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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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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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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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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9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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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43. 그리턴 자작가에서 그간

DUMMY

*


인생은 어디로 왔다 어디로 갈 지 모르는 것이었다.


뜬금없는 생각을 하던 것은 제냐 때문이었다.


질리언과 페이브, 두 사람은 훌륭하게 훈련을 마쳤다.


본디 훈련엔 ‘마침’이라는 게 없는 법이었으나, 그들이 활용 가능한 시간 내에서 극악의 트레이닝을 마쳤으니 일단 그런 표현을 써봐도 좋을 것이다.


로멜리아 가에서 나와서, 주인과 또 존경하는 집사장과 함께 먼 여정을 떠나기 시작할 때 막연하게 가졌던 두려움이나 긴장감이 다소 희석될 정도의 연습이었다.


제냐는 미친 사람처럼 그들을 몰아붙였고, 개패듯 팼고, 몬스터의 먹이로 던져주는 사이코 패스가 아닌가 싶었다가, 때로 성자처럼 그들을 구해주었다.


성자聖者라.


애초에 그들을 위험 속에 빠트린 것이 그라는 점을 잊어먹을 정도로 괴악한 괴수 소굴에 집어 던져지면 그럼 표현이 절로 나온다.


줄리앙 리스트에게 정당하게 허락을 받은 제냐 킴은, 목적과 의도가 아주 분명한 사내였고, 강해지기 위한 모든 일을 시간 내에 했다.


데슈칸 산맥을 터전으로 삼아 온 로키캐슬과 그리턴 시티의 많은 주민들도 지나가며 그 모습을 보곤 놀라워했다.


죽지 않을 정도로 사람을 굴리거나 자신의 몸을 던져 훈련을 하는 일은, 말이 쉽지만 행동으로 하기엔 참 까마득한 난관이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제냐 킴은 그들을 위해서 스텟과 스킬을 늘리려 자신이 했던 트레이닝 방법을 거의 유사하게 시켰다.


생각보다 둘의 재능이 출중했고, 육체적 능력 또한 그 가능성이 충분하게 따라와 주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NPC들은 실제 몸이며 고통을 느끼고, 플레이어들처럼 초인적인 회복력을 갖고 있지도 않으니까 사려야 할까··· 했는데 생각보다 기사가 될 수 있도록 선택받은 재능의 소유자들은 상당히 남달랐다.


이곳이 NPC들에게 있어 실제라면, ‘실제’로 그런 말도 안되는 초인적인 근력을 낼 수 있는 재능의 인간들이니 현실과 비교해서 차이가 많은 게 당연할 지도 모른다.


이건 수많은 정보를 취합하고 조합해내는 시나리오 온라인의 관제 AI가 도출한, ‘초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일지도 몰랐다.


야채가 강함의 근원이 아닐까 하는 단상에서 튀어나온 듯한 어느 ‘용공’이란 제목의 먼 옛날 만화 속 우주인들처럼 질리언과 페이브는 두드릴수록 강해졌다.


제냐도 겸사겸사 자신의 일을 했고,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혼자서 기행을 일삼을 때는 플레이어이기에 고통에 신경쓰지 않고 과도한 트레이닝법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플레이어여서, 갖는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플레이어는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게임 오버를 의식하면서 ‘죽음’에서 분명 몇 걸음 뒤에 자신의 경계를 정해두고 플레이를 한다.


NPC들은 이 세계가 현실이라 쉬이 죽음에 다가가지 못하지만, 만약 죽음을 결단했을 때 그들은 그것을 이겨내고 콘란드 대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술류의 오의에 다다를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그들만큼 진지하게 콘란드 대륙에 몰입하지 못하기에 죽음의 근처까지는 쉽게 딛지만 그 죽음을 넘어서는 모험에 있어서는 도리어 NPC들보다 쉽게 도전하지 못하고, 그 너머에 있는 심득에도 닿지 못한다.


그게 NPC들의 최상위권 강자와 플레이어간의 격차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무수한 시간의 차이도 있겠으나 결국 경험의 질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


진지한 삶으로 여기를 살아가는 NPC들 중 수많은 전쟁을 이겨내고 칼날 위에 삶을 살아낸 검사와 그저 재미난 게임으로 기술을 익혀낸 플레이어들 중에서 누가 더 전설급 스킬의 마스터 단계에 가까울 것인가.

