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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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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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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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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41. 사촌 형제

DUMMY

*


시종이 급하게 뛰었다. 일의 중요도에 따라 편지를 배달하는 어린 시종의 달음박질은 빨라지거나 한다.


열댓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은 왕실에서 일을 하며 삯을 받는 시종이었다.


하얀 낮, 고풍스러운 곡선이 아름다운 산슈카의 왕궁 사이로 키가 짧은 소년이 뛰고 있는 것이다.


"하."


숨을 뱉으며 손아귀에 곱게 잡은 종이 한 장이 소중하다. 고급스런 인장으로 봉인된 붉은 봉투가 상하지 않도록 품으로 가려 안은 채다.


왕궁의 건물들은 띄엄띄엄 지어져 있고 정원을 비롯한 조경이 넓은 전경에 탁 트인 시야를 보장한다. 본궁과 별궁등 거대한 건축물들이 있지만 거기까지의 길목은 야트막한 높이와 소담스런 미美로 꾸며진 뜰의 연속이다.


장미 화단이 소년의 허벅지 즈음에 닿는 높이로 길가에 장식되어 있었다. 장미길을 달려 어린 시종은 어느 별궁에 닿았다.


궁은 왕실의 소유였고, 왕가의 식솔들과 산슈카에서 가장 고귀하고 지엄한 양반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각 부의 고관들은 수도에 자신의 저택을 마련해 출퇴근을 하는 자들도 있었고, 더러는 집무실을 제 집처럼 여기며 사는 자들도 있었다.


개중에서 소년이 닿는 곳은 왕족이 기거하는 궁은 아니었다. 산슈카의 법관 중 가장 높은 이가 법무부장이었다. 기나긴 왕국의 역사와 세월만큼이나 길다란 직책 명이 달리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줄여 불렀다.

그 아래에 있는 것이 법무부차장으로, 사슈나 가家의 사위로 들어온 머킷 그리섬 그리턴이었다.


소년은 법관들과 행정관들이 함께 머물고 있는 건물, 금사자 1궁에 다다라 들어갔다. 소년의 목적은 개중 부차장인 머킷 그리섬 그리턴 자작이었다.


화창한 낮의 날씨가 소년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었다.


어느 흥 많은 사내는 일을 하러 가다가도 쓸 데 없는 바람이 들어 샛길로 나들이를 떠날지 모르는 그런 날씨다.

소년을 비롯해 여러 고용인들과 고관부터 그 아래 직급의 세부 실무자들까지 자신들의 책무에 여념이 없다.

정부 조직이라 할 수 있는, 나라의 본부랄만한 곳이 그런 근로 의욕에 불타는 분위기라면 당장 그 나라는 큰 걱정이 없을 것이다.

우환이 있어도 단결된 충정은 몇 차례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소년은 익숙한 듯 금사자궁에 발을 디뎠고, 정문을 호위하고 있는 근위병도 별다른 말 없이 그를 들여보냈다.

늘 오는 얼굴임과 동시에, 소년이 들고 있는 편지가 무엇인지 대강 알기 때문이었다. 붉은 색 봉투에 금색 인장. 붉은 색은 가급적 즉각적인 회신을 청한다는 의미였고 금색 인장은 각 부처의 결정권자 이상에게 전해지는 편지라는 뜻이었다.


결정권자 이상이란, 법무부장, 부차장, 그 아래 차장보補까지를 의미했다. 부장이 바쁠 때는 부차장이, 부차장이 자리에 없을 때는 차장보가 일단一旦 결제를 하고 사후 보고를 하는 식이다. 물론 부차장의 권한으로 직인이 찍힌 안건은 추후 문제가 생길시 도루묵이 될 수 있다. 부장의 선에서 반려가 된다면 말이다.


차장보의 결단 역시 부장 선에서 바뀔 수 있었고.


그러나 부차장의 가장 주요한 업무란 부장의 법적 일처리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이었고, 차장보의 가장 중요한 재능은 부차장의 마음을 읽고 결정의 개연성을 깨닫는 것이었다.


윗 사람의 선택 원칙을 파악하기에 그 보조를 할 수 있다. 다른 부서 역시 직속 상사와 직속 부하의 관계란 긴밀한 것이었지만 법무부는 특히나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부하들도 상사와 ‘사이가 좋’다고 여길런지는 모르겠지만, 각별하게 협조하며 일처리의 신속성을 자랑하는 부서이기는 했다. 일이 빠르고 또 좋게 처리가 된다면, 일을 위해 모인 자들은 서로에게 불만이 없는 법이었다.


