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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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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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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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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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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49. 달려가는 소시민들

DUMMY

*


마차 내부에 몸을 싣고 있다면 슈페리얼 2호의 방호력에 도움을 받게 되어 있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객실에 타면서 창 밖으로 몸을 조금 빼꼼 내밀던 말이다.

슈페리얼 2호에 작용하는 초현실적인 방호력은 마치 자력이나 그런 것처럼, 일정한 막이나 범위를 형성하며 그것에 닿은 것들에 얼마간 옮겨갔다. 아예 마차에서 분리되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방호력은 계속해서 기능하여 탑승자를 ‘마차’의 일부로 만들고, 방어막의 보호 속에 둘 테였다.


질리언과 페이브 역시 나름대로 활을 꺼내들어 부족한 솜씨지만 사격을 해보려 했다. 그들의 솜씨로 백발백중은 무리이니, 최대한 아군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사로를 확보한 뒤 공격 횟수만 채우고자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부석의 빈 공간들처럼, 적당한 자리를 찾아 자세를 위한 자리와 사격 궤적을 확보하는 것이 일이었다. 페이브는 작은 곡궁 하나를 준비해두었던 걸 꺼내들고, 마차를 이끄는 흑마의 그냥 올라타버렸다.


여전히 담대한 심장을 가지고 있는지 소란에도 잘 놀라지 않는 로즈와 덴드였다. 슈페리얼 2호에 묶이기 위해 그런 성정을 가진 놈들을 고른 탓도 있고, 이 마차와 연결된 터라 여태껏 어떤 난관도 그 네 발로 각자 헤쳐나왔기 때문에 강인한 기억이 새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로즈와 덴드 중 오른 쪽 덴드의 등에 올라타 갈기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페이브는 상체를 빙글 돌려 마상 궁술을 시도했다. 그가 노리는 곳은 기사와 기사 사이, 성벽의 빈틈이었다.

몬스터가 다가온다면 그 사이를 두고 벌어져 있는 양쪽의 두 기사가 무차별적으로 대검이나 창날 따위를 휘둘러서 틈을 메울 것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사이에 최대한 많은 화살을 갈겨야 하리라.


로즈와 덴드는 전마였고, 다양한 마구들이 있었다. 페이브는 전통에 화살을 가득 담은 것을 능숙하게 덴드의 배 근처 마구에 연결시켰다. 뽑기 좋은 각도로 살짝 아래에 걸린 전통이다. 마구잡이로 뽑아서, 페이브가 난사하기 시작했다. 한 두 번 직선으로 쏘아내다가 잘 걸리지 않는 것을 느끼고 그냥 위를 향해서 쏘았다.


어차피 면의 이동이라고 할만한 몬스터 대군의 전진이었다. 대강 쏴도 고블린은 얻어 맞으리라. 나무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쉬이이, 하고 화살 날아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렸고, 바로 앞에 떨어지도록 화살이 여러 방식으로 날려졌다. 질리언 역시 마찬가지로 궁술을 시도했다. 둘 모두 검술에 비한다면 소양이 떨어지지만 손재주가 나쁜 편들은 아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 틈새, 그 빈 공간을 찾아 몬스터를 노린다는 게 난이도 있는 일이었으나 점차 익숙해졌고, 다가오는 몬스터들의 몸체에 꽂히는 화살 개수가 점점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제냐는 조금 옆, 마차의 위에서 장궁을 쏘아대고 있다. 저 대군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그는 다이어 울프만 노리기로 했다. 서른 마리를 지금 빠르게 다가오는 얼마 안되는 시간만에 다 처치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지만, 최대한 줄여놓는 게 나쁠리 없었다.

다이어 울프만 없었다면 고블린이나 오크의 추격 정도는 그래도 피해볼만 했을텐데.


퉁, 하고 거친 현악기의 소리처럼 다시 한 번 시위가 떨었고, 그러기 전에 제 몸에 올려졌던 철시 하나는 다시 쏜살이 되어 바람을 갈랐다. 제냐는 적당히 장궁으로 견제하면서, 한 호흡은 쉬고 장궁을 빙글 돌려 빼내듯 바깥을 향해 보게 잡았다. 그 아랫단을 마차의 지붕에 닿게해 툭 놨고, 오른 손을 앞으로 뻗는다.


