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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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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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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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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3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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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57. 사연

DUMMY

*


"······."


싸늘한 정적이다.


제냐는 그 시간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다른 말이 얼마든지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기로 했다. 아니,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 그 시간을 혼자 되뇌이기에 그렇게 정리한 것이다.


칼젝의 말은,


공격적이지도 누구를 비난하지도, 욕도, 혹은 거친 음성이나 위협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지만 어떤 비수보다 날카롭게 분위기를 잘라내었다.


그 말이 좌중에 뱉어지고 난 다음과 그 직전은, 완전히 다른 시간이었다.


킬 드로얀과 아는 모든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중앙의 법관이었으나, 로키 캐슬과 그리턴 시티에 머물면서 이 자리에 함께하는 많은 이들과 교분을 나눴다.

사내다운 인간이었고, 나름대로 정의감이 있는 법관이었다. 법관이 정의감을 잃지 않기가 참 힘들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제냐 역시 그렇게 느꼈고 생각했다. 그리고 혼자서 웃은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고작 게임 속에서 법관으로 지어진 저 NPC의 직업 정의 의식을 보고 내가 감탄을 하나? 라고 말이다.


그는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권력과 무력, 재력을 가진 이들에 대해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일정한 기준을 갖고 있었다. 법관은 그 기준 위에 자신을 올려놓았고, 그 말은 곧 이 왕국의 어떤 이라도 올려놓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왕실, 사슈나 가는 그 역사와 법의 수호자로서 기능하지만 그들 역시 온전히 법의 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왕가와 왕족에게는 적용되는 법이 또 따로 있었고, 그들은 그 울타리 내부에서 겸허함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더 많은 책임을 지는 자는, 더 많은 권력을 가진다. 달리 말해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지며 태어난 사슈나 가의 인간들은 다른 종류의 책임을 여러 종류 부과받는다.


산슈카 왕국의 어떤 국민도 나라의 질서를 정리하는 일, 내정에 소홀하며 태만했다고 극형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산슈카의 국왕은,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 경우 그 과를 물어 처형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까지 가는 일은 물론 없지만, 또 실현시키기도 애매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법적인 책임은 명문 상 그렇게까지 물리고 있었다.


또 그건 사실 많은 군주들이 갖는 실제적인 책임이기도 했다. 망국의 왕들, 탐욕과 향락으로 얼룩진 인간들이 나라를 개밥그릇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시켜 많은 이들을 비탄으로 빠뜨리곤 한다.

누군가 그 죄를 묻지 않아도, 결국 어마어마한 수의 인간들을 괴롭게끔 한 인간은 그 질고를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왕의 자리에 있다고, 눈 앞에 누군가 칼을 들이밀기까지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도, 그 보이지 않는 책임이라는 건 엄정하다.


당신은 죄의 벌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렇게 형량이 떨어지곤 하는 것이다. 그 죄의 벌이 당장 시행될 수도 있고, 죽기 직전까지 미뤄질 수도 있고, 혹은 내세에서 감당하게 될 수도 있었지만은.

현실의 삶이라는 건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엄정한 면이 있는 것이다. 엄혹한 삶의 잣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겨누어진다. 그건 권력의 높고 낮음 따위, 고작 인간이 떠받들고 정하는 어떤 힘들로 바뀌거나 빗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슈카는 그런 세상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알고 명문화한, '명법'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런 지엄한 법리를 수호하여,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올 지도 모르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상리에 따라 행동하기로 한 자가 킬 드로얀이었다.

그 대쪽같은 인간이 갑자기 바뀔 리도 없기에 어느 정도 믿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킬 드로얀은 자신의 일을 할 것이고, 운트 작힘의 목줄은 빠르든 늦든 조여질 테다.


중앙의 법무부로부터 파견받은 질서의 대리관을 죽이는 일은, 국법과 왕실에 대한 정면 승부의 포고이기도 했으며, 누구도 운트 작힘이 그런 선택을 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이제까지의 일과는 조금 궤가 다른 것이다.