법무부장, 메기 그리섬 사슈나는 지방 관청으로 순방을 떠난 차였다. 왕실 법무부 관청인 금사자궁에 남아 있는 최고위자는 자연스레 머킷 그리섬 그리턴 자작이 되었고, 금사자궁의 단골인 붉은 머리의 어여쁜 소년은 몇 차례 그를 가로막는 내부 사무관들에게 목례를 하며 지나쳤다.


석조 궁이었고, 내부로 들어서면 웅장한 소리의 울림과 시각적 공간감이 있는 모습이다. 근위병을 지나쳐 정문 복도에 발을 디디면 한 두 걸음만에 암녹색의 카페트를 밟게 된다.


정갈하게 다듬어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린 돌바닥 위에, 귀퉁이에 금빛 수가 놓아진 푹신한 카페트 위를 지났다.


궁 내부는 거대한 집회실과 대회의실을 지나쳐 안쪽 사무실로 이어졌고, 1층은 전부 일하는 공간이었다. 복잡하게 나누어진 다양한 방들과 복도 사이를 지나 거하는 모든 이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며 부차장의 방까지 다다랐다.


소년은 가쁘게 쉬던 숨을 세 번에서 다섯 번 정도 천천히 골랐고, 늘 그렇듯 짧은 시간 만에 호흡을 되찾으며 침착하게 문 앞에 선다.


소년이 있는 곳은 작은 복도칸으로, 그가 지나쳐 온 법무부 관리들의 사무실 쪽으로 난 문이 뒤에 있었다. 앞은 갈색의 고급스런 목재로 만들어 둔 부차장실의 문이다.


관리들이 일하고 있는 널찍한 사무실이 하나 있었고, 문을 통해 방 안에 들어서서 주욱 직진하면 부차장의 방이고, 직진하다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법무부장의 방이었다. 차장보는 테이블과 서류로 복잡한 사무실 상석에 앉아 관리官吏들을 관리管理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총 세 명이었고, 소년은 언제나 보던 얼굴이라 익숙한 사내들 중 두 명만이 자리에 있다는 걸 알았다. 한 명은 어딜 갔는지, 외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열심히 일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법관들을 두고서 콧바람이라도 들어 나들이를 떠났는가.

소년이 생각할 바도, 알 수 있는 바도 아니었다.

열 한 두 살 정도 되는 소년은 조심스레 목을 가다듬고, 문에 달린 금빛의 손잡이를 잡고 퉁퉁, 정직한 박자로 두드렸다.


그 다음 한 두 호흡 정도를 다시 쉰 다음에 소리를 낸다.


“머킷 그리섬 그리턴 법무부차장관님. 법무 행정궁 배달부가 급속 회신 편지 배달 왔습니다.”


“······.”


그 말에 뜸을 들인 건 안쪽에서의 일이었다. 소년은 늘상 하던대로 말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땡, 하는 종소리도 함께 울렸다. 보통은 종만 울려도 알아 듣고 들어가면 되는 일이다. 법무부차장인 머킷 그리턴은 늘 소년에게 말로 한 번 더 언질을 주곤 했다.


끼익, 하고 작은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소년은 한 쪽을 열었는데, 소년의 키보다 과장을 조금 보태 두 배 정도 되는 높이의 문이었다. 묵직할 것 같은 크기와 달리 부드럽게 당겨지며 열린다.


장정 대여섯 명이 서 있으면 비좁고 꽉 찬 느낌이 들듯한 작은 복도방 쪽으로 문이 열리며 내부가 나타났다.

소년에겐 익숙한 방의 전경이었다.


방의 안 쪽 멀리, 집무실의 테이블에 앉아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는 중년의 젠틀한 사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켈릭. 이리 주렴.”


오후의 햇살이 그 뒤를 비추었다.


한 쪽 커튼을 활짝 열어두어 하늘의 햇빛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던 부차장이다. 40대 정도의 남성으로, 나이답지 않게 날렵한 느낌이 드는 외견이었다. 다만 동안인 얼굴에 비해 희끗한 터럭이 섞인 금발을 뒤로 깔끔하게 넘겼고, 으레 궁에서 이래야 한다는 듯 정갈한 정장을 입고 있는 사내였다.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단추가 인상적인 검은 빛의 재킷이었다. 안쪽으로 흰 셔츠를 입고 있다.


“예, 자작님. 여기 있습니다.”