누구에게 물어도 후자일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가상의 세계에서 오는 분명하고 뚜렷한 이질감을 견디어내고, 그만큼 몰입을 하고 나름의 진지함을 찾아내야만 이 게임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을 테였다.


NPC들보다 강해지고, 모든 오브젝트의 정복자가 되는 것이 반드시 승리의 조건은 아니지만, 떳떳하게 어떤 방면으로 겨루어도 이겨낼 수 있을만한 강함에 다다르는 건 분명 중요한 요소였다.

필수 불가결한 요소까지는 아니어도, 시나리오 온라인의 마지막 장면에 닿기 위해서 가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얻어야 하고 얻게 되는 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부류의 클래스에서도 극의를 보지 못했으며 단순히 오래 살아남아 플레이어 중에 최후의 1인이 되어서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법도 있기야 하겠으나.

그래도 기왕 깔린 판에서 주어진 화려한 반찬을 다 맛보는 미식가가 되듯, 혹은 준비된 스테이지 위에서 모두가 기대하는 연출적 하이라이트를 제대로 연기해내는 스타 배우가 되듯 구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리라.


게임에서도 진지함이라는 게 있는가.


비련의 시나리오의 의미와 질문은 그런 것이기도 했다.


그건 게임을 만든 개발진들, 태Tae의 질문이기도 했고 그들이 만들어낸 AI, 만물박사의 질문이기도 했다.


제냐는 두 재능 출중한 청년을 혹독하게 굴리며 그들의 표정에서 몰입감을 보았고, 비록 NPC의 계산된 데이터 값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삶을 조금 반영했다.

이곳에서의 신체는 그 역시 데이터로 이루어진 가상의 복합 그래픽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는 있었다.

제냐 킴은 김서원의 별명이었고, 게임에 접속해 있을 때도 현실의 시간과 차이가 나는 하루를 살지만 여전히 그는 한국에 사는 어느 대학생이었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어딘가에서 제대로 된 결과나 열매를 얻을 수는 없다.


현실의 가장 초라한 자리에서도 자신의 삶을 제대로 받아들인 뒤에 더 나은 결말로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그 궁색한 자리가 온라인 게임 내부의 어느 한 구석이라 해도 다를 건 없었다.


게임을 하다가도 어떤 꼬맹이는 삶의 깨달음을 얻고, 한 치 정도는 정신적 성장을 이루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유년기와 사춘기가 모여서 한 명의 어른이 되곤 한다.


결국, 한 머리로 평생 살아가면서 오랜 고민을 하고 또 답을 찾고, 하는 것이 인생이니까.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 실제의 삶이니까 말이다.


위와 같은 논리로, 여가 시간에 즐기던 게임이었지만 제냐는 스스로도 조금 더 몰입을 해보았고, 기술의 극의를 찾기 위해서 진지하게 움직여보았다.


어차피 지나가는 1초라면 헛되이 쓰지 않고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해보는 것도 좋다. 무언가에든 집중할 것이라면, 게임 속에서의 현상에 관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집중하지 않아도 결국 1초는 지나가버리고 말기에.


옆에 애들이 인생을 걸고 진지하게 공부를 하고 있길래, 독서실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려다가 갑자기 공부를 몇 자 더 하게 된 어느 반푼이 학생처럼 제냐는 검류를 비롯한 각종 스킬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나아가서 전투의 본질에 닿았다.


질리언과 페이브를 떠밀다가, 그들을 구하고 자신마저 더 깊은 구렁텅이로 들어간 것이다.


어, 그러니까,


‘로키 산 고블린 소굴’같은 곳이었다.


로키 산의 고블린은 종류가 다양했고, 비슷하게 생긴 몹들도 위치와 환경에 따라 강함이 천차만별이다. 그가 발견한 적절한 사냥터는 작은 놈부터 인간 정도 크기에 우락부락한 놈들까지 다양하게 들어찬 거대한 동굴이었고, 산맥 쪽으로 이어지는 깊은 공동과 긴 길은 고블린 집락의 본거지였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이족보행류의 괴물들은 신나게 그들을 반겼고, 그 초입에서 질리언과 페이브를 훈련시키다가 열의에 찬 도전을 시작한 제냐는 심처까지 들어가 수 백 마리의 고블린 떼를 상대로 서바이벌을 벌였고, 간신히 살아돌아왔다.


