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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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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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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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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3쪽

26. 솜씨 확인

DUMMY

“두 후계자 분들만 제 놈이 손을 쓴다면 로멜리아 가의 유산은 사실 상 적법한 권리자가 없게 되는 셈이니. 그 실존조차 가주님만 알던 물건이었으니 말이야.”

“흐음······.”


제냐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 역시 줄리앙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얼굴. 수심이 깊은 노인이다. 백발과 갈색 눈동자. 그는 대각선 방향으로 내리깐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이다. 아마 불길한 상상들을 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개중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아직 버젓이 살아있는 로멜리아 가의 후계자들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까를 계산하고 있으리라.


“가문의 숨겨진 유산을 완전히 독차지 하기 위해서, 전 남작님께 일부러 접근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적법한 주인인 남작님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요?”

“그렇겠지. 남작님께서 정확하게 물건의 위치와 내용에 대해서 알고 계셨는 지는 나도 잘 모르네. 그저 약속에 따라 돌려받으라고만 하셨을 뿐. 그 외에 건네주신 건···”


줄리앙이 말을 다 잇지 않았지만 제냐는 고갤 끄덕였다. 그가 하는 말을 안다. 제냐에게 주었던 책을 이름이다.


“예, 그 책이요.”

“그렇네. 내게 마지막에 주신 ‘물건’이었지. 아마 그 즈음부터 불안한 감을 느끼셨을 지 몰라. 내가 조금 더··· 잘 뫼시었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 마지막 말에 물기가 조금 어렸다. 늙으니 주책이지, 줄리앙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수통의 물을 자신의 컵에 부었다. 흔들리는 손으로 쥐어 왈칵 흘러내리는 수통 아귀의 물줄기가 차마 참지 못한 줄리앙의 회한과 떨림을 말하는 듯하다.


제냐는 조용히 혼자 조금 고개를 끄덕거렸다. 깊이 생각을 할 때 나오곤 하는 버릇이었다. 제냐가 그 뒤에 서 있는 남자를 처다봤다.

선이 굵은 사내. 칼이라도 깨나 쓸 것 같은 양반이었다. 제냐가 처다보자 그 역시 제냐를 노려보았다. 사실 그냥 본 것이었지만, 인상이나 눈빛이 조금 날카로운 구석이 있어서 그렇게 느껴진다.


“······.”

“······.”


제냐가 물었다.


“그, 형님께선 혹시 나이가···.”


제냐가 딱히 할 말이 없어 물었다. 말했듯, 그는 예식 따위 모른다. 그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건 그저 현대의 사회생활에서 익혀야 하는 예절 정도였다. 이름도 모르고 자신을 노려보는 청년과 말을 트기 위해서 일단 입을 열었다.

제냐는 청년들이 멀쩡히 정신을 차린 것을 오늘에서야 처음 보는 중이었다. 제냐가 그들을 도와줬을 때 약물에 중독돼서 기절 중이었고, 해독 포션을 먹이고 치료사에게 데려간 뒤에야 안정을 찾았다.


깨나 지독한 독이었는지 그러고도 의식을 완전히 찾지는 못했고, 노인과 두 아가씨에게 수 없이 감사 인사를 들으며,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러고 나서 이틀 뒤인 지금이다.


“···크흠.”


사내가 헛기침을 하면서 줄리앙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는 뜻이었다. 줄리앙은 그 연륜처럼 빙긋 웃어만 보였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사내에게는 적당히 대답이 되었던 모양이다.


“32살이오. 나이를 묻다니··· 특이하군. 갈렙 페이브라고 한다네. 페이브라고 부르게, 킴 경.”


제냐보다는 한참 형님이었다. 뭐 형님 대접을 해드리고 싶어서 딱히 물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현대 한국 사회의 관념이 머리에 자리잡은 제냐는 연장자에게 하대를 하거나 하는 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시나리오 온라인의 세계에서 대단한 대접은 그렇더라도 말투 정도는 나이에 맞추어 해줄 수 있었다.

아예 관계를 맺지 않았으면 모를까, 맺는다면.


“페이브 경이시군요. 예.”


제냐가 빙긋 웃으며 그 다음 줄리앙을 보았다.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제냐가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뭐 상황이 어려운 것 같으니 여쭙는 말씀입니다만, 부디 실례 되는 질문이라도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제냐가 그, 페이브 경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선 다른 청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두 분 다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줄리앙도 보았다.


“어르신도 포함해서요.”


“호.”


줄리앙은 갑자기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리고 말한다.


