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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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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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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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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1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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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쪽

46. 로웰 드버는 결심했다.

DUMMY

*


성문이 열리는 순간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누구일까.


로키 캐슬의 정문 말이다.


대감 집의 현관이 열리듯, 검은 톤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의 한 가운데에, 두터운 목재로 이루어진 대문이 열렸다.

그야말로 대大문이었다. 어지간한 인간을 네, 다섯 번 이상 쌓아 올리면 저 위에 닿을까. 그래도 3분의 2지점 정도에서 멈출 것 같은 위용이 있었다. 현대식의 건축물이 아닌 것에서 이런 장엄한 무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했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거대한 제국의 유산이던가, 혹은 이런 판타지 세계관에 있는 가상의 물건이던가 말이다.


이런 유산을 남겨놓고 역사서에 떡하니 자신의 이름을 박아넣지 않은 문명이 없을 것이다. 콘란드에서도 이 문명 유산의 전부는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이름은 남겼다. 산슈카 제국이라고.

제국기에 건조된 로키 캐슬은 왕국기에 들어서며 그리턴 가가 본인들의 본가로 삼았고, 오랜 왕국기 동안 증축과 변형을 거쳐 지금의 모양을 완성했다.


그리턴 가 이전에는 나름대로 이름 있던 제국의 산지기 가문이 있었다. 당시엔 데슈칸 내부까지 제국의 정복령이었고, 지금보다 인류의 영역이 훨씬 넓었으며 자유로웠다.

시간이 지나고 관리 부실과, 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초입인 로키 산맥의 건축물만이 형상을 남기고 있다.


장엄한 건축물이 작동한다는 것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격스러움이 있었다. 멀리서 그것을 가만히 감상하고 있노라면 말이다.


마차의 열린 틈새로 넓게 펼쳐지는 로키 캐슬의 정문을 바라보고, 그 아래 쭉 뻗는 산책로를 구경하며 제냐 역시 그런 감정을 느꼈다.

현대에는 잘 없는 형식의 건축물이다. 피라미드니, 그런 것들이 있지만 굳이 보러 구경을 가야 했다. 또한 그런 류가 이토록 깔끔하게 남아서 거기다 움직이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야말로 현실을 1:1 비율로 옮긴 뒤 새로운 역사를 시뮬레이트 해서 묘사하는 비련의 시나리오 속에서나 구경하는 장관이다.


그렇게 마차를 타거나, 혹은 말들에 올라탄 채 로키 캐슬의 바깥으로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그 문을 움직이고 있는 도르래병이나 인력과 기계의 힘만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거체를 돕는 아티팩트 작동병 따위가 성문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느끼고 알아챘을 것이다.


인지 이전의 단계로 가보자면 출정하듯 채비를 갖추고 나서는 이들을 배웅했던 그리턴 자작, 성문을 열라고 지시했던 지휘관들의 체계 속 인물들이 있을 것이고.


그러나 성문의 움직임에 직접 관여하거나 미리 계획을 알던 자를 제외하고는, 바깥에서 로키 캐슬의 동태를 가장 먼저 파악한 이들은 따로 있었다.


산책로 인근, 감시 체계에 걸리지 않도록 산림의 수풀 속에 모습을 감춘 채 오랜 시간 대기를 하던 ‘운트 작힘 백작’의 고용병들, 그리고 사병들이었다.


그들은 로키 캐슬의 전면부 전경이 감지술사들의 스킬에 잘 걸리도록 적당한 각도와 위치를 찾은 뒤 베이스 캠프를 다시금 꾸렸다.

이전에 분지에 차렸던 것보다는 훨씬 약식이었고, 간신히 몸을 누이거나 앉아서 쉴 정도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긴 시간을 버티려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로웰 드버는 기사들의 눈총에 못이기듯 작전 수행을 위해 인근 몬스터 분포도를 살폈다. 감지술사들의 도움이 있기에 스킬 활용이 더 쉬운 면이 있었다. 드버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조력이었지만 말이다.


그들도 마침 아침 식사를 건식으로 대강 때운 뒤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로웰은 간이식으로 변형한 테이밍 스킬을 이용해서 인근의 고블린 떼와 갈색 오크 떼, 그리고 다이어 울프 무리를 몇 군데 나누어서 분포시켜 두었다.

일시적으로 괴물들의 주인이 되는 강력한 테이밍 스킬을 사용하면서 물약을 마셨다. 로웰 드버는 35,000이 넘는 MP를 보유하고 있었고, 강력한 의지력을 가지면서 자신이 활용하는 스킬의 최대 위력을 발휘 가능한 인간이었다.


수준이 떨어지는 초상술사에 비해 동량의 MP로 훨씬 막대한 일을 일으킬 수 있었고, 금강 급의 용병, 마물술사가 펼치는 테이밍 스킬에 로키 산의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현혹되었다.