그리턴 가에서 붙여준 여러 안내인들의 도움에 따라 로키 산 곳곳의 사냥터를 돌며 그런 짓거리를 반복했던 제냐는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고, 최태현 역시 그보다는 못했으나 나름의 소득이 있었다.


질리언과 페이브는 레벨로 쳤을 때 20대 후반 정도의 전투력을 갖다가, 이제사 30대 중반 정도로 들어섰고 말이다.


제냐가 30대 중반 정도의 레벨로 그들을 만났지만 실질적인 전투력은 40정도에 근접했었고, 일반적인 유저 평균에서의 수치로 30대 중반에 이제 그들이 다다른 차다.


NPC들은 인터페이스가 없기에 그들의 레벨을 볼 수도 없고 있는지도 잘 알 지는 못하겠으나, 어쨌든 제냐가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강함은 대강 그러했다.


로키 산의 고블린 본거지는 레벨 10부터 40대까지 다양하고 강력한 고블린들이 있었고, 제냐보다 강한 놈들이 있어서 정말 죽기살기로 도망쳐 나와야 했다, 몇 번은.


그렇게 제냐와 질리언, 페이브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우여곡절의 굴곡과 밑바닥의 깊이만큼 강해졌고, 빠른 시간동안 전투적으로 성장했다.


“······.”


질리언은 그 스스로 짧게 자주 다듬는 갈색 머리칼을 매만지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그러다 잠시 멈추곤 옆에 있는 제냐를 처다보았다.


그는 고된 훈련을 마치고 쓰러지듯 엎어져 잠을 청하고 있었다. 간혹 저렇게 기절한 것처럼 구는 때가 있다. 옆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잘 일어나지 않았다. 연무장 근처에 있는 휴식용 평상에 있던 세 청년이다.


페이브 역시 멀찌감치 떨어져 드러누워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지난 며칠 간은 지옥이라고 해도 좋았다.


비유적으로, 말이다.


나름대로 험악한 세월과 험난한 고련을 거쳐 기사 급의 무력을 손에 넣는 질리언과 페이브였지만 그 정도의 흉악한 훈련법을 잘 상상해내지 못했다.

직접 제 목숨을 죽음의 곁자리로 밀어 넣는 훈련은 정상적인 인간이 생각을 해낼만한 범주의 것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가치가 있었다.


질리언과 페이브는 용감하고, 강했지만, 또 그만큼 두려움이 있었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이들은 강인하며 지혜로운 자들이었다.

세상에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삶을 반만 아는 반푼이들이었고.


둘은 타의로 두려운 자리 근처로 밀어 넣어졌지만, 결국은 이겨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도 많다. 기술적인 깨달음, 자신의 강함에 대한 이해 따위 말이다.

데슈칸 산맥이 산슈카에서 손에 꼽히는 험지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참 몬스터가 많았다.

무료로, 죽을 때까지 달려들며 심지어 진짜로 죽이려고 드는 훈련 파트너는 참으로 귀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훈련장과 파트너였고, 전혀 의사소통이 안되는 상황 속에서 진검을 든 채로 목숨 건 트레이닝을 이었다.

검술이 진일보했고, 감각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발달했다.

예전의 자신이 눈 앞에 만약 있다면 이제는 수월하게 손목을 비틀어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블린이라면 욕지기가 먼저 치밀어오를 정도로 격하고 또 진한 훈련이었다.


그 과정 중에서 그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 돌아보았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죽음 너머의 것을 얻을 수 없었다.


죽음 너머라는 의미는,

죽겠다는 말보다는 죽을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아 주변의 지켜야 할 자들을 지켜내겠다는 말이었다.


줄리앙 역시 오래 전부터 목숨을 걸어온 사내였고, 그들보다 강했다. 로멜리아 가는 영락했고, 재흥의 단서는 아주 빈약하다.

작힘 가는 위세가 높고 산슈카의 위용 역시 대단하다.

