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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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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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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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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3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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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29. 돌아가는

DUMMY

질리언이 들고 있는 것은 4권이었다. 총 5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중 4권. 1권이 개요를 개략적으로 풀어 설명하고, 나머지 권 수가 자세한 설명과 스토리를 더한다. 특이한 구성이었지만, 뭐. 아무튼 4권이면 후반부의 이야기일 것이다.

로멜리아 가의 흥망성쇠를 논하자면, 전성기의 끝이 4권의 끝이며 5권은 영락한 이후의 일을 다루고 있다.

마침 질리언이 말하는 내용도 그러했다.


“거기 있다고? 뭐가?”


줄리앙이 물었다. 질리언은 커다란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다른 이들의 이목도 펼쳐진 책으로 온다.


“88대 가주님께서 산슈카 제국기에 마지막으로 칼을 들고 나가서 승리하셨을 때요.”


질리언이 책의 내용을 가리키면서 읊었다.


“[로멜리아 가의 88대 가주이자 소드Sword 마스터였던 카신 로멜리아 백작은 침략군이 물러간 뒤, 산슈카의 귀족이었던 자들이 모여 일으킨 내란을 정리했다.

···

산슈카 제국령 바깥의 외적들은 자신들이 차지한 파이 조각에 만족했지만 뒤늦게 제국을 배신했던 자들의 욕심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공작이었던 존 로멜리아가 죽고, 공작가가 백작가가 된 이후 가주가 된 존의 아들 카신은 배반자들에게 무엇보다 엄정한 검기를 선물했다.

수 만의 귀족가 사병들이 왕도 사르삿Sarsatt에 모여들어 왕위를 찬탈하고자 했으나 누구도 나서서 막지 못했는데, 로멜리아 백작이 고작 이 천의 기병과 백 여 명의 기사단을 데리고 출정해 제국기 후반의 소란을 잠재운다.

이 때의 귀족들의 반란을 막지 못했다면 지금의 산슈카는 왕국으로도 남지 못했을 것이며······


······(중략)


사람같지 않은 신위를 보인 로멜리아 백작이 가지고 있던 건 한 개의 펜던트와, 한 개의 손방패였다.

그가 긴 롱소드의 위로 푸른 검기를 솟구쳐올릴 때마다 펜던트가 강렬하게 빛났다. 마르지 않는 SP를 검술가에게 부여하는 보석이 있었고, 또 멀리서 다가오는 화살과 돌무더기는 어김없이 손방패로부터 뻗어나온 하얀 막에 막혀 가루가 되었다.

전류가 서린듯 요동치며 상대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던 방패는 분명 제국의 보물 중 하나였다.


···훗날 카신 로멜리아 백작은 이 두 개의 보물을 왕에게 진상했으나 공신의 충정을 이유로 당대의 국왕이 받지 않았다.

카신 백작은 세상을 떠나기 전 말미에 그의 가장 충실한 친구였던 작힘 후작에게 보물을 주었고, 소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던 후작가에서 신의에 대한 보답으로 수 백의 기병과 말, 세 명의 상급 초상술사와 함께 금은보화를 건네준다.


그러고도 작힘 후작과 카신 백작 사이에는 연이 남아서, 다음 대의 후작이 검을 놓는 순간부터 어느 때건 로멜리아의 요청에 따라 보구를 반납하기로 서약한다.] ······.”


질리언이 긴 글을 읊는 동안 다른 이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과 추리를 빠르게 정리하느라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로멜리아와 산슈카 전기집에는 또렷한 내용이 있었다. 저것 외에 다른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


줄리앙은 자신의 둔함을 탓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때로는 코 앞에 물건을 놓고도 정녕 찾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다.

오랜 삶의 경험으로 줄리앙은 그게 진실이란 걸 안다.


“저거군요.”

“저거네요.”


헤슈나가 말했고 제냐가 받았다. 노인은 짐짓 담담한 척 턱수염은 매만졌지만 속내를 숨기기 어려웠다. 고갤 끄덕인다.


“저거로군.”


질리언은 잘했죠? 라는 표정으로 그들을 처다봤다. 헤슈나와 비교해도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급 인원을 제외한 전투 병력 가운데 호위조로 뽑혔을만큼 재능이 출중하다. 바꿔 말하면 실력에 비해 어린 티가 가끔 있다.


