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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님의 서재입니다.

구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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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작품등록일 :
2015.03.19 05:37
최근연재일 :
2015.05.15 21:12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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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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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06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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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벌을 떠나다-4

해동국 최북단. 민족의 영산, '흰두루산'. 그곳은 민족의 정기가 샘솟는 못이었으며, 한민족을 수호하는 영험한 기운이 펄떡이는 맥박이었다. 이곳에 구름을 벗삼고 도를 닦던 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도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천하를 재패한 거대 제국인 천자국은, 수천의 군대와 귀신을 부리는 술객들을 앞세워 도사들을 죽이고 민족의 영산을 빼앗고 말았다. 천자국은 한민족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영산의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귀신들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DUMMY

가리울은 도술을 쓰기 위해 소매를 걷어 올리려다, 소매 안에 뭔가 묵직한 것이 만져지는 것을 깨달았다. 수천 선생으로부터 받은 은자 한 냥이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가리울은 얼른 수레에서 내려 그 병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나으리…….”

“뭐냐. 죄를 실토할 마음이라도 생겼느냐.”

"나리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마침 북문으로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새벌을 나서고 들어오는 행상들이 주였고, 활을 맨 사냥꾼에, 새벌 윗쪽의 산으로 가 약초를 캐오려는 약초꾼도 섞여 있었다. 가마를 대동한 귀족의 행렬도 있었다. 다른 병사들의 시선이 이쪽에서 벗어난 틈을 타 가리울이 기창을 든 병사의 소매를 끌었다.

“잠시만,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어허, 아니 이놈이 글쎄..."

가리울은 병사를 수레 뒤쪽으로 데리고 갔다. 흘긋 성문 쪽을 보니, 병사들은 문 밖으로 나가려는 다른 사람들을 검문하느라 이쪽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잘 조련된 군사들이라도, 늘어난 사람들을 당해낼 순 없었다. 이쪽 일은 기창을 든 병사에게 모두 맡겨 버린 모양이었다. 가리울은 수레 뒤에 쪼그리고 앉아 품속에서 은자를 꺼내어 병사를 향해 받쳐 들었다. 은 덩어리는 햇빛을 반사하자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병사의 눈은 놀라움으로 커졌다. '걸렸구나.' 가리울의 얼굴에서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헤헤, 이건 천자국의 은자입니다요. 이거 한 냥이면 쌀 스무 섬은 살 수 있습죠. 이걸 드릴 테니 모른 척 해 주시면…….”

“이, 이놈 이제 보니 도둑놈이로구나!”

“쉿! 아,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발각되면 물론 전 끌려가고 물건은 모두 나라에 빼앗길 테지만 말이죠. 만약 나리께서 눈감아 주시기만 한다면 저도 잡혀가지 않아 좋고, 나리께선 은자 한 덩어리를 독차지해서 좋고, 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요?”

"네, 네 이놈이..."

"나으리. 들어 보십시오. 나으리께선 억울하지도 않으십니까요?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어디 나으리 탓입니까요. 남아로 세상에 나서 주지육림, 산해진미에 예쁜 기생들도 좀 후려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돈이면 많은 걸 할 수 있을텐데요?"

병사는 잠시 갈등하는 것 같았으나 곧 큼지막한 은 덩어리를 갖고 싶은 욕망에 마음이 움직여버리고 말았다. 병사는 입이 귀에 걸려 어쩔 줄을 모르며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은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역시 속인들이다, 재물 앞에서는 정의도 버리는구나.

그때, 수레 앞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어이, 거기서 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한 마디 호통과 함께 칼을 찬 무관 한 명이 갑옷 비늘을 잘각거리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뿔싸, 병사는 좀 더 손이 빠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가리울은 재빠르게 은자를 소매 속에 넣었다. 병사는 수레 앞으로 돌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이고, 아닙니다요. 운 좋게 고향 사람을 만나 잠시 한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리울이 치고 들어왔다.

"예예, 이 형님을 만난 지 오랜만이라 이 천한 것이 나으리들께 누를 끼치고 말았습니다요. 헤헤."

"우리는 중요한 공무를 수행 중이다. 검문이 끝났으면 어서 가도록 하라!"

무관이 말했다. 그러자 가리울은 넙죽 절하더니 일부러 동작을 과장하며 다른 병사들도 다 이쪽을 보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럼 여럿 나으리들 수고하십시오! 쇤네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요!”

가리울이 수레에 오르자, 닭 쫓던 개 마냥 넋을 놓고 있던 병사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자, 잠깐 이놈아! 게 섯거라! 은자를 내놔라!”

그러자 무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은자라니? 그리고 내놓으란 건 또 무슨 소리냐?”

