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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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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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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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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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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쪽

48.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어진

DUMMY

*


최태현은 빨랐다.


그는 궁수의 감각을 모두 사용했다. 매의 눈과 들쥐의 눈을 복합 사용해 얻는 기감계 효과의 사용은 물론 천공의 눈 같은 번외의 스킬들까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쓰이고 있다.

패시브 형과 그 스택으로 인해 얻는 복합 보정, 발동형 스킬의 효과까지 순식간에 차오르며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화살을 쥐고 있을 때 그는 가장 강한 편이다. 아무래도, 레인저라는 클래스가 그런 식이었다. 근접 전투 역시 가능은 하다만 제냐처럼 전문가의 느낌은 조금 부족했다. 누구나 방점을 찍는 분야가 있는 것이다. 한 가지에 집중을 하다보면 다른 것에 모자람이 있게 마련이고.

제냐는 전천후에 가까웠지만, 궁술만을 놓고 보자면 최태현이 아직 앞선다.


지난 로키 캐슬에서의 시간은 제냐가 가진 여러 능력 중에서 근접전과 초상 스킬전을 더 능숙하게 만들었고, 최태현은 궁술 한 가지만을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적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소재로 화살이 만들어졌다. 이름대로 붉은 기운이 도는 목재의 화살은, 합금으로 장인이 제련한 철시에 비해 아주 약간 강도가 부족하지만 기력술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훨씬 뛰어났다.

자연적으로 타고나길 더 MP친화적인 소재들이 있었다. 명장의 솜씨라면 장인의 다듬음이 본질적인 소재의 특성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특이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보통 소재의 탁월함이 기력술에 용이한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있어 첫째가 되는 요소였다.


어느 정도 수준이 있어서, 물리 계열 공격직이라도 MP를 숨처럼 다루며 기력술이 공격의 주가 된 이후부터는 적목시가 오히려 더 강력한 화살이다.


최태현은 어둑한 기분을 느끼며 감지 계열 스킬로 먼 산림 속을 더듬었다. 소리로 듣기에 이미 군단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발력이나 집중력 등, 스텟이 오르면서 감각 계통의 기능 역시 진보한다.

스킬의 패시브 스택 따위가 더해지고 몸에 차고 있는 아이템의 기본 효과가 더해진다면 더욱 가파른 증가폭을 보인다.


개멋진나 최, 의 예민한 감각으로 거대한 무리가 상상되었다. 불투명한 정보들이었으나 머릿속에서 종합된 모습은 그러하다.

상대의 움직임 역시 거대한 MP로 이루어진 스킬이 장악한 무언가인듯, 감지 계통 스킬이 원활하게 먹혀 들지는 않았다.

상대가 만들어 둔 가상의 벽을 뚫듯이, 애를 써서 감지 계열 스킬을 운용하고 MP를 다루어야 조금 숨통이 트인다.


검은 안개로 가려진 채 보이는 듯한 상대방의 형태가 비로소 감지 기술의 감각에 잡히는 것이다.


바로 지척까지 왔음에도, 빼곡한 수풀 속에 가려져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기감 스킬로는 보였어야 할 지점임에도 알지 못하고 조금 늦게 그 모습을 파악했다.


최태현은 헛숨을 삼켰다.


짐작은 했다만, 대군의 내용을 알게 되니 어쩔 수 없었다.


몬스터 아웃브레이크. 그가 처음 떠올린 것이다. 콘란드 대륙 각지에 일정한 분포도를 가지고 자생하는 괴물들이 이따금씩 프로그램이 버그를 일으키듯 비정상적으로 밀집한 뒤 인류의 터전을 향해 오는 경우가 있었다.

자연적인 이유와 인위적인 이유가 있는 현상이었는데, 어느 쪽이든 지키는 입장에서는 극악한 난이도의 디펜스 게임이 된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최태현이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으나, 오늘로서 비슷하게 알 수 있을 테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한 건 게임 오버에 대한 상상이다.

아직까지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을 플레이하면서 그다지 어려운 점을 느끼지는 못했는데. 이 놈의 게임은 난이도가 심하게 들쭉날쭉이라, 플레이어마다 플레이 스타일마다 체감하는 난이도가 크게 차이난다.

최태현에게 있어서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아직 그 흉악한 면모를 보이지 않은 차분한 성격의 친구같은 것이었다.


오늘로서 일그러진 친우의 뒷면을 볼 수 있겠구나, 하고 느꼈다.


최태현은 침을 삼키면서 조용히 집중했다. 당황은 빨리 밀어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외부인에 가까웠고, 로멜리아 가나 그리턴 가, 그리고 그들과 제법 오래 지낸 제냐와 달리 집단의 결속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의 준비 자체는 그가 가장 빨랐다. 제냐보다도.


개멋진나 최, 는 시위에 매긴 적목시에 자신의 MP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도 놀고 있던 게 아니다. 로키 산에서 혼자 무사 수행을 하듯, 레인저로서 기량을 갈고 닦기 위해 험지를 드나들며 사냥을 계속했다.