적어도 법무부의 차장관과 장관에게 강력한 위력을 선사하거나, 입김을 넣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서야 덮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법무부는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정통파, 고류파에 속하는 부서였으며 최대한 중립을 지키지만 딱히 신진파 세력들에게 손을 들어줄 이유도 없는 곳이었다.

무슨 배짱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다는 말인가.


한 끝, 발 앞 코 한 자락만 더 넘어가도 곧바로 사슈나 가의 왕이 들고 일어서며 세슈칸의 주인이 바뀔 수 있는 일이었다.

정보의 전달이라는 게 아티팩트가 발달하고 나름대로 견고한 행정 체계를 지닌 이 소국에서 그리 오래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중간 과정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행정권과 실력, 권력, 다양한 요소들을 모두 갖춘 인간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 전달 과정 모두 사람의 손과 입과 귀를 거치니, 모든 중간자들을 완벽하게 포섭할 수 있다면 달리 말해 산슈카 국내의 정보를 통제할 수 있었다.


세슈칸의 영주에게 그런 힘이 있는가?


역사적으로 없었고, 이전의 대영주, 세슈칸 뿐만이 아니라 제국기 산슈카 령의 여러 곳을 동시에 다스렸던 로멜리아 공작가가 비슷한 권세를 가졌을 지 모른다. 다만 로멜리아 가의 가주들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기록은 딱히 없었다.


줄리앙의 머리 회전이 빠르게 굴러갔다.


헤슈나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아미를 찡그렸다.


그리턴 가의 기사, 켄은 속모를 표정으로 입을 다물 뿐이다. 그것이 그의 나름의 추모였다. 그보다 훨씬 많이 킬 드로얀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을 이들 앞에서, 굳이 큰 티를 내지 않는 것.

겉으로 다 드러내지 못할 정도의 파도를 속으로 겪고 있을 이들에게 짐을 더 부과하지 않는 것.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닌 것을 같이 견뎌주는 것.

그것이 켄의 도리였다.


안드레 챈의 경우에는, 조금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운트 작힘 백작, 그의 주인이었던 자가 그런 짓거리를 벌이다니. 아직까지 그의 배신에 대해서 잘 모를 수 있을테니 섣불리 주인이었던, 이라며 단정하는 게 위험하기는 하지만. 어차피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운트 작힘의 행보가 앞으로 그의 안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작힘 백작은, 아마 말도 못하게끔 거대한 권력자를 조력으로 얻은 모양이었다. 세슈칸의 대영주를 수족으로 부리며 뒤를 봐줄 만한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정치에는 비교적 둔한 무부의 머리로도 몇 사람 정도만이 스쳐갔다. 달리 말해 그만큼 유명하다는 뜻이다. 신진파이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국내의 거물들. 후작이나 변경백, 대장군 등이다.


안드레는 그 끔찍한 정적 속에서 눈치를 살피며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찾다가, 견디지 못하고 볼을 긁적거렸다. 생리를 참으면서까지 정적에 동참하기도 어려웠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먼저 말을 낸 건 그래도 연륜이 높은 줄리앙 리스트였다.


"···어찌된 일인지, ···물어도 괜찮겠나."


사정은 알아야 했다. 이미 그들과도 깊게 관계된 것이었으니. 칼젝의 슬픔만을 위로하고 있을 상황은 아닌 것이다.


"···예."


칼젝이 느리고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사내는 별 말도 없고, 감정을 폭발시키지도 않았다. 그와 함께 하는 친위대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고. 아마 이 호텔에 오기 전, 언제가 되었든 어디서였든 자기 나름대로의 폭발을 경험하고 난 뒤인 것 같았다.