악의를 품은 세력가의 눈에서 살아남고, 두 아가씨를 보호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 다시금 예전 그 때처럼 평화로운 한 때를 맞이하며 여생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지금 그들이 목숨을 던지듯한 각오로 어둔 길에 발을 들여 놓는 일이 필요했다.


고블린의 소굴이나 워 베어의 둥지, 다이어 울프와의 드잡이질 속에서 질리언과 페이브는 그런 것들을 깨달았다.

검술의 오의란 손잡이에 삶이 쥐어져서 도저히 놓을 수 없을 때 닿는 것인지도 몰랐다.

적어도 사력을 다한 검은 그들을 다음 수준으로 인도했고, 아직도 그들이 무수하게 발전할 것이 남았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그들은 강해질 것이다. 앞으로도 더더욱.

제냐라는 미치광이같은 조력자가 있다면 보다 쉽게 될 것도 같았다.


“컹.”


엎드려 자다가 숨이 막히는지 호흡을 뱉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을 보며 질리언은 상념을 마쳤다.


인생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마지막 데슈칸 산맥에서의 사냥 훈련을 마치고, 성채로 돌아와 긴 대련을 반복했다.

한계의 한계까지 체력을 쏟아내고 점심 무렵이 지나 바람을 쐬면서 쉬고 있었다.


로키 성채 내부는 활달한 사람들과 고용인들이 여기저기 길목을 채우고 있었다. 해가 뜨거웠고, 그들 외에도 늘 있는 몇 명의 병사들이 나와 훈련장을 채운다.

연무장 모퉁이 부근에 있는 평상에서 그들의 모습이나, 널브러진 자신들의 꼴을 비교하며 바라보다가 질리언은 자신 역시 벌러덩 누웠다.

햇빛을 막는 지붕의 밑둥을 바라보면서 잠시 잠깐 눈을 감았다.


*


최태현은 나름대로 데슈칸 산맥에서 날뛰며 훈련을 했다.


제냐와 NPC들, 질리언과 페이브와 함께 움직이고 사냥을 할 때도 있었지만 주로는 혼자 움직였다.


어엿한 중수 사냥터인 데슈칸 산맥은 사실 슬슬 그들이 와서 레벨링을 할 만한 장소이기는 했다.


마침 퀘스트의 흐름이 알맞은 자리로 그들을 인도했고, 최태현은 자신이 가진 다양한 스킬들을 써먹기 위해서 레인저로서의 전투를 이어나갔다.

제냐가 이전에 그러했듯, 자신보다 체급이 높은 상대들을 사냥해갔다.


레인저의 장점은 높은 체력과 인내심이다, 결국.


지속적으로 사냥감 한 마리를 괴롭히며 그 체력을 바닥낸 뒤에, 천천히 요리를 해나갔다.

그것 역시 물론 쉬운 일은 아니기에 게임 오버에 근접한 위기를 몇 번 맞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살아서 사냥을 반복했다.

결국 전투직은 전투를 벌여야 성장을 한다.


제조직은 제조를 해야만 했고.


자신이 클래스를 정하고 주 업무, 성취를 낼만한 분야를 정했다면 그것에 몰입하는 것이 가장 쉬운 강자로의 지름길이었다.


레인저는 레인저의 방식을 사용할 때 가장 많은 경험치를 먹을 수 있는 법이었다.

숨는 법, 상대를 먼저 찾아내는 것, 자신이 들키지 않고 최대한 오래 강력하게 데미지를 입히는 일. 그것들은 최태현 개인의 노하우에 스킬샷이 더해져야 하는 것이었고, 스킬은 관련 행동을 깊이 이해하고 반복할 때 가장 큰 경험치를 준다.


레인저 류의 스킬셋이 다량 경험치를 얻기 위해선 그 스킬셋을 모두 사용하는 플레이를 구사해야 했고.

스텟 또한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 자주 쓰이며 올라가는 것이 다르기에 개인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일은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주요한 일이었다.


모든 분야를 다 잘하기 위해서 잡다한 느낌의 캐릭터를 키우는 것 역시 가능은 하지만. 그 이상의 특별함, 연계를 위한 좋은 머리, 노동에 가까운 플레이 타임이 없다면 힘든 방식이었다.