“당돌한 친구로군. 뭐 나쁠 건 없네만. 생명의 은인에게 답할 말이니 어렵진 않네. 다만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는 조금 힘든데······ 자네가 실력을 좀 보겠나? 직접.”


노인은 답잖은 호기로움을 표정에 띄우며 고개로 슬쩍 창문 쪽을 가리켰다. 호텔 건물은 깨나 크기가 컸다. 앞쪽은 대로변과 연결된 정문이 있었고, 뒤쪽에는 호텔 부지에 포함되는 후원이 있다.

잘 조성된 정원수들이 가지런히 길을 꾸미고 있는 곳이었고, 슬슬 저물어가는 어스름에 조명이 켜지며 더욱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제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줄리앙은 두 청년과, 아가씨를 처다보았다. 고용인의 선택으로 주인의 거취를 정할 수는 없었다.

전쟁 중에 피보호자의 입장이라면 멱살이라도 끌고서 가야 했지만, 그럴 때가 아니라면.


그러나 두 아가씨는 눈치나 말귀가 빠른지 그들이 하는 대화의 흐름과 분위기를 보고 깨달았다. 어린 아가씨, 아드리안이 얼굴에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산책 가고 싶어! 방 안은 지겨워.”


어린아이다운 말투였다. 침대에 앉아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몸을 배배 꼬던 녀석의 말이었다. 헤슈나 로멜리아, 그 옆에 단아하게 앉아서 경청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아가씨 역시 고개를 고아하게 끄덕거려 보였다.

그 모습에 줄리앙이 두 청년에게 눈짓을 했다.

모두 저녁은 넉넉하게 먹은 참이었다. 잠시 나가서 바람을 쐰대도 어색하지 않은 행동이다.


두 영애의 허락이 떨어지자 노인이 일어섰다. 황야와 맞닿아 있는 도시의 기후는 밤이 되면 또 금새 쌀쌀해지는 경향이 있다.

낮 시간의 열기를 보관할 적당한 지형물이 없어서 그렇다.

추운 정도는 아니었으나 얕보고 얇은 옷차림으로 다니다간 한기가 들 지 몰랐다. 드레스 위에 걸칠 가벼운 외투나 스툴 따위를 두 아가씨가 몸에 둘렀다.


후원으로 향한다.


*


정원수는 호텔에서 고용한 기술자가 특별하게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어디 하나 엇나간 구석 없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전체적인 조형미를 완성시킨다.


어스름한 저녁의 어두움 사이에서 비춰지는 주황빛의 따스한 조명들이 나무들 사이에 서 있다.

전체적으로 조경을 위해 심어진 나무들은 그다지 키가 큰 종류는 없었고, 사람의 키나 눈높이 근처에서 몸통부의 성장이 끊겨 있다. 그 위로 삐죽이 솟은 가지와 나뭇잎들이 모양을 내고 있는 부분이었고.


길바닥은 잘 닦인 벽돌로 깔려 있었다. 도시의 뒷골목에도 깔리는 흔한 종류는 아니었고, 어딘지 단가가 높은 재료로 만들어진 듯하다. 외관도 색이 통일되어 있고 반질거린다. 빗자루 질을 자주 하는지 길이 반짝반짝하다. 빛이 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깔끔하다는 뜻이다.


회백색 돌길에 그 사이드에는 한 칸 정도 되는 조금 어두운 톤의 돌이 인도와 관목들이 늘어선 자리를 구분한다.

호텔 뒤쪽에 있는 후원은 제법 크기가 넓었고 산책 정도를 할 수 있었다. 투숙객들이 적게 잡아도 늘 수십 명은 있을 텐데, 그들 전부가 나와도 일단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은 된다.


가운데에 타원형으로 길쭉한 뜰이 있고, 나무와 풀들이 모양 잡혀 선 그 가운데를 빙 두르는 돌길이었다. 다시 돌길의 외곽에 상록수와 꽃 따위가 있었고.


호텔의 뒷문으로 나가 정원에 발을 디딘다. 양갈래로 갈라지는 길 중 오른쪽을 골라 일행이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맞은편에 이어지는 공간이 있었다.


작게 마련된 연못과 가로등, 벤치와 정자 따위가 있었다.

소소한 운동을 할 만큼은 되어 보이는 풀밭 자리도 조금 있다. 정자 근처에 있는 그 공터에 사람들이 섰다. 두 아가씨는 청년 둘과 제냐가 풀밭에 선 것을 구경하고 있다. 아드리안은 연못가의 근처에 서서 그 물에 손가락을 담갔다 뺐다, 손바닥으로 조금 물을 움켜 쳐내면서 물장구를 친다.


