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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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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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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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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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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쪽

36. 트레이닝Training

DUMMY

*


날이 밝았다.


제냐는 푹 자고, 다음 날 게임에 접속했다. 바깥에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고, 아침까지 먹고 씻은 다음이었다.

게임을 오래 하다 보면 운동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생각보다는 그렇게 몸에 해로운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신경과 연결된 근육 반응이 계속해서 움찔거리면서 운동성을 주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온전한 운동은 당연히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가볍게 집 밖으로 나가 동네 거리를 뛰어댔다. 도심 지역은 공기 정화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는 구간들이 많아서 맑은 공기를 자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량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도심 지역에 있는 공원, 센트럴 파크 같은 것을 여기저기 조성했다면 좋을 텐데. 그 놈의 땅값이 뭐라고, 일반적으로 부지가 남는다면 고층 빌딩을 올리고 용적 대비 금전적인 회수율을 최대로 높이기 위해서 애쓸 뿐이었다, 대부분은.


몇 개의 가로수가 있고, 인조적인 회백색 질감의 현대 도시를 구경하며 한 바퀴 돌고나서 게임에 들어온 참이다.


시간은 흘러 그들 일행의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마차는 지치지도 않고 다그닥거리며 로키 산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흑마가 이끄는 이두 마차가 지나가는 길 뒤에는 지난 밤의 흔적이 뒤쳐져 있었다.


야영지에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이나, 그들이 자리를 깔고 누웠던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기절을 한 한 흑인 사내가 있었다.


제이미 숄더였다.


어디 한 구석 상한 곳은 없었다. 최초에 제냐가 그를 포획하기 위해서 벌였던 무리한 묘기 중간에 관절이나 뼈가 나갔을 지는 모르겠다.

그 외에 그들 일행은 강도에게 심하게 손을 대지 않았고··· 물론 질리언이 뺨을 후려치기는 했다만 그가 한 짓에 비해서는 애교스런 상처였다.


물리적으로는 슬쩍 까진 뺨의 피부가 지난 밤 제이미가 당한 고통의 전부였다. 비물리적이며 비가시적인 형태로는, 줄리앙 리스트의 정신력 에너지가 그의 심장을 조였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협심증에 걸린 사람처럼 은근한 답답함을 느끼던 제이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서둘러서 모두 말했고,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제이미를 놓아주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출발할 때의 모습은 보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간단했다. 줄리앙이 ‘방랑 기사의 살기’라는 피어Fear류의 제압 스킬을 최대한 발휘하자 자연스럽게 정신을 잃었으니까.

널브러진 강도는 야영지에 쓰러져 있고, 그렇게 로멜리아 가의 일원들은 가던 길에 다시 올라섰다.


다그닥, 다그닥.


로즈와 덴드가 사이좋게 발걸음을 맞추어 마차를 끌었다. 마차에 매인 두 놈 중 왼쪽 놈이 로즈였고, 오른 쪽 놈이 덴드였다. 마부석에서 바라봤을 때의 이야기다.


거의 쌍둥이가 아닐까 싶은 외형이었지만 로멜리아 가에서 태어나 오랜 세월 살았던 말이었고, 마찬가지로 가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이들은 구분하는 모양이었다. 마부석에 자주 같이 앉게 되는 질리언이 구분법을 설명해줬지만 제냐의 눈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로즈가 목덜미 한 부위의 갈기 색깔이 다르다고 한다. 흑마 두 마리의 갈기는 회색빛이었는데, 로즈의 갈기 중 한 군데가 불그스름하다고 했다. 제냐는 그 말을 듣고 곰곰히 살펴봤지만 눈에 띄는 차이는 아니었다. 밝은 낮에 가까이서 관찰을 하면 보이지만 급하게 두 마리를 놓고 본다면 구분할 자신이 없었다.


덴드는 로즈보다 키가 아주 약간 작고, 정면에서 보면 눈이 왼쪽 눈이 아래로 쳐졌다고 한다. 그리고 뒤에서 봤을 때도 몸통 부위에 여기저기 상처가 있다고 하고.

그 역시,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라 가까이서 손을 대고 그 피부를 쓸며 관찰해야 보이는 수준의 상처였다. 질리언의 눈에는 뚜렷하게 보이는 차이인지, 그는 그 다름을 설명하면서 똑같은 곳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제냐는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소일거리 정도로 이해했고, 잠깐 도전하고 포기했다.


이전과 똑같은 발걸음이지만, 마차의 분위기는 달랐다. 여정의 끝자락에 닿고 있었으니.