질리언은 이미 여러 번 읽었던 책이었기에 그 종반부까지 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직도 오후의 시간대다. 줄리앙이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가 중요하겠군.”

“그렇죠.”


제냐가 맞장구쳤다. 맞는 말이다. 펜던트와 손방패. 친절하게 삽화까지 그려져 있었다. 오랜 역사를 여러 번의 교차검증 끝에 실은 책이니 아마 정확할 것이다.

88대 가주, 제국이 왕국이 되던 그 격변기의 인물인 카신 백작이 생의 마지막에 작힘 가에 넘긴 물건이다.

산슈카의 제국기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의 이야기였다. 그 동안 60여 번의 교체가 있었다. 로멜리아 가의 주인 자리 말이다.


전대 가주, 전 남작이 꼭 150대 가주였다. 아직 정식으로 계승식을 하진 못했으나 그들 눈앞의 헤슈나가 151대 로멜리아 가주였고.

가문의 대수가 숫자로 백을 넘고, 거기서도 중반에 이른다는 말은 현실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모든 왕의 수를 더해도 30이 안 될 테니. 한 세대를 30여 년으로 계산했을 때 4, 5천 여 년의 시간이었다.

현실감 없는 단위였고, 지구의 역사와는 궤가 달랐다.

물론, 게임 내 가상의 설정이니 그렇다.


“가주님께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었던가요. 그러니까, 아버지께서요. 그저 작힘 가와의 우정만을 믿고 물건을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으셨다면 너무 허황된 요구가 아니십니까.”

“가주님의 마지막 말씀이라······.”


줄리앙은 헤슈나의 이야기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전 남작, 자힌 로멜리아와 마지막으로 얘기한 건 약 한 달 반 여 전의 어느 밤이었다.

중독 증세로 위독하던 남작이 고비를 넘기던 날.

그 다음 날 새벽, 가문의 중신들과 자식들의 곁에서 남작은 마지막을 맞이했다.


줄리앙은 그 때 마지막으로 의식이 또렷하던 남작과 유일하게 후사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눈 사람이다. 다른 이들은 거의 꺼져가는 불씨처럼 사그라드는 남작의 정신 앞에서 몇 마디 당부나, 사랑의 말 정도를 나누고 들었을 뿐이었다.


줄리앙은 그 날을 기억했다.


*


“줄리앙······.”


바깥은 바람이 찼다.


로멜리아 남작령. 세슈칸으로부터 여행길로 보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예전엔 그곳부터 세슈칸까지가 전부 로멜리아 가의 영토였다. 지금은, 전부 사라지고 한 영지만 남았다. 예전에 로멜리아 가의 자리였던 곳은 산슈카의 다른 귀족들이 차지했거나, 혹은 인접국의 영토로 편입이 되어 역사의 명맥이 끊긴 곳들이었다.

그 땅의 역사는 로멜리아 가가 아니더라도 번영하겠지만, 로멜리아 가가 주인으로 있던 역사는 말이다.


봄, 바람이 조금은 찼다. 황야의 바람 줄기는 세차게 저택의 창문을 두드렸다. 바깥은 어둑하다. 침대에 몸을 누인 남작은 성대가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처럼 힘이 없다. 긁는 듯한 소리를 내며, 상처 입은 짐승이 색색 숨을 쉬듯이 말을 했다.

오래도록 그가 모셔온 주인의 말이었다. 줄리앙은 늙은 귀를 가까이하며 그 전언을 확실히 듣기 위해 애를 쓴다.


“예, 남작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남작이 침대 속, 이불에 파묻힌 채 그 어깨 위로만 몸을 드러내고 있다. 옥빛의 풍성한 감이 있는 두터운 이불이었다. 뒤로는 초식동물의 털과 새의 깃털을 모아 만든 특제 배게가 흰 천에 은빛 천에 싸여 있고.


남작은 천천히, 또 힘겹게 목을 가누어 줄리앙이 있는 자신의 왼편으로 돌렸다. 고개 끝 시야에 줄리앙이 걸렸다. 남작은 흐릿한 눈가를 한 번 찡그렸다.

시야가 조금쯤 돌아온다. 아직까지 자신이 죽을 때는 아닌 모양이다.

몇 시간을 버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아닌 모양이었다.


"줄리앙··· 오랜 친우여.

그대에게 내 두 딸을 부탁하네."

"···예 알겠습니다, 주여."


