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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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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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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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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3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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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쪽

28. 여기 있습니다.

DUMMY

*


[바쁘십니까, 저는 개인퀘(스트)를 시작해서요. 오셨을 즈음에도 끝났을 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열일 하십쇼.]


텍스트 메세지를 적어 날렸다. 최태현에게였다. 제냐가 날린 것은 아니었고, 김서원이 적은 것이다. 휴대폰으로.


김서원은 학교에서의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도 지났고, 공부를 위해 잠깐 책을 폈다.

여전히 머리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툭, 툭.


그는 경영학도였다.

머리에 들어오는 건, 없다.


펜대를 잡고 한동안 손 안에서 빙빙 돌렸다. 어릴 적부터의 습관이다. 그가 다니는 학교, 중앙대학교의 대도서관 내부 어딘가였다.


가림막 없이 주변 광경이 다 보이는 자리다. 암갈색 테이블, 오래도록 사용했는지 이런저런 자국, 낙서 따위가 있다. 그 직사각형의 커다란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아 늘어지는 자세로 책을 편 채 고개만 까딱거리던 그는 책을 덮기로 한다.


날은 아직도 더웠다. 마지막 시험이 한 두 개 정도 남은 상태였다. 이번 학기는 전공을 다섯 개, 그리고 교양을 하나 듣는다. 그럭저럭, 그냥저냥. 대충 때우면서 다니고 있는 모습이다.

시험에서 대단한 점수를 받기 위해서 노력하지도 않았고. 탈락만 면하자, F만 면하자는 심정으로 수업 시간에 참석하고 지나간 강의 필기를 되새긴다.


시험 범위가 좀 많기는 하지만······ 시험 직전에 보자면 못 볼 양도 아니었다. 벌써부터 머리를 싸맬 필요도 없었고. 그래.


서원은 돌아가기로 했다.


커다란 도서관 내부는 시원했다. 1층에 천장이 높은 홀이 있었고, 2, 3, 4층에 1층의 홀이 보이는 복도 형태의 공간이 있다. 목조 난간으로 막혀 있고, 복도 안쪽에 테이블을 깔아 돌아다니는 통로겸 앉아서 책을 볼 자리겸 해서 마련해둔 곳이다.


드륵, 하고 목재 의자의 발밑이 석재 바닥을 긁었다. 테이블에 앉은 다른 이들이 꿈틀거렸다. 서원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다. 소리가 아예 나지 않게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차피 다른 층에 위치한 실내 도서관보다 홀에 만들어 둔 뻥뚫린 곳이라 소음에 관대한 점도 있다.


그는 전공책이나 강의 노트를 대강 가방에 욱여넣었다. 검은 색의 백팩이고, 으레 대학생들이 맬법한 그런 디자인이다. 깔끔하고 세련되었다. 얼마 하지는 않는다. 집 근처 쇼핑몰 매장을 지나가다 할인을 하기에 산 것 뿐이었다.


대학생이고, 용돈을 받아 생활하고 있었지만 딱히 부족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일을 정정하게 하고 계셨고. 아마 졸업을 하고 나면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좋아 보였지만. 물리적으로 독립을 하면 정신적으로도 자유로운 점이 있는 법이었다. 자신이 돈을 벌기 위해 얻게 되는 스트레스와 치환하는 꼴일 테지만 사실은.


그는 흰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고, 가벼운 소재의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가방을 매고서 도서관을 나선다.


피곤한 하루였다. 비련의 시나리오를 오래도록 플레이하는 건 몸에는 아무 무리가 없지만 신경을 자극해서 그런지 피로감이 좀 있기는 하다.

신기한 점은, 온라인 게임 내부에서 더 집중력을 발휘하고 다양한 경험을 할수록 어딘지 약간 뻐근한 감이 더 든다는 사실이다.

꿈속의 일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비슷한 꼴이었다.


“후우우우.”


제냐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면서 도서관을 벗어났다. 복도에 마련된 공부용 테이블을 지나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다. 바닥의 색깔이 다르다. 복도는 조금 어두운 톤의 석재였고, 위 아래를 잇는 계단은 조금 더 밝은 톤이다.