‘로멜리아 가의 재흥’이라는 주제를 놓고 본다면 이 여정은 아직 시작도 채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중간 목표인 로키 산에는 거의 다 와간다.


어제밤을 보내고, 야영지에서 출발한 마차가 부지런히 달려 산 어귀가 보이는 즈음에 다다랐다. 점심이 되기 전에 다다를 것이다.

평원 지역은 멀리 목적지가 되는 오브젝트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나 가늠하기가 편해서 좋았다. 별다른 장애물이 없으니까, 점점 가까워지고 커져가는 산맥의 크기를 보면서 간단히 남은 시간을 잴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맵Map, 목적지 기능을 통해서 여행 거리를 잴 수 있었으니 지도만 있다면 언제든지 추론할 수 있기는 하다.


시나리오 온라인 내의 여러 직종들 중에는 이런 여행에 최적화된 클래스와 스킬군도 존재했다. 패스파인더, 트래퍼, 매퍼Mapper, 그런 이름들로 불리는 이들은 탐지, 색적 계열의 스킬들을 우선적으로 익히고 스킬군에서 파생되는 복합 스킬, 상위 스킬과 노하우를 통해서 콘란드 대륙의 지형을 누구보다 빠르고 자세하게 알아내는 이들이었다.


당장 제냐와는 관련이 없었다. 지금 일행들 중에도 없었고. 그나마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자라면 줄리앙 리스트였다. 마차에 앉아서 먼 거리에 있는 지역을 기감 계열의 탐지 스킬로 확인할 수도 있었고, 산슈카 내부의 지리라면 훤하게 꿰고 있었으니까.


평온한 여정의 끝에, 마차가 산맥 초입에 닿았다.


로키 산.


어느 유럽 신화의 장난꾸러기 신의 이름과 닮은 산이 데슈칸 산맥의 초입이었다.


닮았다고 표현하는 점은, 영문으로 철자가 달랐기 때문이다.


*


로키Lokye 산.


녹음이 우거진 산의 오르막길은 마차가 오르기에 적합한 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리턴 가의 산중 성채로까지 이어지는 길목은 잘 정비된 등산로였기에 마차를 버리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두 마리의 흑마, 로즈와 덴드는 전천후로 이용될 수 있는 훌륭한 짐승들이었다. 초원이건, 황야건, 협곡이건, 산길이건 가리지 않고 뚜벅이며 걷는 말들이 늠름하다.

제 때 건초와 물만 챙겨준다면 마치 모터 엔진이 달린 기계처럼 그들이 탄 마차를 끌어올렸다. 일반적인 말들에 비해서도 상당히 근력이 센 것 같았다. 로멜리아 가 특유의 품종인 것인지, 혹은 산슈카의 말들이 다 저런 건지.


별다른 특이 설정이 없을 때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내부의 동식물들은 현실의 그것과 비슷한 세팅 값을 갖게 된다. 초마馬적인 활약을 보이는 녀석들이니 세기에 한 번 나오는 명마라던가, 혹은 특수한 종자의 말이라던가, 뭐 그런 설정이 덧붙을 것이다.


굳이 질리언이나 누구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제냐는 세세하게 파들어가면서 게임을 하는 편은 아니다. 그러려니.

정한 뒷 얘기나 그럴싸한 설정들이 다 있겠지, 하면서 넘어가는 편이다. 소설이나 영화 류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도.


지금은 경사진 길을 걸어 올라가는 말들의 궁둥이를 시야에 담으며, 그저 마부석에서 등을 기댄 채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제냐의 곁에 질리언도 그러고 있다.


로키 산은 정비가 아주 잘 되어 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편하도록 평탄하게 다져진 흙길에 억새풀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엮은 천같은 게 깔려 있었다. 흙바닥에 약간 파묻혀서 걷기 편하게 도와주고, 또 기껏 다진 길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물건이었다.

성채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주는 역할도 겸한다.


현대의 산책로와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퀄리티에 놀라며 멍을 때린다.


데슈칸 산맥은 중수들이 찾는 위험 지역이었지만, 초입은 아직 별다른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그도 아니면 그들이 이 길을 찾기 직전에 어떤 플레이어나 NPC 집단이 등산을 해서 거치적거리는 몹들을 한 번 깔끔하게 치웠다던가.

후자가 조금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다. 제냐는 뒤뚱거리는 흑마를 보고, 우거진 활엽수가 가득찬 산림을 바라보고, 그리고 퍼런 하늘과 구름을 처다보면서 손깍지를 꼈다. 제 뒤통수에 갖다대어 발을 아래로 쭉 뻗고, 좋은 경치를 구경했다.