헤슈나가 그 주변을 서성이면서 아드리안이 위험하지 않은가 보았고, 줄리앙이 그 흩어진 사람들의 가운데 즈음에 서서 이야기를 뱉었다.


“실력을 알고 싶다고 했지. 중요한 일이기는 하네.”


줄리앙이 제냐를 똑바로 처다보았다. 어스름한 하늘 아래에서도 가로등 불빛이 그다지 어둡지 않게 비추어서 서로의 표정을 잘 알 수 있었다.

제냐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예. 말씀드렸듯,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못 드릴 것 없습니다. 어차피 떠돌이 신세이고. 궁한 처지라고 한다면 잠깐 함께 걸을 수 있죠. 다만···.”


제냐는 스스로 말을 뱉으면서, 마치 연극 배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완벽에 가까운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시나리오 온라인의 NPC들은 경이로울 때가 있었다.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그대로 듣고 반응하며, 실제 사람과 교감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개발진들이 플레이어들에게 주고 싶었던 재미이다.

영화 속에 실제로 들어가 액션과 스릴을 잠시 느껴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렇다 하더라도 서로 얼마만큼 하는 지는 알아야지요. 세상 물정이 어두운 떠돌이기는 합니다만··· 세슈칸의 영주와 대치할 수도 있는 일이라면 위험하기도 하고.”

“자네가 먼저 도망칠 일은 없겠나. 무얼 보고 우리를 도와준다는 거지?”


사내, 페이브가 말했다. 그 옆에 선 짧은 머리의 더 어린 청년은 ‘질리언 마스’였다. 둘 다 어중간한 길이의 한 손 검을 갖고 있다. 질리언은 제 오른쪽 허리에, 페이브는 뒤켠 등쪽의 칼집 안에 말이다.


제냐가 페이브에게 대꾸했다.


“음··· 솔직히··· 한 번 얽혀든 일이기도 하고.”


제냐가 말을 뜸들였다.


“예. 솔직히 말하자면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어차피 모험을 위해서 나선 길이고, 나는 모험가입니다. 그게 딱히 나쁜 일이 아니라면 어렵고 위험한 모험일수록 신이 나는 게 당연한 일이지요.

여러분이 의지가 있다면 전장터라고 하더라도 같이 들어갈 생각이 있습니다. 게다가 도망친다는 건···

뭐 그럴 수 있겠지만 적어도 여러분보다 빨리 지치거나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도망칠 정도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상황이라고 봐도 좋겠죠.”


꽤나, 오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제냐는 그 정도쯤 말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알기 위한 탐색전으로는 약간 찌르는 듯한 투의 말이 적절하다. 그래야 상대도 본신의 실력을 전부 발휘하기에 알맞지.


“오호?”


페이브의 말은 아니었다. 마스, 질리언 마스가 입을 열었다. 두 청년은 조금 심술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왜냐면, 그들의 임무를 하나도 수행하지 못하고 뻗어 있기만 하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이 오늘 아침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로멜리아 가의 집사장 줄리앙 리스트의 설명에 따라 눈 앞의 청년을 어느 정도 신뢰하고는 있었지만. 그리고 고마움도 느끼고는 있었지만.


자신들의 임무를 빼앗겼다는 생각도 일부 들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사내란 책임감으로 사는 자들이었다. 책임감을 상실한 두 청년에겐 그것을 되찾을 기회가 필요했다.

한 번은 방심해서 무력하게 당했으나 두 번은 그러지 않으리라. 그리고 독이 아니었으면 제냐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거뜬히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고자 했다.


“서로 피를 보는 건 과한 일일 겁니다.”


제냐의 말에 두 청년이 집중했다.


“그러니, 가볍게 하고 끝내죠. 제가 그렇게 할테니, 두 분은 전력을 다해주십시오.”


이 정도로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조금 걱정이 되고 또 이 중세 시대의 귀족가 일원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조금 극적인 투로 나오는 게 민망하기도 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제대로 잘 플레이하려면 연기력 역시 요구되는 요소였다.


제냐의 말은 효과가 좋았다. 두 청년은 낯빛이 조금 굳을 정도로 반응했다. 페이브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응을 바라고 건넨 말에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리어 가장 큰 반응일 수 있었다.


스릉.


페이브가 조용히 자신의 허리춤에 찬 칼을 뽑아들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이어서, 조금의 끊김이 없다고 느꼈다.

춤이나 무술에 일가견이 있지 않은 제냐였지만, 이곳에서 그는 어엿한 검술가였다. ‘보법’스킬과 ‘검술’계열의 스킬이 그를 전체적으로 보정한다. 그의 움직임과 함께 아이디어와 감각 역시도.