줄리앙이 천천히 또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고, 자신의 움직임과 비슷한 톤으로 말을 받았다.


로멜리아 가의 주인, 자힌 로멜리아 남작은 격통이 심해지다가 어느새 잔잔해졌음을 느끼고 움직인 참이었다.


심장께를 옥죄듯이 만들던 독기가, 손발을 저리게 하고 척추 온 뼈가 시리도록 하던 놈이 활동을 멈춘 건지, 아니면 단순히 감각이 마비된 건 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 분명 후자이리라.


남작은 정신이 또렷한 것 같았다. 스스로가. 그렇기에 말한다. 목소리도 생각하는 말을 다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는 나왔다. 다행이었다.

전할 말이 마침, 있었다.


"집사장."

"예."

"우리 아이들을··· 잘 부탁하네. 자네를 믿어. 그리고 하나 더.

···로멜리아 가에 관한 말이네.

세슈칸···의 작힘 가로부터 보물을 받게. 지난 약속의 증거인 로멜리아의 금목걸이···

그것을 주면 돌려줄 거야.

오래 전 작힘 가가 대여한 비보이니 그들이 언약과 신의를 기억한다면 줄 것이네.

지금의 로멜리아 가는 너무···

약하고 또 불안하네.

자네도 카샨과 호드의 수작을 알겠지.”


거기까지 길게 말하는데 깨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마지막 문구에서 남작은 눈을 빛냈다. 독기로 인해 수척해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형형함이었다. 희끗한 머리에 움푹 패인 볼. 살이 빠져 있지만 의지는 강해 보인다. 길쭉하게 생긴 얼굴형이었다. 색이 진한 갈색 눈동자가 줄리앙을 응시한다.


남작의 말에 노집사는 그의 곁 가까이에 다가서 있었다.


침대 근처로 가서 고개를 둔 뒤 조금 낮춘 자세다. 남작이 슬쩍, 팔을 이불 속에서 꺼내어 줄리앙의 뒷목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바들거리는 손목의 가는 떨림이 그의 마지막을 말하는 듯하다. 남작은 기어코 몸을 조금쯤 일으켜 세워 줄리앙의 귓전에서 이야기했다.

속삭이는 주군의 말이 전하는 내용은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두 개자식들이 감쪽같이 독을 탔네. 언제, 누구로부터인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가 말하는 두 개자식들은, 로멜리아 가 영지 주변에 있는 인접한 소영주들이었다. 각기 카샨과 호드 남작이다. 로멜리아 남작과 비슷한 영배의 중년 사내들이었고,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늘 로멜리아 영지를 지켜보던 망나니들이다.

로멜리아 가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유서 깊은 그들의 전통 속에 아직도 다 소멸하지 않은 어떤 고대의 유산이 있을거라고 여기는 작자들이다. 카샨과 호드 뿐만 아니라, 서넛이 더 호시탐탐 그 영지를 노린다.


산슈카 왕국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왕권이 약화되어 왔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왕권이었으나, 예전 시대를 기억하는 자들이 아는 산슈카의 왕권과는 다른 것이었다.

변방에 위치한 귀족들은 제 배를 불리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행동한다. 거기까지 왕의 눈이 닿지 않는 것은 당연하나, 그 뒷 일을 책임질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지금은 적당한 고위 귀족, 중앙의 관리 따위의 뒷배가 있으면 마음 놓고 일을 저지른다.

평온해 보이지만 어떤 전란기보다도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시점이었고,


그걸 알고 있던 로멜리아 남작이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해버렸다. 그들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경계하고 있었지만 이미 망나니들의 칼날이 로멜리아 영지 내부에까지 닿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 귀족 가의 영주를 이렇게 독살할 수 있는 실력이라면, 어느 거물급 영주를 뒷배로 삼아 대단한 암살자를 고용했다거나, 혹은 로멜리아 가가 경계하기 이전부터 이런 일을 계획했다거나 할 테였다.

남작은 그런 상황에서 두 딸을 생각했다. 로멜리아 가의 미래. 영지민들을 이끌만큼, 어느 대장부 못지 않게 잘 해낼 수 있게끔 교육을 시킨 아이들이었다.

한 아이, 아드리안은 아직 혼자서 무엇 하나 해내기 어려울만큼 어리지만 명민하고 담대한 면이 있다.

장성하면, 도리어 언니인 헤슈나보다 믿음직한 면이 있으리라.


