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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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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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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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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0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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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45. 석별惜別

DUMMY

*


“그래서 말이네.”


킬 드로얀이 떠났다.


수도에서 파견된 법무부의 일원들, 그리고 치안대 소속의 노련한 기사들이 같이 말이다.


그리턴 자작의 인맥은 놀라운 편이었고, 수도 사르삿의 법무부차장관에게 직통으로 닿아 인원들을 보내줄 정도가 되었었다.


꼬이고 얽힌 상황의 자세한 내막을 듣던 그네들은 다른 방면의 정보들을 모으고 검토하기 위해 먼저 세슈칸으로 간 상황이다.


그들이 적절한 정보를 얻고, 운트 작힘 백작의 검은 속내에 대해 확실하게 안다면 아마 규탄과 함께 작힘 가가 보관하고 있는 아티팩트를 내놓도록 하겠지.


제냐는 생각보다 수월하고 유혈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듯한 상황 전개에 만족했고, 최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멋진나 최와 제냐 킴, 그리고 로멜리아 가의 일행과 그리턴 자작이 한 데 모여 있는 식사실에서 그리턴 자작이 입을 연 참이었다.


“그런데 말이네, 슬슬 세슈칸으로 옮겨 가봐야 하지 않겠나? 킬 드로얀 경이 세슈칸으로 먼저 떠난지도 삼 일인데. 발빠른 준마를 가지고 곧장 지름길로 이동했을 테니 벌써 닿았겠지.

우리도 움직여서 그들의 일에 도움을 주고 적절한 순간에 작힘 백작을 압박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라네.”

“흐으음.”


침음을 낸 것은 줄리앙 리스트, 로멜리아 가의 신실한 집사장이었다.


세슈칸으로 간다.


좋은 말이었지만, 운트 작힘이라는 작자가 어떤 행동을 할 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걸렸다. 그 뱀같은 인간이 만일 자신의 야욕을 꺾지 않고 대놓고 깽판을 친다면?

미치광이의 몸부림에 휘말려 가문의 후계자가 조금이라도 다친다면 작고한 전 남작을 생각할 낯이 없으리라.


“그럴까요.”


줄리앙이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며 처다본 것이 헤슈나였고, 그녀의 안색이었다. 헤슈나 로멜리아. 20세 무렵 정도가 된 듯한 블론드 헤어의 고운 미모를 가진 아가씨는 별다른 기색의 요동이 없다.

그저 줄리앙의 근처에 앉아 점심 식사로 나온 스프를 뜨고 있다. 줄리앙의 눈길에 노신을 잠깐 처다보았지만, 그 눈빛에 불안한 감은 없어 보인다.


“운트 작힘 백작에게 확실한 로멜리아 가의 입장을 밝히고 개탄스러운 일에 항의해야 한다고는 생각합니다.”


조금 뒤, 헤슈나가 스프를 천천히 떠먹고는 말했다. 그리턴이 고갤 끄덕거렸다.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중앙의 인사가 직접 파견을 나온 자리에서 작힘 백작이 특별히 수를 쓰지는 못하리라 생각하네.

왕실과 수도의 귀가 엄연히 살아있는데 일을 벌인다고? 더 이상 농담이나 눈가림으로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되니 말이야.”


산슈카에서 왕실, 중앙 정부의 위엄이 절대적이진 않다. 그러나 지엄함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적어도 백주대낮에, 그러니까 왕가의 눈이 살아있는 동안에 좌시할 수 없는 일을 벌인다면 중앙 권력 역시 적절한 대응을 해야만 했다.


나라 곳곳에 속속들이 영향을 미치진 못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손길이 닿는 곳이라면 산슈카의 명예가 훼손되어선 안된다.

산슈카는 고국이었고, 오랜 전통과 현명한 법례들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도서관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사람의 상리에 따라, 상식을 갖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법이 그에게 죄를 물으리라.


법무부는 행정부와 곧 닿아 있었고 치안대와 긴밀하게 협조 협력을 해낼 수 있는 강력한 기관이었다. 법무부차장관이라고 마음대로 권력을 유용할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 수도의 실력자였고 그리턴 가가 배출한 고관 중 하나였다.


그리턴 자작의 사촌 동생이라고 마음대로 편의를 봐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법리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을 내려줄 수는 있었다. 얼마든지 말이다.