켈릭은 땡그란 눈을 곱게 뜨며 다가가 편지를 건넨다. 빠르게 달려왔으나 궁 안뜰의 잘 정비된 블럭 위만 밟아서 왔으므로 신발에 이물질은 없었다. 전체적으로 갈색, 주황색, 상아색 따위가 섞여 있는 인테리어와 분위기다. 바닥에는 얇고 검붉은 카펫 하나가 회색 석재 위에 깔려 있었다.


소파나 탁자, 집무실 중앙에 있는 여러 가구와 집기들 아래에 깔린 것으로 방 전체 바닥을 덮는 물건은 아니었다. 켈릭은 가구를 피해 천천히 안쪽 테이블의 머킷에게 다가갔다.


쫑쫑거리며 오는 듯 보이는 행색에 머킷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귀엽고 어설픈 꼬맹이었다. 자신이 어설프지 않아 보이도록 늘 애쓰는 꼴이 가엽고 기특하다. 왕성에서 일을 하는 몇 명의 시종들이 있었고, 보통 이런 잡무는 그런 시종들 중 아이를 가진 이들이 지원을 해서 맡게 된다.

왕실에서 일을 하는 고용인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벌이가 부족할 때가 종종 있었고, 식구가 많은 집은 이렇게 부업을 시켜 살림을 낫게 하는 경우가 있다.


켈릭 아르펠Kellic Arpell. 법무부 소속의 편지배달부로, 궁 내 우체郵遞소에 들러 늘 그에게 가장 빨리 소식을 전달해주는 고마운 꼬맹이였다.


그보다 더 긴급을 요하는 경우는 이런 꼬마의 발이 아닌 성인 남성의 다리를 빌려 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어디에서 귀족 영주들간에 불명예스런 전면전이 일어났다거나, 내란이나 역병 등 국난이 될법한 일이 터졌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 대개의 일은 켈릭이 가져온다.


작은 손에서 붉은 편지 봉투를 빼앗아, 머킷은 테이블 한 켠에 널브러져 있던 편지칼을 집어들어 자연스런 손놀림으로 개봉했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입구가 열린다.


부차장은 그 감각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허구한날 앉아서, 전해져 오는 서신을 뜯어보는 게 그의 일 중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물론 내용에 따라서 생각해야 할 바나 결정할 논리의 종류는 천차만별이었지만.


붉은 색 봉투가 자주 오는 일은 아니다. 그것도 금색 인장을 달아 그의 앞으로 오는 것들은 말이다. 그 아랫급에서 일하는 자들의 사정이 조금 다를는지는 모르겠다.


머킷은 사락거리며 접힌 종이를 펼쳐 내용을 보았다.


[친애하는, 또 존경하는 대 산슈카 왕국 법무부차장관 머킷 그리섬 그리턴 자작님.

오랜만에 편지로 전하는 인사에 사과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수도로부터 떨어진 데슈칸의 산지기가 이렇게 몇 자 글을 적어 보내니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읽고 반려치 말아주시기를. 늘 그대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고, 또 왕국의 정기와 평화가 그와 같이 하길 바랍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고류가문의 일로 아뢰는 바입니다.

위세가 이전과 같지 않으나 산슈카의 정기를 수호하는 명예로운 사대 고가 중 로멜리아 가의 후계자들이 그리턴을 찾아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자힌 로멜리아 남작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으며 그 두 딸아이와 유명한 집사장이 로키 캐슬을 방문했고, 그들의 사정을 아뢰기를


‘산슈카와 로멜리아 가의 역사서’에도 기록 되어있듯 세슈칸의 ‘작힘 가家’는 제국기 1급의 아티팩트 두 종을 오래 전 로멜리아로부터 대여한 뒤 반납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문의 안위와 부흥을 위해 로멜리아 가의 후계자들이 세슈칸 영주에게 언약의 이행을 요구하고자 하였으나, 운트 작힘 백작은 교묘하게 그들을 피하고 따돌린 뒤

심지어 용병과 강도를 통해 암살 교사를 했다,


고 합니다.

더욱이 로멜리아 령 근처의 소귀족들 중 카샨과 호드 남작은 로멜리아 전 남작의 죽음에 부정적으로 관여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그들의 손속에 대해 세슈칸으로부터 많은 시달림과 습격을 당한 줄리앙 리스트 집사장은 작힘 백작의 관여를 심증적으로 고민하는 중입니다.


명예로운 머킷 그리섬 그리턴 자작님.

부디 영명한 대 산슈카 국의 법적 정의의 빛을 가꿔온 법무부차장관으로서, 이 산슈카 중남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황당무계한 사건의 올바른 결말을 위해 도움을 주십시오.