공기도 맑다. 바람도 시원하고. 중부 지방은 습기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주 메마르냐, 하면 그도 아닌 것이 이렇게 선선하게 바람이 부는 곳이 종종 있다. 여행을 즐기기에 좋은 날씨다. 플레이어들을 위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스타팅 포인트로 선택하는 이들이 많은 도시 근처가 캐쥬얼하게 여행을 하기 괜찮은 지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질리언이 마부석 옆에서 입을 열었다.


“제냐 공.”

“경이라고 하십시오. 씨라고 하던가.”


제냐가 처다보지도 않고 뚱하게 답했다. 질리언에게 무언가 모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지난 여행 중에 그만큼 편해졌을 뿐이다.

질리언 역시 오랜 시간을 지내며 제냐를 동료로 받아들였다. 페이브나 헤슈나, 아드리안마저도 깨나 익숙해졌다.

그러나 그런 친밀감과 별개로, 질리언은 자신도 해내지 못할만한 일을 언제나 거뜬하게 해내는 제냐를 바라보며 일종의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이면서, 그로서는 도저히 따라잡기 어려운 수준의 강함을 갖고 있다는 건 확실히 동경의 이유가 될만한 점이었다.


그만큼 질리언은 ‘강함’에 대해서 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전심으로 검도를 수련하는 검술가였으며, 로멜리아 가의 기사가 될 청년이었으니까. 페이브도 그렇고 질리언도, 재능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도리어 아주 뛰어난 편에 속했지.

그러니까 기사가 아닌 자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 받아 줄리앙의 손에 이끌려 이렇듯 긴 여행을 떠난 것이다. 정식 기사는 아니었으나 기력술을 다르며 가문의 검술을 훈련했고, 기사에 준하는 힘을 보유했다.


장래가 유망한 무술인들이었는데, 그런 이들이 보기에도 제냐 킴은 불가사의한 인간이었다. 자신들보다 몇 살 차이가 나 보이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종 자체가 다르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여정 중에 마차가 황야의 갈라진 틈새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한쪽 뒷바퀴가 완전히 움푹 들어간 골에 먹혀서 도저히 전진이 안 되던 때. 로즈와 덴드가 아무리 힘을 써도 각도가 나지 않을 때 제냐가 나서서 거뜬히 마차를 들어올렸다.


기본적으로 통짜 목재 구성이었고, 거기에 다양한 종류의 소재가 부품으로 섞여 들어간 데다, 넉넉한 객실 크기까지 보유하고 있어 1톤이 가뿐히 넘지 않을까 싶은 물건이었는데 그것을 사람의 손으로 든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는가.

제냐로서도 애를 쓰는 것같이 보이기는 했다만, 질리언이나 페이브는 일단 자신이 없었다. 바퀴가 빠진 골이나, 마차의 자세가 영 좋지 않았기에 들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고. 질리언과 페이브, 줄리앙까지 모두 달려들어 애를 쓴다면 가능할 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제냐가 없었다면 그렇게 했었어야 하리라.


그 외에도 붉은 다리 협곡에서 강도들을 토벌할 때 제냐가 보여준 것은 신위에 가까운 궁술이었다. 질리언도 페이브도, 또 집사장도 화살은 깨나 다루는 양반들이었지만 제냐 정도의 솜씨는 나지 않으리라. 장궁을 이용해서 철시를 날려대는 기력술 보유자의 사격은 투창에 가까웠고, 놀라울만큼 정확했다.


줄리앙의 경우 제냐보다 궁술 경지는 높았으나, 그만큼 넉넉한 MP를 보유하지는 않았기에 화살 쏘기에 기력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잘 만들어진 석궁을 활용하는 것이기도 했고.


제냐 역시 협곡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이 인원들이 그리 녹록치 않은 양반들이란 사실을 새삼 깨달아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퀘스트의 난이도가 가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고 또 길이도 길어 보였는데, 한 편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저력이 만만찮다면 그래도 낙관적으로 결과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 가능하니까 시켰을 것이었다. 아무리 비련의 시나리오가 지독한 시나리오를 플레이어들에게 들이밀기로 유명하다고는 해도. 게임인 이상 클리어 확률이 없는 물건을 유저에게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애초에 설계의 오류였으니까.


“······제냐.”

“······아무것도 안붙이는 겁니까?”


질리언 역시 제냐가 불편하거나 멀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는 되었으니까.


“그 강함은 타고난 강함인가?”