적절한 증거와 상황 파악, 확보만 된다면.


산슈카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에서 발췌한 문구들은 이미 보여주었다. 오랜 계약이어도 계약이었고, 그 증거는 당시 왕실의 기록서에도 남아 있다. 제국기의 말엽은 아직 로멜리아 가의 위세와 권위가 살아있을 때였으니까.

그 행보가 특별하게 기록되어 있대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계약 건은 아마 문제 없이 처리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살필 게 운트 작힘이 벌였으리라 생각되는 여러가지 암수暗手들이었다. 가깝게는 로멜리아 가 일행을 죽이려고 보냈던 강도나 뒷골목의 용병 패거리, 그리고 멀게는 애초에 여정의 시작이 되었던 전 남작의 죽음까지.


사건이 입증된다면 더 이상 제냐가 무언가 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쉽게 퀘스트가 끝날 것 같았다.

전근대의 시대라고 할지언정, 산슈카의 법리는 거대한 흐름에 있어서 현대의 그것과 닮아 있는 부분이 많았다. 보이지 않는 데서 눈가리고 아웅하듯한 비리나 불법이 있을지언정 적어도 대놓고 국격을 해칠만한 일은 벌이지 못하리라.


제냐는 최악에서 한 발짝 더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동료들과 함께 운트 작힘 백작의 모든 사병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상황 말이다.

그도 아니라면 세슈칸의 회색 성채, 산슈카의 제국기에는 로멜리아의 것이었던 그 성의 담을 뛰어넘고 운트 작힘 백작에게 달려가 그를 제압한다거나.


둘 다 정면 충돌이었는데, 전자는 소수 정예로 한 기습이 잘 안풀렸을 때고 후자는 계획이 조금 잘 풀렸을 때이리라.

목적이 있고 상대가 전쟁을 방불케 하는 무차별적 태도로 나온다면, 제냐 역시 그런 수단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전투를 준비하며 질리언과 페이브를 단련시킨 것이기도 했고.


그리턴 자작가의 인맥이 생각보다 막강했다. 제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는 산슈카의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부디 그렇다면 좋겠군요.”


중앙 권력이 실종되고, 어떤 최소한의 법리마저 상실된 채 야만화된 나라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투의 말이었다. 제냐의 말은.

산슈카의 사정이 그런 곳들과는 달랐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으니.

제냐가 콘란드 대륙에서 다녀 본 곳은 산슈카 국내가 전부였지만, 플레이어로서 들어서 아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


NPC들이 발생시키는 퀘스트와,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행동들이 서로 최악의 시너지를 내서 이미 나라가 엉망이 된 사례들도 몇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외부의 지식을 갖고 내부에 들어온다. 아직까지 학문도, 정치 체제도 그렇게까지 견고하지 못한 콘란드 대륙의 평균은 ‘외부의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허술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개혁을 일으켜서 나름대로 명예 점수를 쌓고 전 대륙적인 변화를 만들려는 생각들은 여기저기서 있어왔다. 플레이어 혼자서 어떤 위업을 달성하는 것보다, 전 대륙의 NPC들을 규합해서 일을 만든다면 역사서에 적힐 행보를 이어나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다.


그렇게 여러가지 방식으로 메인 스토리 급 퀘스트의 발생과 클리어를 노렸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은 과도기적 단계에서 포기하게 되었고, 대륙 한 지방의 나라나, 크게는 여러 개국이 악영향을 받아 해당 지역의 플레이 난이도가 더 올라가는 결과도 많았다.


제냐는 산슈카의 변방, 피스 시에서 시작했지만 이 나라를 바꿀 의도나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대로 흘러가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었다.

지금의 상황 역시 그가 일부러 물길을 바꿀 뜻은 없다. 가만히 있어도 이미 산슈카에 깊이 뿌리를 내린 그리턴 자작이나 로멜리아 가의 실력자들이 알아서 진행을 해주는데, 그가 끼어들 것까지야.


“그리고··· 이번에 움직일 때는 충분한 병력과 같이 하도록 하지. 미치지 않고서야 전면전을 벌이지는 않겠지, 운트 작힘도. 그리턴 가의 기사단 중 정예 열 명이 함께 하겠네. 줄리앙 자네와 두 명의 호위··· 제냐 킴 경도 함께 한다면 충분하지 않겠나.

