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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님의 서재입니다.

구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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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작품등록일 :
2015.03.19 05:37
최근연재일 :
2015.05.15 21:12
연재수 :
3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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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수 :
17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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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5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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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8. 살 오를 꽃-1

해동국 최북단. 민족의 영산, '흰두루산'. 그곳은 민족의 정기가 샘솟는 못이었으며, 한민족을 수호하는 영험한 기운이 펄떡이는 맥박이었다. 이곳에 구름을 벗삼고 도를 닦던 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도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천하를 재패한 거대 제국인 천자국은, 수천의 군대와 귀신을 부리는 술객들을 앞세워 도사들을 죽이고 민족의 영산을 빼앗고 말았다. 천자국은 한민족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영산의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귀신들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DUMMY

8. 살 오를 꽃



하람은 숨소리조차 죽이며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겨우내 바싹 마른 낙엽이 그의 발밑에서 바지직 소리를 내며 부스러질 때마다, 하람은 마치 자신의 갈빗대가 부서지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코를 간질이는 기이한 향기는 그의 골수마저 붙잡고 흔드는 것으로, 피어오르는 안개와 더불어 더 없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자들의 말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저만치서 산길을 걷고 있는 세 명의 그림자가,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났다. 하람은 황급히 굵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고개만 살짝 내밀어 그들의 뒷모습을 보니, 발걸음이 가벼운 세 명의 여인이 보였다. 여인들은 모두 하얗고 자락이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찾았다!’

하람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들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계속해서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은 결코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인들은 피부가 백옥 같고 몸이 나긋나긋했으며, 허리까지 늘어뜨린 머리칼은 마치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세여인 중, 양 끝에 선 여인들만이 고개를 돌려 가운데에서 걷고 있는 여인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가운데의 여인은 그들보다 한 걸음 앞서서 걷고 있었는데, 양 옆의 여인들이 그녀를 모시는 듯이 보였다.

하람은 어떻게 해야 여우구슬을 훔쳐낼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천군이 알려준 방도대로라면 일부러 구미호에게 잡혀, 자신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려 할 때쯤에 구슬을 훔쳐내야만 했다. 하지만 운이 좋아 훔쳐낼 수 있었다 해도 그 다음이 문제였다. 도망치기 위해서는 말 위에 올라야 했고, 그 말은 길가에다 매어놓고 온 상태였다. 더욱이 저들은 세 명이나 되어 수적 불리하다고 하람은 생각했다. 도저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자, 자신을 눈치 채지 못하길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며, 하람은 자꾸만 힘이 빠지는 발걸음을 애써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미행이 계속되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날 즈음, 안개가 두꺼워지며 여인들이 불현듯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하람은 크게 당황하여 미친 듯이 사방을 헤매었으나, 향기만 길게 이어질 뿐 여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 안 돼! 하람 이 멍청아! 눈앞에서 놓치다니!’

하람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나무에 기대어 섰다. 긴장이 탁 풀리자, 팔 다리에서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하람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버렸다. 안개 사이로 보이는 달은 밤하늘 복판에 떠 은빛을 뿌리며, 하람의 얼굴을 안쓰럽게 내려다보는 듯하였다. 하람은 달 보기도 부끄러워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사방이 캄캄해지자,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하람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하람은 소리를 따라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갈수록 소리를 더욱 선명해졌다. 너무도 익숙한 소리, 감악산 폭포의 소리였다.

‘폭포가 가까이 있구나!’

이미 여인들을 놓쳐버린 하람은,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하고 있을 순 없었다고 여겼다. 폭포에 가서 익숙한 산길을 통해 마을로 돌아간 뒤, 마을을 나와 다시 기회를 노려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람은 폭포 소리를 향해 방향을 잡고는, 바위를 넘고 나무를 헤치며 다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를 다시 자극했던 향기가 풍겨왔다. 하람은 아까의 여자들에게서 나던 향내임을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구미호들이 감악산에까지 들어오다니! 신장님이 두렵지도 않은 걸까?’

하람은 오히려 잘 되었다고 여기며 거침없이 폭포를 향해 나아갔다. 만약에 구미호들이 자신을 잡으러 쫓아온다면, 저번처럼 산신군웅신장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믿었다.

감악산 폭포 또한 짙은 안개로 겹겹이 싸여 있어, 바로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하람은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폭포 주변의 바위에 내려섰다. 향기는 더욱 짙게 깔려 있었다. 하람은 향기가 나는 쪽으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물을 헤치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잠시 후, 하람의 발에 뭔가가 걸렸다. 하람은 흠칫하며 발에 걸린 것을 들어 올려 보았다. 그것은 세여인 중 한 명이 입고 있던 것이 분명한 옷이었다. 옷은 감촉이 매우 부드럽고 눈처럼 새하얀데다 은은한 향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하람은 옷 속을 뒤져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와 안개 사이로 큰 샘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김이 오르고 있는 샘에서는 하람이 찾던 여인들이 몸을 깊숙이 담그고 있었다. 조금 전 양 옆에서 걷던 두 여인이, 앞서 걷던 여인의 목욕 시중을 들고 있었다. 하람은 구슬을 찾느라 몸을 굽힌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공주님, 제가 머리를 빗겨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공주라고 불린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었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기울인 채 다른 여인들에게 머리칼을 맡겼다. 그러자 두 여인은 바위에 놓아두었던 참빗을 들어 여인의 긴 머리칼을 나누어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여인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하람은 시중을 받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인의 머리칼은 칠흑같이 검었고 폭포수처럼 물결쳤으며,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영롱한 진주 빛의 피부에 수줍은 듯이 감은 눈, 은은한 홍조가 어린 뺨이 이제 막 새로 피어난 백목련을 연상시켰다. 여인은 마침내 눈을 떴다. 그리고는 하람과 눈이 마주쳤다. 하람은 가슴이 뛰고 정신이 어지러워져, 자기도 모르게 비틀거리다 그만 돌멩이를 잘못 밟고 말았다.

