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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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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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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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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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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쪽

32. 붉은 다리 협곡

DUMMY

HP와 MP모두 스텟과 마찬가지로 구간별로 ‘1’의 의미가 달라진다. 11이 원점이 되는 위력을 x로 잡았을 떄 1.1x이고, 21이 2.2x가 되듯, 0.1x와 0.2x로 두 배의 차이가 나는 것처럼 구간별로 위력의 차이가 컸다.

통계적으로 주요한 포인트로 잡고 있는 구간은 보통 10,000과 50,000, 100,000정도였다. 그 외에도 자잘한 변화들이 있었지만 그 부근을 수준의 차이로 나누고 있었다. 100,000이 넘는 이들은 보통 스텟이 10에서 100까지 수치를 놓고 봤을 때 그 후반부에 달한 인간들이 닿는 것이었다.

물리 계열 스텟들이 80정도 돌파를 기점으로 삼는다.


50,000만 하더라도 6, 70인 이들이 다양한 스킬과 아이템을 사용해서 닿는 지점이다. 10,000이 비련의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가장 먼저 본인이 숙련자가 되었다는 기점으로 삼는 포인트였고, 스텟들이 40근처일 때 도달하는 것이 평균적인 경우였다.


인터페이스에 보이는 MP와 HP의 증가는 스텟의 증가가 첫 번째였고, 각 계열 스텟들의 고른 균형 발전 상태가 또 한가지 큰 요소였다. 신체 중 어느 한 부분의 강도만이 급격하게 발전하고 발달할 수 없는 것처럼, 물리 계열 중 HP증가에 가장 큰 요인으로는 ‘지구력’을 뽑았지만 순발력과 근력 역시 올라가야 제대로 HP증가 효과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외에 다양한 아이템과 스킬의 효과가 들어갈 테였다. 특별한 자세 시 스텟이 증가하는 것처럼 플레이어 행동의 위력을 올려주는 각종 스킬들, 온갖 패시브 스킬의 복합 작용과 연계는 비련의 시나리오에서의 핵심 시스템이었다.


거기에 유저 캐릭터의 개성과 특질을 만들어주고 발전시켜주는 아이템 따위의 영향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수치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냥꾼의 감각’ 따위의 패시브 스킬들도 모여서 HP증가의 결과론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육체 능력을 증가시킨다는 건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었다. 그것 하나만 있을 때 그래프에 표시되는 ‘1’을 올려주진 않지만 표시되지 않는 소수점 단위의 증가가 있었고, 여러 개가 얽혔을 때 그건 배수가 되어서 플레이 후반부로 갈수록 기하급수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HP나 MP의 숫자 역시 모일수록 강력함이 더욱 커졌고, 많은 돈에 이자가 붙고 그 이자로 다시 다른 사업을 할 수 있게끔 되듯이, 눈덩이가 굴러 불어나듯한 다양한 부가 효과들이 있었다.


사용자의 HP가 10,000을 넘는다면 일단, 절단상으로 쇼크가 일어나 죽는 일은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이하 HP에서는 갑자기 중상을 입게 되었을 때 조치를 잘못하면 확률론에 따라 쇼크로 순식간에 게임 오버를 당할 수도 있다.


50,000이 넘었을 때 신체 주요 장기 중 하나가 완전히 소실되어도 바로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뇌나 심장이 날아가도.

그 찰나의 순간에 스킬 명 ‘부활’과 같은 강력한 치유 계열의 능력이 투입되면 게임 오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100,000이 넘는 자들은 극소수였고 또 정보를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으나, 50,000만 되어도 그 정도이니 이미 현실의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MP역시 정신력 에너지의 양이었고, 그것은 곧 ‘의지력’이라는 근육을 사용해 움직일 수 있는 가상의 ‘몸뚱이’의 크기라고 할 수 있었다.

거대하며 비가시적인 몸뚱이를 가져도 정신력 계열 스텟이 고루 발전하지 못하고, MP사용에 관련된 경험도 적고 스킬도 없으며, 감각적인 노하우도 부족해 의지력이 낮다면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

자신보다 체급이 낮은 상대에게 얼마든지 질 수도 있는 것이다. 거리를 둔 술사간의 초상 스킬 난사전에서 말이다.


여러가지 비유가 있었다. MP말이다. 비대한 몸뚱이도 비유 중 하나였고, 다른 이야기는 지휘관이 부리는 군사가 이해하기 쉬운 말이었다. 의지력은 지휘관의 지휘 능력과, 군대의 군기, 명령 수행 능력의 정도였다. MP의 양은 곧 의지력을 가진 플레이이어가 부릴 수 있는 보유 군대의 수다.


