 다양한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며 동시에 물질이었다.


제냐는 떨어지는 공중 한 가운데서 MP를 쏟아냈다. 절반 가까이 닳은 MP때문에 약간의 빈혈기가 찾아올 것도 같지만, 지금 그런 것에 집중력을 잃고 포기했다간 그대로 게임 오버이리라. 그가 갖고 있는 내구성이 초인적이라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런 높이에서 꼴아 박아도 좋을 정도는 아니었다.

운 좋으면 살아서, 회복 스킬의 혜택을 누릴 정도가 될 뿐이다. 즉사가 아닌 중상 상태로 말이다.


‘바람’ 속성은 아직 제냐가 다루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파이어 볼과 썬더 볼트, 그 무엇도 아닌 것을 자신의 발 밑에 형성했다. 오른 손으로 꽉 잡은 제이미를 두고 왼 손을 늘어뜨려 아래로 향하게 한 뒤였다.


왼 손바닥 아래로 붉고 푸른 기운이 몰려들었다. MP다. 아직 어떤 속성을 정확하게 갖추기 전이다. 사실은 파이어 볼의 형성 과정에 가깝긴 하지만, 일단 그가 발휘 가능한 정신력 에너지를 다 쏟아넣는다.

불꽃의 모습으로 바꾸는 연출은 없다. 번개와 같은 모습도 없이 그저 둥그런 에너지체가 생겨났다. 열량, 파괴력, 반발력을 최대치로 높인다.


제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한 가지였다. 초상 스킬은 직접적으로 사용자에게 피해를 미치지 않는다. 그건 1차적인 일이었고, 거대한 파이어 볼이 폭발을 일으킨 뒤 그 잔여물이 쏟아지는 것에선 얼마든지 피해를 받기는 했지만.

일단 초상 스킬은 설계 자체가 사용자에게 데미지를 주는 일을 피하도록 되어 있다. 온갖 스킬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저항력과 방호력까지 계산해 자신의 MP나 내구성을 깎아먹어야 한다면 지나치게 게임이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리라.


상대의 속성까지만 생각하고 공략을 하도록 설계가 된 배려였다.


물론 화염 속성의 초상 스킬을 다루는 화염 술사가 불꽃 내성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기는 했다. 말했듯, 최초의 데미지는 입지 않더라도 그로 인해서 발생한 ‘자연적’인 변화는 충분히 사용자에게도 충격을 줄 수 있었으니까.

자신이 발 딛은 전장 전체를 불길로 뒤덮은 뒤 그 불길이 초상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불길로 바뀌기 시작하는 지점부터 술사 본인에게도 데미지가 들어가기 시작한다.


원소술을 익히는 술사들은 초반에 다양한 액티브 스킬, 발동형 공격 스킬을 익히며 육성을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해당 분야의 패시브 스킬들을 많이 얻게 된다. 그런 패시브 스킬들 중에 해당하는 원소의 저항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한 가지만을 깊이 파고 드는 자들은 그렇게 된다. 그러나 단발적인 사용, 분야에 얕게 파고드는 이들에게까지 모두 자신의 스킬로 인한 데미지라는 제약을 줘버리면 게임 플레이의 다양성 파생에 지나친 저해점이 되리라.


제냐는 그런 점을 노리고 있다. 그는 아직 초상술사로서는 아주 기초적인 단계로, 파이어 볼2를 익혔지만 별다른 패시브 스킬도 없었다. 그런 단계의 그라도 단순한 발출은 할 수 있었다.

그 왜, 파이어 볼을 익히기 위해서 수업을 듣던 퀘스트 과정 중에 어느 플레이어 하나가 급발진을 해서 파이어 볼을 형성했던 일이 있지 않은가.


당시의 스킬을 알려주던 교수직 NPC는, 그렇게 MP가 부족하고 실력이 없는 경우에는 차라리 화구를 만들어낸 뒤 직접 적의 몸에 갖다 박는 식이 유용하리라고 설명했다.

뭐 비슷한 일이었다. 제냐가 지금 하는 일은.


제이미와 제냐의 수직 낙하 중, 그 아래에 만들어지는 거대한 빛의 공은 무식한 폭발력을 가진 무언가였다. 방향성만큼은 제대로 제시를 했다. 아래를 향하게끔 말이다. 다만 그로 인한 반발력은 술자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엄밀한 계산보다는 뚜렷한 상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원래 스킬은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기력술의 요체 역시 비슷하다.