보다 지속적이며 견고한 테이밍Taming을 위해서는 그 또한 해야 할 밑작업들이 많기는 했다. 그러나 아주 단발적인 복속, 한 가지 짧은 행위를 위한 것이라면 어디서든 순식간에 해낼 수 있는 것이 로웰 드버가 가진 특성이었다.


그와 비슷한 추정 레벨을 가진 마물술사라 할 지라도 로웰 드버만큼의 힘을 내지는 못할 경우가 많으리라.

그 개인이 가진 마물술사로서 천부적인 패시브 스킬들이 특성으로 붙어 있었고, 그 외에 초상술사로서도 일류의 솜씨를 가졌기에 가능하다.

로웰 드버는 본디 초상술사로서의 길을 가던 인간이었고, 도중에 진로를 변형했다. 테이밍 류의 스킬들이 자신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며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힘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그의 인생 여정 여러 곳에서 천운이 따랐기에 테이머들, 마물술사에게 필요한 희귀한 장비들 역시 많이 얻었고, 그런 아티팩트의 도움으로 능력은 배가된다.


세슈칸 시티 정도의 수준에서 이런 마물술사는 강력한 개인 군단이나 다름 없다.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흉포하며, 인간을 바라보고 달려들기에 적군의 본령 근처에 마물을 이동만 시키더라도 나머지는 그 몬스터의 공격성이 알아서 일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공격의 시기는 아니었고, 다만 그들이 자리 잡은 근처에 알맞은 때에 움직일 수 있도록 몬스터 무리들을 배치해놨을 뿐이다. 위치를 조정당한 몬스터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크나 고블린, 늑대같은 놈들은 의외로 변화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다. 테이밍 스킬에 의한 일시적인 현혹이라고 하더라도 옮겨진 자리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로웰은 기다림의 시간동안 그런 일을 몇 번을 반복했고, 자신이 한 번에 부릴 수 있는 몬스터의 양을 가늠하면서 최대치를 맞춰갔다.


테이밍 스킬이라는 건 MP를 다루는 일과도 흡사했다. 다른 조건을 포기하면 일부 조건을 강화시킬 수도 있었다. 파이어 볼을 형성할 때 폭발력 대신 지향성을 높인다거나, 열량을 높인다거나 하듯이 말이다.

테이밍의 지속성과 또 행동 명령의 세세한 지시 사항들을 포기한다면 다른 요소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테이밍에는 아주 다각적인 힘 분배가 필요했고, 테이밍은 고등 스킬이었다. 설령 엘리트 몬스터들을 만드는 쪽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말 그대로 몬스터들의 흉포함은 그들의 근본 그 자체였고, 테이머의 말을 듣고 정확하게 전략대로 행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신경이 필요하다. 짜여진 진형으로 안전하게, 정해진 장소까지 이동하는 데 들어가는 점들이었다.


정해진 장소에 풀어놓고 나서 마음껏 날뛰게 할 때는 그다지 상관이 없었지만.

로웰 드버는 MP도 넉넉하게 있었고, 아티팩트로 추가되는 MP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의지력이 매우 강력한 인간이었다.


한 번은 MP가 동이 나도록 사용을 해도 다시금 최대 MP량까지 채워주는 정신력 계열의 기사회생 아티팩트조차 있었다.

보통 자신의 전체 MP량에서 10분의 1정도를 다루어내면 훌륭하고 준수한 의지력이었는데, 로웰은 본인의 한계치보다 한참은 높은 지휘력을 가진 지휘관이었다.

지휘력은 의지력이며, 지휘관이 다루는 병사들은 곧 MP를 말한다.


로웰은 기형적인 의지력의 소유자로, 자신의 전체 MP 과반수 이상을 단번에 다루어낼 수 있는 유형의 술사였다.


그 정도로 강력한 MP능력자이기에 금강 급 이상에 랭크될 수 있던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육체적인 근접 전투 능력이 부족함에도.


"로웰."


그들이 차린 베이스 캠프, 라고 할 것은 그리 대단찮은 물건이었다. 산 중에 잘 드러나지 않게 그냥 가림막, 위장막 따위를 걸치고 자리를 만들어 누울 곳을 꾸몄을 뿐이다.

초상술사들이 있으니 약간의 색적 방해 스킬이나 알람 스킬로 방비를 조금 하고. 그 정도만 하더라도 인적이 드문 숲 속, 누가 살피지도 않는 자리에 숨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준비였다.


감지술사들이 먼저 정문이 열리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낌새가 변하자 용병들의 동태를 살피던 기사들이 다음 차례로 알아챘고, 감지술사들의 보고로 확실시되었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굳이 누군가 소리치지 않더라도 눈짓이나 조용한 말만으로 계속해서 염두에 두던 작전이 슬그머니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런 사이, 암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로웰에게도 무언의 지시가 있었다. 기사들의 눈치에 그가 움직이려 했고, 그 때 그를 소리내어 부른 건 근처에 있던 호아킨이었다.


거대한 육신 탓인지, 어딘가 곁에 있는 사람에게 듬직한 느낌을 주곤 하는 호아킨 팍스다. 그의 옆에 늘 있는 릿샤도 여전히 모습이 보인다.


