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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님의 서재입니다.

구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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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작품등록일 :
2015.03.19 05:37
최근연재일 :
2015.05.15 21:12
연재수 :
3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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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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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수 :
17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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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31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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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 개구멍받이-4

해동국 최북단. 민족의 영산, '흰두루산'. 그곳은 민족의 정기가 샘솟는 못이었으며, 한민족을 수호하는 영험한 기운이 펄떡이는 맥박이었다. 이곳에 구름을 벗삼고 도를 닦던 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도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천하를 재패한 거대 제국인 천자국은, 수천의 군대와 귀신을 부리는 술객들을 앞세워 도사들을 죽이고 민족의 영산을 빼앗고 말았다. 천자국은 한민족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영산의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귀신들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DUMMY

“여, 마마(천연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최근에 저 아랫말 대아찬 김 가 가문에 호구별상(마마를 퍼뜨리는 신)이 다녀갔다는구나. 행색이 남루한 낭객 차림을 하고 밥 한 끼를 청했다지? 보아하니 각설이는 아니었다는데, 숭늉이나 한 사발 꿀 타서 주어 보낼 생각은 안허구 문전 박대를 했단다. 아, 그랬더니, 그 집 외손자가……”

하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린아이들에게 호구별상은 저승의 삼 차사들만큼이나 무서운 존재였다. 어릴 때 마마를 치렀던 하람에게도 여전히 그 기억이 남아 있었다. 하람이 너덧 살이 된 어느 가을이라고 했다. 그날따라 하람은 열이 끓어 일찍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하람의 아버지 아라한은 하람의 이마 위에 물수건을 얹어 주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이란다. 저 멀디먼 서천국에는 아주 아름답고 또 엄청나게 넓은 꽃밭이 있었지. 지금도 그곳을 서천 꽃밭이라고 부른단다. 서천 꽃밭에 자라는 꽃들은 무척 아름답지만 또 신비하고 진귀한 꽃이 많아. 그중엔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꽃도 있단다. 뼈살이꽃,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 혼살이꽃이라고 하지.” 해동의 아이들에게 서천국은 꿈의 나라였다. 하늘의 옥황상제와 옥황궁을 지키는 벼슬아치들, 아름다운 선녀들. 서천국의 이야기를 들으면 하람은 마치 그곳이 멀리 두고 떠나온 고향처럼 정겹게 느껴지곤 했다. 서천 꽃밭의 전설은 그중 하람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혹시라도 그 꽃밭에 가게 되면 잃어버린 어머니를 다시 만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향기로운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넓은 꽃밭에 누워 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어린 하람은 잠이 들었다. 잠결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하람은 가뿐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곁에는 아라한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하람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람아, 이제 괜찮을 거다. 간밤에 호구별상이 다녀갔더랬다.” “호구별상이요?” “그래. 손님마마 말이다. 네겐 특별히 약하게 치르게 해 주었다는구나.” 아라한은 땀에 젖은 하람의 이마를 무명으로 닦아 주었다. “한차례 고된 병을 치렀으니 오늘은 이 아비가 장닭을 잡아 보신을 시켜 주마.” 하람은 아버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여겼다.

한동안 달그락 거리며 부산을 떨던 주모는 마침내 밤새 한 두 방울씩 받은 소주를 조심스럽게 병에 옮겨 담는데 성공했다.

“이것두 정성이다. 흙을 빚어 구운 토고리의 부리에서 한 두 방울씩 모은 것이 이리 되었지 않느냐. 풀잎서 새벽이슬 모으는 그 기분이구나.” 주모는 병들을 비단 보자기에 싸서 하람에게 건네었다. “자, 옜다. 또 얼마나 필요한데?” “앞으로 나흘 동안 두 병씩이요.” “나흘씩이나? 에고, 까닥 하단 이 나이에 허리까지 휘겠구나. 과부 팔자, 녹의홍상을 입고 꽃단장 하면 뭘 하누. 논밭서 김매다 꼬부라질지언정 서방 없고 자식 없는 게 설움이로구나.”

