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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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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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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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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4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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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DUMMY

*


안드레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을 상황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할만큼의 겨를도 없었다.


갑자기 무자비하게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공격들에 버거워했다. 레벨 근 80대를 넘는 전투력의 보유자였지만, 어쨌든 손은 두 개 뿐이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다이어 울프의 어금니는 그에게도 확실한 위험거리였다. 오크나 고블린의 공격들은 다소 허용해도 큰 상처까지는 아니다.


검이 그의 손 안에서 놀았다. 작힘 가, 그레이 하운드 류 검술을 상당히 익혀낸 사내다. 좋은Good이나 훌륭한Excellent 수준 정도가 되면 검술은 현실에서 가늠하기 어려운 달인이 되어가는 지경이다. 게임 내에서만 볼 수 있는 신묘한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마치 소설 속의 초인들처럼, 일종의 무리武理에 대해 깊이 깨달아가며 동작 하나하나가 깊이감이 생긴다. 단순한 패시브 스킬의 경지이지만 대인전이라면, 체급이 맞다면 완벽하게 승률이 뒤바뀔 정도의 효과가 있었다.


안드레는 능숙하게 검을 다루었다. 한 번의 휘두름에도 몸을 쥐어짜내듯 회전시켜 크게 베었다. 일반적인 검이 아니라 기력술을 함께 쓰기에 충분한 파괴력이 있었고, 다이어 울프의 발톱이나 이빨을 처내고도 남는 관성이 있어 여러 방위를 견제할 만했다.


그것으로도 조금 부족하기는 했지만. 사방에서 짓쳐드는 괴물들의 아우성이 스트레스였다. 그런 와중에 하나 더, 위기를 고조시키는 요소가 있었다.


“크르르릉.”


낮게 우는 맹수의 소리가 그의 귓가에 잡혔다. 큰 울음은 아니었으나 어딘지 섬뜩한 면이 있는 소리였으므로, 이 다이어 울프들과도 다른 종류의 맹수인가 싶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기력 감지술이 먼저 더듬었고, 그의 시야가 따라갔다.


웬, 거대한 금빛 사자의 면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심지어 그 아가리에 대형 도끼를 물고 있어서, 그 날이 예사롭지 않게 빛난다. 안드레는 그 초현실적인 광경에 식겁하면서 다리에 힘을 집중시켰다.

대퇴부의 근력만이 아니라 기력술까지 응용해서, 본능적으로 힘을 주어 튀었다.


메뚜기가 튀어오르듯 펄쩍 날아오른 점프였고, 사자가 고갯짓으로 휘두르는 거대한 도끼날이 부웅, 그 근방을 갈랐다.

아쉬운 일이었다. 다이어 울프 몇 마리가 찢겨나가듯 상처를 크게 입으며 물러섰다.


호아킨, 그의 변신술이었다.


그는 변신술에 스택으로 곁들여 쓸만한 여러 패시브 스킬을 익히고 있다. 외형 대변신(물질)은 따라하는 생물체의 속성을 일부 얻는다. ‘질량’같은 것이었다. 거대형의 마수로 MP를 소모해 변신한다면 그만한 무게를 얻게 된다. 스텟이 부족하다면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꼼짝할 수 없겠지만.


호아킨은 거대 사자를 움직일만한 근력은 있었다. 거기다 변신 시, 자신보다 거대한 무언가로 바뀌었을 때 질량에 맞춰 근력이 조금 오르는 보정 패시브 스킬이 있었다. ‘변신술사의 미덕’이라는 희귀 스킬이었다. 이런 종류의 스텟들이 여러 종 그를 보강해주었고, 결과적으로 사자의 아가리로 휘두르는 대형 도끼술이 일반적인 손의 그것보다 더 강력해졌다.


변신술을 하고 물어챈 도끼의 날 사이로, 기력술의 흔적이 일렁거린다. 호아킨은 완성형의 전사였고 변신술을 어떻게 이용해 전투를 풀어나갈지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피해버린 건 조금 예상 밖이기는 했다만. 어차피 릿샤가 노리고 있었다. 그는 거리를 벌린 안드레를 노려보았다. 사자의 안광이 사내를 좇는다.


암살조 일행들의 급변과 상황의 급전개는 따라가기 힘든 면이 있는 것이었다. 마차 내부에서 침착하게 석궁을 겨누고 있던 줄리앙조차도, 부족한 솜씨로 궁술을 발휘하던 질리언이나 페이브도, 또 그 외 여럿도 잠깐 움직임을 멈출 정도였다.


거대한 적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부터가 패닉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저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애초부터 이럴 계획으로 다가왔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사람들의 움직임이 조금 굼뜨고, 멍청하다. 제냐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다시 손을 들어, 썬더 볼트 하나를 시전했다.


파지직거리는 푸른 번개가 그의 손 앞에 모여들었고, 일단 마찬가지로 마차 근처에서 멍청히 굴고 있는 로브의 괴한들을 향해서 뿌려버렸다.


정확성을 크게 생각지도 않고 날린 공격이었지만 마차 바로 앞에 모여있는 그들은 맞추기 딱 좋은 표적이었고, 투사체의 번쩍거림과 함께 시야를 돌린 한 명이 검으로 그것을 베었지만, 전기는 검날을 타고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폭발했다. -! 귀가 얼얼한 소리가 들리며 한 명이 감전되었다.