“멍청한 질문이군요. 전에 말했잖아요. 이상한 짓거리들을 많이했다고. ···뭐 물론 체질적인 부분도 부정할 순 없습니다만.”

“······그래.”


질리언이 말을 멈췄다. 몇 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제냐와 같이 허공을 처다보던 질리언이다. 제냐는 옆을 바라봤다.

제냐보다 어리거나, 혹은 비슷해 보이는 젊은 청년의 면상이었다. 어딘지 공허해 보이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꼴이 인상적이어서 말을 걸었다.


“뭐, 자신도 강해질 수 없는가, 그런 종류의 얘기입니까?”

“······.”


질리언은 대꾸하진 않았다. 그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릴 뿐이었다.

제냐도 속으로 고갤 끄덕거렸다. 확실히 중요한 문제였다. NPC 강화. 같이 플레이를 하는 팀원들이 강할수록 퀘스트의 난이도가 내려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퀘스트 상황에서 클리어 팀의 수준에 따라 난이도가 조정되지는 않았다.

물론 퀘스트 진행을 하면서 선택지에 따라서는 상황도 바뀌고 난이도도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갑자기 수련 좀 한다고 멀쩡히 있던 작힘 백작가 병사들의 수준이 급변하지는 않는다.


“···그렇습니까. 강해질 수 있긴 하죠. 필요하기도 하고요.”


질리언이 제냐를 보았다. 제냐는 고갤 끄덕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아가씨들을 지키려면 그래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가는 길이 쉬운 여정도 아니고. 우선··· 여태까지 전투 경험은 얼마나 됩니까? 때려 잡은 몬스터의 수라던가. 겪어온 전장의 횟수라던가.”


제냐는 손깍지를 풀지 않고, 늘어지듯한 자세로 계속해서 말했다. 질리언 역시 한 손으로 고삐를 몰아쥐고 벤치에 등을 깊이 댄 상태였다. 로키 산의 등반 여정은 목가적이란 말이 어울렸다.


“글······쎄? 세어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군. 남작가에서 병사로 일하면서 수십 번은 나갔을 거네···. 괴수나 맹수, 영지 근처의 도적단 따위를 상대하기 위해서 말야. 근처 영주들의 병사들과 벌였던 소규모 교전도 꽤 될 테고······.”

“흐음.”


NPC건 플레이어건 콘란드 대륙에서는 공평하게 경험치를 먹게 되어 있었다. 전투 직종의 강함이 올라가려면 전투를 벌이는 게 가장 직접적인 일이다. 인간들끼리 없던 다툼을 만들어 싸우는 건 이곳에서의 삶이 현실인 NPC들에게는 가혹한 방법일 것이고.

가만히 있는 괴수 류를 토벌하면서 영토 확장을 하는 게 가장 좋은 일일 테다.


전투와 훈련. 플레이어들이 해내고 있는 그 반복 노동을 결국 따라온다면 NPC들도 강해지게 되어 있었다.

물론, 게임 오버가 가상인격의 종말인 만큼 플레이어들처럼 고된 수준으로 하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일괄적으로 건장하며 체력적으로 우세한 기본 세팅 값을 받는 플레이어들과 달리, NPC들은 특성에 따라 유약한 자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의 트레이닝을 받는다면 강해지기 전에 죽는다.


NPC들도 각기 적성이라는 건 있었지만, 어쨌든 콘란드 대륙의 논리대로 계속해서 강해질 수는 있을 테였다. 세계관이 품을 수 있을 만큼은 끝까지 스텟을 올릴 수 있는 법이다.

마침 자신에게는 포션이 두둑하게 있었다. 치유 스킬은 없었지만. 돌아가면서 굴리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느리고, 약소하지만 치유 효과가 있는 아티팩트가 두 아가씨에게 있었다. 붉은 물약을 때려박고 붕대를 감고, 약품을 쓰고, 아티팩트까지 쓰면 누가 죽지는 않으리라.


제냐는 그런 계산 속을 굴리며 기감을 확장시켰다.


그의 반경 수십 미터 정도로 감각이 넓어졌다. 3D 데이터 맵처럼 대략적인 정보가 그에게 들어왔다. 특정 조건으로 범위를 좁혀서 무언가를 찾아낸다.


산길의 중심지에는 별다른 소요가 없었지만, 그 너머 조금만 들어가도 이미 짐승들의 영역이었다. 시나리오 온라인 내부의 자연 지형들은 현실 지구의 그것과 달리 아주 야만적이며 인간에게 불친절한 곳이었다.