"어?"


로웰이 멍청히 답했다. 자신을 부를 줄은 생각하지 못하던 찰나에 들은 소리라 그렇다. 그는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고, 타성에 젖은 행동주의로 그저 작힘 백작의 병사들의 말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이대로 있다면 두 가지 선택지 중, 로멜리아 가의 후손들을 파멸로 몰아넣고 작힘과의 관계를 건사한 뒤, 외국으로 튀는 결정이 되리라. 로멜리아 가의 이름 정도는 그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차라리 의뢰의 내용을 끝까지, 조금도 몰랐으면 좋았을 걸. 아니··· 그랬다간 알지도 못한 채 복수의 칼날에 언젠가 횡액을 당했을까.


로멜리아 가는 분명 약소한 가문이지만 사대고가에 대한 이야기는 산슈카에 사는 자로서 들어본 바가 있었다. 상징적인 의미로 제국기 이전부터 이미 나라를 지탱하던 집단은 명예만은 남아 있었다.


지금은 유명무실하지만, 나중에 귀족가들의 심기가 뒤틀려서 구실을 삼고자 하면 얼마든지 얽혀을어서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다. 로웰이 말이다. 그다지 실질적인 결속, 실리나 관계를 다져오지도 않았으면서 정치적 명분으로는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는 이름이었다.

사대고가의 이름은 그런 종류의 소재로는 최고이리라. 바로 그 점이 로웰 드버가 걱정하는 먼 미래의 불행의 근거다.


산슈카를 벗어나고, 중부 대륙 자유 연맹의 먼 나라로 가거나 아니면 아예 먼 지방으로 가얄 테였다.


의뢰를 수행하든 수행하지 않든, 산슈카의 오랜 알력 다툼에 끼어든 이상 대가가 필요했다.


호아킨의 부름은 고심하던 로웰의 뇌리에 종소리처럼 현실을 일깨우는 무엇이었다.

그가 둥그렇게 붉은 눈을 바로 뜨며 바라본다.

금발 백인이 멍청하게 자신을 보자 호아킨은 생각했다.


'이게 맞는가 모르겠군.'


릿샤의 아이디어와 그녀가 생각한 타이밍이니 뭐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꼭 맞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 최적이라 생각한 이유가 있을 테지. 호아킨은 릿샤의 판단이나 머리를 신뢰한다.

호아킨도 비슷하게 느낄 때가 많고.


자신보다 디테일하게 계뢱을 수립하는 일에 머뭇거림이 없고 익숙한 편이다. 호이킨은 머리가 복잡하면 부딪히는 편이고. 대개의 일에 그런 용단과 행동성이 유용하게 먹히기는 한다. 워낙 신체적 능력이 좋아야지.


"고르시게."

'뭘' 이라고 로웰이 입을 열어 묻기도 전에 이어 말했다.


"자네 생각을 편하게 말해."


어쩔텐가, 라는 표정으로 그가 물끄러미 본다. 순식간의 일이라 주변 일행들이 알아채고 있지는 못한다. 기사들도 잠시 흘끗거릴 뿐이고.


로웰은 머리가 좋은 편이다.


잠시 잠깐의 언질이나 암시만으로 모든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인지는 모른다. 릿샤가 입술을 옆에서 달싹거렸다. SP가 움직인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것을 초상력SP이라 하고, 사람에게 종속되어 그 내부에 머물다 쓰이는 소유주가 있는 종류를 MP라 바꿔 말한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MP에 SP가 포함된다.


릿사의 운용이 참으로 절묘했다. 릿샤도 나름의 천재였고, 그녀는 한 가지 스킬이라도 자신만의 방식과 모양으로 완벽하게 써내는 일을 연습한 시간이 많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내부에서.

마치 가느다라며 '한미'하다라는 수사가 어울릴지도 모를 정도의 미세한 실이 움직이듯 했다.


허공을 뱀처럼 가로지르는 희끗한, 반투명한 작은 실 한 가닥. 그것은 MP의 움직임을 감각하는 초인의 시선으로 봐도 그렇게 잡기 어려운 형체라는 말이었다.

일반적인 눈으로 본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뒷목이 싸늘한 한기가 느껴진다면 아주 예민한 부류이리라.


어수선하고 좋은 타이밍이었다.


사냥꾼의 주의력이 가장 떨어지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냥감이 눈 앞에 있고, 달려들기 직전의 그 때였으니.

온 관심이 순간 그곳에 가 있는 자들은 다른 방면의 감각이 극단적으로 떨어진다.


모두가 일어서서 연습했던 자신의 행동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때 릿샤와 호아킨은 준비했던 다른 계획을 움직이고 있었고, 덕분에 방해 없이 짧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희끄무레한 MP의 실은 소리의 전달로였다. 뱀처럼 허공을 유영한 실이 금세 로웰에게 닿았다. 로웰의 어깨 즈음에 붙은 실의 끝자락이 그대로 로웰의 로브에 붙었다.