푸른 물약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자신의 최대 MP를 넘을 수도 없었고, 대개 의지력은 보유한 정신력 에너지보다 한참 아래인 것이 정상이었다. 총량을 한 번에 쏟아낼 수 있다면 그것만 하더라도 전무후무한 대술사의 경지였다.


돈이나 보유한 인력이 그러하듯, 많이 모일수록 이전과는 규모가 다른 사역이 가능했다.

10,000정도의 MP를 가진 플레이어는 그 10분의 1인 1,000정도를 한 번의 초상 스킬 발동으로 사용이 가능했다. 한 때 제냐의 MP총량에 달하는 분량이었고, 제냐가 초상 스킬을 대인 저격과 견제의 용도로 쓰는 것과 달리 본격적인 폭격이 가능한 정도였다.

마치 폭탄이 터진듯 지근거리의 것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파괴력이 충분하다, 그 정도 에너지 양이면.


20,000을 넘는 지점부터 안정적으로 더블 캐스팅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다. 의지력이 2,000정도 되는 MP를 다룰 즈음부터 말이다. 물론 그 전부터 사용자 개인의 감각과 노하우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었다.

아주 드문 경우로 능숙하게 발동을 하거나, 대개의 경우 어설픈 운용일 것이고.


썬더 볼트를 발휘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MP는 약 300정도였다. 사실 감각적으로, 만들어진 스킬의 원래 위력이 온전히 발휘된다고 느껴지는 수준은 400정도를 소비하는 식이었지만, 약식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인 발휘가 가능했다.


아직까지 여러 개의 스킬을 동시에 캐스팅하고 난사하는 건 힘들었다. 파이어 볼2의 경우에는 파이어 볼의 변용에 이름 붙은 스킬이었기에 정확한 소비값을 측정하기 힘들었고 말이다.

대거나 외날검에 불을 두르고 더 오래 싸울수록, 당연히 소비가 더 커진다.


제냐와 질리언은 각자 각오와 경계심을 다지고 높이면서, 협곡으로 진입했다.


*


마부석에 앉은 제냐의 기감이 활성화된다.

여러 가지 스킬이 동시에 켜지는 것이다. 패시브 스킬의 경우에 언제나 영향을 미치지만, 조건에 따라 발동되는 것이라면 해당하는 조건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특정 자세에서 힘을 더해주는, '사냥꾼의 자세'같은 스킬이었다.


활대에 시위를 걸고 조준을 할 때, 완력과 상체 근력, 그 외 필요한 사소한 에너지를 더해주어 더 높은 장력을 화살에 실을 수 있도록 해준다.


매의 눈과 들쥐의 눈의 복합 효과로 발휘되는 기감 탐지는 두 가지 패시브 스킬의 사용을 인식하고 집중하면서, 미량의 MP를 눈 부위에 집중해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눈은 아니었고, 이미지에 가까운 방식이라 본인이 '감각 기관'이라고 생각하는 어딘가에 기력술을 발휘하면 되는 일이었다.


기초적인 기력술이나 초상 스킬은 사실 아무런 스킬을 배우지 않고 레벨을 올리지 않아도 모든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다. '기력술'이다, 라고 말을 할만한 효과는 아니었고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초기에는.

그것이 점차 경험이 쌓이며 능력이 확대된다. 애초에 플레이어에게 부여된 능력이었고, 열려 있는 가능성이었다. 프로그래밍된.


두 개의 패시브 스킬은 레인저, 궁수 계열 등 중 원거리에서 물리적 전투를 지향하는 클래스가 가장 흔하게 익히는 감지 스킬이었다. 두 개의 스킬로 얻게 되는 기력 감지의 효과는 그에 이어서 가장 먼저 그들이 얻게 되는 초자연적인 감지 기술이었고.


해당하는 색적 기술을 계속해서 활용하다 보면 다른 기력 감지술로의 길로 연결된다. 최태현은 더 빨리 얻었고, 제냐 역시 파티 플레이를 하는 다양한 사냥의 와중에 얻게 되었다.


최태현이 그러했듯 화살을 쏴서 교전할만한 거리까지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협곡의 입구에 들어서며, 제냐는 그것을 활성화했다. 봉우리의 꼭대기까지 닿았다. 야트막한 언덕, 혹은 봉우리인 그것이 수 백 미터를 넘지는 않았다.


계곡 전체를 감싸는 범위는 아니었으나 주의에 주의를 또 기울이면서 서서히 전진한다. 질리언은 기력술을 사용하는 기사였으나 광범위한 탐지기는 없었다. 기사들, 근접직은 보통 그렇다. 플레이어가 아닌 경우에는.


플레이어들은 스킬의 입수 경로와 익히기 위한 순서도를 알고 있었으므로 클래스와 스타일에 상관없이 필수적인 능력들을 익히고 육성시키지만 NPC들은 아니었다.