피스 시 근처의 파란 귀 토끼만 하더라도 그렇잖은가. 한 번 싹 점검을 하고 토벌을 하고, 도리어 희귀 생물들의 멸종을 걱정해야 하는 지구의 사정과 달리 이곳의 숲과 자연은 언제 날카로운 어금니를 들이밀 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설령 초인들이라고 해도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되는 그런 수준이다.


데슈칸 산맥의 초입.

로키 산의 수준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레벨링 역시 필요했다. 평화로운 것도 좋지만 전투는 플레이어를 플레이어로 만드는 근본적인 행위 중 하나였다. 전투 직종의 이야기였지만, 제냐는 전투 직이다.


기감의 영역을 확장시켜가며 주변을 더듬었다. 평범한 감각으로 느낄 때 그러했듯이, 기감 탐지 스킬로 색적을 해나갔지만 근처에 이렇다 할만한 놈이 없었다.

그 반경을 백 수십 미터 정도로 넓혔을 때 적당한 놈들이 걸렸다. 생각보다 가도 근처가 깨끗하게 소탕되어 있었다. 산지기 가문이라는 그리턴 가에서 일을 상당히 잘 하는 모양이었다.


봉우리 위쪽의 성채까지는 아직 갈 길이 남아 있었다. 3D 맵에 드러나는 정보, 특히 적당한 위험도의 몬스터 위치를 보며 제냐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이대로 주욱 올라가면 넉넉하게 저녁 전에 닿을 것이다. 그 전에 한 두 차례 소요가 일어난다고 해도 여정에 무리는 없겠지.


툭, 툭. 제냐가 마차 내부를 두드렸다.


"왜 그러나."


열린 창문 새로 줄리앙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냐가 말했다.


"어르신. 듣고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한테 질리언을 맡겨주시면 빡세게 굴려보겠습니다."

"호. 이를 말인가. 바라던 바라네."


줄리앙은 제냐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개중에는 두 청년의 미래에 대한 말도 포함되어 있았다. 실전은 사람이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적당한 훈련 교관이 옆에 붙어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그리고 줄리앙은 체험적으로 캐릭터가 성장하기 위해서 몬스터를 잡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적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때마다 그 노인 역시 계속해서 강해졌으니까 말이다.


플레이어의 신체와 달리 NPC들은 이 세계에서 무수한 시간들을 보냈으므로, 나이에 따른 노화와 전투 능력의 열화가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레벨업을 한다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전투 능력의 열화는, 신체적으로 다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젊은이보다는 같은 수련을 해도 체력적으로 성장세가 둔화되게 되어 있다.


특질의 체질이나 스킬들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은.


"···가는 길에 사냥을 좀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무런 방해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마음껏 하게.“


줄리앙이 대답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제냐를 믿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과 헤슈나는 괜찮아 보였다. 오는 길에 소란이 하나 있었지만 그녀들에게 충격이 간 바는 없었다.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렸고, 보이는 곳에서 화살과 돌무더기가 떨어져서 어린아이가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다. 그녀 역시 로멜리아 가의 여식이었고 이런 소란과 전투에 결국은 익숙해져야 했다.

언젠가는 그녀가 직접 지휘관으로서 가문의 군대를 이끌 날조차 오리라. 지금은 먼 미래였지만.


견디어 낼 수 있는 소란이라면 줄리앙은 기꺼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두 명의 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입장에서, 그녀들의 안위에 무리가 간다면 어떤 일도 사실은 해서는 안되겠지만 컨트롤 할 수 있는 리스크의 한도 내에서 호위자들의 무武력이 올라간다면 결과론적으로 일행이 안전해지는 길이었다, 그건.

줄리앙은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마차가 움직일 때마다 그가 알고 있는 지형도 내에서, 매복이나 기습이 올 수 있는 길목 쪽으로 원시遠視 계열의 탐지 스킬을 계속해서 쓰고 있었다. 거대한 범위를 한 번에 알 수는 없었고, 먼 거리의 일정한 구간을 탐색할 수 있는 스킬이기에 여행을 눈으로 미리 답사하듯 소규모의 색적을 긴 시간, 반복해서 해야만 했다.


줄리앙이 산슈카의 지형을 머리에 넣어두고, 또 원시 스킬이 있었기에 미리 알고 쓸 데 없는 위험들을 피할 수 있었다. 어쩌면 세슈칸 가는 길목에서, 그토록 아무런 인적도 없는 시간대에 그들의 마차와 조우했던 것도 나름의 필연일 지 몰랐다.

제냐로서는 다른 위험들을 운좋게 피했기에 로멜리아 가의 마차를 만날 수 있었던 셈이었고.


