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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님의 서재입니다.

구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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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작품등록일 :
2015.03.19 05:37
최근연재일 :
2015.05.1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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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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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구멍받이-2

해동국 최북단. 민족의 영산, '흰두루산'. 그곳은 민족의 정기가 샘솟는 못이었으며, 한민족을 수호하는 영험한 기운이 펄떡이는 맥박이었다. 이곳에 구름을 벗삼고 도를 닦던 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도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천하를 재패한 거대 제국인 천자국은, 수천의 군대와 귀신을 부리는 술객들을 앞세워 도사들을 죽이고 민족의 영산을 빼앗고 말았다. 천자국은 한민족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영산의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귀신들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DUMMY

별채는 저택의 구석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구석진 곳에서 돋아난 감나무 한 그루가 마당 중앙을 수호신처럼 굽어보고 있었다. 별채의 앞마당에서는 하람과 마루가 감나무 가지를 깎아 만든 막대기를 한 자루씩 쥐고 서로를 노리며 천천히 옆으로 돌고 있었다. 마루가 슬쩍 어깨 위로 막대기를 올리며 처음 보는 자세를 취하자 하람이 헛숨을 들이켰다. ‘저런 건 또 어떻게 막아야 한담.’ 마루가 대장군의 부장 환찬으로부터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하람은 매일 아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절대 거르지 않는 마루의 검술 연습에서 대련 상대가 되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람은 화상을 가리기 위해 눈과 입만 내놓고 대부분의 얼굴을 붕대로 싸매고 있었다. 하람은 특히 흰색을 좋아하여 언제나 흰색 홀태바지와 저고리였다. 발에는 마루로부터 물려받은 소가죽 목신발을 신었으며, 키는 다섯 척(1척=30.3센티)을 간신히 넘겨 전체적으로 왜소해 보였다. 그에 반해 마루는 쪽빛 저고리와 바지에 검은 순록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목신발을 신었으며, 수려한 이목구비에 기골이 장대하고 키는 여섯 척에 약간 못 미쳤다.

둘의 차이는 막대를 겨누는 자세에서도 드러났다. 하람은 두 팔을 몸 쪽으로 구부려 전체적으로 다소 어정쩡한 상태였으나, 마루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지면에 닿을 두 발에서부터 검 끝까지 완벽한 선을 이루는 발검 자세였다. 막대기의 연장선은 정확하게 하람의 목을 향해 겨눠지고 있었다.

마루가 씩 웃으며 말했다.

“네가 먼저 들어올래, 내가 먼저 들어갈까?”

그러자 하람은 입술을 삐죽였다.

“도련님. 오늘은 또 얼마나 가지고 놀려고 그래. 뻔하지. 조금 있다 네가 내게 허점을 보여 주면 내가 못 참고 검으로 네 왼쪽 어깨를 후릴 거고, 그렇게 몇 합이 지나다보면 네가 또 일부러 틈을 보여 주겠지. 난 그새를 못 참고 먼저 공격해 들어가 크게 검을 후릴 거고, 자네는 대나마님으로부터 배운 기술을 내게 연습하겠지.”

마루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내가 일부러 허점을? 흠, 어떻게 알았어?”

“좀 되었어. 자존심 때문에 별다른 말을 안했을 뿐이야.”

“확실히 눈썰미가 좋아졌구나. 게다가 싸움의 양상을 미리 예견하는 저 능력! 아주 좋아. 그러면.” 마루는 하람을 향한 칼끝을 살짝 비틀며 말했다. “그걸 깨고 내가 먼저 들어가지 뭐.”

하람이 미처 그 말뜻을 파악하기도 전에 마루는 하람을 향해 길게 뛰며 번개 같이 돌진했다. 그러자 하람은 본능적으로 마루의 막대기를 쳐내며, 뒤로 한 바퀴 돌아 그 기세로 마루의 허리를 베어 들어갔다. 그러자 마루가 옆으로 슬쩍 피하며 막대기를 휘둘러 하람의 어깨를 내리쳤다. 놀란 하람이 막대기를 위로 크게 휘두르자 마루는 잽싸게 뒤로 뛰어 물러났다.