초상력의 실을 타고 릿샤가 달싹거리는 말이 전음傳音되었다.


‘전음傳音’ 스킬이다. 레어 급이었으나, 릿샤 개인의 소양이 높고 스킬 숙련도도 높아서 더욱 효과적이었다.


[로웰 드버. 세슈칸의 마물술사. 선택해. 이 자리에서 암살 대상이 되는 귀족가를 도울지, 아니면 세슈칸의 영주인 작힘 백작의 명령에 따를지.

우리도 이 의뢰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던 차야. 마물들을 데리고 로키 캐슬에서 나온 자들을 잡으나, 여기에 있는 기사들을 물리치나 위험도는 비등할 것 같은데.

당신 선택에 따라 우리도 어떻게 할 지 달라져. 암살 대상을 돕겠다고 한다면 우리도 돕지. 운트 작힘은 그리 믿을만한 평판의 영주가 아니거든.]


릿샤는 말이 아주 빨랐다. 전음 스킬을 사용하는 경력이 오래되어 노하우가 늘어서 더 속사포로 얘기를 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빠르게 웅얼거리는 그녀의 입이 자신과 호아킨의 속내를 전달한다.

로웰은 눈에 띄게, 그 붉은 눈을 크게 뜨며 동요했다.


애초에 철석간담을 가진 작자는 아니었다. 로웰 드버Rowell dver는.

NPC의 대략적인 속내는 릿샤가 빠르게 캐치했다. 호아킨이 느끼는 것보다도 더 상세하고 신속하게 규격화해낸 드버의 성격은 주변에 영향을 잘 받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얼마든지 의뢰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자라는 것이었다.

운트 작힘은 표독스러운 맹주였고, 신의는 그다지 없는 자였다.


세슈칸에서 오래도록 활동해 온 용병들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온유하며 인자한 영주를 연기하지만, 작힘 가의 심기를 거스르는 평민들이 대개 어떤 마지막을 맞이했는가, 에 대한 이야기는 세슈칸의 불문율처럼 전해지는 교훈이었다.

운트 작힘을 쉽게 신뢰하지 말고, 그의 곁에서 허점을 보이지 말라고 말이다.


아마 세슈칸이 지금처럼 대도시에, 어느 정도 외력이 작용하는 장소가 아니었다면.

산슈카의 변방 쪽에 위치하며 중앙 정부나 외국의 시선이 닿지 않는 폐쇄된 영지였다면 운트의 행패는 더욱 적극적이며 공개적이었을 수 있었다.

세슈칸의 시민들은 영주에 대해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의 눈길 근처에 닿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고, 가급적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데만 애를 쓰는 편이다.


운트 작힘은 자신의 야욕을 어떤 식으로든 실현시키기 위해 성채 내에서, 혹은 세슈칸의 뒷거리를 통해 늘 악의적인 계략을 꾸미고 실행하고 있었고.


은근히 도는 많은 소문들은 세슈칸의 중심지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이들의 눈과 귀, 입과 손을 통해 알음알음 전파되어 나름대로 요긴한 정보로서 쓰였다.


수도의 급파원인 킬 드로얀 역시 그런 소문의 역학 관계를 좇다 보면 운트 작힘의 실체에 의외로 금방 다다를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막 로키 캐슬을 떠나려는 그리턴 가의 기사들, 로멜리아 일행들, 또 세슈칸에서 임무를 받고 여기까지 온 암살단의 사람들은 확인할 길 없는 이야기였지만.


릿샤는 지금이 뚜렷한 기점이라고 생각했다.


로웰 드버가 애매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을 때부터 예견했던 퀘스트의 분기점.


자신이 전음으로 말한 내용처럼, 운트 작힘은 확실히 믿을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퀘스트의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고, 진행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호아킨의 판단에는 동의했지만 끝까지 운트 작힘의 의뢰대로만 움직일 것이냐고 물었을 땐, 릿샤는 살짝 부정적이다.


자신의 혼돈, 악 수치가 중요하듯이 함께 일하는 NPC의 성향 수치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쪽이 단순히 의뢰를 수행하고 신의를 지킨다고 저쪽에서도 그렇게 나오리란 법이 없었다.

약간 수세에 몰려 있더라도, 대영주를 배신한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걱정 없이 한 배를 탈 수 있는 쪽을 선택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공정성’이라는 가치는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였다.


릿샤 애드윈은 그걸 누구보다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이 게임은, 온갖 심미적인 요소, 개발진의 취향, 쓸 데 없이 불편함을 강조하는 게임성,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극악한 난이도 편차 등 파악하기 어려운 재료가 섞여 만들어낸 복잡한 하모니였지만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주제 의식이 있음이 분명했다.


전체적으로 사회-도덕적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일관된 게임 시스템의 방향성이 있었고, 절대적인 가치, 그러니까 거의 모든 역사와 공간에서 공통적으로 지키고 있는 상식적인 보편성을 따르는 노력이 있었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현대화된 사회에서의 삶이 마찬가지로, 함부로 행동하다가는 말못할 패널티를 껴안고 게임 오버까지 직행할 수도 있었다.