초상술사 둘을 거기에 더하고.”


기사 열에 초상술사 둘. 거기에 제냐와 줄리앙, 질리언과 페이브라면 차고도 넘치는 전력이기는 했다.

어지간한 마을 규모의 용병 길드와는 전면전을 벌여도 되리라.

물론 용병 길드가 하나의 기치로 모여 있는 군사 집단은 아니었지만, 만일 그에 속한 소속 용병들 전체와 싸운다고 쳤을 때 말이다.


기사급, 이라는 건 세슈칸같은 대도시에서도 용병이나 모험가 길드에 들어가 은급이나 금급 이상의 솜씨를 단번에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기사의 전투력에도 물론 편차는 극심하고, 자기류의 싸움법을 익힌 용병들에 비해 기사가 조금 더 안정적인 전투 능력을 가지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이기는 했다.

그러나 대강의 논리와 평균값으로 거칠게 가늠을 해보자면 그러하다.

기사들 중에서도 중견 기사들, 이제 막 기력술을 터득한 자들이 아닌 충분하게 자신의 기술을 가다듬고 많은 연전 끝에 일류 이상의 기세를 갈고 닦은 자들은 금급에서도 상위이거나, 혹은 금강 급에 비견할 수 있으리라.


세슈칸의 용병 길드의 관점에서 볼 때였고,

이런 비교는 많이 허술한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세슈칸 시티와 다른 곳의 용병 길드가 또 기준이 다를 테였고, 용병의 등급은 일괄적인 근접 전투 능력이 아닌 다양한 활용성에서 추가 점수를 얻는 기준이기에 그렇다.


개인의 신체 능력은 턱없이 낮더라도, 무언가 특별한 기술이나 솜씨, 지식을 갖고 용병 길드를 위해 헌신한다면 얼마든지 등급은 높아질 수 있다.

기사들이 당장 길드에 들어가 앞으로의 헌신을 약속할 시 받을 수 있는 등급이 그 정도라는 것 뿐이었다.


어쨌든 무장한 초인 16명은 어떤 전장에서도 유의미하게 쓰일 수 있는 전투 유닛Unit(전투에서 특정 임무를 위한 부대 단위)이다.

전쟁터에 통용될만한 수준이란 것은,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그런 규모의 접전이 벌어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세슈칸은 온갖 군데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대한 자유 도시였고, 산슈카에 막대한 세금으로 재정을 충당시켜주는 알짜배기 땅이었다.


그만큼 중앙에서 파견한 병력들이 수비대의 임무를 다하며 그곳에 몰리는 수많은 인원과 모험자들을 관리했고, 해외 인력들로 인해서 중부 대륙 내부의 자유 연맹 속 일이기는 하지만 국제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는 조심스런 곳이었다.


세슈칸의 영주이기에 운트 작힘 백작은 힘을 얻었고 권력을 휘두르며 오만방자하지만, 사실 세슈칸 시라는 특수성이 아니었다면 더욱 편하게 자신의 야욕을 드러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대도시의 한복판에서 전쟁과 비슷한 일을 저지르기는 힘들 것이다. 그 수많은 인간들은 해외에서 온 모험가들도 포함하고 있었고, 그만한 수의 건장한 장정들은 혼란 속에서 폭도로 변한다 해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어쨌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세슈칸에 투입되어 있는 왕국 소속의 수비대가 움직이고, 국가적인 사태가 되리라.

운트 작힘이 그런 짓까지 벌이려고 할까.

고작해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습을 하려는 일이라면, 일단 그리턴 자작가로부터 보내주는 지원군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열 여섯을 무리없이 잡으려면 두 배는 가져와야 할 것이다. 작힘 백작가의 기사단 수가 50에서 60여 명이니, 기사단의 반절을 사용할 배짱이 있는가의 질문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줄리앙은 헤슈나의 눈치를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헤슈나는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줄리앙의 말에 자신의 뜻을 더한다는 이야기로 보였다.


조금 이른 점심 만찬을 즐기면서, 그들도 슬슬 로키 캐슬에서의 정비를 마치고 세슈칸으로 떠나기로 했다.