추스른 톤으로, 그러나 퀭한 눈매와 피곤에 절은 얼굴로 칼젝이 사정을 소상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사정 설명은 견디기 어려운 끔찍함이었지만, 함께 걸어가는 동료들 앞에서 그것을 숨기다가는 도리어 죽음을 모독하는 일이었다.

칼젝은 그러길 원치 않았다.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호텔 바깥으로 향하는 창문의 커텐을 쳤다. 로비로 향하는 면은 기사를 비롯해 여러 인물들이 진을 치듯 도열했다. 순식간에 장막이 완성되었다.


소근거리는 소리로, 멀리까지 새어나가지 않도록 칼젝이 그냥 거기서 이야기했다. 법무관들을 보호하는 기사들 중 몇이 메어둔 칼집을 빼들어 그것으로 바닥을 쿡, 쿵, 찔러대며 소음을 만들었다.


그 의도를 알아챈 다른 이들도 적당히 몸을 움직였다. 다양한 장비를 차고 있는 이들은 소음을 만들기에 편하다. 도리어 죽이는 것보다 내는 일이라면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었다.


칼젝이 퀭한 눈으로 줄리앙의 가슴팍 즈음을 처다보며, 우울한 톤으로 말한다. 그 스스로는 그것이 침체되어 있는 표정과 분위기와 말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루종일을 넘어서는 동안 늘 그 상태였기에.


"···그러니까···


···


독사는 칼을 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움직이기 훨씬 전부터요. 그리고 존경하는 집사장님, 당신과 두 따님의 집안에 손을 쓰기 전부터도요.

···

우리는 독사의 집 안 사정을 알고 있는 내관 하나를 만나서 소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도 다양한 연줄을 통해 그의 밑천을 털기 위해 노력했고요.

움직임은 거의 완벽하다고 생각했고, 우리를 지키는 호위자들 역시 곁을 떠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만··· 예··· 생각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본격적이더군요.


전투?

그보다는 전쟁에 가깝습니다. 독사가 생각하는 다음 그림은."


'독사'는 법관들이 정보를 나눌 때 '운트 작힘'에 대한 표현으로 자주 쓰는 말이었다. 그리턴 가에 머물면서 이미 익히 들었던 것이기에 법관들의 말투는 이해하기가 편리했다.


별 것 아닌 적당한 암어 몇 가지로도 상당한 정보 누수를 막을 수 있었다. 도청을 하려는 자들도 어쨌든 한 번의 공정은 더 거쳐야 하게 되니까. 혹은 괜한 귀들이 엿듣다가 중요한 곳에 가서 발설하는 데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겪도록 말이다.


"···전쟁이니까 그런 짓거리를 벌이지요."


라고 말하면서 칼젝은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잠시 삼켰다. 사내의 울음이었다. 그는 떠오르는 호흡이나 떠는 발음 따위를 잠시 누르면서 가만히 있고는 말했다.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물론 얻어내야 하는 말들이 어두운 것이다 보니 도시의 그늘진 거리들만을 골라 가기는 했지만은.


···아마 당신들이 말했던 이들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만 독사의 손은 생각보다 더 지독하게 뻗쳐 있었고··· 우리는 우리가 건드렸던 거의 모든 뱀둥지에 그의 수족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


줄리앙의 표정이 굳어졌다. 켄 역시 마찬가지다. 호아킨이나 릿샤, 제냐도.

생각보다 운트 작힘의 위세가 대단했다. 세슈칸에서 대외적으로는 좋은 탈을 쓰고 있을만치, 어느 정도 눈치는 보는 인간인가 싶었지만 생각보다 더 적극적으로 뒷거리를 장악하고 제 야욕을 준비하던 상황이었나 보다.


몇몇 놈들을 부리는 수준이 아니라, 이미 수도 출신의 치안대의 눈이 닿지 않는 모든 곳은 그의 영역이었다는 말이었다.


"···아주 잠시였습니다. 경이 혼자 남겨졌던 시간은.