혹은 단순한 게임 오버보다 더 괴로운 플레이 타임이 될 수도 있었고.


인생은 게임이 아니기에 인생을 알려주기 위한 의도라면, 훌륭하다고 볼 수 있었다.


어쨌건 그런 개발진들의 의도는 뚜렷하고 이해하기 쉽다. 퀘스트의 난관을 뚫을 때, 혹은 개인적으로 플레이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어느 쪽 길을 골라야 하는가 생각할 때 이 세계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가 깨닫고 고른다면 결국 답에 가까우리라.

그건 시험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수험생의 태도와도 같은 것이었다.


보편적인 세상의 법칙을 먼저 아는 자가 승리한다. 그리고 그 보편적 법칙이란, 그 때 그 선배들이 ‘왜 그렇게 살았는가’에 대한 답이 된다. 늘 후배들, 팔로워Follower들이 나중에 깨닫게 되는 지혜들이었다. 왜 그 양반들이 그토록 무식하고 미련하게 살았는가에 대한 대답들.


릿샤는 자신이 머리가 좋다고 한 게 거짓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게임의 한 구간이 아니라 전체 구조를 파악하고 플레이한다면, 좋은 편이라고 할만했다.


직관에 따라 릿샤가 고른 것이다. 로웰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지금 이 돌발 행동은.


“으······.”


로웰은 신음소리 같은 걸 내었다.


머리가 과열될 정도로 고민하는 탓이다.


어디가 더 안전할까, 로웰 드버가 생각했다.


호아킨이 눈 앞에 있었다. 로웰에 비해 머리통이 몇 개 더 있는 것 같은 거한이다. 구릿빛 피부의 사내가 씨익 웃었다.

아메리카 원주민같은, 그런 느낌의 사내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자 로웰은 생각했다. 로웰은 지구의 아메리카 원주민 인종에 대해서 알지는 못했지만, 콘란드의 역사와 요소들은 지구의 것의 재조합이었고, 그의 눈으로 보아도 호아킨은 강인한 전사다.


‘······씁. 이 작자가 도와주는 쪽이 결국 제일 안전한 거 아닐까.’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어차피 콘란드 대륙에서의 삶은 파도 위에서 날아다니는 부표나 비슷한 것이었다. 금강 급의 용병이라고는 하지만 세슈칸 시티에서나 이름을 날린 것이었고, 도리어 그 널리 퍼진 이름때문에 지금처럼 골머리를 썩는 경우도 있었다.

로웰은 전략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지만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단은 생각보다 부족할 때가 많다. 지속적으로 몬스터를 테이밍 해서 끌고 다니도록 스킬을 익히지도 않았고, 한 마리를 특별히 강화할 기술이 부족하기에 어찌저찌 군대를 끌고 다닌다면 일상적인 삶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군주가 될 수 없다면 개털이나 마찬가지인 스킬 셋Set이었다. 그리고 그의 수준은 아직, 어느 지방에서나 군주가 되기엔 한참이나 모자란 역량이다.

어느 영주의 눈에 밉보여서 기사단이라도 움직였다간 꼼짝없이 목이 날아갈 정도. 기습적인 공격이 가능하고 유연하게 대처 가능하다는 점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다.


로웰의 눈길이 호아킨과 그 너머 릿샤의 얼굴을 번갈아 처다본다.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형태를 바로했다.

로웰은 표정을 굳혔다.


“···도와주겠소?”


정말, 이라는 강조어가 빠진 말이었다. 거기까지는 작힘의 기사들이 들었다고 해도 문제 없는 말이었다. 어차피 중요한 내용은 릿샤가 전음으로 말한다.


기사와 용병들이 앞서 나가며 정신이 없다. 후방에 있던 자들도 감지술사들의 보고에 자신들의 위치를 재확인한다. 로웰과 호아킨, 릿샤가 서로 눈짓을 하며 지체되는 게 테이밍 스킬을 쓰느라 시간이 조금 걸리는 줄 알 뿐이다. 실제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고.


릿샤가 다시 말했다. 로웰의 표정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대화가 되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움직인다. 얇은 편이다. 앵두같다, 라는 고리타분한 관용어가 어울리리라.


[얼마든지. 선택만 해, 드버 씨. 우리로서는··· 당신이 파격적인 결정을 내려주는 게 달갑겠는걸. 미래를 생각하자고. 세슈칸은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작힘 백작의 뜻에 따라 딱히 잘못도 없는 귀족을 처죽였다간 그 원한이 어디까지 따라올 지 모르지. 신을 믿나?]


릿샤는 꽤나 달변이었다. 옳은 쪽을 선택해라, 그리고 아마 운트 작힘은 불의한 쪽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고 말하는 내용의 정리로 마지막 문장은 탁월했다.