아드리안은, 주변 상황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자신 앞에 놓인 호박 스프를 빠르게 흡입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냐는 그 꼴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다가 그리턴 가의 요리장이 내놓은 훈제 오리 통구이를 발라 먹었다.


*


마차는 아름답게 조형된 물건이었다.


이것을 만드는 데 얼마만큼의 젠Jen이 들어갔을 지 알지 못한다. 아마 동량의 금으로 마차 표면을 칠하는 것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금은 아니지만, 그 외관과 내부 곳곳에는 아티팩트Artifact가 들어가 있었다. 아티팩트는 고급으로 갈수록 많은 경우 보석류를 이용하고 있기에, 금보다는 단위 당 가격에서 단연 앞서게 된다.

거기에 투입된 초상력(SP)과 장인의 솜씨, 아티팩트 메이커의 스킬 값까지 친다면 단순 계산으로 헤아리기 힘들다.


물론 아티팩트의 소재에도, 들어가는 솜씨에도 수준 차이는 있었다만.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고, 그 마차를 몰고 있는 두 마리의 준마와 같은 털 색깔을 일부러 맞춘 것인지, 검은 톤에 고급스런 원목의 갈색 느낌이 섞여 들어간 마차이다.


얼핏 보면 알 수 없는 다양한 디테일에서 장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마차의 정확한 가치를 알아보는 건 안목이 필요한 일이었다.


제냐는 물건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고, 마차를 유심히 살필 일도 많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기능미였고, 현실적으로 그의 목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였으니.

이제는 조금 달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마차의 생김새는 단순하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아티팩트 내장 스킬이 얽혀 있는 것이며, 용법에 따라 사용한다면 능히 현대전의 전차처럼 이 세계에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뒤로부터 말이다.


이제 그의 눈에 마차가 조금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낮.


로키 시티의 어느 마구간.


성채의 정문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말들이 머무는 숙소가 있었다. 지푸라기로 대충 깔아놓고, 시종일관 푸르릉거리는 말들이 머물고 자고 하는 곳이다.


목재로 가로막힌 각 칸마다 그리턴 가의 전력이 되는 준마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들어차 있었다. 그런 축사의 앞마당 부근에 마차 한 대가 서있고, 그것이 로멜리아 가에서 운용하는 ‘슈페리얼 2호’였다. 마차의 별명이다. 슈페리얼 1호는 남작 가에서 운용을 하다가 십 여 년 전 전투 때 망가져서 소실되었다.


총 세 대가 있고, 3호차가 로멜리아 령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요인을 태우고 이처럼 먼 거리를 여행할 때 쓰기도 하고, 거친 용도로는 무관 등의 간부가 탄 채로 전장터를 누비기도 한다.


1호차는 전 남작, 작고한 자힌 로멜리아가 그렇게 타고 몇 명의 기사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비다 부숴먹었다.

만일 로멜리아 령 근처의 영주간 신경전이 격화되면 3호차 역시 비슷한 결말을 맞을 확률이 높다. 로멜리아 가는 왜소한 몸집을 가진 가문이었고, 지금 가문의 저력을 총동원해서 애를 쓰고 있는 상황이다.


“타시게.”


줄리앙이 일행들을 이끌었다. 페이브와 질리언이 먼저 마차의 마부석에 탔다. 안쪽으로 아드리안과 헤슈나가 미리 타 있었고, 객실의 남은 자리에 줄리앙이 제냐를 권하는 것이다. 제냐가 고개를 저었다.


“리스트 경 먼저 타십시오. 제가 바깥에 앉았다가 돌아가면서 길을 보겠습니다.”

“그럴텐가?”


별다른 말 없이 줄리앙은 훌쩍, 마차에 올라탔다.

왔을 때와 비슷한 행색들이었다. 아드리안과 헤슈나는 움직이기 편한 경장에 두께감이 있는 망토를 걸쳤고, 리스트 역시 양복에 비슷한 물건을 걸쳤다.


제냐는 늘 같은 모습이다. 전투가 임박하면 인벤토리에서 몇 가지 방어구를 더 꺼내서 살이 보이는 곳이 없도록 조금 더 신경을 쓴다. 그렇다고 신체 전부를 가죽판이나 쇠판으로 덮는 것은 아니었고. 중요 피격 부위와 타격 부위들 위주로 감싼다.