뒷골목에 있는 여관에 묵고 있다가 고작 몇 초, 혹은 일 분 정도 바로 앞을 혼자 거닐었을 뿐이었는데···

마치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경이 나서자마자 일이 터졌습니다.


당시 여관에 묵고 있던,"


칼젝의 눈이 옆을 향했다. 그들을 둘러싼 자들 중 한 명의 기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체인 발막 경이 2층 창문으로부터 바로 뛰쳐나가 상대를 죽였지만 이미 암살자의 손이 드로얀 경을 덮친 뒤였습니다.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급소를 손상시켰고···

예.

얼마 가지 못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어제 오후 무렵의 일이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로멜리아 일행이 세슈칸에 입성하고, 호텔에 다다라 짐을 푼 뒤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본디 약속이 그 날이었기에, 칼젝을 비롯한 킬 드로얀 일행들 또한 움직이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아주 잠시 일행이 흩어져 대기하고 있을 때 벌어졌다. 저녁이 되기 전, 한적한 뒷골목에서 낮에.


"······."


칼젝이 말했다.


"운트 작힘··· 놈의 뒤에 누가 았는 지 아직 모릅니다. 당장 떠오르는 건 대장군, 신진파의 후작, 변경백 정도··· 각 계파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바로 뒷배에 있으니 이따위 짓을 벌이겠지요."


칼젝은 더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참담한 심경이 그를 감쌌다. 그는 정신적으로 무엇보다 피로한 기분을 느끼면서, 잠시 얼굴음 갈싸며 고개를 내렸다.


잠시간 더 앉아 있었다. 그들이 얻은 정보를 나누고, 일단은 호텔에 모든 일행이 모여 쉬기로 했다.


*


전략은 중요하다. 언제나.


특히 자신보다 체급이 높은 자를 쳐야 한다면 머리를 굴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제냐는 퀘스트의 다음 길을 알아내기 위해 절실하게 궁리해야 했다.

길이 있으니 퀘스트이고 시나리오이다.

플레이어가 뚫을 수 없는 미로를 가져다두고 팔아먹는 자들은, 게임의 기본 요소조차 갖추지 못하고 장사를 시작한 자들이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게임이었으니, 그럴 일은 없을 테다.


가장 단순한 방법이었던 조력자를 구하는 일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운트의 기세만 더 사납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앙 정부에서 직접 파견을 나온 관리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모르는 곳에서의 일이라면 모두 무마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제냐는 혹시나, 이 퀘스트가 내전까지 이어지지는 않겠지, 문득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을 최태현도 마찬가지였다. 일개국 전체가 휩쓸리는 일이라면 지역간 퀘스트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나의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면 자연스럽게 그 주변 지역까지 영향이 미치게 되어 있었다. 역사든 문화 경제, 사회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서로 고리처럼 얽혀 있고 얽힌 기둥이나 밧줄처럼 서로 무게를 나눠 지게끔 되어 있다.


연결된 옆 집이 폭삭 주저 앉는데 다른 집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얼마나 절묘하게, 그 연결부를 잘 끊어내느냐에 따라서 사고에 쉬이 휩쓸리지 않을 수도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아예 영향이 없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차라리 다른 방면으로 수를 써서 이득을 취하는 일은 가능하리라.


도미노가 무너지듯 현재 중부 대륙의 절묘한 균형 따위가 있고, 이 퀘스트가 그.균형 전부를 쓰러뜨리는 단초가 된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까지 커지면서 희귀도마저 고유, 유일 급에서 전설 급까지 간다면 분명 제냐나 최태현이 감당하기 어려운 국면이 올 것이다. 중수 수준의 레벨로는 그런 장면들을 통제하는 일에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런 때가 온다면 얌전히 주도적 위치에서 내려와야 할 테였다. 다른 거물급 NPC의 행동을 보좌한다거나, 다른 고레벨 유저에게 맡겨야 하리라.