어디로 가면 어떤 결과가 나오고 어떻게 움직일 지. 몸이 더 편한 방향으로 사용자를 인도한다. 그리고 빠른 시간 내에 여러가지 물리 현상을 시뮬레이팅 한 뒤 현실의 근사치에 가까운 결과값을 플레이어에게 직관으로서 제공하는 식이다.

처음에는 스킬 시스템이 건네는 결과값을 받아 먹는 것 밖에 못하지만, 지속적인 주입식 교육이라도 반복이 된다면 학습이 일어난다.


제냐는 어느 정도 학습이 시작된 플레이어였다.


초보자 치고는 빠른 변화였다.


분명히 그건, 비련의 시나리오의 개발진들이 염두에 둔 가능성 중 하나였다. 초고도의 시뮬레이팅 프로그램이 현실에서의 학습에 얼마나 큰 영향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에 대한 연구 말이다.


세세한 운동과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면 다른 방식의 정보 역시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습득하게끔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베타 버전의 무언가였다. 그 시험작을 가지고 만들어질 다음 프로그램의 형태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게임이 될 수도 있고, 게임이 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을 테다.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게임 그 자체보다는 이런 전대미문의 작품을 만들어 놓은 초인공지능이 더 값진 것이었다.


가상현실 게임의 개발사인 태Tae迨는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그 발명품의 한계를 시험하고자 게임을 만들었고, 내놓았고, 서비스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사상과 취향이 한껏 들어간 일은 덤이었고.


살갗 하나하나, 그리고 신경 뉴런 하나하나에 선명한 자극이 올 정도의 세밀한 질감을 가진 초현실적 판타지 게임.

그 가상현실 기술을 악용하지 않는 선에서, 사회 기준에 적합한 선에서 스릴과 서스펜스마저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운동을 많이 해보지 않은 초심자라고 할 지라도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된 듯한 반쯤 초인적인 속도감의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일.


개발진들이 원한 것이었다.


제냐는 충실하게 겪고 체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제냐 역시, 허리춤에 늘 매어둔 대거를 꺼내들었다. 붉은 이빨이 이글거린다. 제냐가 그동안 스킬을 습득하고 경험치를 먹으면서 전투 기술 역시 일취월장했음이 드러나는 점이었다.

기력술이 아주 자연스럽다. 그의 손끝이 닿자 무기가 숨을 쉬듯 반응을 했다.


기력, 초상력, 정신력 에너지. 모두 같은 사물의 다른 이름이었지만 어쨌든 그 힘은 비련의 시나리오 세계관 내에 있는 물질들에 호응하고 내재된 성질 이상의 위력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입도 손도 감각도 없는 무정물이지만 제냐의 의지력 컨트롤에 따라 말을 하듯 반응한다.


웅웅대며 떨리는 금속의 진동은 아주 미세한 것으로, 기감이 탁월한 특수한 전사들이나 느낄 것이다. 제냐는 그런 전사이기도 했고 자기 손에 든 것이라 더 쉽게 감각할 수 있었다.


페이브가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설 듯 무게 중심을 바꾼다. 반면 그 옆에 선 삐죽한 헤어스타일의 사내, 질리언은 몸을 조금 뒤로 젖히는 기색이었다.

한 눈에 개개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다음 것을 예상하는 건 전투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자질이자 능력이다.

관찰력, 눈은 생명과 가장 직결되어 있는 기관이었다. 그것에 따라 근육이 반응할 때 승기라는 놈을 잡을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제냐는 보는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적어도 아직 이 정도 레벨의 전투에서는 말이다.


귀족가의 호위로 일하고 있는 두 청년이니 솜씨가 없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본격적인 ‘기사’의 수준인 지는 알지 못했다.

로멜리아 남작 가가 영락했다고 하는데, 인재들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는가.


기사Knight는 중세 시대의 환경을 모티브로 가져온 비련의 시나리오 세계관에서도 핵심적인 전투 계층이었다. 귀족 가의 사병, 혹은 왕가의 검이 되기도 하는 이들.

초보자 딱지는 떼는 수준인 기력술의 기초적인 발동 정도는 가능해야 그래도 서임을 받고 정식으로 인정 받는 기사들이라고 한다.


질리언은 뒤로, 페이브는 앞으로.

제냐가 본 그대로 달려들었다.


별다른 예비 동작도 없이 제냐의 말이 끝나고, 그가 기색을 바꾼 것을 두 청년이 확인한 뒤였다. 나름의 배려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상대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으니까.