슈페리얼 2호에 앞서, 여러 마리의 말들이 얌전히 대기하고 있었다. 마차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가지런히 도열해 있는 갖가지 톤의 털색을 가진 준맏믈이다.


훈련받은 군마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짐승들 곁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었다. 그 곁에 시립해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로, 복색은 으레 전쟁터의 기사가 그렇듯 판금 갑옷을 입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잘 갖추어서 채비를 마친 노련한 인원들이다.

너무 튀지 않도록 제각기 망토나 로브 따위로 장구를 가렸으나 잘 손질된 탄탄한 가죽, 합금, 사슬 갑옷 따위로 무장을 했다.

그리턴 가의 갈색 사슴 기사단은 제식화된 무기 형식이 있었지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일률적으로 사용하는 장비가 있고, 그에 추가해서 개인 장비를 몇 종 더 다루어도 되는 셈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제식 장비에 대한 숙련도는 필수였다.

난전 속에서 진형을 갖추고 훈련된 합격 따위를 할 때 통일된 장비와 조직적인 움직임은 필수였으니 말이다.


군인이란 발맞추어 걷는 자이다, 라는 말처럼 기사들 역시 군대의 한 부속으로서 전장터에서 활약하려면 그런 노력이 필요했다.

뛰어난 개인, 엘리트화되고 초인화된 전력은 분명 막강하지만 제식화된 초인 병력은 더욱 강력하다.


그리턴 가의 정예들로 열 명을 뽑았고, 다시 초상술사 두 명이 합류했다. 그들 역시 다종의 실전적인 초상술을 다루는 전투 병사들이었고, 각기 그리턴 시티에서 몬스터들의 분포도를 낮추기 위해 애를 쓰던 특수 병종의 엘리트 군인들이었다.


데슈칸 산맥의 말단인 로키 산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다. 콘란드 대륙에 다양한 비소祕所, 심유한 비처가 많지만 데슈칸도 그에 못지 않은 인류의 활동 범위 외 지역이다.


데슈칸의 심처는 아무래도 플레이어들조차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고레벨 사냥터였으니. 아마 호아킨과 릿샤가 잡았던 검은 용같은 것들이 여러 개체 있으리라.


인류의 정복지에 데슈칸 산맥은 아직 전부 들어가지 않았고, 그곳에 자생하는 여러 종류의 신비한 동식물들은 그 자체로 천혜의 자원이라 할 수 있었다. 동식물 뿐만이 아니라 광물질 따위의 소재들도 마찬가지이다.


제국기를 지나 왕국기에 접어 들면서 로키 산을 본령으로 정한 그리턴 가는 천 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산맥을 지키며 적응해왔다.

많은 자원이 있었고, 그것들을 수집해 직접 활용을 하던 수도 사르삿 따위로 옮겨 팔던, 부족하지 않은 재화를 늘 수급해왔다.


그리턴 가의 병력이 탄탄하고 군마를 비롯해 그 외 재원들 역시 모자람이 없을 수 있는 이유였다.


“잘 다녀오시게들.”


마차의 곁에 그리턴 자작이 나와 있었다. 안주인은 몸이 좀 좋지 않다고 미리 저택에서 인사를 전했고, 바깥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 하이샨 그리턴이었다.


슬하에 아드리안과 헤슈나 사이의 나이대인 귀여운 소년과 소녀를 자식으로 두고 있었지만, 머무는 동안 그리 깊이 친해지지는 못했다. 낯을 가리는 편인지 귀여운 금빛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두 아이들은 먼발치서 인사만 쭈뼛거리며 나누는 게 대부분이었다.


식사를 할 때도 아드리안이나 헤슈나의 기색을 살피면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면 멋쩍게 인사를 하는 정도였고. 사내 아이는 아마 아드리안을 좋아 할지도 몰랐다. 아드리안은 마치 인형처럼 생겼고, 잘 꾸며놓으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미모를 갖추고 있었으니.

두 남매 중 동생인 론 그리턴, 십대 초중반 정도의 녀석은 아드리안 앞에서 유독 바보처럼 굴었다.


여러 가신들이 그리턴 자작의 뒤로 나와서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고 있었고, 그런 이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남매도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제냐는 그 녀석들을 보고 피식 웃었고, 줄리앙이 마차에 오르자 뒤이어 객실칸에 탔다.