대개의 초보자, 혹은 중수 수준에서 만나는 레벨 대의 근접 전투 직종들은 바로 눈 앞의 범위 속에서 초인적인 감지를 해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만 하더라도 강력한 물리 능력을 갖고 다가오는 스페셜리스트들은 상당히 무섭고 또 위협적이긴 하다. 여러 명이 된다면 더더욱.


질리언과 페이브 역시 제냐에게 너무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그렇지, 그들과 견줄만한 신체 능력이나 혹은 아래의 상대들이 모여 있는 전장에 간다면 초인적이라는 말이 그야말로 어울리는 활약을 보일 이들이었다.


그들보다 한 두 수 정도 윗자리에 확연하게 있는 것이 줄리앙 리스트 집사장이었고. 장기전으로 가면 스테미나가 떨어져 전투력과 집중력이 조금 떨어지는 경향은 있었다.


질리언은 날카롭게 눈을 빛낸다. 짧게 깎은 갈색머리가 협곡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린다. 바람이 불었다. 짧은 머리칼이 흔들릴 정도로. 눈은 감지 않았다. 푸른 홍채가 맞바람치는 협곡 내부의 공간을 주시한다.

양 옆으로 깎아낸듯한 절벽이었다. 흔히 하는 비유로, 하나의 거대한 봉우리를 거인이 거검으로 한 번에 내려쳐 갈라낸 것 같은 지형이다. 단숨에 찍어내린 그 파괴흔이 절벽면의 울퉁불퉁한 굴곡이었다.


내부의 골목은 깨나 넓었다.

지금 그들이 타고 있는 이두 마차의 경우는 나란히 최소 간격을 유지하면서 7, 8대 정도가 이동할 수 있는 간격이었다. 입구부터 길목의 너비가 일정하지는 않으나 더 넓어지는 쪽이었지 지나치게 좁아지지는 않는다.


토암의 질은 주변의 것을 닮은 갈색과 회색이 섞인 톤이었다. 예전에는 물이 지나 간듯한 흔적도 바닥에 조금은 있으나, 지금은 말라 비틀어져 지나다니기 아주 편한 지형이 되었다.

군데군데 사람이 몸을 숨기고 있을만한 크기의 바위들이 흩어져 있기는 했다. 지면도 굴곡이 조금 있었고.


우둘투둘한 지면을 마차 바퀴가 밟았다. 목재로 이루어졌으나 바깥면에 납작한 쇠테를 박고 초상공학적인 처리가 조금 되어 있다. 비련의 시나리오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소재들도 쓰였고.

프레임, 현대 자동차의 서스펜스라 할 만한 구조가 기초적으로 이루어져 있어 충격을 조금 흡수했다.

상쇄시키는 구간에는 중부 대륙 삼림의 특산품인 고무가 쓰였다.


내부에 탄 이들도 덜컹거림으로 협곡을 지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창문 한쪽으로 바깥을 보고 있었지만.

반쯤 열린 틈으로 외부 시야를 확보하고 있었고, 줄리앙은 중급 탐지 스킬로 계곡을 살핀다.


제냐와 엇비슷한 규모의 색적 범위였다.

마차 내에 타고 있는 두 아가씨는 별 일이 없겠지, 싶은 마음과 표정으로 평안함을 보이고 았었다.

진실로 그러냐고 묻는다면, 아주 조금쯤 불안감이 있었다. 평안을 가장하는 것도 평안함을 불러온다.

거기다 위기의 때에, 침착함을 유지하는 게 도움이 될 때도 많았고.


그런 태도는 '담대함'이란 단어로 바꿔 말 할 수 있으리라.


옹기종기, 또는 정갈하게 객실 안에 앉아 있는 네 명이다. 줄리앙은 평온한 듯한 표정으로 눈을 반쯤 감고 있다. 기감은 움직인다. 페이브는 자신의 긴장감을 호위 대상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듯 티나는 연출을 하며 눈을 감고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표정 아래 몸은 언제라도 문을 박차고 나갈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객실 의자 아래에는 제냐가 그렇듯 방패 하나를 미리 챙겨두어 놓았다. 검은 그의 앉은 자리 오른쪽 다리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세워두었다.


덜컹, 덜컹.


흙먼지가 날린다. 바깥은 초원이었으나 협곡으로 다가올수록 풀이 줄어들었다. 협곡 내부는 흙과 돌바닥이다. 제냐는 천천히 마차의 속도를 조율한다.

뒤에서 마부가 이끄는 말들의 템포가 짐승 스스로의 익숙한 호흡에서 어긋나지 않아야 했다. 어지간하면 흑마들은 놀라지도 않고, 평온하고 충실하게 마차를 끌기는 한다.


질리언과 제냐는 같이 앉아 있지만 별다른 말이 없었다. 협곡 너머의 먼 하늘과 반대편 출구 쪽을 제냐가 바라본다.