왕실 깃발의 상어 눈이 붉게 타오르고 있는 작금 이 현대에 법리와 귀족 가의 명예, 그리고 산슈카의 역사를 거스르는 실정법實定法의 파괴자들에게 적당한 처우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길 간절히 탄원하는 바입니다.


데슈칸 산맥, 로키 산의 산지기, 사대고가 그리턴 가의 가주家主, 하이샨 올드 그리턴 자작 올림.


추신.

잘난 사촌 덕 좀 보자.]


“······.”


머킷 그리섬 그리턴은 마지막 문장을 보면서 자신이 똑바로 읽었구나, 생각했다.


그의 사촌형제가 이토록 진지하고 또 절실하게 자신의 도움을 바라는 일은 확실히 흔치 않은 것이었다.

장황하게 긴 설명이었지만 어쨌든 뜻은 전해졌다.


세슈칸의 작힘 백작.

운트 작힘.


수도의 어느 관직 파벌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거론되고는 하던 뱀 같은 작자였다.


산슈카는 오래된 나라였고, 수많은 역사동안 많은 영웅과 범인들이 나고, 지고, 타오르고, 죽었다.

그들의 이야기만큼 켜켜이 높게 쌓인 역사서는 늘 고국古國으로서의 자랑이었고, 오랜 역사와 함께한 옛날부터의 충신들과 새로이 힘을 기른 신진파 가문들과는 늘 알게 모르게 반목이 있어왔다.


결국 같은 나라의 한 국민이며, 오래되고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차이일진데.

중앙에서 행정 처리를 하는 여러 관리들에게 있어서는 골칫거리나 다름 없는 파벌 분리였지만 귀족들은 그런 분쟁이 자신들의 주 업무라는 듯 늘 수도 지방에게 고민을 안겨주었다.


사슈나는 왕가로서 지엄하고 고고했고, 알사드는 공작가로서 위세가 대단했다.


그들만큼 오래되진 않았으나 나름대로 왕국기의 대부분을 함께한 귀족가로 이루어진 고류파들과, 그 반대되는 신진파들은 국내 대회의가 열리면 늘상 반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로멜리아와 그리턴은 사대四大고가의 일부로 명예로운 이름과 역사를 가졌지만 지금은 영락해서, 고류파에 있어서도 그리 대단한 입지를 다지지는 못했다.

그리턴과 다시 로멜리아를 비교하자면 로멜리아가 거기서 더 연민을 부르는 처지였고 말이다.


거센 힘겨루기를 은근하게 해대고 있는 것이 국내의 실정이다.


왕가의 권위는 있으되 그것이 절대적이거나, 진실로 모든 국토의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것이 진솔하고 실정적인 이야기였다. 그가 법관이기에, 더욱 잘 안다.


그리턴 가의 일원이었다가 사슈나 가의 한 명과 결혼을 해서 왕실의 사위가 된 머킷은 오랜만에 받은 사촌 형제의 연락에 편지 봉투의 질감을 느끼며 종이를 매만졌다.

‘······.’


사촌 형님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직접적인 문장 구사는 법무부차장으로서의 직업 윤리와의 갈등을 일으켰다.


법 안 지키는 놈은, 아주 많다.

그러나 개들 중에서 심각한 놈을 잡아내고 그래도 산슈카의 법적 정기를 올바르게 해내는 것이 법관 중 서열 2위로서의 의무였다.


수도의 눈길과 권력, 그리고 병력이 닿는 거리에 있는 세슈칸에서 대놓고 귀족가의 일원을 핍박하며, 부당한 대우를 하고 있다면 당장 치안부 소속의 수비대가 출동해도 괜찮은 안건이기는 하다.


그의 말이 온전히 다 사실이라면 그러하다.


얼마 없는 형제들 중 그리턴 가에서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던 하이샨의 얼굴이 떠오른다.


“크흠.”


머킷은 답잖게 헛기침을 했다. 쿨럭이는 소리에 가만히 있던 켈릭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더니 그에게 눈짓을 했다. ‘가도 좋을까요?’라는 뜻의 몸짓을 소극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소년에게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으며 허락했고, 편지 배달을 마친 소년이 들어왔을 때처럼 단정한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가로질러 나갔다.


짹.


창 너머, 별궁 옆에 정원수가 하나 있었다.