슈페리얼 2호가 출발 준비를 마쳤다. 질리언이 먼저 고삐를 잡았다. 모든 채비를 마치고, 앞서서 진형을 갖추었던 이들 역시 차례로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탄다. 등자를 밟고 훌쩍 오르는 기사들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데슈칸의 실전 전투를 겪어낸 초상술사들도 그저 정신력 스텟만 올린 빈틈 많은 NPC들은 아니었다. 적절한 전투 능력을 함양한 전투술사들, 워 메이지 혹은 배틀 메이지라 따로 불러야 할 부류이리라.


밝은 낮.


다같이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전날부터 시작된 여행의 준비와 행낭을 모두 실어 마무리하고, 점심까지 시간이 한참 남은 때 그들이 로키 캐슬을 떠난다.


세슈칸으로 간다.


여러 명의 지원군과 함께.


미리 도착했을 중앙의 인사들이 어디까지 운트 작힘에 대해 파헤쳤을 지 알 수 없었다. 운트 작힘 백작의 진정한 속내를 모두 알았더라면, 법무부의 양심적인 인원들이 과연 로멜리아 가의 편을 들지 않고 베길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지만-(그리턴 자작은) 앞으로 벌어질 실제 상황이 어찌 될 지는 가봐야 아는 일이었다.


10명의 노련한 베테랑 기사와, 워 메이지의 칭호를 달아도 부족함 없는 초상술사를 붙여 주고도 하이샨 그리턴은 ‘병력이 조금 부족한가······’하고 생각했다.


약간 아쉬운 듯하지만, 로키 캐슬에서 제냐와 질리언, 페이브가 보여줬던 무용이 잘 잊히지 않는다. 저들이라면 아마 잘 해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개멋진나 최··· 라는 자도 있었고 말이다. 그리턴은 그 자를 넣어서 전력에 포함시키지 않은 걸 문득 깨달았다.


나중에 로멜리아 가 일행의 도우미같은 자인 제냐 킴의 동료라며 합류한 세시앙 인이었다. 대부분은 흑발 흑안에 다른 인종에 비해 얼굴 골격이 두드러지지 않은 편이었다. 개멋진나 최라고 하던 자는 흑발은 아니었고 약간 톤이 다른 회색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궁술사이긴 했지만, 그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제냐 킴과 거의 같은 생김새의 특징들이었다.


제냐 킴은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모험과 방랑으로 중부 대륙을 떠돌며 살아왔기에 산슈카의 자세한 물정이나 사정, 그리고 귀족가의 격식에 밝지 않다고 했다. 실제로도 그런듯 보였고.

다만 개멋진나 최라고 하던 이는 그보다는 능숙하게 그리턴 자작인 자신을 대했고, 짧은 인사와 소개 이후에는 로키 산 그 숲 속에 숨어 혼자서 수련만을 반복하던 사내였다.


나름대로 로키 캐슬에서 머무른 시간이 있었지만 정작 처음 인사를 할 때 외에는 제대로 말도 해보지 못했고, 얼굴도 잘 익히지 못한 자이다.

그까지 해서 열 일곱. 가만 보면 마차의 앞에 만들어진 인마 행렬의 끄트머리에 어느새 몰래 끼어 있는 꼴이다. 그리턴은 멀리 있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피식, 웃음이 나는 걸 느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실력자들이 많이 있다. 신용을 할 수 있는가, 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줄리앙 리스트가 믿어주는 사내라면 쉽사리 배신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력적인 면에 있어서는, 두 낯선 모험가 모두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냐 킴은 말할 것도 없고, 개멋진나 최라는 궁술사 역시 얼핏 보여주는 기력술의 경지가 결코 낮지 않았다.

합동 대련을 할 때 슬쩍 실력을 보이는 모습을 지나가며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산림 속을 그리턴 가의 레인저 부대마냥 들쑤시고 다니더니 큼지막한 중형의 괴수들을 잡아서 로키 캐슬 내부로 끌고 오던 모습을 기억하면.


로키 산의 흉종凶種이라 할 수 있는 로키 그리즐리 베어가 있었는데, 어지간한 장정은 아이처럼 보이는 괴물을 잡아와서 성채 내의 인원들에게 마음대로 유용하라며 건네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젊은 실력자를 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자신이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도.