거인이 내려친 검날의 틈새.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협곡 내부의 길목이 좁지 않았으나 길이가 제법 길어 멀게 보이는 출구, 허공의 흔적이 아주 좁고 길다.


“으랴.”


고작 입을 벌려서 내는 소리는 말들을 향한 의성어였다. 마구에 연결된 끈을 넉넉하게 잡고 적당히 리듬감을 준다. 마편을 꺼내들 필요도 없다. 슬쩍슬쩍 당기기만 해도 알아서 방향을 능숙하게 선회하는 머리 좋은 놈들이었다. 바위나 장애물이 있을 때도 적당히 피해 간다.

마차에 걸리지 않도록 조금 더 크게 돌게 만드는 건 마부의 일이었다.


그들이 협곡의 3분의 1지점 정도를 지났을 때였다.


항상 일은 그런 순간에 일어나 닥치게 마련이었다.


*


제냐, 김서원에게 있어서는 며칠 전의 이야기였다.


시험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 잘도 비련의 시나리오에 접속해 즐기고 있었다.


마차가 협곡의 초반 부분을 지날 때, 그 때였다.


가장 먼저 이상함을 느낀 건 줄리앙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감각적으로 예민한 건 줄리앙이고, 그 다음이 제냐이다.

제냐 역시 색적 범위로는 뒤지지 않았지만 미세한 자극에도 정확하게 반응을 하는 예리함은 노장에게 조금 뒤쳐진다. 동시에 여러 개의 화면을 보면서 적절한 이상 징후를 알아차려야 하는 일이었으니, 플레이어들도 다소간 연습이 필요하다.

다른 공격용의 스킬들이 고련을 거쳐 노하우를 익힌 뒤 진정한 플레이어의 실력이 되듯이, 색적을 비롯해 다양한 유틸리티Utility 스킬들 역시 그러하다. 도리어 단순한 구조를 가진 공격 스킬들보다 더 깊은 연구와 연습이 필요한 부류도 있었다.


어떤 장인들은 다양한 스킬을 익히고 탁월한 연구 개발을 통해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플레이 스타일을 완성하는 자들도 있었다. 제냐도 그런 인간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인터넷에 비련의 시나리오에 관한 공략글을 올리는 자들은 대개가 그런 양반들이었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무엇 하나 플레이를 하지 못하는 괴짜들.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NPC들 중에서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기행과 노하우를 익힌 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제냐가 더 만날 가능성이 높은 건 그들 쪽이었다. 줄리앙만 하더라도, 퀘스트 상황에서 짐작되는 일반적인 캐릭터들의 전투력보단 조금 높은 편이었다. 그가 이끄는 다른 두 호위 무사나, 그들의 적이 되리라고 예상되는 일반적인 자들 말이다.

물론 제냐의 도움을 입었던 때는 독에 당해 큰 힘을 보이지 못했으나.


똑똑,


하고 마차 내부에서 목재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부석 쪽의 벽면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자리에 앉은 제냐와 질리언이 반응을 했다.

창문은 총 네 개가 나 있었다. 마부석 쪽에 난 작은 창문, 그 바깥의 덧창을 밀어 열며 얼굴 반쪽 정도가 보일만한 구멍으로 질리언이 내부를 처다보았다. 제냐는 여전히 앞을 보고 있다. 한 명이 말을 몰면 다른 쪽은 다른 데 신경을 써도 좋다.


“···예.”


질리언이 답했다. 약간은 잠긴 목소리였다. 그의 긴장을 대변한다. 두 청년 역시 어느 정도 긴장감은 있었다. 줄리앙만큼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런 협곡은 암습을 당하기 딱 좋으니 조심하라고 했던 만큼, 전투를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그리고 있기는 했다.

아무리 색적 스킬 등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세상에는, 그리고 세상을 닮게 지어진 지독한 부류의 게임인 비련의 시나리오에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곤 했다.


연속된 퀘스트 상황은 유저들이 그런 진실을 가장 뼈저리게 깨닫는 곳이었다. 등장인물을 굴리기 위해서 일부러 작가가 머리를 쓴 것처럼 느껴지는 시나리오 내부의 연극자가 되어,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종류의 자극과 스트레스를 받는다.

물론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라는 이유로, 단순하게 현실에서의 정신적 피로감을 풀기 위한 플레이가 되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게임 오버를 당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잘 읽던 초가상현실적이며 입체적인 이야기 하나가 끝날 뿐이었다.


질리언의 말에 객실 내부에서 대꾸가 날아왔다. 줄리앙의 틈새로 그 늙은 얼굴의 윗부분과 형형한 눈빛을 빛내면서 말을 날렸다. 창틈새로 날아드는 말소리가 질리언과 제냐의 귓전에 울렸다.


“······얼마나 왔나. 절반 이상?”