시나리오 온라인에 접속한 수학자들은 가끔 시스템 AI가 관할하는 다양한 수치들을 계산한 뒤 일일이 모든 요소를 정확하게 기입하려고 한다.

물론 스킬 시스템의 메커니즘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연구법이었지만 대개의 스킬러들, 술사들은 그렇게 쓰지 않는다.


결과에 대한 명확한 이미지가 있다면 비련의 시나리오는 그에 맞게끔 발동하는 편이었다. 보편적인 상상력이라는 게 있었다. ‘파이어 볼’을 만들면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이미지와 물리적 현상들은 그 스킬 하나에 이미 다 들어가 있는 정보였다. 처음부터 그리 애를 쓰지 않아도 좋았다.


하얀빛의 광구는 어느새 일렁거리며 만들어져 제냐의 상반신 몸집보다 커져가고 있었다. 고체보다는 유체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면서 약동하는 에너지체다.


제이미는 반쯤 정신이 날아간 상태였다. 자신의 발밑이 부서지면서 갑자기 협곡 밑바닥으로 끝없는 추락을 시작할 때 이미 그런 꼴이었다. 칼밥으로 먹고 황야를 버티며 살아온 중년의 강도라기엔 심약한 정신머리였지만 어쩔 수 없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이라고 느꼈기에, 그로서는.


콘란드 대륙에서 다양한 기현상이 자주 발생하지만 초상 스킬과 관련이 없는 평범한 NPC들은 그에 대한 내성이 없거나 적다.

현실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초능력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셈이었지만, 그래도 마냥 흔한 편은 아닌 것이다. ‘있다’와 ‘없다’의 차이였고 그것이 가장 큰 간극이었으나 그럼에도.


실성을 해서 동공이 풀리고 입을 조금 벌리고 있는 제이미를 데리고, 제냐는 속으로 숫자를 센다.

그가 느끼고 있는 조감도에 자신의 위치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자신이 머무르는 전체 환경을 한 번에 보여주는 기력 감지 스킬, 탐지계 스킬들은 전투에 있어서 압도적인 이점을 준다.


객관적으로 거리를 잴 때 그보다 더 정확할 수 없는 것이다. 제냐는 자신의 스킬의 위력과, 지면에 충돌하는 시기를 가늠하면서 초를 재듯 속으로 타이밍을 잡았다.


적당한 시점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그 몸으로 허공에서 그들을 때리는 바윗덩이 따위를 막으면서, 최후의 순간에 제냐는 몸을 빙글 반회전 시키며 제이미를 위로 끌어올렸다. 자신이 아래를 바라보게끔, 그 아래서 터져나가는 충격파를 제 몸으로 감당하게끔 말이다.

몸은 위를 바라본 채, 고개와 왼 팔만 아래로 향한다. 그 상황에서 훅, 하고 에너지체를 쏘아냈다.


파이어 볼을 닮았고, 썬더 볼트를 발동시키는 것 그 이상의 에너지가 들어간 광구가 아래로 날았다. 묵직하게 생긴 생김새만큼이나 천천히 날아 지면에 닿는다. 그들이 낙하하는 속도보다는 조금 더 빨랐고,


빛의 광구는 협곡의 바닥에 닿으면서 출렁거렸다.


제냐의 몸집만한 거대한 공이 반쯤 사라지며 퍼졌고, 협곡의 바닥을 집어 삼킬듯 굴더니 곧이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과광. 귀가 먹먹해져서 중간부터는 제대로 듣기도 어려울만한 굉음이다. 흙바닥 그 깊은 곳에 있던 돌덩이나 토사가 거꾸로 튀어나왔고 흩어진다. 그와 함께 폭발력이 바람을 형성했다.


제냐는 나머지 모든 MP를 쥐어 짜서, 간신히 탈진을 면할 만큼만 남겨두고 다시금 광구를 만들고 있다. 폭발의 순간에는 제이미를 한 번 끌어안듯 자신의 품에 구겨넣어 충격으로부터 보호했다.


땅바닥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 근처에 있던 절벽 위쪽의 돌덩이나 부스러기가 많이 사라졌다.

공중에서 참 다양한 짓거리를 한다, 고 제냐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물리 계열 스텟과 집중력이 높아져서 짧은 순간을 나누어 느끼고 정밀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아까처럼 빛의 에너지체가 생겨났다.