마차는 약간 경사진 길을 끊임없이 올라갔다. 산책로는 아주 가파른 부분이 별로 적었고, 완만하게 죽 이어지는 오랜 길이었기에 마차가 다니기에도 편했다. 가만히 올라가는 과정 중에 생각을 해보면, 데슈칸 산맥 초입에 가문의 성채를 지어낸 그리턴 가문이 그들의 물자를 올릴 방도 또한 마련해야 했기에 이런 편리한 길이 있지 않은가 싶었다.


편리한 길은 필연적으로 군대와 병사가 사용할 수도 있었다. 자신들의 성채로 이어지는 길을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산 입구로부터 뻗게끔 만들어 두고 정비하며 살아가는 산지기 가문의 자신감이란 어떤 것일까.

제냐는 산슈카에 대해서도, 콘란드 대륙 내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만. 막연하게 상상해보자면 대단한 성채와 수성 준비를 마쳐놓고 외적들을 물리쳐 온 그리턴 가문의 악착같음이 그려진다.


국경 부근이 아닌 산슈카 중심지에서 약간 남쪽에 있는 지역이어서 특별한 변란이 나라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적국의 침입을 받는 일은 별로 없겠지만.

말했듯 산슈카 국내에서도 상황이 불안정하기에 가문의 보물이나 지위 따위를 노리고 계략을 꾸며 덤벼드는 도적같은 자들이 있을 수 있었다.


또한 데슈칸 산맥이 그 자체로 플레이어들에게 개방된 사냥, 전투 필드인만큼 몬스터들의 접근을 막는 일도 상당한 수고로움일테고. 산지기 가문. 고도로 훈련된 레인저들을 정병으로 거느린 유서 깊은 귀족가의 모습일까.


작힘은 직접적으로 아티팩트에 욕심을 내면서 로멜리아와의 언약을 배신했지만, 그리턴 가문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의 문제도 있기는 했다.

전 남작의 유언에 따라 해결책으로 가고 있는 여정 중이기는 했다만 직접 만나본 바는 아니니 대면해서 이야기를 해야 결론이 나리라.


제냐로서는 당장 고민을 해봐야 답도 없고, 쓸모도 없는 문제들이었다. 그는 제 검은 앞머리칼을 조금 매만지면서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그들이 마차를 탄 채 오르고 있는 흙길에서, 제냐의 기준으로 10시 방향 122m 부근에 고블린들이 있었다. ‘몬스터’, ‘비인간’, ‘적정 레벨’ 따위의 정보를 조건으로 찾다가 발견한 것들이었다.


‘적정 레벨’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캐릭터가 감각하고 선택하고, 시스템이 약간의 플레이를 위한 보정을 더하는 게임 내부의 일관적인 메커니즘처럼 제냐가 어림짐작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강함의 척도였다.

고블린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몬스터 종류였고, 그가 판단했을 때 별다른 특이점이 보이지 않아서 괜찮은 대상으로 골랐다.


농담으로라도 인간으로 부를 수 없는 녹빛의 피부를 가진 이족 보행형의 소악귀들은 오크보다 훨씬 체구가 작았다. 인간보다 거대한 체격을 가진 오크와 달리 인간보다도 작은 형태로, ‘소형’으로 분류되는 크기였다.

일반적인 사람 체격의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크기라면 소형으로 분류되었다. 소형의 최대 크기가 건장한 사내 정도였고, 최하 크기는 일반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소형 짐승들이었다.


토끼, 고양이, 다람쥐, 박쥐, 뭐 이런 것들.


곤충 중에서 작은 포유류 동물과도 맞먹는 크기를 가지는 놈들은 소형이었고, 일반적으로 느끼는 손가락만한 크기 아래의 벌레들은 전부 ‘극소형’으로 분류된다.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평균적인 벌레들이 ‘극소형’의 최대 크기였으며, 그 아래로 무수한 생물군이 존재했다.


몬스터로 분류되는 행동 양식과 생명을 가진 몹들 중에는 안개 따위의 형태로 뭉쳐서 사람을 공격하는 ‘균류’의 일종이나 그 외에 판타지적 모티브로부터 탄생한 입자 형태의 괴물들이 있었다.

마치 게임 속에서 상처와 피가 빛의 입자로 표현되는 것처럼,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의태를 하며 플레이어와 인류를 공격하는 고약한 성질의 몬스터들도 있었고.


소형의, 그들보다 몇 수 아래의 전투 능력을 갖고 있고, 골치 아픈 특성도 없이 리스크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인 고블린 7마리가 타겟이다.