그건 재미없는 일이었고, 그러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 깔끔하게 끝내기를 원한다. 이 로멜리아 가의 재흥 퀘스트의 뒷맛이 깔끔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자기가 커버할 수 있는 정도의 인물들, 줄리앙을 비롯한 호위 무사들과 로멜리아 남작 가의 여식들이 적당한 해피엔딩을 얻는 시점에서 퀘스트의 끝을 봤으면 좋겠다. 그 다음 퀘스트로 국면 전환이 일어나며 바뀌더라도, 자신은 깔끔하게 내려오거나 할 수 있도록.

고작 NPC에 불과했지만 이토록 정밀함 이상으로 고도의 인공 지능 캐릭터들과 얽혔다면, ···그래 그건 따지자면 소설을 집필하거나 읽는 일과도 비슷할 것이다.


몰입해낸 이상, 보편적인 가치나 진리에 닿으면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좋겠다. 사랑이나 우정, 행복, 희망, 평안 뭐 그런 가치와 결말들. 소설 속 주인공들과 웃으면서 헤어지고 싶다는 말이었다.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해피 엔딩 비슷한 것으로 끝나면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 조금 머리를 굴려야 할 때다.


제냐는 우울한 칼젝에게 물어 많은 것을 알아냈다.


이를테면 운트 작힘 휘하의 사병 규모 같은 것들 말이다.


칼젝은 작힘 가의 내무관과 연이 닿고 내통하면서 백작 가의 상세한 정보들을 얻어냈다.

동료이자 직속 상사였던 인간을 잃은 칼젝은 어딘가 기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본래 성격은 아닐 것 같았다. 평생을 그러고 있었다면 필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내이리라.


칼젝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이 마쳐야 할 일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대략적으로 제냐가 이해하기로는, 90레벨 중후반 혹은 100레벨 정도가 되는 전사 한 명이 최고위 전투력을 가진 NPC였다. 작힘 가의 주력이라는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의 단장일 것이다.


그 아래로 80레벨대 정도의 부단장을 비롯한 간부진들이 있었다. 십인장 안드레 챈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안드레의 말과 칼젝의 이야기를 종합한 결과 십인장은 7명, 그 위의 삼십인장이 두 명, 부단장과 단장이 있다고 한다. 안드레는 자신이 십인장 중 중간 이상은 하는 실력자라고 이야기했다.


안드레가 자신의 수준도 가늠하지 못하는 멍청이가 아니라면, 십인장들의 수준은 대강 알 수 있었다.


지금 제냐와 함께하는 무리들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깨나 부담되는 숫자였다. 간부급만 11명에 휘하 일반 단원들이 6-70여 명이다.


일반 단원들은 간부진에 비해 확실히 실력이 낮으며 제냐를 비롯해 최태현, 호아킨과 릿샤는 편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턴 가의 갈색 사슴 기사단원들도 그다지 약한 자들은 아니었다. 작힘가에 비해 숫자가 조금 적을 뿐이지, 평균적인 수준 자체는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워메이지 둘과 로웰 드버는 강력한 전력이다. 도심 내에서 마물술사가 진가를 발휘하기는 까다롭기는 했지만. 정말 수를 쓰고 싶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세슈칸은 자유 도시였고, 몬스터 테이머들도 평범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일시적으로 지배를 받는 마물들을 반영구적인 테이밍 몹으로 소개한다면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다.


작힘의 눈을 피하고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여러 명이 따로 번거롭게 들어와야겠지만 말이다. 로웰이 부리는 몬스터들을 한 마리씩 이끌고.


아무래도 전면전 따위는 어렵겠지만, 객관적인 비교는 해서 나쁠 게 없다. 어차피 국면이 최악으로 치달으면 믿을 수 있는 건 당장 가진 실제적인 아군의 전력 뿐이다.


작힘 가가 가지고 있는 엘리트 병력은 기사단 뿐이 아니었다. 그리턴 가에 워메이지, 공격적인 초상술사들이 있듯이 그레이 하운드를 보조하는 술사들이 여럿 있었다.