또각거리며 신발 바닥에 밟혀 울림을 낸다. 아주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 1층 홀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발소리. 또 가끔 이렇게 계단을 걸으면서 내는 울림. 여러가지가 섞여서 웅웅댄다.


도서관은 쾌적하다. 여름에나 겨울에는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여름엔 7월부터, 겨울에 1월부터는 방학이었지만, 그 전까지는 말이다.

방학 때도 학구열을 불태우며 학교에 나와 공부를 하는 인간군상들 역시 있는가 모르겠다. 그가 재학중인 학교는 그리 수준이 낮은 곳은 아니었다. 공부 쪽으로 더 나아가려고 매진하는 놈들이 있어도 그리 이상한 일까진 아니다.

다만 김서원은 아니었다.


근 몇 달간 생긴 취미인 비련의 시나리오는 시간을 쏠쏠하게 뺏어가는 종류였다.


오늘 하루 누군가와 말을 했는가.


대형 공간을 가득 매우는 한기의 에어컨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나가면서 그가 생각했다.

‘······.’


뭐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학교 생활의 말미 즈음이 되면 아무래도 이야기할 건덕지가 적어진다. 굳이 누군가와 시간표를 맞추어서 같이 다니는 일도 한 때이지. 시간이 갈수록 개인 플레이가 되어가게 마련이었다. 꼭 그의 게임 내 플레이 스타일처럼.


연락 없는 하루, 또 혼자 보내는 하루.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심심하지도 않았고.

현대 사회에서 이런 일상은 누구나가 겪는 것일지도 모른다.

좁은 공간 안에 사람은 더 늘어났지만 결론적으로 인간이 겪는 외로움의 강도와 수치는 더 높아졌다.

달리 말하면, 그런 게 조금 필요할 지도 모른다.


번잡한 공간 속에서 고요하게 지내는 순간들.


그는 그런 편인 인간이었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를 떠났다.


건물 바깥으로 나서면 멀리까지 경치가 보인다.


몇 개의 유리문들을 밀고, 손목 시계 디스플레이로 내보일 수 있는 학생증을 출입구에 찍어 퇴관을 알리고, 바깥으로 나오면 학교의 대도서관은 조금 높은 위치에 자리했으니까 말이다.


거대한 평지와 약간의 언덕을 부지로 삼아 만들어진 학교다. 그의 자취방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수 십 개는 되는 계단을 이용해 올라오거나, 아니면 한 쪽에 마련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온다. 언덕의 위쪽에 있는 대도서관의 정문에서 나와 시야의 반쪽은 하늘이 차지한다.

그다지 고층 건물이 없는 학교 내 부지이다.


도로가 나 있고, 야트막한 건물들이 여기저기 듬성듬성 있고. 또 가로수로 세워진 나무들이 정원처럼 구석구석을 조성하고 채운다. 한낮의 태양이 싱그럽게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백색으로 느껴질 정도로 밝은 톤의 광량이 그 아래를 거니는 학생들의 뒷덜미를 꼼꼼히 태우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학교 식당을 들러 밥을 먹을까, 잠시 고민하며 학교 내 경치를 구경한다. 멀리까지 보며 눈의 피로를 좀 풀다가, 김서원은 그 때서야 안경을 끼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공부 용의 안경이었고, 사용자가 원한다면 주변시를 차단하고 집중하고자 하는 부분의 선명도를 높여주는 물건이었다. 겸사겸사 눈 보호도 조금 해주는 것 같았고.

학생들은 간혹 사서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다.


김서원은 안경을 뺐다. 태양이 아주 약간 더 밝게 느껴졌다. 직접 바라본 건 아니었지만, 주변 경치의 화이트 밸런스가 높아지는 기분이다. 빛의 세기 또한 아주 약간 조절하고 보정해서 시력 보호를 해주는 물건이다.