“······예, 그 쯤입니다. 절반 조금 못됩니다.”


부지런히 발을 구른 흑마는 어느새 그들을 협곡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 지점이 가장 불길한 구간이었다. 좁은 골목에서 빠져나가기 힘든 곳이었으니 말이다. 줄리앙의 목소리가 꺼끌했다. 그의 눈가가 찌푸려진다.


“······느낌이 안 좋은데. 누가 있는 것 같군, 협곡 위에.”

“······.”

“······.”


제냐와 질리언은 둘 다 말을 멎었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필 이런 곳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온 것이기는 했으나 너무 공교롭다.

제냐는 그것이 시나리오적인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퀘스트의 진행을 위해서 마주치게 되는 상황 말이다. 시나리오를 적은 작가, 개발진이나 혹은 시스템 AI가 배치한 사건의 흐름으로 퀘스트를 진행하는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을 하던 높은 확률로 맞닥뜨리게 되는 과정이다.


······. 하기는, 지금까지 너무 쉽게 오기는 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여러 명의 적을 배후에 둔 몰락한 남작가의 일행이 어떤 위협도 당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말이 되지 않으리라.

초자연적인 기술과 아이템이 발달한 이 곳에서 현대 공학은 없더라도 누군가의 뒤를 쫓는 기술 자체는 더욱 발전을 했을 수도 있고.

그래, 이런 황무지와 드넓은 초원 지대를 지나가는 작은 마차 한 대를 특정해서 그 경로에 매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냐가 스스로 플레이어이기에 잘 안다.

그가 지독한 방식으로 어떤 사냥감을 쫓고 있지는 않았지만, 만약 퀘스트 수행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면 아마 수 천 가지의 방법이 있으리라. 그것들을 모두 털어내고 움직이는 것이 도리어 대단하다.

반대급부로 그만한 가짓수의 파훼법을 알아야 하니까.

줄리앙이 여태 잘 막았다고 생각했다.


제냐는 자신의 색적 범위 내부 영상을 관찰했다. 기감에 집중하면 그의 시야는 여러 곳으로 분리된다. 하나는, 계곡 전체를 조감하는 영상이다. 또 하나는, 그 자신의 캐릭터 안구로 바라보는 정면의 장면이다. 또 하나가, 그 조감도 내에서 집중한 특정 장소를 세밀하게 보여주는 원거리 시야였다.

자유롭게 시점 이동이 가능한 망원경이나 같았다. 캐릭터의 육안으로 봤을 때 막혀있더라도 제약이 없었고, 색적 범위 내부의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볼 수 있었다.


‘시야’로 표현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미세한 감각이기도 하다.


MP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에너지였으니 콘란드 대륙에서는 물리적인 작용을 하는 실존 에너지이다.

가상의 에너지는 촉감과 청각 등, 다양한 감각 기관과 연동해서 캐릭터에게 느껴지고 또 플레이어들은 그 감각을 사용해 다루게 된다.


‘기력 감지’라는 것 역시 그렇다. 알기 쉬운 인터페이스로 분할 화면의 형태를 띄며 나타나지만 조금 더 노련한 인간들은 색적 범위 내의 이상 반응을 알람이 알려주는 신호처럼 잡아낼 수도 있었다.

특수한 조건을 거는 것이다. 그건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 MP가 반응하며, 초상 스킬의 ‘술식’이 짜이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MP자체에 여러가지 고도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고, 프로그래머가 코딩을 즉석에서 해내듯이 의지에 따라 알맞은 형태로 변형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작용은 시스템 AI가 알아서 처리한다.


그야말로 현실에서 ‘마법’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운 창조성을 게임적으로 구현했다고 할 수 있었다.

작가가 글을 다루어 작품을 적어내듯이, 마음대로 조물造物되는 가상의 만능 베이스 재료가 높은 반응성을 가지고 다양한 결과값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MP자체에도 다양한 원리와 법칙, 반응성에 대한 분석이 있었고 그건 NPC들이 말하는 초상 스킬학, 초상술학 따위의 이름으로 정리되는 학문이었다.


플레이어들은 그들만큼 오랜 시간 MP를 다루어오지 않았기에 그 초능력적인 기술에 대해 노련하지는 못했지만 시스템의 보정을 받았고, 그 이상을 바라는 플레이어들은 항상 NPC들이 미리 정립해둔 초상술학 분야에 닿게 된다.


제냐는 줄리앙의 말에 감각을 집중한다. ‘인기척’ ‘생물’ ‘인간형 크기의 사물’, 대강 이런 종류의 코드를 인식하여 기력 감지 스킬의 효과에 부여한다. 그것이 기력 감지술의 올바른 사용법이기도 했다.