귀로는 허공을 가르고 있다는 증거처럼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맞으면서, 제냐는 집중한다. 그리고 그 광구가 아까의 그것보다는 못미치는 크기로 커졌을 때, 더 이상 키울수도 없이 땅바닥에 거의 가까워질 무렵.

그는 다시 한 번 빛의 구를 터뜨렸고, 조금 더 직접적인 반탄력이 생겨났다. 최후의 MP로 자신의 기력술을 사용해 자신의 몸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제이미는 자신의 몸으로 보호했다.


쾅!


폭발력 있는 폭탄이 제 몸을 산화시키듯 굉음이 울렸고, 제냐와 제이미는 그대로 터져나가는 폭발의 충격을 힘입어 낙하의 반대 방향으로 밀려나갔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얼마쯤 더 튕겨나가, 대각선 방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고는 흙바닥에 퉁겨 나뒹굴었다.


“으어어어어······.”


실성한 듯 흰소리를 내고 있는 흑인 사내다. 제냐는 천운으로 강도 새끼가 살아남았다는 걸 인지했다.

지독한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푸른 물약을 빨리 마셔야 한다. 고갈 상태에서는 몇 개를 들이켜도 모자라다. HP는 0이 되거나 그에 가까이 되었을 때 육체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꼴이 되고, MP가 그렇게 될 때는 잠시 전투 불능에 가까운 혼란 상태가 찾아온다.


육체 계열 스킬에 통증과 손상에 내성을 부여하는 스킬이 있듯 정신 계열 패시브 스킬에는 그런 종류도 있다. 현실에서 느끼는 현기증과는 조금 이질감이 있었고, 사용자의 정신을 보호하는 시스템이 가동 중이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게임 내 제냐의 신체는 잠시 그 자리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으어어어···.”


입이 벌려지며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제이미의 것은 아니었다. 제냐의 소리였다.


그는 바닥에 누운 채 잠시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간신히 인벤토리를 열어 푸른 물약 하나를 꺼내들었다.


*


“말해보게.”


“······.”


줄리앙이 낮게 말했다.


노인은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경험 중에는 포로를 고문하는 기억 역시 들어가 있었다. 험난한 야만의 시대. 중부 대륙의 전장터를 전전했던 줄리앙은 백전 연마의 기사였다. 지금은 집사장의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로멜리아 가의 집사장은 원래 선임 기사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단장 급의 기사가 부재할 때 집사장은 가문의 기사단을 지휘할 수 있는 실력과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런 노인의 앞에 무릎 꿇은 채 앉은 자가 있었다.


제이미 숄더.


거구를 자랑하는 흑인, 붉은 머리의 사내였다. 자신의 몸집처럼 선이 굵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뺨을 가로지르는 붉은 흉터가 있다. 검은 피부에서도 두드러지는 물건이다.

그는 초췌한 꼴로, 반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아직도 하고 있었다.


절벽 위에서 단장의 명령을 따라 마차를 쏘아대던 것이 아까의 일 같았는데, 어느새 자신이 여기에 잡혀 와 있다는 말인가.

상황의 흐름이 그가 이해하기에 지나치게 빨랐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눈 앞의 노인의 기세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말을 머뭇거리다가는 사지 중 몇 개가 날아갈 지도 몰랐다.


툭, 툭.


하고 줄리앙 리스트는 실제로 자신의 애검을 들고 있었다. 칼집에 넣은 것을 한 손으로 가볍게 쥐어 들고, 다른 손바닥 위를 검면으로 두드렸다. 칼집에 담겨 한 손바닥에 조금 버겁게 잡히는 검이 위협적이다.

여차하면 집에서 나온 쇠붙이의 잘 갈아진 날이 제이미의 목을 상대로 날카롭기를 시험할 지도 몰랐다.


제이미는 정신 없는 와중에 자신의 처지는 비교적 분명하게 인식했다. 왜냐면, 그가 그토록 죽이려고 애를 쓰던 작자들이었으니까.

별다른 사적인 원한 관계는 아니었고 또 사연도 없었지만 그는 단장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부하 중 하나였다.


별다른 의리나 충심이 있다기보다, 그것 외에는 딱히 살아갈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은 단세포적인 정신 상태 때문이었다.

그는 칼밥을 먹고 살았다.


그렇게 말하면 어떤 낭인의 낭만 넘치는 삶이 연상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조금 더 지저분하고 추악하게 살았다.

길거리에서 죄 없는 양민들을 상대로 노략질을 했고, 그렇게 얻은 양식과 물건들을 다시 도시의 더러운 상인들에게 팔아서 이득을 챙겼으니까.