이럴 때 가장 좋은 일은 아무래도 초상 스킬이다. 황야 지룡을 상대할 때도 역시 그러했듯이. 그의 손 주변으로 파스스, 하고 강렬한 MP의 유동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강렬하며 또 현실적인 연출 효과를 가지고 있는 비련의 시나리오 속 초상 스킬들은 쓸 때마다 나름대로 짜릿한 맛들이 있었다.


영화 속 히어로들의 초능력을 보는 것과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자신의 감각과 인터페이스 상의 움직임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초능력이라.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초능력 시뮬레이터’라고 팔았어도 상당히 완성도가 높고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을 것 같은 재미다.


어쨌든, 날씨의 일부요 원소라고 취급받는 번개의 힘이 별다른 기계적 장치도 없이 그의 손바닥 앞에 모여들었다.

썬더 볼트, 의 시전이었다. 어느새 40에 근접한 스텟들이며, 그가 자주 사용하는 물리 계열의 경우 40을 넘은 것도 있었다. 54레벨의 스텟 치고는 흉악한 편이었다.


그만큼 그가 지독한 사냥을 쉬지 않고 반복해왔다는 말뜻도 된다.


별다른 기계 장치 없이, 라고는 했지만 아이러니일 지 모른다.


근미래, 21세기의 끝을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어느 원룸 방구석에서 가장 최첨단 시뮬레이터 기계로 플레이하며 게임 속에 들어와있는 것이 제냐, 김서원의 실재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지금 당장 그가 감각하는 세계 속에서 기계 장치는 없다. 이 세계가 기계 장치로 인해 이루어진 꿈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아니, 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점도 있고, 아닌 점도 있다.


‘비유’이며 ‘허상’이라는 점의 꿈에 비해서는 조금 낫다. 실제적 꿈은 사람의 뇌와 신경에 영향을 미치고, 그 정리 과정이 다음 날 낮의 삶에 도움을 주니까.

실제 비련의 시나리오 플레잉은 신체 각부의 근육에 약간의 자극을 주기도 하고, 운동 선수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연습 효과를 줄만큼 실제적인 무엇이었으니.


물론 고도로 발전한 기계로 인해 자각몽을 꾸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고, 그저 일반적인 꿈에 불과하며 이 세상에서 얻는 수많은 성취들을 현실로 가져가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기는 했다.

다만 이 속에서 얻었던 수많은 경험이나 기억들이 전이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본인이 시뮬레이터를 끄고 나서 그냥 퍼자는 게 아니라 리마인드라도 한 번 한다면.


게임에 불과하지만 어떤 사람은 일류 프로게이머가 되어서 현실에도 영향을 미칠만치, 많은 부와 명예를 얻기도 한다. 결국 스포츠의 한 갈래가 되게 되어있으니까. 동일한 조건 하에서의 경쟁이라는 점이.


독자적인 자신의 길, 을 구체화시키며 권장한다는 점에서 뭐 해볼만한 취미이기도 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어떤 식으로든 이 하드한 서바이벌 게임 내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길게 꾸려나가다 보면, 현실에서의 삶에도 써먹을 만한 어떤 동기나 노하우 따위를 얻을지도 모른다.

없을지도 모르고, 일말의 상관도 없을 수 있지만. 무얼 하든 어디에서든 깨달음을 얻는 건 결국 본인의 주체적인 태도에 달린 것이기에. 사람마다 다를 테다. 누군가는 쓰레기같은 ‘작품’이라 부를 수 없을만치 수준 이하의 컨텐츠를 즐기면서도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되새긴다.


무엇이든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망가뜨린 그것 속에서도 세계의 구조에 대해서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제냐는 게임에 슬슬 재미를 붙여가기 시작했다.


잘 하지 않는 게이밍이었지만, 나름대로 완성도가 높은 세계였다. 그리고 이전부터도 이미 제일 잘 즐기는 취미 생활이 되어버린 삶의 패턴이긴 했다만, 그럼에도 ‘재미’를 붙인다는 점은, 그가 클리어를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서바이벌 게임이고, 경쟁 게임의 구도 또한 가진다. 어떤 플레이어가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메인 스토리 급 퀘스트를 열어서,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 지 기다리는 재미도 있다.