마루가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제법인데? 어디 가서 검 배웠단 말하기가 무섭다.”

“매일 아침마다 이 짓이니, 슬슬 몸에 익을 때도 되었지.”

“이럴 때 어른들은 뭐라고 하던가. 서당개 삼 년이면 뭘 읊는다던데. 자, 이번엔 진짜 간다.”

두 소년은 막대기를 휘두르며 재차 맞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하였다. 하지만 하람의 동작이 거의 체계 없이 즉흥적인데 반해, 마루는 막대기 끝에서부터 두 발에 이르기까지 자세 하나하나마다 완벽한 선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마루는 환찬으로부터 배운 동작을 응용하여 만든 자기만의 독특한 검술을 이미 구사할 수 있었다. 한 시진이 지날 동안 하람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과 반대로 마루의 호흡은 평온하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람이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며 숨을 몰아쉬게 되었을 무렵, 멀찌감치 머슴 하나가 하람을 부르며 느릿느릿 걸어왔다. 머슴은 마루를 향해 몸을 돌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요, 마루 도련님?”

“네, 잘 잤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머슴은 헤헤거리며 말했다.

“이거, 연습하시는데 죄송합니다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큰 도련님의 관례 준비 때문에 일손이 턱 없이 달려놔서……. 하람에게 심부름 좀 시켜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하람이 막대기를 내던지고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후아, 이 짓도 이젠 못할 짓이다. 도련님은 이제 다른 상대를 찾으셔야 해요. 차라리 뙤약볕에 하는 논일 밭일이 갑절은 쉽겠습니다. 아저씨, 어서 저 좀 구해 주셔요. 무슨 심부름인데요?”

“청지기님께서 주막에 좀 다녀오라신다. 술 두 병만 받아오라대. 지난번 대금까지 삼베 한 필이면 충분할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주모가 술값으로 한 필을 더 청하면 돌아와 청지기님께 말씀드리고 더 가져가도록 해라.”

“예. 그럼 청지기님께 가 보아야겠군요.”

머슴은 허리춤에서 삼베 한 필을 꺼내 하람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가 이미 받아 두었다. 주막까지 가는 길에 중간에 새지 말구. 오늘도 할일이 많으니까. 헤헷. 그럼 도련님, 소인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요.”

머슴은 먼저처럼 다시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때워 보려 일부러 천천히 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우스꽝스러워, 하람과 마루는 마주보며 킬킬거렸다. 머슴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하람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람은 막대기를 담벼락에 세우고는 풀어헤쳐진 앞섶을 정돈했다.

“그럼 미안. 먼저 갈게.”

“이 날씨에 옷도 안 갈아입고 가려고? 너 고뿔든다.”

“다들 바쁜데 나라고 여유부릴 틈이 있을까? 그럼 도련님, 이따 저녁 때 다시 만나자고.”

그러나 마루는 하람의 소매를 잡아끌며 별채를 돌아 뒤꼍으로 갔다. 왜소한 하람의 몸이 근육이 불거진 마루의 팔에 붙잡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아, 좀 놔 봐. 알았다, 알았어.” 결국 하람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부뚜막으로 들어가 바가지를 가지고 나왔다. 두 소년은 물독으로 가서 번갈아가며 목물을 끼얹었다.

하람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으으, 추워……. 빨리 해가 높아져야 할 텐데.”

“사내대장부가 이 정도 추위에 움츠리면 쓰나.”