산슈카 지방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떨치는 ‘작센 일당’의 일원인 그는 창술에 일가견이 있는 놈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도시 바깥에서 살아온 그가 생존을 위해서 익힌 기술이다. 온갖 사람들의 목덜미를 꿰뚫으면서, 자연스럽게 익혀온 하류 창술이었다.


대개의 무기술은 ‘하류’가 붙는 이름이 많았다. 그건 일반적인 무기술을, 별다른 배움이나 가르침 없이 실전에서 조악하게 익히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다른 의미로는 실전적이라는 뜻도 되었고, 하류가 붙은 스킬 역시 마스터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면 훌륭한 능력이 된다.


보통 가야 할 길이 먼 스킬들은 단발적으로 끝나지 않고 그 뒤에 숫자가 붙어 여러 개의 스킬을 순차적으로 익혀야 했다.

작센은 아직 하류 창술2도 익히지 못했고, 1에서 6, 7단계 즈음을 머물고 있었다. 로멜리아 가의 검술을 익힌 페이브나 질리언과 언뜻 비슷해보이는 수치였으나 그들이 익히는 검류가 훨씬 고급스러운 종류였다.


정통파에, 단순히 형식적인 검술이라는 의미에서 ‘고급’이 아니라 정말로 더 어렵고 강력한 기술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페이브나 질리언 역시 자기들만의 실전적 검술, ‘기본 검술’ 따위를 먼저 익혔고, 그 스킬의 8단계 이상을 지나면서 다음 수준인 로멜리아 가 검술을 익혀온 전적이 있었다.


줄리앙도 그간 익혀온 무기술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켜켜이 쌓인 스킬들의 순차적인 패시브 효과들은 그대로 전투력으로 환원된다.

이 세계에서 노인은 얕잡아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스테미나나 체력의 문제는 특수한 내력이 없다면 동급의 젊은이보다 조금 낮을지 몰라도 그 이상의 요령과 기술이 있었다.

속도나 순간적인 근력에 있어서 전혀 부족하지도 않았고.


눈 한 번 잘못 깜빡이면 목이 날아가고 마는 것이 오랜 세월 ‘스킬’을 연마해 온 NPC들이었다.

비슷한 논리로,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노인이 들어와 게임을 즐기는 경우에 얕잡아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비련의 시나리오에서 얻어낸 것들은 대개 현실에서는 써먹을 수 없다. 어떤 경험이나 신경 반응의 반복으로 익혀낸 연습같은 건 조금 전해질 지 모르겠지만. 또 지식이나 정보도 갖고 나갈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현실에 유용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변환 과정이 필요하고, 그 중간에 많은 손실이 일어난다.


게임 내에서 어떤 공부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이 그대로 쓸모가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다만 공부를 할 때 써먹는 집중력이나, 게임 내의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집대성 되어 있는 그 논리 체계를 이해하는 법, 이해력 따위는 밖으로 나가 학문을 팔 때 좋은 연습이 되리라.


반면 현실에서 어떤 기술을 익힌 장인들은, 게임 내에서 그 동작을 그대로 수행하는 데 남들보다 쉬운 점이 있었다.

본인의 감각으로 움직이는 비련의 시나리오 내 캐릭터들은 현실의 신경 반응을 그대로 이식한 듯 자연스럽게 동작한다.


거의 현실의 육체와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질만큼 딜레이 없는, 초가상현실 내부에서 솜씨 좋은 대장장이는 남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대장장이 직종으로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무언가 익혀 온 이들은 비련의 시나리오에서 추가적인 경험치를 갖고 시작하게 마련이었고, 그런 경험은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건장한 육체 능력을 갖고 시작해서 초인적인 지점까지 발전해 나가기에, 거기에 경험과 지식이라는 요인을 더하는 노인들이 만만치 않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게임 세상에 그토록 진지하게 집중하며 플레이를 하는 노인이 그리 많을까 싶겠지만, 예상 외로 비련의 시나리오는 별다른 부작용 없이 현실적인 플레이가 가능한 공간이었으므로 젊은이들만큼, 혹은 그보다 더 집중하는 노인들이 간혹 있었다.


현실에서 전쟁을 경험했던 어떤 명사수는 이곳에 와서 원거리 공격 직종을 가지고서 그대로 자신의 능력을 구현해내기도 한다.