그 염려가 과연 고수의 것인지 하수의 오지랖인지 알아낼 수 있는 건 다음 동작이 이루어지는 찰나이리라.


한 두 걸음 만에 수 미터를 좁혀 오는 페이브의 몸놀림은 날쌨다. 어둔 정원의 풀들을 밟아대며 진격하는 사내의 걸음이 매섭다. 그 우수에 들린 양날검의 날은 더욱 무서웠고.


제냐가 무서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전투 중에 정신적인 보정을 약간 건다.

현대에서 살아오는 이들은 전투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약간의 아드레날린을 비롯해서 신경 물질들이 분비되고, 전투에 적합한 정신 상태가 되어야 제대로 된 퍼포먼스가 나올 수 있었다.

최소한의 게임 시작을 위한 배려이다.


제냐는 그런 보정이 잘 맞는지, 혹은 시나리오 온라인이 잘 맞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아무리 흉악하게 생긴 놈과 위험하게 맞닥뜨리더라도 두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가 뒤로 몇 걸음 빠르게 물러섰다. 예상을 했다는 듯한 날쌤이었다.


타닥, 하고 제냐의 가죽 신발 밑창이 몇 발자국 어치의 풀들을 눌러 죽이며 뒤로 뛴다. 그것을 페이브가 따라 들어왔다. 대거의 검날이 자세히 바라보면 미세하게 이글거린다. 기력이 닿아 잠재되어 있던 인챈트 스킬이 발동된다.

지금 제냐의 수준에서 발톱 대거로 평범하거나, 혹은 녹슨 검의 경우 대련 중에 무기를 부숴버리는 일도 가능했다. 무기를 없앨 수 있다는 건 방호구도 역시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계산하면서 조금쯤 MP를 사용했다. 무기에 들어간 정신력 에너지는 기력이라고 부른다. 의지력에 따라 운용하는 요령은 똑같다. 그의 MP가 소량 줄어들고, 발톱 대거가 불꽃 대거라 부를만치 붉은 아지랑이를 슬슬 흘려보냈다.


그 모습에 페이브는 찰나의 순간 눈끝을 떨었다. 사실 그는 완전하게 기력술을 마스터하지는 못했다.

기력술을 마스터한 인간이 과연 세계관 내에 얼마나 있겠냐만은, 페이브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기준에 조금 못 미친다는 뜻이었다.


페이브는 아주 오랜 세월 단련을 쌓고 또 재능이 있는 무술가였으나, 정신력 에너지, 초상력, Supernatural Power를 다루는 데에는 재능이 조금 모자랐다.

그마저도 고련으로 얼추 기사와 비슷한 수준에 자신의 경지를 올려놓는 일에 성공했다.

그러나 제냐의 수준을 그는 알지 못한다.


두 청년은 제냐가 실력을 발휘했을 때 쓰러져 있었다.


노인, 줄리앙은 제냐의 솜씨를 알만큼 안다. 그러나 제냐는 줄리앙이 움직이는 모습 역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본신의 실력을 알진 못했다. 그러니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다.

플레이어로서 다음 스텝을 밟고 다음 씬Scene을 맞닥뜨리려면 적어도 파티 구성원들의 전력 정도는 알아두어야 했다.


정말 최악의 경우라면 이들에게 퀘스트 달성을 포기하라고 언변으로 설득하는 일도 각오를 해야 했다. 그것을 따를 리는 없겠지만. 괜히 개죽음 당하는 꼴을 보는 건 그것이 게임 내의 NPC라고 하더라도 기분의 문제로, 찝찝한 구석이 있다. 사람의 모습을 닮은 AI들과 역할극 중이었으니 어쩔 수 없으리라.


할 만큼은 하자, 가 제냐의 모토였으니.


페이브와 제냐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제냐가 물러서는 속도보다 페이브가 다가가는 것이 빠르다. 보통의 논리라면 당연하다. 뒤로 뛰는 것보다야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게 순발력 있는 게.


제냐는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러진 않았다. 한 두 호흡 정도 튀다가 턱, 하고 뒷발로 정원을 패이도록 밟으며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급정거에 페이브가 타이밍을 잃었다. 반 치의 반 치 쯤. 눈썰미가 좋은 무술가가 아니라면 캐치하지 못할 정도의 움찔거림이다. 제냐에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제냐가 깊숙히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주제에 혼자서 관성의 영향이 적은 것처럼 굴었다.

서로 움직이는 속도와 방향 전환이 아예 다르다면 레이싱은 성립되지 않는다.