제냐는 자신이 맡은 퀘스트의 NPC인 질리언이나 페이브, 라는 자들과 함께 했던 것 같지만. 근접전에서의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은 최태현이 할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도 제냐가 그러하듯 아주 잘 싸울 수 있기는 하지만. 조금 더 집중하고 발전시키고 싶은 분야는 결국 중원거리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궁술사 클래스의 기술들이었다.


거목의 꼭대기에 아슬아슬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감지 스킬로 주변 몬스터를 색적한 뒤 닥치는 대로 쏘아 잡았다.

몬스터가 거목에 닿아 나무가 쓰러지거나, 자신이 있는 꼭대기에 올라와 근접전이 되면 거기서 멈추는 식이었고, 그 전에 화살만으로 다가오는 놈들을 모두 죽이는 방식의 연습이었다.


아주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었다. 거기다가 로키 산은 데슈칸 산맥의 일부로 차고 넘치는 몹들이 있었으니, 훈련에 얼마든지 매진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들이 움직이며 사냥했던 험지들에 다른 NPC나 플레이어들이 있지는 않았다. 로키 산은 제법 컸고, 데슈칸 산맥은 더욱 거대했다.


산슈카 왕국만 하더라도 중부 대륙의 약소국이라지만 그 면적만 놓고 보면 현실의 한반도보다 훨씬 컸으니, 또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평지 면적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니. 다른 이들과 자주 마주치진 않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깊은 집중력으로 지난 시간 게임 속에서의 활동에 열정을 쏟아내며 캐릭터를 키웠다. 제냐가 들인 공에 비해 그리 부족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궁술 스킬이 사용된다. 헤비 샷Heavy shot이라는 액티브 스킬이었다. 로키 산에서의 사냥 중에 획득한 스킬이었다. 그전부터 스킬을 얻기 위해 관련 경험치를 꾸준히 누적 시키던 것이기는 했다.


최태현은 주로 공략본을 틈틈이 살펴보고, 캐릭터 육성을 위해 어떤 식으로 플레이 해야 할 지 정한 뒤 그대로 하는 편이다. 제냐와는 다른 플레이 스타일이다. 각기 장단이 있었고, 최태현은 자신의 플레잉에 만족했다.


헤비 샷은 기력술 중 MP가 많이 들어가는 액티브 스킬이었다. 기본적으로 기력술이 전제되는 스킬이었고, 고로 중수 이상에서 사용하게 되는 게 일반적인 시점이다. MP를 잘 빨아들이는 소재의 무기 역시 준비물로 필요하다. 적목시는 그가 구할 수 있는 수준의 물건 중 가장 효율이 좋았다. MP반응률도 그렇고, 그런 소재들 중에서 가격대비도 그렇고.


더 좋은 소재와 물건은 언제든지 있지만, 결국 금전적인 문제는 현실적인 타협선을 제시한다.


붉은 나무로 지어진 화살대에 웅웅거리는 떨림, 소리마저 들리는 것처럼 MP가 빨려들어갔다. 최태현의 MP는 기본 스텟만으로 3,000여 정도 된다. 개중에 300을 사용한다면 일반적인 의지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력술은 초상력만으로 투사체를 형성하거나, 효과 전부를 감당하는 초상 스킬과 달리 뚜렷한 실물에 공격력만 더하는 것이기에 MP소모가 적다. 100에서 150정도가 한 번에 소모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헤비 샷이 가능했다.


MP량을 올려주는 ‘정순한 호흡’이나 ‘술사의 기관’같은 스킬들을 따로 익혔고, 그다지 획득 조건이 어렵잖은 패시브 스킬들은 그의 MP량을 올려준다. 그 외 몇 가지 장신구류 아티팩트를 사서 혁대에 꿰어놓기도 했고.


동시에 스텟 증가 효과를 받을 수 있는 아티팩트 개수는 한계가 있는데, 최태현은 MP량 증가 쪽에 상당히 많이 투자한 편이었다.


제냐는 그가 세슈칸에서 파티 플레이를 하던 시절 억지로 몇 개를 쥐어 주어서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원래는 따로 아이템 효과를 보고 있지도 않았으나.


어쨌든 최태현의 MP량은 뻥튀기처럼 부풀어서 4,500정도 선이었다. 그럼에도 의지력이 증가한 건 아니라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MP의 상한은 300여 정도다. 무리한다면 과용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안정성이 줄어들어서 과손실이 일어나고, 정확도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공격의 명중률 따위가 말이다.


최후의 한 수로 근접 거리에서 써먹을 수는 있겠다만.


어쨌든 헤비샷은 넉넉하게 머금은 적목시 내부의 기력을 활용해서 온전히 발동된다. 모인 기력술의 MP에 추가적으로 ‘중량’ 보정을 더한다. 같은 샷Shot이라고 하더라도 묵직한 맛이 있는 화살 한 발이 되는 것이다. 실제적인 효과였고, 맞는 입장에서 본다면 방패를 가져다 대었을 때 확연하게 다른 충격을 받을 것이다.