폭발과 함께 전류량이나 전압을 크게 키우고 높여 보낸 것이었다. 아찔할 정도로 짜릿하리라. 보아하니 기사들인 것 같았다. 작힘 가의 기사인가? 뭐, 아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상황이 괜찮게 움직이고 있었다. 몬스터란 종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영문은 모르지만 언제 광폭화해서 그들 전부를 노릴 지 모른다.

기사들을 빨리 무력화시키고, 용병이나 강도와는 사정이 다른 놈들을 생포하는 것이 중요했다. 팔다리에 치명상을 입히고, HP를 깎아두어야 했다.


이번의 습격은 좋은 선물이었다. 마침 세슈칸으로 향하고 있던 찰나였는데, 제 발로 운트 작힘의 심복들이 찾아오다니. 뒷골목의 용병, 불량배나 다름 없던 놈들이나 강도단과 달리 이들은 작힘 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내부 사정이 많을 것이다.

거기다가 운트 작힘이 아무리 부인을 하려 해도 기사단의 일원을 ‘그런 자가 없다’는 말로 모르는 체 할 수도 없겠지.


만약 퀘스트의 향방이 산슈카의 법리, 곧 현실에서 온 플레이어들도 인식할만큼 상식적인 순리에 따라 풀린다면 이 기사들을 인질로 데려가는 일은 퀘스트 완료에 성큼 다가가는 성과일 테다.

제냐는 신나게 번개를 쏟아부었다. 몬스터들에 의해 계속 압박을 받으며 벗어나지도 못하는 그레이 하운드 가의 기사들로서는, 아주 곤욕스러웠다.


*


나무 위, 대강 제냐의 움직임을 보고 행동 방향을 정한 최태현 역시 화살촉을 로브를 둘러싼 자들에게 겨누었다. 어차피 적들이라는 건 인지했다. 몬스터냐 괴한이냐, 둘 중의 선택에서 일단 괴한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나무 위에서 헤비 샷으로 날려지는 적목시가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원들을 습격했다.


*


릿샤는 자비가 없었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작힘 가의 기사들은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몬스터에 의해서 견제 받는 용병들은 자신들이 살아남는 일에 몰두하는 것에 급급하다. 릿샤는 완벽한 프리 롤Role로, 누구한테도 견제받지 않으면서 몬스터로 이루어진 움직이는 발판을 딛고서 세 개의 스킬을 동시에 캐스팅했다.


초상超常 스킬Skill.


흔히들 마법이라고 부르며 상상하는 류를 일컫는 말이었다. 어떤 물질적인 재료가 필요하지 않고, 온전히 MP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스킬들을 특별히 구분해서 그렇게 부른다. 릿샤는 그런 류를 다루는 탁월한 술사였고, 워 메이지 종류의 달인이었다.


중복 캐스팅, 동시 캐스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더블 캐스팅의 상위 개념인 트리플 캐스팅은 패시브 스킬로 있는 기술이었다. 스킬이 없더라도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내에서 대개의 행동들은 그냥 가능했다.

시스템의 보정 없이 스스로 해나가는 것이라 처음부터 홀로 조각상을 만들어내야 하는 초보 조각가의 부담감과 비슷한 걸 이겨내야 하지만. 어쨌든 이 세계는 연습이라는 게 통하는 곳이었고, 릿샤는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사실이나 누군가의 인정보다는, 어쨌든 스스로의 집념으로서의 자각이었다. 그런 집념은 한 가지 행동에 몰두하는데 의외로 도움이 된다.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릿샤는 그 일에 온통 매진을 한다.


다행히도 그녀가 하고 있는 연구나 학업들은 시간에 크게 구애받는 종류는 아니었다. 당장은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게임에 들어올 시간도 없는 상황도 아니었고. 나름대로 재미있으며, 학술적으로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현상인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괜찮은 취미였다.


그녀의 눈으로 보아도 말도 안되게 정밀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이 들어갔다고 단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아니, 세계 최고라는 말이 도리어 조금 부족하다. 다른 경쟁 상대들과 비교가 불가능할 수준의 게임이었다.

이런 식의 정밀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것도 놀랍고, 멀쩡하게 서비스하며 수 억 이상의 플레이어를 감당하는 것도 사실 입이 벌어지는 수준이다.


업계에 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은 이게 얼마나 기막힌 정도의 일인가 알 것이다. 릿샤는 물리 계열의, 기초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게임에는 여러 번 취미가 있었기에 나름대로 지식이 있었다. 프로그래밍이나, 관련 하드 웨어에 관한 경향이나 유행, 현대 기술의 한계 또한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이상하다. 그래,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다시금 기술적인 혁신의 과정일 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사람들도 어렴풋이는 느낄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도와 유행을 섬세하게 느끼지 못하는 자들마저도 일상 생활에서 접하는 일반적 기술과 어딘가 차이가 있다면 알게 마련이었다. 정확하게 콕집어 말 할 수는 없어도, 다른 어디에도 없는 특이점들이 있다면.