그런 논리는 플레이어들보다도, NPC들 사이에 더욱 뿌리 깊이 박혀 있고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이곳은 현실과 다른 초인들이 있는 세계관이기에, 백발에 수염이 성성히 나 있는 노인들이라 할지라도 어떤 종류의 초인적 기술을 한계까지 연마한 진짜배기 괴물일 가능성이 있는 법이다.


전장터에서 만난 묘하게 활기찬 노인을 보면 일단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라는 게 콘란드 대륙에서 병사들 사이에 암암리에 떠도는 생존 노하우였다.


그런 이야기를 또 알고 있는 제이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퍽.


타이밍이 조금 좋지 않았다. 질리언이 나서서 검집으로 제이미의 뺨을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고개가 돌아갔다. 건장한 장한의 몸이 기우뚱, 기울 정도로 강력한 한 방이었다.


‘억······.’


제이미는 입을 달싹이며 소리를 차마 뱉기 전에 신음을 뱉어야 했다. 이빨이 흔들거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볼에 감각이 없었다.

‘질긴 피부’라는 스킬을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제이미 숄더다. 타고난 용력과 거친 성정으로 강도단에서도 오래도록 살아남아 그 나이까지 단장의 곁을 보필하고 있던 인간이었다.


그는 얼얼한 한쪽 뺨의 감각에 고개를 흔들어대며 정신을 다시금 차렸다. “크, 흠.”


제이미가 말을 시작했다.


“나··· 그··· 나는 작센 숄츠 강도단의 제이미 숄더라고 하오.”

“흠.”

“이름보다, 당신네들이 어째서 그 위에서 우리를 노렸는지 설명하시오.”


줄리앙이 소리를 낸 게 첫번째였고 그 다음 페이브가 옆에 팔짱을 낀 채 서서 물었다.


타닥, 거리면서 불티를 튕겨내는 모닥불이 근처에 있다.


그들은 협곡을 지나왔다. 그들이 나온 협곡의 이름은 ‘붉은 다리’ 협곡이었다. 위에서 바라보면 초원에 있는 두 봉우리가 길쭉하고 붉게 보여서 대강 붙여졌다. 데슈칸 산맥, 개중에서도 로키 산쪽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협곡이라 출발지를 알 수 있다면 그 길을 지나리라는 건 예측이 쉽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는 길목이었지만 하필 그들을 노린 듯한 인상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넓은 콘란드 대륙의 땅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여행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지나지 않는 곳이 훨씬 많다.

정비된 가도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면, 개척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길목들에는 말이다.

소식을 들었기에 시기를 맞추어서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 소식을 알려준 인간이 누구냐고 묻는 중이었다.


제이미는 뺨의 감각을 찾기 위해 잠시 기다려봤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양 손발목이 밧줄에 제대로 묶여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대고 있는 불편한 자세다.


협곡을 성공적으로 탈출한 로멜리아 가 일행은 그대로 마차를 끌고 로키 산 쪽으로 여정을 지속했다.

터프한 일정이었다. 골짜기를 지나면서 화살과 돌무더기 세례를 받고 강도단과 조우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멈추지 않고 계속 가다니.


마차에 걸려 있는 다종의 보호 스킬들 덕분이었다. 제냐는 목재로 이루어진 마차가 현대의 탱크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흑마의 체력을 고려해서 갈 수 있을만큼의 속도로, 거리를 더 지난 뒤 로키산 근처에 다다라서 야영을 하고 있다.

어느 바위 언덕 근처에 있는 그림자 속이었다. 바위로 가려져 있어서 피우고 있는 모닥불의 불빛이 멀리까지 가지는 않으리라. 연기는 다소 보일 수 있겠지만 밤하늘에 흩어지는 흰 연기가 그렇게 쉬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


야영용 경계 스킬 또한 아티팩트 몇 개를 꺼내들어 발동하도록 설치를 해놓았다. 야영지를 완성시킨 뒤, 그들은 가져 온 짐덩이 하나를 풀어서 신문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제냐가 묘기를 부리면서까지 절벽 위에 있던 놈 하나를 데려 왔다. 정신을 잃은 제이미 숄더, 거구의 사내를 그가 직접 들쳐 업고 달려 왔다. 협곡을 벗어나 기다리고 있던 마차의 지붕에 남자 하나를 싣고, 밧줄로 묶은 뒤 마차가 덜컹거리며 여행을 이어나갔다.