곧바로, 잘 느껴지지는 않았다. 푸른 하늘. 갈색 절벽, 봉우리. 협곡 내부. 이렇다 할 거대한 생물은 없다. 초원을 뛰어다니는 작은 동물들이 언덕에 올라 있거나 새들이 가끔 내려앉아 쉬는 모양이다.

조금 더 집중하며 스킬을 발동하던 제냐의 감각에도 곧이어, 무언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인기척을 감각한 건 아니었다. 도리어 그 반대다. 기력 감지는 인간의 오감에 관여해서 사용자에게 느껴진다.

더 스킬에 깊숙이 들어가고 몰입할수록 다양한 감각과 연계되어 풍부한 정보를 얻고 직관적인 처리가 가능했다.


그렇게 집중해가다 보니 어딘가 이상한 구석을 알게 된다. 노이즈가 낀 자연적인 소음 상태를 듣고 있다가, 어느 한 구간이 인위적으로 소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뭐 그런 방식이었다.

어설픈 영상 조작 기술로 어느 한 구간을 덧칠해놓은 것처럼, 툭 튄다. 도리어 기척이 없기에 그 부분이 부자연스럽도록 눈에 띄는 아이러니였다.


줄리앙이 협곡 근처를 미리 조사했다고 하는데, 제냐와 달리 아주 원거리까지 색적이 가능한 특수 스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건 이렇듯 협곡 내부에 들어와서 감지하는 기술보다는 정확성이 떨어지는 듯했다.

그러니 저런 이상함을 미리 눈치채지 못하고 그들의 방향이 이곳으로 정해졌지.


“······.”


질리언은 별다른 감각이 없지만, 눈치는 있었다. 줄리앙이나 제냐의 낌새가 이상해지자 덩달아 긴장을 한다. 신뢰하고 있는 동료의 반응은 곧 그의 판단 근거가 된다. 질리언은 비늘처럼 만들어진 얇은 철갑옷을 겉에 입고 있었다. 천에 가죽을 덧댄 보호의를 상체에 입고, 그것은 목까지 덮는다. 그 위에 얇은 비늘 갑옷을 덧입은 것이다. 하체 역시 비슷한 꼴이었다.

이미 기사에 준하는 실력을 보유한 이들이었기에 어지간한 보호구로 속력에 제약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장인의 손으로 지어진 얇은 사슬갑옷, 비늘갑옷 따위는 최적의 선택지가 된다.

신체 동작의 유연성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방어력까지 갖출 수 있었으니까.


질리언의 자리 한 켠에 본인이 놓아둔 검이 있다. 그는 그것의 손잡이 근처로 손가락을 대었다. 단지 닿아 있을 뿐이지만, 그 본인의 긴장감과 전투 감각은 최고로 고조되었다. 어느 정도냐면, 그대로 화살이 어느 방향에서건 날아온다면 칼집에서 칼을 빼들어 화살촉을 처낼 수 있을 정도였다.

기예였고, 보통 NPC들이 ‘기사’급에 도달했다고 한다면 그 정도의 무기술 격투술 수련을 거친 뒤에 닿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냐는 그들보다 검술의 예리함은 떨어졌지만 신체 능력과 기력술의 경지가 조금 더 나았으므로 그냥 때려 눕힌 것이었고.

아마 MP를 사용하지 않고 기술만을 겨룬다면 제냐가 백 번을 다 지리라. 백 번을 싸워서. 물론 과도하게 언밸런스한 신체 능력 역시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기술 교류 때의 이야기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질리언이 ‘로멜리아 가 기사 검술’의 흔한Common 단계였다. 페이브가 드문Uncommon이었고. 아래에서 숫자로 따지면 질리언이 5급, 페이브가 6급이다. 줄리앙은 ‘실전 중급 검술’ 스킬의 좋은Good 단계였다. 7급이다.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스킬의 단계는 정말 더럽게 잘 오르지 않는 것 중 하나였고, 가장 박하게 평가된 수식어가 단계의 이름이 된다. ‘흔한’ 정도라고 하지만 그건 최종 단계에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였고, 진지하게 인생을 걸고 다년간 수련하지 않으면 결코 닿을 수 없는 수준이다. 해당하는 스킬의 완성 단계에 비교해서도.

달인 그 이상의 경지를 최고로 쳤을 때 그래도 ‘중간은 하더라’라는 말이 흔하다Commmon라는 단계였으니까.


제냐는 이제 하류 검술의 좋지 않은Not Good 단계였으니. 3급이고, 그것만 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을 검을 들고 싸워야 했다. 기초 외날 검술의 경우엔 쓸만한Usable의 단계다. 4급으로, 초보자치고 빠르게 성장한 셈이었다.

제냐가 비스트 슬레이어를 들고 다양한 난적들과 싸워온 경험이 추가적인 점수를 얻어 그렇게 성장했다.