속도가 줄어드는 것 없이 무게만 늘어난다. 물론 무한정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고, 화살 투사체의 크기, 질량, 들어간 MP에 상관해서 증가폭은 계속 달라진다. 그럼에도 어떤 화살을 쏘더라도 상대에게 늘 1.2배 이상의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기술임은 맞았다.


가볍게 말아쥔 듯한 활대를 잡은 그립이다. 그의 순발력은 상당한 편이었고, 손가락이나 손을 움직이는 근육 역시 굉장했다. 악력이 좋다는 뜻이다. 올곧게 뻗은 검지 하나가 조준을 보정한다.

단지 그런 자세가 아니더라도 사냥꾼의 자세, 궁수의 감각 따위 다종의 스킬들이 그의 명중을 돕고 있지만 말이다. ‘천공의 눈’ 등의 스킬로 시야가 분할되었고, 분할된 장면 속에서 붉은 예상 궤적선이 나타나있다.


온 몸의 근육들이 탄탄하게 조응하며 각부의 역할을 다한다.


마치 멋있는 춤을 춰내듯이, 익숙한 자세로 두터운 거목의 나뭇가지 위에 자세를 잡고, 최태현은 화살을 당긴다.


마물들이 다가온다.


얼핏 보이는 것들만 고블린 수 백마리, 갈색 오크 백 여 마리, 다이어 울프 수 십마리 정도이다. 대략적인 가늠으로도 점이 아니라 면의 이동처럼 느껴지는 군대였다. 산책로의 한 가운데. 로키 산의 중턱. 고작해야 십 수 명 남짓한 병력으로 막아내기에 저건 그야말로 파도나 다름 없었다. 간신히 살아남는 것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최태현은 아군의 진형을 살핀다. 마차를 중심으로 그리턴 가의 기사들이 둥글게 둘러싸며 방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가장 앞선 자는 가장 강력해 보였던 NPC로, 옌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사람들이 부르던 걸 기억한다.


그 외에 그의 친구이자 게임 파트너, 동료 제냐는 마차 지붕 위에 올라서 자신처럼 궁술을 조준하고 있었다. 그의 것보다 조금 더 길다란 장궁은 제냐의 무식한 물리 스텟으로 단번에 당겨 철시를 포탄처럼 쏘아내는 물건이었다.

제냐의 활보다 조금 더 좋은 물건인 그의 활이었고, 비슷한 나무 질감의 그것이지만 소재가 약간 좋았다.


궁술 위주로 쌓인 스킬들의 스택 효과 역시 무시할 수 없고.


더 이상 가늠할 건 없었다.


최태현은 기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군단의 머리를 보았다. 당장 잡히는 건 어수선하게 움직여야 할 몬스터들이 마치 누구의 지시라도 받듯이 질서정연하게 다가오고 있는 모습 뿐이다. 가장 앞서서 제 몸을 들이밀고 있는 각 덩어리의 선두, 오크와 다이어 울프와 고블린 중 발이 빠른 놈들의 대가리를 노렸다.


슈욱, 하고 탄탄하게 당겨진 시위가 제 몸을 앞으로 밀어 적목시를 날렸다. 붉은 기가 감도는 화살대, 그 앞에 꽂힌 화살촉이 바람을 가르며 난다.


헤비 샷이다.


투명한 기력이 용솟음치듯이 그 화살의 전신에 묻어났다. 짐승이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듯, 화살 주위로 기력의 기류가 터져나오며 앞으로 간다.


몇 개의 장애물을 늘 그래왔듯 능숙하게 넘고, 부수고, 공기를 갈라내며 묵직한 한 발이 전진해 오크의 대가리를 터뜨렸다.


*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선두를 달리던 갈색 오크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현실이었다면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겠으나 비련의 시나리오는 모자이크로 빈틈없이 잔인한 장면을 메꾸고 있었다.


빛이 산란하며 흩어지는 피와 살점을 대신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머리가 없는 꼴이 잔인스럽기는 하다만.

대가리를 잃은 거대한 돼지 인간은 그대로 죽었다. 걷던 관성 그대로 대가리가 꿰뚫렸다. 헤비 샷은 화살이 아니라 마치 철퇴로 후려친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애초에 묵직한 화살을 쓰는 궁사의 공격에, 기력술이 실리고 무게감과 충격량을 더해주는 액티브 스킬이 걸리니 일어나는 결과다.


최태현의 활 역시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뒤로 당기지 못할 물건이었다. 그의 레벨도 로키 산에서 가혹한 사냥행 덕분에 50을 넘겼다. 스텟 역시, 40에 근접한다. 고되게 플레이를 할수록 스텟은 잘 오른다. 어차피 사용자가 감당하는 부하의 총량에 따라 늘어나는 일이기에. 거기다가 자신의 레벨과 스텟, 가지고 있는 전투력 따위에 과도할 정도의 난이도로 플레이를 하면 된다.


하드한 플레이를 즐겼던 유저들은 모두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한 단계 위의 강인함을 얻어냈다. 호아킨이나 릿샤 역시 그렇다. 제냐 역시 꾸준히 그런 식으로 성장했고. 제냐와 함께 다니며 그렇잖아도 진지하게 게임을 하던 최태현은 한층 더 매니악한 유저가 되었다.