마루는 바가지를 들고 정수리부터 물을 끼얹었다. 제법 벌어진 어깨 위로 김이 솟아올랐다. 하인들의 분주한 소리가 별채인 이곳까지 들려왔다. 감나무 우듬지 근처까지 해가 솟아오르자, 사위가 완연히 밝아졌다. 까치 한 쌍이 우듬지 근처에 내려앉았다. 한 마리는 힘차게 울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약간 아래서 둥지에 쓸 나뭇가지를 물고 있었다. 혹여 새똥이라도 맞을까, 마루는 슬쩍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제비가 올 때는 아직 아닌가?” “내달은 되어야지.” “그러고 보니 우리도 다음해면 관례 치를 나이다.” “난 상관없지. 관례야 귀족들이나 하는 거니까. 너라면 몰라도.”

마루는 눈살을 찌푸렸다. 같은 무명옷을 입었어도 하람의 것은 허름하고 군데군데 해져있는데 반해 그의 것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마루는 마치 합당치 않은 것을 몰래 빌려 쓰는 기분이었다. 다음해면 그들도 성년이 되었다. 이것은 마루에게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귀족가의 서자들 중 일부는 골품제의 한계에 불만을 품고 ‘신촌락’을 찾아 떠났다. 열다섯이 되는 해의 정월쯤, 마루는 길을 떠나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하람아. 얼굴도 씻어라. 붕대 좀 풀어봐.”

“어? 아니, 난 괜찮은데…….”

“땀이 났을 텐데? 환부를 깨끗이 하지 않고 바람을 못 받으면 덧날 수도 있다고, 수천 선생이 그러지 않았어?”

그러나 하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결국 마루는 하람을 붙들고 억지로 붕대를 풀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내려와 하람의 목덜미를 덮었다. 마루는 머리칼을 헤치고 조심스럽게 하람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았구나.” “그래 봤자, 흉물일 건데.” “근래 얼굴 제대로 본 적이 없구나?” “괴로워서. 비추는 물건들은 다 피했어. 세수도 일부러 눈 감고 해. 근데 눈 감으면 손끝이 예민해지잖아. 도드라진 흉터 탓에, 어둠 속에서도 내 얼굴이 선연히 떠올라. 도깨비 같아.”

“허, 도깨비?”

하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루는 놋대야에 물을 담아 하람에게 내밀었다. 하람은 꽉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어느새 해는 제법 높아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다. 대얏물에 하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추었다. 그러나 마루의 말이 무색하도록 흉터는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화상 입은 자리는 이마에서부터 코 주변까지 안쓰러울 정도로 벌겋게 일그러져 있었으며, 눈썹이 있어야 할 자리엔 새로 자란 털 몇 가닥만이 간신히 들러붙어 있었다. 하람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마루가 손에 물을 묻혀 하람의 얼굴을 직접 씻어주기 시작했다. 하람은 그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왜 거짓말 했어?”

그러나 마루는 다시 손을 내밀어 하람의 얼굴을 부드럽게 씻어 내렸다.

“거짓말 아냐. 확실히 전보다 좋아진 걸. 다시 한 번 봐봐.”

마루는 물을 조금 떠 부스스한 하람의 머리칼을 적셔 한데 모아 뒤로 훌쩍 넘겼다. 하람은 눈을 떠 물에 일렁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확실히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나니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추하고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기준에 불과해. 사람은 ‘미(美)’를 경외하지만, 그조차 영원한 것은 아니지. 절세가인도 언젠가는 늙고, 요절이라도 하면 아름다운 몸이 썩어 구더기가 들끓고 악취를 풍기게 되어 있어. 그때도 생전처럼 아름답다 할 수 있을까?”

“수천 선생님 말이야? 나 꼬아서 말하는 거 안 좋아해. 그냥 말해.”

“아냐. 그러니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아름답다는 거지!”

하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는 대청에 벗어놓았던 낡은 두루마기를 입고 허리에 대를 매었다. 그동안 마루는 자신의 방에서 뭔가를 들고 나와 하람에게 내밀었다. 흑건이었다.