기술적 혁신, 작게 말했으나 혁명이라고 할 만하다. 릿샤가 바라보는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그런 종류였다. 분명하게 여태까지 없던 수준의 데이터 규모를 저장하고, 처리하고, 개발해냈다. 말도 안되는 수준의 저장장치나 연산기계라도 발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것들보다 확실히 한 수 앞서 있는 데다가, 그런 퀄리티의 게임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동시에 서비스하고도 안정적일 게임의 내용이라니.


단순히 플레이어들만이 아니라, NPC나 몹들의 질감 역시 놀라운 수준이다. 릿샤는 이 개발진들, 태Tae라고 불린 어느 동양인들이 만들어낸 게임사의 전신이 천재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리라 확신했다.

IT분야에서 에너지 혁신, 데이터 혁신을 이루어냈거나 적어도 초월적인 수준의 압도적 AI 따위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전까지의 모든 수퍼 컴퓨터들을 발치에도 두지 않을만한 기능의 녀석으로.


그런 CPU와 자율적 사고, 계산 기능이 있는 기계가 있다면 각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당장 물리학 계열의 기초 실험만 하더라도 데이터 추출에 걸리는 연수가 짧아질 것이다. 온갖 기본 과학을 비롯해서 응용 학문에도 시차는 있겠으나 그 개혁의 여파가 미칠 것이며, 이제까지 점진적으로 발전해 온 21세기 이후의 과학사, 기술사가 한 단계 더 가속도를 받을 것이다.


“알 마룬 캄브디.”


적당한 소리를 지껄인다. 알 마룬, 어렸을 때 사귀었던 남자 친구의 애칭과 유년기에 키웠던 강아지의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캄브디. 그녀가 학창 시절 등하교 때 늘 들러서 그네를 타던 동네의 작은 공원 이름을 아나그램Anagram으로 철자를 바꾸면 나오는 단어였다.

어쨌거나,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또 연상 작용에 도움을 줄 단어이기만 하면 된다.


어떤 언어 계통에 속할 필요도 없이, 웅얼거리는 발음이어도 자신에게 인식만 제대로 되면 된다. 초상 스킬과 관련된 것들을 콘란드 대륙 내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으나, 사실적으로 본다면 아직까지 현대 과학으로도 다 다루지 못하는 의식과 정신에 관한 부분이 주류가 되기에 릿샤 역시 진지하게 몰두하고 있지는 않았다.


과학도, 인 릿샤의 눈으로 본다면 콘란드의 초상력학이 어딘가 널브러져 있는 정보 체계처럼 보이는 구석도 있지만 개중에서 직관적으로 깨달을만한 이야기들도 있기는 하다. 릿샤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온전하게 정보로 체계화시켜 따로 정리해두지 않았다.

조금 더 알아보고, 자신이 더 깊이 깨닫게 된다면 아마 스스로는 일종의 학문이나 지식 체계라고 인정하고 파볼 것이기는 하다. 아직은, 그 끝이 어찌될 지 모르나 배우고 있는 와중이었다.


연상 작용을 돕는 시동어는 확실하게 캐스팅에 도움이 된다. 어디에서건 집중을 해내야 했다. 집중을.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고작 게임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의 현실성을 가진 물건이라서, 극단적으로 무서운 스릴러나 공포 영화를 볼 때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사람을 놀라게 하는 면들이 있었다.

그래서 일정 나이 아래의 플레이어들은 시각적으로, 또 여러 감각적으로 데포르메되고 바뀐 모드의 시나리오 온라인을 즐길 것을 권장받기도 하고 말이다.


실감 나는 오크나 고블린, 다이어 울프나 그 외 세기도 다 어려운 수많은 종류의 괴수들과 실제의 숲이랑 똑같은 어느 오지에 떨어져서 사생결단을 내고 있자면, 릿샤로서는 실제 전쟁에서 필요한 만큼의 담력이 필요했다. 침착하게 캐스팅을 하고 스킬을 난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럴 때 어릴 적 자신의 추억의 근원지, 자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기억의 큰 가지같은 단어들을 시동어로 삼으면서 순식간에 안온한 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집중력 스텟을 키우는 행동이기도 했다.


근육이 그러하듯 정신력 스텟들 역시 많이 사용할수록 늘어나게 되어있다. 점진적 과부하. 근육들이 그러하듯, 사람의 정신력 역시 일부 고난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면이 있었다.

사람의 몸이 또 그러하듯이, 지나친 충격을 받으면 그만 으스러져 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한 가지 분명하고 또 다행인 사실은, 정신은 몸과 달리 실제 실체는 없기에 사람이 강렬한 의지와 믿음으로, 또 긍정적 사고로 소망 따위를 가져본다면 불구의 지경에서도 회복할 수 있었다.

아니 의학계의 논문이나 자료들을 살펴보자면, 신체의 불치병 역시 그렇게 치유되는 사례가 있음을 깨닫게 되니 사실 정신이나 몸이나 매한가지인 것일 지도 모른다.


어쨌든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주로 다루는 건 신경과 정신 위주였다. 실제 몸은 침대 따위에 누워서 쉬고 있고, 정신과 신경만은 현실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게임 내에서도 활용이 된다.