하드한 전투 플레이, 는 결국 집중력과 몰입감이 필요했다. 비록 게임이라지만 어느 정도 피지컬, 신경 반응과 현실에서의 운동 능력도 약간의 영향을 주었다.

바깥에서 가지고 있는 운동 신경은 결국 게임 내부에서도 적용을 하기에. 같은 조건의 스텟을 가졌다 하더라도 탁월하며 초인적인 수행이 가능한 게임 내의 육체는 좋은 신경이 있을 때 더 정밀하게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정밀 수행은 결국 순발력 스텟의 과부하로 이어지고, 순발력의 빠른 성장으로 귀결될 것이다.


몸의 각 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얼마나 인지하고 하나하나 세밀하게 다루어내느냐가 훈련의 관건이었다.


이런 감각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이 게임이기도 하고, 그래서 운동계 쪽에서 한창 감각을 살리고 훈련해야 하는 층의 수련생들이 자주 찾기도 했다.

정밀한 운동 신경만을 극대화한 뒤에 곧바로 현실에서의 트레이닝으로 연결한다면 동작 수행 능력에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것이 운동계의 공통된 견해였다.

물론 따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의 도움이 필요 없을 수준의, 자기 분석과 이해가 뛰어난 일류 운동가는 현실에서 몸을 굴리며 세세한 조정을 계속 해나가면 될 것이었다.


최태현은 헤비샷을 일단 연달아 날리기로 했다. 오크들은, 고블린들은, 그리고 다이어 울프 떼는 별다른 기성도 지르지 않고 무기질적인 객체가 된 것마냥 숲 속을 전진해나갔다.


앞선 선두 한 마리가 죽었고, 곧 그 몸이 쓰러져 뒤따라 오던 것들의 진로를 방해했지만 크게 개의치도 않았다. 몬스터들을 다루는, 그 1-200미터 정도 뒤 지점에서 따라가는 로웰이 정밀하게 조작했다. 선두의 몇 마리가 헤비 샷의 충격으로 뒤로 넘어가는 오크의 사체를 걸으면서 대충 밀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대로 밟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으로 변화하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상대방도 물론 초인적인 수준의 엘리트 병사들로 호위 인력을 꾸렸다고 생각했기에 로웰로서는 놀랄 것 없는 상황이었다. 몬스터들의 진격이 빠르다. 숲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지난다.

공격이 왔다는 것은 이미 알아챘다는 이야기다. 로웰이 진군 속도를 높였다. 다이어 울프들이 더욱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고, 여러 마리는 제 앞을 가로막는 숲 속의 장애물들을 다각적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뛰어넘어 간다.


개개의 전투력을 따진다면 이중에서 다이어 울프가 가장 높을 것이다. 소나 말이라고 착각할만치 거대한 덩치를 지닌 놈들이 날렵했다. 그 이빨은 대거와 같고, 빛나는 눈은 목표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맹수의 의지를 대변했다.

굼뜬 인간형의 몬스터보다 날랜 맹수형의 몬스터가 훨씬 까다롭다. 지능마저도 제법 교활한 편인 다이어 울프들은 아마 로웰이 테이밍, 지배에 가까운 스킬을 풀어내면 눈 앞에 보이는 인류를 잡아먹기 위해 짜맞춘 듯한 움직임으로 단숨에 달려들 것이다.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부담스러운 돌격이었다. 황소같이 생긴 늑대의 돌격이라는 것은. 초식 동물의 그것과 다른 날렵함이나 예리함이 있었다. 목줄기를 물어뜯기 위해 다가오는 예상이 어려운 동선이나 발톱과 이빨에서 오는 위기감이다.


다이어 울프가 선두로 치고 나갔고, 오크와 고블린들이 서로가 먼저라며 엎치락뒤치락하듯 뛰어간다. “우아아아아아아!”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는 조금 질감이 달랐다. 몬스터의 성대도 결국 크게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조금 더 야성적이었다. 톤 역시 더 긁는 소리에 강렬함이 있어 멀리까지 울렸다.


제각기 다른 음으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오크와 고블린들이다. 움직이는 소리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란을 일으키며 나아가자 온 숲이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몬스터들이 군대처럼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암살단의 일원들은 조용히 뒤로 빠졌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몬스터 대신 일단 저들을 산책로에 붙들어두고 로키 산에서 처리해야 했기에 기민하게 움직이던 것이었는데.

로웰의 마물술, 테이밍 스킬이 제대로 발동하자 그들이 할 일은 하나로 좁혀졌다. 몬스터 무리가 상대의 발길을 붙잡고 혼란을 유도하고 있을 때, 난전 속에서 정확히 목표 대상들을 죽이는 것이다.


로웰의 마물술이 지배력을 잃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하기 시작할 때에도, 약간의 추가 MP만 소모하면 피아 정도는 구분케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적극적으로 운트 작힘의 병사들에게 길을 내준다거나 협조를 하게끔 하는 복잡한 구분 동작은 어려웠지만 알아보고 공격케 하지 않게 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피아 구분이 가능하며 간단하다라는 말은 말이다. 운트 작힘의 병사들, 로멜리아 가 일행을 죽이기 위해 숨죽이며 뒤따르는 자들을 적으로 보고 암살 목표 대상인 산책로의 인원들을 아군으로 보게 할 수도 있었다.