주모는 허리를 두들기며 한숨을 푹 쉬었다. 주모에게서 지난 일 년 동안 본 적 없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자, 하람은 자신의 처지는 이내 잊고 좋은 말로 주모를 달래가며 위로했다. 주모가 서린 한을 감추고 다시 당당해지자, 하람은 평상에 병을 잠깐 내려놓고는 허리춤에서 베를 빼어 주모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베 한 필이요. 아주머니, 하제에 또 올게요.”

“그러렴. 참, 그 머리쓰개 잘 어울린다.”

하람은 배시시 웃었다.

“헤, 정말요?”

“아유, 그럼. 훨씬 낫다. 이제 어른 티가 제법 난다. 하람아, 올해 몇이지?”

“열 넷입니다.”

“아유, 벌써? 혼례 치를 나이로구나.”

하람은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네? 말도 안돼요!”

“왜 그러느냐? 요즘은 빨리 손주 보겠담서 영감님네들 미처 머리새기도 전에 자식들 혼례부터 부랴부랴 시키지 않디? 네 나이 때 혼인하는 사람들이 요새 얼마나 많다고?”

“…….”

“히힛, 어떠냐? 매파라도 불러다 색싯감이라도 한 번 알아봐주랴?”

“주모!”

하람이 납덩이를 목에 단 듯 고개를 들어 올리질 못하자 주모는 고개를 젖히고 목젖이 보이도록 깔깔 웃어대는 것이었다. 그냥 하는 농지거리라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하람은 확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이 화상 흉터가 좋은 점도 있었다.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해도, 혹여 슬프거나 괴로워 할 때에도. 표정이 흉터에 가려 드러나질 않았다.

그때였다.

“어얼씨구씨구, 저얼씨구씨구, 헤헷. 동방의 예의지국, 해동성국 나랏님 기체가 평안하오니까? 비단옷에 산해진미, 팔도강산 특산물은 무제(천자국의 천자)놈 측간에나 찾아보게!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뇨?”

주모는 킬킬대며 앞으로 나왔다.

“아이구, 가리울 나으리. 예까지 납셨구려. 마침 병신 장돌뱅이들이 버린 주인 없는 차림이 한 상 남아 있소. 어때. 와서 뜨고 가시지? 일로 와서 앉으시오.”

“이히히, 주모 얼굴은 날이 갈수록 빛이 영롱하구려. 흡사, 한뫼섬 특산 진주 한 알이 슬그머니 부끄러워 껍데기 안쪽에서 얼굴을 숨긴 것 같소.”

주모는 가리울에게 호의적이었다. 하람으로선 신기할 따름이었다. “좀만 기다리소.” 주모는 가리울의 바가지를 들고 부뚜막으로 사라졌다. 가리울은 탐욕스럽게 두 손을 마주 비벼가며 한달음에 평상 앞으로 내달려 왔다. 평상 위에 대자로 뻗더니 한층 새된 목소리로 타령을 뽑아대었다. 가리울은 먼지와 검댕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에 동물거죽을 온몸에 두른 기이한 행색이었다. “헤헷, 역시 익숙한 데가 최고구만.” 가리울은 등을 받치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 문득 하람을 발견하였다. 가리울의 눈이 커졌다.

“너, 잠깐 이리 좀 와 봐라.”