절벽 위에 있던 강도단들은 아마 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 게임적으로 말하자면, 게임 오버 당했을 것이다. 개중에서 몇몇 운 좋은 작자들은 기어코 봉우리 아래로까지 내려가 자기들의 살 길을 위해 도망친 것 같지만, 많지는 않다. 제냐나 줄리앙이 파악하기로 고작해야 두 셋 정도였다.


성공적인 토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매복으로 기습을 당했음에도 도리어 보다 심한 피해를 주고 그들은 다친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까.

다만 배터리 형식으로 이루어진 마차의 보호 술식이 깨나 달았다. 충전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조금 더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직접 MP를 쏟아내 주입시키는 일이 필요했다.


제냐가 푸른 물약을 인벤토리에서 토해냈고, 아무도 상처 입은 자들이 없었으므로 다행히 다들 과소모한 MP만 회복시켰다.

헤슈나가 단도를 들고 ‘라이트Light 애로우’를 남발하느라 가장 심각하게 MP고갈에 시달렸다. 프로그램에 의해서 보호 받는 제냐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진지한 종류의 현기증을 앓으며 헤슈나는 마차 내부에 드러누웠고, 다른 이들이 그런 헤슈나를 보살폈다.


아드리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 태도가 굉장히 칭찬해줄 만한 점이었고, 괜히 경기를 일으키며 뛰쳐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제 몫을 다한 것이었다.


어린 소녀는 이제 점점 더 거친 세상의 바람과 파도에 익숙해져야 하리라. 콘란드 대륙에서 전쟁 중인 곳이 여러 군데 있었지만, 중부 대륙은 아니었고 또 산슈카 왕국도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늘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밑에서 움직이는 칼날은 셀 수도 없고, 전쟁을 만들고 싶어하는 야심가들의 계략 또한 늘 진행중이었다.


산슈카는 나라의 기틀이 온전히 반석 위에 올라섰다고 하기엔 어려운 상황이었고, 까딱 잘못 해서 어느 플레이어가 국가적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건드려서 내일이라도 변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콘란드 대륙은 아직까지 안정기와는 거리가 아주 먼 상태였다. 칼과 초상 스킬, 정신력 에너지로 만들어진 온갖 원소 계열의 탄환과 화살, 총알이 날아드는 전장이 이 세계의 본질에 가까웠다.

양식화된 도시에서의 삶 역시 즐길만한 것이었지만, 인류는 외적이라 할 수 있는 몬스터, 괴수 무리들과도 싸워야 했고 내적들과도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 끝에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만물박사가 그것을 가늠하고 있다면 대단한 일이리라.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움직임 속에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마지막이 나타나고, 게임이 끝날 것이었다.


“크흠······.”


제이미 숄더는 제 어깨를 움찔거렸다. 불편하다는 제스쳐였다. 그러나 그의 몸짓에 그를 편하게 해줄만큼 아량이 넓은 자들은 이곳에 없었다. 어디까지나 로멜리아 가가 숨겨온 아티팩트가 성능이 뛰어났기에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이었지, 조금만 그 준비가 소홀하고 능력이 부족했어도 협곡에서 그대로 생매장 당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윗더미들은 제냐가 몇 번의 MP고갈을 견디면서 푸른 물약을 물처럼 마시고 초상 스킬을 남발했어도 다 견뎌낼 수 있을까 말까한 일이었다.


다행히 흑마가 주변 상황에 동요하지 않고 굳건하게 달려주어서, 탱크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전진했기에 협곡을 살아서 나올 수 있었다.


이미 시간은 저녁이 지나고 밤이었다.


그들 일행은 챙겨온 건식을 냄비와 불, 물을 이용해 죽처럼 끓여 먹었다. 아드리안과 헤슈나도 불평 없이 배를 채웠다. 제이미는 당연히 먹지 못했다.

아까의 사투 속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한 거한이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나 발끝 등 말단을 덜덜 떨어대면서 마저 이야기를 했다.


“······운트 작힘. ······. ······그가 시켰소.”

“씨발.”


줄리앙이,

드물게 욕을 토해냈다. 서슬퍼런 기세에 제이미 숄더마저 흠칫거렸다. 아드리안과 헤슈나는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포로를 신문하는 꼴을 굳이 보여서 좋을 게 없었기에, 이미 마차 안에 모셔둔 상태였다. 그렇잖아도 헤슈나는 MP 고갈로 어지럼증을 계속해서 호소했기에, 저녁을 먹고 객실에 다시 누워 있었다. 아드리안은 문을 헐겁게 잠근 뒤 객실 내부에서 그녀의 언니를 두고 노닥거리고 있었다.