누군가는 시나리오의 주체요 주인공이 될 것이고, 어떤 자는 게임 오버되어 바깥에서 바라보거나 혹은 게임 내부에서도 객체가 될 테다.

게임이 정해놓은 시스템의 잣대가 게이머에 대한 진정한 평가일 수는 없지만, 이왕 그렇게 만들어진 게임이니 한 번 경쟁과 승리, 클리어를 위해 달려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제냐는 분명한 초후발주자였지만 메인 스토리에 닿는 선두 주자가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직 콘란드 대륙은 무궁무진하게 찾아 헤맬만한 미경험지들이 많았고, 그 남아 있는 탐험지의 깊이를 생각해본다면 얼마든지 주인공이 되어볼 수도 있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건 비단 제냐만이 아니라 아직 비련의 시나리오에 들어오지 않은 신규 가입자들, 새로운 플레이어들에게도 열려 있는 말이었고.


뭐 물론 여태까지 콘란드 대륙을 여행해 온 선발대들, 기존의 플레이어들이 일을 낼 가능성이 조금 더 있기는 하다. 어떻게 되든, 게임을 재미있게 즐겼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제냐는 클리어를 염두에 조금 두기 시작한다.


그의 손바닥 앞에서 푸른 번개의 투사체가 형성된다.


MP는 과용한다.


일반적으로 300정도의 형성 MP였지만 두 배, 세 배를 넘는다. 정확한 조준 따위는 사실 없어도 된다. 다가오고 있는 무리들에는 대충 때려 박아도 맞으리라. 번개의 지배자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푸른 번개의 둥근 공을 만들어간다.


공 형태의 무엇이지만 외곽이 깔끔하지는 않았다. 둥근 외곽을 벗어나는 번개 줄기들이 계속해서 튀어나간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빛나는 형체가 만들어진다. 푸른 빛줄기가 위협적이었다. 썬더 볼트는 기본적으로 이리저리 휘어대며 날아가서 궤적을 예측하기 힘들고, 파이어 볼이나 여타 원소의 볼, 볼트 류 스킬보다 빠른 편이다.


번개에서 오는 이미지 자체가 그런 것이기에 애초에 기본 값이 그리 설정되어 있다.


제냐는 MP를 미친듯이 밀어넣기 시작했다.


로웰 드버는 이처럼 자신의 MP 중 과반수 이상을 사용하면서, 별다른 효율적 손실을 겪지 않고 정확하게 다루어낼 수 있기에 강대한 ‘의지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보통은 거대한 물의 흐름을 제어할 수 없듯 난폭해지는 스킬 운용이라 명중률이던 속도건 형태건 본질적 효과이던, 어떤 식으로든 스킬의 상像이 무너지며 완성도가 떨어지게 되어있다.


지금 당장은 압도적인 파괴력의 한 방이 필요할 뿐이었으므로 상관 없다. 썬더 볼트는 어느 기점을 지나서 구형의 일관된 모습마저 없어졌다. 계속해서 방전해대는 전기의 흐름을 시각화한 것 같이 요동친다. 바깥으로 퍼져 사라지지는 않았다. 모양이 잡히지 않을 뿐이지 계속해서 MP는 투입된다.

작은 규모의 MP로 스킬을 쓸 때처럼, 정확히 MP1이 썬더볼트의 파괴력 1로 대체되지 않고, 변환 효율이 조금 떨어져갈 뿐이다. 0.9, 0.8, 0.7······. 지나친 낭비가 된 이후에야 그의 MP투입이 멈추었다.


한 낮, 아침과 점심 사이. 즉 오전.


하얗게 부서지는 산책로의 중간에 그보다 더 밝게 타오르는 빛의 투사체가 일렁거린다. 일그러지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낸다. 썬더 볼트는 원래 이렇게 사용하는 스킬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알게 무언가. 정해진 법도로만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냐는 자신의 상체만치 거대해진 썬더볼트의 궤적을 대충이나마 가늠했다. 천공의 눈은 제대로 발동하지 않았다. 투사체를 다루는 일이라 그래도 붉은 예상 점선이 나타나야 했는데,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는 듯 여기저기로 뻗어나가고 흔들리기에 제냐가 시선을 돌려 없애버렸다.