그러나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고작,


하루 정도일까. 다음 날 새벽이 올 때까지 남작 그 자신이 과연 살아있을 것인가. 그것은 커녕 이렇게 멀쩡한 정신과 또렷한 시야, 그리고 분명한 말소리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그 시점에 자신의 곁에 오랜 친구이자 믿음직한 노신老臣인 줄리앙 리스트가 곁에 있다는 건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남작은 해야 할 말들을 전했다.


그의 귓전에서 속삭이던 입을 떼어 남작은 조금쯤 뒤로 갔다. 힘겹게 일으킨 상체를 다시 침대 속에 묻는다. 이불의 감각을 둔하게 느끼면서 남작이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이 줄리앙의 동공을 정확히 처다보았다.

생에 마지막 말이니 더욱 그래야 하리라.

줄리앙은,


오랜 경험과 전쟁 속에서 철석같은 간담을 소유하게 된 노신은 간신히 떨리는 표정을 참고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이자, 형제이자, 친구이자, 전우이자, 피를 나눈 동생처럼도 여겨졌던 사내다.

형식을 초탈해서 많은 것을 나눈 인간이었는데. 자신보다도 먼저 간다는 것이 가장 서글픈 점이었다. 아직 정정하지만, 이 노구를 먼저 사그라들도록 불태우지 못했는데 자기보다 젊은 주인이 간다니.

신하로서 가장 쓴 결말이었지만 줄리앙은 어쨌든 그 맛을 받아들여야 했다.


인생의 여러 지독한 쓴 잔 중 이것이 몇 번째이고 또 얼마나 남았을까.

줄리앙 역시 남은 후계자를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더 이상 로멜리아 가에 비극이 일어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하다면, 그의 힘이 닿는다면, 그는 이것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 쓴 잔이 되었으면 했다.


그럴 수 있다면 반드시 기필코, 그가 모시는 이들보다 먼저 나서서 죽으리라.


마음이 맞은 두 사내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작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께서는 아직도 로멜리아 가에 대한 전통을 기억하고 계시지. 왕가는 그렇지.

······.

······하이샨. 그 친구는 옛 인연이지만 아직까지 로키 산에 있겠지. ······.”


몇 마디 말을 더 하려는 듯 했지만 남작의 눈빛에 불빛이 사그라들어갔다.

죽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 몇 시간 뒤의 일이었지만, 그 당장은 아니었다. 남작은 많은 말을 하지 못했다. 기력이 달렸다. 생각도, 혀도 굳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잘.


“줄······ 리···. 잘··· 부탁······ 하네.”


졸음이 쏟아지는 사람처럼, 남작은 그 이후로 더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독성을 이겨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내던 남작의 면역 체계나, 기력 따위가 잠시 승기를 잡았다가 여력을 다 사용해버린 뒤 잠잠해진 것이었다.

해독제도 찾을 수 없고, 주변에 있는 치료술사들의 초상 스킬조차 듣지 않는 지독한 독술이었다.


힘이 다 한듯 침대에서 많은 말을 하지 못하고 쓰러진 남작이다. 고급스러운 남작의 개인 침소다. 넓은 방 안에 심플한 목재 가구들이 주인의 취향을 반영하듯 예스러운 멋을 더했고, 남작의 침대는 붉은 기가 도는 고급스런 원목 가구로 각 모서리에 기둥이 있어 지붕까지 지어져 있다.


사방이 뚫린 집 안에서 쉼을 청하는 듯한 남작의 눈꺼풀 한 구석이 덜 덮였기에, 줄리앙은 주름진 손으로 그것을 내린 뒤 말도 없이 자세를 바로했다.


그는 독에 찌들고, 취해서 말을 잃은 남작의 모습을 선 채로 잠시 지켜봤다.

굳은 표정.

늙은이의 볼이 아주 약간 떨렸다. 이빨을 강하게 짓씹은 탓이었다.


그는 몇 초 정도 더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물을 뿌려 식힌 뒤, 신하의 예를 다해 깊이 고개를 숙여 방을 나섰다. 산슈카 특유의 문양이 수놓아진 카펫 위를 검은 가죽 구두가 뚜벅이며 밟는다.


다른 가구나 침상과 마찬가지로 검붉은, 혹은 짙은 갈색 톤의 묵직한 문을 열어 나오고, 천천히 닫았다.


끼익. 또 철컥.