달칵, 하고 자연스레 오른 손이 백팩의 옆구석을 더듬었다. 옆으로 나 있는 지퍼를 내려 작은 공간이 났고, 안경집을 꺼내들어 벗어 넣었다. 메탈같은 느낌으로 만들어진 회색의 안경집이다. 실제 메탈은 아니었지만, 나름 튼튼해서 땅바닥에 그대로 내던져도 별로 무리 없다.


서원은 후끈하지만, 습기가 없어 그래도 견딜만한 백주대낮의 교정을 거닐었다.


밥은 먹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어르신.”


제냐가 말했다.


그는 호텔의 로비에 있었다. 눈 앞에는 줄리앙과 질리언, 헤슈나가 있었다.


길다란 직사각형 모양에서 그대로 쌓아올린 대형 호텔이다. 화려한 현관을 밀고 들어가면 샹들리에와 각종 유리 세공품, 카펫과 웜톤의 조명이 눈부시게 빛나고, 길쭉한 데스크가 정면에 있었다.

현관과 데스크 사이의 빈 공간에는 머리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이 있었고, 그 벽면 근처로 사람들이 약속을 잡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벤치와 테이블들이 늘어서 있다.


로비의 데스크에서 간단한 다과를 주문하면 값을 내고 즐기면서 짧은 회의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진 않았고, 그저 그들끼리 덩그러니 앉아 있을 뿐이다.


함께 자리하지 않은 아드리안은 페이브와 놀고 있었다. 호텔의 객실 내부에서. 아직 저녁까지는 좀 시간이 남은 오후 시간대였다. 아드리안은 건물 내부에만 있어야 하는 생활이 답답하다고 했지만, 막상 뛰어보면 운동도 할 수 있을 정도의 객실이었고 뒤뜰 정원 역시 언제나 개방되어 있다.

페이브가 그 앞에서 인형 따위로 시간을 끌고 소설책을 읽어주고 하다 보면 금세 불만 없이 빠져들곤 한다.


그렇게 둘을 빼놓고 하는 말은 세부 계획에 관한 이야기다.


“······.”


줄리앙은 침침한 눈매를 좁혔다. 언제나 단정한 행색의 양반이지만 표정으로 드러나는 난처함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옆에 있는 헤슈나를 바라본다.

콧날이 오똑하고 오밀조밀하게 생긴 미인. 금발, 묘령의 아가씨가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걱정이 많은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애를 쓰고 있을 집사에게 늘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속 깊은 여인이다.


현재 전 남작이 작고한 이후로 로멜리아 가의 가주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일찍이 어미 없이 키워낸 두 여식은 남작의 사랑을 두 배 이상으로 받으며 커왔고, 쓸쓸함도 그다지 많이 체감하지는 못했다.

가문의 많은 인원들이 두 아가씨를 극진히 보살피며 길러냈으니까. 규모는 작지만, 나름대로 정이 있고 또 살만한 곳이었다. 로멜리아 남작가는.


그런 곳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무수한 가신들, 기사단장, 병력들은 외적과 눈을 맞추고 으르렁거리며 불편한 싸움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도 지금 여기에 나와 있는 인물들은 전 남작의 유지를 이어받아 가문의 재건을 위한 비보를 되찾아 돌아가야 했다.

문제는, 그 비보가 어떻게 생겼고 또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헤슈나 양은 뭔가 아는 게 없습니까?”

“크흠.”


질리언, 갈색 머리가 헛기침을 했다. 조금 불편한 모양이었다. 헤슈나 어쩌구 로멜리아는 엄밀히 말해서 전 남작의 유지를 잇는 후계자였으며, 남작 대리라고 해도 좋았으니까. 대귀족이나 그에 준하는 고위 관리, 혹은 왕실의 인가를 받는 건 절차와 시간이 필요해서 이루지 못한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미 가주나 다름 없었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고, 그런 인가나 절차가 아랫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게 할 만한 상황은 후계권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진흙탕 싸움을 할 때나 그런 일이었다.


로멜리아 전 남작이 세상을 떠난 시점부터 가문의 구성원들은 헤슈나를 가주로 여기고 있었다.