프로게이머, 스포츠 선수, 예술가, 학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직군들이 이따금식 게임 내에 들어와서 정신적인 도야와 수련을 일삼는 이유였다.


릿샤 역시, 그저 취미로 즐기고 있을 뿐이지만 내심 그런 긍정적 작용이 있어 계속해서 접속하고 또 플레이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이 자신의 연구와 학업에 도움이 되는가.


릿샤는 다이어 울프의 등을 밟은 채, 대낮의 산책로 한 가운데서, 범람하는 몬스터들의 파도와 그에 맞서는 인간들의 몸부림을 보고, 세 개 쯤 MP로 이루어진 천연색의 투사체를 만들어내며 한 번 고민해보았다.


음, 아마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단발 머리를 찰랑거린다. 그녀는 아가씨, 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은 체구에 앳되어 보이는 미모이다. 조금 부담감을 가지고 무리를 한다면 어디에 가서 아직도 학생이라고 해도 믿을지 모른다. 아직 대학원생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그것 말고, 10대 학생 말이다.


그녀의 외모에 꼬여드는 남자들은 종종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딘가 취향이 이상한 놈들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었지만. 그녀의 성격은 상당히 드세고, 당찬 면이 있어서 그런 인간들을 잘 피해 오고 물리치며 살아왔다.

동물귀를 좋아하고, 귀여운 인형을 보는 걸 좋아해서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동물 귀 아티팩트를 구해다 종종 쓰기도 한다. 지금은 물론 그런 꼴은 아니지만.


아무 때고 그렇게 다니다보면 NPC들로부터 좀 이상한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아, 물론 아예 특이한 내력을 지닌 수인 종족이라고 하면 뭐 큰 문제까진 아니었다. 그 거짓말을 감당할만한 특화 스킬들이 따로 없어서 굳이 거짓말을 치지는 않지만은.

어쨌든 이곳은 마음에 드는 판타지 세계였다.


거의 완성되어 간다. 순식간이었다. 연산을 해내듯이, 수식을 놓고 종이나 컴퓨터 디스플레이 앞에서 문제를 풀던 순간들과는 다르지만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늘 하던 공부나 연구와 비슷한 점이 많이 있었다.

조금 더 직관적이고, 직감적이고, 약간은 지저분하거나 더 거친 단면으로 계산식의 중간 중간을 토막쳐도 괜찮았다.


MP라는 물질은 찰흙과도 같고, 충만한 유동성과 생명력이 있어서 만드는대로 조물되고 알아서 기능을 갖기에. 오작동 하는 일들이 더 많고, 그 자체로 불발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물론 그만큼 폭발성이 있고 위험한 에너지이기는 하지만.

그런 위험성과 스릴마저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큰 재미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머리 위 부근에는 한기가 서린 음울한 기운이 뭉쳐 있었다. 모두 근본적으로 파헤쳐보면 ‘MP’라고 시스템 AI가 결론을 내릴 무언가로 구성된 투사체들이다.


빙글빙글 도는 소용돌이처럼, 그녀의 머리 위 1m 부근, 거기서 다시 앞으로 조금 몇 발짝 나아간 허공에 생겨난 구체의 무언가다.

가까이 다가가면 스킬의 시전자인 그녀가 아닐 때는 시리도록 차가운 온도를 느끼게 된다. 섣불리 만지기라도 하면 동상을 입을 수도 있었고.

그녀는 네 개의 속성을 다룬다. 더 많이 다룰 수도 있었지만, 주력하고 있는 것들은 네 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재능어린 신체를 부여받아 게임 속 세상을 탐험하기 시작하는 플레이어들은 적절한 공략집의 정보와, 성실한 이행만 있다면 알려진 모든 속성을 얻어낼 수 있기야 하지만, 그에 비례해서 노력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주력으로 사용할 몇 가지에 집중한다. 그 외의 것들도 익혀는 두지만 깊이 파지는 않는다. 획득 조건이 다소 까다로운 경우에는 아예 익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고.


머리가 복잡해지는 속성 술식들의 상관 관계로 게임을 풀어나가려다 보면 결국 가위바위보의 순환에 빠진 것이나 비슷해진다. 어떤 속성도 약점과 강점이 공존했고, 그건 초상 스킬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파훼가 가능할 때가 많은 것이다.

속성도 분명 중요하지만 어떤 분야에 있어서 수준이 더욱 분명한 전투력으로 전환된다.

강한 불은 냉기도 수기水氣도 집어삼킨다.


여러 가지를 익히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플레이 타임과 여러 경험치들을 소모해서 나누어 할당해야 하고, 한 가지를 깊이 파는 인간들보다 성장세가 둔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런 초상 스킬을 다루는 플레이 방식에 특화가 된 특이한 인간, 천재가 아니라면야.


릿샤가 주로 다루는 것은 냉기와 화기火氣, 뇌기雷氣와 풍기風氣였다. 자연계의 원소들을 떠올리라고 하면 분명 앞 부분에 적힐 대중적인 속성들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삶에서 많이 경험하는 것들이기도 했고.


하나는 냉기의 소용돌이로 릿샤의 머리 위 허공을 떠돈다.