데슈칸 산맥과 그 초입인 로키 산은 고블린보다 훨씬 더 강력한 몬스터와 야수, 짐승들이 많았지만 그것들과 훨씬 약한 소형 동물들은 공존하고 있었다. ‘자연계’가 이루어져 있는 것이 시나리오 온라인 내부의 환경과 모습이었고, 주로 사냥을 위한 적정 난이도의 필드라는 건 경험치를 먹을 만한 해당 레벨의 몹들이 많이 있느냐, 만을 따지는 이야기였다.


초고레벨의 유저들이 애용하는 사냥 필드에도 얼마든지 초보자가 잡아낼 수 있는 몹들이 서식한다. 그런 사냥 도중에 예기치 못한 위험을 맞닥뜨리고 그것을 컨트롤할 새도 없이 한 방에 게임 오버를 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접근 금지나 비슷하게 된 것 뿐이고.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비련의 시나리오는 플레이어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게끔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제냐 역시 티를 내지는 않지만 귀족 가의 시나리오에 휘말렸을 때부터 내심 긴장하는 면이 있기도 했고.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한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제냐는 인벤토리를 열어 활을 꺼냈다. 벤치에서 갑자기 붉은 색의 목재 장궁을 꺼내 잡자 질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갑자기 뭐하는···’ 하고 미처 물을 시간도 없이, 제냐는 철목시 하나를 꺼내들어 시위에 걸었다. 살짝 벤치에 걸터 앉으며 몸의 방향을 바꿨다.


경사 위를 불규칙적으로 걷는 마차의 마부석 위에서, 약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각도를 만들어 장궁을 조작한다.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마치 십 수년 이상 그 행위만 반복해온 장인마냥 깃을 말아 쥐고 팽팽하며 강력한 시위를 흉근과 배근 등을 써서 주욱 당겼다. 대흉근과 광배근 등 커다란 근육들이 어지간한 소형 기계보다 강력한 압력으로 수축하며 괴물같은 힘이 필요한 시위를 붙들어 늘어뜨린다.


대근육도 중요하지만 말단 부위의 소근육들도 상당한 역할을 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 결국 장인들 사이의 퀄리티란 디테일에서 승부가 나는 것이었으니까.

손목, 말아 쥔 손과 손가락, 몸짓 하나마저 미세하게 움직이며 조준한 시위를 약간씩 틀고 활대, 화살촉의 끝이 변한다.


제냐는 이미 스킬이 발동하며 붉은 궤적이 뜬 시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지 계열 스킬을 쓰고 있는 궁사의 화살을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뭐, 물론 그 화살을 맞는 상대방들도 늘 초인적이며 초현실적인 기술과 능력들을 가진 콘란드 대륙이라 얼마든지 빗나가기는 한다만.

적어도 지금 노리는 고블린들은 재주가 부족했다.


주욱 뻗어 나가는 화살의 예상 궤적에 나뭇가지나 그 몸통의 끄트머리가 몇 군데 걸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기력을 담은 중급 복합궁은 말이 화살이지 이미 투창 그 이상의 위력을 원거리에 투사하는 무기였다. 또 말이 투창이지, 기계식 병기의 탄환보다 강력할 것이다. 지금이라면 거목을 뚫고 그 너머에 있는 오크를 관통할 수 있었다.


부과하는 기력술-궁술의 위력에 따라 그보다 더한 짓도 가능할 지 모른다. 컨트롤이 불안정해지고 정확도가 급감하기에 자주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제냐의 손은 현실의 김서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임 내에서 궂은 일을 반복해서 그런지 조금 거칠어지기는 했다. 사진을 찍어 나란히 놓고 본대도 같은 손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대단한 변화까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게임 내, 가상의 일이라 무지막지한 부하를 견디며 장궁을 다루었다. 장력의 최고점에 이른 시위가 팽팽하다.

활대 역시 그 몸을 뒤틀면서 투사체를 날려낼 준비를 했다.


붉은 궤적이 고블린의 근처에 닿았다.

한 번에 격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들이 있는 곳까지 불러오려는 의도였지. 제냐는 열의 초상력을 사용했다. 그가 당긴 시위에 불꽃이 넘실거리, 는 것 같은 환상이 덧입혀졌다. 실제 불은 아니고 모습이다. 그러나 초능력이 실존하는 이곳에서 모습이란 중요한 요소였다.