묘령의 아가씨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런 그녀가 예법을 아는지 모르는 떠돌이 모험가에게 편하게 불리는 건 호위 무사로서 불편한 경우였다.

질리언이 그런 마음을 담아 인기척을 낸 것이었는데, 제냐는 전혀 모른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정작 헤슈나나, 혹은 줄리앙은 크게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다.

어느 정도 신뢰의 문제였다. 예법이라는 건 말이다. 서로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달려나갈 준비가 되었고 마음이 통했다면 사소한 형식은 넘어가도 좋다. 의도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무례함이 아니라면야.


제냐가 고급의 예절이나 상식에 조금 둔하다는 걸 줄리앙은 알고 또 이해한다. 어딘지 이 나라 사람도, 이 시대 사람도 아닌듯이 구는 이상한 점은 아주 옛날부터 거처 없이 떠돌아다닌 흔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노인이 함부로 다 추리할 수 없을만큼 고생스런 지난 날을 겪었으리라. 앳된 얼굴로 고위 기사에 버금가는 신체적 능력을 얻기까지 다양한 고난과 고련을 지났어야만 했을 것이고.


줄리앙은 노인의 연민과 자비로, 그리고 헤슈나는 자신의 목숨과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구성원들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에 대한 보답으로 넘어갔다.


헤슈나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오늘은 곱게 머리를 뒤로 땄다. 놀랍게도, 줄리앙의 솜씨였다. 집사장은 온갖 잡기에 능하다. 아가씨들을 모시면서 알아둬야 할 다양한 상식들도 풍부했고. 아드리안이 머리를 묶거나 하고 싶다면 그건 헤슈나가 해줄 테지만.


이전의 화려한 것보다는 조금 분위기가 죽은 단정한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감색 가디건을 걸쳤다. 헤슈나 로멜리아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음······ 글···쎄요. 아버지께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줄리앙이 말하는 그 얘기는 자세히 들은 적이 없어요. 기억을 그동안 많이 더듬어봤지만 마찬가지더군요.”


고운 목소리다. 제냐는 기왕이면 상대하는 NPC가 아름답고 미성인 편이 더 편안하군, 이라고 게이머로서의 리뷰를 생각하며 대답했다.


“난항難航이로군요. 다른 단서는 없습니까, 어르신? 혹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요.”

“나도 머리를 뒤질 만큼 뒤져봤네. 자네에게 줬던 그 책이 가장 큰 단서였어. 다시 좀 살펴보겠나?”

“좋죠.”


줄리앙의 말에, 질리언은 등께에 매고 있던 천의 매듭을 풀었다. 끈으로 끝이 연결되어 있어서, 혁대나 외투 등의 버클이나 고리에 잘 끼우면 편하게 다양한 물건들을 지고 다닐 수 있어 보였다.


벤치의 등받이에 눌려 있던 사이에서 두꺼운 책 하나가 나왔다. 길다란 의자와 테이블 하나를 두고 그들은 마주보고 있었다. 제냐와, 헤슈나가 마주보았고 헤슈나의 양 옆으로 줄리앙과 질리언이 거리를 조금 띄운 채 앉았다.


툭, 하고 놓아지는데 책이 두꺼워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콘란드 중부에서 산슈카와 로멜리아가 미친 영향에 대하여.’


라는 책의 제목이 다시금 보인다. 하드 커버에 오래된 그림으로 장식이 된 물건이다.


제냐는 스스럼없이 책을 끌어당겨 표지를 넘기고, 내용을 건성으로 훑었다. 지금 정독을 하고 있을 시간은 아니었다. 다시금 받아가 본인의 숙소에서 읽어보는 것은 모를까.


줄리앙이 말했다.

“남작님께서는 심계가 깊으신 분이셨네. 아마······ 내게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을 거야. 그렇게밖에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그것 역시 그만한 까닭이 있었을 거고.

적은 말씀으로도 우리가 알만한 단서가 이미 다 주어져 있으리라는 거네.”

“거 참···.”


