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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점퍼Jumper, 순간이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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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2.09.27 18:20
최근연재일 :
2024.06.2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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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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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84.

DUMMY

김민서는 어느 집에 와 있었다.


늦겨울. 얼마 전에는 또 눈이 내렸다. 2월 중순도 지나고 하순이 시작되는 무렵. 길었던 겨울의 끝이 달력 상으로는 보인다.


추운 날씨를 뒤로 하고 저녁 무렵에 초대를 받아 오게 된 식사 자리였다.


겨울의 해는 빨리 져서, 어둔 밤거리를 버스를 타고, 걷고 어쩌고 하며 지나다 보니 도착을 했다.


낯선 곳은 아니었다. 익숙한 자리. 그리고 익숙한 대상이 있는 곳.


그는 입고 온 코트의 깃을 여미며 종종 걸음으로 걸어와 집 안에 이르렀고, 문을 열며 반겨 준 친근한 이의 소개를 받아 집 안 거실의 식탁에 앉아 있는 참이었다.


맞은 편에는 중년을 넘어 장년을 지나는 남성. 네모난 식탁의 다른 변에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성이 있었고.


장년 남성의 옆자리에 그가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사실, 두 어른의 낯빛도 눈에 익은 것이었다. 오며가며 본 기억이 있었다. 어쨌든, 이 집안에서 가장 익숙한 사람일 그녀와는 오랜 친구였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져 온 인연이었다. 그 전부터 이래저래 투닥거리며 지내면서 놀 때 서로의 부모님을 뵌 적도 있었다.


민서는, 아버지의 옆에 있는 수정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그를 처다보았고. 민서는 아무래도 난처한 기분을 숨기기가 힘들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마침 비슷한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아, 그래. ‘여기는 그래도 분위기가 평화로운 집안이구나’, 하고 민서는 생각했다.


부모님은 두분 다 정갈한 외모에, 실제 나이보다는 주름이 적은 모습이었다. 안면이 있는 사이였음에도 유달리 오늘은 어색함이 느껴져서, 뭐라고 말을 못하고 반찬만을 집어 먹었다.


직접 하신 건지, 혹은 어딘가 맛집 요리사의 솜씨인지 모를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다. 고기찜, 닭볶음탕, 갖은 전, 나물 무침 등. 식탁을 보면 그래도 문전박대를 당하는 분위기는 아닌 듯한데···.


한참을 뜸을 들이던 장년의 남성,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김성헌이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눈이 크고 눈썹이 짙은. 약간은 희끗한 머리마저 분위기가 있는 편이었다.


“민서 군.”


낮은 음색이었지만 듣기에 정다운 면이 있는 목소리였다. 민서는 약간은 안심했다.


“음, 예.”


마침 무언가를 뜯고 있던 참이라 입에 있는 것을 삼키고 대답했다.


성헌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한다.


“음, 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이라네.”

“어, 네. 들은 적 있습니다.”


뜬금없는 말처럼도 들렸다. 어른이 하는 말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고개만 끄덕였다.


확실히 수정이 종종 얘기한 적이 있었다. 애초에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녀는 일요일에는 교회를 갔고.

제법 친한 친구였던 민서 역시 익히 아는 사실이다. 최근에도 그녀를 보기 위해 그 자신도 갔었고.


“우리 딸이랑 사귄다고 들었는데, 맞나.”

“네, 넵. 친하게 지낸 지는 꽤 됐고··· 얼마 전부터입니다.”


고작 10여 일 정도 지났다.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관계성이 변한 지.


“다른 건 뭐 알아서 잘 할거라 믿는데···. 둘이서 진지하게 긴 관계를 생각하고 있다면 해줘야 할 게 하나 있네.”


큼. 에둘러 말하는 말에 수정이 뭔가를 마시다가 기침을 했다.


‘무엇인지요, 나으리.’ 정도 되는 태도로 민서가 그의 말을 기다렸다. 괜히 많은 말을 한다고 도움이 될 것은

없었다. 특히 어른과 대화를 할 때는.


“자네 집안 어르신들까지는 아니어도.”


성헌도 잠깐 말을 멈추더니 뜸을 들였다.


“자네는 이제부터 매주 교회에 출석해서 일요일 예배를 드려줘야 하네. 우리 딸과 사귀고, 더 나아가 진지한 관계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면 말이야. 가능하겠나?”