열량을 가진 MP가 일시적으로 인챈트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효과적인 시각 연출이었다. 시위를 타고 들어간 불의 MP가 철목시에 닿았고, 곧 그 머리끝 화살촉 말단에 닿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그닥, 혹은 또각. 로즈와 덴드 두 마리는 무심하게 걸었다. 마부석에서 보면 왼쪽에 자리한 놈이 로즈다. 흑마는 인간은 아니지만 마치 표정이라고 생각될만치 얼굴 근육을 풍부하게 움직였다.

심드렁한 눈빛이라고 보일 수 있는 기색으로 덜 다듬어져 튀어나온 돌멩이를 툭, 제 앞발로 차고 걷는 와중이었다.


나뭇잎을 본다면 몇 개가 바람에 날려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제냐가 화살을 조준한 채 바라보고 있는 시야로, 바로 앞 몇 미터에 있는 활엽수 한 개에서였다.


식물은 잘 모르지만 수종은 대강 비슷한 것 같았다. 엇비슷하게 생긴 모양새가 주욱 이어진다. 흙길에 인위적인 멍석 따위를 길게 깔아놓은 모양이고, 마차 두 세대가 간신히 지나갈만치 폭이 나왔다. 그 산책로 양 옆으로는 빽빽하게 산림이 형성되어 있었고.


나무와 나무 사이, 그 틈새로 먼 거리에 있는 고블린의 그림자를 본듯도 한 제냐가 시위를 잡던 오른 손아귀를 툭, 놓았다.

툭, 이라고 표현했지만 손가락을 떼는 그 미세한 움직임 외에 그의 근육은 정지한 듯 보이는 절묘한 사격이었다.


명필가가 움직여야 하는 붓 끝만을 미세하게 조작하듯 흐트러짐 없이 시위를 놓아준 제냐의 선택에 철목시 한 대는 허공으로 자유로이 비행했다.


바람도, 산의 거목들의 버티어 선 방해도,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여러 잎사귀들의 눈가림도 제쳐놓고 날아간 화살의 끝이 매섭게 빛났고,


숨 한 번 들이쉴만한 타이밍에 몇 개의 장애물을 패도적으로 지나쳐 목적지에 다다랐다.


절묘한 힘 배분이었고, MP량의 투입이었다. 적절히 궤적 상에 걸리는 물질만 분해하고 목표가 되는 나무 몸통에 깊이 박혀들어갈만큼 세게 날린 화살이 딱 그렇게 나무 한 그루를 쑤셨다.


열기를 미약하게 띄었던 그 불길의 연출은 게임 내에서는 사실적인 정보였고, 미리 주변인들에게 일렀던 암시를 그대로 실현시켰다.


”끼이이익!“


하고 고블린 몇 마리가 화들짝 놀라며 울었다. 놈들은 숲 어귀, 자그마한 공터에 모여 나무 뿌리에 상처를 내고, 몇 놈은 금방 잡은 토끼를 해체하며 놀고 있었다.

먹기 위한 짓이었지만 몬스터로 분류되는 괴물들은 잔혹하며 상종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 생물들을 이유 없이 파괴하곤 한다. 먹이의 숨통을 지저분하게 끊는다던가, 요리가 아닌 의미 없는 행위로 그 사체를 분해한다던가 말이다.


물론, 플레이어의 시각이 닿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곧바로 게임적 모자이크 연출로 처리되어 빛가루가 날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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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7. 사연 23.08.13 32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7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5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6 3 14쪽
54 53. Could you join us? 23.08.05 29 4 34쪽
53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23.08.04 29 4 35쪽
52 51. 굳세어라 안드레 23.08.04 26 4 19쪽
51 50. "허억." 23.08.04 25 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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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43. 그리턴 자작가에서 그간 23.07.29 29 4 25쪽
43 42. 호아킨 팍스Joaquin Pax 23.07.25 28 3 29쪽
42 41. 사촌 형제 23.07.24 29 3 18쪽
41 40. 로키 캐슬 23.07.24 28 3 20쪽
40 39. 운트Unt의 의뢰 23.07.23 27 3 30쪽
39 38. 그리턴, 갈색 사슴 23.07.23 33 3 29쪽
38 37. 등산 23.07.23 25 3 31쪽
» 36. 트레이닝Training 23.07.23 26 3 32쪽
36 35. 제이미 숄더 23.07.20 27 3 51쪽
35 34. 전진하는 요새 23.07.19 33 3 32쪽
34 33. 강도단 23.07.19 30 3 31쪽
33 32. 붉은 다리 협곡 23.07.19 29 3 34쪽
32 31. 협곡 진입 23.07.15 31 3 31쪽
31 30. 마차 안 23.07.14 36 4 30쪽
30 29. 돌아가는 23.07.13 34 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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