제냐는 작게 투덜거렸다. 그들의 충의는 높이 사지만, 제냐로서는 만나본 적도 없는 작고한 남작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사내이기에. 퀘스트를 이렇게 빈약하게 시작하게 만들었는가.

며칠 간 작힘가에서 추가적인 동향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호텔에 쥐죽은듯 머물고 있었고, 여행을 시작했을 초창기만큼이나 경계를 높이며 두 아가씨를 모셨다.

제냐는 자신의 스킬과 스텟 경험치를 위해서 도시 내에서 훈련을 하거나, 바로 인근 평야에서 간단한 사냥을 하면서 전투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고.


결국 닿아야 할 곳은 하나다. 세슈칸 중심 부의 작힘 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강제로라도 뚫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플레이어이니까. 세상의 상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망나니 모험가들.


만나주지 않는 작힘 백작으로부터 어떻게 정보를 얻어내고 물건을 얻는가···.


질리언이 말했다.


“···그런데, 이 책은 시리즈입니다.”

“에?”


제냐가 멍청하게 답했다. 그 모습에 질리언이 제냐를 처다보더니, 줄리앙 역시 의문스러운 낯을 하자 말했다.


“어··· 모르셨습니까? 깨나 유명한 책입니다. 로멜리아 가의 서재에도 전 권이 꽂혀 있고요. 저희 영지 내에서는 인기가 좋은 소설책이자 동화책이었습니다. 몇 부가 있어서, 영주님께서 가신들이나 영지민들한테 자주 빌려주고는 하셨었죠.

남작 가 내의 도서관 사서가 가장 자주 출납되는 책이라고 하기도 했었습니다.”

“어······ 그런가?”


줄리앙이 다소 흰소리같은 대꾸를 했다. 그는 집사장이었고, 가문 내의 온갖 일처리들을 맡아서 하는 자였지만 어린아이들이나 구성원들이 할 일 없을 때 무엇을 하는지까지 면밀하게 알지는 못했다.

도서관은 그의 영역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영지 운영에 문제가 생기는 것들을 위주로 머리를 쓰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오래된 역사서이기도 한 그것은 풍부한 묘사나 설명이 삽화와 함께 곁들여져 있었고, 하드커버에 내지 역시 질긴 것으로 만들어져서 여러 사람의 손을 타도 잘 망가지지 않았다. 그런 고급스런 책을 사기는 비싸기에, 영주 저택의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곧잘 빌렸다.

로멜리아 가에 대한 자부심과, 영지민들을 향한 친근한 애정이 서려 있는 일이었다.


남작의 명으로 저택 부지 내 도서관을 특별히 관리하여 주민들에게 책을 대여해주고 있다는 건 집사장 역시 알고 있었지만, 그 도서목록까지 염두에 두지는 못했다.


“예. 저도 자주 읽었거든요.”

“아.”


제냐가 입을 벌려 소리를 뱉었다. 맞장구를 친 건 헤슈나의 이야기였다. 남작가의 후계자 역시 어린 시절에 도서관에 신세를 많이 졌다.

어머니가 없었던 헤슈나는 많은 사람들의 이쁨을 대신, 갈음하듯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모자란 지점이 있었다.

어떤 여러 사람도 어머니만큼 쏟을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것을 마음 깊이 알았기에 그녀가 조금 머리가 자란 뒤부터는 아드리안을 향해 어머니처럼 굴기 시작한 바 있었다.


“···그렇군요.”


집사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는 투의 눈매였다. 물론, 헤슈나도 질리언도 차마 생각이 닿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책이란 물건을 받은 건 줄리앙이었고, 그의 주된 고민이었고 다른 이들에게 의견을 적극적으로 구하지는 않았으니까. 어느 정도는 참고를 했으나 말이다.


가장 연장자로서, 또 섬기는 고용인의 신분이나마 일단은 경험자로서 일행의 여정을 이끌어가면서 너무 독불장군처럼 군 게 있는가, 줄리앙은 속으로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되돌아보는 지난 몇 개월 간의 삶이었다.