로웰은 거대한 몬스터 무리를 이끄는 전장의 지배자였다. 물리 스텟이 빈약한 대신에 정신력 스텟에 모조리 자신의 능력이 들어가버린 극단적인 초상술사. 술사 부류의 클래스들이 대개 드러하듯, 그들은 정확한 준비와 밑재료만 있다면 최강의 전투력을 전장에서 발휘한다.


넉넉한 MP포션과 스킬 발동을 도와줄 다종의 아티팩트, 자신이 발휘하는 초상스킬에 딱 어울리는 전장의 상황 따위.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지만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술사들은 전장을 떨게끔 하는 대형 포대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감지술사들이 하는 일은 이제 거의 끝났다. 어차피 방향과 위치를 알았으니, 마차를 가지고 굼뜨게 움직이는 자들을 잡지 못할 것이 없다. 다이어 울프들은 그 냄새로 이미 목표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달리고 있었다.

울프들이 뒤따르는 이족보행의 굼뜬 마물들을 이끌 것이다. 회색, 흰색, 검은색 따위가 뒤섞인 늑대들의 터럭 색이다.


마치 갈기를 휘날리듯이 온 몸의 긴 털들을 바람에 날리며 달리는 놈들이 인상적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두를 차지하는 놈들이 계속해서 바뀌어나갔다.


로웰은 몬스터들을 감지 도구로 사용해, 그것들이 움직이는 곳의 지형과 상황을 파악했다. 다이어 울프의 경우에는 놈들이 인식한 범위까지 얼추 예상해서 알 수 있었다. 울프들이 앞길을 훤히 예측하고 빠르게 뛰고 있으니, 예상 경로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로웰은 뒤따라 달리면서 호아킨과 릿샤를 보았다. 둘은 아마 로웰과 팀일 것이다. 애초부터 배치된 진형상에도 그러했다.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두 명이 그의 호위인 것부터 로웰의 마물술이 작전의 핵심이라는 점을 증명한다.


호아킨과 릿샤는 로웰의 굼뜬 달리기 속도에 맞추며 나란히 달린다. 로웰은 둘의 표정을 종종 살폈고, 그건 지금의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느끼는 불안감 탓도 있었지만 정확한 행동의 타이밍을 맞추려는 의도적인 일이기도 했다.


“닿으면, 바로, 달려가시오.”


로웰이 뛰면서 중간중간 호흡이 끊겨 말했다. 그 이야기에 호아킨은 그를 바라보며 고갤 끄덕거린다. 릿샤는 전음의 실이 아직도 연결되어 있었다. 일부러 끊지 않는다면,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다면 적은 MP로도 오래도록 유지하면서 팀 간의 작전 회의에 요긴하게 써먹히는 스킬이었다.


[몬스터들은, 당신이 제어하는 거지? 작힘 가의 기사들을 노리도록 만들어 두었나?]


로웰은 달리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릿샤 역시 알았다는 듯 맞추어 끄덕인다.


그녀의 손이 한 발 정도 계속 앞서는 호아킨의 한쪽 팔꿈치를 퍽, 때렸다. 호아킨이 그녀를 본다. 앞을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노련해진 전투직은 기력술로 근거리 감지가 가능하다. 기사 수준의 전투를 하면서 기감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오감만으로는 초인적인 스피드를 따라가기가 어렵다.


초인적인 신체 능력은 곧 상식을 벗어나는 궤도의 공격들을 많이 파생시키고, 그건 익숙한 눈이나 귀의 감각만으론 모두 대처하기가 힘든 종류였다.


여전히 언제 나무 뿌리던 나무의 기둥이건 튀어나올지 모르는 숲 속을 달리면서 호아킨은 릿샤를 보았고, 그녀가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으로 말했다.


‘몬스터들 갖다 박으면 바로 기사들 뒤에서 치자. 로웰이 기사들 쪽으로 몬스터 어그로를 돌려놓겠다고 했어.’


호아킨이 뛰며 고갤 끄덕거렸다.


기력술은 신체에 적용시켰을 때 근력과 순발력 등 다양한 스텟 증가 효과가 있었다. 신체의 감각 역시 끌어올릴 수 있었는데, 원거리 기력감지가 부족한 근접직의 경우 이따금씩 눈의 안력이나 귀의 청력에 기력술을 발휘해 극단적으로 예민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달려가는 와중에라도 기사의 감각에 걸릴 수 있었으므로, 희박한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굳이 전음이나 독순술로 이야기를 나누고 전하는 것이다.


“크흠.”


호아킨이 목을 거칠게 가다듬었다. 주변 사람들이 처다보지는 않았다. 제각기 집중력을 발휘하며 목표물을 향해 달리고 있는 순간이다.


*


최태현이 두 발의 화살을 더 쏴 날렸다. 선봉을 서고 있는 몬스터의 대가리를 날려버리겠다는 생각의 실현이다.