산슈카에도 종교와 신앙은 있다. 비단 산슈카 뿐 아니라 중부 대륙, 나아가 콘란드 대륙의 여러 나라들에 뿌리내린 종교가 있었다.


아직 콘란드에서 종교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단체를 조직하지 못했다. 그저 고래로부터 이어져 온 신앙의 명맥이 여러 형태로 각국의 문화에 스며들어 있을 뿐.

그 신앙에 대해 공부해 본 자라면 안다. 릿샤 역시 궁금해서 찾아봤었고. 그 신앙의 율법이나 교훈들은 결국, 말했듯 개발진이 계속해서 의도하는 ‘보편적이며 상식적인 선善’의 가치에 의거했다.


게임 속에, 어지간하면 똑바로 살아라, 고 이스터 에그인듯 아닌듯 몇 마디 문장을 삽입해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앙에 의거하여,


그 율법에 따른 어떤 종교적인 신실함을 평생 그리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혹은


자신의 양심에 의거하여,


제대로 의뢰의 내용과 사연을 알리지 않고 세력적으로 약자로 보이는 가문의 집단들을 무작정 죽이라고 한 운트 작힘 백작에게 자연스런 의심을 품어서


로웰은 결심했다.


그가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아킨이 릿샤를 보았다. 릿샤는 그들의 고갯짓에 이야기를 덧붙였다.


[좋아. 움직이자고. 말한대로 마물술사로서 마물들을 끌어 모아. 뒤통수를 치려면 사냥감 바로 앞에 있는 사냥꾼들을 치는 게 좋겠지.

다 몰아서 처박고, 그 순간에 마물들을 제어해서 기사들을 잡아. 우리도 도울테니까.]


‘용병들은?’이라고 호아킨이 눈치로 물었다. 그의 표정이나 소리없이 달싹거리는 입술에 릿샤가 말한다.

호아킨에게는 전음이 가지 않았지만, 지난 작전 준비 기간 동안 서로 나누었던 얘기들이 있었기에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로웰의 동요를 미리 짐작했기에 어떻게 하면 운트 작힘의 뒤통수를 잘 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둘이서 궁리해 보았었다.


또, 호아킨은 릿샤가 자주 전음을 쓰는 걸 알았기에 독순술讀脣術(입술의 움직임만으로 말을 알아듣는 기술)을 얼추 익히고 있었다. 위급 시, 그러니까 이럴 때 아주 유용하게 써먹는다. 몇 번 현실에서도 연습하고 게임에서도 사용하니 스킬로까지 생겨서 더 확실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일단 기사들을 무력화. 용병들은, 기사 편에 서서 우리를 공격하는 자들만 친다. 어차피 다 고용된 놈들이라 그다지 의욕은 없을 거야. 세슈칸의 백작이 얼마나 망나니인지 다들 알 테고. 은금이면.]


사람 사는 생리나 중요한 정보같은 건,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라면 모두 알만치 알 것이었다. 세슈칸에서 삶에 필요한 정보란 운트 작힘 백작의 인격이 거지같다는 점이었고.


로웰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서두르지. 놓치겠군.”


결정을 하니 움직임이 빠르고, 적응도 잘 한다. 마치 기사들과 함께 준비했던 작전의 수행인양, 로웰 드버는 천연덕스럽게 달음박질하며 동시에 거대한 MP를 사역해 테이밍 스킬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정확한 좌표도 알고, 또 근거리에 둔 마물들의 무리를 향해 스킬이 발사되었다.


알아보기 힘든 반투명한 투사체의 형태로 발동하는 테이밍 스킬은 약 200m 정도 거리까지 날아간다. 숲 속의 장애물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직선상으로 뻗는 투사체의 행로가 거침없다.

최초의 한 마리에 마치 릿샤의 전음용 실처럼 가 닿는다면, 그 개체를 중심으로 주변에 전염되듯 지배력이 퍼져나간다.


강력한 초상력은 마치 어느 지독한 식물이 뿜어내는 환각 물질처럼 마물들의 정신을 혼미케 하고, 그것들의 본질을 일그러뜨린다.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인류를 적대하고, 그저 강포할 뿐인 놈들이 한 명의 말을 듣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일시적으로 테이머Tamer인 로웰 드버를 상위 개체로 인식한다. 자신들을 이끄는 오크 우두머리, 대장 고블린, 다이어 울프 무리의 가장 강한 수컷처럼 느끼는 것이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그가 내리는 명령 또한 몬스터의 본래 지능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행동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MP라는 초법적인, 마법의 힘이 해결한다.

콘란드 대륙은 신비의 에너지가 횡행하며 실재하는 판타지 월드였다.


먼저 뒤돌아 스킬을 사용한 로웰의 시점에서 멀리 왼쪽에 있는 것이 고블린 무리다. 그의 MP가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거대한 고블린 군집을 컨트롤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천천히 소모된다.