페이브가 서늘하게 허리춤 높이로 가로 눕혀 들고 오던 한손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냐가 캉! 하고 다가가며 대거로 그것을 쳐날리듯이 옆면을 갈긴다.


쇳소리가 둔탁하게 나며 페이브의 손이 퉁겨 나갔다. 자세가 바뀌거나 검을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한 손 검과 대거라면 보통은 대거 쪽이 불리하다. 질량에서 단검이 밀리니까. 뒤엎을 정도의 힘이, 제냐에게는 있었다. 한 두 걸음의 전진과 맞대어본 칼날 너머로 제냐가 페이브의 실력을 가늠했다.


제냐보다는 부족했다.


아마 세슈칸에 처음 왔을 때의 최태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 때 정면에서 붙었다고 하더라도 이길 수는 있으리라. 조금 까다롭기는 하겠지만. 그리고 격전을 치르듯 연속적으로 감당해 낸 여러 파티 퀘스트로 인해 비약적인 스펙 업그레이드가 있었다.


일반적인 건장한 남성의 6, 7배가 되는 순발력이라는 건 끔찍한 수치였다. 상대 역시 그마만한 초인이 아니고서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말이다.

거기에 다양한 스킬의 패시브 보정과, 기력술로 일시적인 스텟 상승이 추가된다면 더하다.

페이브는 노련한 검술가였으나, 기력술의 운용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아마 가지고 있는 MP량 역시 그리 높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높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힘이 많기만 해서야, 전투 지속 시간은 오래 갈 테지만 현실적인 전투 능력은 그다지 높지 못하단 말이다.

침착하고, 검을 다루는 기세는 제냐 못지 않고 도리어 그보다 더 나을 수 있었다. 다만 신체 능력의 차이가 많이 났다. 기술도 어지간히 체급이 맞아야 통하는 말이다. 게다가 체급을 무시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술의 격차까지도 아니다.


제냐도 초보자나, 플레이어 중에서는 그래도 뛰어난 전투 감각의 소유자였다. 스킬 보정으로 유도되는 행동 감각의 길을 거침없이 따라간다면 그래도 중반 레벨 정도에서 NPC에게 무술 숙련도를 이유로 밀릴 일은 많지 않았다.

상대가 비범한 수준으로 무술 스킬을 숙련한 종류가 아니라면. 페이브는 그 수준에는 아직 조금 미치지 못했다.


쳐낸 한 손 검으로 인해서 빈 자리로 제냐는 자세를 바꾸어 더 깊이 찼다. 오른 손에 든 대거가 상대방 오른 손의 검을 밀었고, 그대로 몸을 돌리면서 발을 바꾸고 옆차기를 갈겼다. 늘 말하듯 묘기에 가까운 자세 변환이다. 보법과 쌍이 되는 ‘오류五流 무술’을 익힌 성과도 있었고, 또 그 외에도 갖가지 박투술이나 검술 계열 스킬들이 그의 움직임을 신경이 내린 판단 그대로 이끌어가고 있다.


뇌가 결과를 원하면, 중간 과정을 스킬들이 유연하게 구현해내는 방식이다.

간혹 지나친 아웃풋을 상상하면 스킬마저 구현 불가능이라 판단하고 포기할 테지만.

스텟이 올라가고 플레이어 본인의 전투 감각이 오를수록 구현 가능한 자세의 종류가 늘어가고 있었다.


탄력적이고 빠르게 공격을 해 오는 제냐의 기세에 페이브는 기겁을 했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두 세 배는 더 빠른 움직임이다. 마치 기사를 상대할 때와 같다.

페이브도 어지간한 기사들은 상대할 수 있었다. 그들을 상대로 안정적으로 이기는 건 무리였지만 맞상대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승산 역시 점쳐볼 수 있었고.


제냐의 움직임의 강력함은 고도의 기력술로 자신의 신체를 활성화시킨 숙련된 기사의 그것과 비슷했다.

차오는 옆차기를 막을 길이 없다. 페이브는 자신의 MP를 사용했다. 그가 사역하는 정신력 에너지가 명치 부근에 모여들었다.

신체에 머무른 MP는 조금 애매하다. 그건 마법의 결과이기도 하고, 기력술의 일종처럼도 보인다.


마법은 ‘술식’을 미리 정해두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기력술에는 술식의 제한이 애초부터 없다. 마법의 통달자들은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강대한 MP를 제멋대로 다루어내지만.


보조 마법, 지원 마법으로 ‘헤이스트’를 거는 것과 MP를 사용해 스스로의 순발력을 높이는 것의 결과는 결국 비슷하다. 그러나 발동 이후에도 세세한 조정이 끊임없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력술과의 차이가 조금 있을 테다.