하나는 릿샤의 오른쪽 손으로부터 뻗어나온 자리에 화염의 구체가 이글거리면서 세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크기는 일정 이상, 릿샤의 팔뚝만한 지름을 가진 것에서 더 이상 자라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품는 열기와 폭발력, MP는 계속해서 강해지고 점점 더 밀도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 캐스팅하고 있는 트리플 캐스팅의 마지막 물건이 그녀의 왼쪽 손바닥 앞에 생겨나는 번개의 형상이었다. 모두 기본적으로 원형, 구형을 띄고 있으나 그 모습이 깔끔하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그 외곽선이 무너지고 다시 구형으로 돌아오고를 반복하면서 거칠게 유동하는 릿샤의 MP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탁월한 초상술사였고, 높은 의지력을 갖고 있다. 견제나 유격전의 경우에 충분한 이동능력과 순발력 등을 갖고 있었지만 주력은 결국 정신력 계열 스텟을 이용한 초상술전戰이었다.


트리플 캐스팅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초상술이 완성되어간다.


각기 다른 소리와 연출적 효과를 보이면서 커지는 MP체들은 슬슬 다른 이들의 눈에도 띄어간다. 다행히, 말귀가 잘 통하는 놈들이라 릿샤를 공격하는 놈들이 없었다. 릿샤의 생각이었고, 그건 그들이 암살을 하려고 했던 귀족가 일행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갑자기 몬스터들이 기사들을 둘러싸 견제하면서, 그녀와 호아킨이 나타나서 몬스터에 가세하자 로키 캐슬로부터 나온 기사들이나 마차의 호위무사들이 갈팡질팡하다 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얼굴을 다 드러내놓고 나온 뒤 그들을 돕는 릿샤나 호아킨보다는, 전부 거무튀튀한 로브로 행색을 감추고 마차를 때렸던 기사들이 더 위험해보이고 적대적이게 느껴질 테였다.


달가운 일이다. 저쪽도 머리가 돌아가는 인간이 있는 것인지. 혹은 직관적으로 판단을 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상황이 제법 괜찮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세 가지 색으로 빛나고 있는 자연력, 원소의 집합체가 그녀의 신체 주변 허공으로부터 포탄이 발사되듯 날아가기 시작했다.

미사일이 날아가는 모습처럼 추진력을 갖고, 긴 꼬리를 그리면서 MP 투사체들은 방전하거나, 한기를 흩뿌리거나, 혹은 불티를 남기면서 난다.


두 개는 안드레를 제외한 기사단원들이 방진을 이룬 곳으로 날았고, 한 개는 안드레의 등판을 향해서였다.


호아킨을 견제하면서 뒤로 훌쩍 물러나 어느 오크의 대가리와 어깨를 밟으며 자세를 다시 잡던 안드레의 뒤로 아이스 블래스터Ice blaster가 날아가 직격했다.


*


쾅!


귀가 먹먹하다. 안드레는 갑자기 들이닥친 충격에 말을 잃었다. 원래 소리를 지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순간 폐에 있던 공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로브를 입고 있기에 간단한 투사체는 막아주는 효과가 있었다.


아티팩트의 효과를 아득하게 상회하는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등쪽을 강타하는 강렬한 힘으로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뇌가 흔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지근거리에서 공격들을 막아내던 감지술마저 제 때 반응하지 못했다. 릿샤의 초상술이기에 그렇다. 그녀는 기사들과 너무 많은 싸움을 벌여왔고, 그녀가 날리는 초상 스킬의 발사체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큼 MP를 흘리지 않는다. 고요하게 다가오는 암살의 일격과 비슷하다.


주변 기류, 는 아니되 MP의 흐름에 맞추어 딱 알맞게 날려보내는 그것들은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적절한 속도와 방향, 궤도와 약간의 스킬 형성 시의 노하우가 필요한 기술이었고, 스킬로 이름 지어지지 않은 노하우였다.

릿샤는 아직 이렇게 초상 스킬을 쓰는 인간을 그녀 외에는 본 적이 없다. 그녀가 본 이들의 한계가 있으니, 아마 고수들 중에는 의외로 이미 유명하게 통용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안드레가 맞은 무언가는 아이스 블래스트라는 이름의 스킬이었다. 고유 급의 스킬이었고, 그에 어울리는 충격이다. 방호 로브의 MP가 순식간에 0이 되고 방어막이 사라졌다. 그대로 강타당한 등줄기에는 감각이 없는 듯했다.


충격과 소리, 귓전으로 확 뻗어나오는 한기가 서슬퍼렇게 그를 노렸고, 다음 순간엔 입가나 코끝마저 얼얼할 정도로 추위가 다가왔다.

움직임이 조금 느려졌나? 안드레는 그걸 먼저 생각하고 걱정했다.


한 순간에 터진 폭발에 정신이 없었지만 다행히 몸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관절도 근육도, 크게 이상은 없다. 다만 몸 주위에 두르고 있던 기력술이 한 번에 꺼져버렸다. 기사들은 전투 시에 기본적으로 MP를 다루며 초상술사들이 방어 스킬을 익히고 사용하듯이 자신의 몸을 지킨다.