거기다 다른 무리의 테이밍을 위해서 다시 한 번 투명한 투사체, 희끄무레하고 잘 보이지 않는 화살표 모양의 손부채 만한 크기의 스킬Skill이 날았다. 부유하는 초상력체體가 끄트머리엔 로웰로부터 시작되는 실선을 꼬리로 달고 부웅 움직인다.


육안으로 보일 정도의 속도였지만 그래도 제법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웰의 시선 정면 부근에 있는, 다이어 울프 무리의 한 수컷에게 가 닿았다.


다시금 MP가 상당량 빠져나가는 걸 느낀다. 현기증의 전조 현상이 왔지만 로웰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의지력은 상당하고, MP의 과용으로 인해 오는 고갈 상태는 아주 익숙하다. 정신력 스텟에 그의 인생을 모조리 투자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견디는 일에도 내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웰은 제법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다.


MP를 다루는 의지력 뿐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의 실제 의지력 역시 강한지 몰랐다. 단번에 수 천 단위의 MP가 사라지고 또 수 백 단위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간다. 다이어 울프 무리는 약 삼십 여 마리 정도였다. 가장 거대한 놈은 소와 비슷한 덩치를 지닌 괴물들이었다.


기사류의 초인들을 막아서고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고블린 군집은 500 여 마리에서 조금 부족할 것이다. 그 크기래봐야 소년 정도의 체격이지만 독살스럽고 집요하다. 약간의 교활함마저 악의 넘치게 갖고 있어서 오래도록 상대하고 있다면 피폐해지기 딱 좋은 몹들이었다.

어떤 자들은 이런 고블린이나 오크,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세계관 내의 몬스터들만 집중적으로 잡고 청소하듯 사냥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은 슬레이어Slayer, 천적, 전문 사냥꾼 따위의 칭호를 받는다.


마지막으로 로웰의 손짓에서 출발한 반투명한 투사체가 가 닿은 곳은 그의 시선에서 오른쪽 대각선으로 멀게 뻗은 자리였다. 산림에 생성된 공터나 혹은 빼곡한 나무들 사이 자리에 더욱 빼곡하니 자리를 차지한 몬스터들.


갈색 오크 떼거리.


나무 껍질과 비슷한 톤의 피부를 가지고, 그 어금니가 툭 튀어나왔고, 멍청한 듯 혹은 흉악스러운 광포함을 숨기는 듯 초점없는 눈빛을 가진 거구의 괴물들이었다. 2m를 넘고 2m50cm 안쪽에서 정리되는 그것들의 체장은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잘못 얼핏 본다면, 나무로 빼곡히 가득찬 이상한 공간이라고 착각할 지도 몰랐다.


데슈칸 산맥에서 오래도록 기거하며 이따금씩 찾는 인류의 수제품을 빼앗아 자신의 장비로 삼은 것들이다. 오크의 손에 들어간 무기들은 생각보다 오래 버틴다. 결합이 헐거워 보이고 녹슬어 보일지라도 말이다. 게임적인 안배였는데, 보통 사람의 무기를 빼앗아 제것으로 쓰던 몬스터를 잡아 죽이면 전리품으로 그와 유사한 무기를 얻기에 그러했다.

언젠가 사냥꾼이 그것을 잡고 전리품으로 선물을 받게 하기 위해서 게임적인 설정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어떤 오크의 손에서 무기나 장비들은 아주 오랜 시간을 버텼다. 한 마리의 개체가 수명을 다하고 다른 개체에게 넘어가서 사용되는 경우마저 있다.


멀거니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혹은 누워서 잠을 청하기도 하며 이끌린 자리에서 얌전히 대기를 하던 오크 떼에게 로웰의 스킬이 도착했다.


한 마리의 명치에 닿았고, 그 흰 화살표는 그대로 안개가 흩어지듯 형체가 사라져 해당 오크의 신체 전체로 퍼져나갔다. 흰 연기가 오크의 몸을 감싸안듯 굴었다. SP를 감지하지 못하는 오크들의 눈에는 모양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기력술을 익힌 자들의 감각에 반투명하게 움직임이 보이리라.


그 연기는 마치 포자, 유해한 가루가 흩뿌려지듯 주위를 떠돌더니 오크의 신체 내부로 흡수되었다. 정말 유독한 식물의 독이 동물에게 해를 가하듯한 연출 효과였다. 오크의 눈빛에 붉은 광기가 돌았다. 그 오크 한 마리의 변화를 시작으로, 다시 흰 연기가 뿜어져 나가며 주변의 것들에게 닿는다


완벽하게 로웰의 지배 하에 들어온 한 마리를 중심으로 테이밍이 연속해서 이루어졌다.


그의 손아귀에 강력한 군단이 들어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으로 잰다면 한 수 분 여 정도. 그만한 군대를 공짜로 얻었다고 하기에는 말도 안되는 소요 시간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 그 몬스터들을 상대해야 하는 자들이 느끼기에는 한없이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효율이다.


멀리, 자신의 일행들과 있는 로웰 드버가 손짓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자신만이 아는 시동어를 읊었고, ‘마물Monster 테이밍 고급’ 스킬이 그의 의지력에 따라 더욱 분명하게 발동한다.