“붕대 대신 이걸 쓰고 다녀.”

“바깥을 붕대 없이 다니라고? 내가 관아에 끌려가는 걸 보고 싶냐.”

“그렇겠지. 새벌의 새아씨들 가슴 저민 죄목으로.”

마루는 손을 갈퀴처럼 만들어 하람의 머리를 빗질하듯 쓸어 내렸다. 그리고 그 위에 흑건을 씌우고, 눌린 부분을 잡아 폈다. 하람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마루는 하람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이젠 용기를 내야지. 일단 익숙해지면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거야.”

“……정말 그럴까?”

“사내자식이 징징거리긴. 걱정 말고 얼른 다녀와. 아침 안 먹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마루는 하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전송했다. 하람은 가다가 멈추고 다시 가다가 뒤를 돌아보길 반복했다. 마침내 하람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마루는 대청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나날이 국운이 쇠해가고 있던 해동국. 해동국의 항구도시 '미추홀'에 살던 소년 하람은, 해적들의 습격에 아버지와 얼굴 반쪽을 잃고 대장군 진가람의 저택에서 종으로서 살아간다. 장군의 아들 가천의 관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하람은 새벌의 각설이 가리울을 만나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된다. 몸은 왜소하고 얼굴은 흉측하지만, 선골을 타고 나 도사의 자질을 가진 소년, 하람.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그의 일대기가 이어진다.


작가의말

두루마기는 삼국시대부터 전래되어온 우리 고유의 의복으로,

고대에는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띠를 허리에 둘러 고정했고,

조선시대에는 옷고름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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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8. 살 오를 꽃-4 <1기 연재 종료> 15.05.15 178 0 14쪽
32 8. 살 오를 꽃-3 15.05.15 125 0 10쪽
31 8. 살 오를 꽃-2 15.05.15 124 0 11쪽
30 8. 살 오를 꽃-1 15.05.15 146 0 10쪽
29 7. 여우구슬-4 15.05.15 121 0 10쪽
28 7. 여우구슬-3 15.05.14 167 0 14쪽
27 7. 여우구슬-2 15.05.14 178 0 9쪽
26 7. 여우구슬-1 15.05.14 174 0 13쪽
25 6. 가림새 마을 - 4 15.05.13 123 0 9쪽
24 6. 가림새 마을 - 3 15.05.12 177 0 10쪽
23 6. 가림새 마을 - 2 15.05.12 120 1 13쪽
22 (재업로드) 5. 새벌을 떠나다-3 15.05.12 160 0 12쪽
21 6. 가림새 마을 - 1 15.05.12 138 0 13쪽
20 5. 새벌을 떠나다-4 15.05.06 139 0 10쪽
19 5. 새벌을 떠나다-2 15.04.29 274 0 13쪽
18 5. 새벌을 떠나다-1 15.04.27 251 0 13쪽
17 4. 불꽃의 원기-5 15.04.25 177 0 9쪽
16 4. 불꽃의 원기-4 15.04.21 161 0 14쪽
15 4. 불꽃의 원기-3 15.04.19 234 0 11쪽
14 4. 불꽃의 원기-2 15.04.18 256 0 11쪽
13 4. 불꽃의 원기-1 15.04.14 186 0 10쪽
12 3. 도사, 가리울-3 15.04.11 120 0 15쪽
11 3. 도사, 가리울-2 15.04.09 269 0 11쪽
10 3. 도사, 가리울-1 +2 15.04.06 295 1 11쪽
9 2. 개구멍받이-5 15.04.03 267 1 13쪽
8 2. 개구멍받이-4 +2 15.03.31 278 1 10쪽
7 2. 개구멍받이-3 +2 15.03.28 409 1 13쪽
» 2. 개구멍받이-2 15.03.25 241 0 11쪽
5 2. 개구멍받이-1 15.03.23 318 0 10쪽
4 1. 폭풍의 전조-4 15.03.22 266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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