물리 스텟과 장비들이 형성하는 기본적 방어력 위에 덧대어지는 MP로써의 방어력이었고 그것이 중수 이상의 전투에서 핵심이었다.


한 번 사라진 기력술의 방패는 그의 몸을 이전보다 더 무방비하게 세상에 노출시켰다. 안드레는 로브 후드 속을 파고들어 몸 속을 저릿하게 얼리는 듯한 기운에 얼얼했고, 어이가 없었으나 빠르게 움직였다.

멍청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앞에서 다가오던 금색 사자나, 뭐 무엇에라도 당하기 좋았다. 그의 뒤를 노린 배짱 좋은 술사가 누구인 지는 모르겠지만 굼뜨게 행동하다 한 번 더 맞을 지도 몰랐다.


그는 몸의 충격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것처럼 덜덜덜 떨어대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기력의 흐름을 인지했다. 강렬한 초상력 공격에 당하고 나면 이런 현상이 가끔 일어난다. MP는 사용자의 의지력에 따라 움직이는 군사와 같다.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에너지인데, 같은 계열의 MP가 강렬한 힘으로 섞여버리면 순간 의지력이 마비되는 효과가 있다.


무방비에, 급작스럽게 공격을 당할수록 일어나기 쉬운 일순간의 재밍 효과이다. 스킬 중에는 상대의 MP활용을 전문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재밍Jamming 스킬, 디스펠Dispel(n, 떨쳐 버리다)스킬 따위들이 있었다. 이렇듯 사고처럼 일어날 수 있는 정신력 에너지 침식 효과를 의도적으로 구현하는 기술들이었다.


고수 수준의 술사들은 상대의 의지력을 흐트러뜨리는 온갖 방해 스킬과 방어 마법, 공격 스킬을 다각도로 동시 구사하는 난전이 그들의 싸움이 되게 된다.


안드레는 이것저것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지친 육신을 이끌고 오크의 대가리 몇 개인가를 더 밟아서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따르는 기척들이 있었다. 릿샤와 호아킨. 둘은 일단 안드레 챈을 잡아 죽이고 시작할 모양이었다.


운트 작힘과 갈라서기로 한 이상, 이 자리에 있는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원들을 모조리 끝내야 한다. 작힘은 백작은 인망이 없었으므로,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긴 했다··· 고 안드레는 머릿속 한 켠에서 생각했다.


복잡한 뇌리를 애써 정리하며 살기 위해 안드레가 거리를 벌렸다. 효용을 다한 로브가 너덜거린다. 격한 움직임에 그 후드가 벗겨졌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원래의 얼굴 형태는 아니었다. 안드레가 품에 넣고 있는 작은 펜던트 하나는 그의 얼굴 형태를 왜곡해서 상대방에게 전달한다.


분류를 하자면 외형 변신(환상)에 속하는 스킬 효과였다.


안드레의 도망가는 꼴을 두 명의 플레이어가 추격했고, 그 발밑은 오크나 고블린의 대가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몬스터들은 여전히 기사들을 공격한다. 안드레 챈 역시 어그로의 대상이었으므로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으르렁거리며 그 발톱을 세웠지만 재빠른 기사의 몸놀림은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모두 피했다. 그 정도 실력은 되는 작자였다, 십인장이.


제냐와 최태현은 일어나는 꼴을 보며 황망하게 있었다. 사태가 제대로 가늠이 가지 않았다.


‘최태현’은 현재 상태가 복잡하다, 고 나무 위에서 생각했다.


일반적인 퀘스트의 형태는 아니었다. 어딘가 이지러진 형태의 사건 발생이다. 공격이면 공격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이토록 애매한 꼴은 무어란 말인가. 암살자들끼리 분열이라도 한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중간에 운트 작힘 백작의 계획을 알아챈 조력자가 도중에 난입을 한 것인지.


연계 퀘스트라고는 하지만 도저히 의도를 종잡을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시나리오들 또한 있지만, 이토록 난방향으로 전개되며 개발 의도를 알 수 없는 스토리는 지양하는 편이다. 원래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의 성향이라면.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다. 퀘스트 내부에 다른 유저User가 있는 경우.


플레이어가 주체가 되어 선택하는 비련의 시나리오 속 여러 퀘스트들은, 사람과 몹, 다양한 오브젝트와 NPC들간의 상호 교류에 따라 무한한 결말로 이어진다.

이것 역시 그런 작용의 한 가지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추리였다. 최태현은 머리를 굴린다. 그렇다면······


아무리 봐도 운트 작힘의 사병처럼 보이던, 마차를 대놓고 노리던 암살자들을 추격하는 낯선 두 개체가 플레이어이리라. 최태현은 나무 위에서 전황 곳곳을 기감 스킬과 두 눈으로 살피면서 생각했다.


‘제냐’는 지붕 위에 두 발을 딛고 한 손에 비스트 슬레이어를 든 채, 초상 스킬을 캐스팅 하려던 자세에서 멈춰 있었다. 그리고, 별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게임의 성질을 가늠하고 분석할 만한 의지는 별로 없다. 재미있어서 하는 게임이었고, 상황이 닥치는 대로 풀어나가는 퀘스트일 뿐이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제냐는 머물러 있는 로브를 쓴 놈들에게 집중했다. 마차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려던 놈들이었고,


외부에서 온 워메이지인가 싶은 붉은 단발머리가 그들을 타격했다.