‘어······ 예.’ 민서는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나 뜸을 들이고 긴장을 하던 것에 비해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나 마음의 부담감이 드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고, 그녀를 매주 일정한 장소에서 본다고 생각한다면야 뭐.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고,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단박에 매주, 하루의 일과를 결정해서 철칙으로 삼는다는 게 어렵긴 하겠지만, 결국 본론은 무교에서 개종을 하라는 말일 것이다. 매주 그렇게 하라는 행위에 대한 말은 말이다.


생각보다 단순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김성헌이 도리어 맥이 빠졌다.


"그럴 수 있겠나? 평생?"

"어, 예 뭐. 그러죠."

"......."


김성헌은 잠깐 말을 잃더니, 곧 푸하하 하고 웃어보였다. 활짝 웃는 모습에 식탁에 흐르던 긴장감이 풀어지는 것도 같았다. 애초에 있었는가 싶었던 위압감이었으나, 웃지 않던 어른이 웃는 것은 그래도 앞 자리에 앉은 젊은이로서는 한결 편안해지는 변화였다.


"시원시원하군. 좋네. 그것만 지켜주면, 허락하지. 둘이 알아서 잘 해보라고. 어쨌든 우리 집안은 기독교를 믿고 있고, 이 집안에 들어올 사위라면 역시 그래야 한다네. 자네 역시 그러리라 마음 먹었다고 생각하겠네. 그래도 되겠지?"


그는 굳이 한번 더 자세하게 말을 건넸다. 민서 역시 그런 말이라고 들었으므로, 한번 더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그렇게까지는 이르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수정이 들릴락말락하게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성헌이나 민서는 들었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어떤 일을 하거나 생각할 때는 마지막까지 염두에 두는 것이 올바른 염려일 것이다.

딸 아이가 남자 친구를 데려왔다고 한다면, 사윗감으로서는 어떤가 한 번 생각해보는 게 아버지의 심정이었다.


"네 뭐. 그런 말씀이신 걸로 새겨 들었습니다."


민서가 조용히 말하자 옆에 있던 어머니가 살풋 웃었다. 아무래도, 환대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의 속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미소나 표정 정도는 볼 수 있었다. 민서는 누군가의 속내나 기분에 대해서 단순하게 생각하는 편이었고.


"편히 들지. 식탁 앞에서 내가 너무 분위기를 잡았나."


성헌의 말에 민서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면서 마저 식사를 마쳤다.


화목한 분위기의 집안이었다.


밝게 켜진 실내등의 광량만큼이나, 어둔 구석도 적고 서로간에 사이가 정겨운. 모든 가정들이 늘 이런 평범한 모습을 가지지는 못한다. 마음만은 뭐 어디나 비슷하겠으나. 삶의 질고가 눈으로 보이는 형태로 들어나 같이 있는 것조차 소원한 가정도 있는 법이었다. 민서의 집은 어떤가, 그는 스스로의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것보다는. 이럴 때도 있었지만 다소는 서로에게 섭섭한 구석도 있고, 소원할 때도 많은 듯했다. 그가 아들로서 살갑게 굴지 못했기에 그럴 수도 있었고. 책임감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외동 아들로서 영 부모님께 친근하고 싹싹하게 굴지 못했기에 그랬을 수도 있고.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의 생각에는 말이다. 그림에 그릴 것처럼 한 번 다투지 않고 하하호호 사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강한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아무튼 민서는 수정도 마음에 들었으나, 그녀의 부모님에게도 마음에 들었고, 그 역시 두 어른이 인자해 보여 속 깊은 애정이나 존경을 가지기 쉬웠다.


어딘지 이런 평화로운 한 때를 즐기다 보면 괜스레 눈물이 맺힐 것 같은 기분이 들고는 했다. 평범함이란 늘 감사한 일이었다. 그것들을 느낄 수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연말연시, 고요한 밤 아래에서 두런두런 정겨운 담소를 나누는 모임은 언제나 추억이 된다. 민서는 서울에서의 친밀한 공동체를 하나 더 얻은 것 같은 생각에 푸근함으로 겨울의 말미를 채워냈다.


*


글라이더Glider라는 사내가 있었다. 조직의 점퍼 중 한 명이었고, 굳이 전투 요원과 비전투 요원을 가른다면 전투 요원이었다. 개인적인 근접 교전 능력이 그렇게 막강한 편은 아니었다. 필요에 의한 호신 정도가 가능한 수준.


그러나 그와 별개로 다양한 임무들을 소화하기 위한 신체적 능력과 적응력은 놀라운 편이었다. 그의 주된 임무 수행 환경은 공중이었다.