유일 급의 스킬(유일 급 스킬의 경우, 정말 유일하지는 않다. 비슷한 이름과 효과를 가진 스킬들이 결국 여러 종류 게임 내에 배포되어 있기에. 비유나 과장의 의미로, 희귀 급 이상의 희귀함을 가졌다는 뜻이었다)을 가진 그는 순식간에 20,000이상의 MP를 소모했고, 그가 가진 아티팩트 하나가 웅웅거리며 발동 준비를 마쳤다.


단숨에 과량의 MP를 쏟아내는 로웰의 스킬 특성 상, 만성적인 MP 고갈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데 그럴 때 도움을 주는 아티팩트였다. 플레이어가 아닌 NPC들은 훨씬 비싼 값에 포션을 사게 되는데, 유저들은 기본 상점에서 무한의 재고를 가진 기본 물약들을 사용할 수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NPC들은 현실의 대륙을 살고 있었고, 그에 맞추어 포션 가격 또한 책정되었다. 플레이어들처럼 물처럼 쓰지는 못했고, 로웰 드버가 가진 MP 회복 아티팩트는 그런 점에서 더욱 값졌다.


그가 로브 안쪽으로 매고 있는 갈색의 가죽 허리띠가 로웰의 사정에 따라 호응했다. 테두리와 버클이 보석으로 장식되고 만들어진 물건으로, 흉포한 몬스터의 가죽을 가공해서 장인이 제작한 아티팩트였다. 4급의 물건이었고, 급수 이상의 유용성을 가졌다.

막대한 MP를 체내에 머금고 토해내던 원시림의 거수巨獸로부터 기인한 가죽이다. 가공 시에 추가된 보석류도 보통 비싼 것이 아니다.


순식간에 로웰의 MP량이 15,000이하로 떨어졌지만 아직 아티팩트의 효과를 온전히 보기엔 모자랐다. 그는 한계까지 기다렸다가 사용하기를 늘 원했다.

MP 보강, 기사회생의 아티팩트가 쓸모가 있는 건 하루에 한 번 뿐이다.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하루 중에 써먹지 않고 아낀다고 가용 횟수가 누적되지도 않는다.

최대한 이점을 보기 위해선, 테이밍 스킬을 한 번 더 운용하고 난 다음이 좋으리라.


“······오라!”


로웰이 낮고 강하게 끊어 외쳤다. 그 말이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기사들은, 용병들은 그 단호한 명령에서 강력한 MP의 유동성을 느꼈다. 로웰과 연결된 수많은 몬스터의 무리들은, 그것들의 대장이 이끄는 것처럼 명령을 들었다.

소리가 들릴 턱이 없는 거리였지만 초상력의 끈은 전음의 실이 그러했듯 그의 지시를 정확하고 명료하게 전달했다.


숲 사이, 나무들의 틈바구니를 지나 수 백이 넘는 몬스터 무리가 저돌적으로 전진해오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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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남자의 결심,


이라기엔 참 계산적이고 유약하기는 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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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 릿샤Rissha의 방 23.08.16 23 3 17쪽
58 57. 사연 23.08.13 32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7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5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6 3 14쪽
54 53. Could you join us? 23.08.05 29 4 34쪽
53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23.08.04 29 4 35쪽
52 51. 굳세어라 안드레 23.08.04 26 4 19쪽
51 50. "허억." 23.08.04 26 4 20쪽
50 49. 달려가는 소시민들 23.08.02 31 4 25쪽
49 48.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어진 23.08.02 27 4 36쪽
48 47. 최태현은 빨랐다. 23.07.31 29 4 25쪽
» 46. 로웰 드버는 결심했다. 23.07.31 34 4 34쪽
46 45. 석별惜別 23.07.30 35 4 25쪽
45 44. 결정의 주체 +3 23.07.29 35 4 45쪽
44 43. 그리턴 자작가에서 그간 23.07.29 29 4 25쪽
43 42. 호아킨 팍스Joaquin Pax 23.07.25 29 3 29쪽
42 41. 사촌 형제 23.07.24 29 3 18쪽
41 40. 로키 캐슬 23.07.24 28 3 20쪽
40 39. 운트Unt의 의뢰 23.07.23 27 3 30쪽
39 38. 그리턴, 갈색 사슴 23.07.23 33 3 29쪽
38 37. 등산 23.07.23 25 3 31쪽
37 36. 트레이닝Training 23.07.23 26 3 32쪽
36 35. 제이미 숄더 23.07.20 28 3 51쪽
35 34. 전진하는 요새 23.07.19 34 3 32쪽
34 33. 강도단 23.07.19 30 3 31쪽
33 32. 붉은 다리 협곡 23.07.19 29 3 34쪽
32 31. 협곡 진입 23.07.15 31 3 31쪽
31 30. 마차 안 23.07.14 37 4 30쪽
30 29. 돌아가는 23.07.13 35 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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