결과는 같아도 매커니즘이 다르다.

어쨌든 발동되는 마법이 허공에 강철 방패를 만들어내서 상대의 공격을 막기도 하듯, 기력술 사용자들의 MP는 신체에 머무르며 추가적인 방호구로 충분히 기능한다.

칼날에 씌워져 강력한 덧날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퍼억-! 하고 깊게 들어간 옆차기가 명치를 찍었다. 마지막에 발끝을 세워 내장부까지 충격을 전달하는 건 사소한 요령이다. 무게가 실린 발차기가 페이브를 차고, 동시에 밀어냈다. 그는 그 힘에 그대로 뒤로 날았다. 앞으로 달려들던 그의 움직임이 멈추고 몇 걸음 정도를 붕 떠서 움직였다.


괴력怪力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우와’하며 아드리안이 입을 벌렸다. 헤슈나 역시 놀라움으로 눈을 치켜떴다. 기사들의 싸우는 장면을 볼 일이 많은 귀족들이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기사들이 아니라면 이런 모습을 연출할 배우는 달리 없다.


어린 아드리안은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쓰는 것을 본 일이 아직 많지 않았다.


쾅! 하는 소리가 귀에서 울리는 것 같다.

페이브는 그대로 뒤로 퉁겨 날았다. 풀밭, 흙 위 였지만 거칠게 맨 땅에 다이빙을 한 뒤 자세도 취하지 못하고 공이 된 마냥 굴러갔다.

간신히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아직도 들고 있는 칼은 꼿꼿하다. 그는 넘어가는 관성 그대로 한 번 더 굴러서 조금 뒤에서 일어섰다.


페이브가 날아가는 걸 보고 질리언이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도 마찬가지로 팔뚝부터 손끝만한 길이의 검날을 가진 한 손 검이 들려 있었다. 손바닥만한 너비의 큼직한 검이다. 용도가 다양하다. 근접 전에서는 검면을 세워 상대방의 공격을 막기도 한다.


옆차기로 페이브를 날리고 제냐가 자세를 수습하는 동안 질리언이 금방 닿아 검을 휘두른다. 대각으로 질러오는 내려베기를 제냐가 인식했다. 그대로 자세를 회복하면서 대거를 갖다 박았다. 깡! 하는 철 부닥치는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의 손이 반발로 뒤로 튕겼다.

질리언은 그대로 검을 회수했다. 한 번 더 지른다. 거친 상단 베기로 제냐의 머리통을 쪼개려고 했다.

친선 시합에 가깝고, 서로의 실력을 보자는 것이었지만 두 호위 무사가 품은 독기가 만만치 않았다. 제 역할을 제 때에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또한 제냐가 상당히 강력한 인간이라는 걸 깨닫고서 마음 놓고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제냐는 다가오는 검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대로 상단 올려 베기다. 팔을 인사하듯 크게 흔드는 궤적으로 날렸다. 우수에는 발톱 대거가 있고, 단검과 제대로 된 검의 대결이지만 근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손가락 끝 마디의 힘 따위를 표현하는 수치이기도 한 ‘순발력’의 경우에는 거진 두 배 이상의 차이가 났다.


그건 자세의 정확도를 만들어내고, 근접의 격전에서 작은 동작의 변화를 만드는 소근육의 차이가 생각보다 심대하다. 자기가 가진 근육을 얼만큼 활용하느냐의 문제였는데, 제냐는 시스템의 도움으로 온전히 시너지를 내며 힘을 끌어내 쓰고 있었다.


보법이 제냐의 발 움직임을 돕는다. 두 호위 무사, 기사급인 청년의 움직임들은 만만치 않았다. 제냐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즐거움으로 찡그려진 것이다. 집중을 하느라. 스릴 넘치는 전투의 감각은 이 게임 속에서 가장 즐길만한 것 중 하나였다.

스포츠를 나름대로 좋아는 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신경과 정신의 스포츠였지만 현실에서 즐기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체감이 있다.


크게 날린 단검의 길에 내려치는 질리언의 검날이 정확하게 맞아 들어갔다. 긁어내듯 크게 치고 지나가자 내려베기의 궤적이 멀리로 무너졌고, 제냐는 그대로 대가리를 박았다.


퍽! 하고 둔탁한 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제냐의 이마가 그대로 질리언의 턱을 쳤다. “컥.”