점퍼는 위치 좌표만 알고 있다면 어떤 곳에든 침투가 가능하다. 아무리 삼엄한 경비 체계를 만들어낸 요새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두꺼운 방벽으로 주위를 두른 벙커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정확한 위치 데이터가 없다면 그 곳으로의 침투는 불가능하다.


물론 실물로 거대한 크기의 요새를 볼 수 있다면, 점프의 시도를 이용해 내부 정보를 읽어내는 꼼수로 아주 시간을 들여 침투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점퍼들이 그런 수를 쓸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어쨌든 잘 만들어졌으며 심지어 정보의 제한을 잘 해낸 철저한 요새들은 점퍼 조직의 입장에서도 함부로 들어가기가 어려운 지역들이다.


그러니까, 맵 메이커가 필요했다. 점퍼들이 안정적으로 침투할 수 있게 최초에 요새에 들어가서 내부 정보를 파악할 말이다.


다양한 특작 임무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까다로운 포지션이었고, 갖은 종류의 기발한 재주들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방법들은, 점퍼 조직과 연관된 기술 개발소에서 만들어 낸 특수복과 기구를 이용해 공중에서 침투하는 일이었다. 레이더 상으로 흔적이 남지 않는 스텔스 기술의 무동력 글라이더를 이용해 중력과 대류를 따라 주욱 내려간다.


하늘에 자유로운 궤적을 그리며 아래로 뻗어나가, 지붕이 없는 요새라면 그대로 침투해 들어가고, 점프를 이용해 내부에서 활동을 개시한다.


가슴께에 부착하는 작은 비쥬얼 로그 장치를 이용해서 360도 전경의 맵 데이터를 조직으로 보내고, 실시간으로 3D맵을 제작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보안 기기나 사람들의 눈에 걸리지 않도록 은밀하게 행동하면서 빠져나오면 되는 일인데, 보통은 불가능하고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난이도의 임무였지만 점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보다 가능한 일로 바뀌게 된다.


천장이나 빈틈이 없는 외벽이 있어 일반적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환경이라면, 폭약을 비롯한 다양한 기구들을 사용해서 침투를 한다. 물론 흔적이야 남지만 단기간 내에 내부 정보를 얻게 된다면 이후의 임무가 훨씬 수월해지는 게 당연했다.


어느 독재 국가의 비밀 요새나 선진국 진영에서도 타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만들어 둔 벙커들 따위들의 내부를 파헤치는게 그의 일이었다.


존 카메론, 이라는 이름의 미국인 남성이었고, 밝고 쾌활한 웃음이 인상적인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의 청년이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였으나 나이보다는 어리게 보이며, 만나는 이들에게 늘 즐거운 인사를 전하며 신변잡기를 떠드는 습관 때문에 조직 내에서도 친근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리시버와는, 각별한 사이이기도 했다. 주로 그가 뚫어 놓은 요새의 맵 데이터를 통해서 그가 침투를 하거나, 침입 작전에 동반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기에.


'마스터'라고도 불리는 홍인수는 주로 온전하게 데이터가 뽑혀진 임무 장소에 투입이 되어 마무리 소탕을 하는 역할이었다.


그런 고로, 글라이더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


23년 2월 말, 겨울의 끝자락.


미대륙 유타 주의 황야에는 인적이 드문 넓은 장소가 즐비해 있었다.


사람들의 손길이 영 닿은 적이 없어 보이는 끝없는 황야 지대. 지도 상으로도 별 것이 없다고 나오는 개중 어딘가에는 비밀스럽게 지어진 요새 따위가 있었다.


허름한 목책으로 만들어진 부실한 공간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협곡 내부에 지어진 규모 있는 장소였다. 번듯한 콘크리트 외벽으로 외부와의 단절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협곡의 틈 사이, 요새의 천장이라 부를만한 곳에는 투명한 유리막이 쳐져 있었다.


유리막의 안쪽에는 황야의 절벽이나, 협곡 내부의 바닥 색깔과 비슷한 톤의 천이 덧대어져 있어서 하늘에서 바라보면 쉽게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넘어갈만한 형상이었다.


고층 빌딩 따위에 사용되는 고강도의 유리 소재였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내부에서 기거할 수 있는 정도의 넓이였다. 척박한 땅. 어딘가에서 자재들과 여러가지 자원들을 조달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지어진 요새는 실제로 사람들이 기거하는 곳이었고, 쥐도 새도 모르게 어느새 지어져 황야의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땅에서 정체불명의 구조물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들키지 않는 일이란 굉장히 요원한 일이었다. 위성 사진이나, 공중을 가로지르는 여러 비행체에서의 관찰에도 결국에는 걸리게 되어있었다. 어설픈 위장이 절대적인 안전책은 되어주지 못했다. 당장 하릴없이 미국 국토를 샅샅이 뒤져보거나 하는 인터넷 내부의 폐인들도 많이 있었고.