아주 사소한 소리가 다 죽여지지 못하고 났다.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


방 안에는, 남작의 침상에는 알람 스킬이 걸려 있었다. 신변에 아주 사소한 변화라도 생기면 옆 방에 대기하고 있는 초상술사들이 알아챈다. 미묘한 변화는 호흡, 맥박, 신체 온도 따위의 것마저 알아챘다.

직접적으로 대상의 ‘생기Health Point'를 체크하는 스킬도 있었다. 몇 명의 감지계 술사, 치료술사, 물리적인 의료진, 약재 따위가 구비되어 있다.

아마 남작이 눈을 뜨기만 해도 알아챌 수 있으리라.


집사장이 남작의 방에서 나선 복도에는 바로 창문이 높은 위치에 달려 있었다. 사람의 고개보다 더 높고 작은 창문이다. 위를 처다보아야 보이는데 거기서 바깥의 밤하늘과 달, 별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줄리앙은 군데군데 발광석을 이용한 등으로 광량을 유지하는 영주 저의 3층 복도에서, 잠시 밤을 처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그는 잠을 자지 못하고 다른 시종들을 부리며 저택의 소일거리를 하고, 남작의 마지막 말을 되새기다가, 몇 시간 후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다 같이 남작의 침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로멜리아 가의 남작이 가신과 친족들을 두고 세상과 일별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


줄리앙 리스트,


곱게 늙은 집사장이 반개했던 눈을 오롯이 떴다.


노인의 시야에는 젊은이가 보였다. 검은 머리칼. 분명 또렷하게 뜨고는 있지만 어딘지 총명해보이는 느낌은 없는 눈. 동북부인, 그러니까 세시앙 인.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믿어볼 만한 친구였다. 일단 아무런 득 없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나약해진 그들 일행으로부터 무언가를 노리기 위해 나타났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우연이 심했다.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몰살시키고 원하는대로 속내를 보였으면 될 것이었고.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먼 이방인이었고 고생을 자처하고 있다. 아직 젊고 어리지만, 나름대로 유망한 모험자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 옆에도 젊은이들이다. 아름다운 금발의 머릿결. 영지를 돌아다니면 모든 영지의 남성들이 설레일 것 같은 외모를 가진 아가씨였다.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건실한 속내를 채워낸, 로멜리아 영지의 자랑스런 후계자였다. 또한 당장 그가 모실 주인이기도 했고.

다른 옆 자리에는 조금은 미덥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재능이 출중한 어린 영지병이 있었다. 일반병들 중에서 특출난 재주와 신체 능력을 가져 특별하게 차출되어 기사들과 비슷한 트레이닝을 받은 친구다.

아마 로멜리아 가가 조금 더 안정이 된 채 시간이 지난다면 충분히 기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청년이다. 이미 수습, 견습 기사, 기사 시종이나 다름 없는 위치였고 실제적인 전투 능력은 어지간한 얼치기 기사가 온다면 도리어 잡아먹을 수 있는 수준이다.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주름진 손은 버텨왔던 긴 세월을 말한다. 노구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몇 차례의 파도만 젊은이들을 위해 대신 막아주어도 족할 것이다.

이들이 거목으로 성장할 즈음이 되면 자신은 그 자리에 있을 텐가.

없어도 좋다.


줄리앙이 말했다. 잠깐 깊은 생각에 잠기며 목까지 함께 침체되었는지 눌린 목소리가 처음에 새어나왔다.


“···남작님께서 그러고 보면 마지막에 말씀하셨네.


왕실, 작금의 폐하께서는 전통을 중요시하신다고. 로멜리아 가의 전통을 잊지 않으며 호감을 보이신다고.

그리고··· 로키 산에 있는 하이샨, 이라는 친구를 말씀하셨는데··· 로키 산의 하이샨이라면···.”


산슈카 왕국의 온갖 가문과 집단들이 사용하는 문장과 특색, 또 그 무리들의 역사를 꿰듯이 알고 있는 헤슈나가 입을 열었다.

집사장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줄리아가 맑고 명랑한 톤으로 빠르게 이야기한다.


“하이샨 그리턴. 로키 산의 산지기 가문이자 자작가, 그리턴 가의 가주의 이름이에요.”

“······아.”