제냐는 게임 오버에 한없이 다가가는 것으로 부족한 경험치의 절대량을 메꿔나갔다.


하드한 경험은 이 하드코어 게임에서 가장 보상이 높은 것 중 하나이다.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서바이벌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작자가 결국 마지막에 다다를 확률이 높을 테다.

인생과 닮아 있었고,

게임이 끝난다고 아무것도 끝나는 것은 없지만 교훈 정도는 얻을 수 있을 테였다.


삶이 쉽지만은 않다는 류의.


제냐도 최태현도, 레벨에 비해서는 조금 이르게 데슈칸을 활보했고 거칠게 길을 개척했다. 고스란히 캐릭터 스펙으로 바뀌어서, 확연하게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었다.


챙겨왔던 포션이 거의 바닥을 보일 정도로 고생을 한 며칠이었다.


다행히 그런 식의 훈련과 사냥을 반복하며 사지 결손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어디 한 군데가 크게 날아갔다면 로키 캐슬 내부에서는 처치가 곤란했을 수 있다. 자작가 내부의 치유술사나 외과의사, 자잘한 치료 스킬 보유자와 약재들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완벽하게 회복할 수 있다고 보장할 순 없었고, 플레이어가 아니라 NPC의 경우라면 조금 더 후유증이 심할 수도 있었을테니.


전사들이 시간을 그렇게 활용하고 있었을 때, 정치가들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고 살 길을 도모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개중 가장 분명하게 반응이 온 것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인맥이었다.


로키 캐슬에 중앙, 수도에서 온 손님들이 찾아왔다.


*


끼이익,


하고 로키 캐슬 성채의 문이 열렸다.


목재, 암석질, 흙 따위가 섞여 이루어진 외부 방벽은 장엄한 디자인의 건축물이었다. 이 산에서 나는 것들을 모조리 이용해 삶을 구축하기 위해 애를 쓴 흔적이었다.


성문이라 할만치 거대한 문이 도르레를 이용해 움직였다. 평소에는 정문을 사용한다기보다, 그 옆에 나 있는 쪽문을 쓰지만 지체 높은 방문자를 맞이할 때는 의례의 의미로 정문을 개방한다.

방문객의 규모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이번에 로키 산을 찾은 자들은 그리 많지 않은 인원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정문 가운데 틈새가 살짝 열리며 성 내부를 바깥에 드러냈다.


거무튀튀한 목재가 겹겹이 쌓이고 쇠판이 목판을 연결하며 이루어진 거대한 문 틈새로 몇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제각기 말을 탄 인원들은 수도 사르삿에서 파견된 관리와 병사들이었고, ‘법무부’에 속한 자들이었다 특히. ‘법무부’에 소속된 사무관들과 수도의 치안을 맡은 기사 몇 명이 여정을 함께했다.


네 명의 일반병 겸 기사의 시종이 따랐고, 세 명의 중견 기사와 두 명의 사무관이 일행이었다.

기사의 이름은 체인, 드보, 세인이었다. 두 명의 사무관 중 일행의 총 책임을 맡은 고위자는 5급 법무관으로 일하는 ‘킬 드로얀’이라는 이름이다.

검은 머리의 사무관이요, 하듯한 정갈한 상의 외투를 걸치고 법무-행정에 관한 왕실 사무를 상징하는 금사자 문양을 작게 그 외투 가슴팍에 자수 놓은 차림이다.


아홉 명의 사내들은 전부 말을 타고 왔고, 수도로부터 온 여정에 목을 축이고 싶다는 듯 피곤한 표정들을 보였다.


캐슬의 내무관이 기사들과 함께 마중을 나갔고, 제냐 일행이 그랬던 것 마냥 환대를 받으며 본성에 들어가 곧 그리턴 자작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턴 자작님. 로키 산의 명예롭고 온당한 산지기의 책임을 지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제국기 이후, 영락한 그리턴 가가 데슈칸의 입구를 맡으며 산지기로서 살아가기로 했다. 그 이후 그리턴 가의 후예나 가주를 만났을 때 하는 인사로 아주 양식적인 말이었다.

그리턴은 손님을 맞이하는 방 근처에 나와 그들을 환대했고, 정중한 말투의 사무관에 흡족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드로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들을 방으로 이끌었다.