빠르게 날아간 적목시 두 대가 차례대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고블린 한 마리와 다이어 울프 한 마리에게 꿰여 들어갔다.


고블린은 거대한 도끼나 철퇴에 맞은 것처럼 그대로 두부가 사라져 스러졌다. 앞서던 놈 하나의 머리를 꿰뚫고 그 뒤에 있던 녀석의 몸통을 깊이 파고들 정도로 화살의 여력이 남았다. 둘 모두 헤비샷이었다.

다른 한 발은 앞서던 다이어 울프의 눈을 찔렀다. 신묘한 지경에 다다른 궁술이었다. 그의 기초 궁술은 과반을 넘었다. 기초라 할지라도 Good, 7단계 즈음의 궁사가 되면 보통 현실 지구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명인, 묘기술의 달인이나 그보다 나은 실력이 된다.

기초 궁술을 비롯해 각궁술, 복합궁술, 컴파운드 궁술, 장궁술 계열의 여러 종류를 익히고 있었고, 주력으로 경험치가 들어가고 있는 스킬은 ‘궁도弓道1’이었다. 아직은 3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만 궁술가의 길을 간다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기술이었고, 마지막에 다다라야 하는 스킬류였다.


궁도가의 마음가짐은 차분하다. 그런 패시브 스킬은 최태현의 심장 박동을 느리게끔 한다. 호흡이 미약해지다가 순간 멎고, 무도에서 자연체라 부르는 상태처럼 경직 반응 없이 의도한 대로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게끔 되는 때가 오면 시위를 놓는다.

그 일련의 과정은 오래도록 수련한 것인양 손에 잘 붙는다.


쑤욱, 쑤욱. 활대에 불편하게 서있다가 차례대로 밀려 날아가는 적목시들은 기력술로 강화되어 매섭게 굴었고, 지독한 파괴력으로 적들을 꿰뚫었다.


다이어 울프의 눈을 찌른 적목시 하나는 다각적으로 움직이는 재빠른 맹수의 빈틈을 정확히 맞춘 신기였고, 그 너머의 뇌 기관까지 파괴시킨다. 깊이 파고들어간 적목시의 말단에서 기력술의 잔여물이 터져나온다. 헤비 샷의 일환이었고, 보통은 머리가 부서지는 정도의 위력이지만 다이어 울프의 강인한 두개골과 두부는 박살나진 않았다.


대신, 내부가 진탕이 되어 순식간에 그 맹렬하던 짐승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가라앉다 못해, 빛을 잃고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관성에 의해 앞으로 날던 놈이 쿠당탕! 하며 커다란 나무에 그대로 제 몸통을 처박았고, 굉음과 함께 한 마리가 스러졌다.


다른 놈들은 위기감도 감각도 없는 놈들인양 아무렇지 않게 계속 뛰었다. 늘 그게 가장 무서운 법이다. 멈춤을 모르고, 공포도 없다는 것처럼 달려드는 적군을 상대하는 일이 말이다. 싸움이라는 건 늘 기세가 많은 요소를 차지하는 법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적은 이미 반절쯤 이기고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는 손가락에 걸리는 화살의 감촉을 즐겼다.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철시궁은 제냐와 마찬가지로 몇 번의 인챈트를 거쳤다. 광택이 없는 검은빛의 활이 되었다. 그 위에 불그스름한 적목시가 걸쳐지고 계속해서 날아간다.


기력을 감지할 수 있는 눈으로 보자면 불꽃에 휩싸인 포탄이 날아가는 것이나 비슷한 광경이었고, 어지간한 초상 스킬에 뒤지지 않는 MP가 한 발 한 발에 담겨 날아가 꽂혔다.

쾅, 쾅.

거센 소리와 함께 몬스터들의 피격 부위가 날아가거나 거칠게 찢어졌다.


최태현이 공격을 하듯, 제냐 역시 장궁의 시위에 철시를 걸고 있었다.


최태현이 자리를 잡은 커다란 나무의 중간 즈음에서 한참 아래로 내려간 뒤에, 가도 쪽으로 시야를 옮기면 보이는 곳이다.

장인의 솜씨로 만들어진 마차, 슈페리얼 2호의 지붕 위에서 제냐는 시위를 당긴다. 마치 적목으로 만들어진 듯 붉은 기운이 감도는 활몸은 제냐의 MP에 수월하게 반응한다. 다른 활을 쓰는 것보다 그 복합궁을 손에 드는 것이 MP를 사용하는 데 있어 효율적이리라.


철시 역시 제법 괜찮은 소재였다. 적목시보다는 덜하지만, 어쨌든 제냐는 오롯이 깡 힘으로 활대를 부술듯이 뒤틀어 당겨 장전했고, 쏜다. 장궁은 힘을 받기에 조금 더 좋았다. 신체 전부를 쓰듯한 근육의 굴곡이 곧 화살의 파괴력이 된다.


기력술로 들어가는 MP역시 넉넉하게 집어넣고, 최태현이 그러하듯 그도 기력 감지를 사용한다. 그보다는 늦게 깨달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기력 감지의 준수한 사용자였다. 칼날 위에 선 검객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 한 켠, 위험을 알려온다.