가리울은 부리나케 하람에게 달려들어 하람의 흑건의 벗겼다. “왜, 왜 이러십니까!” 그러나 가리울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하람의 얼굴 전체를 꾹꾹 눌러보는 것이었다. 하람은 비명을 질렀다. “이거, 놓아요. 놓으시오! 사, 사람 살려요!” 그러자 가리울이 하람을 놓아 주었다. 하람은 가리울의 손에서 흑건을 뺏어 들었다. 그때, 가리울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리울의 눈빛이, 어둔 방안에서 켜 놓은 호롱불처럼 형형이 빛났다. 하람은 갑자기 경박한 태도를 버린 가리울의 행태에 당황했다. “하, 하람입니다만.” 가리울은 갑자기 홱 몸을 돌리고는 다시 얼쑤, 절쑤하는 어깨춤을 추며 뱅글뱅글 돌았다. 가리울은 마치 일곱걸음에 시 한 수 짓는 것처럼 거침없이 시상을 토해냈다.


흰두루산 꼭대기서 온 천하를 굽어보니

강남 출신 천자 무제 만주 땅을 짓밟았네.


계절바람이 불 때 되니 흙바람에 피가 섞여

백성들의 부르짖음 하늘까지 닿았도다!


가리울은 껄껄 웃으며 싸리문 밖으로 춤을 추며 걸어 나갔다. 홀연해진 하람은 주모가 와 어깨를 툭툭 칠 때까지 그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람아. 이 양반이 어딜 갔느냐?” “저, 이상한 시 한 수를 읊더니, 나가버렸습니다.” “뭐? 기어코 이 양반이 정신이 나갔는가. 추운 건 참아도 배곯는 건 답 없다는 양반인데. 웬일인가.” 하람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하람은 주모에게 작별을 고하고 새끼줄을 꺼내어 병들의 손잡이를 한데 엮었다.

새끼의 끝을 잡고 걸으며, 하람은 계속해서 주모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전혀 마음 쓰지 않았을 말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자 하람은 스스로도 무척 신기하게 여겨졌다.

‘혼례라고?’

그는 혼례복을 입고 백마를 탄 자신을 상상했다. 백마의 뒤에선 가마꾼 넷이 꽃가마를 하나 이고 따라오고 있었다. 예복을 입은 하람 자신은 무척 멋있게 느껴졌다. 하람은 백마에서 내려 신부 집 대문 앞으로 걸어가 사람을 부른다. 그러자 장인과 장모가 나와 반겨주고 집 뒤쪽의 신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간다. 그리고 신방 안에는 푸른색과 붉은색 비단으로 만든 예복을 입은 아름다운 그의 신부가 다소곳이 앉아있다. 그의 신부가 숙였던 고개를 살풋이 들어올렸다. 난데없는 햇살이 신부의 눈꺼풀 위에서 부서지는 것 같다.

하람은 얼굴을 세차게 저었다. 온몸이 달아올라 하람은 개울이 어디 없나 찾았다. 그는 마침 좁은 강가에 도달해 있었다. 얼굴을 식히려 술병을 놓고 강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하람은 세수를 했다. 일렁이는 물결 위에 비춘 그의 모습은 말쑥해 보였지만, 잠시 후 물결이 가라앉자 얼굴을 뒤덮은 흉터가 선명하게 보였다. 하람은 신경질적으로 수면에 주먹질을 하고는 다시 새끼줄을 손에 꿰고 힘없이 섶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섶다리의 반 쯤 걸어왔을 때, 여자들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람이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쪽 강가의 빨래하던 아낙들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날 보고 저러는 거구나.’ 하람은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어 손으로 얼굴을 싸쥐었다. 그러자 아낙들을 따라 빨래터에 와서 놀고 있던 어린아이들이 왁자지껄 외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하람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어허 디여 저길 보소 개구멍받이(업둥이)가 지나가네.

얼라리오? 얼굴 밭에 곡괭이질을 하였구나.

얼씨구나 지화자 좋다 올해는 농사가 풍년이리.


아이들의 놀리는 소리에 아낙들은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하람의 쪼그라든 한쪽 눈꺼풀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람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뒤돌아 오던 길로 내닫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와하고 떠들어대며 마치 사냥감을 쫓듯, 하람의 뒤를 쫓아 달려왔다. 아이들은 까르륵거리며 노랫소리를 높였다. 하람은 귀를 틀어막고 어지러이 도망쳤다.