하류 검술이 조금 더 광범위한 효과를 보이고, 올리기 어려운 스킬이기도 했다.


줄리앙과 제냐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감각도 부자연스러운 침묵이다.


사진이나 영상을 조잡하게 지우다가 블러 효과가 잘못 남은 것처럼, 지우개로 급하게 연필 자국을 지워내 번진 흔적이 남은 것처럼 협곡 내부의 색적 범위 중에 희끄무레한 구간이 있었다.

언덕 위, 골짜기 바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좋은 위치다. 협곡의 중간 부분이었고, 두 봉우리를 기준으로 한다면 가장 고도가 높은 지점이다.

그런 곳에 토질과 비슷한 색깔의 바위들이 몇 개 있었고, 바위의 주변으로 희끄무레한 흔적이 있다.

누가 보아도 어색하고,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 그 자리에 좋잖은 의도를 지닌 누군가가 엄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본다면 아주 딱 맞는 위치였다.


말은 천천히 걷는다. 흑마는 다름없다.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주인의 낌새 정도는 짐승들도, AI로 구현된 말들도 알아챌 지 모르겠지만. 속도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제냐는 일부러 딴 생각을 했다. 지나치게 전투의 긴장감에 몰입하면 몸이 굳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상상을 하며 다음 상황을 대비하기는 해야 했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먼 하늘을 바라본다던가, 마음을 비우려 노력하며 몸의 긴장을 풀어냈다.

다음 순간이 어떤 장면이 펼쳐질 지 모른다면, 살아남기 위해서 최고의 운동성을 발휘해야 더 긍정적인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리라.


줄리앙이 이미 내부에서 말을 해 둔 모양이었다. 객실 안쪽도 조용하다.


다그닥거리는 소리, 협곡 내부에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 돌 부스러기가 바스락거리며 어디 바닥을 구르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소리.

조용히 집중하면 그런 것들만 들리는 가운데 몇 걸음을 더 간다. 줄리앙이 입을 뗀다. 제냐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는 아니었다.


“······마차의 보호 술식이 있네. 마부석 벤치 가운데, 의자 아래에 손을 대면 누를 수 있는 버튼이 하나 있지. 그대로 가볍게 두 번 누르면서 기력을 흘려보내면 발동하네.”

“······그렇습니까.”

“초상술이 아닌 화살이라면 막을 수 있고, 마차와 이어진 말까지 보호하지. 길목은 잘 보이나? 끝까지 달릴 수 있겠지?”

“아무렴요.”


제냐와 줄리앙의 말은 내부에 있는 다른 세 사람과, 제냐의 옆에 조금 떨어져 앉은 채 긴장하는 질리언에게도 들렸다.

일행은 불길한 예감, 기척 감지의 결과를 공유했다.


이럴 때,


헤슈나는 아드리안을 살핀다. 둘 모두 잘 차려입은 모험가의 행색이었다. 아드리안 역시 단검을 휘두를 수는 있었다. 초상 스킬 하나를 익힌 술사이기도 했다. 나이가 적어 MP역시 별로 없기는 했다.

캐릭터 별로 타고나는 MP와 HP는 달랐다. 특질의 천재들은 어릴 때부터 많은 양의 MP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대개는 플레이어에 비해 턱없이 적은 양으로 시작해 능력을 사용하고 개발하며 늘려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헤슈나에게는 모험 용으로 지급된 단도가 하나 있었다. 예쁜 예술품이라고 보아도 좋을 그것은 검극을 상대에게 향하고 손잡이의 버튼을 누르며 MP를 주입하면 발동하는 발사 도구였다. 검날은 아니었고, 검날 표면에 새겨진 복잡한 술식을 통해 초상 스킬이 발동한다.

적혀 있는 스킬의 발현은 ‘검극으로부터 빛줄기가 뻗어나가 원거리의 적을 꿰뚫는’ 형식이었다. 화살처럼 날아가는 MP는 단도집, 그리고 손잡이 등에 화려하게 장식된 보석들로부터 충당하는 양도 있었고 사용자가 소비하는 양도 있었다.


재량에 따라 비율을 조절할 수 있고, 배터리의 역할을 하는 보석 장식 내부의 MP가 전부 소모하면 재충전까지 시간이 걸렸다. 넉넉잡아 십 수 발 정도는 쏴댈 수 있고, 헤슈나가 가진 MP를 전부 사용한다면 한 전투에서 3, 40발 정도의 견제 사격 정도는 가능했다.

근력이 아닌 단도를 제대로 겨눌 정도의 솜씨만 있으면 되기에, 그리고 헤슈나는 그 방식의 전투를 연습해왔기에 제법 도움이 되는 힘이었다.