주 행정부 당국이나, 그에 관련한 치안 조직에 연결이 되어 비밀스럽게 만들어진 요새의 정체가 대강 파악이 되었다.


내부에는 여러가지 고등 종교들이 혼재되고 제멋대로의 종말론주의 사상이 합쳐진 사이비 종교의 신봉자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현대적인 시설 내부에 약 이백여 명의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고, 대부분은 유타 주의 미국인 시민들이었으며 몇몇은 해외 국적의 인물들로 보였다. 자세한 내부 사정을 알기에는 또한 다양한 절차와 인력 투입이 필요한 일이었고, 외부적인 수사나 추리로 그들이 품고 있는 사상이 지극히 급진적이며 위험도가 높다고 판단이 되었다.


그들 내부적으로도 유혈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고, 시간을 들여 그들의 사상이 깊어진다면 반사회적인 테러 행위의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근시일 내에 세상에 종말이 찾아오며, 자신들의 사이비 사상을 믿는 이들의 손으로 다른 이들을 이승 하직하게 해준다면 그만큼의 숫자를 내세의 구원으로 보내줄 수 있다는 흐름의 이야기가 그들이 믿는 종교의 내용이었다.


그것이, 단순히 이야기 속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사회에서 그렇게 행동하려 한다는 점에서 지독한 위험성이 있는 부류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낌새를 얼마간 살펴보다가, 겨울의 끝자락에 대대적인 사건을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온다.


존 카메론은 그런 사이비 종교의 기지가 있는 황야 위를 날고 있었다.


*


황야.

하늘.


아래로는 적색의 대지가 펼쳐져 있었고 위로 까마득하게 푸른 하늘이 시야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장면을 그려넣고 있었다.


그 가운데 허공. 지면에서 바라보면 까마득한 높이의 고도에 작은 점만한 크기의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제법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르는 그것은 사람 정도 덩치의 물체였고 가까이로 시야를 당겨본다면 그야말로 한 사내였다.


특수한 빛처리가 된 수트를 입고 유리같은 투명한 소재의 글라이더의 아래에 매달린 남자였다.


허공을 유영하듯 빠르게 움직이는 그는 바람을 가르며 활강한다. 지금보다 다소 더 고도가 높은 자리에서 시작한 비행은 미끄러지듯 선형의 움직임을 보이면서 낙하한다.


그 목표지는 지상의 한 지점이었다. 주욱- 허공에 긴 선을 가로로 그려내며 움직이는 물체.


특수한 고글과 플라스틱 마스크 따위를 끼고 있었다. 머리까지 가리는 수트가 그의 얼굴만 빼놓고 온 몸을 가리고 있었고.


허리에 채운 고형의 벨트로 글라이더와 연결되어 있었고, 양 손으로 그 손잡이를 조종하면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에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그야말로 비행하기에 좋은 날이다. 기온도 적당하고. 물론 고공에서 고속 활강을 주욱 하고 있다면 다소 추워지기는 하지만, 수트 내부의 체온은 유지되고 있었다.


사람 하나 없는 까마득한 황야의 위를 날면서, 정해진 포인트로 움직인다.


존 카메론.


이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공간을 홀로 유영하면서 여행을 한다. 단순한 관광을 위한 비행은 아니었고, 정해진 목적이 있는 여정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비행이었다. 생각보다는.


왜냐하면, 그가 출발한 지점은 지금 날고 있는 고도보다 조금 더 높은 허공에서부터였으니까.


그는 점퍼 조직의 점퍼로서, 자유롭게 허공을 움직이면서 선형이 아닌 마구잡이로 뛰어넘는 동선을 보이고 있었다. 허공에 갑자기 나타나서 선을 잇다가 어느 한 순간에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다시 나타나 이어지는 식으로. 펜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어린아이가 무작위로 그려대는 선처럼 보일 것이다.


얼마간 바람을 가르며, 날카로운 대기의 한 가운데로 질주하던 그는 마침내 목적지가 눈에 보이자 방향을 아래로 슬슬 꺾었다.