로멜리아들이 그러했듯 마주보는 긴 소파에 앉아 해야 할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보내주신 급속 편은 잘 받아 그리섬 그리턴 법무부차장관께서 저희를 파견하셨습니다. 들은 바로는 제가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하셨는데···.”

“아, 그런가. 알겠네. 좋지, 직접 자네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도 좋겠어. 유서 깊은 로멜리아 가의 집사장을 불러오겠네.”


손님이 찾아온 시간은 낮이다. 집사장은 개인적인 단련을 오전에 하고, 아가씨들이 잘 있는가 살피고, 따로 식사를 하고, 성채 내부 도서관 따위에 들어가 자료를 살펴 보거나 했다.

줄리앙의 일과를 대강 알고 있는 하이샨 그리턴은 시종 중 하나를 시켜 집사장을 불러오게끔 시켰다.


아랫 사람의 방문에 가주의 역할을 하는, 헤슈나를 불러 오기에는 조금 민망했다. 어린 여식일 뿐이었지만 실제적으로 로멜리아 가의 수장이니 그녀를 오라가라 할 땐 그들보다 확연하게 윗사람이 올 때여야 했다.


왕실 법무부의 5급관이면 그리 낮은 직책은 아니었지만, 그 지위가 귀족가의 명예를 다 합친것만큼을 대신할 정도는 결코 못된다. 평민의 신분으로 올라섰다고 하더라도 준귀족의 예우를 받으며 기사들과 비슷한 신분으로 취급되리라.

귀족가의 일원이라면 본가의 위세에 힘입어 한 끗발 위의 신분으로 취급받을 것이고.


킬 드로얀과 그 일행들은 조심히 기다렸고, 머지 않아 집사장이 노구를 이끌고 접객실로 찾아왔다.

반갑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하고, 사정을 설명받은 집사장이 다시금 그리턴과 함께 현황에 대해서 중앙 부처의 인물들에게 사연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킬 드로얀의 얼굴은 조금 굳어졌다.


“혹여 확실한 증거라도······.”


줄리앙이 입을 똈다.


“언약에 관한 증거라면 기록된 역사서에 있고··· 운트 작힘 백작의 마수에 관한 것이라면 아쉽게 남은 것이 없소. 목격자라면 있지만 ‘제냐 킴’ 경을 제외하면 전부 우리 일행들이고···.

세슈칸의 뒷거리 패들은 세슈칸에서 놓아주었고, 강도들 역시 전부 죽거나 도망치는 걸 놓쳤소. 우리도 워낙 경황이 없고 살아남기에 급급했던 터라···.

그나마 남은 것이라면 이게 있겠군.”


줄리앙은 자신의 양복 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고운 천에 입구를 끈으로 묶는 물건이었다. 그로부터 다그락거리며 부서진 부품들이 접객실의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부서진··· 보석처럼 보였다.


제이미 숄더, 라던 강도단의 일원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낸 물건이었다. ‘투명화의 목걸이’를 비롯해서 강도단의 간부들이 함께 쓰고 있던 아티팩트의 일종이었다고 한다. 백작가의 아티팩트와 공명해서 은엄폐술에 강력함을 더한다.

강도단 사이의 연락용으로도 써먹었던 모양이었다. 백작가로부터 온 물건이었고, 그 중심 소재인 강도단장의 아티팩트는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줄리앙의 손에 있는 건 일단 그것이었다.


“이것으로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다면 혹시 모르겠소.

그리고··· 개인적 심증으로는 로멜리아 령 근처의 호드와 카샨 남작 역시 운트 작힘 백작과 긴밀한 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소.

그들을 추궁할 수 있다면 작힘 백작의 꿍꿍이가 분명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알겠습니다.”


킬 드로얀과 함께 따라온 후임 사무관, 칼젝 벤더스는 그 보석 조각이라도 다시 곱게 천주머니에 담아 가져갔다.

일이 복잡할 것 같았다.

그들에게 떠맡겨진 일이었지만 영 쉽지 않았다. 머킷 차장관은 늘 어려운 일을 시키긴 한다. 그러나 이렇게 혹독한 난이도의 과제를 던져주는 일은 별로 없었는데, 수도 사르삿에서도 그 목소리가 통할만한 대영지의 영주인 작힘 백작의 비리를 케내는 사건이라니.