뚜렷한 장면과 상황들이 이어지지만,

사실은 실감도 잘 나지 않는다.


그만큼 연로한 몸에도 남작의 죽음은 충격이었고 슬픔이었다. 연로하기에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고. 차라리 젊은 날에, 전장터를 직접 뛰어다니고 말 위에서 적병의 목과 자신의 목을 대등하게 둔 채 창날을 휘두르던 그 시절이었다면 주군의 죽음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남작의 딸들을 자신의 딸처럼 여기고, 결혼도 하지 않고, 그저 영지를 위해서 헌신한 세월 동안 전장터의 야성이 죽고 부드러운 감성만이 대신 자리를 하게 되었는가.


육체가 늙어가고 무술가로서 체력의 향상 역시 반감되기 시작하면 정신 역시 조금 나약해지는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더욱 노련해지고 독해진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물러진 데가 있었다.


무른 정신은 준비되지 않은 전장터 속에서 지나친 긴장을 부르고, 결국 지나친 긴장과 피로는 실수와 방심을 낳는다.

줄리앙은 수염을 매만졌다.


“그럼··· 남작님께서는 비유로 이 책을 주셨을 수도 있겠군. 이게··· 시리즈라고 했지? 얼마나 되나, 전 권의 수가.”

“어··· 총 5부작입니다. 그건 개략적인 설명을 해 둔 1권이군요. 2권부터 4권까지 조금 더 상세한 설명과 이야기가 나와있는 버젼이 있습니다.”

“아 그래······.”


제냐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보를 구해야 다음 상황으로 넘어간다. 도서관이라도 뒤질 셈이었다. 이 전근대의 문명 사회에서 실마리를 찾는 건 결국 사람의 입이나, 도서관 따위다. 일단 디지털 저장기기가 없으니까 말이다.

역사 속에 단서가 있다는 맥락이라면, 역사서를 뒤져야만 할 테다.

어떤 역사서를 뒤지느냐가 중요해진다.


“이 책이··· 산슈카 제7 출판장에서 찍혀 나왔군. 계속해서 증쇄가 되었고······. 세슈칸의 도서관에서도 구할 수 있겠지?”


줄리앙의 혼잣말과도 같은 물음에 질리언과 헤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슈나가 입을 열었다.


“네. 가끔··· 세슈칸에 오면 여기서도 그 책을 빌려 본 적이 있었거든요. 아마 남부에 있는 시립 도서관에도 있을 거에요.”

“그렇습니까··· 일단 그 책을 보죠, 그러면. 혹시 모르니까. 남작님께서 이 책 전 권을 통털어서 단서를 찾으라고 제게 건내주신 거라면 그래야겠군요.”


헤슈나와 질리언이 고갤 끄덕거렸다. 줄리앙이 제냐를 처다봤다. 그 눈빛이 묘하다. 뭔가를 바라고 있는 눈치다.


“제냐 군.”

“······예.”


줄리앙이 제냐의 손등 위로 제 손을 올렸다.


“부탁하네.”

“······예.”


이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어느 정도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호텔 내에서 나가 함부로 세슈칸 시내를 돌아다니기에 불안하기는 할 테지. 자신의 안위보다도, 두 후계자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테니까.

여기는 작힘 가의 앞마당이었고, 그들이 수작을 부린다면 정말 언제 어디에서 칼날이 날아올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세슈칸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의 외부인들이 많이 묵는 이곳에 터를 잡고 있는 게,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아 작힘 백작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가능성을 만드는 일일 테다.

꼭 그런 건 아니었지만, 온갖 곳에서 밀려드는 인간들의 교류가 활발한 대도시 세슈칸에서 대사관 같은 곳 중 하나였다.


세슈칸.