그러니까 방진을 이루고 등을 맞댄 채 몬스터 무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애쓰던 로브 뒤집어쓴 놈들 말이다. 거대하고, 유동적이며 제냐로서는 아직 엄두를 못 낼듯한 깔끔한 타격이 투사체로부터 만들어졌다. 쿵, 하고 폭발음을 내면서 화염과 전류가 좌중을 휩쓸었고, 기사들만이 아니라 근처에 있던 고블린 따위의 소형 몹까지 휩쓸면서 MP가 여기저기로 튀어댔다.


여러 방향으로 난반사되듯 투사체를 구성하던 MP가 뻗어나간다. 전류와 화염이 뒤섞이면서 일순간 초현실적인 광경이 소규모 범위에 생성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원들은 자신들이 두르고 있던 MP가 순식간에 줄줄 새어나가고 금방 동이 나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 고 하나같이 생각했다.

그대로 있다면 필패나 죽음이 정해져 있는 결말이었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제냐는 한 방 더 먹여주기 위해 버리듯 옆에 놓았던 장궁을 다시 들고, 철시를 천천이 재어 겨누기 시작했다.


*


“크르르릉!”


사자는 입을 다물고도 으르렁거릴 수 있었다.


안드레는 그런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정말 달갑지 않았다. 사자후獅子吼라고 하지 않던가. 중부 대륙의 평야에는 사자도 서식을 한다. 일반적인 놈들보다 필시 훨씬 거대한 체격의 금빛 사자는, 그 아가리에 도끼 자루를 물고 잘도 그를 쫓아왔다.


“이런-.”


뒷말은 심각한 욕이었다. 안드레는 목지기까지 치미는 욕을 차마 내뱉지 않았다. 단순히, 급하고 숨이 부족해서이다.

운동 부족은 아니었지만, 순식간에 강렬한 충격을 여러 번 먹고 도망치듯 쫓기고 있었다. 호흡이 흐트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기사는 초인이지만 그들에게도 호흡은 있다. 정신이 무너지면 체력은 금방 떨어진다.

그들이 쌓아올린 근력과 신체 능력 역시 사실이기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면 기능은 올라오지만, 이 순간에 그는 굉장히 당황하고 있었다.


‘사자’.


어디서 튀어나온 새끼인가.


안드레는 정신없이 몬스터들이 몰려 있는 그 부근을 벗어나면서 생각했다. 그는 용케도 대담하게 뒤를 처다보며 뛸 정신이 들었다. 슬쩍 고개를 돌린다. 이런 씨-팔. 금빛 사자의 아가리가 바로 코 앞이었다.


“으아아아아!”


안드레는 필생의 잠력을 다 토해내면서 멀리 뛰었다. 마지막으로 밟은 게 고블린의 낯짝인지 뭔지 모르겠다. 그는 몬스터 군대의 대가리 위에서 펄쩍 뛰어서, 그 무리의 바깥, 일반적인 가도의 위로 다이빙을 했다.


부웅, 하고 사자는 아가리를 들이밀며 능숙하게 고개를 휘저었다. 마치 인사를 하듯 유연하게 이리저리 휘는 대가리였는데, 그 옆에 길게 빼어 문 거대한 양날 도끼가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붕붕- 하고 고개를 저을 때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게 난다. 양날 도끼의 칼날에 기력이 묻어 흉흉한 기세가 나는 것을 안드레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 처박히듯 제 몸을 들이박았고, 그대로 앞으로 굴렀다.


안드레 챈은 무술의 달인이다. 기력술을 익힐 정도로 신체를 단련한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소양이었다. ‘기력’, 곧 MP를 물리적 실체에 투입해서 다루어내는 방식은 극한의 고련 끝에 얻어낼 수 있는 비전이었으니까.

콘란드 대륙 내라면, 사람은 현실적인 과학이 말하는 한계 바깥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수행할 수도 있었다.


그의 몸을 휘도는 MP는 아직도 삐걱거리며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생을 수련해 온 신체는 간신히 그의 말을 듣는다. 유연하게 관성을 이용해서 앞구르기를 했다. 튀어 오르듯 구르는 방향으로 일어서 그대로 전력 질주를 시작한다. 칼 하나를 들고 있기는 했지만 자세에 그다지 방해가 되는 편도 아니었다.


뒤따라 오는 사자는 제법 수준이 높다. 강했고, 교활했으며, 무기를 다루고 사자 주제에 기력술을 사용했다. 아마 변신술사이리라.

안드레 챈은 변신술사가 누구인지 아까 전에 알았다.


‘호아킨 팍스’.


운트 작힘 백작이 고용한 용병이었다. 로웰 드버를 지키라고 하면서 뒷전에 둔 사내였는데, 그 인간이 변신술사였을 것이다.

암살의 도중 몬스터가 자신을 공격한 것부터 이상했다.

이상이 아니라, 고의였다면 모두 말이 된다.