왕가의 일원이나 요직을 맡은 고관들이 있는 집무실 바로 근처로 은엄폐물이 있는 것은 그리 지혜로운 조경법은 아니었지만, 저 나무는 다소 떨어져 있기도 하고, 또 그가 좋아하는 향취를 풍기는 것이라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평범한 나무는 아니었다. 이전 제국기의 말엽 완성된 현재의 산슈카 왕궁은 다양한 유물적 아티팩트의 향연이라고 봐도 좋을만치 초상력학적으로 경계가 삼엄한 자리였다.

금사자 제1궁의 방비를 지키는 술식이 있던 자리에 훗날 심겨진 나무였고, 후대의 학자와 술사들이 갖은 연구 끝에 만들어낸 기이한 나무였다.


생목에 초상력이 스며들어 그 자체로 살아있는 아티팩트나 비슷한 것이 되어서, 인공적인 방어 의지를 가진 바이오 공학 경계탑같은 물건이다.


학자들이 하는 말은 반의 반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대강의 내용과 그 위력만큼은 깨닫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가 좋아하는 유자나무라 향이나 가끔 떨어진 열매를 주워다 차를 끓여 먹으면 맛이 좋다.

이따금씩 새들이 날아들어 지저귀기도 하는데, 업무 중의 피로나 졸음을 깨워주는 고마운 알람이기도 하다.


여름이었고, 슬슬 매달린 녹색 유자가 노랗게 익어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는 오후의 일처리를 잠시 미루고 십 분 여 쉬기로 했다.


똑딱거리면서 한 손에 어느새 쥐어든 만년필의 끝을 가지고 테이블을 두드린다.


잠깐 햇살을 받고, 나무를 구경하면서 고민하던 그는 결정했다.


하이샨 그리턴의 양심이 올바르며, 그가 파악한 사실이 진실에 근접하다고 했을 때, 그는 왕국의 법관 중 당장의 우두머리로서 사실에 근거한 판단과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일단, 몇 명의 사무관과 치안대 일부를 그리턴 가에 파견하기로 했다.


그들이 조사관의 역할을 하며 사실을 물어올 것이다.


초상 스킬이 발달한 이 세계에서 도시 간의 연락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적절한 준비와 아티팩트, 자원 등이 있다면 말이다.

일단 로멜리아 가의 일원이라면 산슈카 국으로서도 보호해야 옳다.

사대고가는 산슈카의 역사와 함께 존재해 온 명예로운 이름들이었고, 왕가와 공작가가 그러하듯 영락한 남작과 자작가 또한 면밀하게 보호받을 권리가 있었다.


이 일이 잘못 건드려져 국내에 곪아 있는 파벌 간의 반목적 감정을 터뜨리는 일이 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머킷은 보낼 부하 인선을 머릿속에서 고르기 시작했다.


*

prometheus-BQh3Y68JbyA-unsplash.jpg


작가의말

유자 맛있죠.

생거 말고. 요리한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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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7. 사연 23.08.13 32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7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5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5 3 14쪽
54 53. Could you join us? 23.08.05 29 4 34쪽
53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23.08.04 29 4 35쪽
52 51. 굳세어라 안드레 23.08.04 26 4 19쪽
51 50. "허억." 23.08.04 25 4 20쪽
50 49. 달려가는 소시민들 23.08.02 30 4 25쪽
49 48.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어진 23.08.02 26 4 36쪽
48 47. 최태현은 빨랐다. 23.07.31 29 4 25쪽
47 46. 로웰 드버는 결심했다. 23.07.31 33 4 34쪽
46 45. 석별惜別 23.07.30 35 4 25쪽
45 44. 결정의 주체 +3 23.07.29 35 4 45쪽
44 43. 그리턴 자작가에서 그간 23.07.29 29 4 25쪽
43 42. 호아킨 팍스Joaquin Pax 23.07.25 28 3 29쪽
» 41. 사촌 형제 23.07.24 29 3 18쪽
41 40. 로키 캐슬 23.07.24 27 3 20쪽
40 39. 운트Unt의 의뢰 23.07.23 27 3 30쪽
39 38. 그리턴, 갈색 사슴 23.07.23 32 3 29쪽
38 37. 등산 23.07.23 25 3 31쪽
37 36. 트레이닝Training 23.07.23 25 3 32쪽
36 35. 제이미 숄더 23.07.20 27 3 51쪽
35 34. 전진하는 요새 23.07.19 33 3 32쪽
34 33. 강도단 23.07.19 29 3 31쪽
33 32. 붉은 다리 협곡 23.07.19 28 3 34쪽
32 31. 협곡 진입 23.07.15 31 3 31쪽
31 30. 마차 안 23.07.14 36 4 30쪽
30 29. 돌아가는 23.07.13 34 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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