병사는 순간 뜨악하여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그의 말이 무관의 귀에 들어간 뒤였다. 병사가 손발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고 당황하는 기색을 띠자, 무관은 내막을 짐작하고는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이놈! 너는 검문 내내 선량한 백성들의 길을 막고 사사로이 뇌물을 요구해 왔단 말이더냐.”

“아, 아니옵니다! 그런 것이 아니옵고 저놈이……”

“닥쳐라! 내 요즘 네놈 행실이 난잡하여 어떻게 처벌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아, 그런 것이 아니옵고, 저, 저놈, 저놈이 글쎄..."

"그래도 변명이냐? 안 되겠구나. 내 네놈을 지금 이 자리에서 쳐서 군법의 지엄함을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보여 주겠다!"

무관이 칼을 빼어 날을 병사의 목젖에 겨누었다. 그러자 병사는 가타부타 더 말없이 무릎부터 꿇었다.

“아이고, 장군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병사가 무릎을 꿇고 엉엉 울었다. 그러자 무관이 혀를 차며 말했다.

“늙은 홀어머니를 생각해라 이놈아! 군법이 지엄하나 내 다시 한 번 네게 기회를 줄 것이다. 대신 너는 더 입을 열지 말고 당장 막사로 돌아가 대기해라. 네게 내릴 처벌은 임무가 끝난 뒤에 행할 것이다."

병사는 무관에게 거듭 절하더니 꽁지가 빠지도록 줄행랑을 놓았다. 동로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며 껄껄 웃었다.

“왜 이리 꾸물대나! 빨리 통과 시켜라!”

무관이 호령하자 군사들은 무관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군말 없이 가리울의 수레를 통과시켰다. 가리울은 말채찍을 휘두르는 손이 자기보다 모르게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말이 다시 걷기 시작했고, 가리울은 평생 처음으로 말의 걸음이 그 어느 짐승보다도 느린 것처럼 느껴졌다. 햇빛이 성문에 가려 가리울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 짧은 순간 가리울은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의 상제에게 감사했다. 햇빛이 다시 가리울의 이마에 내려앉았고, 가리울은 비로소 위기가 지나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성문에서 이쪽으로 묵직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다가왔다.

‘역시나, 곱게 보내주진 못하시겠다.’

가리울은 잔뜩 긴장한 채로 고삐를 당기며 기다렸다. 가리울의 오른편으로 다가온 자는 방금 전 성문에서 병사들에게 호령하던 칼을 찬 무관이었다. 무관은 잠시 가리울을 관찰하는 듯하더니, 곧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보였다. 윤곽이 뚜렷한 이목구비에 수염을 멋들어지게 다듬은 그 장수는 바로 대장군의 부장, 환찬이었다.

가리울은 환찬을 알지 못했으므로 마음속으로 경계를 풀지 않으며 웃는 낯으로 물었다.

“쇤네에게 아직 하실 말씀이 남으셨습니까요?”

환찬은 씩 웃으며 말했다.

“혹시 자네의 고향이라던 북쪽 마을이 어딘지 물어도 되겠는가?”

“예, 저 멀리 단둥이라는 곳입니다. 천자국의 국경과도 가깝지요.”

“호, 멀리까지 가는구나. 여독이 심하겠다.”

“헤헤, 괜찮습니다요. 이제부터라도 부지런히 가면 됩니다요.”

"그런가. 허면 내 묻겠소. 그대가 도사, 가리울이요?"

순간, 가리울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환찬을 노려보았다. 새벌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수천 선생과 하람 단 두 사람뿐일 테니, 단연코 수천 선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 여겼던 것이다. 환찬은 표정으로써 이미 대답을 하고 있는 가리울을 잠깐 동안 재보는 듯하다가, 곧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서찰이었다.

“이 서찰을 전하라는 명이 계시었소.”

가리울은 당황했지만, 굳은 표정을 풀지 않으며 물었다.

“누가 말입니까?”

“읽어 보면 알게 될 거요.”

“당신은 누굽니까? 도대체 정체가 뭐요?”

“그것도 알게 될 것이요. 그럼 좋은 여행되길 바라오, 가리울님."

환찬은 가리울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는 왔던 길을 걸어 성문으로 돌아갔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성문이 다시 닫혔다.

가리울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무언가 등을 쿡쿡 찌르는 듯하여 놀라 돌아보니, 하람이 울상을 지으며 가리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람은 몸의 절반쯤을 수레 반대편에다 숨기고 있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하람아, 이제 그만 나와도 된다!”