그가 왕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놓고 일들을 벌이는 듯 하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위세와 권위를 가지고 운트 작힘 백작의 죄를 추궁하는 게 아니라 산슈카 국의 명예와 법정의를 내세워 일을 하는 것이었으니.

작힘이 명백한 증거가 나올 정도로 백주대낮에 일을 꾸민다면 일은 쉬워진다.


그러나 과연 그런 장면이나 증거를 잡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무엇보다 머킷 차장관과 그리턴 자작, 그와 연결된 로멜리아 가의 일원들이 말하는 바가 정확한 지 사실 관계 먼저 파악해야 했다.

로멜리아 가는 산슈카 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유서 깊은 가문이었고, 사대고가의 일파였다.


그로부터 오는 괜한 신뢰감이 있었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게 모르는 것이었으므로, 조금 더 면밀히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우선 로키 산에 왔으니 그리턴 가의 영토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모두 얻고, 그리턴 자작과 협조하며 세슈칸 시로 넘어가 운트 작힘 백작의 일을 살펴야 할 것 같았다.


백작의 평판이나 그가 하는 일들을 좀 알아보고, 수도 법무부의 권세를 빌려서 대담을 나눌 수 있다면 그 대화 속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수도로부터 먼 변방, 드로얀 남작가의 2남인 킬 드로얀은 눈빛을 조금 흐렸다.


차장관, 을 그다지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사들을 대동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외근을 시킨다면 조금 원망하게끔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수도의 중견 기사 셋이라면 상당한 전력이었는데,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로 위험할 수 있는 임무라는 뜻이었으니.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이곳에 와서 그리턴 자작과 줄리앙 리스트 집사장의 진지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저들의 말이 전부 사실이고 운트 작힘 백작과 적대하게 되어서, 대영주의 분노와 암수를 그대로 받게 되는 미래가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게 어쩔 수 없었다.


“흐음.”


킬 드로얀은 속내를 감추고, 우선 알겠다며 자리를 파했다.

당분간 객실 하나를 얻어 성채에서 이들과의 교분을 다지고, 많은 이야기를 더 들어볼 작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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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글을 쓰는 것보다 삶을 사는 게 늘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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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 릿샤Rissha의 방 23.08.16 23 3 17쪽
58 57. 사연 23.08.13 32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7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5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6 3 14쪽
54 53. Could you join us? 23.08.05 30 4 34쪽
53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23.08.04 30 4 35쪽
52 51. 굳세어라 안드레 23.08.04 26 4 19쪽
51 50. "허억." 23.08.04 26 4 20쪽
50 49. 달려가는 소시민들 23.08.02 31 4 25쪽
49 48.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어진 23.08.02 27 4 36쪽
48 47. 최태현은 빨랐다. 23.07.31 29 4 25쪽
47 46. 로웰 드버는 결심했다. 23.07.31 34 4 34쪽
46 45. 석별惜別 23.07.30 36 4 25쪽
45 44. 결정의 주체 +3 23.07.29 36 4 45쪽
» 43. 그리턴 자작가에서 그간 23.07.29 30 4 25쪽
43 42. 호아킨 팍스Joaquin Pax 23.07.25 29 3 29쪽
42 41. 사촌 형제 23.07.24 29 3 18쪽
41 40. 로키 캐슬 23.07.24 28 3 20쪽
40 39. 운트Unt의 의뢰 23.07.23 27 3 30쪽
39 38. 그리턴, 갈색 사슴 23.07.23 33 3 29쪽
38 37. 등산 23.07.23 26 3 31쪽
37 36. 트레이닝Training 23.07.23 26 3 32쪽
36 35. 제이미 숄더 23.07.20 28 3 51쪽
35 34. 전진하는 요새 23.07.19 34 3 32쪽
34 33. 강도단 23.07.19 30 3 31쪽
33 32. 붉은 다리 협곡 23.07.19 29 3 34쪽
32 31. 협곡 진입 23.07.15 32 3 31쪽
31 30. 마차 안 23.07.14 37 4 30쪽
30 29. 돌아가는 23.07.13 35 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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