시중들던 여인들도 돌이 구르는 소리에 놀라 하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하람은 당황한 가운데서도 손에든 옷을 내던지고는, 벗어져 있는 다른 옷들 중에 유달리 아름다운 것을 골라 손에 쥐고는 부리나케 뛰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람! 사람이다!”

“거기 서!”

하람은 황급히 바위를 기어올라 산속으로 줄달음쳤다.

한참 후, 이쯤이면 안전하겠다고 여긴 하람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움켜쥐고 있던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학이 수놓아져 있는 금빛 목도리와, 소매가 긴 새하얀 두루마기와 저고리와 치마였다. 모두 공작새와 비취 새의 깃털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으며, 그 솜씨가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했다. 하람은 그 옷에서 유독 향기가 짙게 서려 있는 것을 깨닫고는, 옷 속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자 그의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색찬란한 비단으로 지어진 주머니였다.

하람이 기뻐하며 외쳤다.

“이제 스승님의 병을 고칠 수 있어!”

그때 어디선가 잔잔한 바람소리가 귀를 간질이더니, 옷을 입은 두 여인이 우아한 몸놀림으로 하람의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여인들의 어깨 위에는 마치 은을 녹여 뽑은 실로 짠 듯한 반짝이는 한 줄기의 띠가 계속해서 펄럭이고 있었다. 하람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여인들은 노기를 띠고 하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감히 공주님의 옷을 훔치다니! 참으로 맹랑한 자로구나!”

“목숨이 아깝지 않거든 어서 공주님의 옷과 주머니를 내놓아라!”

하람은 겁에 질린 가운데서도 손에 든 비단주머니를 품속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가리울을 떠올리며 용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맞서며 외쳤다.

“닥쳐라! 너희야말로 요괴들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거냐?”

그러자 한 여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뭐라고? 요괴? 한낱 사람 주제에 어찌 이리도 무례할 수 있단 말이냐? 정녕 목숨이 아깝지 않단 말이지?”

“어서 공주님의 주머니를 내놓아! 그렇지 않으면……”

하람이 악에 받쳐 외쳤다.

“네놈들 손에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못 내놔!”

하람은 비수를 빼들고 칼집과 자루를 부딪치며 곧 불꽃을 일으켰다. 손에 든 칼집과 비수에 불꽃이 엉겨 붙자, 마치 빛나는 두 자루의 쌍검처럼 활활 타올랐다. 여인들이 놀라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물러섰다. 그러자 하람이 그들을 향해 불꽃을 겨누며 말했다.

“비켜라! 털가죽을 모두 재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그러자 여인들은 소매에서 얼굴만 한 갈맷빛 손부채를 꺼내더니, 하람을 향해 빠르게 부쳤다. 순간 거센 바람이 불어와 하람을 덮쳤다. 하람의 주위로 모래와 낙엽과 나뭇가지들이 어지러이 날려가기 시작했다. 하람은 비명을 지르며 팔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발이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또한 손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힘을 잃고 꺼져가는 것을 하람은 느낄 수 있었다.

‘안 돼! 이 대로면 당한다!’

하람은 두 손에 불의 원기를 집중시키며 가진 도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폭발하듯이 불길이 거세어지며 순식간에 여인들을 덮쳤다. 여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부채를 놓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하람은 손을 모아 불꽃을 거두고는 그 틈을 타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날이 국운이 쇠해가고 있던 해동국. 해동국의 항구도시 '미추홀'에 살던 소년 하람은, 해적들의 습격에 아버지와 얼굴 반쪽을 잃고 대장군 진가람의 저택에서 종으로서 살아간다. 장군의 아들 가천의 관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하람은 새벌의 각설이 가리울을 만나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된다. 몸은 왜소하고 얼굴은 흉측하지만, 선골을 타고 나 도사의 자질을 가진 소년, 하람.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그의 일대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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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8. 살 오를 꽃-4 <1기 연재 종료> 15.05.15 179 0 14쪽
32 8. 살 오를 꽃-3 15.05.15 126 0 10쪽
31 8. 살 오를 꽃-2 15.05.15 124 0 11쪽
» 8. 살 오를 꽃-1 15.05.15 147 0 10쪽
29 7. 여우구슬-4 15.05.15 122 0 10쪽
28 7. 여우구슬-3 15.05.14 168 0 14쪽
27 7. 여우구슬-2 15.05.14 178 0 9쪽
26 7. 여우구슬-1 15.05.14 174 0 13쪽
25 6. 가림새 마을 - 4 15.05.13 124 0 9쪽
24 6. 가림새 마을 - 3 15.05.12 177 0 10쪽
23 6. 가림새 마을 - 2 15.05.12 121 1 13쪽
22 (재업로드) 5. 새벌을 떠나다-3 15.05.12 160 0 12쪽
21 6. 가림새 마을 - 1 15.05.12 138 0 13쪽
20 5. 새벌을 떠나다-4 15.05.06 140 0 10쪽
19 5. 새벌을 떠나다-2 15.04.29 275 0 13쪽
18 5. 새벌을 떠나다-1 15.04.27 252 0 13쪽
17 4. 불꽃의 원기-5 15.04.25 178 0 9쪽
16 4. 불꽃의 원기-4 15.04.21 162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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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4. 불꽃의 원기-2 15.04.18 257 0 11쪽
13 4. 불꽃의 원기-1 15.04.14 187 0 10쪽
12 3. 도사, 가리울-3 15.04.11 121 0 15쪽
11 3. 도사, 가리울-2 15.04.09 27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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