피스 시보다도 거대한 대도시다. 제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 도시를 다스리는 상층부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경 수십 만에 달하는 인간들이 도시 내에서 걸음을 오간다. 어마어마한 인파는 잘 갈린 구획 내에서 제 갈 길을 가고, 대로변은 크게 지어져 있어 온갖 마차와 운송구들이 움직인다. 기계식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이동 수단들이 있지만 아직 이 세계에서 주류를 차지할 정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자전거 정도가 주민들에게도 익숙할까. 다만 플레이어들은 온갖 스킬과 능력을 이용해서 희귀한 몰골들로 도시 내를 쑤시고 다닌다. 제작 스킬을 이용해서 자동차를 만들고, 초상력 엔진 따위를 기어코 발명해 낸 양반들도 있었다. 세슈칸 내에 돌아다니는 걸 제냐도 몇 번 봤다.


거기다 변신술 스킬이니, 예전에 봤던 코미어의 붉은 날개니 하는 이동 기술들을 사용해 도시의 활기와 요란스러움을 굳이 더하는 자들도 있고.

다양한 종류의 생물들을 기승용의 애완동물로 길들여 끌고 다니는 작자들도 한 무더기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판타지 세계관 내의 허용으로 만들어진 온갖 괴생물들이 많다.


날개가 달린 말, 호랑이, 곰. 말처럼 큰 늑대, 개, 고양이, 혹은 동물이라곤 도저히 볼 수도 없이 그저 둥둥 떠다니는 빛의 구처럼 생긴 놈 위에 타고 다니는 작자들도 있었고.


중수들이 도시 인구의 주요층이 되어버린 세슈칸에서는 피스 시보다도 조금 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구경할 수 있다.


제냐가 세슈칸의 전경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답했다. 고갤 끄덕인다.


“예, 다녀오죠. 뭐 지체할 것 있나요. 여러분이 목적을 달성하는 그 때까지는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가능한한, 말이죠.”


제냐의 말은 믿음직한 것이었다. 떠돌이 모험가의 말치고는. 그는 깨나 실력이 넘치는 부류였으니까.


*


툭.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은 것이 여러 권의 장서들이다.


다행히 얼마 걸리지 않았다.


비련의 시나리오에 맵 기능은 없지만 목적지와 출발지 기능 정도는 있다. 그리고 도시의 전도를 갖고 있으면 네비게이션 기능이 완성되는 셈인데, 그럴 것까지도 없었고 길이 나있는 것을 따라 냅다 달렸다.


본질적으로 여긴 게임 내 세상이었고, NPC들의 삶이 면밀하게 구현되어 있는 세계관이지만 플레이어들에게 기행들을 용인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말인즉슨 도시에서 어마어마한 근력과 순발력을 지닌 초인이 전력 질주를 해도 괜찮은 구조라는 뜻이다. NPC랑 정면으로 부딪혀서 연약한 민간인에게 상해를 입히지만 않으면 된다. 대충 널널해 보이는 길목이나, 야트막한 건물의 지붕 위를 뛰어서 제냐는 도서관에 다녀 왔다.


세슈칸 내에서 여러 의뢰를 해결하면서 인망과 명예 점수를 조금 벌었다. 그들이 해결해 준 일 가운데는 도시의 관공서에서 발주를 넣은 의뢰도 있었고. 기본적으로 플레이어들이 가장 흔하게 발급받는 신분이 ‘전문 용병’ 혹은 ‘전업 모험가’의 그것이었다. 용병 길드와 모험가 길드는 따로 있었는데, 하는 일은 대동소이하다.


길드를 설립한 이들이 달랐고, 그 역사적 배경이 조금 다를 뿐이다. 사회에서 그들이 맡는 일은 대체적으로 같다.


콘란드 어딜 가나 있는 집단 중 하나였고, 물론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조직은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용병 길드와 모험가 길드가 지역 별로 있었다.

문화권이 다른 곳에서는 이름도 조금 다르다.


제냐와 최태현은 두 종류의 신분증을 모두 갖고 있었다. 둘이 속한 그 외에도 다양한 직업 조합인 길드가 있었다. 술사, 궁사, 레인저, 오로지 ‘검도’만을 추구하는 검술가 길드 또한 있었다. 기병이나 창병 길드도 있었고, 제조 분야의 장인들이 모이는 곳들도 있다.