하람은 기어 나와 가리울의 옆 자리에 앉았다. 바깥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몸에 붙은 말먹이 풀을 털어냈다. 몇 가닥이 저고리 안으로 들어간 듯, 하람은 등이 가려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느새 도성과는 꽤 떨어진 한적한 숲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가리울은 마침내 마음을 정한 듯, 서찰을 뜯어 내용을 펼쳐보았다. 하람은 힘겹게 속에 들어간 풀을 집어내다가 기력을 모두 소진한 듯, 말먹이 풀에 등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가리울은 하람에게 서찰을 넘겨주며 말했다.

“내가 아니라 네게 온 서찰이구나. 네 벗이 쓴 것이다.”

하람은 소스라치게 놀라 서찰을 펴 보았다.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으나(엉뚱한 이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우려한 것이 틀림없었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정겨운 필체, 마루가 쓴 것이 틀림없었다.

‘너도 잘 알고 있는 분을 통해 이 서찰을 전한다. 큰 형님의 사건으로 네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어. 제발 몸 건강한 네 손에 전해지길 바랄뿐이다. 떠날 것을 알았지만, 막상 이렇게 얼굴도 보지 못하고 보내게 되어 섭섭하다. 난 잘 지낼 테니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네게 말해왔던 대로 다음 해에는 나도 이곳을 떠나게 될 거야. 나의 소중한 벗이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다만 하늘의 도우심으로 온 누리 어딘가, 설령 그게 지옥도일지라도, 꼭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길.’

하람은 서찰을 접어 품속에 고이 간직한 뒤 다시 말먹이 풀에 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가리울은 고개를 돌려 제자를 돌아보았다. 하람의 감은 눈 밑으로 볼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또르르 굴러 내렸다.

“좋은 벗을 두었구나.”

하람은 대답이 없었다. 해는 어느덧 하늘 높이 떠올라 눈물로 젖은 하람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가리울은 그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채찍을 놀려 말들을 더욱 재촉했다. 그렇게 비렁뱅이 스승과 개구멍받이 제자를 태운 수레는, 북쪽을 향해 계속해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날이 국운이 쇠해가고 있던 해동국. 해동국의 항구도시 '미추홀'에 살던 소년 하람은, 해적들의 습격에 아버지와 얼굴 반쪽을 잃고 대장군 진가람의 저택에서 종으로서 살아간다. 장군의 아들 가천의 관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하람은 새벌의 각설이 가리울을 만나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된다. 몸은 왜소하고 얼굴은 흉측하지만, 선골을 타고 나 도사의 자질을 가진 소년, 하람.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그의 일대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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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8. 살 오를 꽃-4 <1기 연재 종료> 15.05.15 179 0 14쪽
32 8. 살 오를 꽃-3 15.05.15 126 0 10쪽
31 8. 살 오를 꽃-2 15.05.15 124 0 11쪽
30 8. 살 오를 꽃-1 15.05.15 146 0 10쪽
29 7. 여우구슬-4 15.05.15 122 0 10쪽
28 7. 여우구슬-3 15.05.14 168 0 14쪽
27 7. 여우구슬-2 15.05.14 178 0 9쪽
26 7. 여우구슬-1 15.05.14 174 0 13쪽
25 6. 가림새 마을 - 4 15.05.13 124 0 9쪽
24 6. 가림새 마을 - 3 15.05.12 177 0 10쪽
23 6. 가림새 마을 - 2 15.05.12 121 1 13쪽
22 (재업로드) 5. 새벌을 떠나다-3 15.05.12 160 0 12쪽
21 6. 가림새 마을 - 1 15.05.12 138 0 13쪽
» 5. 새벌을 떠나다-4 15.05.06 140 0 10쪽
19 5. 새벌을 떠나다-2 15.04.29 275 0 13쪽
18 5. 새벌을 떠나다-1 15.04.27 252 0 13쪽
17 4. 불꽃의 원기-5 15.04.25 178 0 9쪽
16 4. 불꽃의 원기-4 15.04.21 162 0 14쪽
15 4. 불꽃의 원기-3 15.04.19 235 0 11쪽
14 4. 불꽃의 원기-2 15.04.18 257 0 11쪽
13 4. 불꽃의 원기-1 15.04.14 187 0 10쪽
12 3. 도사, 가리울-3 15.04.11 121 0 15쪽
11 3. 도사, 가리울-2 15.04.09 270 0 11쪽
10 3. 도사, 가리울-1 +2 15.04.06 296 1 11쪽
9 2. 개구멍받이-5 15.04.03 268 1 13쪽
8 2. 개구멍받이-4 +2 15.03.31 278 1 10쪽
7 2. 개구멍받이-3 +2 15.03.28 410 1 13쪽
6 2. 개구멍받이-2 15.03.25 241 0 11쪽
5 2. 개구멍받이-1 15.03.23 318 0 10쪽
4 1. 폭풍의 전조-4 15.03.22 266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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