헤슈나와 아드리안은 각기 망토를 겉에 두르고 있었는데, 그 갈색 망토의 목덜미 께에 버클이 하나 있었다. 보석으로 만들어진 버클은 아티팩트였다. 망토의 소재와 호응해서 사용자의 방어력을 높여준다. 얇은 방호막을 형성해서 원거리 공격을 막고, 망토면에 닿는 공격이라면 근거리에서 기사가 휘두르는 검날조차 몇 번 방어해낼 수 있었다.


전부 서민의 감각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값비싼 보구들이었다. 로멜리아 가는 영락했으나 오랜 유산이 없지는 않았고, 또 귀족가로서 챙겨 온 체면과 저력이 조금쯤 있었다.

급박하게 시작된 여행길이었으나 최소한의 도구들은 있다.


집사장 줄리앙이 입고 있는 정장도 그저 천옷처럼 보이지만 판금 갑옷같은 강도를 발휘할 수 있었다. 적절한 MP만 넣어주면.

당시, 골목에서 당했던 독은 신체의 자유를 빼앗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과 동시에 MP의 발현마저 정상적으로 할 수 없게끔 하는 효력이 있었다. 지독한 독이었고, 그 정도의 기능이 없다면 기사를 상대로 완벽한 기습을 성공시킬 수 없다.

어지간한 독이라면 초자연적인 에너지, 정신력 에너지의 작용으로 해독이 된다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단기간 정도는 버티며 전투를 속행할 수 있게 되니까.


줄리앙은 평범한 정장 겉에 망토를 하나 둘렀다. 두 아가씨가 입은 것보다는 조금 얇고 회색빛이다. 그저 질긴 천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쓸만했다. 눈 먼 칼 정도는 막는다. 페이브는 제냐와 비슷한 차림새다. 레더 아머를 섬세하게 기워 입는 형태였다. 자신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을 부분에만 무두질된 가죽 보호대가 붙어 있었고, 쇠판이나 징이 군데군데 덧대어 박혀있다.


페이브가 신은 가죽 구두의 밑창을 들어 마차의 객실 바닥을 한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신발이 제대로 신겨 있나 확인하는 움직임이었다.


줄리앙의 곁에는 그가 자주 사용하는 애검과, 석궁 하나가 있었다. 석궁용 쿼렐quarrel이 또한 전통에 가득 들어차 곁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고.


줄리앙은 소리를 내지 않고 자신의 왼쪽 손목을 오른쪽 검지로 몇 번 두드렸다. 까딱거리며 감각을 확인한다. 그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었다.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며, 노구는 아직 몇 번의 전란을 더 겪고 넘어야 했다.


대비된 전투라면 이 마차는 제법 쓸만했고, 명민한 두 아가씨 역시 제 몫을 하거나 최소한 잘 숨어있으리라.

방심한 틈에 찔린 기습이 아니라면 대응은 가능했다. 앞으로 그들이 넘어야 할 산은 많고도 험하다. 산슈카 왕국에서 몰락한 남작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더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줄리앙은 기감에 집중했다. 언덕 어느 부근에 기감이 지워지는 듯한 모양을 포인트로 잡고 계속해서 따랐다. ‘그것’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희끄무레하게 번지듯 느껴지는 구간.


바위에 자신의 몸을 가린 것인지 모여 있는 부피를 사람의 신체로 나누어 계산하면 약 열 댓 명 정도가 뭉쳐 있을 법한 크기였다.


제냐 역시 알았을 지도 모른다. 자신을 따르는 두 청년은 기력 감지의 재주가 없는 것을 노인은 안다. 줄리앙이 입을 뗸다.


“아마······ 열에서 많으면 스무 명 같군.”

“···그렇습니까.”


제냐는 그 번진듯 보이는 흔적을 정확하게 캐치하는 건 어려웠다. 사람의 숫자까지 짐작할 정도로 정확한 부피감을 재는 일 말이다. 위치 정도는 확연히 알 수 있었지만.


마차는 평온을 가장한 채 얼마간 더 걸어갔고, 그들이 협곡을 3분할 했을 때 3분의 2, 두 번째 구간의 후반에 이르렀을 때였다.


퉁,


하는 소리가 언덕 위에서 났다.


제냐나 줄리앙은 떨림으로 알았다.


기력 감지가 연결된 감각으로 변화를 알린 것이다. 제냐는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의 변화였다. 들었다 하더라도 놓쳤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하며 말이다.

줄리앙의 경우엔 다년 간의 경험으로 그것이 기력 감지를 써서 알았을 때, 화살이 발사되는 기척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줄리앙이 외쳤다.


“제냐! 버튼! 화살이다!”


달칵, 하는 감각과 함께 제냐가 자신이 앉은 벤치 아래의 스위치를 눌렀다. 기계식처럼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어떤 효력이 없었다. 연결된 아티팩트의 발동을 위한 것이었다. 두 번 누르며 동시에 미량의 MP를 손끝으로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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