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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님의 서재입니다.

구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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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작품등록일 :
2015.03.19 05:37
최근연재일 :
2015.05.15 21:12
연재수 :
3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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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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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수 :
171,726

작성
15.05.15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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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7. 여우구슬-4

해동국 최북단. 민족의 영산, '흰두루산'. 그곳은 민족의 정기가 샘솟는 못이었으며, 한민족을 수호하는 영험한 기운이 펄떡이는 맥박이었다. 이곳에 구름을 벗삼고 도를 닦던 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도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천하를 재패한 거대 제국인 천자국은, 수천의 군대와 귀신을 부리는 술객들을 앞세워 도사들을 죽이고 민족의 영산을 빼앗고 말았다. 천자국은 한민족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영산의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귀신들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DUMMY

하람은 가리울의 곁에 앉아 방문을 열어놓고 달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시(酉時-오후 5시부터 7시)가 지날 때쯤 되자, 바깥은 어둠 속에 완전히 파묻혔다. 잠시 후, 보름달이 떠오르며 세상을 은빛으로 비추기 시작했다. 달빛의 손길이 하람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람은 점점 빠르게 뛰는 가슴을 느끼며 비수를 부적처럼 꼭 쥐었다.

‘좋아, 이제 가자!’

하람은 문을 나서려다 뒤에서 누군가 잡아당긴 것처럼 멈칫하며, 뒤를 돌아 가리울을 보았다. 며칠을 제대로 먹고 마시지를 못한 가리울의 얼굴은 두 볼이 움푹 패인데다 달이 내려앉아 해골처럼 창백해 보였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듯, 가리울은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람은 솟아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가리울의 앞에 꿇어앉아 울먹이며 큰 절을 올렸다.

“스승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꼭 약을 구해 올게요, 꼭이요!”

이 이상 지체하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하람은 몸을 홱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나왔다. 하람은 마구간에 매어놓은 말들 중 한 마리를 풀어, 마당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는 고삐를 쥐고 온몸으로 달빛을 받으며, 마을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을은 시퍼런 빛으로 음산하게 부풀어졌다. 귓바퀴를 스치는 바람은 나무에 부딪치자 비명소리처럼 윙윙거렸다. 무서워진 하람은 비수의 칼집을 더욱 틀어쥐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하람은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처음 마을을 들어섰을 때처럼 장승 두 채가 눈알을 부라리며 하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승은 얼굴 곳곳에 그림자가 져 있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보였다. 하람은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조심조심 말을 몰아 마을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놈아!”

우레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오자, 하람은 그 자리에서 세 자나 뛰어오르며 소스라쳤다. 그는 사방을 돌며 누군지 찾으려 했다. 그러자 또 한 번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보고 있어!”

이번에 들려온 것은 아까와는 다른 카랑카랑한 여장부의 목소리였다. 하람은 몸을 벌벌 떨며 비수를 뽑아 쥐고 미친 듯이 사방을 찾았다. 그러자 호걸과 여걸의 껄껄거리고,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다, 이놈아!”

남자가 말하자, 여자는 잽싸게 꼬투리를 잡으며 쏘아대었다.

“멍청이! ‘여기다’라고 말하면 어떻게? ‘위를 봐라’라고 말해야지!”

그러자 남자가 성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누라! 서방한테 멍청이라니!”

여자도 지지 않았다.

“멍청하니까 멍청하다지? 그래서 서방대접 받겠나? 멍청이!”

하람은 어안이 벙벙해져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돌처럼 굳어있던 두 장승이 서로를 향해 잔뜩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유, 불, 도의 사상과 동서의 고전에 정통했어! 그런데 멍청이라니!”

“죽은 귀신들의 찌꺼기만 훑는 주제에 어디서 아는 척?”

“도깨비는 뭐하나? 저 마누라 안 잡아가고!”

“그렇게 홀아비가 부러워? 옥제께 상소라도 올리지?”

“말이면 단 줄 아나?”