황야의 어느 협곡 지형. 그 바닥 또한 물도 없이 메마른 계곡이었다. 바깥에서 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평지의 틈바구니 속에는 대형의 현대 시설이 있었다. 어떤 자금으로 자재를 조달해서 만든 건지 잘 알 수 없지만, 본격적인 본부 기지 시설처럼 보이는 건물이다.


그 위는 주변 광경의 색과 비슷한 것으로 칠해 놓아서 일견 찾아내기 힘들었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고서 온 뒤 바라본다면 그래도 어색함을 금세 눈치챌 수 있는 정도였다.


전체 면적을 바라보는 거시적인 탐색이나 피할 수 있을 법한 눈가림이었다. 존은 자신의 목적지를 발견하고 그리로 날고 있다.


대기를 가르는 압력이 제법 거세다. 알맞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점프를 사용해 공중에서 모습을 감추고 다시 쓸만한 자리로 이동을 한다. 점프를 사용하는 시점에 맞추어서, 몸을 뒤틀며 손잡이를 들어 올리면 일시적으로 글라이더를 든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글라이더의 무게를 자신의 힘으로 지탱하는 순간 즈음에 맞추어서 이동을 했고, 다시 그 물건과 함께 알맞은 방향으로 나타나 활강한다. 그렇게 몇 번을 이동한다.


존의 시점에서 한참이나 먼 곳으로 보이던 협곡이 점차 커져왔고, 어느새 알맞은 위치에 다다랐다. 갈라진 틈새 아래에 기지가 있고, 그 틈새의 위쪽을 넓은 유리천장으로 가려둔 형태였다. 협곡 내부로 글라이더를 이끌고 들어가 그 사잇길의 비행을 할 필요가 있었다.


글라이더Glider, 라는 코드 네임을 가진 점퍼는 자신이 다루는 도구를 마치 제 몸처럼 움직이면서 유연하게 비행했다. 소형의 비행체는 대류에도 영향을 많이 받고, 고속 활강 시 외부 충격으로부터 노출되어 있었지만 베테랑의 손에 기구가 들어간다면 어떤 장소에서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가 찾아온 기지에 별다른 대공 감시 체제는 없는 것 같았다. 혹시 전자 레이더 장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조직이 만들어낸 첨단 이상의 기술력이 들어간 비행 기구는 스텔스 기술을 포함하고 있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기지의 근처로 주욱 내려가며, 그가 협곡 안쪽으로 접어든다.


거친 절벽의 표면과 바뀌는 대기가 그를 반겼다. 양 옆이 거대한 벽으로 막히자 드넓은 하늘에서와 청각적인 느낌도 달라졌다.


적막한 계곡 속. 휘모는 선명한 바람 소리만이 들리는 곳에서 글라이더는 고독한 비행을 이어가며 이윽고, 기지의 코앞에 다다른다.


회백색의 담벽으로 막혀 있는 시설물들의 집합이었다. 높다랗게 지어져 인력으로는 오기 힘든 매끈한 성벽같은 둘레다. 다만 지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내부로 파고들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위로는 유리천장에 천 따위를 덧대어 가리고 있었으므로, 수직 방향의 직사 광선은 막혀서 비교적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현대 도시의 흔한 병원 건물, 혹은 기숙사 건물처럼도 보이는 5층 내외의 시설들이 다양하게 늘어져 있다. 개중 한 가운데에는 가장 높은 건물이 있었는데, 첨탑처럼 우뚝 솟은 10여 층은 되어 보이는 빌딩이었다.


존은 그 내부로 파고들면서 순식간에 전경을 파악했고, 곧 그가 가슴 둘레에 빙 둘러서 끼고 있는 초소형의 카메라들이 모습을 기록하고 있었다.


성벽처럼 지어진 경계를 넘어 시설물들의 내부로 들어가기까지도 아무런 반응은 없었다. 기계적인 방비는 따로 없는 모양이었다. 그 건물들의 내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몰랐지만.


글라이더는 이름 그대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리고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에, 바람을 타고 들어가 안착했다.


첨탑처럼 생겼다고는 했지만 시설물들 중에서 우뚝 솟은 형상을 비유한 것이었고, 그 옥상은 평범한 건물의 옥상처럼 평평했고 또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가 글라이더를 접고 내려앉기에는 충분하다.


휘이익. 하고 바람이 지나치는 소리와 함께 글라이더가 빠른 속도로 그 옥상에 다가선다. 글라이더, 존은 옥상의 위 10여 m위에 다다른 순간에,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듯 선회를 했다.