나날이 국운이 쇠해가고 있던 해동국. 해동국의 항구도시 '미추홀'에 살던 소년 하람은, 해적들의 습격에 아버지와 얼굴 반쪽을 잃고 대장군 진가람의 저택에서 종으로서 살아간다. 장군의 아들 가천의 관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하람은 새벌의 각설이 가리울을 만나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된다. 몸은 왜소하고 얼굴은 흉측하지만, 선골을 타고 나 도사의 자질을 가진 소년, 하람.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그의 일대기가 이어진다.


작가의말

구름의 전설 속 세계는, 신과 도깨비, 귀신들, 신령한 동물들과 악한 생물들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서천국, 개비랑국, 천자국, 해동국 그리고 옥황궁과 시왕국 등은 이 소설이 판타지 소설인 만큼 기존의 신화 설정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개비랑국과 천자국, 명진국의 경우엔 이름과 대략적인 영토의 위치만 빌려왔을 뿐, 모습 자체는 제 창작입니다.


흰두루산은 우리의 고유의 영산인 백두산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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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5.03.31 21:59
    No. 1

    피살이꽃, 숨살이꽃, 혼살이꽃, ....
    또 추천하고 갑니다.
    오정주 향기도 듬뿍 맡고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 시니피에
    작성일
    15.04.03 20:55
    No. 2

    감사합니다 손문혁님!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웹툰도 추천해 드릴게요.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라는 웹툰이 역시 기본적으로는 같은 한국신화를 모태로 하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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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8. 살 오를 꽃-4 <1기 연재 종료> 15.05.15 178 0 14쪽
32 8. 살 오를 꽃-3 15.05.15 125 0 10쪽
31 8. 살 오를 꽃-2 15.05.15 124 0 11쪽
30 8. 살 오를 꽃-1 15.05.15 146 0 10쪽
29 7. 여우구슬-4 15.05.15 121 0 10쪽
28 7. 여우구슬-3 15.05.14 167 0 14쪽
27 7. 여우구슬-2 15.05.14 178 0 9쪽
26 7. 여우구슬-1 15.05.14 174 0 13쪽
25 6. 가림새 마을 - 4 15.05.13 123 0 9쪽
24 6. 가림새 마을 - 3 15.05.12 176 0 10쪽
23 6. 가림새 마을 - 2 15.05.12 120 1 13쪽
22 (재업로드) 5. 새벌을 떠나다-3 15.05.12 160 0 12쪽
21 6. 가림새 마을 - 1 15.05.12 137 0 13쪽
20 5. 새벌을 떠나다-4 15.05.06 139 0 10쪽
19 5. 새벌을 떠나다-2 15.04.29 274 0 13쪽
18 5. 새벌을 떠나다-1 15.04.27 251 0 13쪽
17 4. 불꽃의 원기-5 15.04.25 177 0 9쪽
16 4. 불꽃의 원기-4 15.04.21 161 0 14쪽
15 4. 불꽃의 원기-3 15.04.19 234 0 11쪽
14 4. 불꽃의 원기-2 15.04.18 256 0 11쪽
13 4. 불꽃의 원기-1 15.04.14 186 0 10쪽
12 3. 도사, 가리울-3 15.04.11 120 0 15쪽
11 3. 도사, 가리울-2 15.04.09 269 0 11쪽
10 3. 도사, 가리울-1 +2 15.04.06 295 1 11쪽
9 2. 개구멍받이-5 15.04.03 267 1 13쪽
» 2. 개구멍받이-4 +2 15.03.31 278 1 10쪽
7 2. 개구멍받이-3 +2 15.03.28 409 1 13쪽
6 2. 개구멍받이-2 15.03.25 240 0 11쪽
5 2. 개구멍받이-1 15.03.23 318 0 10쪽
4 1. 폭풍의 전조-4 15.03.22 266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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