“마누라한테 그렇게 이기고 싶나?”

그대로 두면 언제까지고 싸움만 할 것 같아, 하람은 용기를 내어 말소리를 내보았다.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저를 부르신 이유를 물어도 될는지요?”

그러자 두 장승이 싸움을 멈추고 눈알만 내려 하람을 굽어보았다. 하람은 다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껴졌다.

남자 장승이 물었다.

“무슨 일로 마을을 나서나?”

여자 장승도 말했다.

“이 야심한 밤에?”

“잠을 깨워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지금 마을 바깥에 볼일이 있어 그럽니다.”

“보낼 수 없다.”

“낮에 가라.”

하람이 간절히 애원했다.

“제발 보내주십시오! 신장님께서도 제 사정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두 장승은 눈알을 돌려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모르는데?”

“나도 몰라.”

하람은 순간 이 장승들 또한 이곳을 지키는 신장들 일거라 생각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두 분의 존함은 어찌 되시는지요?”

그러자 남자 장승이 말했다.

“나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여자 장승도 말했다.

“나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우리는 당산신의 명으로 마을 입구를 지키는 신장들이다.”

하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신장에게 사정을 말하기로 했다.

“저는 얼마 전 제 스승과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 구미호에게 부상을 당해 구해낼 방법이 없어, 천군님께 방도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군께서 구미호를 잡아 여우구슬을 얻어야하며, 구슬의 가루를 내어 스승님께서 드시도록 하면 병이 낫는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미호는 보름달 뜨는 밤에 나온다고 하셔서 이렇게 오게 된 겁니다. 아울러 산신군웅신장께 도움을 요청 드렸습니다. 그러니 이만 보내주십시오!”

두 장승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만약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분명히 고개를 주억거렸을 것이라고 하람은 생각했다. 잠시 후,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말했다.

“가도 좋다!”

“구미호가 쫓아오면 내가 널 지켜주마!”

그러자 천하대장군이 지하여장군을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마누라! 왜 나는 빼놓나?”

“말만 많은 서방을 어떻게 믿으라고?”

“말 다했어?”

“못 할 말 했나?”

어느새 그들은 하람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람은 픽 웃으며 말고삐를 잡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빨리 달아날 수 있게 말을 몰고 온 것이었지만, 사실 하람은 말을 타고 싶지 않았다. 구미호와 여우요괴들로부터 산길로 도망쳤을 때, 말 위에서 느꼈던 끔찍한 공포가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말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온몸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떨어질지 몰라 말갈기를 붙잡고 안간힘을 써야했던 기억은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하람은 위급한 순간이 아니라면 절대로 말을 타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느새 하람과 말은 서낭목에 다다랐다. 하람은 가리울과 했던 것을 기억해내고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 서낭목에 다가갔다. 그는 돌무더기 위에다 돌멩이를 던져 올렸다. 그리고 손을 모으며 말했다.

“서낭신께 고합니다. 스승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서려 합니다. 제 목숨은 상관없으나, 제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 대신 스승님을 구할 누군가를 꼭 마을로 보내주소서.”

하람은 기다렸지만 이번엔 바람이 불지 않았다. 가슴을 저며 오는 불안감을 애써 떨치려 애쓰며, 하람은 말고삐를 붙잡고 숲길을 따라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람이 말을 끌고 산을 내려와 길가에서 기다린 지 반 시진이나 지났다. 우 노인의 말대로, 밤이 깊어질수록 마을로 통하는 산길의 주변은 두터운 안개로 뿌옇게 뒤덮이기 시작했다. 하람은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면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안개는 길가에까지 내려앉아, 하람이 서 있는 곳을 에워싸며 점점 넓게 펼쳐져갔다. 하람은 하얀 벽으로 만들어진 밀폐된 방안에 갇힌듯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찾아 나서야해.”