스킬 효과들은 보통 간단한 게임 내의 집중과 시선 분산으로 조작이 가능하다.


나무들 틈바구니에서 짐승의 달려옴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한낮의 태양 아래를 어디 어두운 짐승들이 노리냐는 듯, 불호령같은 썬더 볼트 한 개가 날아가 그것들의 머리를 노린다.


*


검은 머리칼을 짧게 잘랐다. 백인종에서 나타나는 것치고는 약간 드문가, 싶은 빛깔이었다. 흑발흑안.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 쓴 안쪽에서 그런 인상착의의 사내가 달리고 있었다. ‘안드레 챈’이었다.

운트 작힘 가의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 십인장. 열 명의 부하를 두고 강력한 검술을 자랑하는 검객. 중견 기사. 로멜리아 가 일행 암살 작전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보다 뛰어난 역량과 핵심적 능력을 갖춘 용병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들은 동기가 빈약했다. 안드레는 직접적으로 운트 작힘 백작의 손아귀에 얽혀든 인물로, 그 뱀과 같은 자의 계략에 어쨌든 동의하고 나아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용병들이 있다면 그들을 다독이거나 위협해서라도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했다.


썩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그다지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세슈칸에 ‘노모’가 한 분 계셨다.


그다지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오래 전에 가족과는 거의 연을 끊다시피 해서 여태 많은 도움을 드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어느 정도 기사단에서의 업무와 직책이 궤도에 올랐을 때부터는 알게 모르게 금전적으로 지원을 해드리고 있었다.


운트 작힘 백작의 휘하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어떤 핑계를 대서든 일가친족과는 연을 끊는 것이 뒤탈이 없다. 그가 지켜본 바, 사이코에 가까운 일면을 가진 작힘 백작은 자신의 대업을 위해 방해가 된다면 부하의 가족마저 인질로 삼고 이용할 수 있는 작자였으니 말이다.


어디까지나 간접적으로, 그저 살았나 죽었나 헷갈릴 정도로만 굴며 부모님을 먼발치서 바라보았다.

가끔 들러 얼굴을 보일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사단의 일원으로 익혔던 온갖 잡기술이나 암행술을 사용해 동료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가서 뵙고 온다.


배다른 형제의 내외 하나가 자신 말고 노모를 종종 돌보는 것 같았지만, 그들 또한 세슈칸의 외곽에서 거칠게 살아가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도시 안에서 안정적으로 노인을 돌볼 여력은 없는 모양이다.

바깥 황야에서 현상금 사냥꾼 따위의 일을 하다가 가끔 도시 내에 들르는 듯했다. 배다른 형제의 부인, 정도가 그나마 가장 노모를 많이 찾는 인물이었다.


안드레 챈은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로멜리아 가의 일행들을 죽여도 되는가, 에 대한 문제도 당연히 고민을 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책임자로 불려나온 이상 합당한 행동까지는 해야만 했다. 눈에 드러나게 반항을 한다면 운트 작힘 백작의 심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짓이고, 자신은 그러고서 세슈칸 시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자신마저 그렇고 혹 작힘 백작이 얼마 남지 않은 친족을 발견한다면 더욱 절망적인 일이리라.

그저 말년은 평온하게 지내시도록, 그렇게 쥐죽은듯 자신 또한 있고 싶었다. 이 도시에서. 그러고 난 다음에는··· 그래 뭐 어딘가로 훌쩍 떠나도 좋을 것이다.


기사의 명예 서약을 한 주군을 배반하고 도망가는 신세가 되겠지만, 지나친 명령을 수행하다가 악업을 쌓는 머저리보다는 나은 처지였다.

아예 외국을 도피처로 삼는다거나, 조금 더 운트 작힘 백작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고 싶다면 그의 정적政敵에게 가서 의탁하는 것 역시 쓸만한 수였다.


어쨌거나 안드레 챈은 간신히 살아왔다.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 자체의 규율과 수준도 결코 낮지 않았고, 그는 대영주의 아래서 기사단 간부까지 올라간만큼 다른 소규모 영지에 간다면 단장직도 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칼을 제 몸처럼 여기고 살았고,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솜씨 좋은 기사였지만 여러 고생을 했다.