거기다 따로 훈련받은 중보병, 중기병의 숫자가 상당하다. 회색의 고성을 지키는 병력들의 수만 해도 일 천에 다다를 것이다. 거대한 세슈칸을 다스린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수일지 몰랐지만, 어차피 도시의 치안 유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투력은 정규군에서 빠져 나온 치안대가 감당한다.


다시 말해 작힘 가의 사병들은 온전히 가문의 일만을 위해 기동력 있게 움직일 수 있는 프리 롤의 대기조라고 할 수 있었다.


만일 그리턴 가가 본영을 포기하고 모든 전투력을 투사한다면 맞설 수 있기는 하리라. 그들 또한 산 위의 대도시를 가졌고, 산 위이기에 더욱 더 단련된 정병들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외의 것, 전면전이 되었을 때 수도 출신의 치안대가 어떻게 움직일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단언컨데 전면전은 무리다. 소수의 침공으로 빠르게 주요 인물의 신변을 제압하고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으리라.

아니, 사실은 싸우지 않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좋았지만.


칼젝은 우울함과 비통함, 분노와 복수의 칼날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제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느껴본 바로는 그러했다.

운트 작힘이 어느 정도의 뒷배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법무부 소속의 사무관으로서, 동료의 죽음을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 임무를 내린 차장관의 지지나 도움 정도는 받을 수 있으리라. 그보다 높은 권력자나 유력자가 있어 일이 어렵게 된다고 하더라도. 일단 시도는 해보아야 할 것이었다. 누군가가 죽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진상은 밝히고, 또 그 죽은 이가 자신의 동료이자 팀, 아군이었다면 자신 역시 목숨 정도는 걸어야만 했다.


칼젝은 그런 식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 노력한다.


제냐는 며칠 정도, 정확히는 이틀간 비련의 시나리오 속에서와 바깥에서 방학을 즐기는 동안에 계속 고민을 했지만 마땅한 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냥 들이 처박아야 하나······.'


하는 생각만이 자꾸 떠오른다.


칼젝을 비롯해서 남은 사무관들은 일단 행동을 함께 하기로 했다. 세슈칸에서 급보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고, 연락용의 아티팩트 하나를 구해서 수도의 법무부쪽으로 지난 소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거리가 깨나 있었기에, 그리고 그리 고급의 용품이 아니었기에 연락할 수 있는 양은 제한적이었다. 더 많은 양의 일, 더 큰 현상, 더 놀라운 이적에는 그만한 SP가 소모된다. SP를 인위적으로 가용하게 가공한 MP로 만든다면 그것은 곧 돈이나 다름 없는 말이었다.


비용상의 문제로, 또 보안상의 문제가 겹쳐 있었기에 세슈칸에서 수도 법무부 차장관 자리로 직접 전할 수 있는 말들이 많지 않았다.

칼젝은 조심스레 말을 골라 음성으로 문장을 보냈고, 반대편에서 수신 확인을 알려왔다.

회신을 곧바로 받고 싶어도,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의 한계로 답장을 받거나 길게 대화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운트 작힘의 계략으로 킬 드로얀이 살해당했다는 말만은 전했으니, 만일 차장관이 움직일 수 있는 처지라면 최대한의 지원을 보내올 것이다.

만일 상상 가능한 최악의 경우, 그러니까 법무부의 장관이나 그 직속 고관, 왕실 인사나 대귀족 따위가 운트 작힘의 뒷배라서 아무런 연락도 지원도 오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칼젝은 로멜리아 일행과 행동을 함께할 생각이었다. 죽어 부서지더라도 말이다. 그는 어느 한켠에서는 차라리 그것을 원할지도 모른다. 지독하게 말한다면.

큰 슬픔과 비통함은 어떤 사내에게 그런 식으로 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결단이나 각오가 섰을 때 한 명의 인간은 수 만 명의 대군이 가로막고 있는 길로도 망설임 없이 걷기도 한다.