제냐가 그 말에 가장 먼저 대꾸하며 반응했다. 뭔가를 알아서는 아니었다. 아니, 한 가지 아는 것이 있기는 했다. 주변도에 대한 정보는 얼추 갖고 있었다. 따로 공략을 찾아보지는 않는다지만 그 정도는 알아둔다.

세슈칸에 가까운 산이나 숲이 몇 개 있었다.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것이 데슈칸Deshukant 산맥에 속한 산들이었다.


갈색 먼지 숲이 남서쪽에, 그리고 세슈칸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검은 안개 숲‘이 있었다. 모두 플레이어들이 당연하게 기억하고 주로 활동하는 퀘스트 지역이며, 그 퀘스트 내용의 대부분은 해당하는 필드에 서식 중인 괴수들을 사냥하는 것이다.


로키 산은 데슈칸 산맥의 말단 지류에 속한 산이었다. 그리 높지는 않은 산이었으나 깨나 넓이가 있었다.

능선을 따라 오를수록 산맥의 높이가 높아지고, 심부에는 7-80정도 레벨을 가진 완숙한 중견 플레이어들이 파티 사냥을 하는 자리가 있었다. 곧 90에서 100에 근접하는 보스boss 몬스터 캐릭터들이 있는 곳이다.

로키 산은 산맥의 입구라 부를 만한 위치였고,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지금까지 제냐가 다녔던 사냥터들 중에서는 가장 평균 레벨이 높다.


갈색 먼지 숲 역시 심부에는 위험천만한 구간이 있지만 그는 외곽에서만 머무르고 파티 사냥을 했으므로.

아마 이전과 달리 4, 50대 정도의 레벨 구간이 분포된 사냥터일 테다.


물론 제냐가 평균적인 동레벨의 플레이어들에 비해 전투 능력이 높은 건 사실이었으나. 아마 체감하는 난이도는 새로운 자극이 되리라.


그런 생각이 든 것이 ’아‘라고 소리를 뱉은 첫번째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여기서 돌아가겠구만······.‘


이라는 마음이 든 탓이다.


줄거리가 길게 이어지는 퀘스트들은 이렇게 여기저기, 온갖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스토리를 파헤치게 되어 있었다. 눈 앞에 목적지와 목표물을 두고도 멀리 다른 장소를 다녀와야 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물론 이런 과정을 생략할 수 있을 정도의 특별함이 있으면 혹시 모른다. 어마어마한 명예 점수를 갖고 있다거나, 전투력을 갖고 있으면.

그도 아니면 어떤 다른 인맥이나 플레이어들 간의 협력을 동원할 수 있다면.

안타깝게도 제냐는 그 무엇도 없었다.

완성도 높은 전투 스타일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착실한 전투 플레이어였지만 세슈칸의 영주인 작힘 백작 가를 정면에서 돌파할 정도는 당연히 안되었다. 이곳이 중수 수준의 도시라곤 해도 그 정도 레벨로 영주성 격파를 도모할 수는 없었다.

콘란드 중부에 위치한 그리 크지 않은 왕국 산슈카였고, 그곳의 일개 백작이었으나 이제 막 플레이를 시작한 제냐의 시선에서는 까마득하다.


진심으로 이 퀘스트를 해결해야만 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면 다른 길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뭐 예컨데 이 도시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설득해서 작힘 가를 무너뜨리자, 는 식으로 플레이 유도를 한다면 또 모른다. 제냐 혼자가 아니라 수 천 수 만에도 달할 이들이 움직이면 작힘 가로서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전혀 없다.


대도시에 주둔하고 있는 영지병들은 국왕의 병력으로부터 빌려오는 자들이 수비대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은 작힘 가의 사병이 아니며 온전히 산슈카 국내의 치안 유지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었고, 수도 왕실 소속의 병력이었다.

산슈카 국 모든 도시에 그렇게 군대가 주둔하고 있지는 않았으며, 세슈칸처럼 대도시에 한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로멜리아 가를 비롯한 변방의 소영지에는 중앙의 눈길이 닿는 일이 거의 없다.


어쨌든 그들은 왕실 소속이었고, 만일 플레이어들이 작당 모의를 해서 일거에 일어나 영주 성을 친다면 작힘 가의 사병들처럼 목숨을 걸고 막아서지는 않고 또 못할 것이다.

그들이 영지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도시를 전복시키려면 몰라도. 그들이 지켜야 할 첫 번째 대상이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세슈칸은 산슈카의 중요한 재산이었고, 그 재산에는 땅과 그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세슈칸의 통치자인 작힘 가와 작힘 백작은 왕실의 재산을 대신해서 관리하는 임시 주인에 불과했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는.