짧은 헛숨을 뱉으면서 그가 비틀거렸다. 제냐는 그대로 질리언의 명치 즈음에 손을 댔다. 천옷이 움켜쥐는 손아귀에 넉넉하게 들어온다. 바깥으로 빠지면서, 그대로 죽 당겼다. 넘어지는 질리언의 발치를 지나가면서 홱 차버려서, 그 강력한 힘에 그의 다리가 허공에 붕 떴다.


풀썩, 하고 질리언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


으략!


하는 기성이 들렸다. 제냐를 노리고 다가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가로등의 불빛이 일정하다. 유리 박스 안에 발광 기능이 있는 도구를 넣어 만든 것이다. 스위치로 조작되고 미량의 SP가 쓰인다.

비련의 시나리오 내에 존재하는 특수한 광물과 초상공학을 이용한 물품이었다.


저녁 무렵, 호텔의 뒤뜰을 박차며 페이브가 날았다. 다시 한 번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이대로 무너지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는 한 게 없었다. 제냐는 단순하고 직선적으로 오는 페이브를 슬쩍 처다보고, 왼 쪽으로 크게 몸을 기울였다. 검을 들고 다가오는 상대에게 빈틈을 내어주는 건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럴 만했다.


이성을 잃고 전략도 없이 다가오는 격하의 상대는 세상에서 가장 손쉬운 요리감일 것이다.


뻔히 보이는 동작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휘청거릴 정도로 몸을 한 쪽으로 빼니 걸려들지 않을 재량이 없었다. 페이브는 그냥 그쪽으로 한 손 검을 쭉 빼서 휘둘렀다. 그의 검술은 일품이었다. 물 흐르듯.


다만 제냐 역시 바람처럼 몸이 날래다. 제냐가 기울이는 쪽에 검을 들고 있었으니 그대로 지르면 된다.


거기서 페이브가 볼 때, 제냐의 신형이 쑥 사라졌다.


제냐가 그대로 넘어져 땅바닥을 짚었다. 상체가 땅에 닿을 듯 내려갔지만 강력한 운동 에너지는 남아 있었다. 그대로 오른 쪽으로 반월을 그리며 온 몸을 날렸다. 레슬링 기술처럼 양 다리가 강력하게 날아오자 페이브가 막을 새가 없었다. 저걸,


그냥 베?


페이브가 잠깐 고민했다. 고민하지 않아도 될 뻔하긴 했다.


제냐는 족갑을 차고 있었고, 정강이 보호대는 칼날도 어느 정도 견딘다. 기력술이 문제라면, 제냐 역시 MP를 소모해서 다리를 이미 무기처럼 만든 뒤였다.

적절한 강도, 방어력이 부족한 부위에 MP만으로 방호력을 자아내려면 소모량이 크다. 기력술의 최고수들은 맨 손으로도 칼날보다 날카로운 검기를 표현할 수 있었고, 특수한 방호공功을 스킬로 익혔다면 실전에서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었지만. 아직 제냐는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기력술의 가장 효율 좋은 활용법은 이미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는 아이템에 MP를 쏟아부어 위력을 끌어올리는 식이다.


가죽 보호대가 그의 몸을 향해 날아왔다. ‘에라.’ 페이브는 그대로 궤도를 바꾸어서 제냐의 양 다리, 정강이 즈음을 야구 배트로 후려치듯 칼날로 때렸다.


꽝! 하고 폭음과 비슷한 효과음이 터져나왔고,


무게와, 기력과, 이미 들어간 운동 에너지의 총합이 페이브가 날린 검격을 상회했다.


그 말인즉슨 검으로 다리를 후려친 청년이 밀려나 뒤로 한 바퀴 굴러 넘어갔다는 뜻이다.


처음에 제냐에게 날아갔을 때와 비슷하게 마당을 구른 페이브가 엉망으로 쓰러졌다.


“컥.”


충격이 만만찮았다. 마차에라도 치인 듯한 느낌이다.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겠으나, 순간적인 체감은 그랬다.


마당에 깔린 풀이 여기저기 뽑히고, 패이고. 엉망이 되었다. 광범위한 수준은 아니고 그들이 달리면서 힘을 주어 밟아대고 몸으로 문지른 부분들 정도만.


페이브를 브레이크 댄스의 한 자세같은 꼴로 날려버린 제냐가 그대로 한 바퀴 돌아, 땅을 짚었다. 유연하고 강력한 근육은 상체가 아래로 가고 다리가 들린 상태에서도 여유롭게 균형을 잡아 덤블링을 하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후우.”


제냐가 투둑, 하며 제 몸 여기저기를 털었다.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 나쁘지 않은. 아니, 꽤나 좋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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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부우지런히 씁시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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