죽음을 각오했다면, 적이 열 명이든 일 억 명이든 관계가 없어지는 법이다.


제냐도 뭐, 그런 스토리와 캐릭터들의 감정적 흐름을 보면서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단순히 노인 하나와, 아녀자 두 명을 도와주는 일이었을 땐 자신이 게임 오버의 위기에 처한다면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점차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이 게임 속 소설에 몰입하자 제냐는 슬슬 이것이 어떤 운명이나 로망이라고 느꼈다.

이 정도 부근에서 게임 오버가 된다면, 그것만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게임을 충분히 잘 즐긴 것이라는 식의 생각이었다.


나쁘지 않은 결단이다. 사람은 결국 하나의 목숨을 갖고 태어나고, 그것을 걸 곳을 영원히 찾지 못하는 사내만큼 쓸모 없는 존재도 달리 없었다. 목숨을 걸 때에야 얻게 되는 것들도 있었고.

세상은 대가의 지불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라서, 적어도 비슷한 가치를 가진 것을 내걸어야 다른 무언가를 얻게 된다.


생명과 그 비슷한 선상에 있는 가치들을 얻기 위해서는, 얻으려는 자 또한 역설적으로 생명을 내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게임 속에서 해피 엔딩을 얻으려고 한다. 제냐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어떤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게 그것을 선사하고 싶다면, 게임 속에서의 종말, 곧 게임 오버 정도는 각오해야 말이 되리라.


호텔에서 묵는 시간이 지나갔다.


많은 사내들이 바삐 움직였다.


굳건한 고성, 천 년 하고도 수백 년 전에는 로멜리아의 것이었던 그 건축물은 그동안 당연히 변함이 없었다. 요동도 없고.

그 내부에 있는 가주의 심정까지 그랬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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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동료의 죽음은 늘 슬픈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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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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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 릿샤Rissha의 방 23.08.16 23 3 17쪽
» 57. 사연 23.08.13 33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8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5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7 3 14쪽
54 53. Could you join us? 23.08.05 30 4 34쪽
53 52. 그는 그렇게 외치기로 했다. 23.08.04 30 4 35쪽
52 51. 굳세어라 안드레 23.08.04 26 4 19쪽
51 50. "허억." 23.08.04 26 4 20쪽
50 49. 달려가는 소시민들 23.08.02 31 4 25쪽
49 48. 갈색 사슴 기사단의 방어진 23.08.02 27 4 36쪽
48 47. 최태현은 빨랐다. 23.07.31 29 4 25쪽
47 46. 로웰 드버는 결심했다. 23.07.31 34 4 34쪽
46 45. 석별惜別 23.07.30 36 4 25쪽
45 44. 결정의 주체 +3 23.07.29 36 4 45쪽
44 43. 그리턴 자작가에서 그간 23.07.29 30 4 25쪽
43 42. 호아킨 팍스Joaquin Pax 23.07.25 29 3 29쪽
42 41. 사촌 형제 23.07.24 30 3 18쪽
41 40. 로키 캐슬 23.07.24 28 3 20쪽
40 39. 운트Unt의 의뢰 23.07.23 27 3 30쪽
39 38. 그리턴, 갈색 사슴 23.07.23 34 3 29쪽
38 37. 등산 23.07.23 26 3 31쪽
37 36. 트레이닝Training 23.07.23 26 3 32쪽
36 35. 제이미 숄더 23.07.20 28 3 51쪽
35 34. 전진하는 요새 23.07.19 36 3 32쪽
34 33. 강도단 23.07.19 31 3 31쪽
33 32. 붉은 다리 협곡 23.07.19 29 3 34쪽
32 31. 협곡 진입 23.07.15 32 3 31쪽
31 30. 마차 안 23.07.14 37 4 30쪽
30 29. 돌아가는 23.07.13 35 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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