지금의 임무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도 후반전의 무엇이라고 여기기는 했다. 아직은 젊은 나이였지만, 운트 작힘의 밑에서 일하는 삶만을 따로 친다면 말이다.


점차 작힘 백작은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토록 멀쩡한 국내에서, 멀쩡하게 지나가는 귀족을 살해하고자 하다니. 그것도 가문의 기사단과 용병들을 정식으로 고용해서 일을 벌이려고 하다니.

정상적인 행보로는 볼 수 없는 짓들이었고, 그 계산의 이면에는 지금 당장만 들키지 않고 지나간다면 훗날 다 무마할 자신이 없다는 셈이 들어있으리라.

안드레는 그 계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훗날 귀족 살해마저 덮을 수 있는 국면이 온다?


나라를 뒤엎겠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거기다 마침 사대고가의 일원인 로멜리아 가를 적대하고 있으니, 아마 정통파와 신진파와의 정치적 싸움이 내란의 수준까지 갈 확률이 있었다.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라고는 운트의 하수인에 불과한 그로서 말할 수도 알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산슈카라는 소국의 멈춰진 정세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만은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불쌍한 기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 발로 걸어왔고 제 손으로 죽여 오기는 했지만. 삶에 대한 회의감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조금 더 나은 삶. 그저 경제적인 안정이 아닌 진실로 나은 삶에 대한 욕구는 불쑥불쑥, 이따금씩 치솟아 그에게 두통을 선사하곤 했다.


안드레는 검을 쥐고 달리고 있다. 몬스터들이 달려나가는 거대한 행렬 뒤쪽이다. 적절한 타이밍이 중요하다. 몬스터들의 군대는 한 번에 마차와 인마를 덮칠 것이다. 로멜리아 가의 사람들이 어떻게 다니는지는 이미 안다.


아티팩트로 무장되어 있는 신묘한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요인을 경호한다. 거기다 그리턴 가와 공조하며 나왔으니 아마 병사들의 지원이 있을 것이다.

몇 명이 되었든, 파도와 같이 덮치는 몬스터 아웃브레이크라면 눈을 속이기에 충분하다. 몬스터들은 작힘 가의 기사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을 것이며, 그 정도만으로도 초인적인 신체 능력이 있는 기사들은 암살이 충분히 가능하다.

다이어 울프 몇 마리만으로도 기사의 발이 묶인다. 그것이 넘치게 되면 기사도 순식간에 잡아 먹힐 수 있었다.


기력을 다루는 기사라지만 MP가 떨어지면 결국 방호력에 한계가 온다. 금보다 비싼 아티팩트를 모든 기사단원들이 둘둘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야 거대한 맹수의 이빨과 발톱에 짓이겨지게 마련이다.


거기에 작힘 가의 기사단 정예들, 여섯 명이 모두 기력을 검날에 최대로 쌓고 단번에 마차의 외부를 후려 갈긴다.

검날에 두른 기력이 그 자체로 폭약과 같은 위력을 낼 것이다. 그 정도는 가능한 놈들로 데려왔다. 주변을 신경쓰지 않고 모든 MP를 폭발시켜서 최고의 위력을 낸다면, 마차의 방어 아티팩트에 구멍을 내는 것도 가능은 하리라.


상대 측의 호위 인력은 모두 몬스터에게 정신이 팔릴 것이다.


마차로 다가가는 사이에 눈을 뜨고 있는 놈이 있다면 그놈부터 처리하는 게 먼저겠지만, 현장에 닿은 다음에 판단해야 할 세부 사항들이다.


안드레는 생각이 많았다.


지금의 일도 그렇고, 지금 이후의 일도 그렇고.


노모의 얼굴을 보고 싶다.


사실 곁에 두고도 보지 않는 것은 그의 선택일 지 모르고, 사실은 그런 것이지만.


삶에는 짐이 여러 개다.


무엇을 버려야 할런지.


그는 혼란 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작힘 가의 십인장이었다.


*


작힘 가가 보낸 암살 공격은, 전면부가 다이어 울프로, 그 뒤를 고블린과 오크가 나란히 잇고 있었다.