네 명의 사내에게 둘러싸인 제이미는 자신이 말을 잘 골라서 해야 하는가, 갖은 고민이 떠올랐다. 이들은 강도는 아니었다. 자신들에게 잡힌 포로가 있다면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그저 그들의 기분에 따라서 목이 날아가거나 험한 꼴을 보았을 것이다.


콘란드 대륙 내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행된다. 물론, 그건 설정 상의 이야기였고 시뮬레이션이었으므로 플레이어들이 볼 일은 거의 없다.

퀘스트가 주변 플레이어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고 생성되며 진행되듯이, 게임적으로 굳이 보여 줄 이유가 없는 연출들은 주변에 플레이어가 없는 상황에서 흘러가고 끝난다.


소설 속에서 ‘그저 그랬다더라’하는 몇 문장으로 지나가버리곤 하는 서술과 비슷했다.


어쨌든, 제냐가 있는 상황에서 그런 잔인한 연출이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우회적으로 표현되거나, 혹은 씬 자체의 전개가 에둘러 갈 것이다.

그럼에도 제이미 숄더가 느끼는 불안함이나 공포는 AI에게 진실되게 작용하고 있었고, 그 가상의 인격은 비밀들을 토설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양식이 있는 도시민들이었고, 심지어 귀족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이라면 귀족들은 어떤 야만적인 강도보다 더 지독한 종자들로 변할 것이다.

그들이 가진 양식은, 아마도 순순히 협조하고 있는 이를 포로라는 이유로 제 기분에 따라 목을 치지 않는 그런 것일 테다.

제이미는 작힘 가와 로멜리아 가 사이에 끼어서 자신의 목숨을 잃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말한다.


“······작힘 백작, 작힘 가의 가주이자 세슈칸 성의 영주 말이오. 운트 작힘.

뱀같이 빛나는 눈을 가진 사내이지만··· 우리는 제대로 그를 본 적은 없소. 그저 그가 부리는 기사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였을 뿐.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오. 우리가 세슈칸 시 근처의 평야와 초원을 뛰어다니며 강도질을 한창 하던 때가.

그 때도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시민들을 털고 있었는데······”


자랑이다, 라고 제냐나 질리언이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상대가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으니 듣는 것이 시간을 아끼는 길이다.


“그것이 조금 심해졌는지, 양민들의 분노가 작힘 가의 문을 두드렸는지 가문의 사자가 찾아왔소.

순식간에 우리 강도단을 제압한 기사는 우리를 무릎 꿇리고, 죽이는 대신 작힘 백작의 전언을 읊었지.

여태까지 여전히 그래왔던 대로 행동하라, 다만 작힘 백작의 명령에 따라서 언제든지 목숨을 바쳐 움직여랴.

우리 중에서 대장··· 작센 강도단의 우두머리인 작센 숄츠가 그 목에 아티팩트 목걸이를 찼소. 그건 신기한 기능이 있고··· 우리들의 모습을 상대에게서 보이지 않게끔 해주는 기물이었지만 동시에 위치를 추적당하고 작힘 백작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지 폭발할 수도 있는 물건이었지.”

“오호.”


제냐가 입을 벌렸다. 투명화 스킬은 작힘 백작이 준 아티팩트로부터. 깔끔한 정리였다. 그 때 도시에서 만났던 용병들처럼, 여기저기에 백작이 뿌려둔 칼날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작힘 백작. 운트 작힘이라고 말했던가. 제냐는 아직 보지 못했으나, 줄리앙은 그 사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듯 이를 짓씹었다. 눈 앞에서 단 한번도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긴 세월 로멜리아 가와 인연을 맺어온 남자의 흉계에 치가 떨리는 모양이었다.


흉악한 낯빛을 하고 피묻은 칼날을 들이대는 강도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으며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강도가 말이다.


줄리앙은 어딘지 늘 이상하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물증은 없었다. 전 로멜리아 남작은 조금 더 의심했을 지도 모른다. 남작에게는 가주에게 전승되는 가문 간의 대여 계약에 대한 정보가 있었을테니.


남작도 자신이 이렇게 빨리 마지막을 맞이할 줄 알았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가문과 아이들을 생각하던 남자가 이렇다 할 준비도 없이 떠났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


작힘 백작이 이토록 교묘하게 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면 당연히 떠오르는 의심은, 이전 로멜리아 남작을 독살한 주변 영주들의 수작도 작힘 백작이 관여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단순히 가문의 유산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피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복수극이 되는 것이지.