길드 또한 제한이 있는 건 아니었으며, 만약 플레이어가 어떤 분야의 플레이 스타일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낸 뒤 해당하는 클래스를 구체화시켜 길드를 창립할 수도 있었다.


어쨌건 제냐는 세슈칸 내에서 충분히 신분을 입증받은 인간이었고, ‘믿음직한’ 도시 내 자유민 중 하나였다.

별 어려움 없이 책을 빌려다 가져올 수 있었다.


‘···대하여.’


책의 제목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줄리앙이 하드 커버를 매만졌다.


“수고했네. 빨리 왔군? 날아서 다녀왔나.”

“비슷하죠.”


허허.

줄리앙의 말에 제냐가 받아친다. 실제로 그와 같았다. 전체 주행 중 비율로 따져보면 허공에 있던 시간이 제법 길 것이다.


“각자 뭐, 읽어보죠. 한 권씩. 사람이 여럿이니 좀 낫지 않겠습니까. 어르신. 정말로 이 책 말고는 다른 단서가 없는 거죠?”

“글쎄··· 그렇지. 다른 말씀은 하신 적이 없네.”


제냐가 고갤 끄덕거렸다. 결국 원점이었다. 멀리 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책을 폈다. 다른 이들도 호텔 로비에서 느닷없는 독서를 시작했다.

한창 책장을 넘기다가 줄리앙이 질리언을 시켜 차를 좀 주문했다.

조금 후에 서버가 다가와 몇 잔의 티를 따라 주었다. 노랗고, 붉고, 푸르고. 이런저런 색깔의 찻잎이 우러나오면서 다채로운 색과 향을 더했다. 긴 벤치에 편하게 앉아 한동안 독서를 한다.

사실 장서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는 건 무리가 있다. 그러나 질리안과 헤슈나는 그 시리즈를 몇 번이나 완독한 경험이 있다.

이미 읽은 책의 내용이, 문장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슥슥 넘어갔다.


제냐와 줄리앙은 조금 더 천천히 넘겼다. 그러다가 제냐가 지루함을 느꼈는지 속독을 하기 시작했고,


질리언이 말했다.


“음··· 어,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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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잠깐의 여유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늘.

여러분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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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 릿샤Rissha의 방 23.08.16 23 3 17쪽
58 57. 사연 23.08.13 32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7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5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6 3 14쪽
54 53. Could you join us? 23.08.05 29 4 34쪽
53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23.08.04 29 4 35쪽
52 51. 굳세어라 안드레 23.08.04 26 4 19쪽
51 50. "허억." 23.08.04 25 4 20쪽
50 49. 달려가는 소시민들 23.08.02 31 4 25쪽
49 48.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어진 23.08.02 27 4 36쪽
48 47. 최태현은 빨랐다. 23.07.31 29 4 25쪽
47 46. 로웰 드버는 결심했다. 23.07.31 33 4 34쪽
46 45. 석별惜別 23.07.30 35 4 25쪽
45 44. 결정의 주체 +3 23.07.29 35 4 45쪽
44 43. 그리턴 자작가에서 그간 23.07.29 29 4 25쪽
43 42. 호아킨 팍스Joaquin Pax 23.07.25 29 3 29쪽
42 41. 사촌 형제 23.07.24 29 3 18쪽
41 40. 로키 캐슬 23.07.24 28 3 20쪽
40 39. 운트Unt의 의뢰 23.07.23 27 3 30쪽
39 38. 그리턴, 갈색 사슴 23.07.23 33 3 29쪽
38 37. 등산 23.07.23 25 3 31쪽
37 36. 트레이닝Training 23.07.23 26 3 32쪽
36 35. 제이미 숄더 23.07.20 28 3 51쪽
35 34. 전진하는 요새 23.07.19 33 3 32쪽
34 33. 강도단 23.07.19 30 3 31쪽
33 32. 붉은 다리 협곡 23.07.19 29 3 34쪽
32 31. 협곡 진입 23.07.15 31 3 31쪽
31 30. 마차 안 23.07.14 36 4 30쪽
30 29. 돌아가는 23.07.13 35 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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