천공의 눈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스킬들이 색적 가능한 범위가 합쳐진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스킬을 사용할 때보다 더 넓은 범위를 자세하게 눈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캐릭터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것과 다른 앵글에서, 다양한 시점이 분할 화면으로 나타나며 그가 집중하고자 하는 쪽에 비중을 두어 비율이 설정된다.


정면은 노리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어찌저찌 궤적이 나올듯 하다. 이미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 몬스터 무리의 돌격 앞에서 제냐는 일단 미약하지만 공격을 시작하기로 했다. 붉은 점선이 화살의 궤적을 가리켰고, 그는 조심스럽게 가늠하며 정확한 포인트를 잡았다. 가장 앞서 오는 놈들은 다이어 울프다.


한 마리를 잡기도 벅찼던 때가 있었다. 오크류와는 차원이 다른 신체 능력을 가졌고, 피스 시에서 그가 드잡이질을 하며 잡았던 황야 지룡이 HP도 스피드도 올라갔다고 상상하면 얼추 비슷했다.

황야 지룡은 덩치가 컸지만 굼떴고, 초보자 용의 몬스터로 너프Nerf(게임 등에서 밸런스를 위해 캐릭터 따위의 능력을 하향 조정하는 것)를 당해 HP도 방어력도 약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가 레벨 10, 20부근에서 안간힘을 다해 단검을 박아 넣어서 죽일 수 있었고.


그런 초보자 용이 아닌 지룡을 만난다면 상당히 고전을 해야 하겠고, 다이어 울프들 중 가죽이 튼튼하고 골격이 강한 놈들은 온전한 지룡 류라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중대형 정도의 거구가 탄력적인 근육으로 채워져 있어서 재빠르게 날뛴다. 여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놈 중 하나의 눈을 보았다. 이글거리는 늑대류 맹수의 눈빛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이것은 사냥이었고, 전투라 동물원에서 감상을 하듯 할 시간이 없고 그 눈알에 화살을 박아넣어야 하리라.


철시가 날았고, 무식한 힘과 MP가 들어간 사격은 최태현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기세로 허공을 가른다.

실질적인 데미지나 받는 입장에서 공격의 까다로움은 헤비 샷 등 액티브 스킬이 적용된 부류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에 준한다, 라는 의미로 비슷하다는 뜻이었다.


빠르게 날아간 철시는 눈으로 좇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였고, 휘어지듯 유영하며 나무 사이를 지나 다이어 울프 한 마리의 눈알에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빠르게 움직이는 짐승의 눈알 맞추기, 라는 묘기는 제냐로서도 조금 도박수에 가까운 것이었고 아마 다음번에 똑같이 맞추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잘 먹혀 들었고, 다이어 울프 한 마리가 다시 더 쓰러졌다. 몬스터들은 자비도 동료애도 없는 괴물들인양 계속해서 다가온다.


다이어 울프, 고블린, 오크들.


제냐를 비롯해 다른 이들도 몬스터들의 구성을 대강 파악해가는 듯 하다.

기사들은 방진을 굳히며, 기력의 기세를 끌어올린다. 그리턴 가의 비전 검술을 보여줄 차례라도 되는 것 같다. 줄리앙은 마차의 한구석에서 석궁을 꺼내들어 갈기고 있었다. 다행히 마차의 옆칸 바로 앞에는 기사가 없어서 사로가 확보가 된다. 작은 마차의 창문 틈새에서 쉼없이 날아가는 석궁살이 제법 위협적이다. 오크나 고블린들한테는 충분한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다이어 울프는 워낙 빠르기도 하고 가죽이 질겨서 눈알 같은 약점부에 맞지 않는다면 치명타까지는 힘들어보였다.


옌 마퉁, 그리턴 가의 기사가 낮고 위엄있게 지껄였다.


“지켜라!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진의 위력을 보여라!”


실제로, 로키 산에서 잔뼈가 굵은 병사들인 그들은 비전 검술을 익히고 이런 국면에서 사용한다. 로키 산에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사태란 곧 외국군의 침략보다는 이와 같은 몬스터 아웃브레이크의 상황이다. 여러 종류의 몬스터들이 거체로 밀고 들어오는 상황 속에서, 주민을 비롯해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이들을 뒤에 두고 물러설 수 없는 그리턴 가의 기사단들이었을 테다.

역사적으로.


그런 사정 속에서 발전한 강력한 방호 검술은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옌 마퉁을 빼고서 나머지 아홉 명이 마차를 뒤에 둔 채 반원을 형성했다. 그 간격만큼은 자신들이 지켜내야 했다. 쌍검을 사용하는 기사들도 있었고, 기다란 창을 꺼내든 인간, 쌍도끼를 쓰는 기사도 있었다.

제각기 기본 무장은 제식검이나 창이 있었지만 유용성과 실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쓰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번에 발휘할 합격진은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개인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그 재량에 의존하는 형태인 모양이었다.