하람은 큰 나무에다 말을 묶고는 정처 없이 길가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안개는 이미 한길을 모두 점령했다. 하람은 마치 잘 익은 탁주 속을 헤엄치며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멀리서 소쩍새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쩍새가 ‘소쩍’하고 울면 흉년이요, ‘솟적다’고 울면 풍년이라는 옛 이야기가 잠시 스쳐갔다. 하지만 지금 하람의 귀에 소쩍새의 소리는, 어딘가에서 그를 노리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을 무시무시한 무언가의 울음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땀으로 축축이 젖은 목덜미를 바람이 훑으며 지나가자, 하람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며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곧 이어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산을 울리며 길게 이어졌다. 하람은 짧은 숨을 들이키며, 품속을 헤쳐 비수를 빼들었다. 그러나 칼을 든 손조차 두 다리와 함께 애처롭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하람은 안개가 옅은 곳을 찾아 사방을 헤매기 시작했다.

한참을 산 속에서 헤매고 있던 그때, 하람은 뭔가를 느끼고는 얼어붙은 듯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드디어 그에게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찬물을 끼얹은 듯,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비수를 땀이 배일 정도로 꽉 틀어쥐며, 조심조심 알 수 없는 기운이 퍼져 나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누군가의 발걸음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가까이 가게 되자, 하람은 그가 느낀 것이 어떤 특별한 기운이 아닌, 공기 중에 퍼져있는 향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향기는 기억 저편에 숨겨진 추억처럼 아련했으며, 흐드러지는 꽃향기보다도 달콤했고, 사향보다도 강렬하여 그의 정신을 아찔하게끔 만들었다.

‘구미호가 틀림없어!’

그리고 그러한 하람의 생각은 여자들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오자, 더욱 확실해졌다.




나날이 국운이 쇠해가고 있던 해동국. 해동국의 항구도시 '미추홀'에 살던 소년 하람은, 해적들의 습격에 아버지와 얼굴 반쪽을 잃고 대장군 진가람의 저택에서 종으로서 살아간다. 장군의 아들 가천의 관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하람은 새벌의 각설이 가리울을 만나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된다. 몸은 왜소하고 얼굴은 흉측하지만, 선골을 타고 나 도사의 자질을 가진 소년, 하람.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그의 일대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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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8. 살 오를 꽃-4 <1기 연재 종료> 15.05.15 178 0 14쪽
32 8. 살 오를 꽃-3 15.05.15 125 0 10쪽
31 8. 살 오를 꽃-2 15.05.15 124 0 11쪽
30 8. 살 오를 꽃-1 15.05.15 146 0 10쪽
» 7. 여우구슬-4 15.05.15 122 0 10쪽
28 7. 여우구슬-3 15.05.14 167 0 14쪽
27 7. 여우구슬-2 15.05.14 178 0 9쪽
26 7. 여우구슬-1 15.05.14 174 0 13쪽
25 6. 가림새 마을 - 4 15.05.13 123 0 9쪽
24 6. 가림새 마을 - 3 15.05.12 177 0 10쪽
23 6. 가림새 마을 - 2 15.05.12 120 1 13쪽
22 (재업로드) 5. 새벌을 떠나다-3 15.05.12 160 0 12쪽
21 6. 가림새 마을 - 1 15.05.12 138 0 13쪽
20 5. 새벌을 떠나다-4 15.05.06 139 0 10쪽
19 5. 새벌을 떠나다-2 15.04.29 274 0 13쪽
18 5. 새벌을 떠나다-1 15.04.27 252 0 13쪽
17 4. 불꽃의 원기-5 15.04.25 177 0 9쪽
16 4. 불꽃의 원기-4 15.04.21 161 0 14쪽
15 4. 불꽃의 원기-3 15.04.19 234 0 11쪽
14 4. 불꽃의 원기-2 15.04.18 256 0 11쪽
13 4. 불꽃의 원기-1 15.04.14 186 0 10쪽
12 3. 도사, 가리울-3 15.04.11 120 0 15쪽
11 3. 도사, 가리울-2 15.04.09 26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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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 개구멍받이-2 15.03.25 24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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