그 뒤에 암살의 공격검檢이 될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원들 여섯이 따른다. 감지술사들은 조금 뒤쳐져도 어쩔 수 없다.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고, 현장에 와서 돌발 상황에 대처해서 한 손 거들 수 있다면 의뢰금 이상의 역할을 해내는 것이리라.


애초에 그들은 감지 계열에 특화된 점으로 용병 계급을 받은 인간들이었고, 로키 산 내부의 넓은 범위를 다 지키며 목표물을 제 때 찾아낸 것으로 일단의 의뢰는 완수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도망가지 못하게끔 위압을 주고 암살 작전 돌입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것은, 마지막에 작힘 백작이 어떤 선택을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세하게 말한 바는 없으나, 허튼 수작을 부리거나 만일 의뢰 내용을 아는 채로 도중에 도망치려 한다면 즉결 처분해도 작힘 백작의 뜻에 거스르지 않을 테다. 도리어 그쪽을 반기겠지.

아주 조금의 부정적인 요소도 남겨두고 싶지 않아 하는 사이코였다. 운트 작힘 백작은. 그 자신이 부정의 결정체같은 인격이라는 점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모양이다.


감지술사들은 느린 발로 따랐고, 그들의 호위를 맡던 전투직 클래스의 용병 둘이 조금 앞서며 기사들의 뒤에 붙는다. 감지술사와 용병 둘의 사이에 로웰이 달리고 있었고, 로웰의 곁에 호아킨과 릿샤가 있다.


로웰은 암살 직전, 그리고 도중까지도 마물들을 컨트롤해야 하는 지휘관이었고, 암살 작전의 요인이었다.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하고 가급적 상황을 봐서 기사를 돕는 것이 호아킨과 릿샤의 일이리라.

사실은 기사들 쪽에선 한 명 정도만 붙고 호아킨이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원하고 있긴 했지만, 지금은 순서를 지키며 그 뒤를 사이좋게 따라 달리고들 있었다.


로웰이 부리고 있는 마물들은 이미 완벽하게 테이밍이 된 상태이다. 앞으로 길어야 한 시간 여 정도면 최초에 사용했던 MP의 효력이 옅어지기 시작할 테다. 그 전에는 큰 소모 없이 마물들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었다.


보다 복잡한 움직임을 한 마리 한 마리, 전체에 영향이 갈 정도로 컨트롤한다면 MP소모가 상관 없이 상당하겠지만, 작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소한 컨트롤은 얼마든지 지속 가능하다.


몬스터들의 행렬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며 질서정연하게 달리고 있는 것도 그런 컨트롤의 일환이었다. 숲 속을 나아가는 진격이 빠르다. 화살인지, 상대방 쪽에서 번개인지 모를 것들이 날아들어 선두를 달리던 몬스터들을 지져버리고 꿰뚫었으나 큰 영향은 아니었다. 어차피 막대한 물량을 막기엔 화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걸 멈춰세우려면, 로웰 정도로 정신력 계열 스텟에 과투자한 초상술사가 와야 했다. 그도 아니면 레벨만으로 100이 한참 넘는 고수 급의 캐릭터가 오던가. 어느 쪽도 당장 어디서 부를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로웰 드버는 특질의 초상술사였고, 그 특질 때문에 중수자들의 도시인 세슈칸에서 아주 진이 빠지도록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신세다.


그 덕에, 그리고 그 효용성이 지속적이기에 처리되지 않으며 계속해서 의뢰금 받은 것만 쌓아가는 신세였지만.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싶었다.


귀족들의 암투와 정쟁은 지긋지긋하다. 평범한 의뢰 정도로 족하다. 그가 가장 마음 편하게 해낼 수 있는 건, 어느 지방의 도시나 마을에 몬스터들이 처들어오니 퇴치해달라는 종류였다.

이빨을 들이미는 마수들을 직접 테이밍해도 좋았고, 그 주변 몹들을 장악해서 전쟁을 시켜도 좋았다.


사람에게 마수를 이용해서 칼날을 들이미는 건, 그 자체로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계산과 사고와, 정치적 도덕적 결정이 필요한 일들이었다. 과연 자신이 저지르는 일이 맞는 것인가, 그는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산슈카와 세슈칸의 흐름을 살펴야 했다.