“······우리는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운트 작힘의 명령을 들었지. 그가 명령하는 것들 중 대부분은 더러운 일이었소. 강도단을 시켜서 할 만한 일들이었지. 평범한 사람, 아무런 죄도 없는 인간들을 강도의 습격이라고 덮고 죽이기 위해서 자세한 정보와 시간을 주었고, 백작이 준 투명화의 목걸이는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기에 충분한 능력이었소.


······그런데 당신들만은 달랐지. 백작은 용의주도하여 뱀같은 인간이었는데··· 그의 계산이 틀렸다는 말도 되오. 그의 생각에는 그것이 충분하다고 여겨졌기에 계획을 짠 것일 텐데······.


우리들도 정작 맞닥뜨린 다음에 놀랐었으니까. 살아남은 형제들이 있기는 한 지······.”


“······살아남은 자는 없다. 있어도 없으리라. 네놈들이 여태껏 죽여 온 시민들의 목숨 때문이라고 생각해라. 네가 다른 이의 형제를 죽였듯 네놈들의 형제들도 그렇게 끝나는 거야.”


페이브가 입을 열었다. 줄리앙은 굳이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후우.”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한 쪽 무릎을 꿇으며 거한의 시선과 대충 높이를 맞춘다. 제이미 숄더는 다가오는 노인의 안면을 보았다.

근처에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의 열기가 뜨겁다. 한쪽, 얻어 맞은 뺨은 아직도 얼얼하니 감각이 둔하다. 흑인은 붉은 눈동자로 노장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이글거리는 원한이 섬칫하다.


제이미는 못 볼 꼴이 없다시피 하며 살아온 강도답잖게 그 볼을 푸르르 떨었다. 단지 기분이나 기세의 문제는 아니었다. 조용하게 분노하는 줄리앙의 기력은 그의 기분을 유형적인 것으로 바꾸어낸다.

스킬로도 있는 것이었다. 기력술의 묘용을 깨달은 자들이 써먹기 좋은 ‘피어Fear'류의 스킬이다. 공포라는 이름의 기술은 그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킬의 사용자와 마주하는 이들에게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스킬이었다.


뱀 앞에 마주 한 개구리처럼, MP가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며 보이지 않는 바늘이 되어 상대의 피부 아래를 찌른다.


그 은은한 자극과, 조금만 더 격화되면 언제든지 심한 상처를 입을 지도 모르겠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은 자연스레 위축되는 정신을 만든다.


거대한 드래곤Dragon 급의 괴수라면 저런 피어만 가지고도 실제 물리적인 영향력을 크게 나타내며, 주변의 적들을 다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 괴물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수준이 되지 않는 이들은 참여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줄리앙 리스트는 드래곤은 아니다.


하지만 백전연마의 노장이며, 그의 기세가 비참한 강도의 살갗을 따끔거리게 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심장께를 아릿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


몹시 속이 안 좋은 듯 어디가 아픈듯 인상을 찡그리던 제이미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다 토해내겠다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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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7. 사연 23.08.13 32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7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5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6 3 14쪽
54 53. Could you join us? 23.08.05 29 4 34쪽
53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23.08.04 29 4 35쪽
52 51. 굳세어라 안드레 23.08.04 26 4 19쪽
51 50. "허억." 23.08.04 25 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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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48.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어진 23.08.02 27 4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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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44. 결정의 주체 +3 23.07.29 35 4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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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41. 사촌 형제 23.07.24 29 3 18쪽
41 40. 로키 캐슬 23.07.24 28 3 20쪽
40 39. 운트Unt의 의뢰 23.07.23 27 3 30쪽
39 38. 그리턴, 갈색 사슴 23.07.23 33 3 29쪽
38 37. 등산 23.07.23 25 3 31쪽
37 36. 트레이닝Training 23.07.23 26 3 32쪽
» 35. 제이미 숄더 23.07.20 28 3 51쪽
35 34. 전진하는 요새 23.07.19 33 3 32쪽
34 33. 강도단 23.07.19 30 3 31쪽
33 32. 붉은 다리 협곡 23.07.19 29 3 34쪽
32 31. 협곡 진입 23.07.15 31 3 31쪽
31 30. 마차 안 23.07.14 36 4 30쪽
30 29. 돌아가는 23.07.13 35 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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