옌 마퉁은 반원의 가장 정면부, 몬스터들을 선두에 맞이하는 자리에 서서 기력을 사용한다. 서서히 그의 신체 내부를 휘돌면서 스텟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그의 MP가 기세로서 느껴진다. 그 검붉은 머리가 어디서 바람이라도 부는지 일렁거리고 흐트러지는 것 같다.


고도의 기력술사가 사용하는 기력은 유형적인 힘을 가지며 구체화된다. 검기가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신체에 둘러져 사용되는 MP들도 물리성을 띄는데, 그처럼 머리카락이 조금 넘실거리는 모습이 아마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변화다.


그건 MP의 양과 기력술의 운용 경지가 둘 다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다른 기사들에게서 쉽게 보이지는 않는다. 옌 마퉁은 MP, 곧 정신력 에너지의 유동과 함께 정신을 최대한 고양시켰다. 전투 시의 감각이 필요하다. 그는 오늘 죽지 않는다. 혹 죽을지라도 지켜야 하는 뒷 자리의 손님들은 지키고 죽으리라. 그는 한 손검 하나만을 단출하게 들고 있을 뿐이다. 그와 같이 제식용의 검을 든 기사가 하나 더 있었다.


반원의 왼쪽 말단을 차지한 자였고, 뒤로 이어지는 산책로의 경계에서 맡은 구역이 가장 작은 자이기도 했다. 오른쪽 끝을 차지한 사람 역시 방어해야 하는 범위가 가장 좁다.

힘이 조금 남으면 옆 사람의 짐을 덜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맨 끝에 자리한 기사는 푸른 머리를 덥수룩하게 길러내고, 마찬가지의 수염이 난 중년 즈음의 사내였다. 옌과 비교해서도 노안처럼 보인다. 실제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의 굳은 표정과 무미건조한 눈빛, 그러니까 푸른 머리의 왼쪽 끝 기사 말이다. 그의 얼굴에서는 알듯 모를듯한 여유가 베어나왔다.


옌 마퉁은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자 이 호위인단의 책임자 격인 인간이었지만, 그리턴 자작은 그러고도 혹시나 있을 사태에 대비해 실력자 한 명을 더 끼워두었다.

기사단의 정식 일원은 아니지만, 그리턴 가의 명예로운 기사이며 그리턴 자작의 개인 호위로서 일하던 로키 캐슬의 검술 교관 켄 마누엠이었다.


갈색 사슴 기사단에 들어오게 되는 초임 기사들은 모두 켄 마누엠의 강의나 교습을 거치며 기사로서의 기본 검술을 가다듬고, 그리턴 가의 제식 검술을 알려주는 일 역시 켄의 몫이었다.

오로지 그만 하는 건 아니었고, 기사단의 선임들이 자체적으로 지도편달을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사람을 그러모아 익히게 하고 또 종종 단원들의 기술 디테일을 봐주는 중년의 사내다. 그는 존재감 없이 일행 속에 파묻혀 있다가 무탈하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여정의 시작부터 이 지랄꼴이 났으니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속내를 감추며 입을 앙다물고 있던 차였다. 옌 마퉁 역시 그가 몇 번 검술을 봐주었던 적이 있는 사내였고, 또 그만큼 잘하는 인간이라는 걸 알았기에 큰 걱정까지는 없었지만······ 여차하면 여기서 다 목숨을 당장 걸어야 했다. 몬스터 떼라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마차 속의 인물들이 없다면 숲 속으로 도망쳐서 살아남기라도 할텐데, 산책로를 벗어나기에 마차의 크기는 여의치 않다. 내부에 있는 인원들만 끌고 달아나기에도 영 불편한 위험이 있고 말이다.

전차와 같이 기능하는 로멜리아 가의 특수 마차에 대해서는 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턴 자작에게서 들어서. 가급적이면 지켜야 하는 요인은 그 객실 내부에 자리하는 게 낫다. 그들이 외부 상황을 처리하고.


아마 오래 버티면, 산책로를 감시하고 있는 캐슬 본부에서 인원들을 급파해줄 것이다. 그 사이에 별다른 변수가 없었다면 좋겠지만······.

다시 거듭 생각하듯 목숨을 다 걸어야 할 지도 모른다. 이미 이 상황부터가 예상 밖이었으니, 앞으로 어떤 예상 밖이 더 덮쳐온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한 손검의 칼날 위로 자신의 머리칼 색깔을 닮은 듯한 푸르스름한 검기를 덧씌웠다. 한정된 MP로 최대한의 공격력을 실현하고 나머지는 적당히 피하거나 흘려보낸다. 그가 타고난 천재성으로 발전시킨 스타일의 전투법이었다.


다가오는 몹들을 상대로 어디로 도망가지도 않은 채, 인마로만 견고한 성벽을 짓는 기사들이었다.

개중 한 축을 담당하는 옌과 켄은 투기를 불태우며 첫 사냥감의 목덜미를 기다렸다.


*

shripal-daphtary-3BbEYiIV7bo-unsplash.jpg


작가의말

옌과 켄.

명기사 둘입니다.


뭐,

고블린도 다이어울프도 오크도 아니지만 대강 저런 동물 떼의 진격같은 느낌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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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0. 마차 안 23.07.14 36 4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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