차라리 한 편을 정해서 온전히 그곳에 도움을 준다면 머리야 편하겠다만. 그렇게 되었을 때 병력의 핵심을 차지할 천재 마물술사를 과연 다른 편에서 가만히 놔둘까? 신체 능력의 부족에 비해 과하게 뛰어난 전장 장악 능력은 암살 당하기에 딱 좋은 스텟 구성이다. 어딜 가나.


그를 전적으로 믿고 완벽하게 투자를 해줄 대영주를 만나서 어마어마한 기사들이 그의 호위로 계속해서 붙는 삶을 산다면 좀 모르겠는데···. 그것또한 애매했다. 로웰이 최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장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정해져 있었고, 대륙의 고수라 불리는 이들에 비하면 확실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 정도 투자를 할 바에야 호위에 쓸 고급 인력을 돌려 전장에서 부리는 것이 영주의 입장에서는 더 낫다. 로웰은 편하게 쓰고 버릴만한, 온리Only 공격력 구성으로 만들어진 전쟁 유닛에 불과했다. 더 고차원적인 싸움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자신의 주제를 잘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을 도와줄만한 눈빛을 가진 호아킨과 릿샤를 선택했다.


이들도 그다지 거처가 일정하지는 않았고, 작힘 백작의 명령에 의해 반쯤은 억지로 이곳까지 온 인물들이었으니. 게다가 계산이 빨라 의뢰 뒤의 상황을 짐작하고 미리 행동 방향을 결정해버리는 담대함까지.

로웰에게 필요한 부분들이었다. 어떤 거시적 전쟁의 득실 상황 때문이 아니라 당장 그를 보완해줄 수 있는 근접 전투직의 동료들과, 그 과감한 결정력들은 말이다.


이제 이들이 말했던 대로, 암살의 대상이 되는 상대 가문의 일원과 집단의 구성원들이 조금 호의적이고 양심적이며 상식적인 사람들이라, 그가 몸을 의탁하고 지내기에 좋은 편이었으면 좋겠다.

거기까지만 간다면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안온한 공동체 내부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딱 지금 바라는 정도의 상황이었다.


작가의말

안드레도 로웰도 뭐

각자 살아남고 싶은 열망의 사내들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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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 릿샤Rissha의 방 23.08.16 23 3 17쪽
58 57. 사연 23.08.13 32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7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5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6 3 14쪽
54 53. Could you join us? 23.08.05 29 4 34쪽
53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23.08.04 29 4 35쪽
52 51. 굳세어라 안드레 23.08.04 26 4 19쪽
51 50. "허억." 23.08.04 25 4 20쪽
» 49. 달려가는 소시민들 23.08.02 31 4 25쪽
49 48.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어진 23.08.02 26 4 36쪽
48 47. 최태현은 빨랐다. 23.07.31 29 4 25쪽
47 46. 로웰 드버는 결심했다. 23.07.31 33 4 34쪽
46 45. 석별惜別 23.07.30 35 4 25쪽
45 44. 결정의 주체 +3 23.07.29 35 4 45쪽
44 43. 그리턴 자작가에서 그간 23.07.29 29 4 25쪽
43 42. 호아킨 팍스Joaquin Pax 23.07.25 28 3 29쪽
42 41. 사촌 형제 23.07.24 29 3 18쪽
41 40. 로키 캐슬 23.07.24 28 3 20쪽
40 39. 운트Unt의 의뢰 23.07.23 27 3 30쪽
39 38. 그리턴, 갈색 사슴 23.07.23 33 3 29쪽
38 37. 등산 23.07.23 25 3 31쪽
37 36. 트레이닝Training 23.07.23 25 3 32쪽
36 35. 제이미 숄더 23.07.20 27 3 51쪽
35 34. 전진하는 요새 23.07.19 33 3 32쪽
34 33. 강도단 23.07.19 30 3 31쪽
33 32. 붉은 다리 협곡 23.07.19 28 3 34쪽
32 31. 협곡 진입 23.07.15 31 3 31쪽
31 30. 마차 안 23.07.14 36 4 30쪽
30 29. 돌아가는 23.07.13 34 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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