로키 산 내부, 성채의 가주 좌座에 앉아 산슈카의 형국을 가늠하며 한탄만 하던 세월이 얼마나 되었는가.

나름대로 깊은 정을 나누었던 친구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심지어 알지조차 못했다. 그 흉수가 근처에 있다면 군을 다 일으켜서 복수를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산지기 가를 이끄는, 산슈카를 생각해야 하는 고가의 가주로서 함부로 전쟁을 벌일 수도 없었다.


쉽게 해결된다면 그것이 가장 좋다. 만일 최악의 경우가 온다면, 정말 왕실에 성토를 하면서 당장 그리턴 가의 정병들을 움직여야 할 지도 몰랐다.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는다면, 사대고가를 상징으로 하는 산슈카의 정통파 가문들과, 왕국기 이후 산슈카의 정세를 주도했던 많은 신진 세력들이 양갈래로 나누어져 전면전을 벌이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일만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면서, 그리턴 가의 가주는 오랜 친구의 신하와 두 딸들, 그 외 사내들을 성채에서 보냈다.


“이랴!”


선두에 선 기사들 중 책임자라 할 수 있는 로맥 칼버그 경이 선창하듯 기합을 내질렀다. 발치로 탄 말의 배 즈음을 툭 치면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고, 그 뒤로 말들의 행렬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슈페리얼 2호가 바퀴를 굴렸다.

마차를 끄는 로즈와 덴드의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즐겁게 꼬리를 흔들며 나아가는 두 마리 흑마의 궁둥이가 그래 보였다.


“곧 뵙겠습니다.”


줄리앙이 마차 객실칸의 덧창을 열고 말을 전했다. 낮은 음성으로 말했지만 왜인지 멀리까지 뚜렷이 들린다.

노신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리턴은 말없이 손짓으로 배웅했다.


그러다 이내 답답함을 느꼈는지, 굴러가는 마차 속의 이들에게 말을 건낸다.


“모두 잘 될 거네.”


꾸욱 눌러 강하게 발음하는 말소리가 줄리앙 리스트에게도, 그리고 그 내부의 이들에게까지도 들렸다.


그리턴의 목소리가 컸기에 주변에 섰던 가신들이나, 그리턴 가의 두 남매에게도 분명하게 들렸다.


잘 될 것이다.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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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뜨거운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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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 릿샤Rissha의 방 23.08.16 23 3 17쪽
58 57. 사연 23.08.13 32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7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5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6 3 14쪽
54 53. Could you join us? 23.08.05 30 4 34쪽
53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23.08.04 29 4 35쪽
52 51. 굳세어라 안드레 23.08.04 26 4 19쪽
51 50. "허억." 23.08.04 26 4 20쪽
50 49. 달려가는 소시민들 23.08.02 31 4 25쪽
49 48.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어진 23.08.02 27 4 36쪽
48 47. 최태현은 빨랐다. 23.07.31 29 4 25쪽
47 46. 로웰 드버는 결심했다. 23.07.31 34 4 34쪽
» 45. 석별惜別 23.07.30 36 4 25쪽
45 44. 결정의 주체 +3 23.07.29 36 4 45쪽
44 43. 그리턴 자작가에서 그간 23.07.29 29 4 25쪽
43 42. 호아킨 팍스Joaquin Pax 23.07.25 29 3 29쪽
42 41. 사촌 형제 23.07.24 29 3 18쪽
41 40. 로키 캐슬 23.07.24 28 3 20쪽
40 39. 운트Unt의 의뢰 23.07.23 27 3 30쪽
39 38. 그리턴, 갈색 사슴 23.07.23 33 3 29쪽
38 37. 등산 23.07.23 26 3 31쪽
37 36. 트레이닝Training 23.07.23 26 3 32쪽
36 35. 제이미 숄더 23.07.20 28 3 51쪽
35 34. 전진하는 요새 23.07.19 34 3 32쪽
34 33. 강도단 23.07.19 30 3 31쪽
33 32. 붉은 다리 협곡 23.07.19 29 3 34쪽
32 31. 협곡 진입 23.07.15 31 3 31쪽
31 30. 마차 안 23.07.14 37 4 30쪽
30 29. 돌아가는 23.07.13 35 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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