손잡이를 돌리듯 조작을 하고, 단순한 움직임 뒤에 양 옆으로 벌리자 글라이더의 양 날개가 가운데에 빈 공간을 두며 크게 벌어졌다.


가운데로 벌어진 틈으로 공기가 새면서 순간적으로 저항이 많이 적어졌고, 그는 그대로 몸을 둥글게 말며 체조선수처럼 공중에서 머리를 아래로 치박다가 다시 원심력을 이용해 올라선다.


한 바퀴 도는 동작을 하는데 글라이더의 날개 역시 마치 유연한 망토나 천처럼 성질이 변화한다. 다양한 모드를 가진 물건이었다. 합체가 된 상태에서 빳빳하게 날개 역할을 하도록 경화 모드가 있었고, 안착할 때에 나부끼는 천처럼 구는 모드가 있었다.


그대로 그는 한 바퀴 돌며 점프를 했고, 한 호흡 뒤. 공중제비가 완성될 무렵 그 위치에서 모습이 사라졌다.


후욱, 하는 점프 특유의 소리와 함께 건물 옥상의 위에 그가 자리를 잡는다.


글라이더는 흐물흐물해졌으나 무게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경량의 소재로 지어졌대도 그 뼈대나 날개를 이루는 천같은 물질 등을 다 더하면 그래도 깨나 묵직한 느낌이다.


그는 그것을 옥상에 멈춰선 채로 익숙하게 말아서, 백팩처럼 만들어냈다. 뼈대나 골격 역시 접이식이었고, 몇 단으로 내부로 접혀 들어가기도 했다. 요리조리 골격을 맞추고 구성 자재를 다 뭉치자 그야말로 배낭같은 모습이다.


그것의 끄트머리에서 작은 끈 따위를 버튼을 누르며 뽑아낸다. 배낭의 어깨끈처럼 주욱 뽑아서 어깨에 걸고, 다시 배낭의 아랫 부분의 버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답답했다는 듯, 일체형의 수트의 머리 부분을 뒤로 벗겨내었다. 후드티의 후드같은 것에서 머리를 빼내고 나자 다소 땀에 젖은 머리칼이 후두두 흩어졌다.


검은색 일색의 수트였으나, 몸에 어느 정도는 달라붙고 어느 정도는 다양한 장구류들이 붙기 편하게 만들어진 작업용 바지나 재킷처럼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다양한 소형 장비를 수납하기도 편했고, 내려앉았을 때 임무를 수행하기 용이하게 만들어진 물건이다. 방탄 소재의 피복으로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글라이더는 아마 조직의 점퍼들 중에서 조직에서 제공하는 기술력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인원 중 한명일 테였다.


그는 그대로, 고글을 낀 채로 움직였다. 플라스틱 마스크는 다소 숨이 답답해질까 해서 빼서 바지의 허벅지춤에 있는 수납 주머니에 넣어둔다.


옥상은 별다른 특징 없이 만들어진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아무런 디자인도 없이 기능미만을 추구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고, 사실 깊게 뜯어보면 기능미도 그렇게 풍부한가 싶어지는 단순한 구조였다.


그의 키높이의 반만한 정도 되는 높이로 올라와 있는 한 부분이 있었다. 옥상의. 아래로 내려가는 출입구일 것이다.


그는 그곳으로 다가갔고, 은색의 손잡이를 잡아 당기며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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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적어도 작가의 말이라도 재미있게 쓰라,

는 말이 있나 봅니다. 현역 어느 웹소설 작가 분과 그 말을 따르는 어떤 작가 분의 말에 따르면요.

음............

사실 하긴 그러고 보면 영도 쌤도 그렇고 다들 저마다 개성을 어떻게든 드러내었던 것 같습니다, 다각적으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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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퍼Jumper, 순간이동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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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88. 22.12.21 41 0 20쪽
92 87. 22.12.20 43 0 17쪽
91 86. 22.12.17 63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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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81. 22.12.07 52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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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79. 22.12.07 48 1 14쪽
83 78. 22.12.04 45 1 21쪽
82 77. 22.12.03 53 0 13쪽
81 76. 22.12.02 58 0 30쪽
80 75. 22.12.02 4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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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73. 22.11.29 51 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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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71. 22.11.25 57 0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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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68. 22.11.24 39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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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66. 22.11.22 42 0 23쪽
69 65. 22.11.21 40 0 17쪽
68 64. 22.11.20 37 1 29쪽
67 63. 겨울 22.11.19 46 0 11쪽
66 62. 22.11.18 30 0 17쪽
65 61. 22.11.18 28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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