어딘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여행을 이어나가던 로웰 드버와 그 근처의 친구들이 기어코 돌아버려서, 운트 작힘 백작을 배반하기로 한 모양이다.

이렇듯 대놓고 작전 과정에서 세슈칸의 대영주를 거스를 줄은 몰랐다. 정말로.


안드레는 달렸다.


그의 뒤로, 릿샤가 빠르게 따라붙는다.

장거리를 달릴 때는 변신술을 이용하고 보법을 즐겨 쓰는 호아킨을 이길 수 없지만 단거리, 근거리에서 릿샤는 호아킨만큼 빠르다. 그런 기동성이 있기에 워메이지로서 완성적인 스타일을 갖출 수 있는 법이었다.


달리는 붉은 머리의 아가씨 주위로 다시금 초상력이 형상을 만들어냈다. 소용돌이던, 이리저리로 이지러지며 튀는 번개건, 화염이건, 혹은 유색의 기류로 보이는 바람의 흐름이건.

릿샤는 움직이면서 캐스팅을 했고, 정밀하게 궤도를 조작하며 마치 유도탄을 날리듯 하나 하나, 스킬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안드레는 죽을 맛이었고,


슬슬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자를 피해 달리고, 그 빌어처먹을 양날 도끼의 검기를 피하면서 안드레는 산발이 된 꼴로 외쳤다. 눈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표정은 상기되었다.

그의 감정은 무엇인가.

감히 세슈칸의 대영주, 백작의 명을 거절한 용병 나부랭이들에 대한 지엄한 분노일까, 배신감일까, 당혹일까.


아무것도 상관은 없었다.


안드레는 사실 자신의 삶의 후반부가 평안해졌으면 좋겠고, 그저 노모와의 마지막 여생을 효자로서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육신의 힘을 쥐어 짜 난관을 피하며 그가 소리쳤다. 토해지는 음성이 걸걸하다.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의 십인장, 안드레 챈의 비명이었다.


“호아킨 팍스! 릿샤 애드윈! 빌어처먹을! 항복한다! 씹새끼들아! 살려다오!”

“······.”


호아킨은 그 이야기를 듣고, 멈출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이렇게 나오나?


근육질의 거한은, 사자의 대가리로 변한 모습임에도 마치 표정이 잘 전달되는 것 같은 꼴이었다. 그 고개가 살풋 갸우뚱했다.


반면 릿샤는, 급하게 거리를 좁히며 안드레 챈을 죽여 없애야겠다는 생각과 집중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으므로, 쉽게 멈추기가 어려웠다.

이미 날려진 투사체, MP로 만들어진 초상 스킬 현상을 제어하는 건 몸을 제어하는 것보다 조금 더 어려웠다. 아니, 비슷할까? 어쨌든 호아킨은 공격의 ‘전’이었기에 금방 멈췄고, 릿샤는 그 소리가 날 때 화염구 하나를 이미 날린 때여서, 멈출 수가 없었다.


아쉽게도 비대해진 파이어 볼이 창처럼 날아가 안드레 챈의 복부를 강타했다.


펑,


하고 사람 몸에서 나면 안될 것 같은 소리와 폭발이 일어나며 안드레 챈이 쓰레기처럼 뒤로 날아갔다.


*

theo-eilertsen-photography-mwlhFUCir_8-unsplash.jpg


작가의말

결단력 있는!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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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 릿샤Rissha의 방 23.08.16 23 3 17쪽
58 57. 사연 23.08.13 32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7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5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6 3 14쪽
54 53. Could you join us? 23.08.05 30 4 34쪽
»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23.08.04 30 4 35쪽
52 51. 굳세어라 안드레 23.08.04 26 4 19쪽
51 50. "허억." 23.08.04 26 4 20쪽
50 49. 달려가는 소시민들 23.08.02 31 4 25쪽
49 48.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어진 23.08.02 27 4 36쪽
48 47. 최태현은 빨랐다. 23.07.31 29 4 25쪽
47 46. 로웰 드버는 결심했다. 23.07.31 34 4 34쪽
46 45. 석별惜別 23.07.30 36 4 25쪽
45 44. 결정의 주체 +3 23.07.29 36 4 45쪽
44 43. 그리턴 자작가에서 그간 23.07.29 29 4 25쪽
43 42. 호아킨 팍스Joaquin Pax 23.07.25 29 3 29쪽
42 41. 사촌 형제 23.07.24 29 3 18쪽
41 40. 로키 캐슬 23.07.24 28 3 20쪽
40 39. 운트Unt의 의뢰 23.07.23 27 3 30쪽
39 38. 그리턴, 갈색 사슴 23.07.23 33 3 29쪽
38 37. 등산 23.07.23 26 3 31쪽
37 36. 트레이닝Training 23.07.23 26 3 32쪽
36 35. 제이미 숄더 23.07.20 28 3 51쪽
35 34. 전진하는 요새 23.07.19 34 3 32쪽
34 33. 강도단 23.07.19 30 3 31쪽
33 32. 붉은 다리 협곡 23.07.19 29 3 34쪽
32 31. 협곡 진입 23.07.15 32 3 31쪽
31 30. 마차 안 23.07.14 37 4 30쪽
30 29. 돌아가는 23.07.13 35 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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