그러나 그 명목상이, 모든 플레이어들이 들고 일어나는 사태 때는 중요하게 생각될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벌인 뒤에 가담한 모든 자들이 산슈카 왕국에서의 행동에 제약이 걸릴 수도 있기는 하겠다만.


그 정도 페널티가 게이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말했듯, 콘란드 대륙의 어느 소국에 불과했으니까.


백작 가의 일반병, 엘리트 병력들이 막아서겠지만 수와 질적으로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만큼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백작의 목이 떨어지리라.

게이머들은 그렇게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렇게 만들만한 적절한 명분이 있느냐가 중요하지.


제냐는 그런 수단을 동원하지는 않는다. 머리도 아프고, 뒷감당도 어렵고. 여러 사람들을 이렇다할 구실도 없이 움직이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자신이 계산할 수도 책임지기도 어려운 일이다. 고작 게임 속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그의 취향이 아니다.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도 다른 문제였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지, 쉽단 얘기도 아니었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큰 일을 저지르기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들은, 그리고 통솔력이나 관계성에 특출난 재능을 가진 부류는 그런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비련의 시나리오가 서비스 된 이후 몇 개 왕국에서 눈 여겨 볼 만한 변화들이 이미 일어나기도 했다. 몇 개 변방 왕국에서 역사서의 기록이 바뀔 정도의 내용들이 진행되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속 역사는 플레이어들더러 만들어가라고 내어 준 백지장, 도화지 뭐 그런 것이었으나 그 서술 방식이 급진적이냐 시스템 친화적이냐 하는 건 차이가 조금 있었다.

올곧게 명예점수를 쌓고 퀘스트로 준비된 사안을 따라가다가 일어나는 변화가 정석적이었고, 자신이 퀘스트를 만들어내듯 행동해서 거대한 소란을 일으키는 건 변칙적인 플레이였다.


제냐는 정석이냐 아니냐를 그런 부분에서 따지지는 않았지만 취향의 문제로, 퀘스트대로 걸어 가기로 한다.


’······.‘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최태현이 시간이 나면, 이 퀘스트에 끌어들여서 같이 행동을 해야 할까.

아마 쉽게 끝나진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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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글을 쓴다.

재미있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 자체로요.

오롯한 즐거움을 느끼며 자기의 일을 하는 순간은

분명한 행복감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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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 릿샤Rissha의 방 23.08.16 23 3 17쪽
58 57. 사연 23.08.13 32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7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5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6 3 14쪽
54 53. Could you join us? 23.08.05 29 4 34쪽
53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23.08.04 29 4 35쪽
52 51. 굳세어라 안드레 23.08.04 26 4 19쪽
51 50. "허억." 23.08.04 25 4 20쪽
50 49. 달려가는 소시민들 23.08.02 31 4 25쪽
49 48.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어진 23.08.02 27 4 36쪽
48 47. 최태현은 빨랐다. 23.07.31 29 4 25쪽
47 46. 로웰 드버는 결심했다. 23.07.31 33 4 34쪽
46 45. 석별惜別 23.07.30 35 4 25쪽
45 44. 결정의 주체 +3 23.07.29 35 4 45쪽
44 43. 그리턴 자작가에서 그간 23.07.29 29 4 25쪽
43 42. 호아킨 팍스Joaquin Pax 23.07.25 29 3 29쪽
42 41. 사촌 형제 23.07.24 29 3 18쪽
41 40. 로키 캐슬 23.07.24 28 3 20쪽
40 39. 운트Unt의 의뢰 23.07.23 27 3 30쪽
39 38. 그리턴, 갈색 사슴 23.07.23 33 3 29쪽
38 37. 등산 23.07.23 25 3 31쪽
37 36. 트레이닝Training 23.07.23 26 3 32쪽
36 35. 제이미 숄더 23.07.20 27 3 51쪽
35 34. 전진하는 요새 23.07.19 33 3 32쪽
34 33. 강도단 23.07.19 30 3 31쪽
33 32. 붉은 다리 협곡 23.07.19 29 3 34쪽
32 31. 협곡 진입 23.07.15 31 3 31쪽
31 30. 마차 안 23.07.14 36 4 30쪽
» 29. 돌아가는 23.07.13 35 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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